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 회)

제 1 장

1

 

고려의 바다는 오늘도 변함없이 아름다왔다. 저 멀리 수평선까지 다림질이라도 해놓은듯 일매지게 매끈하고 푸른 바다.

그우에서 자유로이 노니는 소복단장을 한 갈매기들.

겨끔내기로 울리는 갈매기들의 청쾌한 울음소리, 시원스레 풍겨오는 비릿한 해감내…

시종 바다우에 시선을 얹은채 적동백꽃향기와 생강꽃향기가 향긋하게 어울려 떠도는 산비탈의 소로길로 느리게 말을 몰아가던 경상도원수(도의 군사장관) 박위는 까만 수염발속에 반나마 파묻혀있는 자그마한 입을 벙긋이 터치며 천천히 고개방아를 찧었다.

(이즈막에 우리 경내의 군사일이 썩썩 잘돼나가니 날씨도 운을 맞추는 모양인가?! 하기사 하늘도 고려의 하늘이요, 바다도 고려국의 바다일진대 우리 군대의 애국지심에 어찌 무심하리오.

그래서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도 생긴것이리라.

아무튼 근래의 날씨가 이리 좋으니 매 고을들에서 군사일들이 부쩍부쩍 축이 날게라.)

박위는 지금 해변가고을들에서 새롭게 시작한 군사일들을 일일이 돌아보고 보름만에 경상도군영이 있는 김해로 돌아가는 길이였다.

박위는 고려의 무관들이 일치하게 공인하듯이 자나깨나 군사일을 두고 마음쓰는 진짜배기무장이였다.

그는 이미 지난해(1387년)말에 임금에게 직접 연호군(적들이 쳐들어올 때마다 림시로 조직되던 지방군부대.)제도를 철페하고 매 고을, 특히 해변가고을들에 상비군을 조직하는 동시에 더 많은 병선을 건조해야 한다는 내용의 장계를 올렸었다.

그의 제안은 필경 혁신적인 발기였다.

허나 나라의 전반적인 형세를 놓고볼 때 북방의 외적을 견제하기 위해 수만의 대군이 동서북면에 항시 둔을 치고있는 조건에서 더우기는 군사징발의 기초인 호적, 군적이 심히 헝클어지고 군역대상이 훨씬 줄어든 정황에서 또다시 군사를 뽑고 싸움배를 뭇는 역사를 벌린다는것은 사실상 조련한 일이 아니였다.

그런데다 당시 문하시중이라는 국가의 최고관직을 타고앉은 부패무능하고 탐욕스러운 리인임은 군사일에 물력을 들이자는 박위의 제안이 꼭 제집 재물과 하인들을 털어쓰자는 소리처럼 들리여 상비군조직과 병선건조에 대한 말만 나오면 오만상을 찌프리고 홰홰 손을 내저었다.

허나 백전로장으로 나라안에는 물론 나라밖에까지 널리 알려진 최영은 임금이 《경들은 박위의 제의를 어떻게 생각하는가?》고 물을 때마다 제일먼저 조정의 백관들앞에 나서서 《천만번 옳은 제안이니 커다란 난관이 있고 의견이 있더라도 조속히 실행해야 할것》이라고 주장했다.

청렴하고 강직한 최영과 탐욕스럽고 완악한 리인임이 겯고 트느라고 문제는 쉬이 풀리지 않는데 그 샅짬에 끼운 년소하고 유약한 임금은 안팎곱사등이가 되여 어쩔바를 몰라하다보니 제안의 실행은 인차 결정되지 못했다.

지지부진한 론의속에서 달과 달을 넘겨오던 박위의 제안은 올해 봄 최영장군이 과감한 용단을 내리여 리인임일파를 숙청한 뒤에야 비로소 임금의 윤허를 받고 정식으로 수락되였다.

박위는 임금의 교지를 받자 그 즉시 해안고을들에 상비군을 조직하고 병선을 건조할데 대한 군령을 떨구었다.

뒤이어 열흘에 한번씩 매 고을의 원이나 호장이 직접 경상도군영에 들어와 자기 고을 군사일의 진척정형을 상세히 보고하라는 령을 추가로 내리였다.

했으나 박위는 군영의 교자우에 틀고앉아 지령이나 내리고 올라오는 보고나 듣고있자니 오금이 근질거려 견딜수 없었다.

모든것을 제 눈으로 보고 제 손으로 지휘하고싶었다.

하여 그는 보름전 어뜩새벽에 자기가 직접 현지에 나가 군사일의 추진정형을 확인하고 더욱 다그어댈 결심으로 지방순행의 길에 올랐었다.

현지에 나가보니 간데 족족 군사를 뽑아들이고 전함을 뭇느라고 야단법석이였다.

나라님의 교지와 병부의 명령도 어마어마했지만 박위라는 예쁘장하게 생긴 장수가 얼마나 드센가를 너무나 잘 아는 고을의 부사, 현령, 판관, 감무들은 우선 박위에게 걸려들지 않기 위해 오금에서 비파소리가 나도록 분주하게 뛰여다니고있었다.

고을마다 성과도 있었지만 페단도 없지 않았다.

어떤 고을에서는 군막도 세우고 싸움배도 몇척 무어놓았으나 무턱대고 일을 다몰아대기만 하다보니 병영의 지붕새로는 하늘이 파랗게 올려다보이는가 하면 엉성한 전함의 밑창으로는 물고기뼈다귀를 훔쳐문 부덕쥐들이 무시로 나들고있었다.

군사랍시고 제정된 인원수를 다 채워놓기는 했으나 노닥다리, 포병객(병자)이 절반나마 되는 고장도 있었다.

어느 고을에서는 제법 화약을 만든답시고 덩실하게 염초장까지 지어놓았으나 염초뽑는 방법을 전혀 모르다보니 일껏 품을 들여 세워놓은 아까운 염초장을 소득없이 비워놓고있었다.

박위는 외기둥에 집짓듯이 어설프게 해놓은 일이나 일시 눈가림식으로 건성 해놓은 일들은 건건이 발기짚어내여 호되게 꾸짖은 다음 빠른 시일안에 말끔히 시정하라고 엄명했다.

허나 염초장일처럼 모르고 비워놓은 일들은 자기가 직접 가르쳐주거나 이전에 개경의 화통도감에서 일할 때부터 슬기단지로 소문난 군영의 대정(초급지휘관) 오천에게 차근차근 배워주게 하였다.

하여 적지 않은 부족점을 내포한채 갈피없이 전개되던 해변고을들의 군사일은 기본적으로 제 곬에 들어서게 되였다.

더불어 이발빠진 얼레빗처럼 성글던 해안방어선은 하나하나 빈구석을 메꾸며 견고하게 일떠서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박위의 뒤를 따르며 저들끼리 수군거리던 군영군사들이 한층 목청을 높이여 떠들어댔다.

보름동안이나 박위와 함께 외지에서 나돌다가 정든 군영으로 돌아가자니 너나없이 기분이 흥떠오르는 모양이였다.

《…대정형님, 오늘도 우리 색시는 시큼털털한 탁배기를 걸러놓고 나를 기다릴게요. 이제 군영에 려장을 풀어놓고나서는 나하구 같이 우리 집에 갑시다. 밸이 푹 젖도록 탁배기를 마시잔 말이우.》

박위의 시위군사(호위군사) 여삼이의 아이처럼 챙챙한 목소리가 사뭇 살갑게 울리였다.

여삼은 눈썰미가 빠르고 몸놀림이 민첩한데다 소시적부터 김해일판에서 이름을 들날리던 석전군이라 시위군사로서는 나무랄데가 없었다.

헌데 말이 무척 헤프고 매사에 부산스럽기 짝이 없어 자주 곁사람들의 말밥에 오르군 하는것이 탈이였다.

그는 얼마전 군영의 앞동네에 사는 얌전데기처녀와 짝을 뭇고 상투를 틀어올렸다.

하지만 아직도 형님, 형님하던 예전의 버릇이 그냥 남아있는데다 난다뛴다하는 오천의 인끔에 어느 정도 눌리우기도 하여 로총각인 오천에게 반말을 쓰지 못했다.

여삼의 맑고 창창한 목소리가 잦아들자 이번에는 웃음기가 흐들흐들하게 배여있는 오천의 음성이 잇달리였다.

《글쎄 탁배기는 무척 먹고싶은데… 여삼이네 집에까지야 어떻게 가겠나?!》

오천은 무슨 일이나 막힘없이 수월수월하게 해제낄뿐아니라 매양 남에 없는 신통한 궁냥을 내놓군 하는 슬기단지였다. 게다가 성미는 대활하고 선들선들하여 어디 가나 사람들의 호감을 사군 했다.

그런 오천이 전에없이 자기의 청을 거절하자 여삼은 잔뜩 못마땅하여 볼메인 소리를 늘어놓았다.

《아니, 새삼스레 그건 무슨 소리우? 탁배기가 생각있으면 나와 함께 집에 가면 되는건데 못 가긴 왜 못 간단 말이우?!…》

《이렇다니… 임자 아직두 개구장이때를 깨깨 벗지 못하고 제 궁냥대로 놀아나니 얌전한 색시가 얼마나 속을 썩이겠나.

이보시, 지금 자네 색시가 탁배기만 걸러놓고 앉아서 랑군을 기다리는줄 아나? 그것과는 비교도 할수없이 중한것을 품어안고 기다린단말이여. 그러니 내가 어떻게 탁배기만 크게 여기고 덜레덜레 임자를 따라가겠슴나, 핫하하…》

오천의 걸죽한 롱담에 여러 군사들이 일시에 와 웃음보를 터뜨리였다.

영문도 모르고 따라웃던 여삼은 조금후에야 오천의 숨은 말뜻을 가려들은듯 불시에 새된 청을 왈칵 높이였다.

《아따, 그렇다면 형님은 구서방네 집으로 나가구려, 누가 말린다우?》

《아니, 내가 구서방네 집에는 왜 간단 말이?》

《흠, 시치미를 떼면 장땅이우?! 요새 형님이 구서방의 외동딸 취금이한테 반해서 틈만 나면 그 집 뒤담을 넘나든다구 동네의 애녀석들까지 지껄지껄합디다.

헤살을 놓기 싫어서 가만있으니까 사람을 아주 장님으로 아는게야.》

《알기는 칠월귀뚜라미 한가지로군. 사실 취금이와 어쩐다는 말이 날만 한 일이 아주 없는건 아니지만… 헛허허… 임자가 헤살을 놓겠다니 대체 어쩌자는건가?! 석전군의 팔매돌을 가지고 둘사이를 갈라놓겠슴나?! 핫하하…》

오천의 유들유들한 대답소리, 웃음소리에 군사들은 또다시 푸지게 웃어댔다.

일쑤 발끈하기는 잘하지만 마음이 여리고 뒤가 무른 여삼이도 언제 짜증을 냈던가싶게 깔깔 웃어댔다.

박위도 소리없이 느슨한 웃음을 피워올리였다. 기분은 더욱 흥그러워났다.

새삼스레 자기의 군사들이 대견하고 사랑스러웠다.

아무런 가식도 없이 자기의 마음속을 기탄없이 터놓는 그들의 소박한 생활세계가 은근히 부럽기도 했다.

얼마나 솔직하고 선량한 사람들인가.

저마끔 생김새도 다르고 성격과 취미도 각각이지만 하나같이 점잔을 뺄줄도 모르고 겉발린 례의를 차릴줄도 모르며 유식한 문자말로 자기를 미화할줄도 모르는 저네들.

하지만 저들의 투박하면서도 엇구수한 말마디속에는 나라의 군사일에 사심없는 땀과 지혜를 바치고 정다운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는 인간들의 기쁨과 긍지가 얼마나 진실하고 따뜻하게 슴배여있는가!

훈훈하게 더워나는 가슴을 안고 생각에 잠겨있던 박위는 문득 이마살을 찌프리였다. 가슴속 복판에서 홀연 싸늘한 눈가루같은것이 타래쳐올랐다.

(…저들에게 있어서 군영은 나라를 지키는 성스러운 초소인 동시에 청춘의 꿈을 꽃피우는 삶의 터전이기도 하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군영이란 무엇인가! 시종 딱딱한 구령소리와 병장기들의 부딪침소리 같은것만이 울리는 병영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니지 않는가?!)

박위는 단정하게 박힌 대문이로 귀인성스럽게 생긴 작은 입술을 아프게 짓물었다.

꽃향기에 축축히 젖은 사위는 여전히 고요했다.

어디선가 날아온 두마리의 노랑나비가 눈앞이 어지럽도록 깝치며 돌아가더니 뿔뿔이 갈라져 날아올랐다.

어느 전장에서 왜구의 날카로운 칼날에 한쪽귀가 뭉청 잘린탓에 《짝귀》라는 점잖지 못한 별명을 달고다니는 박위의 황부루는 때마침 번번한 길녘에 파수군처럼 홀로 서있는 나무밑을 지나고있었다.

포도송이마냥 주렁주렁 내리드리운 하얀 꽃방망이들에서 코가 아리도록 싱그러운 꽃향기가 미여지게 쏟아져내리였다.

그 순수한 꽃향기가 어느 옛적 자기 안해의 몸에서 늘 풍기군 하던 이채로운 향내와 엇비슷하다는것을 감촉하는 순간 박위는 사금파리같은것이 가슴의 벽을 빡 내리긋는듯 한 예리한 아픔을 느끼였다.

박위는 슬며시 눈길을 내리떨구며 느슨하게 고삐를 놓아주었다.

되돌이

Twitter로 보내기 Facebook으로 보내기 Google로 보내기 네이버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Google+로 보내기 Evernote로 보내기 Reddit로 보내기
우리민족끼리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E-mail) : urimanager@silibank.com 홈페지내용에 관한 문의(E-mail) : uriminzok@silibank.com
Copyright © 2003 - 2013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
gotop
기사종합
 
도서, 잡지
 
영화, 음악
 
독자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