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 회)

제 1 장

8

 

…박위가 처음으로 호백을 알게 된것은 20대의 청년시절, 그러니 박위가 무과시험에 나가기 한해전 어느 가을날이였다.

그때 고향고을의 주봉인 달래봉의 버섯골에서 전고에 없던 비상사건이 발생하였다.

도관(고려시기 노비소송을 취급하던 기관)에 근무하는 원외랑(도관의 정6품 벼슬아치) 하나가 노비추쇄(소속노비들을 조사, 재등록하고 그들로부터 신공을 수탈하는 일)를 나왔다가 그만에야 버섯골근처에서 형적없이 사라진것이였다.

원외랑이 그리 높은 벼슬은 아니나 명색은 당당한 조정의 관리라 형체없이 실종되고보니 조정이나 임금이 잠자코 있을리 없었다. 장계가 오르기 바쁘게 무조건 원외랑을 찾아내라는 임금의 교지가 떨어지였다.

원외랑의 행적을 찾기 위해 숱한 백성들이 버섯골로 떠밀려들어왔다.

얼마 안있어 버섯골 막바지에서 원외랑의것으로 짐작되는 허리띠와 노비안(노비등록대장), 사람의 머리털과 피자욱이 발견되였다.

더 말할것없이 오래전부터 달래봉주변을 감돌던 호랑이(소문에는 백년나마 묵었다는 늙은 호랑이의 잔등에는 하얀 버섯까지 듬성듬성 돋아있다고 했다.)가 노비추쇄를 위해 산중의 오솔길까지 갈피갈피 뒤지며 나돌아다니던 영악스러운 원외랑을 잡아먹은것이였다.

이것 역시 전고에 없던 호환이였다.

왕실과 조정에서는 재차 로망한 호랑이를 잡아바치라는 령을 떨구었다.

그러자 고을관가에서는 누구든 호랑이를 잡아바치면 황마포 50필을 상으로 주겠다는 방을 내붙이였다.

황마포는 개경에서도 특별히 재주가 있는 장공인들만이 짤수 있는 아주 정교한 포목이여서 값이 여간만 비싸지 않았다.

개경에서 황마포 닷필에 량곡 한평석(고려시기 용량단위, 한평석은 15말)을 아무 흥정없이 맞바꾸는 판이니 궁벽한 시골에서야 더 말해 무엇하랴.

황마포 50필이면 결코 작은 재물이 아니였다.

범 한마리를 잡아 큰 재물을 낚아보려는 탐심에 빠진 젊은이들, 자칭 무예에 능하고 담기있노라는 사내들이 줄달아 버섯골에 밀려들었다.

박위도 소문을 듣자 그날로 좋은 화살들을 골라가지고 버섯골에 들어섰다.

그는 물론 황마포가 욕심나서가 아니라 그지간에 련마한 자기의 무술을 실천적으로 시험해보고싶었던것이였다.

박위는 련 이틀째 버섯골의 숲속을 샅샅이 뒤져보았으나 호랑이의 그림자도 찾을수 없었다.

사흘째 저녁무렵, 이제는 그만 떡심이 풀린 박위는 물녘에 퍼더앉아 싸가지고온 과자를 점심 겸 저녁으로 먹고있었다.

이때였다. 그리 멀지 않은 버섯골 막바지 선바위쪽에서 갑자기 호랑이의 울음소리가 쩡쩡 골을 울리며 들려왔다.

후닥닥 자리를 차고 일어난 박위는 무작정 선바위쪽으로 내달리였다.

울창한 소나무숲과 바줄타래처럼 엉켜붙은 댕댕이덩굴을 헤치고 선바위밑에 이르니 열길은 실히 될 날카로운 벼랑이 한눈에 바라보이였다.

벼랑우에서는 거의 황소만 한 호랑이가 금시 날아오르기라도 할듯 기둥토막같은 앞발을 벋디디고 늘씬한 허리를 휘친거리며 연해 으르렁거리고있었다.

그앞에는 몸집이 체소한 웬 사내가 칼을 뽑아들고 서있는데 그는 결정적인 공세를 취할 대신 주춤주춤 뒤걸음을 놓고있었다.

가만 내버려두면 범에게 물려죽기 전에 벼랑에서 굴러떨어져 죽을것 같았다.

박위는 지체없이 호랑이의 볼기짝을 겨냥하여 화살을 날리였다.

궁력이 센 박위의 화살은 호랑이의 푸들진 볼기짝에 면바로 들어가 박히였다.

《으흐흥!》

난데없이 뒤쪽에서 날아온 화살에 맞은 호랑이는 너무도 놀라 한길이나 껑충 뛰여오르며 다급한 비명을 터치였다.

때를 놓칠세라 칼을 뽑아든 박위는 나는듯이 벼랑우로 치달아올랐다.

그때까지도 화살이 박힌 궁둥이를 비비탈며 어쩔바를 몰라하던 호랑이는 뒤쪽에서 나는 사람내를 맡자 홱 몸통을 돌리였다.

시뻘건 아가리를 한껏 벌리고 박위에게 달려들었다.

헌데 호랑이는 잔뜩 나이를 먹은 비둔한 놈이요, 박위의 화살에 궁둥이가 터진 부실한 놈이라 사나운 겉모양에 비해 동작은 그리 날래지 못했다.

병신스럽게 비척대며 달려드는 호랑이를 마주쳐나가던 박위는 별안간 몸을 한옆으로 홱 빗세우며 번개같이 칼을 비껴내리였다.

날카롭기 짝이 없는 박위의 칼날은 미욱스럽게 곧추 날아드는 호랑이의 대가리뼈를 바수며 깊숙이 내리박히였다.

호랑이는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거방진 몸통을 서서히 비틀며 기운없이 나자빠지였다.

몸집 체소한 사내가 칼을 움켜쥔채 황급히 박위앞으로 달려왔다.

그가 바로 황마포 50필을 상으로 준다는 소리에 귀가 항아리만 하여 버섯골에 달려들었다가 방금 호랑이를 만나 다 죽을번 했던 조호백이였다.

호백은 박위의 손을 덥석 움켜쥐더니 목메인 소리로 웅얼거리였다.

《그대가 아니였던들 나는 필시 오늘로써 생을 마쳤을게요.

하늘보다 크고 산보다 무거운 그대의 은혜를 무엇으로 다 갚으리오.

나는 저기 조촌동에 사는 조호백이라는 사람이요.》

박위는 인명을 구원한것도 기쁘고 자기의 무술을 성공적으로 시험해본것도 흡족하여 빙그레 웃음을 띠우며 손사래질을 했다.

《은혜는 무슨 은혜겠소.

일이 우연히 그렇게 되여 내가 손을 쓴것인데…

아무튼 상한데없이 명을 보존했으니 천만다행이요.》

각기 제나름대로의 기쁨을 안고 말을 나누던 두사람은 얼마후 호랑이앞으로 다가섰다.

호백은 쓰러져누운 호랑이의 기름기 흐르는 잔등을 살살 쓸어만지던 끝에 조심스럽게 자기의 속을 터놓았다.

《우리 호랑이를 잡은 공을 절반씩 나누는게 어떻소?

호랑이를 잡기는 그대가 잡았으나 발견하기는 내가 발견했으니 그렇게 하는게 가장 공평할것 같구려.》

박위는 호백의 어딘가 뻔뻔스럽게 느껴지는 속심이 다소 불쾌했으나 아무 내색없이 머리를 흔들었다.

《구차스럽게 나누고 어쩌고 할게 없을듯 하오. 아닌게아니라 그대가 이놈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내가 어떻게 잡을수 있었겠소.

범을 잡은 공은 전적으로 그대에게 있소. 상을 타는것은 나의 본의도 아니니 그대가 가져다 바치도록 하오.》

호백은 다 죽게 됐던 목숨을 살린것만 해도 하늘을 날것 같은데 한꺼번에 재물과 명성을 공으로 얻게 됐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아찔하도록 기뻤다.

허나 마음과는 전혀 다른 소리가 흘러나왔다.

《허, 그건 너무 렴체없는노릇 같소그려. 둘이서 상을 반분하는것이 가장 옳은 경우 같은데…》

《아니, 나는 벌써 마음속으로 얻을것은 다 얻은셈이니 더 바랄것이 없소.

나는 이 길로 산을 내리겠소.》

박위는 호백에게 작별인사를 하고나서 씨엉씨엉 산을 내리였다.

박위가 사라지기 바쁘게 호랑이의 울음소리를 들은 사냥군들이 사처에서 몰려들었다.

모두들 황소같은 호랑이와 호백을 번갈아보며 탄성을 터치였다.

호백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호기를 뽑았다.

《여보게들! 이 호랑이라는 놈이 듣던 소문보다는 약약하더구만.

내 단살에 이놈의 몸을 뭉청 주저앉히고 다음엔 단칼에 이놈의 대갈통을 바수어놓았소.

자, 이제는 그만들 구경하고 어서 한발씩 떠들고 관가로 가세.…》

호백은 그길로 관가에 내려가 푸짐한 상을 받고 푸짐한 치하를 받았다.

그후 무과시험을 볼 때도 호랑이 잡은 덕을 톡톡히 보아 그리 힘들지 않게 어보(임금의 도장)가 찍힌 합격증서를 손에 넣을수 있었다.

호백에게 있어서 박위는 생명의 은인인 동시에 벼슬길의 첫 대문을 열어준 고마운 은사였다.

그후 호백은 자주 박위네 마을에 찾아와 그와 함께 무술훈련도 하고 술도 마시였다. 헌데 두사람사이는 이렇다할 리유도 없이 차츰 뻐그러져나갔다.

호백은 호백이대로 박위의 고지식하고 융통성없는 성격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박위는 박위대로 호백의 지나치게 경솔한 처사와 과도한 탐심이 비위에 거슬렸던것이였다.

두사람의 우정은 일년도 못되여 싱겁게 끊어져버리고말았다.…

…박위는 무관으로서의 자질은 차고넘치도록 풍부히 소유하고있었으나 인간생활에 대해서는 지나치리만큼 아는것이 적었다.

박위는 누구보다 호백의 래력과 됨됨을 잘 알고있으면서도 그를 그다지 나쁘게 보지 않았다.

지금도 박위는 김해관가에서 썩은 쌀과 너절한 반찬감을 보낸것을 호백이와 련관시켜 생각하고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별로 크지도 않은 사건을 놓고 정도이상으로 심각하게 따져본것이 어딘가 옹졸하고 시시부나하게 생각되였다.

박위는 다시 군영대문을 향해 걸음을 옮기였다.

오천이 바투 따라서자 슬며시 고개를 돌린 박위는 말머리를 돌리였다.

《이 애 오천아, 네 생각에는 어떠하냐.

우리가 주동적으로 대마도를 공격하자면 적지 않은 전함과 군사, 병기와 화약이 있어야 할텐데 그 모든걸 우리 군영의 힘으로 죄다 얻어내고 만들어낼것 같으냐 말이다.》

화제를 돌린다는것이 자기의 가슴에 늘 쇠쪼각처럼 아프게 맺혀있던 시름거리가 저절로 불쑥 튀여나왔다.

날은 살같이 흐르는데 일은 더디게 진전되고 화약과 전함 같은것은 얻어낼 방책은 묘연한데 임금과 최영은 아직 개경에 돌아오지 않으니 드세게 원정준비를 밀고나가면서도 가슴은 노상 무죽했다. 그러다보니 어망처망간에 일개 대정인 오천이한테까지 자기의 시름거리가 튕겨나간것이였다.

어찌 생각하면 남달리 총명하고 궁냥이 틔운 오천에게 언제부터 한번 해보고싶던 소리인지도 몰랐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오천은 좀전의 울울했던 기색을 활 털어버리고 자신있게 대답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 모든것을 우리 군영이 안아올린다는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닐것입니다.

하오나 사람이 많으면 하늘도 이긴다는데 군사들과 백성들이 모두 떨쳐일어나면 그리 어려울것도 없을듯 합니다.》

오천은 때마침 박위에게 김해부사와 같은 껄꺼름한 량반님네들을 믿을게 아니라 자기와 같은 평범한 군사들과 백성들을 믿고 일을 다그쳐야 한다고 소리쳐웨치고싶던차였다.

말마디끝은 여느때없이 강개하게 여물궈지였다.

박위에게는 오천의 장담이 구체적인 타산이 안배된 대답이 아니라 주관적인 욕망에서 나온 뜬소리처럼 들리였다.

그런데도 왜서인지 마음 한구석이 든든해났다.

아직은 모든것이 안개속에 빠진듯 흐릿하고 료원하게 여겨지는 이 마당에서 하잘것 없는 일개 대정이기는 하나 추호의 의문도 없이 거사의 성공을 확신하는 사람이 있다는것은 기쁜 일이였다.

의지가 되는 일이였다.

박위는 대체로 진중한 편이나 자기처럼 진중한 사람보다 쾌활한 사람, 락관적인 기분을 가진 사람을 더 좋아했다.

그래서 밀직부사를 지내는 최칠석이나 이곳의 오천에게 남다른 정이 가고 믿음이 가는지 몰랐다.

어느 정도 마음이 개운해진 박위는 틀지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그래, 옛적부터 장부일언중천금이라 하였거늘 사내대장부가 한번 말을 내고 뜻을 세웠으면 시종이 여일하게 일을 내밀어 기어이 끝을 보아야지.…》

이것은 오천에게 하는 말이기 전에 때없이 뒤숭숭해지는 자기자신의 마음에 대고 하는 소리였다.

다시 걸음을 옮기던 박위는 무춤 굳어지였다.

부지불식간 이처럼 사내싼 오천이가 아직도 둘레머리 로총각이라는 생각이 떠오른것이였다.

박위의 곱다랗게 생긴 입에서는 저도 모르는새 생청같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애 오천아, 너 요즘도 구서방네 집에 더러 나가보느냐? 취금이한테 말이다.》

숫기좋은 오천이건만 박위의 입에서 불쑥 튀여나온 녀자 소리는 전혀 뜻밖이라 퀭하게 눈을 흡뜬채 선뜻 입을 열지 못했다.

사실 오천은 지난밤에도 구서방네 집 뒤담의 장독대곁에서 조용히 취금이를 만났었다.

취금은 얼굴도 둥실둥실하고 몸집도 두리두리한것이 덕성스러워보이기는 하나 삐여지게 인물이 고운 녀자는 아니였다.

하지만 오천의 눈에는 취금이가 세상에서 제일 고울뿐아니라 신기하리만큼 똑똑한 녀자로 보이였다.

오천이가 취금을 처음으로 알게 된것은 올해 삼월삼짇날이였다.

해마다 삼월삼짇날(음력 3월 3일)이 오면 박위는 어김없이 군영군사들의 무술시합을 조직하군 했다.

이것은 심심풀이로 해보는 일도 아니요, 제 흥에 겨워 벌리는 놀음도 아니였다.

옛적부터 고구려사람들은 삼월삼짇날이 오면 5부 군사들을 전부 동원하여 메돼지와 사슴을 잡아오게 한 후 그것으로 하늘과 산천신에게 제사를 하는것을 어길수 없는 관례로 지켜왔다.

이것은 단순한 사냥놀이나 제사행사가 아니라 명절을 기화로 병사들의 무술의욕을 더욱 높여주고 무술조련을 한층 다그치려는 상무기풍의 한 발현이였다.

헌데 고구려의 혁혁한 유풍은 날로 쇠미해지여 이제는 삼월삼질이 오면 문관들은 물론 무관들까지 의례 산에 올라가 꽃구경을 하고 꽃지짐에 꽃국수, 꽃술을 마시며 명절의 하루를 흥청으로 즐기였다.

하지만 박위는 자기의 군영에서만이라도 고구려의 전투적인 상무기풍을 면면히 이어가고싶었다.

군사들에게 꽃보다 검을 더 사랑하는 정신을 키워주고싶었다.

하여 그는 삼월삼짇날이 오면 군사들속에서 사냥경기와 무술시합을 진행하는것을 정례화하였다.

올해 삼월삼짇날.

처음으로 무술시합에 참가한 오천은 말타기와 활쏘기, 검술과 창쓰기 등 모든 종목에서 단연 1등을 하였다.

박위는 오천에게 상등으로 쇠가 좋은 검 한자루와 맛좋은 계피술 한방구리를 상으로 주었다.

상을 타자 오천의 뇌리속에는 제일먼저 선량하고 근실한 구서방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느때인가 바다에 나갔다가 왜구들의 쇠장대에 얻어맞아 한쪽팔을 잃은탓에 곰배팔이라는 소리를 듣는 구서방은 누가 시키지도 않건만 틈만 있으면 그 부실한 몸으로 화살을 만들 대나무단을 묶어가지고 군영을 찾아오군 했다.

그러는 구서방을 볼 때마다 오천은 감동을 금할수 없었다.

언제이건 구서방에게 단단히 인사를 차리고싶었다.

그러던차에 저로서는 희한하기 그지없는 상을 타게 되자 그길로 구서방을 찾아간 오천은 제잡담 술방구리부터 꺼내놓았다.

구서방은 《무술시합에서 1등을 한 군사를 우정 모셔다가 대접은 못할망정 군사의 1등상을 빼앗아먹어서야 어디 백성의 도리가 됐느냐.》고 펄쩍 뛰였다.

하지만 오천의 소탈하고 끈덕진 고집으로 하여 두사람은 종시 술상앞에 마주앉게 되였다.

그 자리에서 오천은 연해 웃음발을 날리며 술시중을 드는 구서방의 딸 취금이를 처음으로 보게 되였는데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고 처녀역시 군사일을 제일로 중히 여길뿐아니라 무술시합에서 1등을 한 자기를 으뜸가는 사내로 쳐주는듯싶었다.

그날의 일을 빌미로 오천은 구서방과도 친해지고 취금이와도 친숙해지였다.

취금은 지금까지 오천을 정성스레 대접해주고 허물없이 대해주기는 했으나 유별스러운 소리 같은것은 한마디도 꺼낸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천은 자기가 무술시합에서 1등을 한것이 무슨 큰 공이라도 되는듯 말끝마다 1등군사라고 추어올리면서 번마다 다정하게 대해주는 처녀를 무심히 대할수 없었다.

날이 갈수록 명랑하고 천진한 처녀, 담차고 오달진 취금에게 마음이 끌리였다.

헌데 어찌된 영문인지 취금이와 마주서기만 하면 오천의 입에서는 제 듣기에도 한심한 말마디만이 불려나갔다.

엊저녁에도 오천은 자신만만하게 취금이를 불러내기는 했으나 입을 여니 어느결에 또 씨알머리없는 소리가 흘러나갔다.

《취금이! 나 말이야, 장군을 따라 해변고을들을 나돌아다닐 때 취금이가 보고싶어 혼났다구.》

취금은 희고 가쯘한 이를 박속처럼 하얗게 드러내기는 했으나 서운하게도 그의 대답말속에는 싸늘한 랭기가 섞여있었다.

《누가 그따위 실없는 소리나 듣겠대?! 그런 말이나 하려거든 난 집안으로 들어가고말테야!》

《사실이 그런데 그렇다고 말도 못할가? 정말이지 취금이 생각을 하면 마음도 즐겁지만 없던 힘이 불끈불끈 생기면서…》

《아유, 징그러워! 1등군사가 고작 한다는 소리가 그게 다야?》

처녀의 말마디는 차거웠으나 오천의 생각은 제 좋을대로 흘러갔다.

(취금이는 말끝마다 나를 1등군사라는데 내가 무술시합에서 1등을 한것이 그리도 마음에 드는가?

취금의 속마음이 정녕 그렇다면 취금이야말로 내가 사랑해야 할 하나밖에 없는 처녀가 아닌가?!)

이렇게 생각되자 어느결에 또 어리석은 말마디가 불려나갔다.

《난 말이지 취금이가 없이는 못살것 같애. 취금이가 있으니 마음은 항상…》

맥락이 닿지 않는 소리를 웅얼거리던 오천은 불현듯 저로서도 알수 없는 불가사의한 힘에 떠밀리워 처녀의 탐스런 머리태를 감아쥐였다.

《어머머! 남의 머리태는 왜 잡아다리는거야? 흉측스럽게…》

취금은 황급히 등뒤로 손을 보내여 자기의 머리태를 당기려들었다.

오천은 얼결에 처녀의 통통한 손까지 덥석 움켜잡았다.

취금은 실팍한 상체를 두어번 세차게 뒤틀더니 곧 잠잠해지였다.

취할듯 한 기분에 휩싸인 오천이 무슨 말인가 또 동닿지 않는 소리를 꺼내려는데 취금은 와닥닥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오천을 쏘아보며 랭랭한 어조로 말했다.

《난 집에 들어가겠어. 아버지는 불편한 몸으로 낮에는 염초장일을 보시구 밤에는 밤대로 화살감을 다듬으시는데 내가 모르쇠를 해서야 그게 몹쓸년이 아니구 무어야?》

오천은 처녀의 심정이야 어떻든 그의 작별선언이 무척 서운하였다.

아무리 아버지의 손을 돕는 일이 바쁘다 한들 달밝은 이 저녁 오랜만에 찾아온 사내에게 살뜰한 말 두어마디쯤이야 왜 못해준단 말인가?!

《그러니 취금인 내가 안중에 없단 말이지?》

《흠! 어떤년이 저같이 늙은 총각한테 마음을 준담.

이제 다시는 우리 집에 오지 마. 아버지가 아시게 되면 나 욕먹어.…》

처녀는 통통한 몸집을 놀라우리만큼 민첩하게 놀리여 장독대를 씽에돌더니 어느 틈에 집모퉁이로 꼴깍 사라져버리였다.…

오천은 박위에게 간밤의 일을 사실대로 아뢰기도 딱하고 거짓말을 하기도 수월치 않아 끙끙 갑자르던 끝에 잘 할줄도 모르는 거짓말을 힘겹게 번져놓았다.

《명색이 군사라는 사람이… 지금처럼 바쁜 때… 어찌 계집이나 찾아다니겠습니까?》

박위는 오천의 말을 조금도 의심치 않고 그대로 믿어버리였다.

그러자 여직껏 해본적 없는, 자기로서는 다소 게면쩍은 느낌이 드는 생각이 뭉게뭉게 떠올랐다.

(자고로 군사라 하면 아무런 정도 나눌줄 모르는 돌상같은 사람이여야 하는가?

아니, 꼭 그렇지도 않은게야.

우선 나부터가 리옥을 생각하면 아픔과 그리움이 열배로 가증되고 대마도에 잡혀간 우리 백성들을 한시바삐 되찾아올 결심이 백배로 굳어지지 않는가.

이런게 사랑이라면 사랑은 인생의 부담일수 없느니…

사랑은 분명 인생을 추동하는 열이고 힘이고 아름다움이라 해야 할게다.

헌데 언제부터 나의 가슴에 리옥의 모습이 이리도 깊숙이 새겨지였고 언제부터 그의 존재가 내 심장을 이리도 아프게, 이리도 뜨겁게 휘저어주기 시작했는고?!…)

박위는 다시는 이룰수 없을것 같은 자기의 사랑, 시작조차 떼보지 못한 자기의 서글픈 사랑이 새삼스레 애석해났다.

쓰라린 마음을 안고 서성거리던 박위는 오천에게 또박또박 뇌이였다.

《이 애 오천아, 군사라 하여 목석처럼 살라는 규례는 없는거다.

내 혼자 생각인데 이 땅이 사무치게 귀중한것은 아마도 정다운 사람들이 살고있는 곳이여서 더욱 그럴게다.

우리 군사들이 나라와 백성을 위해 목숨 내대고 싸우는것 역시 어느 누구보다 이 땅과 정다운 사람들을 더 열렬히 사랑하기때문이 아니겠느냐.

그러니 취금에게 정이 가거들랑 열심으로 정을 나누어라, 군사답게 말이다.》

이것은 박위자신도 여직껏 생각해보지 못한 말이였다. 이런 말이 스스럼없이 터져나온것이 자기로서도 이상하고 놀라왔다.

잠시후 박위와 헤여진 오천은 앞동네쪽으로 덜레덜레 나가다말고 무춤 굳어지였다.

자기 손에 들려있는 그리 크지 않은 꾸레미를 감촉한것이였다.

그것은 오천이가 바다가에 나갔다가 다시 군영으로 올 때 마을어구에 지켜서있던 취금이가 안겨준것이였다.

그때 취금은 엊저녁과는 판다르게 정찬 어조로 말했다.

《요즘 장군댁 도령이 몹시 앓는다지? 왜구에게 끌려간 리옥아씨 생각이 가슴에 맺히여 그리도 심하게 앓는다니 년소한 도령의 속이 얼마나 깊으면 그럴가.

이건 앵두인데 말랑말랑하고 달큼한게 맛이 폭 들었더라구.

군영에 들어가거든 도령에게 대접해주어. 그리구 1등군사에게 줄건 따로 건사해두었어.

이따 저녁때 나오면 꺼내줄게.…》

례장받은 벙어리마냥 저혼자 히죽벌쭉 웃으며 취금이를 만나던 광경을 되새겨보던 오천은 고개를 기웃거리였다.

아무래도 취금의 마음은 조화속이다.

다시는 제집에 오지 말라더니 오늘 저녁에 또 나오란다.

게다가 내 몫으로 따로 간수해둔 첫물앵두까지 꺼내주겠단다.

그리구 1등군사라는 말은 또 얼마나 마음에 흐뭇한가.

내가 운수가 좋아 어쩌다 1등을 했지마는 사실 1등군사라고야 할수 있는가.

그런데도 취금이는 굳이 나를 1등군사란다. 취금이는 정말로 나를 우리 군영에서 제일가는 군사로 치부하는가.

아닐거야.

취금이는 나에게 군사를 더욱 열심히 배워서 고려국의 제일가는 군사가 되라는 당부를, 우리 백성들을 못살게 구는 왜구를 제일로 많이 잡아달라는 소원을 그렇게 말하는걸거야.

그러고보면 취금은 얼마나 속이 깊은가.

정말 장군의 말씀대로 나에게는 취금이라는 처녀가 있어 이 땅이 더욱 소중하고 우리의 군사일이 더욱 성수나는것이 아니겠는가?!

이 애 취금아, 내 기어이 1등군사가 되여 대마도공격전의 그날 제일로 큰 공을 세울테니 조금도 념려말아.

여적 이 오천이가 결심을 다져서 못해낸 일이란 없단다…

생각을 마친 오천은 무슨 큰일이라도 생긴듯 기운차게 활개를 치며 박위의 처소쪽으로 되돌아올라갔다.

저녁밥 지을 물을 뜨러 나가던 군사 여러명이 요즘에 들어 별스레 성급해지고 분주해진 오천을 저으기 놀란 눈길로 바라보았다.

허나 오천은 전혀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오늘 저녁도 현중에게 앵두꾸레미를 넘겨주고나서 잠시잠간 취금이를 만나보고는 그길로 염초장에 나가 장밤을 새워야 하는 오천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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