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회)

제 1 장

4

 

앞서거니뒤서거니하며 기세좋게 내달리던 군마들은 군영앞에 이르자 푸푸 누런 게거품을 내불며 투덕투덕 걸음을 멈추었다.

말주둥이에서 흘러나온 실오리같은 느침들이 얼기설기 뒤얽히며 휘휘 날리였다.

박위가 안장에서 뛰여내리자 어느새 벌써 자기 말에서 내리여 짝귀앞에 서있던 여삼은 잽싸게 말끈을 받아쥐였다.

찌글사하게 박혀있는 기둥에 말끈을 빙빙 둘러감았다.

박위는 땀발이 지르르하게 내번진 볼편을 쓱쓱 문대기며 대문앞에 서있는 느티나무밑으로 걸어갔다.

아스라하게 솟은 나무의 우듬지에서 이름모를 풀벌레들의 늘어빠진 울음소리가 한낮때의 정적을 째며 쓰르륵쓰르륵 쏟아져내리였다.

그 소리때문인지 군영안팎이 별스레 더 괴괴하게 느껴지였다.

아니, 실지로 굿해먹고난 집마당처럼 어수선하고 썰렁했다.

박위는 까닭없이 기분이 찜찜해났다.

예전같으면 짝귀의 뻐기는듯 한 투레질소리가 울리기 바쁘게 대문이 활짝 열리고 부원수를 선두로 한 숱한 장교들이 쏟아져나왔을것이였다.

군영이 통채로 술렁거렸을것이다.

헌데 오늘은 군마들마다 투레질소리를 청청히 내건만 대문은 조금도 열리지 않았다.

사위는 귀가 멍멍할 지경으로 괴자누룩했다. 이 대체 어찌된 일인가?!

아까부터 대문 한쪽귀에 붙어서서 불안한 눈길로 박위쪽을 힐끔힐끔 훔쳐보던 나배기파수군이 장창자루를 질질 끌며 허위허위 다가왔다.

《장군께서 그지간 귀체만강하셨소이까?》

파수군은 깊숙이 허리를 꺾으며 여느때없이 떨리는 청으로 인사말을 뇌이는데 그것은 더욱 짙은 불안감을 몰아왔다. 허나 박위는 침착한 표정을 허물지 않은채 나직이 물었다.

《오냐. 헌데 군사들은 다 어디 가고 군영은 왜 이렇게 나간 집처럼 썰렁하냐?》

주름투성이좀상에 난색을 떠올린채 별로 처져내리지도 않은 통좁은 바지를 추썩거리던 파수군은 불식간에 울가망이 되여가지고 말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소이까? 오늘 새벽에 그 육실할 놈의 왜구들이 죽촌에 달려들어 마을을 통채로 태워버렸소이다.》

《무엇이 어째?!》

박위는 파수군의 청천벽력같은 소리에 금시 뒤머리가 빠개져나가는듯 한 충격을 느끼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파수군은 우두두 진저리를 한번 떨고나서 계속하였다.

《소인은 꽁지대가리 없는 소문을 듣다보니 자상히 알지는 못하오나 오늘 새벽난에 죽촌의 백성들이 죽기도 많이 죽고 잡혀가기도 수다히 잡혀갔다고 하오이다.》

박위는 그만 숨길이 꾹 막혀버린듯싶었다. 잠시후에야 제 목소리같지 않은 거센 청을 터치였다.

《이놈아! 왜구가 군영의 코앞에까지 기여들어 그 지랄을 하도록 군사들은 대체 무엇을 하고있었느냐? 모두들 늘비하게 누워서 코배기가 삐뚤어지도록 잠만 잤단 말이냐?!》

애매한 두꺼비라 장교들이 맞아야 할 떡돌에 제가 치운 파수군은 혼겁을 하여 더이상 대꾸를 못하고 비실비실 가재걸음을 놓았다.

어깨를 헐썩거리며 박위와 파수군을 갈마보던 여삼은 분노로 하여 빨갛게 달아오른 턱을 오천이쪽으로 돌리였다.

《대정형님, 이게 무슨 일이요? 그놈들을 그냥 내버려두어야 옳소?

지금 당장 다그쳐가서 왜구의 뒤대가리를 바사놓아야 옳지 않겠소?》

흥분하면 말수가 더욱 불어나면서 좀체로 자기를 다잡지 못하는 여삼이였다.

허나 오천은 충격적인 사건에 부닥칠 때마다 말수가 줄어들고 생각이 깊어지였다.

여삼이 계곡을 휩쓸어내리는 흐름세찬 산골물이라면 오천은 드넓은 대지를 적시며 유유히 흐르는 깊고 넓은 강이였다. 두툼한 입술을 이리저리 놀리며 제딴의 생각에 깊숙이 잠겨있던 오천은 분기에 젖은 눈으로 여삼을 쳐다보며 나직이 말하였다.

《소견없는 소리 그만해라. 그게 어디 말주먹질로 바로잡을 일이냐?》

오천이 퉁을 주자 여삼은 더욱 등이 달아 열을 내였다.

《아니, 그럼 형님은 분하지도 않소? 왜구들이 우리 군영의 코앞에까지 기여들어 죽촌백성들을 죽이고 잡아가고 별의별 란장을 다 쳤다는데 해가 기울도록 그렇게 생각만 하고 서있겠단 말이요?!》

《너 정말 진정하라는데 왜 그렇게 울뚝거리는거냐?!》

오천의 분기와 짜증기가 섞인 질책이 채 끝나기도 전에 느티나무밑에서 박위의 석쉼하게 갈린 청이 쩌렁 울리였다.

《모두들 말에 올라라!》

박위는 벌써 자기의 군마우에 올라 단단히 고삐를 틀어쥐고있었다.

군사들은 황급히 자기의 군마우에 힝힝 날아올랐다.

이어 군마들은 다시금 먼지구름을 뽀얗게 말아올리며 네굽을 놓아 달리였다.

박위의 황부루가 선두에 서서 행길쪽으로 나섰다.

박위는 쌍까풀이 진 둥그스름한 눈을 스르시 내리깔았다. 머리는 훅훅 달아오르고 가슴은 걷잡을수없이 쿵쿵 높뛰였다.

두서없는 생각이 마구 뇌리를 들쑤시였다.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만사는 불측지변(모든 일은 예측할수없이 변한다는 뜻)이라더니 왜구가 군영앞에까지 달려들어 미친 지랄을 하고 돌아갈줄이야 누가 알았는가.

이야말로 전만고에 없을 변괴가 아니겠는가?!

우리 군영의 망신이요, 우리 군대의 수치가 아니겠는가?!

헌데 죽촌에서 사상자도 많이 나고 잡혀간 사람도 적지 않다니 그 마을 백성들의 고충과 고통은 얼마나 크리오. 가만있어라. 변을 당한 사람들중에 혹시 현중이와 리옥이도 끼워있는게 아닐가?)

불안스레 들뛰던 박위의 가슴속에서 돌멩이같은것이 툴렁 떨어져내리였다.

눈앞이 뿌옇게 흐려들면서 사지가 나른해왔다.

…박위가 지방고을순행을 떠나기 전날 밤이였다.

하루종일 배무이장에 나가있다가 늦게야 처소로 돌아온 박위는 저녁상을 물리자 곧 서탁에 마주앉아 병서를 읽기 시작했다.

얼마 안있어 소리없이 문이 열리더니 현중이가 들어섰다.

박위가 고개를 드니 현중은 밤새 편히 주무시라는 격식바른 밤인사를 하였다. 하고는 왜서인지 서성거리며 쉬이 자리를 뜨려 하지 않았다.

밤인사를 올린 뒤면 의례히 작은 사랑으로 나가군 하던 현중이가 오늘은 이 웬일인가?!

의문을 느낀 박위가 다시 시선을 들자 현중은 나부시 꿇어앉더니 그리 크지 않은 꾸레미 하나를 펼쳐놓았다.

《아버님, 이건 마른 쑥을 넣어서 만든 요대입니다.

아버님께서 객지에 나가시여 습한 자리에라도 드시면 묵은 속탈이 도질듯 하여 마련한것입니다.》

박위는 대뜸 속이 뜨뜻해났다.

한창 장난에 정신이 팔려 돌아갈 어린 자식이 매사에 어른스럽게 처신하려드는것이 대견하기도 했지만 어미없이 외로이 자라는 까닭에 남달리 올되여간다고 생각하니 서글프기도 했다.

잠시 아무말없이 더운 침을 삼키던 박위는 축축하게 젖은 청으로 꾸중 비슷한 소리를 꺼내놓았다.

《이애 현중아, 아버지걱정은 할것 없다. 너는 그저 열심히 글을 읽고 부지런히 무술을 닦으면 그만이다. 알겠느냐?》

현중은 스르시 얼굴을 붉히며 손사래질을 했다.

《아버님, 이건 소자가 만든것이 아닙니다. 아버님께서 수일내에 지방순행을 나가신다는 말을 들은 리옥누님이 제 손으로 햇쑥을 뜯어다 말리워서 만든것입니다.》

《리옥이가?!》

박위는 어망결에 현중의 말마디를 받아 뇌이였다.

왜서인지 가슴이 후두둑 뛰였다.

(리옥이가 나를 위해 요대를 만들었다?!)

고맙게 생각되기 전에 왜서인지 슬며시 얼굴이 달아올랐다.

리옥은 거제도에서 별장벼슬을 지내던 리일경의 외동딸이였다.

몇해전 박위가 경상도원수로 갓 부임되여왔을 때 일경은 제일먼저 배를 타고 군영에 찾아왔는데 그것이 두사람간의 첫상봉이였다.

일경은 그때 벌써 60나이가 불원한 로인이였다.

무관치고는 나이부터 넘고 처지는데 착하고 순하게 생긴 얼굴에는 병색까지 컴컴하게 비껴있었다.

박위는 첫상면에서 벌써 일경에게 실망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고리삭은 샌님같기도 하고 어리무던한 늙은이같기도 한 리일경이 지금껏 무관노릇을 해왔다는것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장차 커다란 섬 하나를 옳게 지켜낼수 있으리라는 기대감 역시 전혀 생기지 않았다.

허전하고 서운하고 서먹서먹하고…

일경을 처음으로 만난 박위의 느낌은 이것이 전부였다.

몇달후 박위는 거제도의 방비정형을 료해하기 위해 섬으로 넘어갔다.

아무래도 리일경의 일이 마음놓이지 않았던것이였다. 헌데 정작 섬에 가보니 거제도의 군사일은 애초의 짐작과는 판다르게 펼쳐져있었다.

무너진 곳 하나없이 든든하게 수축되여있는 성곽, 하나같이 다듬어가꾼듯 칠칠한 군사들, 흠잡을데없이 정연한 경비체계와 비상동원체계…

미비하거나 허술한 구석은 한군데도 없었다.

박위는 만족하기 전에 어벙벙해났다.

인간이라는 존재를 외형에 준하여 평가한다는것은 얼마나 편협한 사고방식인가 하는 자기반성과 죄책감이 아프게 속을 비틀었다.

점심녘이 되자 박위는 일경이가 잡아끄는대로 그의 집에 갔는데 거기서 또 한번 크게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구기자덤불에 묻혀있는 대나무울타리, 무성한 참대숲을 병풍처럼 뒤에 두르고 서있는 아담한 초가집…

겉모양처럼 수수하면서도 정갈한 사랑방.

방안의 시렁우에는 크고작은 화살들이 주런이 놓여있었다.

벽면에는 손바닥만 한 종이장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데 거기에는 활촉이 박혔던 자리가 벌둥지처럼 송송 뚫려있었다.

일경은 몸이 불편하거나 눈비가 내릴 때면 집안에서도 작은 화살을 가지고 활쏘기연습을 하는 모양이였다.

어디 가서도 본적이 없는 방안의 류다른 풍경앞에서 박위는 한참이나 할바를 잊고 굳어져있었다.

일경에 대한 그윽한 존경심이 따갑게 타래쳐올랐다.

요즘 량반들은 거개가 한쪼각의 벼슬이라도 얻어걸치면 천량재산을 뭉그려들이고 집안팎을 번듯하게 꾸리느라고 정신없이 뛰여다닌다. 그런데 리일경은 어떠한가. 다 실그러져가는 자기의 살림집마저 아늑한 생활의 요람이 아니라 하나의 격렬한 군사훈련장으로 꾸려놓았다.

그나 그뿐인가.

로쇠하고 병약한 그가 얼마나 애면글면했으면 섬안의 방비상태와 동원태세가 그리도 빈틈없이 든든하게 꾸려졌겠는가.

일경은 진정 심산에 홀로 핀 향기로운 꽃송이마냥 누가 보지도 알아주지도 않건만 자기의 심신을 깡그리 바치여 나라의 한 전구를 믿음직하게 지켜가는 고지식하고 성실한 진짜배기 무관이였다.

이런 사람을 미타하고 허술하게까지 여긴 자기가 못내 죄스러웠다.

누구앞에서나 자기의 진심을 가리울줄 모르는 박위는 영문을 모르는 일경에게 진정으로 용서를 빌었다.

그제서야 박위의 내심을 알게 된 일경은 제쪽에서 도리여 옹색해하며 자기의 소박한 인생지론을 간명하게 풀이했다.

《소관은 이제 늙은 말 한가지로 기력도 빠지고 정신도 쇠미해졌습니다.

하지만 죽는 날까지 전복을 입고 이 땅을 지키자고 합니다.

늙은 말이 만리를 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한즉 소관은 늙은 말이 만리를 가듯 생의 마감날까지 꾸준히 나라를 지키는 일에 전력을 다하렵니다.

실상 누가 보든말든 병기를 잡고 나라와 백성을 지키는것이 우리 무관들의 사는 멋이 아니겠습니까.

사치나 부귀같은것은 제 갈데로 가라지요. 헛허…》

박위는 일경과 겨우 두번째로 만나지만 그의 인간적인 전모를 확연히 헤아려 짐작할수 있었다.

일경은 진정 성실하고 량심적인 무관이였다. 박위 자기와는 성격도 판다르고 지식정도도, 나이와 군무년한도 엄청나게 차이나지만 병약한 나배기 무관인 리일경이 스승이상으로 쳐다보이였다.

그후 박위는 리일경을 다시 볼수 없었다.

이태전 봄 어느날.

5백도 넘는 왜구의 대부대가 아침나절의 짙은 안개발을 타고 불의에 거제도를 공격하였다.

어느때나 만반의 전투태세를 갖추고있던 거제섬의 군사들은 즉시 반격을 가하였다.

치렬한 공방전은 아침부터 중낮까지 계속되였다.

성밖의 왜구들속에서도 수백의 사상자가 나고 성안의 거제군사들도 반수이상 쓰러지였다.

공격을 시작할 때부터 성을 허물기 위해 지랄발광을 하던 왜구들은 마침내 뒤쪽 성 한귀퉁이를 헐어내였다.

화살에 찔리고 불덩이에 끄슬리여 온통 피자박이 되여가지고도 정열적으로 방어전을 지휘하던 일경은 성이 허물어졌다는 급보를 받자 급히 뒤쪽 성으로 달려갔다.

성이 허물어진 곳으로 왜구들이 불개미떼처럼 밀려들고있었다.

최후를 예감한 일경은 더없이 침착한 어조로 남은 화약을 전부 뒤쪽 성으로 날라올것을 명하였다.

그윽한 웃음기같은것이 비낀 얼굴로 성안의 정경을 둘러보던 일경은 제 손으로 화약통에 불을 달았다.

천지를 진동하는 폭음과 함께 일경은 물론 새까맣게 밀려들던 수십명의 왜구도 재가루가 되여 하늘가로 흩어졌다.

그때 마침 군영 군사들을 이끌고 거제도 앞바다의 배길을 순회하던 박위는 요란한 폭음이 들려오자 즉시 섬으로 방향을 돌리였다.

상륙하자바람 무자비한 소탕전이 벌어지였다.

석양이 불탈무렵 박위네들은 거제섬에 올랐던 왜구들을 남김없이 전부 잡아치웠다.

거제도의 하늘에도 피가 흐르고 거제도의 땅에도 피가 흘렀다.

싸움은 이겼으나 승리는 너무도 가슴아픈 피의 대가였다.

뭐니뭐니해도 그처럼 진실하고 열정적인 리일경을 잃은것이 뼈가 아프도록 괴로왔다.

박위는 거제도에서 선뜻 발을 뗄수가 없었다.

하여 며칠동안 섬에 머무르면서 전장을 수습하는 한편 전사한 군사들의 장례를 성의껏 치르어주었다.

여러 사람들이 만류했으나 끝끝내 고집을 부리여 고인의 근친자만이 입을수 있다는 회복(제일 거칠고 굵은 베로 지은 상복으로서 가장 많은 슬픔을 나타낸다는 의미)을 입고 상례를 주관하던 그 나날 박위는 처음으로 리옥을 알게 되였다.

참대지팽이를 짚고 상주노릇을 하는 처녀(리일경에게는 아들이 없었다.)의 청초한 모습을 대하는 첫 순간 박위는 놀라지 않을수 없었다.

전혀 처음 보는 처녀건만 너무도 낯이 익었다. 깨끗하고 그윽한 생김새도, 조용하고 현숙한 행동거지도 자기의 안해 최씨와 한판에 찍어내기라도 한것처럼 방불했다.

최씨와 굳이 다른 점이 있다면 시원스럽게 쑥 빠진 처녀의 하얀 목언저리에 팥알만 한 기미가 박혀있는것이였다.

(환생이란 말은 많이 들었어도 여적 실체를 본적은 없었는데 드디여 그 사람의 환생을 보는것인가?!)

허망한 생각인줄 알면서도 허망하게 스쳐버리고싶지 않았다.

뼈저린 아픔우에 또 하나의 고통이 겹쌓이였다.

하여 박위는 되도록이면 리옥이와 마주서는 일을 피하였다.

7일제까지 보아주고나서 서둘러 거제섬을 떠났다.

하지만 영용하게 싸우다 전사한 늙은 전우의 외동딸이요, 거제섬방어전때 적지 않은 왜구를 쏘아잡은 녀무사인 리옥의 운명을 두고 무심할수는 없었다.

일경의 돐제가 지나자 박위는 군영의 군사들을 파하여 리옥을 뭍으로 데려오게 하였다.

하고는 군영에서 그리 멀지 않은 포실한 어촌마을인 죽촌에 리옥의 살림집을 지어주고 각색 살림도구와 식량을 보내주었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 이따금 현중을 죽촌에 보내여 며칠동안 처녀와 함께 지내게 하는가 하면 명절이 오거나 빛 다른 음식이 생길 때면 리옥을 친히 군영에 불러들이였다.

박위가 각근히 살펴줄수록 리옥의 가슴에도 박위에 대한 존경심과 감사의 정이 층층 두터워졌다.

요즘에 이르러 리옥은 박위와 현중을 한집안식구처럼 친근히 여길뿐아니라 그들을 위해 제나름껏 성의를 다하고있었다.

하지만 박위는 리옥이가 이처럼 자기의 속탈까지 념려하여 정성껏 요대까지 만들어 보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별치 않은듯 하나 스쳐지날수 없는 이 요대를 그 어떤 은혜에 보답하고싶어하는 처녀의 순수한 정성으로만 생각해야 하겠는가?…

…리옥의 따뜻한 마음이 슴배여있는 요대를 매만지며 추억의 나날을 더듬어나가던 박위는 문득 보라빛요대천이 무척 눈에 익다는 느낌이 들자 저도 모르는새 눈에 힘을 주었다.

보라빛비단천은 분명 어느땐가 자기가 리옥에게 보내준것이였다.

올해 정초 조정에서는 왜구와의 싸움에서 많은 공을 세운 박위에게 상을 내리였는데 그속에는 맛좋은 계피술과 함께 여러가지 색고운 비단옷감이 들어있었다.

박위는 사실 생활면에서는 매우 투미한편이였으나 오래전부터 과년한 처녀인 리옥의 장래일을 위해 무슨 마련이든 차근차근 해두어야겠다는 생각만은 가지고있었다.

그 생각은 언제인가 누구에게서 요즘 행세하는 집 딸들은 시집을 갈 때 저고리 삼작이라 하여 초록저고리, 노랑저고리, 보라저고리를 갖추어입고 또 치마삼작이라 하여 웃치마, 속치마, 무지기를 겹겹으로 떨쳐입는다는 소리를 들은 뒤부터 더욱 굳어지였다.

허나 재산이라고는 칼 한자루밖에 없는 박위로서 그 모든 값진 옷감을 고루 마련한다는것은 너무도 아름찬 일이였다.

그러던차에 희귀한 옷감이 여러벌 생기게 되자 박위는 무슨 큰 소원이라도 성취된듯이 기뻐하며 그것을 고스란히 리옥에게 보내주었다.

헌데 뜻밖에도 박위의 사려깊은 마음이 담겨진 그 옷감중에서 한토막이 다시 그에게로 되돌아온것이였다.

고마운 생각은 차츰 숯불처럼 사위여들고 서운한 마음이 아릿하게 우러났다.

(그러니 리옥은 내가 보내준 옷감을 전부 이런 식으로 소모하려는것인가?

며칠전에 현중이한테도 무관복을 한벌 지어주겠다고 했다던데 그것 역시 내가 보내준 천으로 만들 작정일수 있으렷다.

허― 나로서는 서운하기 이를데 없지만 처녀의 마음은 얼마나 갸륵한고?!

지금 한창 얼굴단장, 몸단장에 왼심을 쓸 나이의 처녀가 어쩜 이렇게 웅심깊을수 있을고?!…)

다시금 훈훈해나는 가슴을 안고 요대를 쓸어보던 박위는 문득 요대끝머리에 끼워있는 종이쪼박을 띄워보자 서둘러 그것을 집어들었다.

무심결에 종이쪼박을 펼치니 거기에는 리옥의 단정한 글씨가 빼곡이 박혀있었다.

《현중 아버님, 소녀의 가슴에 그냥 묻어둘수 없는 사연이 생기여 외람된줄 알면서도 이렇게 서툴기 그지없는 글월을 올립니다.…》

대체 어떤 사연이 생겼기에 엎디면 코닿을데 있으면서 이런 이상야릇한 편지를 보낸단 말인고?!

박위는 얄팍한 호기심과 가느다란 불안을 느끼며 글줄을 더듬어내리였다.

《…사실 말이지 현중이는 소녀에게 있어서 마음과 정을 나눌수 있는 가장 가까운 혈붙이가 아닐수 없습니다.

정말 소녀는 현중을 친동생이상으로 사랑합니다.

그래서 지금껏 변변치 못한 재주로나마 그에게 활쏘기를 가르치면서 할수 있는껏 성의를 다하고있습니다.

헌데 요즘에 이르러 현중은 소녀의 성의에서 어머니의 정같은것을 느꼈는지 아니면 어머니의 사랑이 정녕 그리워선지 때없이 저를 어머니라 부릅니다.

이 일을 어찌하면 좋으리까?!

너무도 귀에 설은 부름을 그냥 듣기도 섬찍하고 만류하기도 수월치 않아 수일을 모대기던 소녀는 비로소 이 일이 소녀의 결심 하나로 처리할 문제가 아님을 확연히 깨닫게 되였습니다.》

박위는 와뜰 놀라 머리를 들었다. 종이장을 쥔 손이 중풍이라도 만난듯 부들부들 떨리였다.

이게 무슨 소린가. 그러니 리옥은 나에게 한마디 대답으로 두가지 일을 결정하라는 뜻이 아닌가.

세상에 이런 변사가 어디 있을고.

리옥이 정녕 이리도 도담한 처녀였는가?!

박위는 창호지를 얼비치며 들어온 희푸른 달빛에 휘감긴채 돌상처럼 굳어져버리였다.

사색은 하냥 리옥에게로 달리였다.

리옥은 올해 들어 스물일곱살, 과년해도 지나치게 과년한 처녀였다.

하지만 그는 필경 린근 동네 처녀들과는 겨룰 터수가 안될만큼 인물도 절등하고 성품도 우아했다.

거제도에 살 때부터 제노라고 꺼떡거리는 량반댁도령들은 쥐며느리 새우아재 사모하듯 가당치도 않은 사랑에 빠지여 리옥의 주위를 부절히 감돌았다.

혼담을 싸안은 매파들이 문돌쩌귀에 불이 일도록 리옥의 집을 나들었다.

하지만 매파들은 번마다 퇴를 맞고 뿌옇게 밀려나군 했다.

그도 그럴것이 무관의 가정에서 태여나 결곡한 아버지의 신칙과 초달을 받으며 결바르게 자라난 처녀는 자기의 부풀어오른 가슴이 사랑을 속삭이는 첫 순간부터 뜻이 높고 기개가 헌헌한 무관총각을 배우자로 택하리라 굳게 결심하고있었다.

헌데 안팎으로 훌륭한 총각이 어디 그리 흔하랴.

한해, 두해 무정한 세월은 덧없이 흘러갔다.

열성좋고 구변좋은 매파들도 하나, 둘 기가 진하여 리옥이라 하면 들떼놓고 홰홰 손을 내저었다.

허나 리옥은 불안과 애수에 시달릴망정 아무에게나 허턱 자기를 내던지려 하지 않았다. 한번밖에 없는 인생에 높이 세운 뜻도 없고 사내다운 열정과 의지도 없는 범박한 필부에게 한생의 운명을 기탁한다는것은 너무도 허망한 일이였다.

그러던중 거제도전투가 터지고 아버지의 희생이 잇달리였으며 그로하여 박위를 가까이 알게 되였다.

리옥은 이미 아버지를 통해 박위라는 예쁘게 생긴 장수가 뜻이 높고 무술에 능하며 배짱과 인정도 사내싸다는 소리를 귀에 절도록 들어왔었다.

소문은 과연 헛된것이 아니였다.

죽촌에 나온 뒤에 리옥은 박위의 인간됨을 자기의 눈과 페부로 직접 확인할수 있었다.

리옥은 비로소 자기가 그처럼 애타게 찾고 부르던 진정한 사내가 바로 자기의 곁에 현실적으로 존재하고있음을 커다란 환희속에서 발견하였다.

사랑의 불길은 고요히 솟아올랐다. 그 불길은 날이 갈수록 걷잡을수없이 황황 타번지였다.

마침내 폭발의 순간은 다닥치고야말았다.

며칠전 리옥이 현중에게 무관복을 지어주기 위해 한창 옷감을 마르고있을 때였다.

그때 마침 집에 나와있던 현중은 한참이나 리옥을 여겨보던 끝에 물기어린 청으로 밑도 끝도 없는 소리를 꺼내놓았다.

《지금껏 어머니처럼 각근한 사랑과 정성을 베풀어주시는분을 누님이라 불러온것은 너무도 경홀한 처사라고 생각됩니다.

이제부터는 어머님이라 부르겠사오니 사양말고 허락해주십시오.》

《?!》

철없는 소년의 말이라고 흘려듣기에는 너무도 곡진한 현중의 진정앞에서 리옥은 당황해났다.

허나 리옥은 곧 현중의 간절한 소청이 정신상의 부담이 아니라 무한한 행복과 잇닿아있음을 깨달을수 있었다.

기쁨의 눈물이 샘솟아올랐다.

사랑의 파도가 키를 솟구었다.

며칠을 두고 바재이던 리옥은 마침내 한장 종이장우에 자기의 불붙는 가슴을 통으로 쏟아놓았다.

…최씨가 비명횡사를 당한 뒤 박위는 지금껏 그 어떤 녀자도 가까이해본적이 없었다.

최칠석과 같은 절친한 친지들은 만날 때마다 재취를 해야 한다고 못견디게 쑤셔댔지만 박위는 매양 고집스럽게 머리를 흔들었다.

자기에게는 이미 사랑의 의욕이나 이성에 대한 관심이 깡그리 사라진듯싶었다.

아니, 지금같은 때 사랑이나 재취를 론한다는것자체가 안일과 해이의 표현이라고 생각되였다.

헌데 이밤 리옥의 비밀한 편지에서 은페된 사랑의 고백 같은것을 감득하게 되자 지금껏 깊은 잠에 들었던 박위의 가슴은 알릴듯말듯 박동을 높이였다.

자기에게도 련정이라는 감정상의 한뿌리가 의연히 존재하고있음을 기쁨과 괴로움속에서 의식할수 있었다.

허나 리옥의 사랑을 아무 꺼림없이 받아들일수 있겠는가?!

무질서하게 들뛰던 가슴이 적히 가라앉자 박위의 뇌리속으로는 엄연한 생활의 론리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렇다. 태여나 지금까지 어머니의 사랑을 전혀 모르고 외롭게 자라난 현중에게 친어머니와 생김새도 꼭같고 마음씨나 행동거지조차 방불한 새 어머니가 생긴다는것은 기쁜 일이였다.

상처한 뒤 오늘까지 녀인의 살뜰한 정이라고는 받아보지 못한 자기에게 아름답고 젊은 녀인의 봄볕같은 사랑이 비쳐든다는것도 행복한 일이였다.

그러나 아무리 기쁘고 즐거운 일일지라도 인간은 그것을 무턱대고 그러안아서는 안된다.

마땅히 인륜과 도의에 비추어보고 가려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놓고보면 리옥은 응당 자기보다 모든 면에서 훌륭하고 젊은 사내에게 장래를 기탁해야 옳을것이였다.

자기 역시 왜구의 출몰이 그칠새 없는 이 세월 각처에 숱한 군사일을 번다하게 벌려놓은 이때 한 녀자와의 사랑에 몸적실수 없었다.

결심은 명백했으나 왜서인지 자기의 뜻을 리옥에게 알려야겠다는 용단은 쉽사리 떠오르지 않았다.

리옥의 요청(물론 우회적인것이라 할지라도)을 즉시로 거절한다는것은 리옥에게도 그리고 현중에게도 죄가 되는 일같았다.

자신으로서도 어딘가 애석하게 생각되였다.

하여 박위는 환희로우면서도 난중한 운명의 숙제, 한순간에 수월히 풀어내칠수 없는 단순하면서도 까다로운 생활의 수수께끼를 안은채 지방순행의 길에 올랐었다.…

…군영 앞거리를 벗어난 군마의 행렬은 초여름의 따거운 해빛을 들쓴채 고즈넉한 정적에 깔려있는 앞마을 행길에 들어섰다.

급작스레 들이닥친 야단스러운 말발굽소리에 또 어떤 변이 생겼는가싶어 이 집, 저 집에서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불안과 의혹이 비낀 까무잡잡한 얼굴들이 집집의 대나무울타리우에, 혹은 꽁꽁 닫아맨 삽짝문우에 조롱박열리듯 오롱조롱 매달리였다.

행길가 우물터에서 드륵 드르륵 다기차게 용드레줄을 당기던 구서방의 딸 취금이가 처음에는 군마의 행렬에 놀라고 다음에는 저같은것은 본체도 않고 지나치는 오천의 전에없이 험한 얼굴에 기가 질리여 다리던 줄을 툴렁 놓아버리였다.

번들번들한 물미역이 그득 담긴 함지박을 안고 허위허위 행길에 들어서던 꼬부랑로파 하나가 돌연히 다가서는 말떼를 띄여보자 혼겁을 하여 뒤로 나동그라지였다.

솔가리가 산더미처럼 쌓인 지게를 지고 건들건들 마주오던 초군아이는 길을 피하느라고 헤덤비던 끝에 길녘에 파놓은 진흙구뎅이속에 곤두박히였다.

대나무울타리밑에 드러누워 낮잠을 청하던 동네개들이 후덕후덕 뛰쳐일어나 앞발을 벋디디고 짖어댔다.

병아리떼를 거느리고 유유히 산책을 하던 어미닭들이 꼬꼬댁 꼬꼬 다급한 비명을 지르며 행길을 가로질러 내달리였다.

박위는 지그시 눈길을 내리깔았다.

가슴은 숨가쁘게 옥죄여들었다.

(아, 왜구들의 때없는 침노와 악행으로 하여 백성들은 물론이요 짐승들까지도 속이 버들잎처럼 졸아들어가지고 전전긍긍하며 살아가지 않는가?! 하고보면 이 나라에 과연 무관다운 무관이 있다고 말할수 있겠느뇨?!

정녕 수치로다, 망신이로다.)

박위는 지금껏 포악한 왜구들을 꼼짝 못하게 잡죄지 못한 자신이 나라와 백성앞에 더없이 부끄럽고 죄스러웠다.

박위의 뒤를 따르는 오천과 여삼을 비롯한 군사들의 심정도 박위와 크게 다를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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