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9 회)

제 2 장

4

 

일전에 현중을 치료해준바 있는 늙은 의원의 말에 의하면 사람의 마음속에 든 병은 병자의 육체와 함께 정신까지도 심히 해치는데 그것으로 하여 마음속에 든 병은 육체에 든 병보다 훨씬 더 나쁘고 위험한것이였다.

그 의원의 말은 기실 적지 않게 난해했으나 그렇다고 하여 아주 무시해버릴만큼 허무맹랑한 견해라고 볼수는 없었다.

개경에 올라가 여적 받아본적 없는 심대한 정신적타격을 받은 박위는 군영에 돌아오자 예전의 그라고는 믿기 어려울만큼 과격한 언행으로 주위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런 현상이 혹시 그 의원이 말한것처럼 마음속에 든 병이 정신까지 침해한 경우라고 봐야 하지 않을가?!…

아무튼 요즘 박위는 별치 않은 일을 놓고도 짜증을 내거나 화증을 터치였으며 뻔드름한 리치앞에서도 생억지를 쓰거나 우격다짐을 들이댔다.

평소에는 위엄기가 있기는 해도 늘 밝은 표정으로 누구나 너그럽게 대해주던 박위, 장교들은 간혹 드세게 다불러대도 군졸들은 하냥 부드럽게 살펴주던 박위가 이 어인 일인가?…

사람들은 모두 뻥뻥해지였다.

단지 어리둥절해지기만 한것이 아니였다.

원체 윤통의 딱딱하고 팩팩한 성미만 겪자고 해도 숨이 가쁠 지경인데 전에없이 드세지고 다급해지고 사나워지기까지 한 박위의 단근질까지 겹하여 당하자니 군사들은 노상 꽁무니에 불이 달려가지고 진둥한둥 드달아다니였다.

이제 와서 장교들은 물론 군사들과 여삼이, 지어 현중이까지 되도록이면 박위에게 걸려들지 않기 위해 슬슬 눈치를 살피며 뒤를 사리군 했다.

오천은 된꾸중을 당할것이 두려워선지 아니면 사랑놀음에 더욱 깨가 쏟아지는지 아예 박위앞에 나타나지도 않았다.

박위자신도 과하다못해 사납게까지 번져가는 자기의 언행이 원정준비를 다그치는 필수적인 방도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것은 필경 박위의 가슴속에서 항시 우글거리는 그 어떤 울화와 초조감의 폭발인 동시에 때없이 밀려드는 좌절감과 공허감을 뿌리쳐보려는 충동적이면서도 서뿌른 시도에 불과했다.

박위는 스스로도 자기의 극적인 변화가 어느 정도 불만스러웠으나 그것을 쉬이 시정하거나 다잡을수 없었다.

오늘 아침도 일찌감치 염초장에 나간 박위는 산산하게 식어있는 염초가마앞에 퍼더앉은 구서방을 띠여보자 대바람 불호령을 터치였다.

《이놈들아! 하루 고기잡고 사흘 그물 말리는 격으로 일을 해서야 어느 하가에 염초를 다 뽑는단 말이냐?

이렇게 굼벵이 천장하듯 하다가 일이 터지게 되면 화포속에 돌멩이를 집어넣고 쏠테냐? 고이현―》

염초장사람들은 경겁을 하여 자리에서 일어섰다. 뒤구석쪽으로 비실비실 가재걸음을 놓았다.

그래도 말주먹질깨나 한다고 으시대는 옥보가 용케 용기를 내여 박위앞에 다가섰다.

《아뢰옵기 황송하오나 소인네들은 지금 염초감대기가 제때에 썩썩 닿지 못해서 별로 일축을 못내고있습니다.

하오나 이제 감대기만 나지면 밀린 일을 열배로 벌충하겠소이다.》

제딴에는 사리정연하게 염초장의 형편을 알리고 앞날의 결심도 아뢰였다고 생각한 옥보가 자신있게 고개를 들어올리는찰나 머리우에서 다시 천둥이 울었다.

《무엇이 어째? 네 이놈! 지금껏 얻어내지 못한 염초감대기가 불시에 하늘에서 떨어져내린다더냐?

설혹 어느때인가 떨어져내린다 한들 그때까지 너희들은 빈절에 구렝이 꾀듯 모여들어서 그냥 공념불만 하고있을셈이냐?》

옥보의 긴 목이 대번에 쑥 들어가버리였다.

노기띤 얼굴로 염초장안을 휘뚜루 둘러보던 박위는 거친 청으로 말을 이었다.

《오천이란 놈은 어째서 오늘도 보이지 않느냐? 요즘도 되지 못하게 계집을 끼고 산놀이를 다닌다더냐?

워낙 그놈을 그냥 내버려두어서는 못쓰겠구나.

이봐라 여삼아, 이제 오천이라는 놈이 나타나거든 그 당장 오라를 지워서 내 앞에 끌어오너라. 알겠느냐?》

《알겠소이다.》

여삼은 습관적으로 제꺽 대답을 했으나 오천에게 오라를 지우라는것은 너무도 난처한 분부라 얄팍한 입술을 헤벌린채 말뚝처럼 굳어져버리였다.

구서방을 위시한 염초장사람들의 얼굴도 하얗게 질리였다.

이어 배무이장으로 나간 박위는 거기서도 또 한바탕 야단복장을 놓았다.

《이게 도대체 어느때부터 시작한 일인데 아직까지도 배는 보이지 않고 왼통 뼈다귀같은것들만 널려서있느냐.

네놈들은 밥이 아니라 거미장을 지져먹고 나와서 일을 하느냐?》

그러자 된욕도 잘 타지 않고 조롱이나 야유 같은것도 시물시물 웃어넘기군 하는 키 꺽두룩한 군졸 하나가 말코를 벌름거리며 자신있게 박위앞에 나섰다.

그는 어느 대가집에서 주로 목수일을 하다가 군졸로 뽑혔는데 신통치 않은 목수재간이 장교들의 눈에 걸리여 곧장 배무이장으로 떠밀려나온 사람이였다.

막생기기는 했으나 무척 선량해보이는 그는 노상 셈평이 유하여 동료들로부터 《만사태평》이라는 별명을 얻어가지였다.

박위앞에 나선 지금도 그는 별로 놀라지 않고 한없이 느려빠진 어조로 태평스럽게 대답했다.

《황공하오나 지금처럼 일이 더디되는것은 소인네들이 거미장을 지져먹은탓이 아니오라 배무이재로 쓸 나무가 속속 닿지 못하는 까닭이오이다.

소인네들도 너무 안타까워 어제 중낮에는 배무이재로 쓸만 한 상무리나무(너도밤나무)가 한벌 쭉 깔려있다는 쇠풀골로 밀려갔댔소이다.

헌데 관가의 아전들이 미리 쇠풀골에 결진을 하고있다가 〈이곳의 나무는 동헌개축에 쓸것이니 다치지 못한다.〉고 욱대기는 바람에 어쩔수없이 되밀려 왔소이다.》

《만사태평》의 다소 능갈친 대답말이 끝나기 바쁘게 박위는 벌컥 화증을 터치였다.

《에끼! 순 밥병신같은것들! 도끼를 둘러메고 산에까지 갔다가 관가것들에게 쫓겨서 되온단 말이냐!

그래 네놈들은 전함을 뭇는 일이 해도 되고 안해도 그만이란 말이냐?

페일언하고 오늘 해중에 쇠풀골의 나무를 말짱 베다가 내앞에 쌓아놓아라.

그렇지 않다간 네놈들의 다리정갱이를 죄다 분질러내칠테니 그리 알아라!》

일이 늦어진 책임을 슬그머니 관가 아전들에게 넘겨씌우려던 《만사태평》은 금방 어깨가 축 꺼져내리여 뻐꾹소리 한마디 잇대지 못했다.

군사들이 저들끼리 웅성거리며 뿔뿔이 흩어져가자 박위는 할바를 망각한 사람마냥 우두커니 굳어져버리였다.

가는 곳마다 호령을 터치고 을러멨으나 속은 조금도 개운해지지 않았다.

아니, 갈수록 더욱 답답해나고 무죽해났다.

박위의 눅눅한 뇌리속으로는 불현듯 개경에 갔을 때 군자시(군수품의 저장보관에 관한 일을 맡아보는 관청)에 잠시잠간 들리여 목격했던 그곳 량반들의 유들유들한 모습이 떠올랐다.

…박위가 군자시대문안에 들어서니 앞마당 구석에 박혀있는 향오동나무밑에서 한유하게 바둑을 두고있는 군자시량반들의 모습이 한눈에 안겨왔다.

얼추 보아도 몸이 너무 나서 숨이 차보이는 소윤(군자시의 벼슬아치)은 박위를 띠여보자 어색해하거나 당황해하기는커녕 태연하게 인사말을 건네고나서 다시 바둑판에 고개를 구겨박았다.

이 소윤이라는 작자가 바로 구워서도 데쳐서도 먹을수 없는 소가죽같이 질긴 사람이요, 능구렝이같이 흉물스러운 인물임을 박위는 이미 알고있었다.

박위는 은근히 부아가 치밀었으나 딱히 책 잡을 건덕지도 없고 그럴만한 상대도 아니여서 끓어오르는 부레를 애써 눌러참았다.

바둑판에 다가선 박위는 눈앞으로 날아드는 한쌍의 노랑나비를 휘휘 밀어던지고나서 찾아온 연유를 꺼내놓았다.

《소윤, 상경했던 길에 우리 군영에 화약을 좀 돌려줄수 없겠는가 알아보려고 이렇게 찾아왔소.

그래 어떠시우? 군자시의 화약형편이?…》

소윤은 개기름이 번질거리는 살집좋은 얼굴을 바둑판우에 드리운채 배포유하게 대답했다.

《화약광이 동이 난지가 언젠데 이제 와서 화약소리를 하시우? 허허 참.》

박위의 속에서 주먹같은것이 불끈 치밀어올랐다.

《아니, 어제 밤 불놀이때에는 숱한 화약이 터지던데… 그게 여기서 나간게 아니란 말이요?! 그게야 오늘 죽은 사람 어제 장례지냈다는 소리나 비슷한 말이 아니요?!》

박위는 다소 흥분하기는 했으나 자기가 극력 삼가해야 할 말을 꺼냈다는것을 모르지 않았다.

최칠석이같은 사람조차 매사에 조심을 두고 사는 요즘세월에 거의나 파악이 없는 군자시량반들앞에서 임금과 리성계를 념두에 두고 시비를 캔다는것은 저으기 위험한 일이였다.

그러나 박위는 자신을 후회하지 않았다.

사나이로 세상에 나서 진실을 말하기도 두렵고 속생각을 터놓기도 무섭다면 과연 무슨 큰 일을 하겠는가.

《아니, 그건 대체 뉘게다 대고 하시는 말씀이요?》

아니나다를가 소윤은 박위의 말꼬리를 후리쳐잡더니 염소눈처럼 노란 눈알을 디굴리며 고개를 들었다.

《박장군도 병이나 재앙이 입을 거쳐 들어온다는 말을 모르지 않을 텐데…

궁중행사에 쓰인 화약을 두고 옴니암니 시비를 캐서야 일이 되겠소?

그리구 군자시의 업무는 병부에서 간참할 일도 아니고 군영의 일개 원수가 캐고 따질 문제도 아니요.

어련하겠지만 일후로는 분수에 넘치는 일은 삼가하는게 좋을듯 하오.》

소윤은 제법 훈계조로 오금이라도 박듯 말했다.

그의 속심인즉 임금과 리성계의 위엄을 빌어 올적마다 시끄럽게 구는 박위를 한시바삐 떠밀어보내려는것이였다.

박위는 소윤의 내속이 빤히 들여다보였으나 새암바리계집처럼 속이 꼬부라든 그와 시야비야 하고싶지 않았다.

박위가 제일로 관심하는것은 역시 화약이였다.

《그러니 우리에게 줄 화약은 한근도 없다는 말이겠소?!》

《그렇소. 쌓아놓고 주지 않는게 아니라 없어서 못 주겠단 말씀이요.》

소윤은 다시금 잔뜩 가로꿰진 소리를 하고나서 바둑판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박위는 속이 왈칵 치밀어올랐다.

군자시량반들의 너무도 무책임하고 라태한 태도를 그냥 내버려둘수 없었다.

《여보 소윤, 지금 경상도와 전라도에서는 왜구들의 침노가 그칠새 없어 매일과 같이 백성들의 원성과 곡성이 랑자한데 공들은 한가하게 바둑이나 두면서 모든 허실을 말휘갑질로 굼때려 하니 이래서야 되겠소?》

《아니, 말휘갑질이라니 그건 누구보고 하는 소리요?》

다시 고개를 쳐든 소윤의 눈에서 파란 불꽃이 튕기였다.

박위는 소윤을 맞바로 쳐다보며 더욱 청을 높이였다.

《누구긴 누구겠소? 바로 당신보고 하는 소리요.

사실말이지 당신들처럼 한유하고 무사태평한 무관들이 이 나라에 천이 있으면 무엇하고 만이 있으면 무슨 소용이요?

우로는 비위를 맞추고 아래는 내리누르며 잡스러운 놀음으로 허송세월하는 당신들같은 무관들때문에 우리는 아직까지도 왜구를 잡지 못하고있는게요.

전하의 대해같은 은혜를 입어 조정의 벼슬을 하고 나라의 록을 타는 당신들이 오늘날 정녕 이렇게 살아야 옳겠소?》

결정적인 반격을 가하려고 기회를 노리던 소윤은 독기서린 눈길을 스르시 내리깔았다.

같지않은 시골의 무관따위가 으르딱딱거리는 꼴은 장히 비위에 거슬렸으나 아침부터 관청앞마당에 바둑판을 펴놓은것은 역시 떳떳치 못한 일이였다.

자칫하다가는 도리여 박위에게 뒤덜미를 잡힐것 같았다.

소윤은 슬며시 고개를 외로 비틀며 쑤얼거리였다.

《…하도 속이 답답해서 바둑판을 펼쳤던것인데 책망이 너무 과하구려.

우리도 판을 거둘테니 장군도 그쯤해주시우.》

소윤의 말투는 뻣뻣하고 유들유들했으나 한손접고 물러서는 뜻이 분명했다. 사실 이들과 더 말해봤대야 리속은 없고 속만 더 졸아들것 같았다.

박위는 건성으로 작별인사를 나누고나서 군자시를 나섰다.

그 걸음으로 공조서(왕정귀족들의 각종 가구제작을 맡은 관영 수공업장)뒤쪽에 무성한 살구나무로 담을 두른 최무선의 집으로 갔다.

수년전 력사적인 진포해전을 준비할 때부터 친교를 가지고있던 최무선에게 화약을 부탁해보려는것이였다.

최무선은 화약과 화포를 발명한 학자인 동시에 라세장군과 함께 진포해전에 부원수로 참전하여 왜구들에게 섬멸적인 타격을 가한 유명한 군사지휘관이였다.

박위가 무선의 조촐한 사랑방에 들어서니 왕년의 혈기방장하던 장군은 로환으로 앓고있었다.

허나 로인의 애국적열정과 기개는 예나 다름없이 펄펄했다.

그는 박위가 화약소리를 꺼내자마자 이마를 동이였던 수건을 풀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평소의 침착하고 안존한 성미와는 달리 분주스럽게 설치고 돌아갔다.

하인들을 시켜 자기 집의 화약광을 반반히 쓸어내게 하는가하면 화통도감으로 사람을 띄워 자기의 옛 직분과 명망으로 얻을수 있는껏 화약을 가져오게 하였다.

로인의 성의와 수선에 비해 모아진 화약은 많지 않았으나 그 화약에는 분명 최무선의 뜨거운 애국심과 변함없는 우의가 어려있어서 바라볼수록 가슴이 미여져올랐다.

박위는 거듭 사의를 표하고나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최무선은 고집스럽게 박위를 눌러앉히더니 빈한한 자기 집살림을 털어내다싶이 하여 주안상을 차리게 했다. 차려내온 주안상은 그런대로 풍성해보였으나 무엇인가 못마땅하여 서성거리던 최무선은 터밭에 나가 수전증이 이는 손으로 오이와 참외를 한아름이나 따들여왔다.

칠석의 집에서는 수라상같은 주안상을 마주하고도 칠석의 어질더분해진 속마음이 가슴에 마쳐와 쾌하게 술을 마실수 없었지만 여기서는 세월의 풍랑속에서도 변함없는 로인의 성실하고 정갈한 마음이 가슴을 지지여 쉬이 술을 넘길수 없었다.

무선은 병환으로 하여 전혀 술을 마시지 못했으나 술마신 사람보다 더 흥분하여 대마도원정을 기어이 승리적으로 단행할것과 예전에 자기가 부리던 오천을 부디 잘 키워줄것을 재삼재사 당부했다.

박위는 석양이 비낄무렵에야 무선의 집을 나섰다. 개경에 올라온 뒤내내 무거운 기분에 짓눌려있던 박위는 무선의 집에 와서야 비로소 한가닥의 기쁨과 환희를 맛볼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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