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7 회)
제 2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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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위는 리성계의 방으로 들어섰다.
휑뎅그렁한 방안의 상좌에 홀로 앉아 두툼한 문서장을 뒤적거리던 리성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피로가 비낀 눈으로 박위를 바라보던 리성계의 길쑴한 얼굴에 홀연밝은 웃음기가 확 퍼지였다.
리성계는 보기 좋게 발달한 체구를 움쭉 일으켜세우며 제쪽에서 먼저 인사말 비슷한 소리를 활기있게 꺼냈다.
《박장군이 상경했소그려. 우리가 대체 몇해만에 만나는거요?! 헛허허…》
박위는 리성계의 예상밖의 언행에 다소 얼떠름해지였다.
박위는 요즘 조정의 권세를 거의다 줌안에 넣은 리성계가 차림새도 으리으리하고 언행도 거드름스러울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헌데 리성계의 차림새는 너무도 수수했다. 옛적의 붉은 직령을 입고 전이 좁은 주립을 썼는데 그나마도 물이 너무 날아 거의 분홍색으로 보이였다.
언행 또한 예전과 다름없이 소탈하고 진실해보이였다.
솔직성과 진실성을 인간의 가장 큰 장점으로 여기는 박위는 예나 다름없는 리성계의 수수한 모습앞에서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어느 정도 감격하기까지 하였다.
똑똑한 근거도 없이 리성계를 의문시하고 불신했던 자기가 은근히 불만스럽기도 했다. 그러자 진정으로 되는 인사말이 절로 우러나왔다.
《대감! 그지간 귀체만강하셨소이까!》
《념려덕분에 무탈했소. 박장군은 별고 없으셨소?》
살뜰한 문안인사를 나눈 뒤 두사람은 탁자를 마주하고 자리에 앉았다.
리성계는 무엇때문인지 초조한 기색을 떠올리며 서둘러 말꼭지를 뗐다.
《박공도 십분 짐작하겠지만 우리 고려국이 건립된 이래 지금처럼 국력이 쇠잔하고 기강이 해이된 때는 일찌기 없었소. 왜 그렇게 되였는가?…》
성계는 급급히 말을 이어나갔다.
그것은 정력적인 성격탓도 아니고 그 어떤 바쁜 일이 기다리고있기때문도 아니였다.
성계는 뭐니뭐니해도 박위가 최영의 축출리유를 따져물으며 저주와 규탄을 쏟아놓을가보아 속이 저리였다.
물론 성계는 박위의 항변을 무찔러버릴 론거와 배심이 없는것도 아니고 박위라는 존재가 그리 두려운것도 아니였다.
필요하다면 능히 해제낄 자신이 있었다.
그러나 아직은 적지 않은 반대파들이 왕권강화를 고집하고있는 형편에서 그들에게 또 하나의 언터구를 잡힐 일을 한다는것은 너무도 우둔한짓이였다.
리성계의 심사는 이래저래 착잡하였다.
허나 대마도원정을 시급히 단행할 의지로 온몸이 달아있는 박위는 이미 최영의 축출이 아무리 가슴아픈 일일지라도 민족의 존망과 관련된 군사일우에 놓을수는 없다고 단정하고있었다.
성계는 근엄한 표정을 띄운채 급급한 어조로 계속 딴전을 펴나갔다.
《…남북으로 밀려드는 외적들과 장장 수십년동안 전쟁을 한데다 나라안의 몇 안되는 세신대족들의 손에 국가의 토지와 군대들의 둔전까지 거의 전부 흘러들어갔기때문이요.
또한 전임재상들인 림견미, 리인임 같은자들이 저들의 사리사욕을 채우는데 광분하면서 나라의 페단을 바로잡기는커녕 더욱 조장하고 확장시켜놓았기때문이요.
형세는 참으로 위급한데 나라와 백성은 안중에도 없는 세신대족들은 계속 저들의 줌안에 토지를 끌어들이여 이제는 한개 사영농장의 면적이 몇개 고을을 타고넘는 지경에 이르렀소.
이렇게 되니 얼마간의 제땅을 가지고있던 농민들까지 세신대족들의 사영농장에 의거하여 전호(소작농)로, 외거노비, 솔거노비로 굴러떨어지고있소.》
박위는 처음 한동안은 리성계가 무슨 말을 하는가 하여 다소 떨떠름하였다.
새겨들어보니 그의 말인즉 나라의 악페청산에 관한 문제요, 국력강화와 민생구제에 관한 이야기였다.
언제나 국가의 번성과 백성들의 생활향상에 대해 무심한적 없는 박위는 저도 모르는새 자기의 용건과는 전혀 갈래가 다른 왕청같은 화제에 깊숙이 말려들어갔다.
박위는 마침내 피빛이 내번진 얼굴을 번쩍 들어올리며 청을 높여 말했다.
《대감, 나라가 이 지경이 되도록 세신대족들의 특대형범행을 방치해둔것은 지난 기간 우리 조정의 가장 큰 실책인줄 압니다.》
잠시 말을 끊고 상대의 반응을 예리하게 살피던 성계는 박위가 시비를 걸기는커녕 적극적인 공감과 성원을 보내자 더욱 기세가 올라 턱을 부들부들 떨며 열을 올리였다.
《옳소, 우리는 전시대 재상들의 과오를 인정해야 하며 (이것은 최영을 념두에 둔 말이였으나 박위는 리인임을 두고 하는 말로 리해하였다.) 그것을 과감히 시정극복해야 하오.
이제 더이상 이 불미스러운 사태를 방치해둔다면 얼마 안 가서 나라안의 토지와 백성은 전부 세신대족들의 손아귀에 들게 될것이며 국가는 알쭌히 빈 허울만 남게 될게요.》
리성계는 체계적으로 글공부를 한적도 없었고 책권도 별로 읽은것이 없는 무식쟁이였다.
하지만 수십년세월 제노라 하는 조정의 엄지가락량반들과 어울려지낸데다 때없이 수하장졸들앞에 나서서 군령도 내리고 제나름의 인생풀이도 해온 덕에 언변은 그런대로 꽤 좋은편이였다.
그 좋은 언변, 그 좋은 목청으로 승기가 나서 장광설을 엮어나가던 리성계는 불시에 탁자의 모서리를 쾅 내리치며 결연히 부르짖었다.
《이제 더는 한시도 미룰수 없소.
우리는 조속한 시일내에 세신대족들의 방대한 토지를 말짱 몰수해야 하오.
그래야 백성들이 살아나고 국력이 제고되며 나라의 기강도 바로 설수 있소.
이미 전하께서 주달하셨고 방금 국책으로도 론의되였지만 조정에서는 우선 료물고(왕실창고)에 속한 360여개의 장, 처전에서 절에 기증한 토지들을 모조리 회수하고 비법적으로 차지한 세신대족들, 량반토호들의 사전을 가차없이 몰수할것이며…》
리성계는 세상의 모든 위정자들이 다 그러하듯 말끝마다 나라와 백성을 떠올리며 박위를 포함한 관리들과 세상천하를 솜씨있게 기만하고있었다.
농사나 토지경영의 물계 같은것은 초보도 알지 못하는 리성계가 만사를 젖혀놓고 사전정리건부터 들고나온것은 전적으로 자기의 권욕실행과 일파의 리익을 위해서였다.
방대한 토지를 장악하고있는 세신대족들을 철저히 제거해야 자기가 온 나라의 토지를 독점할수 있으며 모든 농민들을 《국가토지》에 결박해놓고 세력권확장과 왕권탈취에 소요되는 재정을 시급히 지속적으로 뽑아낼수 있었다.
이런 리유로 하여 리성계를 추종하는 관리들은 사전정리를 전폭적으로 지지찬동했으나 조락의 음영이 짙게 드리운 왕권의 회복을 갈망하는 리색과 정몽주네들은 사전정리를 필사적으로 반대하였다.
방금전 이 집을 나서던 재상들의 얼굴색이 그처럼 심한 대조를 이룬것은 바로 그때문이였다.
아직은 수면아래서 고요히 소용돌이치는 조정의 파국적인 형세와 극으로 대립된 관료들의 내면세계를 깊이 알리 없는 박위는 거듭 리성계의 과단성있는 정치소신과 용단에 경탄과 공감을 표시하였다.
박위는 리성계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서며 오래간만에 만났는데 술잔이나 나누자고 해서야 소스라치는 놀라움속에서 자기가 무엇때문에 이 방에 들어왔는가를 깨달을수 있었다.
헌데 정작 말을 떼자니 리성계의 거창한 정계쇄신의 구상에 비해볼때 자기의 대마도원정건은 너무도 지엽적이고 왜소한 문제같았다.
다음순간 대마도원정은 단순히 지역적의의를 가지는 협소한 군사작전이 아니라 나라의 자주권과 민족의 존엄과 관련된 중대한 국사라는 생각이 불덩이처럼 가슴을 지지였다.
박위는 불타는 눈으로 리성계를 쳐다보며 비로소 자기의 용건을 터놓았다.
《이미 대감께서도 깊이 통촉하시는바이지만 왜구의 끝없는 침노와 략탈로 하여 우리 백성들은 도탄에 빠지고 국가의 존엄은 훼손되고있습니다.
우리 군대는 지난 기간 왜구들을 바다에 나가 때려보기도 하고 륙지에 들여놓고 치기도 하는 등 온갖 방법을 다하여 물리치려 했습니다.
그러나 왜구의 침략과 략탈은 근절된것이 아니라 더 자주, 더 큰판으로 계속되고있습니다.
열백번 생각해보아도 이제 더 다른 방도는 없습니다.
방비나 반격이 아니라 주동적인 공격을 개시하여 도적무리의 근거지인 대마도를 통채로 짓뭉개버려야 합니다.
우리 군대의 정의로운 출동은 필경 백세의 한을 풀고 오늘과 래일의 참화를 방지하며 나라의 위세와 존엄을 만방에 떨치게 될것입니다.》
두툼한 입술귀를 짓물고서서 연해 고개를 끄덕거리던 성계는 불시에 목침같은 주먹으로 허공을 내리찍었다.
《옳소, 박공의 대마도진공결심은 백번 지당한것이요.
대고구려의 후손들인 우리가 잰내비같은 왜구들의 불장난에 고통을 겪고 망신을 당한다는것은 말도 되지 않소!》
이것은 위선이 아니라 리성계의 진심이였다. 그러나 리성계는 박위의 원정용단이 정당하다는것을 인정하면서도 시급히 그것을 단행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 당장 성계에게 급한 일은 대마도원정이 아니라 온 나라의 토지를 탈취하고 리색과 정몽주 같은 반대파세력을 숙청 또는 흡수하여 자기의 정치경제적기반을 구축하는것이였다.
그와 함께 성리학을 국가정치의 리론적기조로 내세울것을 요망하는 조준, 윤소종 같은 관리들의 얼쑹덜쑹한 리론을 빌어 자기의 배신적인 죄행과 앞으로의 흉악한 사변을 장미빛으로 채색해나가면서 아직은 헐렁헐렁하게 잡혀있는 권력일체를 소고삐처럼 바싹 조여잡는것이였다.
총체적으로 말하여 리성계에게 있어서 가장 급하고 중한 일은 무혈의 역성혁명 즉 왕위찬탈이였다.…
천천히 자기의 교자에 들어앉은 리성계는 대마도원정에 대해서가 아니라 이 박위라는 인간을 장차 어떻게 대하고 처리할것인가를 따져보기 시작했다.
얼마전 리성계는 오래전에 조민수를 통해 알게 되였던 김해부사 조호백으로부터 상당한 량의 희귀한 어물과 함께 한장의 비밀한 사찰(사적인 편지.)을 받았었다.
호백은 편지의 서두에서 《리대감이 원정군을 돌려세우고 최영을 축출한것은 국가정치의 새장을 알리는 혁신적인 처사》라고 리성계를 극구 추어올리였다.
계속하여 호백은 자기의 사촌형인 조민수가 관직을 삭탈당한것은 (최근 리성계는 자기와 함께 위화도회군을 단행한 좌시중 조민수를 파면시키였는데 공개적인 파면리유는 어떠하든 리성계로서는 전략적으로 반분했던 권력을 시한부적으로 회수한것이였다.) 전적으로 정당한 인사행정이노라고 덧붙이였다.
호백의 로골적인 아첨에 성계는 흡족한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 왜서인지 자꾸만 속이 근지러워나고 얼굴이 뜨끔해났다.
마감으로 호백은 근래에 경상도원수 박위는 대마도원정을 준비한다는 표구아래 모반음모를 꾸미고있다고 악의에 차서 력설했는데 그것이야말로 호백이가 사찰을 내게 된 근본동기인듯싶었다.
그 대목에 이르러 성계는 시큰둥한 표정을 띄우며 코방귀를 내불었다.
성계가 알건대 박위는 지나칠 정도로 진실하고 고지식한 무관으로서 역신음모 같은것은 꿈에도 생각지 못할 사람이였다.
모름지기 버들잎처럼 속이 좁고 무엇이든 제 마음에 시쁜것은 갈구리로 걸어채야 속이 시원해하는 조호백이 서뿌르게 판단했거나 개인적인 앙심을 먹고 생먹은 소리를 아무렇게나 엮어댄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성계는 박위의 역신음모라는 대목을 훌훌히 넘겨버릴수 없었다.
예전에도 그러했지만 앞으로도 자기에게 고분고분 숙어들것 같지 않은 박위.
최영의 축출로 하여 자기에게 극심한 의혹 내지 반감을 품고있을것이 분명한 박위는 필경 편안치 않은 인물, 거치장스러운 존재였다.
좀더 깊이 해부해본다면 한개 도의 군력을 총섭하는 군영의 원수요,
자기 손에 직접 검을 잡고있는 무관인 박위는 위험하기도 한 존재였다.
어느때든지 반드시 제껴버려야 할 대상이였다.
(리성계는 실지 공양왕 초기에 자기를 포함한 9명의 공신중에서 두명의 무관을 권력권밖으로 추방하였는데 그속에는 박위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박위에게 손을 댈 필요가 없었다.
아직까지 자기를 반대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선망높은 장수를 이렇다할 명분도 없이 제거한다면 그것은 반대파의 력량을 보강해주거나 자기의 세력기반을 약화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할것이였다.
적절한 기회에 보다 명백한 증거를 가지고 잘 익은 열매를 따듯 아무탈없이 손쉽게 따던져야 했다.
성계는 호백에게 지금같은 때 증거가 불충분한 고변은 소요와 혼란만을 빚어낼수 있으니 모쪼록 심사숙고하라는 내용의 아리숭한 련락을 은밀히 내리떨구었다.
그 련락인즉 너무 조급해말고 박위의 일거일동을 세심히 주시하면서 보다 뚜렷하고 충분한 증거를 채집하라는 우회적인 암시와 당부였다.…
리성계의 두툼한 가슴속에서는 검은 피가 소용돌고있었으나 그의 넓둥그런 얼굴에는 박위야말로 자기와 뜻도 배짱도 맞는 무관이여서 바라보기만 해도 마음이 흡족하다는 뜻의 미소가 은은히 흐르고있었다.
이윽하여 성계는 은근진 어조로 말을 이었다.
《속잎이 자라면 떡잎은 젖혀지기마련이라더니 과시 박공은 오늘날 우리 군대의 가장 큰 기둥이고 제일가는 장수요. 공같은 무장이 전역에 나가있으니 우리의 마음은 정녕 든든하오.
그렇다면 우리 군대의 대마도원정은 언제쯤 하는것이 가장 합당하겠는가, 요는 이것인데…》
리성계는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박위를 쳐다보았다.
다시한번 알락달락한 문양으로 치장된 기만극을 본때있게 연출할 잡도리였다.
여기서 잠시 리성계일가와 그의 래력을 소급해보자.
퍽 오래전에 전라도 전주에서 나지래기벼슬을 지내던 리성계의 조상 리안사는 13세기 중엽 당시 교전상태에 있던 원나라에 투항하였다.
나라와 민족을 배반한 대가로 리안사는 원나라가 타고앉아있던 쌍성총관부의 동계(현재 강원도 북부일대와 함경남도지방)에서 비교적 큰 세력지반을 가지게 되였다.
그후 리안사의 아들인 리행리와 손자인 리춘도 원나라로부터 천호라는 벼슬자리를 얻어가지고 한개 지역의 토호로 뚱땅거리며 살았다.
리춘의 아들 리자춘 (리성계의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리자춘일가의 토호생활을 감싸주고 떠밀어주던 원나라가 급기야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러자 리자춘과 그의 아들 리성계는 원나라에 치중하던 종래의 생활태도에서 탈피하여 수평선상에서 고려와 원나라에 각각 한발씩 잠그고 량국의 형세를 예리하게 살피기 시작했다.
원나라가 망하면 고려로 넘어가고 고려가 무너지면 원나라에 가붙을 심산이였다.
그무렵 고려는 강경한 자세로 반원의 기치를 추켜들었다.
원나라는 내리막길에 들어선 찌그러진 수레모양으로 더이상 본래의 모양을 수습할수 없었다.
오직 파멸만이 원을 기다리고있었다.
자춘과 성계는 재빨리 원나라에 잠그었던 한발을 각각 뽑아올리였다.
이제는 통으로 고려편에 가붙는것이 현책이였다.
그러한 때인 1356년(공민왕5년) 고려정부는 동북병마사 류인우에게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동계를 회복할것을 명령하였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리자춘은 자기가 직접 개경에 들어와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는 돌아가자바람 동계전역에서 대규모의 폭동을 일으켰다.
류인우의 공격에 호응한 리씨부자의 폭동으로 하여 고려군은 삶은개 눈뽑듯 손쉽게 동계를 되찾을수 있었다.
리성계의 특기는 활을 귀신같이 다루는것인데 사실 그는 활쏘기만이 아니라 검술과 기마술에도 능하였다.
리성계의 군사적재능을 포착한 최영은 그를 고려군대의 장군으로 끌어올리였다.
군대의 요직에 들어앉은 리성계는 북원의 납합출과 덕흥군의 반란군을 격파하고 1376년 개경을 위협하는 왜구의 집체를 요정낸것을 비롯하여 련속 전과를 거두었다.
성계는 시중벼슬을 거쳐 수시중의 관직에까지 톺아올랐다.
리성계는 시중이 되였을 때 연회장에서 시 한짝을 지었다.
석자 되는 환도로
나라를 평정하고
이렇게 운을 뗀 성계는 최영에게 자기의 시에 대구를 채워줄것을 요청했다.
최영을 찬양하는 시를 지어 그에게 더욱 잘 보일 심산이였다.
성계의 간특한 속심을 알리 없는 최영은 도리여 기마술에 능한 성계를 칭송하는 의미에서 대구를 채웠다.
한가닥 채찍끝에
천하가 평정되리
시는 필경 고려장수들의 높은 뜻과 웅건한 기상을 노래하며 내용적인 련관을 이루었으나 시를 지은 사람들의 마음은 이렇게 흑심과 진심으로 각각 달랐다.…
실로 리성계는 한생을 두길보기를 하며 흑심과 이심으로 살아온 사람이였다.
그 덕에 료동원정군의 부사령관격인 우군도통사의 벼슬과 조정의 최고관직인 문하시중 다음가는 자리의 수시중벼슬에까지 오른 리성계는 마침내 왕위찬탈의 무서운 야망을 품게 되였다.
야욕실현의 첫 단계로 그는 료동원정군을 되돌려세우고 임금과 최영을 군력으로 몰아내였다.
성계는 최영을 제 손으로 묶어서 끌어내면서도 《도통사대감, 세상에 이처럼 기막힌 일이 또 어디 있겠소. 하늘의 뜻이 이러하오니 달리 어쩌는 수가 없소이다.》하고 넉두리를 해가며 대성통곡을 하였다.
그것이야말로 리성계가 얼마나 파렴치하고 능칼진 위선자인가를 극치의 높이에서 보여준 세련된 광대극이였다.
진정 리성계는 수십년세월 단 한번의 좌절도 없이 정계와 군계의 풍랑속을 교묘하게 누비며 오늘의 봉우리에까지 치달아오른 교활하고 영악스러운, 로회하고 야심만만한 늙은 여우(올해 그의 나이는 54살이지만)였다.…
리성계는 또다시 진지한 표정을 띄우고 박위의 결곡하고 단순한 마음을 우롱하기 시작했다.
《공도 아다싶이 본관은 얼마전까지 노방 전역에 나가살던 장수로서 누구보다 공의 심정을 통절히 헤아리고있소.
하지만 공의 제안을 조정의 탁자우에 쳐들어올리자니 자연 나라형편을 둘러보지 않을수 없구려.
수십년세월 줄창 전란을 겪은고로 나라는 피페해지고 국고는 텅텅 비였는데 가도와 산야 그 어디나 류랑하는 백성들과 굶어죽는 시체들이 돌멩이처럼 나딩굴고있소. 그런데다 옹이에 마디격으로 올해에는 혹심한 자연재해로 온 나라 들판이 벌거숭이가 되였으니 그 후과가 장차 어떻게 될지 누구도 가량할수 없소.
오죽하면 전하께서 엊그제 친히 흥왕사의 중들을 대궐에 불러들이여 금강경도량(비오기를 빌어 경전을 읽게 하는것.)을 펴시였겠소.
그 마당에서 본관은 숯불에 팔을 태우며 비가 내리기를 안타깝게 빌었소.
나라와 백성의 고통을 다소라도 덜수 있다면 팔이 아니라 온몸이라도 태우고싶은것이 본관의 진정이요.》
성계는 이마살을 찡그리며 조심스레 팔소매를 걷어올리였다.
피딱지가 덕지덕지 엉겨붙은 성계의 시꺼멓게 탄 팔이 드러났다.
박위는 호흡장애같은것이 느껴지는 순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아아니, 대감께서 몸소 팔까지 태우시며 기우제를 지내셨단 말입니까?!》
성계는 비통한 음조로 박위의 말을 받아넘기였다.
《어쩌겠소. 그런 일은 절차에도 없는것이지만 속이 끓어번져 견딜수가 없더란 말이요.
공도 알겠지만 원래 기우제라면 종묘와 사직에 제사를 지내고 다섯마리 룡에게 제사를 지낸 다음 련못의 물독속에 도마뱀을 띄워놓고 〈도마뱀아! 도마뱀아! 구름을 일으키고 안개를 토해내여 비를 펑펑 퍼부어야 너를 놓아보내리라.〉하고 소리소리 지르면서 바라를 치는게 정해진 절차가 아니겠소.
헌데 그 번다한 절차를 꼬박꼬박 다 시행해도 비가 오지 않으니 너무 안타까워 본관의 살을 태워본거요.
애국이 지극하고 애민이 지극하면 하늘도 감응할게라―하고 말이요.》
박위의 가슴은 훗훗하게 더워났다.
리성계야말로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불태우는 애국애족적인 관리, 정의로운 인물이라는 의식이 따겁게 속을 파고들었다.
성계는 석쉼한 음성으로 계속하였다.
《…이러한 형세로 하여 본관은 누구보다 박공의 심정을 잘 알면서도 지금 당장 대마도원정건을 들어올릴수 없소그려.
하지만 박공, 원정에 관한 문제는 조속히 전하께 품달하겠소.
이미 전하께서도 알고계시지만 내가 직접 나서서 전면적인 리해가 가도록 두번세번 설유를 해드리겠소.
그러니 공은 절대로 맥을 놓지 말고 이미 경상군영에서 시작한 원정준비를 계속 다그치면서 나라가 허리를 펼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주오.
단언하건대 원정은 반드시 가까운 시일안에 성사될것이요.》
리성계의 속심을 알리 없는 박위는 나라와 백성들의 일을 두고 가슴태우면서도 대마도원정에 깊은 관심을 돌리는 리성계가 눈물겹도록 감사하였다.
박위는 실상 리성계와의 상면에서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했으나 전혀 그것을 감촉하지 못했다.
도리여 격정으로 가슴이 들먹거리여 바이 자신을 진정할수 없었다.
박위는 리성계의 당부대로 나라가 허리를 펼 때까지 조금 기다렸다가 원정을 단행하는것이 여러모로 옳을것이라고 자신을 납득시켜버리였다.
그러고도 모자라 박위는 자기자신이 기만과 롱락을 당한 수난자임에도 불구하고 교란자인 성계에게 진심으로 되는 위로의 말까지 덧붙이였다.
《대감, 너무 상심마시오이다. 대감과 같은 충신들이 충의로 일관된 정사로 전하를 받들어나간다면 우리 고려국은 가까운 앞날에 반드시 강성불락의 나라로 다시금 우뚝 솟을것입니다.》
성계는 색날은 전복의 앞자락을 여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모든 일이 자기의 의도대로 결속된것이 저으기 흡족한 리성계였다.
박위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성계의 어깨너머 벽면에 쌍으로 내리드리운 두폭의 족자가 또렷이 안겨왔다.
《충을 위해 살고 의를 위해 죽으리라》, 《수신제가후 치국평천하》(제몸을 돌본 후에 나라를 다스린다)
초자로 휘갈겨쓴 족자들의 글발 역시 성계의 진심을 반영한것이 아니라 위선과 기만으로 충만된 그의 얼룩진 마음을 가리워주거나 윤색해주는 여러가지 소도구들중의 하나였다.
하지만 박위에게는 그것 역시 성계의 진심에서 우러나온 인생의 의미깊은 병장명계(병풍에 쓴 좌우명)처럼 생각되여 다시한번 크게 감복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