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회)

제 1 장

9

 

휘영청 밝은 보름달이 중천을 바라고 둥깃둥깃 떠오르자 앞쪽의 솔숲에도, 동쪽내가의 버들숲에도, 실실이 내리드리운 버들가지들사이로 빠금빠금 내다보이는 잔잔한 내물우에도 희푸른 달빛이 가득 덮이였다.

내가는 고요하고 저녁의 대기는 싱그러운 꽃내, 풀내로 그득 들어찼는데 고르로운 풀밭우에 펼쳐진 돗자리우에는 류두명절날음식이 울긋불긋하게 차려져있었다.

그런데다 곁에는 인물곱고 기예 뛰여나며 고임성과 붙임성이 뛰여나게 좋은 김해관가의 1등명기 매화가 해반주그레한 얼굴에 함박꽃같은 웃음을 피우고 바싹 다가붙어있었다.

빠진것없이 차려져있는 류두명절의 저녁상이요, 손만 내뻗치면 무엇이든 집을수 있는 풍성하고 아늑한 좌석이였다.

하건만 단정하게 올방자를 고이고앉아 휘휘 사위를 둘러보는 호백의 희좁은 얼굴에는 짙은 수심이 덕지덕지 발려있었다.

아까부터 호백의 음울한 기색을 할깃할깃 훔쳐보던 매화는 마침내 사내의 척 늘어진 팔을 가볍게 잡아흔들며 간지러운 애교를 떨었다.

《아이유 원님, 어인 일로 이리도 심란해하시오이까. 오늘이야 년중의 명절중에서도 제일로 운치있고 재미스러운 류두명절이 아니오니까?!》

호백은 멀리 군영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시푸녕스럽게 대답했다.

《이년아, 아무리 운치있고 재미스러운 명절이래도 내가 흥이 나지 않는데야 무슨 소용이냐?》

계집은 앵두알처럼 도드라진 빨간 입술을 살살 감빨며 더한층 아양을 떨었다.

《어야나! 커다란 김해고을을 떡반죽처럼 쥐락펴락하시는 원님께서 이 기쁜 날 흥이 나지 않으시다니 이 어인 일이오니까?》

《이년아, 자발스러운 소리 작작해라. 속 상한다.》

《아유! 말씀을 지망지망히 해서 죄송하오이다.》

호백의 등을 문지르고 배를 쓰다듬으며 갖은 애교를 다 부리던 매화는 호백이 눈을 부라리며 짐짓 노여운체 하자 가장 황송한듯 나부시 고개를 숙이였다.

허나 사내다루기를 개떡 주무르듯 하는 계집은 벌써 호백의 얼어붙었던 속이 흐물흐물 녹아내리고있음을 여실히 느낀듯 살그니 입을 가리고 뜻있는 미소를 머금었다.

조호백이 경상군영에서 상원수벼슬을 지내다가 여기 김해고을 부사로 돌아앉은지는 올해까지 꼭 다섯해가 되였다.

호백이 상원수노릇을 할 때까지만 해도 매 도의 군영에는 상원수요, 도원수요, 병마원수요 하는 동급의 군사장관들이 거의 10여명이나 되였다.

그로 하여 지방군은 도저히 통일적인 지휘체계를 수립할수 없었다.

일이 제기되면 매 원수들은 저마끔 마음내키는대로 령을 내리고 그에 따라 군사들은 방향없이 밀려다니였다.

당시 어느 고을 만호로 있던 박위는 누구보다 먼저 이러한 페단을 포착하고 임금에게 매 도에 한명의 원수를 두고 그에게 도안의 모든 군사들이 전적으로 복종하게 하자는 내용의 건의서를 올리였다.

임금은 최영과 거듭 토론한 후 박위의 건의를 조정의 군사정책으로 집행할것을 명령하였다.

그 바람에 숱한 원수들과 함께 호백이도 상원수자리에서 밀려나 김해부사로 내려앉았다.

사실 상원수에서 김해부사로 돌아앉은것은 거의나 동급조동에 가까왔다.

허나 도의 군사장관을 1명으로 규정하고 모든 원수들을 축출하도록 한 임금의 조치를 최영과 결탁한 박위의 음모로 여긴 호백은 자기의 조동을 무서운 좌천으로 생각하였다.

하여 호백은 이를 으득으득 갈며 군영을 나섰다.

헌데 정작 김해관가의 높직한 동헌마루에 올라앉고보니 최영과 박위에 대한 불만과 증오심은 가뭇없이 사라지였다.

남해와 락동강하류를 끼고있는 김해는 땅이 비옥하고 물자원이 풍부한데다 기후가 온화하여 곡식과 과일이 여느 고장에 비길바없이 잘되였다.

희고 찰기 좋은 김해쌀, 대저벌에서 나는 김해배와 진영벌에서 나는 김해단감은 경향각처에 특히 이름이 높았다.

물고기 또한 없는것없이 다 잡히였다.

명지 앞바다와 록산 앞바다에서 잡히는 칼치와 도미, 전광어와 숭어 같은 해산물들은 덩지가 크고 맛이 특이하게 좋아 나라안에는 물론 나라밖에까지 소문이 파다했다.

헌데 그 모든 희귀한 재물이 호백의 줌안에 들었으니 엎어져도 떡함지에 엎어진다는 항간의 속담은 얼마나 그럴듯 한가. 게다가 걸핏하면 위험천만한 전장에 뛰여들어야 하는 무관의 전복과 칼을 벗어놓았으니 마음은 또 얼마나 편안한가!

워낙 재물이라면 오금을 못쓰는 호백은 우선 고을밖으로 개미 한마리 새나가지 못하도록 단단히 방비책을 세웠다. 하고는 손수 팔을 부르걷고나서서 살살 털을 불어가며 고을안의 알짬들을 찰찰하게 발그집어내기 시작했다.

먼저 합법적으로 내려먹일수 있는 조세와 공물의 액수를 규정액보다 배로 높이였다.

또한 별선이라는 명목으로 각 촌의 술과 어물을 끌어들이고 잡공이라는 명색으로 밤과 대추, 개암과 같은 산열매들까지 끌어들이였다.

호백은 원노릇을 시작한지 불과 얼마 안되여 열칸도 넘는 너렁청한 광속에 각색 재물을 둥덩산같이 쌓아놓았다.

매일과 같이 주지육림에 파묻히여 풍청거리면서 기회가 생기는대로 임금과 조정의 재상들에게 품들여 마련한 뢰물을 섬기고 진상을 올리였다.

우황든 소마냥 껍질만 남은 백성들은 울며불며 원망을 터치는데 저멀리 개경의 만월대 궁궐속에 깊숙이 들어앉은 나라님과 재상들은 호백이를 두고 기특하다, 예쁘다 온갖 칭찬을 다 하였다.

호백은 정녕 살맛이 났다.

부귀는 날을 따라 늘어만 가고 권세는 온 고을에 샅샅이 뻗쳤는데 귀맛좋은 칭찬은 비발치듯 내리지 않는가!

이럴 때 재미나는 골에서 범난다고 호백이 그리도 절치부심을 하던 박위가 경상군영의 원수가 되여 김해로 내려왔다.

호백은 아뜩했다.

얼마간 흐릿해졌던 박위에 대한 반감은 다시금 바람맞은 숯불처럼 빨갛게 살아올랐다.

(그런즉 박위 너는 그때 벌써 여기 군영의 원수자리를 노리고 그따위 얼쑹덜쑹한 건의서를 올렸댔구나.

어쩌면 사람이 그리도 간특하고 모질수 있단 말이냐?!)

호백은 박위에 대한 분노로 이를 갈고 치를 떨면서도 은근히 간이 오무라드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확실히 박위는 두려운 존재였다.

재산이라고는 허리에 찬 칼 한자루밖에 없으면서 그 무엇도 바라지 않고 오로지 군사일에만 전념하는 청렴하고 강개하고 헌신적인 박위의 눈앞에서 예전처럼 마구 으르렁거리며 갈퀴질을 해댈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하루아침새 욕심스러운 마음과 생활습벽을 헌데딱지 뜯어내듯 떼내칠수도 없는노릇이였다.

호백은 군영의 눈치를 슬슬 살피면서 조심스레 공안(고려시기 백성들로부터 수탈한 국가세입을 기록한 장부)의 세입이 부족하다는 명목으로 인납(다음해공물을 미리 받는것)을 실시하였다.

수조지(정부로부터 전세를 내기로 하고 빌린 땅)의 규정액도 살금살금 불구어놓았다.

그밖에도 가지가지 교묘한 오그랑수를 계속 펼쳐나갔다.

하지만 아무리 기묘한 착안이나 음모라 해도 꼬리가 길면 잡히는법이다.

협잡과 권모술수가 하나, 둘 들통이 나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박위는 자기가 직접 관가에 찾아오거나 윤통이 같은 감때사나운 군영장수들을 보내여 오금을 박군 했다.

《왜구의 침탈로 고통을 받고있는 백성들인데 관가에서까지 핍박을 해서야 어디 살아내겠소?

관가의 공사에 대해 잘 모르기는 하겠소만 웬간하면 조금 늦춰주시구려.》

《부사도 아다싶이 이 고장 백성들은 장차 군사로 쓰거나 군사일의 협력군으로 써야 할 사람들인데 초보적인 생계야 살펴주어야 하지 않겠소?》

호백은 차츰 사지가 가드라들었다.

권세도 예전처럼 마구 휘두를수 없었고 부귀도 예전처럼 마음껏 누릴수 없었다.

그럴수록 박위에 대한 반감과 격분은 부풀어올랐다.

더우기 요즘에 와서 군사일의 판이 더욱 크게 벌어지자 이제는 그만 박위의 이름만 들어도 이가 으득으득 갈리고 소름이 오싹오싹 내돋았다.

박위는 관가에 대고 내라는것이 많기도 했다.

군사들을 뽑아올려라, 군량과 반찬감을 바쳐라, 각색 장공인들을 골라보내라, 배널과 쇠쪼박따위를 모아바쳐라.

지어 염초를 만드는데 필요한 나무재까지 긁어내라.…

부르는대로 꼬박꼬박 섬겨바칠수는 없었으나 그렇다고 하여 번마다 모르쇠를 할수도 없었다.

그래 초기에는 눈치를 보아가며 미움이나 사지 않을 정도로 졸금졸금 보내주었다.

그러자 박위는 만날 때마다 건건이 찍어가며 우뢰질을 하였다.

거짓열성이라도 보이지 않고서는 견디여배길것 같지 못했다.

그 거짓열성바람에 피를 졸이며 뭉그려들인 갖가지 재물이 뭉텅뭉텅 관가밖으로 떠실려나갔다.

그때마다 호백은 생살점이 뚝뚝 떨어져나가고 선지피가 줄줄 새나가는듯싶었다.

괴로움과 고통은 그뿐만이 아니였다.

요즘 박위와 군영의 장교들, 지어 보잘것 없는 군졸들까지 자기나 관가의 구실아치들을 소 닭보듯 하면서 걸핏하면 시비질, 엇드레질을 하려 들었다.

죽촌을 다녀온 그날 저녁도 호백은 밤늦도록 비단이부자리에서 궁싯거리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고을관하의 한개 마을이 알쭌한 페허로 화한것도 기가 막혔지만 그보다는 자기가 박위와 윤통의 샅짬에 끼워 짚새기공처럼 이리 굴리우고 저리 굴리운것이 복통이 터지도록 분하였다.

(한개 고을의 방백이라면 조정의 재상들과도 떳떳이 항례(대등한 례로 대하는것.)를 할수 있는 나라의 당당한 관헌인데 이제는 시골의 무관나부래기들까지 내놓고 모욕을 하고 조롱을 하자고드니 이게 귀구멍이 막힐 일이 아닌가.

그놈의 군영은 왜 하필 우리 고을안에 들어와가지고 이 야단인가.

뭐니뭐니해도 제일로 괘씸한 놈은 박위 그 작자로다.)

군량바리를 마련해가지고 군영에 갔던 배뚱뚱이 호장이 매를 얻어맞고 징징거리며 돌아온 날 밤에는 너무도 기가 막히여 혼자 화술을 퍼마시며 기염을 토하였다.

《윤통이 너 이놈! 무엇이 어쩌고 어째? 〈너희 골 부사대신 매를 좀 맞아보라.〉고? 그러니 나를 때릴수 없어 호장을 두드린단 소린데…

어이구, 네놈이 그따위 불공설화를 늘어놓으며 몽둥이를 휘둘러댈 때는 이 조호백을 거랑말코지쯤으로 여긴다는 뜻이 아니냐.

오냐, 어디 두고보자.

네놈이 그렇게 하늘 높은줄 모르고 마구 날뛰는것도 구경은 박위를 등대고 하는 수작이렷다.

이놈들, 소금도 쉴 때가 있고 박달나무도 좀쓸 때가 있다더라. 어느때건 때가 오거든 내 네놈들을 모짝 한바리에 처실어서 저 율하천의 룡소에 꺼꾸로 처박아넣을테다.》

호백이도 물론 박위의 덕을 아주 모르는것이 아니였다.

오래전에 자기의 생명을 구원해준것은 더 말할것 없고 근일에 와서 박위의 군영이 김해에 있기에 이 고장에는 왜구의 침노가 극히 드물다는것도 잘 알고있었다. 죽촌참변의 책임도 박위가 제 혼자 홈빡 뒤집어쓰고 나섰기에 그에게는 조정의 질책과 비난이 소나기처럼 쏟아져내렸지만 자기에게는 비방울 한꼬치 닿지 않았다는것 역시 모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여 박위에 대한 분노와 반감이 감소돼가는것은 결코 아니였다.

아니, 박위에게 입은 덕, 입고있는 덕은 날이 갈수록 별치 않게 생각되는 반면에 박위로 하여 당한 손해, 겪고있는 손해는 바람먹은 숯불마냥 더욱 따갑게 살아올랐다.

분노는 반격과 복수의 의지를 격증시켰다.…

…호백은 희푸른 달빛에 묻혀있는 내가의 고즈넉한 밤경치를 얼없이 살펴보며 검칙칙한 사색을 여념없이 씹어나갔다.

(장차 이 일을 어쩌면 좋을고?!

재물을 그러모으는 재미도 없고 권세를 휘두르는 멋도 없이 원노릇을 해서 무엇한단 말이냐.

차라리 종형대감께 내직으로 벼슬을 옮겨달라고 품해보는게 어떨가.

(호백은 시골구석에 박혀있으면서도 얼마전 좌군도통사로 료동원정에 나갔던 자기의 사촌형 조민수가 리성계와 함께 원정을 포기하고 개경에 돌아온 사실을 환히 알고있었다.)

아서라, 아직은 종형대감의 일도 조금 더 두고봐야 한다.

요즘 리성계대감이 무엇때문인지 우리 종형을 곱지 않게 본다던데 그에게 붙어돌아가다가 만일 종형이 밀려나게 되면 내게도 그 불똥이 튀게 될게다.

하다면 이 자리에 그냥 붙박혀있을수도 없고 내직으로 옮겨앉을수도 없으니 이야말로 호미난방이 아닌가?!…)

《아이고 원님, 이 팔을 어이 하오리까. 원님께서는 어이하여 이 매화를 이다지도 하대하시오이까?!》

매화의 간드러진 목소리가 바로 코앞에서 울려왔다.

그제서야 깊은 상념에서 깨여난 호백은 번쩍 눈을 치떴다.

술잔을 받쳐든 매화의 하얀 두손이 턱밑에서 살래살래 춤을 추고있었다.

호백은 얄팍한 입술에 연한 웃음기를 띄우며 헌헌히 술잔을 받아들었다.

《이 애 매화야, 내가 너를 박대할 까닭이 있느냐. 마음이 하도 어수선해서 그러는게다.

누구니누구니해도 내 마음을 위로할건 다만 매화와 술뿐인가 하노라.》

말을 마친 호백이 술잔을 쭉 찌워버리자 매화는 기다란 저가락으로 수란(삶은 햇보리와 농마를 오미자물과 꿀로 반죽하여 만든 류두날 음식.) 한덩이를 집어 사내의 손에 쥐여주었다.

하고는 미색이면 만사통과라는듯 서슴없이 호백의 무릎우에 말궁둥이같은 엉치를 넌떡 올려놓으며 종달새 열씨까듯 종알거리였다.

《원님, 소녀가 듣자하니 요즘 군영의 박장군께서 가는 곳마다 군사일을 벌려놓고 백성들을 못 견디게 지지고 볶는다던데 혹여 그로 해서 원님의 마음이 상하신게 아니오니까?》

술기운이 퍼지여 툭툭 높뛰는 호백의 가슴속으로는 계집에게 무작정 너그러워지고싶은 얼간이의 자비심같은것이 그들먹이 차올랐다.

《헛허, 네년이 신통맹통하게 알아맞추는고나. 정말이지 박위라는자가 내 고을을 타고앉아 좌지우지하고있으니 내 마음이 어찌 순편할수 있겠느냐?!》

《아유, 원님도 참 답답하셔. 박장군의 속내를 뻔히 아시면서도 곱게 두손 동여매고 앉아 강건너 불보듯 하시니, 원 참.》

《이년아, 그놈이 노상 임금의 어명과 병부의 군령을 부작처럼 휘두르며 날뛰는데 뭐라고 대거리를 한단 말이냐?

소갈머리없는 소리 작작해라.》

호백의 무릎우에서 그네라도 타듯 살집좋은 궁뎅이를 이리저리 흔들며 아양을 떨던 매화는 갑자기 두눈이 동그래지며 오똑 굳어지였다.

《소녀가 소갈머리 없다니요?

원님이야말로 천군만마를 호령하시던 상원수시절의 그 기상을 죄다 버린듯 하오이다.》

호백은 매화의 당돌한 대꾸질에 부아가 난듯 짐짓 눈을 흡뜨더니 이내 낯색을 풀며 당치도 않은 허세를 부리였다.

《이런 살똥스러운 년 보았나. 이년아, 내 비록 검을 놓기는 했으나 아직도 상원수시절의 기상은 그대로 가지고있느니.

이제라도 호풍완우(바람을 부르고 비를 몰아오는 재주)도 할수 있고 둔갑장신(몸을 감추는 재주)도 할수 있단 말이다.》

《그렇다면 어이하여 원님을 시동다루듯 하려드는 박장군을 그냥 내버려두나이까?

원님을 극진으로 보살펴드리고 따르는 소녀는 그게 안타깝소이다.》

취기에 젖어 떨떠름해진 사내를 제 마음대로 주물러대던 매화는 이제야말로 가장 긴요한 이야기를 한다는듯 사뭇 긴장된 시선으로 사위를 휘둘러보더니 앵두알처럼 빨간 입술을 호백의 귀바투에 가져다붙이였다.

《원님, 듣자니 요즘 박장군이 왜구를 치겠노라며 분주탕을 피우고있는데 그게 사실은 저들의 역적모의를 가리우기 위한 방편이라고…

알만 한 량반들은 모두 뒤에 돌아앉아 수군수군한답니다.》

《무웨? 역적모의? 그게 무슨 소리냐?!》

호백은 자기의 곁에서 금방 화약무지가 터지기라도 한듯 깜짝 놀라며 갈고리눈을 한껏 흡떴다.

(이년이 안면이 너르다더니 못 물어들이는 소문이 없구나.

박위가 역적모의를 한다?! 그러니 조정을 뒤집어엎을 반정을 준비한다는 말이 아닌가.

그게 정말일가, 아니면 매화가 나를 돕고싶은 마음이 하도 간절한 나머지 그런 생먹은 소리를 지어냈을가?)

호백의 가슴은 쿵쿵 높뛰였다.

호백이 알건대 매화는 전라도 령광의 어느 촌락에서 살다가 몇해전에 왜구에게 량부모를 다 잃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다가 김해에 들어와 어느 아전의 천거로 기적에 오른 녀자였다.

호백은 올해 정초 초닷새 자기의 생일잔치때 처음으로 매화를 보게 되였는데 첫눈에 그만 홀딱 반해버리였다.

매화의 나이는 올해 들어 열아홉, 휘친하게 쭉 빠진 몸에서는 한창 피여나는 매화꽃같은 싱싱한 기운이 약동하는데 요염하게 생긴 이쁜 얼굴에서는 노상 사랑의 욕구같은것이 지글지글 끓고있었다.

그때부터 호백은 기회가 생길 때는 물론이요 기회가 없을 때도 우야 기회를 만들어가지고 매화를 제곁에 불러들이군 했다. 매화를 끼고있으면 시간가는줄을 알수 없었다.

함께 술을 마시기도 즐겁고 이야기를 나누기도 재미있었지만 시들시들한 호백의 몸에 향내풍기는 매화의 단단한 육체가 밀착해 들어올 때면 이루 형언키 어려운 무아경의 쾌감이 전신을 휘감았다.

관가의 이 구석, 저 구석에서 《우리 원님이 정사는 아주 전페하고 매화에게 빠져 세월 가는줄 모른다.》는 뒤소리가 쉬쉬 나돌았다.

그런데도 호백은 조사때마다 상판에 개가죽을 뒤집어쓰고 나서서 《매화로 말하면 량부모를 다 왜구에게 잃은 불쌍한 애인데 우리가 잘 돌봐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나도 그 애 일에 깊이 관심을 돌리느라 하지만 너희들도 그 애를 각별히 살펴주어라.》 하고 자기가 마치 양아버지노릇이나 하는듯이 얼레발을 떨었다.

일이 이쯤 되고보니 계집에게 혼이 빠진 어리석은 사내들이 대개 그러하듯 호백의 눈에는 매화의 모든 언행이 하나같이 신통맹통하게 보이였다.

호백은 매화가 방금 귀속말로 일러준 말도 훌훌히 스쳐버리게 되지 않았다.

아니, 매화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그것은 캄캄한 어둠속에서 뜻밖에 얻어가진 홰불마냥 무등 반가왔다.

호백은 박위가 음흉하게 뒤에 돌아앉아 반역음모같은것을 꾸밀 사람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사사건건으로 자기를 괴롭히는 박위를 일격에 제거할수 있는 단서가 생긴 이상 그것을 버리고싶지 않았다.

아니, 가능한껏 확장하여 본때있게 써먹어야 했다.

호백은 너무도 긴장하여 돌부처처럼 굳어진채 당치도 않은 제나름의 리치를 억지다짐으로 전개해나갔다.

(…세상에 역적모의를 할 놈이 어디 따로 있다드냐. 박위쯤 그악스러운 놈이면 역적질도 능사로 할수 있으렷다.

그렇지, 그놈이 작년에 해변고을들에 상비군을 내오자고 제의를 한것도 지금 생각해보니 그저 일이 아니다.

요즈음 불시에 군사일의 판을 크게 벌리는것도 반역을 바싹 다그치려는 수작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시각빨리 역적고변을 해야 한다. 조정의 형세인즉 때마츰하다.

리성계대감이 회군한 후 임금은 왕좌에서 밀려나고 최대감은 권력의 자리에서 쫓겨났으니 때는 누구도 세상일의 꼬리대가리를 판별할수 없는 때다.

이런 때 고변을 하면 십중팔구 내 뜻대로 성사되리다.)

사람이 약으면서도 경망스러운 호백은 이렇게 결심이 서자 금시 성공이 눈앞에 다가온듯싶었다.

속이 훅훅 달아오르고 숨이 헐헐 가빠났다.

허나 저로서도 엄청나게 생각되는 자기의 비밀한 속내를 함부로 발설하고싶지 않았다.

겁이 나기도 하고 아직은 모든 일을 좀더 무르익혀야겠다는 조심스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한참이나 모주 먹은 수돼지마냥 어깨를 들썩거리며 헐헐 가쁜숨을 내불던 호백은 다소 마음이 진정되자 무슨 장난이라도 하듯 매화의 하얀 볼을 다독이며 짐짓 딴전을 부리였다.

《이 애 매화야, 설마하니 박장군께서 역적모의를 하겠느냐?

항간에 떠도는 소리를 그대로 믿어서는 못쓰느니.

자, 그런 말은 이제 그만하고…

오늘이야 동류두목욕날인데 동쪽내가에 나가 머리를 감고 몸을 씻어 부정을 말끔히 털어버려야지.

액막이술은 이미 마신셈이니 이제 목욕만 정히 하면 이런저런 시름거리도 날아나겠지.…》

호백은 아까와는 전혀 딴판으로 활기있게 주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어서는 참 얼결에 바다쪽으로 시선을 돌린 호백은 갑자기 후두두 턱을 떨며 비명같은 소리를 내질렀다.

《저게 무어냐, 엉? 저게…》

지금껏 호백의 표정을 놓칠세라 여겨보던 매화는 침착하게 치마폭을 휘감아쥐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여기 록산은 크고작은 지류들을 수없이 품어안고 흘러내리는 락동강의 드넓은 하류와 끝간데없이 펼쳐진 남해가 한눈에 바라보이는 평야지대였다.

그러니 여기 내가의 두두룩한 등성이우에서는 락동강하류와 바다가가 그림처럼 선명하게 내다보이였다.

역시 달빛이 하얗게 내린 바다가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와와 소리까지 질러대며 끓고있는데 그 광경에 호백은 그리도 놀란것이였다.

주의깊게 바다가를 살펴보던 매화는 놀라기는커녕 싸늘한 미소를 띄우며 씹어뱉듯이 말하였다.

《요즘 군영군사들은 저렇게 밤에도 배를 뭇고 화약을 뽑느라고 복새를 떨고있소이다. 듣자니 대마도로 쳐나갈 준비를 차린다는데 그게 혹시 저들의 반정준비를 가리우려는 수작이 아닌지… 누가 알겠소이까?》

매화는 박위네가 대마도원정을 준비한다는 소리는 누구에게서도 들은적 없건만 호백을 더욱 자극하기 위해 생각나는대로 마구 주어섬기였다.

아니나다를가 호백은 다시한번 크게 놀라 염소수염이 매달린 강파른 아래턱을 후두둑 떨었다.

그의 뇌리속에서는 연해 섬광같은것이 번쩍거리였다.

(이게 또 웬떡이냐?

그래, 그렇게 들떼놓고 역적고변을 할게 아니라 박위가 그 무슨 대마도원정준비를 차린다는 방편뒤에서 반역을 준비한다고 하면 얼마나 그럴듯 한가?!

정말 박위 저자가 반역을 하기는 하려는가부다. 그렇지 않고야 저다지 기를 쓰고 날뛸리가 있겠는가. 한즉 일각이 여삼추로다.)

호백이 오늘 관가에서 수십리나 떨어진 여기 록산으로 조용히 나온것은 고요한 내가에서 젊고 예쁜 기생년을 짓주무르며 울적한 심사를 달래보려는 욕망도 있었지만 보다는 군영의 동태를 제 눈으로 살펴보고싶은 아기뚱한 마음이 작용했기때문이였다.

헌데 바늘을 찾다가 송이버섯을 발견한 격이라 할가, 개천을 치다가 금덩이를 얻은셈이라 할가.

록산에 나오자 앉은자리에서 역적고변의 기틀을 물샐틈없이 세운데다 인생의 새 출구까지 명확히 내다보게 되지 않았는가?!

(이제는 무엇을 더 캐고 따질것없이 대마도원정준비를 코에 걸어가지고 역적고변을 해야 한다.

잠시라도 시각을 늦구어서 저 야단스러운 원정준비가 계속된다면 나는 박위네들에게 더욱 괴퍅한 모욕과 행패를 당할것이요, 지금껏 고수해온 재물까지 깡그리 다 털리우고말게다.

박위 너 이놈! 버러지도 밟으면 꿈틀한다는데 온 세상이 다 아는 명관이요, 조민수대감의 사촌동생인 이 조호백이 노상 두손 동여매고 앉아 네놈의 무쌍한 행패를 곱게 당하고있을줄 아느냐.

그리구 윤통이 너 이놈― 네놈도 가재새끼 바위등대듯 박위를 등대고 나서서 무서운것없이 날뛰고있지만 이제 당해보아라.

대가리를 삶으면 귀도 익기마련이라더라.)

호백은 잔뜩 몸이 달아오른 탓에 요즘 새로 류행되는 자기의 양태넓은 새 갓이 풀밭에 구겨박힌줄도 모르고 하염없이 바다가쪽을 노려보고있었다.

희푸른 달빛, 불그레한 화광이 번뜩거리는 저 멀리 바다가에서는 여전히 숱한 사람들이 와와 기세를 올리며 분주하게 돌아가고있었다.

무슨 일을 하는지는 똑똑히 가려지지 않았으나 그것은 장차 호백에게 더 큰 재앙을 가져다줄것만은 분명했다.

이밤 군사들과 백성들의 가슴속에서는 애국의 붉은 피가 끓고있었으나 호백의 흉중에서는 일신의 권세와 부귀를 위해 그 무엇이든 무자비하게 짓뭉개버릴 무서운 흑심이 사품치고있었다.

통통하게 부푼 가슴을 들먹이며 바다가의 군사들과 눈앞의 호백을 갈마보던 매화는 무엇때문인지 미묘한 미소를 띄우며 호백의 어깨우에 치렁치렁 매달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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