
(제 23 회)
제 2 장
8
아침일찍 자리에서 일어난 박위는 여느때없이 기운찬 손길로 사랑채문을 열어제끼였다.
오는듯마는듯 하던 장마철은 때이르게 지나가버리고 초가을의 신선한 공기가 밀려다니는 때라 자연은 고요히 얼룩덜룩한 가을의 색옷을 갈아입고있었다.
멀리 동켠하늘에서는 솔개미 한마리가 날개에 아침노을의 피빛광선을 반사하면서 유유히 날아예고있었다.
싱그러운 공기를 호흡하며 솔개미의 무한히 자유로운 아침운동을 바라보던 박위는 잠시후 방안의 서탁앞에 마주앉았다.
요즘 박위는 잠에서 깨면 곧 서탁에 마주앉아 두툼한 목책을 펼쳐보군 했다.
목책은 군영과 여러 고을들에서 새로 모집한 군사들과 새로 만든 전함의 수, 새로 생산한 화약과 염초의 수량, 새로 확보한 군량과 반찬감의 수량 같은것을 매일같이 기록한 기밀문서였다.
한장두장 손때묻은 책장을 번져나가던 박위는 《…7월 열이레중낮때 김해부사가 직접 3백근의 량식과 2백근의 어물을 령거해가지고 찾아오다.》라고 쓴 대목에 이르자 우뚝 시선을 멈추었다.
그날 10여대의 마바리, 소바리를 뒤에 달고 범잡은 포수마냥 어깨를 으쓱거리며 군영에 들어서던 호백의 장한 모습이 방불히 떠올랐다.
박위앞에 다가온 호백은 제 손으로 흰쌀이 들어있는 자루와 전광어, 칼치 같은 절인 어물이 들어있는 대나무통의 뚜껑을 열어보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장군! 저번날 군영에서 량식청탁이 왔을 때는 본관이 일이 잔뜩 밀려놔서 아래것들에게 일임했댔소이다.
헌데 그것들이 중간에서 롱간질을 하여 종내는 듣기에도 창피한 썩은 쌀소동이 났댔소이다. 허허… 참, 무엇이라 사과해야 할지…》
《사과는 무슨… 나도 그쯤 짐작했댔소. 아무렴 부사께서 그런 좀스러운 일을 벌렸겠소. 아무튼 또 이렇게 군량을 대주니 감사의 말 무엇이라 했으면 좋을지 모르겠소.》
박위는 지나간 일을 놓고 가타부타 따질것 없다는 뜻으로 빙그레 웃으며 호백의 변명을 듣기 좋게 거들어주었다.
호백은 더욱 기가 올라 수염을 빡 내리씻고 련속적으로 거짓말을 널어나갔다.
《그래서 이번에는 본관이 직접 백사를 제치고 나서서 시작부터 마감까지 일을 간검해가지고 나왔습니다.
사실말이지 이 고급어물들은 조정의 리부(고려시기 관리들의 임명과 성적을 맡아보던 관청.)에서 특별히 부탁을 해서 따로 잡아 건사했던것인데… 지금이야 리부의 일보다 우리 고을 군사일이 훨씬 더 급하고 중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아시고 가져온 물자들을 군영의 군사일에 긴요히 써주시면 본관으로서는 더 바랄것이 없겠습니다.》
손수 짐을 꾸려가지고 군영에까지 찾아온 호백의 헌신적인 행동도 무등 고마왔고 그의 길다란 설명 역시 조금 간지럽기는 해도 귀맛이 좋았다.
호백은 단단히 개심을 하고 군사일에 특별히 관심을 높이는것이 분명했다.
박위는 호백의 수고를 진심으로 치하해주고나서 그와 함께 처소로 들어갔다.
급급히 재촉을 하여 성의있게 차린 주안상을 내오게 하였다.
기름에 튀긴 전복꼬치(그것은 호백이가 박위에게 특별히 선사한것이였으나 박위는 통털어 호백에게 대접하도록 했다.)를 연해 저가락 끝으로 집어내며 맛스럽게 술을 마시던 호백은 취기가 오르자 새빨갛게 익어번진 희좁은 얼굴을 호들갑스럽게 흔들어털며 말하였다.
《정말이지 오늘처럼 우리 고을 지경이 평온하고 우리 고을 민심이 안연한것은 전적으로 박장군의 덕이요, 군영의 덕이올시다.
그런즉 우리 관가가 군영군사들에게 군량과 반찬감을 대주는것쯤은 고맙다고 하실것도 없습니다.
너무도 의당한 일이지요.
그리구 듣자니 일전에 우리 관가의 아전들이 쇠풀골에 배무이목재를 찍으러 온 군사들을 막무가내로 쫓아버렸다가 봉변을 당했다던데 그런 좋지 못한 광경이 생긴것은 구경 하관의 불찰입니다.
하관이 평시에 아래것들을 옳게 주물러놓았다면야 어찌 그런 일이 생겼겠습니까.
늦게나마 하관이 단단히 신칙을 하고 닥달을 해놓았으니 이제 다시는 그런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지 않을겝니다.》
호백의 뜻밖의 사죄와 반성앞에서 박위는 일순 떨떠름해지였다.
《부사가 그렇게 나오니 할말이 없소그려. 사실은 우리 군사들이 아전들에게 떠밀려내려온 뒤 본관이 다시 군사들을 내몰아 마구다지로 나무를 베오게 했소.
오늘 부사의 말씀을 듣고보니 나로서도 그때 일이 여간 미안하지 않구려.》
호백은 저가락을 든 손을 절레절레 흔들어털며 자못 대범한 태를 보이였다.
《아니할 말씀이요. 그까짓 나무 몇대가 무엇이라고…
왜구를 소탕할 원정에 쓸것이라면 나무가 아니라 온 고을을 통채로 퍼넣는다 해도 아까울것이 있겠소이까.
자고로 대공이나 대첩은 만반의 준비우에서 피여나는 꽃이 아니였소이까?》
《고마운 말씀이요. 부사의 그 곡진한 마음과 사심없는 지원을 잊지 않겠소.》
박위는 전에없이 대활하고 우선우선해진 호백이가 무등 고마운 한편 다소 기이하게 생각되였다.
사실 이 순간 호백의 심리는 여간만 뒤숭숭하지 않았다.
그가 몸소 짐바리를 이끌고 수십리 울퉁불퉁한 산골길을 누벼온것은 물론 박위를 돕기 위해서가 아니였다.
제 눈으로 직접 군영의 동태, 박위의 동정을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또한 희귀한 어물로써 박위의 환심을 사는 동시에 있을수 있는 자기에 대한 의심을 막기 위해서였다.
하여 그는 겉으로는 시종 소탈하고 대담한 태를 내면서 마음속의 날카로운 시선으로는 박위의 언행과 표정을 예리하게 살펴보았다.
박위가 혹시 조정에 꽂아넣은 자기의 고변을 눈치채지 않았는지, 그것으로 하여 자기를 의심하거나 지레 겁을 먹고 원정을 포기하지나 않았는지…
헌데 아무리 뜯어보아야 박위는 자기의 역적고변을 아는것 같지 않았다.
자기를 의심하는 눈치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원정준비는 포기하기는커녕 더욱 큰 판으로 더 줄차게 내미는것 같았다.
이제는 마음놓고 리성계가 암시해준대로 박위의 목대를 바싹 옭아맬 빈틈없는 증거를 찾아내는데 전력해야 했다.
박위가 기어이 원정을 하겠노라고 날치는 이상 그럴듯한 증거를 찾아내는것은 별로 어려울것 같지 않았다.
매화의 말에 의하면 대마도에 잡혀간 죽촌사람들중에는 박위와 친밀하게 지내던 리옥(그는 박위의 후실감이란다.)이라는 계집도 있는데 그는 사실 잡혀간것이 아니라 제발로 찾아간것이였다.
박위는 왜구들에게 반정을 지원받기 위해(례컨대 병기의 조달같은것.) 부러 죽촌기습사건이라는 기만극을 꾸미고 감쪽같이 자기의 계집을 대마도령주에게 띄웠을수 있다는 뜻이였다.
그러니 박위의 원정준비(반정준비)가 계속된다면 대마도령주나 리옥에게서 무슨 소식이든 반드시 날아올것이였다.
그 소식을 손에 쥐면 더욱 좋고 설사 쥐지 못한다 해도 리옥에 대한 이야기만 잘 반죽해놓으면 그럴듯한 증거는 능히 빚어질것이였다.
허나 어째선지 박위의 원정준비가 명백한 역신음모라는 매화의 말과 그에 대한 자기의 계략은 미심쩍게 생각되기도 하고 허황하게 여겨지기도 했다.
그렇다고 하여 하루가 새로운 이때 다 익은 감이 저절로 물러떨어지기를 세월없이 기다리고있을수는 없었다.
가능한껏 확실하거나 확실해보이는 증거를 거머쥐기 위해 눈을 밝히는 한편 이미 주어진 건덕지를 우리고 또 우리여 누가 보아도 그럼직한 증거물을 만들어야 했다.
이제 와서 박위를 제끼는것은 단순히 그 어떤 앙갚음이나 하고 협착된 부귀와 권세를 회복하는 일 정도가 아니였다.
그것은 필경 조민수건으로 하여 리성계의 눈에 미운 털이 박혔을 조씨가문과 자기의 영상을 새롭게 개선하고 오늘의 벼슬자리를 영구히 보존하기 위해서도 절실히 필요한 일이였다.
그러니 리성계가 박위를 못마땅하게 여기고있는 이때(호백은 리성계의 우회적인 권고를 받았을 때 벌써 그것을 여실히 감촉했었다.) 지체없이 박위를 찍어넘길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섬겨바쳐야 했다.
그렇게 되면 박위를 들내치니 좋아, 리성계에게 어여쁜 인물, 요긴한 존재로 지목받으니 좋아, 정말 꿩먹고 알먹기요, 일거량득이 아니겠는가?!…
이래저래 기분이 좋아진 호백은 주량에 겨웁도록 술을 퍼마시고나서 다시금 박위에게 헛맹세와 겉발린 아첨을 잔뜩 늘어놓은 다음 비쓸거리며 군막을 나섰다.
아전들의 부축을 받으며 대문쪽으로 나가는 호백의 뒤모습을 쏘아보던 윤통은 독설에 가까운 소리를 꺼내놓았다.
《터놓고말해서 하관은 저 사람을 볼 때마다 기분이 상합니다. 어쩐지 말과 행동이 판판 다른듯 하고 가슴속에는 겉모양과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이상한 얼굴이 있는것 같단 말입니다.》
박위는 윤통이가 소지를 바치고 집에 돌아가겠다고 한 뒤로는 될수록이면 그에게 모진 소리를 하려 하지 않았다.
윤통이가 가는것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한명의 장수라도 제곁에서 떨어져나간다면 원정준비는 그만큼 오래 걸리고 왜구와의 싸움은 그만큼 어려울것이였다.
하지만 지금까지도 호백을 불신하면서 기회가 생길 때마다 그에 대한 독설을 퍼내는 윤통의 편벽한 심리와 피상적인 판단은 그냥 스쳐버릴수 없었다.
《부원수, 내 진정으로 하는 말인데 김해부사는 근래 단단히 채심을 하고 우리 일을 열심으로 돕고있소.
그런데 치사는 못할망정 헐어서 말해서야 일이 되겠소?》
박위는 한껏 부드럽게 말했으나 윤통은 벌컥 증을 내였다.
《김해부사가 채심을 했다고요?
흠, 아무리 애를 써도 게를 곧바로 걷게 할수는 없습니다.
원체 삐뚜로 걷게 된 물건이니까요.
하관은 오히려 김해부사가 예전보다 더 험하게 변한게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어쩐지 앞에서는 살살 웃으며 돌아가다가는 뒤에 돌아앉아서는 썩썩 칼을 벼리는 음모군같단 말입니다.》
《음모군?!》
박위는 흠칫 몸을 떨며 윤통을 노려보았다.
그의 말이 무엇을 념두에 둔것인지 직감적으로 느껴지였다.
(그러니 윤통은 조호백이가 반정준비라는 거짓소문을 지어내여 조정에 꽂아넣었다고 생각하는가. 물론 우리의 원정준비에 대해서는 개경의 량반들보다 이곳 사람들이 훨씬 더 잘 알고있다.
그렇다고 하여 무작정 이 고장 사람들을 의심해야 하겠는가.
아니야. 호백이 무엇때문에 나를 모함하려 하겠는가, 과연 무엇때문에…)
박위 역시 저도 모르는새 호백에 대한 의혹이 갈마들었으나 애써 그것을 부정하기 위해 모지름을 썼다.
한참만에 박위는 다시금 준절한 어조로 말을 꺼냈는데 그 말은 윤통에게 하는 말인 동시에 자기자신에게도 하는 소리였다.
《부원수, 사람이 황달에 걸리면 세상이 전부 노랗게 보인다는 말이 있소. 우리 함부로 속단하지 맙시다.
의심이 병이요. 그 병이 커지면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되고 사람을 믿지 못하면 아무 일도 할수 없게 되오.》
두툼한 입술을 삐주름히 내밀고 서서 듣는둥마는둥하던 윤통은 아무 대꾸없이 교련장쪽으로 스적스적 걸음을 옮기였다.…
…목책우에 가벼운 붓방아를 찧으며 여념없이 사색을 이어나가던 박위는 느리게 도리머리를 저었다.
(조호백― 다른 일은 다 말말고라도 예전에 고향의 버섯골에서 내손에 의해 목숨을 구한 그가 무엇때문에 왜구격멸을 주장하는 나를 해치려 하겠는가.
모해의 불똥은 필경 다른 곳에서 튀여올랐을것이다. 이제 더이상 당치도 않는 헛소문에 왼심을 쓰면서 함부로 사람을 의심하는 좀스러운 노릇을 하지 말자.
우리의 원정이 천백번 정당하고 우리의 마음이 더없이 청백한데야 두려울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마음이 진정되고 결심이 굳어지자 박위는 교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벽에 걸려있는 환도를 벗겨들고 밖으로 나왔다. 검술훈련은 어느 하루도 어겨본적 없는 아침일과중의 하나였다.…
뒤뜰에 돌아가 온몸에 땀이 내돋도록 칼을 휘두르고난 박위는 날아갈듯이 거뿐해진 기분으로 앞마당에 나왔다.
어느새 왔는지 마당 구석쪽에서 서성거리던 윤통이 커다란 키를 꺽둑거리며 성급하게 다가왔다.
감때사납게 생긴 눈을 희번득거리며 대충 인사를 차리고나서 급급히 말을 꺼냈다.
《급보올시다. 오늘 아침 우리 군사들이 바다길순시에 나갔는데 갑자기 왜구의 배 한척이 나타나더니 우리 배 돛대에 수상한 화살 한대를 쏘아박고는 정신없이 내빼더랍니다.
화살을 뽑아보니 살깃에 편지 두장이 끼여있더랍니다.
하나는 대마도령주가 쓴것이고 다른 한장은 리옥이가 쓴것인데 모두 박장군앞으로 보냈습니다.》
《?!》
왜구들이 편지를 보내온것도 전에 없던 일이요, 대마도령주와 리옥의 편지가 함께 날아온것도 기이한 일이였다.
박위는 한동안 어안이 벙벙하여 입을 열지 못했다.
조금후에야 윤통에게서 편지를 받아든 박위는 우선 대마도령주의 편지라는것부터 펼치였다.
령주라는 작자는 거드름스러운 어투로 문안인사 비슷한 소리를 건숭 해넘기고나서 역시 거만하기 짝이 없는 글귀로 되지 못한 수작을 질질 늘어놓았다.
《…듣자니 박장군은 요즘 대마도를 치겠노라며 복닥소동을 피우고있다는데 자중하는게 어떠시오?
당신들이 대마도를 공격하겠다는것은 잠자리가 수레바퀴를 굴리겠다는 수작과 엇비슷한것으로서 도저히 성사될수 없는 망상에 불과하오.
털어놓고말하여 당신네 고려군은 생소한 날바다길을 헤쳐오기도 어렵겠지만 설사 온다 한들 튼튼한 성곽과 험준한 천연바위들로 싸여있는 우리 섬, 수백척의 전함과 수만명의 정예한 군사들이 항시 출동태세를 갖추고있는 우리 섬을 무슨 수로 깨치겠소.
부질없는 망상을 품고 귀중한 시간과 정력을 헛되이 소모하지 마시오.…
박장군! 나로서는 오래동안 깊이 생각하고 고려한 끝에 하는 말인데 이제부터 우리는 각자가 새로운 인생길을 선택했으면 하오.
이를테면 량국간의 화해와 화평의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 우선 우리가 물물교역의 새 장을 열자는거요.
그러자면 쌍방이 다같이 독기서린 검을 내려놓고 협상의 자리에 마주앉아야 할게요. 주지하는바이지만 검과 검이 부딪치면 죽음과 파괴가 생기지만 물건과 물건이 교역되면 진흥과 향상이 따르는 법이요.
깊이 생각해보고 긍정적인 회신을 보내주기 바라오.
우리는 당신의 회신을 받기 위해 또 협상문제를 론의하기 위해 성의껏 례물을 마련해가지고 이달 보름날 팔소앞바다에 우리 군사들을 보내겠소.
어련하겠지만 당신의 군사들도 다음과 같은 항목의 물건들을 례물로 마련해가지고 바다가에 나와 우리의 평화사절들을 맞아주기 바라오.
1. 곡물(김해흰쌀) 5천근
2. 과일(김해배와 김해단감) 2천근
3. 호피 300장
4. 비단 600필…》
사다께는 오만무례하기 짝이 없는 어투로 박위의 원정준비를 비난조소하고나서 그 무슨 화해와 화평을 뇌까리며 물물교역을 운운했다.
박위의 시점에서 볼 때 사다께의 모든 수작은 새로운 음모의 시작이거나 군사적도발의 서곡일뿐 다른 아무것도 아니였다.
보잘것없는 작자에게 하대를 받고 조롱을 당한것이 여간만 분하지 않았으나 눈앞에 없는 놈을 놓고 분을 터친다는것은 우스운 일이였다.
잠시 거친 숨을 내불며 대마도쪽을 노려보던 박위는 다시 편지의 글발을 더듬어나갔다.
《…내가 보건대 박장군의 성미와 처지로써는 우리의 제의를 선뜻 받아물기가 조련치 않으리다. 하지만 서둘러 거절하기 전에 조성된 오늘의 정황을 신중히 따져봐야 할게요.
알고있겠지만 여기 대마도에는 지금 100여명의 경상도백성들과 죽촌사람들 그리고 왕년의 거제도별장이였던 리일경의 딸이 와있소.
장군이 만약 우리의 화평제의를 거절하거나 이달 보름날 팔소에 당도하게 될 대마도의 평화사절에게 군사적위해를 가한다면 우리는 부득불 당신을 화평의 교란자로 인정하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리옥의 목을 잘라보내겠소.》
《잰내비같은 놈이 누구를 감히 협박하는고?!》
박위는 종시 애써 누르고있던 울분을 터치며 와락와락 종이장을 구기였다.
불타는 시선으로 이윽토록 사위를 두릿거리던 박위는 피끗 리옥의 편지에 생각이 미치자 남은 편지장을 마저 펼치였다.
리옥의 단정한 글씨들이 눈앞으로 밀려들었다.
후두둑 가슴이 뛰였다.
편지내용은 어찌됐든 리옥이가 살아있다는것이 우선 기쁘고 다행스러웠다.
《장군께 올립니다.》
이렇게 서두를 뗀 리옥은 자기가 대마도로 잡혀오던 날의 정황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간단히 언급하고나서 침울하기 그지없는 필치로 급기야 기본화제를 펼쳐놓았다.
《…이곳 령주는 현중 아버님에게서 좋은 소식이 오는 경우 그날로 고려백성들과 소녀를 돌려보내겠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곳에 갇힌 고려백성들과 소녀의 생사여탈권은 전적으로 현중 아버님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살아생전에 단 한번만이라도 현중 아버님과 현중을 만나보고싶은 소녀의 마음 하늘에 닿도록 간절하건만 망망대해에 떠도는 일엽편주와 같은 소녀의 불행한 운명은 과연 구원될수 있사온지…
부디 소녀의 일생일대의 소망을 이루게 하여주옵소서.…》
박위는 피가 나도록 아프게 입술귀를 짓물었다.
리옥의 편지를 읽고나니 그리도 바라던 리옥의 소식을 알게 된것이 기쁜 일인지 슬픈 일인지 딱히 가늠할수 없을만큼 속이 허우룩해났다.
또한 왜구들이 죽촌을 급습하여 백성들과 리옥을 잡아간것은 이처럼 자기를 우롱하고 협박하기 위한 계획적인 모략이였다는 짐작이 굳어지였다.
박위는 아무말없이 윤통에게 두장의 편지를 다 넘겨주었다.
박위의 어수선한 뇌리속으로는 착잡하기 이를데없는 사색이 갈피없이 뒤번져지였다.
(내가… 리옥을 구원하기 위해 고려장수의 본분을 저바리고 왜구들과 짝자꿍을 한다는것은 상상도 할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고 대마도에 잡혀간 우리 백성들이 왜구들의 손에 죽도록 가만히 내버려둘수도 없지 않는가. 과연 무엇을 어찌해야 두가지 일을 다 옳게 처리할수 있는가?)
박위는 불현듯 지난해 어느 여름날 저녁이 생각나자 곱살하게 생긴 작은 입술을 푸르르 떨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창원의 어느 촌락에 출몰한 왜구들을 소멸하고 군영으로 돌아가던 박위는 대오가 죽촌어구에 이르자 말에서 내리였다. 부원수에게 부대를 이끌게 한 다음 홀로 마을에 들어섰다.
리옥의 집에 나와있는 현중을 데려가기 위해서였다.
꼭 그렇다고 인정하기는 조금 민망스러우나 은근히 리옥이가 보고싶어 그런 핑게가 떠올랐는지도 몰랐다.
수레바퀴자리가 움푹움푹 패이고 잡풀들이 듬성듬성 널려있는 행길을 지나 리옥의 집앞에 이른 박위는 무춤 걸음을 멈추었다.
울타리를 타고넘은 앞뜰의 구기자잎새들은 석양빛을 들쓰고 와슬와슬 설레는데 그 모양은 마치 이기고 돌아온 고려장수를 손벽을 치며 환영하는듯싶었다.
뒤울안에서는 리옥의 나직한 노래소리가 은은히 울려나오는데 그 소리 역시 박위의 전승을 축하하는 의미깊은 환영곡으로 해석되였다.
비단필을 수놓아
변방 멀리 싸움터에 보내옵니다
귀중한 몸 아끼시고
끼니나 많이 드시기 바라나이다
나라위해 공세움이
사내대장부 할일이니
원쑤 베지 않고는
돌아오지 마옵소서
리옥의 목청은 맑고 그윽했으나 소리하는 솜씨는 그닥 신통치 못했다.
허나 가락마다 처녀의 절절한 심정이 슴배여있는탓인지 노래의 구절구절은 감동적으로 마쳐왔다.
그와 함께 노래의 내용 그대로 리옥에게도 마침내 사랑하는 사내가 생긴게 아닌가 하는 짐작이 떠올랐다.
그러자 왜서인지 슬그머니 속마음이 알찌근해났다.
박위는 데데한 잡념을 털어버리려는듯 갑자기 활개를 휘휘 뿌리며 뒤울로 들어갔다.
옥돌같은 두손을 모두어잡고 평상우에 앉아 저 멀리 바다쪽을 바라보며 노래를 부르던 리옥은 가벼운 탄성을 터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 회군하시는 길이오니까?》
리옥은 여느때없이 당황해하며 간신히 말끝을 여미였다.
그의 하얀 볼우로 꽈리빛이 번져지였다.
웬일일가?!… 내가 혹시 처녀의 가슴속에 간직되여있는 그 어떤 보지 말아야 할것을 훔쳐보기라도 했단 말인가?
박위는 심상치 않게 두근거리는 자기의 가슴을 애써 누르며 리성의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훌륭한 장수의 딸인 리옥에게 좋은 배우자가 생겼다면 그것은 기쁜 일이다.
일이 정녕 그리 되였다면 처녀의 래일을 축복해주어야 한다.)
《그래, 지금 돌아오는 길이야. 오늘 싸움에서도 수십놈의 왜구를 모짝 때려잡았으니 작은 전승이 아니지.
헌데 현중이녀석은 동네에 나가 애놈들과 장난을 하는 모양인가?!》
부러 활기를 띄우며 우선우선한 태도로 말문을 연 박위는 자기의 허리춤에서 정교하게 만든 단검을 떼내였다.
싱그레 웃으며 리옥에게 단검을 내밀었다.
《뭐라구 할가, 리옥의 노래를 훔쳐들은 값이라 할가, 전승을 축하하는 의미라 할가. 아무튼 이건 내가 몹시 애용하던 물건인데… 네게 이걸 줄만 한 사내가 생겼거든 내 마음까지 합쳐서 그에게 선물로 주도록 해라.》
《황송하옵니다.》
리옥은 살며시 얼굴을 붉히면서도 사양없이 단검을 받아들었다.
(리옥의 선물을 받을 사내는 과연 누구일고?)
참대숲사이로 빠끔히 내다보이는 저 멀리 바다가 선바위쪽에서 한무리의 호구니떼가 저마끔 제 짝을 애타게 찾으며 분주히 날아예고있었다.…
…박위는 무겁게 고개를 들었다.
(그처럼 속이 깊고 도담한 리옥이가 아무리 절망적인 처지에 빠졌다한들 왜구들의 음흉수에 거의나 장단을 맞춘 편지를 쓸수 있겠는가?)
그사이 두장의 편지를 다 읽어본 윤통은 마치 이가 쏘는 사람처럼 보기 싫게 얼굴을 찡그리며 부르짖었다.
《박장군, 이 일을 어쩌면 좋습니까.
왜구의 건수작에 발을 맞출수도 없고 우리 백성들과 리별장의 딸이 참을 당하도록 내버려둘수도 없고… 이야말로 호미난방이 아닙니까?…》
박위는 천천히 채머리를 흔들며 준절하게 말했다.
《우리는 검으로 말을 하는 무관들이요. 동풍이 불건 서풍이 불건 한시도 손에서 검을 놓을수 없소.
아니, 오늘처럼 안팎의 형세가 복잡한 때일수록 더욱 힘껏 검을 틀어잡아야 하오.》
《그건 그렇지만… 우리가 사다께의 제의에 검으로 대답하는 경우 리옥은 왜구의 칼에 목이 잘릴겁니다.
리별장이 우리에게 맡기고간 외동딸인 리옥을 그렇게 허무하게 잃을수는 없지 않습니까?》
박위는 가슴복판에 칼이라도 박힌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순간이나마 리옥의 처지를 잊어버리고 무관으로서의 결기만을 살린 자기를 의식한것이였다.
(그러니 내가 검을 들면 리옥은 목이 잘리게 된단 말이지.…
세상에 이런 괴이한 변사가 또 어디 있을고?…)
앞마당 저편 구석쪽에서 돌연 현중의 울음소리가 끅끅 흘러나왔다.
그는 검술훈련을 하다말고 박위와 윤통이 나누는 말을 엿들은 모양이였다.
《이애 현중아―》
윤통은 울음소리가 새나오는쪽으로 겅정겅정 반달음을 놓았으나 현중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대신 비맞은 장닭모양으로 후줄근해진 여삼이가 지척지척 골기없이 걸어왔다.
여삼이도 현중이와 함께 두 량반의 대화를 말끔히 훔쳐들은게 분명했다.
박위는 입빠른 여삼에게 오늘 엿들은 말을 일체 내돌리지 말라고 일러야 했으나 왜서인지 전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뒤산기슭에 널려있는 군막쪽에서 아침밥을 짓는 군사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낮추 드리운 비구름탓에 밥짓는 연기는 하늘로 오르지 못하고 그물그물 땅바닥을 핥으며 이쪽으로 밀려내리고있었다.
박위는 졸지에 할바를 망각한 사람마냥 우두머니 굳어진채 움직일줄 몰랐다.
…그날 저녁 김해관가의 조호백도 박위가 받은 편지와 엇비슷한 내용의 얼쑹덜쑹한 편지 두통을 손에 넣었다.
그것은 물론 매화가 록산의 어느 촌길에서 주은것이라며 가져다준것이였다. 호백은 편지를 다 읽고나서 무릎을 탁 치며 쾌재를 불렀다.
이제는 이런저런 증거물을 꾸미거나 주어모을것도 없이 편지 두장만 조정에 가져다바치면 박위의 목대는 그날로 뎅겅할것이였다.
잔인한 환희로 온몸이 화끈 달아오른 호백은 수상쩍기 짝이 없는 두장의 편지가 어떻게 되여 유독 매화의 손에 들어오게 되였는가에 대해서는 깊이 캐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