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 회)

제 1 장

14

 

조촐한 방안의 왼쪽벽에 동그랗게 뚫린 뙤창너머에는 한쪼각의 밤하늘이 그림처럼 까닭없이 드리워있었다.

거기서는 쥐여뿌린듯이 무수한 별들이 은싸래기처럼 바글바글 끓고있었다.

큰 별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작은 별들은 헤아릴수없이 많았다.

살아움직이는 물체라고는 그것밖에 보이지 않는탓인지 아니면 고려에서 바라볼 때나 다름없이 유난스러운 정체를 발산하는 낯익은 별들이 정에 겨워선지 하나하나가 다 의미깊게 안겨왔다.

(저기 먼 웃쪽에서 유난히 빛나는 제일 큰 별은 나라님이시고 그곁에서 반짝이는 작은 별들은 나라님의 거동길을 따라나선 룡호군의 군사들이라고 해야 할거야.

그렇다면 왕별곁에 초간히 떨어져있는 조금 큰 별은 현중이 아버님이라고 봐야지.

그뒤에 바투 따라선 애기별들은 군영의 군사들과 귀여운 현중이?!…

그럼 나 리옥은 어디에 있는거나?

아, 저기 맨 구석에서 애처롭게 파들파들 떨고있는 자그마한 저 별,

그만에야 기다란 은꼬리를 끌며 곤두박혀 떨어지는 저 별이 바로 내가 아닐가.

아아 그래, 나는 정녕 저 별처럼 인간세상에서 떨어져서 지옥속으로 굴러내리였어.

이제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가?!)

대마도에 끌려온 리옥이 정신을 차리자 제일먼저 안겨온것은 동그란 뙤창속에 들어있는 한쪼각 밤하늘, 그 밤하늘에서 반짝이는 무수한 별무리였다.

리옥은 그 별무리를 살펴보며 절망적인 사색을 두서없이 이어가고있었다.…

…리옥은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자기가 겪은 며칠간의 일이 도무지 현실처럼 실감되지 않았다.

꼭 악몽속에서 겪은 일같았다.

(어떻게 되여 아늑한 시골동네에서 조용히 살아가던 나의 운명이 하루 아침새에 이렇게 엄청나게 뒤번져지였는가?!

이것이야말로 귀신의 작희가 아니고 무엇이랴?…)

리옥은 절망과 공포, 불안과 위구가 가슴을 옥죄일수록 이 땅에서의 래일이 소름끼치게 두려웠다.

그런중에도 고국에서 흘러간 나날, 다시는 돌아올것 같지 않은 지난 나날들이 사무치게 그리웠다.

…그날 아침 여느때없이 일찍 자리에서 일어난 리옥은 대숲속에 청동거울쪼박처럼 박혀있는 정갈한 샘둥천에 나가 말끔히 세면을 하고 나서 난생처음 얼굴치장에 달라붙었다.

그러지 않아도 하얀 얼굴에 조개껍질을 보드랍게 가루내여 만든 조개분을 고루 문대기였다.

윤기가 자르르하게 도는 검은 머리에는 향긋한 동백기름을 조금 진할사하게 발랐다.

그다음은 앞가슴우로 태머리를 끄당겨놓았다.

몇번이나 풀었다꼬았다 하던 끝에 실하지도 여위지도 않게 탐스러이 땋아지자 머리태끝에 장농깊이 간수했던 새 다홍색댕기를 곱게 드리웠다.

얼굴치장, 머리치장에 이어 몸치장까지 꼼꼼히 하고난 뒤 잠시 할바를 잊고 서성거리던 리옥은 자꾸만 들썽거리는 마음을 눅잦힐양으로 앞마당에 나섰다.

구기자포기마다 질벅하게 물을 주었다.

몽당비로 앞마당을 쓸고 걸레로 마루를 닦았다.

다시 방으로 들어온 리옥은 짓다가 만 현중의 무관복을 꺼내들었다.

바늘을 들고 골무까지 끼였으나 왜서인지 일손이 놀려지지 않았다.

저로서도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고 허둥거리는 자기의 모양이 우습기도 하고 민망스럽기도 하여 절로 허거픈 웃음이 나갔다.

조금후 단단히 마음을 조여먹은 리옥은 화살을 벗겨들고 뒤뜰로 들어갔다.

했으나 활쏘기에도 집념할수 없었다.

한껏 부풀어오른 처녀의 마음은 하냥 박위에게로 달음쳐갔다.

오늘은 해변고을들을 돌아보러나간 박위가 군영으로 오게 된 날이였다.

박위가 군영에 들어서면 현중은 그 즉시 여기 죽촌으로 달려올것이였다.

어쩌면 박위가 직접 이곳에 나올지도 몰랐다.

그렇게 되면 보름전의 그날 밤 자기가 불타는 마음을 통으로 기울이여 써올린 편지의 회답을 받게 될것이였다.

말로든 글로든…

헌데 그 회신은 과연 어떤 내용일가.

찬동일가, 거절일가?!…

얼굴생김새는 준수해보이기도 하고 위엄있어보이기도 하지만 속마음은 깊고 너그러운 박위는 필시 절절한 자기의 마음에 찬동을 보낼것 같았다.

어찌 생각하면 노상 군사일에만 집착하는 딱딱하고 드바쁜 그의 생활태도로 보아 거절할것 같기도 했다.

찬동은 더 말할것없이 기쁠것이요, 거절은 제일로 괴로울것이였다.

아니, 씹어 생각해보면 꼭 그럴것 같지도 않았다.

박위가 선선히 찬동한다면 일변 기쁜중에도 다른 한편으로는 두려울것 같았다.

그가 거절한다면 한켠으로는 슬프면서도 다른 한켠으로는 다행스러울것 같았다.

한참이나 번거로우면서도 환희로운 사랑의 감정에 빠져있던 리옥은 자기의 살진 귀밥이 따갑게 달아올랐음을 의식하자 살풋이 얼굴을 붉히며 살래살래 도리머리를 저었다.

(무슨 녀자의 마음이 이렇게 경망스러울가.

내가 이렇게 싱숭생숭해가지고 마음을 진정 못하는것은 나의 됨됨이 천박한탓이 아닐가.

아니, 그렇지 않을거야. 나는 지금 그 어떤 찬동이나 거절을 두려워하는것이 아니라 몰리해를 겁나하고있어.

그걸 어떻게 천박하다고 볼수 있으랴.

그래, 나의 청순한 진정이 전혀 다른 뜻으로 곡해된다면 그것이야말로 가장 비참하고 가슴아픈 일일거야.…)

겉모양은 아련하나 내성적인 가슴속에는 풍만한 정서와 도담하고 열정적인 성품이 넘치도록 그득히 들어있는 리옥은 자기로서도 알길없는 슬픔과 기쁨에 잠기여 상반되는 두 감정의 근원을 찾아보느라고 무던히도 속을 태우고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저벅저벅 앞마당쪽에서 청신한 고요를 짓째며 다급한 발자국소리가 들려왔다.

(아, 현중이가 왔구나!)

가슴속에서 후두둑 새가 깃을 쳤다.

리옥이 높뛰는 가슴을 제어하며 앞마당으로 나가려는데 뒤뜰의 참대숲언저리에서도 소삽한 발자국소리가 났다.

그제서야 리옥은 이상한 느낌, 불길한 예감에 쌓이여 사위를 휘둘러보았다.

허나 때는 이미 늦었었다.

앞뜰, 뒤뜰의 울바자를 타넘고 들어온 왜구들은 리옥을 에워싸고 갈가마귀떼처럼 모여들었다.

한뉘 무관의 집에서 무관들과 어울려지낸 처녀, 어릴적부터 활쏘기와 말타기와 같은 무술을 열심히 련마해온 리옥은 자기가 승산없는 정황에 맞다들렸음을 직감했으나 그렇다고 하여 적들에게 공손히 목을 내댈수는 없었다.

익달된 동작으로 재빨리 살을 메워든 리옥은 맨 앞장에서 다가드는 절구통같이 생긴 왜구의 목대를 겨누고 살을 날리였다.

상대가 마닐마닐해보이는 아녀자라 시물시물 웃기까지 하며 다가들던 절구통은 번개처럼 날아온 리옥의 화살에 멱살을 찔리자 상판에서 징그러운 웃음기를 채 지우지도 못한채 뒤로 나떨어지였다.

리옥은 다시 시위에 살을 메웠다.

순간 뒤쪽에서 달려든 검덕귀신같은 왜구가 처녀의 머리에 검은 자루를 푹 내리씌웠다.

리옥은 새된 비명을 지르며 필사적으로 몸부림을 쳤으나 두억시니떼처럼 달려든 왜구들은 우악스러운 손질로 순식간에 자루속에 든 처녀의 몸을 꽁꽁 묶어버리였다.

아늑한 정적에 묻히여 또 하루의 생활을 즐겁게 꿈꾸던 죽촌마을의 곳곳에서 급작스레 무엇이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 사람들의 아우성, 비명소리가 귀따갑게 터져올랐다.

초가이영과 나무기둥, 천뭉테기 같은것이 타는 소리가 황황 들려오고 후끈후끈한 열풍이 밀려드는 소리가 훅훅 울려왔다.

리옥은 자기의 몸이 말달구지우에 허궁 날아 떨어지는 순간 그만에야 의식을 잃고말았다.

그가 처음으로 정신을 차린것은 다락배의 갑판우에서였다.

간신히 눈시울을 올리고보니 왜구의 다락배는 기세좋게 물살을 헤가르며 왜땅쪽으로 미끄러져가는데 갑판우에 패패로 모여앉은 왜구들은 저들끼리 시시덕거리며 술을 퍼마시고있었다.

리옥은 순식간에 자기가 어떤 지경에 처했는가를 포착하였다.

수치와 모욕을 모면하자면 죽든살든 바다물에 뛰여들어야 한다는 발작적인 충동이 떠올랐다.

리옥은 무작정 몸을 솟구쳤다.

무엇인가 온몸을 세차게 나꾸어채는듯 한 느낌이 들었다. 그제서야 리옥은 자기의 몸이 돛대에 꽁꽁 묶이웠다는것을 알아차리였다.

리옥은 피가 나도록 아프게 입술을 깨물며 맥없이 고개를 푹 내리떨구었다.

다시금 까박까박 의식이 흐려들었다.

이것은 결코 리옥의 기질이나 속심지가 섬약한탓이 아니였다.

리옥은 숫눈처럼 깨끗하고 샘물처럼 정갈한 처녀였다. 불의라면 추호도 용납할줄 모르고 정의라면 온몸을 태워서라도 지키려드는 강개하고 정열적인 녀자이기도 했다.

하기에 그는 자기의 눈앞에 수치와 모욕의 진구렁이 꺼멓게 입을 벌리고있다는것을 깨닫자 심장이 터져나갈듯 한 극렬한 분노와 반발감에 휩싸이였다.

바로 그래서 홀연 의식을 잃어버리였다. 까마귀는 구린내나는 오물더미우에서도 먹을것을 헤집어내며 살수 있지만 물새는 맑고 푸른 물과 청신한 공기를 떠나서는 순시도 살수 없지 않는가?!…

…세월의 흐름은 정지되고 세상만물은 순환의 섭리를 망각한채 죄다 화석으로 굳어진듯싶었다.

그속에서 또 하나의 석상으로 변한듯 까딱없이 앉아있는 리옥의 명상적인 눈에서는 맑디맑은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내리고있었다.

생각탓인지 뙤창너머에서 울리는 밤바다의 파도소리는 한층 높아진듯싶었다.

예전에는 으스산하게만 생각되던 밤바다의 파도소리조차 지금에는 애틋한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아! 저 파도를 가르며 가고 또 가느라면 이삼일도 안되여 그리운 고국땅에 가닿을것이다.

현중이가 있고 현중 아버님이 계시는 곳, 오늘도 오가는 바람결에조차 이 딸의 명복을 실어보내고계실 아버님의 령혼이 있고 구기자열매들이 어우러진 아늑한 내 집이 있는 그곳에…

아아! 현중 아버님! 대체 이 어인 일이옵니까!

지금껏 어느 누구에게도 죄를 끼친적 없는 이 소녀에게 이런 악몽같은 현실이 차례진단 말입니까!

현중 아버님! 흉폭한 왜구들은 이제 소녀에게 상상만 해도 몸서리치는 모욕과 수치를 강요할것입니다.

소녀는 아무리 큰 시련이라도 능히 견디여낼수 있지만 수치와 모욕은 비록 하잘것없는것이라 할지라도 들쓰고는 한시도 살수 없습니다.

이제 와서 소녀는 죽음을 택하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기쁜 일도 있었고 서러운 사연도 있었지만 아직은 너무도 많은 미련이 남아있는 이승입니다.

그 이승과 서둘러 작별하자니 가지가지 한과 원이 얼음덩이처럼 차겁게 이 가슴에 맺혀오릅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가슴아픈것은 평생을 조용히 살아오시다가 요란한 폭음과 함께 인생의 문을 소리없이 닫으신 아버님처럼 그렇게 살지도 못하고 또 아버님의 원쑤도 갚지 못한채 값눅게 세상을 하직하는것입니다.

…현중 아버님이 지방순행을 떠나시기 전날 저녁 소녀는 열번, 스무번을 바재이던 끝에 그리도 힘겨운 글월을 써올렸습니다.

그것이 옳은 례절인지 바르지 못한 행실인지 지금도 소녀는 똑똑히 가늠할수 없습니다.

하오나 진정을 고하건대 소녀는 당신의 중하신 군영일을 성심으로 도와드리고 현중이의 성장을 성의껏 살펴주는것이 곧 아버지의 원쑤를 갚는 길이요, 고려땅에 태를 묻은 녀자의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헌데 불행한 이 소녀는 당신의 대답말씀을 들어보지도 못하고 이승을 떠납니다.

그것 역시 무척 한스럽고 애석한 일입니다.

현중에게 무관복을 채 지어주지 못한것도, 그에게 있는 정을 다 기울이지 못한것도 무척 서운합니다.

장군! 소녀는 비록 왜땅의 한구석에서 빛없이 스러지지만 당신께서 가끔이라도 이 세상에 당신을 열렬히 존경하고 사랑하는 녀자가 있었다는것을 추억해주신다면 그것만이라도 소녀는 행복할것입니다.

모쪼록 당신께서 내내 건강하시여 왜구와의 싸움에서 더 큰 공을 세우시기를, 그래서 소녀의 쌓이고 맺힌 원한도 백배로 풀어주시기를 간절히 바라옵니다.…)

…리옥은 자정이 훨씬 지난 뒤에야 잊지 못할 그날 박위를 맞이하기 위해 그처럼 가슴설레이며 정히 드리웠던 다홍색댕기와 머리태를 감싸쥔채 살풋이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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