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8 회)

제 2 장

3

 

개경장안의 언덕받이라고 할수 있는 남산재의 밤은 소리없이 깊어가고있었다.

예로부터 남산재는 조정의 고위관리들만이 사는 반촌(량반동네)중에서도 으뜸가는 반촌이여서 낮에도 조용했지만 밤에는 더욱 고요했다.

그 고요에 휘감기기라도 한듯 최칠석의 집 사랑방에 주안상을 마주하고앉은 박위와 칠석은 아까부터 덤덤히 침묵을 지키고있었다.

주안상복판에서는 울긋불긋한 신선로가 구수한 고기내, 향긋한 양념내를 풍기며 지글지글 끓고있었다.

신선로주위에서는 설리적(소등심살로 만든 소고기산적)과 전유화(물고기지짐), 문어회와 붕어탕, 참대순볶음과 유밀과 같은 상등음식들이 맛스러운 향기와 아지랑이같은 김을 피워올리고있었다.

박위는 오래간만에 친구를 만나고 풍성한 주안상을 마주했건만 왜서인지 술을 마시고싶은 의욕이 나지 않았다.

자꾸만 서글퍼지면서 뒤머리가 욱신욱신 들쑤시였다.

과연 무엇때문일가?!

…리성계와 헤여진 뒤 병부로 향하던 박위는 불식간에 속이 허우룩해나면서 무엇인가 마음속의 귀중한 보배를 잃은듯 한 극심한 상실감에 사로잡히였다.

그 어떤 소외감도 떠올랐다.

사실상 박위는 성계에게 모욕이나 무시를 당한 일도 없었고 따돌림같은것을 당했거나 무엇인가 절취를 당한 일은 더우기 없었다.

아니, 환대라면 환대를 받은셈이였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울적해지고 쓸쓸해지고 공허해지는것인가,

무엇때문에 갑자기 서러워지고 맥적어지는것인가?!…

박위의 걸음은 저도 모르는새 칠석의 집이 있는 송악산기슭으로 꺾어들었다.

경상도군영에는 하루 늦게 가는 한이 있더라도 이 세상에서 속을 터놓을수 있는 유일한 지우인 칠석을 만나 울울한 마음을 활활 씻어버리고싶었다.

활달하고 통쾌한 친구의 위로와 조언을 듣고싶기도 했다.

느리게 흐르는 개울물곁에 자리잡은 낯익은 반촌에 들어서니 소풍을 하던 동네늙은이들이 그새 칠석은 남산재로 이사를 갔다고 일러주었다.

박위는 그들에게 자세히 길을 물어가지고 남산재로 향하였다.

저녁때건만 칠석은 집에 없었다.

박위는 이미 잘 알고있는 상노아이에게 문을 열게 한 다음 사랑방으로 들어갔다.

이전과는 판다르게 으리으리하게 꾸려진 넓다란 사랑방에 송구스러운 마음으로 들어앉은지 얼마 안되여 칠석이가 들어섰다.

기쁘고 반가운 마음이 사무쳐올라 한참이나 인사말과 그지간의 소식말을 나누고난 끝에 칠석은 화색이 충천하여 제쪽에서 먼저 묻지도않는 말을 꺼내놓았다.

《해암(박위의 호), 내 지금 좌주(자기가 급제한 과거의 수석시험관.)님댁에 갔다오는 길일세.

오늘이 좌주님의 손자 돌생일이라 우리 문생(과거의 시험관이 급제시킨 사람들.)들이 모두 모여가서 축하를 해주었지.

참말 생일잔치판이 대단하더구만.》

전혀 뜻밖의 화제에 처음 한순간 떨떨해졌던 박위는 인차 그의 말뜻을 가려들었다.

요즘 과거의 시험관으로 나섰던 사람들은 자기가 급제시킨 사람들을 문생이라 부르며 아들이나 동생처럼 각근히 대해주고 문생들은 시험관을 좌주 또는 은문이라 칭하며 부모처럼 정성스레 섬기고있었다.

그들의 관계를 꼭 사제간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여하튼 옛 인연을 잊지 않고 웃사람, 아래사람이 사랑과 존경을 나누는 일을 두고 옳지 않은 례절이라고 탓할수는 없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나라안팎이 다 복잡한 때 나라일을 바로잡기 위해 누구보다 애써 뛰여다녀야 할 조정의 관리들이 좌주의 손자 돌생일까지 잊지 않고 찾아가 진종일 술상을 껴안고있는것을 정당한 처사라고볼수 있겠는가.

그런데도 칠석은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좌주에게 기쁨을 드린것이 무슨 큰 공적이라도 되는듯이 하냥 즐거워하고있지 않는가.

박위는 그때부터 기분이 흐려지였다.

저도 모르는새 비틀린 소리가 흘러나갔다.

《요즘같은 때 개경의 량반들은 좌주의 손자 돌생일까지 꼬박꼬박 찾아가 즐기니 정말 살 재미가 있겠네그려.》

박위의 기분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칠석은 흥이 나서 대답했다.

《그럼, 좌주와 문생들사이에 애경(슬픈 일과 경사스러운 일.)간의 인사는 분명해야지 그걸 몰라서야 사람인가.》

《역시 개경량반들의 례법이 다르구만.

하긴 요즘세월에 나같은 쑥이 또 어디 있겠나, 헛허…》

허거프게 웃고난 박위는 무슨 말이든 좀더 짭짤하게 하고싶었으나 그것이 칠석에게 옹졸한 마음의 표현으로 곡해될것 같아 화제를 돌리였다.

박위는 될수록이면 자기의 감정을 섞지 않기 위해 왼심을 쓰며 리성계를 만났던 일과 까닭없이 뒤숭숭하고 울울한 자기의 기분까지 털어놓았다.

화색이 충천하던 칠석의 얼굴색이 금시 컴컴하게 변하였다.

거동조차 전혀 딴사람처럼 이상해졌다.

덤덤히 앉아있던 끝에 마치 성이라도 난것처럼 소리높여 주안상을 재촉하더니 그다음은 꾸며낸듯 한 미소를 띄우며 새삼스레 문안인사같은것을 늘어놓았다.

《해암, 이게 정말 몇해만이요? 지난 4월에 상경했을 때는 우리 집에 들리지도 않고 그냥 내려갔더군.

아무튼 반가우이. 이렇게 불쑥 나타날줄은 정말 몰랐소그려, 헛허.

 

림진강 봄도 깊어 물가풀도 고울시고

흰모래밭 백구백로 한가로이 조은다오

저 멀리 들려오는 노소리에 놀라 깨니

어드메 고기밴고 안개속에 손님 왔네

 

헛허허… 마침맞게 주안상이 나왔소그려. 자, 오랜만의 상봉을 축하하여 한잔씩 냅세그려.》

칠석은 몸집도 그리 크지 않고 얼굴도 안존하게 생긴것이 어딘가 얌전한 선비같은 인상을 주었으나 성격은 생김새와 판다르게 소탈하고 대범했다.

장난기도 심하고 시읊기도 즐기는 유쾌한 사람이였다.

헌데 리성계에 대한 말을 듣자마자 전에없이 심중해지더니 좌석의 공기에 맞지도 않는 너스레를 떨던 끝에 시조까지 읊어내리였다.

박위는 아연해났다.

아니, 전혀 처음 보는 칠석의 류다른 언행에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칠석은 내가 리성계를 만난것이 불만스러운가? 아니면 리성계에 대한 나의 불만조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가?

여하튼 칠석은 무엇인가 몹시 불안해하고있다, 그래서 눅거리광대극같은것을 놀고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아무리 요즘세월이 흉흉하고 어수선하다 해도 벗의 진정에는 진정으로 대답하는것이 지우의 도리가 아니겠는가, 진정을 토파하는 벗에게 진속을 터놓기 꺼려한다면 그는 벌써 참된 우의를 가진 벗이라고 말할수 없다.…

…그때부터 박위는 침묵을 지키고있었다.

별안간에 속이 꽁해진것이 아니라 칠석의 이상한 태도가 섭섭하고 벗에게까지 환영을 받지 못하는 자기의 처지가 서글퍼나서 술도 마시고싶지 않았고 말도 나누게 되지 않았다.

침묵, 침묵, 침묵…

마침내 칠석은 자기의 마음을 소리없이 칭칭 동이는 지루한 침묵이 지겨운듯 짜증어린 어조로 부르짖었다.

《해암, 오랜만에 취하도록 마시자는건데 왜서 술을 들지 않소?》

그제서야 박위는 갑자기 술생각이 난듯 맑은 술이 철철 넘쳐나는 놋주발을 집어들었다.

술을 마시고싶어서가 아니라 술로써 자기의 쓰라린 마음, 허우룩한 마음을 다소라도 가시고싶었다.

박위는 단숨에 주발의 술을 말끔히 비워버리였다.

불덩이처럼 따거운 술이 목을 지지며 굴러내리자 무거운 기분은 가셔지는것이 아니라 더더욱 아프게 뇌리를 조이였다.

박위는 칠석의 속마음을 알고싶었다.

벗의 진정을 느끼고싶었다.

박위는 턱수염에 튕겨난 술방울을 천천히 쓸어내리고나서 고개를 들었다.

《백운(칠석의 호), 나는 그대에게 털끝만 한 거짓도 없이 진속을 다 털어놓았소. 그런데 백운은 나에게 전혀 할말이 없는가본데 그대야말로 이 웬일이요?》

칠석은 너무도 직선적인 박위의 질문이 몹시 난처한듯 어줍은 미소를 띄우며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해암, 오랜만에 조용히 마주앉았는데 반가운 정이나 나누면 그만이지 무얼 자꾸 그런 소리를 하우. 우리 피차 정치에 너무 바투 다가서지 맙시다. 〈하이해후요, 유주내강〉이라는 옛장수의 말대로 술로써 시름을 풀며 그럭저럭 세월을 누벼나가는게 현책일줄 아오.

자, 또 한잔 마시세그려.》

박위는 무엇에 들레이기라도 한듯 번쩍 눈을 치떴다.

이제는 칠석의 너무도 변화된 정신적인 모습이 확연히 가려지였다.

칠석은 의심할바없이 리성계를 두려워하고있었다. 박위 자기를 꺼리고있었다.

그것은 상층권력가들에게는 될수록 밉지 않게 보이는것으로써 자기의 권력과 부귀를 길이 부지해나가려는 이 세월 권력배 일반의 공통된 심리에 뿌리를 둔것이였다.

박위의 속은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니 백운은 이제 와서 나에게도 속을 터놓기가 무척 힘겨운 모양인데…

그렇다면 나는 그대의 지기가 아니라 비편하고 부담스러운 객이 아니겠소?》

칠석은 주둥이가 묘하게 꼬부라진 은주전자를 기울이여 술을 붓다말고 황망히 고개를 들었다.

《아니 객이란 무슨 소리고 비편과 부담이란 또 웬말이요?!

그거야 롱이라도 지나친 롱이 아니요?》

《백운은 내가 지금 롱을 하고 다닐 경황이 있다고 보우? 또 지금껏 내가 실없는 롱담을 하는걸 본적이 있소?》

주발을 잡으려던 박위의 커다란 손이 허공에서 부르르 떨었다.

박위는 아득히 흘러가버린 옛시절 고향마을에서 나누던 티없이 깨끗했던 우정이 못 견디게 그리워났다.

박위와 칠석은 참대말을 타고 참대칼을 휘두르며 뛰여놀던 소년시절에는 물론 여기 개경에서 벼슬살이를 하던 한창나이때도 순진한 소년들처럼 서로 꺼리는것이 없었고 기이는것이 없었다.

네것이자 내것, 네 마음이자 내 마음…

슬픔도 기쁨도 언제나 반반씩 나누어가졌다.

박위가 칠석을 남달리 사랑하는것은 단지 한고향 태생, 유년시절의 흔치 않은 벗이기때문만이 아니였다.

어릴 때부터 군사를 애중하던 칠석이 (소년시절 칠석은 무관을 지향했으나 아버지의 강권으로 문관이 되였다.), 누구보다 군사를 중시하는 칠석의 마음이 돋우보여서였다.

지나치게 군사일에 끼여든다고 뒤소리를 들을만큼 군사일에 극성스럽게 나서는 그의 마음이 고마워서였다.

리색이 해군력증강을 주장해나섰을 때도 제일선참으로 그의 발기를 지지찬동한 사람이 바로 최칠석이였다.

그런데 그때의 열렬하던 칠석은 어디로 갔는가?

애국이 말로만 떠들고 다니는것이라면 이 세상에 애국심이 없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박위의 눈앞에는 예전의 솔직하고 유쾌하고 강직한 최칠석이가 아니라 조정의 벼슬살이속에서 조약돌처럼 동그랗게 다듬어진 꾀발발한 생면부지의 사람이 최칠석의 탈을 쓰고 앉아있는것 같았다.

서글프고 괴로운 마음탓인지 사랑방의 여기저기서 번쩍거리는 은주전자며 옥차종, 은향합, 옻칠을 먹인 문갑따위의 값비싼 기물들마저 야릇한 혐오감을 자아냈다.

번들거리는 벽장에 아직까지 붙어있는 춘축(립춘날 새봄을 축하하여 대문이나 문설주, 벽장 같은데 써붙이는 글)의 《수여산 부여해》(오래 살기를 산과 같이, 부유하기를 바다와 같이 되라), 《립춘대길 건양다경》(봄이 오자 행복이 오고 계절따라 경사가 많다)이라는 글발까지 꼭 칠석의 변화된 인생목표처럼 생각되여 더더욱 쓸쓸해났다.

박위의 낯색을 불안스레 살펴보던 칠석은 공연히 허리를 둘러감은 사치한 슬띠를 매만지며 가까스로 말을 꺼냈다.

《그러니 해암은 그예 송헌(리성계의 호)대감을 다시 만나겠다는거요?》

《만나겠소. 오늘은 내가 정신이 조금 흐려졌댔는지 아니면 도까비한테 홀리웠댔는지 군영에서부터 뼈물러가지고온 말을 절반도 하지 못했소.》

《…내 생각에는 송헌대감과 다시 만나는것은 삼가하는것이 좋을듯 하오. 아니, 대마도원정자체를 당분간 덮어두는게 옳을것 같소. 주역에도 〈때가 행함즉하면 행하고 때가 그침즉하면 그치라〉고 하지 않았소?》

《그건 또 무슨 소리요?!》

《해암, 놀라지 마오. 털어놓고 말해서 지금 조정의 일부 량반들속에서는 경상도원수가 대마도원정준비를 차린다고 하면서 실은 정변음모를 꾸미고있다는 소문이 쉬쉬 돌아가고있소.》

《정변음모?!》

박위는 정변이라는 당치도 않는 소리가 지나치게 들리기는 했으나 그런 생각은 꿈에도 품어본적이 없는지라 전혀 놀랍지 않았다. 허거픈 웃음이 나갈만큼 어이가 없을뿐이였다.

《내가 반정준비를 차린단 말이요?! 헛허허.… 그게야 할일 없는 사람들이 심심풀이로 해보는 소리겠지.…》

박위의 심상한 낯빛을 의아쩍게 쳐다보던 칠석은 한층 긴장된 표정으로 계속하였다.

《글쎄… 아직은 근거없는 랑설이니 해암의 말대로 롱담이라고 할수도 있겠지.

하지만 원정준비의 첫발을 떼기 바쁘게 이런 험한 소리가 나도는데 장차 준비가 성숙되는 경우 어떤 변이 생길지 누가 알겠소.

조정의 기둥뿌리노라고 꺼떡거리며 돌아가던 조민수대감도 하루아침새 떨컥하는판인데 매사를 조심해야 하지 않겠소.

사실말이지 누가 시키지도 않는 대마도원정을 하겠다고 뛰여다니다가 없는 죄를 뒤집어쓰고 전정을 망친다면 그런 억울한 일이 또 어디 있겠소.》

《전정(앞길)을 망친다?!》

박위는 침먹은 지네모양으로 잔뜩 쭈그리고있던 칠석이가 내놓고 대마도원정을 반대하자 기분이 상하다못해 격분하기까지 했다.

칠석이가 박위의 대마도원정을 애써 제지시키려는것은 자기도 무사하고 박위도 탈이 없게 하려는 의도로서 정의와 진실, 나라와 백성의 고통 같은것은 안중에 두지 않은 자기 보신책에서 나온것이였다.

박위는 이 정도로 생각할만큼 저급하게 변모된 칠석이가 측은해났다.

이런 사람을 세상에 둘도 없는 벗으로 믿고 허위단심 찾아온 자기가 새삼스레 구슬퍼났다.

《내 이제야 백운의 진속을 알만 하오그려.

그대가 무엇때문에 송헌대감의 소리를 꺼내기 주저하고 무엇때문에 대마도원정을 한사코 만류하려 하는가를 손금보듯 알만 하단 말일세.

백운은 분명 송헌대감의 비위를 조금이라도 건드리게 될가봐 그것으로 해서 자기의 전정을 흐리게 할가봐 그리도 조심을 두는것 같은데…

옳은 처사일세.

요즘처럼 조정의 공기가 어수선한 때 백사만사를 다 외나무다리를 건너가듯 조심해야 벼슬자리도 오래오래 지키고 부귀영화도 길이길이 누릴수 있겠지.》

박위의 말속에 심각한 질책과 조롱이 스며있음을 감촉한 칠석은 창피하기도 하고 분하기도 했으나 애써 딴전을 피웠다.

《해암, 무슨 말을 그렇게까지 하오?! 해암이 그만 취했소그려.》

박위는 단정하게 올방자를 고이고앉은채 무겁게 고개를 끄떡거리였다.

《그건 아무렇게 생각해도 좋소. 이왕 말부리를 헐어놓은김에 내 몇마디 더 하리다.

솔직히 말한다면 백운은 지금 송헌대감도 무섭고 대마도원정도 두렵고 역적소리가 묻어다니는 이 박위와 술을 마시는것도 껄끄럼할게요. 그대는 어쩌다가 이 지경으로 변했소? 옛적의 그 정갈하고 의기양양하던 최칠석은 어디로 갔느냐 말이요.

하기야 누구를 탓할것도 없지. 요즘 세월이야 묘하게 인생의 노를 저어가면서 자기가 탄 배를 깨지 않는자가 현명한 재사로 인정되는 때이니 백운도 역시 그렇게 사는거겠지…

하지만 나는 세상이 모두 미련둥이라고 흉을 보고 촌보리동지라고 손가락질을 해도 옛모양대로 살아가겠소.

내 손으로 내 인생의 보습을 틀어쥐고 험악한 삶의 들판을 갈아엎으며 희망의 씨앗을 묻어나가겠단 말이요.…》

《…》

《하고보면 그대와 나는 물과 불처럼 도무지 어울릴수 없는 사람이요. 추구하는 인생의 목표도 판판 다른것이 분명하오.  그러니 피차 거치장스럽게 우의라는 화려한 외피는 해서 무얼 하겠소. 속시원히 벗어던지는것이 홀가분할게요. 오늘로써 우리 영영 작별을 합세. 일후로는 내가 다시 이 집에 발길을 안할테니 그러더라도 어찌 생각지 마오. 그렇게 알고 난 그만 가겠소.》

박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혀 뜻밖의 결별선언에 깜짝 놀란 칠석은 반사적으로 튀여일어났다.

박위의 팔소매를 틀어잡으며 노기에 젖어 웨치였다.

《해암, 이 무슨 망녕이요? 취해도 류만부동이고 주정을 해도 한도가 있는게 아니요.》

《취중의 망녕이라면 작히나 좋겠소. 나는 그대에게 더이상 할 말이 없는 사람이요.》

점잖게 칠석의 손을 털어버린 박위는 사랑채 문을 밀어제끼였다.

그 순간 만월대쪽에서 요란한 폭음이 울리였다.

불시에 궁궐쪽의 밤하늘이 빨갛게 타올랐다. 박위는 문지방을 넘어서다말고 칠석에게 놀란 눈길을 돌리였다.

《이게 무슨 일이요?!》

칠석은 별로 놀라지도 않고 나직이 대답했다.

《전하께서 아마 불놀이를 구경하시는 모양이요.》

박위는 더욱 놀라워 커다랗게 눈을 흡떴다.

박위도 궁중의 불놀이에 대해 잘 알고있었다.

연등회나 팔관회와 마찬가지로 오랜 연원을 가진 불놀이는 궁중의 주요행사중의 하나로서 궁중행사전반이 그러하듯 막대한 비용이 드는 놀이였다.

불놀이는 매번 궁궐의 후원과 뒤산에서 진행되는데 후원에서 먼저 석류황, 염초, 반묘, 버드나무재 같은것을 두터운 종이에 싸서 만든 폭발물질을 터친다.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과 함께 여러 줄기의 불기둥이 솟구쳐 오를 때면 수천개, 지어 수만개의 불화살을 묻어놓은 뒤산마루에도 불이 달린다.

불이 당긴 화살들이 길게 꼬리를 끌며 무수히 밤하늘로 솟구쳐오른다.

밤하늘은 온통 불화살에 덮이여 눈이 시글 정도로 번쩍거린다.

이 정도의 불놀이는 그래도 작은 폭이다.

대판으로 벌릴 때면 이외에도 후원복판에 보퉁이를 매단 장대들을 수없이 세워놓고 불을 다는데 그때면 보퉁이속에서도 불화살들이 홱홱 날아오른다.

돌로 깎아만든 커다란 거부기들의 입에서도 불줄기와 연기타래가 쉬임없이 쏟아져나간다.

그와 동시에 넓다란 풀밭에서 일어난 불길은 마치 화공이 커다란 붓으로 그림을 그리듯 꽃모양, 새모양, 포도송이모양을 그리며 기묘하게 퍼져나간다.

이때라 갈파리떼처럼 쏟아져나온 광대들은 불붙는 풀판을 이리저리 뛰여넘으며 절묘한 춤가락을 펼친다.

임금은 2품이상의 문무량반들과 함께 후원의 솔숲에 들어앉아 향기로운 술을 마시며 밤늦도록 재미있게 불놀이를 구경한다.…

오늘 불놀이도 대판으로 벌어진듯 왕궁쪽에서는 연해 폭발소리가 울리고 련속 불기둥과 불화살들이 솟구쳐올랐다.

왕궁쪽의 하늘은 통으로 타번지는듯싶은데 그 장엄한 화광은 여기 남산재에까지 번뜩번뜩 날아들었다.

하염없이 궁궐쪽의 하늘을 바라보던 박위는 허청비청 퇴마루를 내려섰다.

근래에 이르러 한동안 자취를 감추었던 불놀이였다.

헌데 어떻게 되여 세월도 어수선하고 나라와 백성들도 어렵게 살아가는 이때 랑비밖에 가져오는것이 없는 저 불놀이가 다시 생겨났는가.

과연 어느 누가 오늘의 불놀이를 기안하고 추진했는가.

그 사람은 두말할것도 없이 리성계일것이다.

성계는 분명 임금을 기쁘게 해드린다는 명목밑에 자기파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저렇듯 야단스러운 놀음을 벌려놓은것이였다.

(아! 단지 몇몇 관리들의 흥과 위세를 돋구기 위해 이 나라 군사들과 백성들이 피와 땀을 몰부어만든 귀중한 화약을 하루밤새 수천근이나 태워버린다는것은 얼마나 허망하고 한심한 일인가.

이제 와서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라면 팔이 아니라 온몸이라도 태우겠다던 송헌대감의 말을, 백성들의 생활이 추설 때까지 대마도원정을 미루자던 리성계의 말을 어떻게 리해해야 하는가?…)

박위는 술이 아니라 너무나 무거운 번민에 취하여 위태롭게 비틀거리며 대문쪽으로 걸어갔다.

문득 새로 일떠선 도 평의사사의 으리으리한 건물이 우렷이 떠올랐다.

흐리지도 않은 하늘을 쳐다보며 된소나기가 터질 조짐이노라고 탄식하던 끝에 누런 눈물을 줄줄 흘리던 리색의 암울한 얼굴도 생생히 안겨왔다.

화사스럽게 꾸민 방안모양과는 어울리지 않게 수수하게 차리고 앉아있던 리성계의 모습도 얼찐얼찐 비껴왔다.

침착한 얼굴표정과는 달리 불안과 긴장감을 띄고 쉬임없이 돌아가던 리성계의 꾀어린 눈동자, 나라와 백성들에게 거대한 덕행이라도 베풀듯이 고아대던 그의 열띤 음성도 상기되였다.

리성계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무엇을 바라며 무엇을 위해서 사는 인간인가?!…

박위는 비로소 자신이 리성계에게 우롱과 기만을 당했다는것을 통감하였다.

그러자 학질에라도 걸린듯 전신이 후들후들 떨리였다.

머리속에서 날벌레의 나래소리같은것이 윙윙 울리였다.

행랑방의 퇴마루에 걸터앉아 연송 탄성을 질러가며 왕궁쪽의 하늘을 재미있게 구경하고있던 여삼은 비틀거리며 걸어나오는 박위를 띠여보자 덴겁을 하여 자리에서 일어섰다.

곤두박질하듯 달려와 박위를 부축해주었다. 박위는 여삼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나서 몇번이나 헛발질을 하던 끝에 가까스로 말우에 올라앉았다.

극심한 좌절감과 소외감을 안은채 아직도 이글이글 타번지는 왕궁쪽의 하늘을 추연히 바라보던 박위는 제 듣기에도 구슬픈 음조로 옛시 한수를 뜨직뜨직 읊어내리였다.

 

하늘은 옛하늘 그대로건만

사람들은 옛사람이 아니요

달은 명월이로되

사람들은 밝지 못하구나

 

《어허! 그러니 내 이제 누구와 더불어 대사를 의논하고 누구와 더불어 장부의 큰뜻을 이루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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