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2 회)
6
지난밤에 봄비가 소리없이 내리더니 아침이 되자 감방철창으로 바라보이는 하늘은 때를 말쑥하게 씻어버린듯 연푸르렀다. 이제 눈부신 해빛이 저 하늘에 꽉 차겠지. 감옥마당가에 있는 뽀뿌라나무잎은 청보석마냥 은은한 빛을 뿜을것이고 대지는 다채로운 색갈로 단장했을것이다.
한상수는 가슴이 설레여왔다. 봄의 정취를 한껏 느끼며 활기에 넘쳐 뛰여다니던 어린 시절이 그리웠다. 불현듯 철창으로 보이는 푸른 공간으로 한개의 축구뽈이 날아오른다. 그 다음에는 새끼공, 고무공, 가죽뽈이 풍선마냥 한꺼번에 하늘을 메우며 솟아올랐다. 함성!…함성!…
어느덧 한상수의 눈앞에는 어린 시절 평양 모란봉골안의 넓은 운동장에서 벌어진 축구경기때의 일들이 연줄 떠올랐다. 가난뱅이아이들이 공부하는 경상울종사립학교와 왜놈자식들이 공부하는 서문거리소학교간의 봄철축구경기인것이다. 두 학교 선수들을 응원하는 학생들의 함성소리가 하늘을 찌를듯 했다. 사립학교에서는 학부형들도 달려와 꽹과리를 치며 응원에 합세했다. 두 학교 선수들의 경기는 치렬했다. 허우대가 큰 왜놈아이들은 조선아이들을 얕보고 란폭하게 뽈을 차며 으시댔다. 동무들과 함께 응원하던 한상수는 왜놈종자들이 노는 꼴을 보니 눈에 불이 이는듯 했다. 사립학교의 후보문지기인 한상수는 운동장에 뛰여들어 뽈을 차고싶어 견딜수가 없었다. 그는 이때처럼 후보문지기에 불과한 자신에 대한 수치감을 느껴본적이 없었다.
경기는 전반전에서 사립학교가 한꼴 먹은것으로 끝났다. 한상수는 땅을 치며 통곡하고싶었다. 후반전에 사립학교의 꼴문을 한상수가 지켜서게 되였다. 그러나 이날 경기는 끝내 사립학교가 지고 말았다. 두 학교의 선수들이 운동장에서 퇴장하였으나 한상수는 너무도 분하여 꼴문대를 두팔로 그러안고 엉엉 소리내여 울었다. 동무들이 달려와 그를 끌어내려 하였으나 한상수는 꼴문대에 얼어붙은듯 떨어지지 않았다.
《상수, 이젠 그만 해요.》
녀담임선생이 그에게로 다가와 조용히 타일렀다. 그러나 한상수는 막무가내였다.
《왜놈들이 보고있어요. 상수가 이러면 그들이 좋아해요. 눈물을 씻어요.》
녀선생은 엄하게 말하며 향수내가 연하게 풍기는 손수건으로 눈물범벅이 된 한상수의 얼굴을 꼼꼼히 닦아주었다.
《선생님, 전 문지기가 싫습니다. 꼴을 넣는 공격수가 되겠습니다.》
한상수는 얼굴을 들고 담임선생을 쳐다보며 부르짖었다.
《좋아요. 이제부턴 공격수가 되여 꼴을 본때있게 넣으세요.》
녀선생은 한상수의 어깨를 뜨겁게 그러안으며 열렬히 속삭였다. 그때부터 한상수는 후보문지기로부터 꼴을 넣는 공격수가 되였던것이다.…
한상수는 손가락만 한 쇠꼬챙이로 감방마루바닥에 금을 긋기 시작했다. 운동시간에 감옥마당에서 간수모르게 슬그머니 주어들고 온것이였다.
곁에 있던 정창식이 호기심이 들어 뭘 하는가고 물었다.
《축구경기장이야.》
한상수는 이렇게 한마디 내뱉고 열성적으로 금줄을 새겨나갔다.
《축구경기장이요? 그건 갑자기 무엇때문에?…》
정창식은 어이가 없는듯 미소를 띄우며 반문했다.
《경기전술을 연구해야지. 긴긴세월 뭘 하겠나.》
한상수는 여전히 등을 구부린채 앉아 부지런히 문지기구역과 벌축구역, 중앙선을 그려나갔다.
정창식은 더 묻지 않았다. 그의 얼굴에는 무엇인가 생각깊은 표정이 어리여있었다. 《떡봉》이를 조겨댄것으로 하여 놈들의 보복이 있겠는데 한상수는 태연히 감방바닥에 축구경기장을 새기며 전술을 연구하겠다고 하지 않는가. 하긴 감옥생활에서는 무엇인가 취미를 붙여야 한다. 그래야 시간이 가고 날이 가는지 모르는것이다. 멍청히 앉아 하루하루 날을 세다가는 지레 고독에 말라죽고 말것이다.
《어떤가? 비슷한가?…》
한상수는 싱글벙글 웃으며 자기가 한 일에 만족하여 《축구경기장》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비슷합니다.》
정창식도 기쁨에 넘쳐 맞장구를 쳤다.
《이젠 선수들이 있어야 되겠는데…》
한상수는 감방안을 두리번거리며 안타까운듯 중얼거렸다. 그러다가 생각난듯 정창식을 쳐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 나가거든 장기쪽 한조를 들여보내주게. 신통히 한쪽팀이 후보선수까지 열일곱명이니 서른네개면 두팀을 조직할수 있네. 그전까지는 내가 아무렇게 변통해서라도 이 경기장에 선수들을 세워놓을테니…》
한상수는 조용히 웃었다.
《알겠습니다. 선생님.》
정창식의 목소리는 진지했다.
다음날 아침 뜻밖에 정창식은 출소하게 되였다. 그러나 그는 별로 기뻐하지 않았다. 한상수를 혼자 남겨놓고 나가자니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였다.
《선생님, 미안합니다. 아무쪼록…》
정창식은 더 말을 못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아버지의 돈으로 출소하는것이 떳떳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것이였다. 역시 피줄은 속일수 없는것이다.
정창식의 아버지는 아들이 《빨갱이》라고 감옥에 처넣어 5년이나 콩밥을 먹이더니 이제는 정신이 들었을것이라고 생각하였던지 《법무부》에 뭉치돈을 들이민것이다.
《사람두 참. 자네야 5년을 살지 않았나. 나야 이제 1학년생이구. 박우갑동지말대로 우리 몫까지 통일을 위해 싸워달라구.》
한상수는 그동안 정이 든 정창식의 손을 잡고 놓지 못했다.
《선생님, 부디 몸조심하십시오. 우갑동지하신 말씀 잊지 마시고…》
정창식은 또다시 목이 메여 말을 못하고 허리를 깊숙이 숙여 인사를 했다. 한상수는 부지중 뜨거운것이 북받쳐올라 그를 부둥켜안았다.
《잘 가라구, 창식이.》
《예. 선생님의 부탁을 잊지 않겠습니다.》
정창식까지 떠나가자 감방안은 정적이 꽉 찼다. 불시에 고독감이 덮쳐들었다. 동지들이 있을 때에는 간수에게 끌려나갔다가도 감방으로 돌아오면 한결 안온하고 마음을 놓게 되더니 이제는 공허감이 떠돌았다. 저녁을 먹고나서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세멘트벽에 귀를 가까이 대고 저가락으로 옆방에다 정창식이가 가르쳐준 통방을 해보았다.
《내 말이 들리는가. 내 말이 들리는가?》
아무런 기척이 없다. 그는 실망하여 한숨을 내쉬고 다시 반대편 세멘트벽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곧 그쪽에서 신호가 왔다. 기쁨을 억제할수가 없었다. 아무리 소소리높은 세멘트담장으로 감옥을 둘러싸고 방마다 든든히 칸을 막아 외부세계와는 물론 감옥안에서까지 철저히 격리시켜놓았지만 동지들 호상간에 오고가는 마음과 마음만은 갈라놓을수 없는것이다. 그들은 《통방》이라는 언어를 통하여 하고싶은 말을 다할수 있었다.
육체는 철쇄로 얽매여놓을수 있을지언정 그들의 심장까지는 그렇게 할수 없는것이다.
한상수는 조용히 규칙적으로 벽을 두드렸다. 싸움은 이제부터이다. 한상수는 절대로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놈들은 새로운 보복을 준비할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