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2 회)
제 1 장
2
…그해 초봄 김해부사로 있던 박위는 어느 해변고을의 만호(고려 후반기 지방의 요충지에 배치되였던 군사지휘관 또는 지방관.)로 임명되였다.
박위는 만호벼슬이 승급인지 좌천인지 선명하게 가려지지 않았으나 새 직무를 받자 그 즉시 군말없이 임지로 떠났다.
그의 안해 최씨는 갓 태여난 아들 현중이를 싸업고 밀양의 친정집으로 향하였다.
최씨는 친정집에서 아들의 젖이나 뗀 다음에 박위에게 가는것이 가군의 일을 옳게 돕는것이라고 생각한것이였다.
그가 친정집으로 온지 꼭 열흘이 지난 어느날이였다.
그날은 항간에서 즐거운 봄명절이라 일컫는 삼월삼짇날이였다.
고향마을의 야트막한 뒤산기슭에서는 그날을 기다려 한껏 피여난 진달래꽃송이들이 봄바람을 타고 설레며 이쁘게 웃고있었다.
그 진달래꽃속에서 최씨를 위시한 동네녀인들도 꽃다림(화전놀이)에 쓸 진달래꽃지짐을 지지고 꽃국수를 사리며 떨기떨기 웃음꽃을 피우고있었다.
그럴 때 갑자기 한무리의 왜구가 마을을 에워싸고 갈가마귀떼처럼 달려들었다.
고요속에 날이 밝고 적막속에 해가 지던 아늑한 산골마을의 곳곳에서 비명소리, 아우성, 고함소리가 터져올랐다.
곳곳에서 두리기둥같은 불길과 삼단같은 연기타래가 치솟았다.
마을사람들은 승냥이무리에게 쫓기우는 사슴무리처럼 산지사방으로 황급히 흩어져 달아났다.
최씨도 현중을 둘쳐업고 대중없이 내뛰였다. 황망히 꽃무더기를 헤치고나온 최씨가 뒤산골짜기에 들어가기 위해 음침한 벼랑그림자가 드리운 골어구에 다가섰을 때였다.
목을 지키고있던 세놈의 왜구가 솟아나기라도 한듯 우뚝우뚝 일어서더니 와르르 최씨에게 다가들었다.
무작정 칼을 휘두르려던 왜구들은 무엇때문인지 일시에 칼을 내리웠다.
아직 서른살도 채 안된 젊은 녀인, 한창 피여나는 작약꽃처럼 싱싱하고 아름다운 최씨의 자태에 그만 얼혼이 빠진것이였다.
왜구들은 음독이 올라 지지벌개진 눈망울을 희번득거리며 저마끔 씨벌거리였다.
《보매 당신은 귀부인같은데 우리가 어찌 함부로 살해할수 있겠는가.》
《부인이 우리에게 잠시 몸을 허락한다면 머리터럭 하나 다치지 않고 살려주겠다.》
이를 사려물고 왜구들을 쏘아보던 최씨는 품속에서 번쩍거리는 단검을 뽑아들었다.
왜구들을 노려보며 통통히 호령하였다.
《이 짐승같은 놈들아, 내가 구구히 목숨이나 건지자구 네놈들의 개수작에 귀를 줄것 같으냐. 내 오늘로써 이 세상을 하직한다만 네놈들은 머지않아 내 피값이 얼마나 비싼가를 똑똑히 알게 될게다.》
말을 마친 최씨는 자기의 가슴에 힘껏 칼을 들이박았다.
급보를 받은 고을의 군사들이 달려왔을 때 최씨는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그때로부터 세월은 흘러 10여년이 지나갔다.
10년이면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니다.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옛적의 일은 아무리 가슴아픈것이라 할지라도 차츰 희미해지거나 가뭇없이 기억에서 사라져버리기마련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로부터 세월의 흐름은 망각의 휘장이라고 일러오지 않았던가?!…
하지만 박위는 안해의 최후의 모습을 영원히 잊을수 없었다.
그날의 광경을 제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했어도 세월이 갈수록 잊혀지기는커녕 더 자주, 더 생동하게 뇌리속에 비껴들군 했다.
그럴 때마다 박위는 왜구에 대한 증오와 복수심으로 더더욱 이가 갈리고 살이 떨리였다. 지금도 마음속깊이에 안해의 모습이 떠오르자 대번에 복수의 붉은 피가 사품쳐 끓어번지였다.
뒤이어 순간이나마 그 어떤 자기만족에 빠지였던 자신에 대한 불만이 쓴물처럼 우러났다.
(옛 병서에도 《네가 하루를 방심하면 적은 두배로 강해진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나는 해변고을들의 군사일을 돌아본것이 무슨 공적이라도 되는듯이 여기지 않았는가.
어제 저녁 회군하던 길에 부산관가에 들어가 늦도록 술을 마신것도 그리고 지금껏 놀량으로 길을 걸어온것도 따져놓고보면 다 내 마음의 탕개가 풀어진 까닭이리라.
그런데다 새빠지게 녀인에 대한 생각에 빠진것은 또 웬일인고?!…
아서라, 왜구가 언제 어디로 쳐들어와 무슨 지랄을 할지 모르는 요즈음 어디 가나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이때 나라의 최전역에 나선 장수가 이래서야 되겠는가?!)
한참이나 자신의 신통치 않은 정신상의 과실을 두고 정도이상으로 심각하게 속을 썩이던 박위는 날카롭게 벼려진 시선을 뒤쪽으로 돌리였다.
무슨 말끝엔가 또 한바탕 크게 웃어제끼느라고 어깨를 들썩거리던 오천은 박위의 시선과 부딪치자 금시 두툼한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얄팍한 어깨를 달싹거리며 해망스럽게 깔깔거리던 여삼이도 가느다란 눈을 샙뜨며 황급히 웃음기를 삼켜버리였다.
《그만들 해라. 이제는 그만 길을 재우쳐가야겠다.》
박위는 위엄기 배인 청으로 웨치듯이 말하고나서 세괃게 고삐끈을 나꾸어챘다.
주인의 불같은 성미에 익숙된 황부루는 박위의 급작스러운 신호에 놀라기는커녕 투레질 한번 하지 않고 화닥닥 네굽을 놓았다.
오천과 여삼을 위시한 10여명의 군사들도 박위의 흉내라도 내듯 일제히 고삐끈을 세차게 당기였다.
태평스레 드러누워 인간세상의 범인들로서는 감히 륜곽조차 헤아릴수 없는 거창한 꿈을 꾸는듯싶던 장려한 바다는 야단스러운 말발굽소리에 놀라 깨여나기라도 한듯 불시에 하얀 물이랑을 말아올리며 거방진 몸통을 뒤틀기 시작했다.
군마들의 행렬앞으로는 불덩이같은 꽃송이들이 다닥다닥 박혀있는 해당화덤불들이 빠르게 다가왔다가는 미처 여겨볼새도 없이 홱홱 스쳐지나갔다.
얼마후 가락촌을 지나서 구랑마을을 에돌아나온 군마행렬은 록산쪽으로 내리달리였다. 눈깜짝할새에 록산마을을 비껴치우고 야트막한 언덕우에 올라서니 적토색평야우에 엎어놓은 놋바리처럼 보이는 그리높지 않은 군영뒤산이 우렷이 안겨왔다.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삘틈없이 들어찬고로 사시절 푸르게만 보이는 군영뒤산기슭에 덜썩덜썩 몸을 솟군 군막들도 뚜렷이 가려지였다.
박위의 두툼한 가슴은 서서히 달아올랐다. 군영대문우로 문득 현중의 고집스럽게 생긴 귀여운 얼굴이 달덩이처럼 떠올랐다.
어머니의 살뜰한 사랑이라고는 전혀 모르고 자라난 현중이.
키는 벌써 엄부렁하게 크지만 몸은 아직 봄날의 물버들처럼 애리애리한 현중이.
하지만 아들녀석은 벌써부터 활쏘기, 칼쓰기에 정신이 팔려 돌아가고있었다.
아마 오늘도 현중은 죽촌에 사는 리별장의 딸 리옥에게 내려가 활재주를 익히고있을것이였다.
아들에 대한 강렬한 그리움과 대견한 마음을 안고 고개를 끄먹거리던 박위는 부지중 리옥이가 군영에 들어와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떠오르자 지그시 입술귀를 짓물었다.
후둑후둑 가슴이 높뛰였다.
섬세하고 정교하게 다듬어진 리옥의 부드러우면서도 강단있는 얼굴모습이 아프게 심장을 찌르며 육박하듯 다가왔다.
일찌기 체험해본적 없는 류다른 번민이 가슴의 벽을 아리게 허비며 떠올랐다.
(이제 리옥을 만나거든 내 무슨 말을 해야 하는고?)
박위는 난감한 표정을 하고 이런저런 말마디를 골라보았다.
허나 군영을 떠날 때부터 지금까지 보름내내 짚여지지 않던 신통한 말마디가 이제 갑자기 떠오를리는 만무했다.
박위는 애써 번거로운 생각을 털어버리려 했으나 리옥이와 결부된 그날 밤의 일은 하냥 생동하게 떠오르며 괴롭게 속을 허벼팠다.
각일각 다가오는 군영에는 사랑하는 아들도 있지만 옛 전우의 외동딸인 리옥이와 련관된 환희로우면서도 딱한 생활상의 고충도 있었다.
박위의 심중은 착잡하기 이를데 없었으나 군영대문앞에 아름드리몸통을 비틀고 서있는 소소리높은 느티나무는 기다란 팔을 벌려 흔들며 어서 오라 반기고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