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회)

3

 

기다리던 안해가 면회를 왔다는 간수의 말을 듣고도 한상수는 기쁜줄을 몰랐다. 오히려 그를 만날 일이 두렵기까지 했다. 백근식이 무엇인가 모략을 꾸민듯 한 예감이 들었다. 밀고한자가 누구인지 숙제를 준다고 지껄이던 백근식의 말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분명 놈은 한상수, 자기를 그 어떤 심리극의 주인공으로 내세울 작정인것 같았다. 이제 옥야가 나타났으니 무대우에서 그 연극을 창출할것이다.

《뭘해? 빨리 나왓!》

감방문을 열고 한상수가 나오기를 기다리던 간수가 증이 나서 고함을 질렀다.

《한동무, 어서 나가보오. 아주머니가 왔다는데.》

박우갑이가 부드러운 눈길로 한상수를 쳐다보았다. 그 눈길에는 흥분하지 말고 처신하라는 무언의 부탁이 실리여 있었다.

한상수는 간수를 따라 걸음을 옮기며 천천히 생각을 굴리였다. 백근식은 한상수를 만난 이후부터 아직 한번도 구차스럽게 전향소리를 하지 않았다. 그를 잘 알고있는 이놈은 그런 소리가 백해무익하다고 생각한 모양이였다.

한상수는 백근식의 립장에 서서 생각을 더듬어보았다. 밀고자가 누구인가를 서뿔리 말하지 않은것은 한상수로 하여금 번뇌에 잠기도록 한것이다. 이제 옥야를 맞대면시켜놓고 한상수의 가슴에 날창을 박듯이 밀고자는 아무개다 하고 말할것이다. 그렇게 하여 나의 분노를 활화산처럼 타오르게 만들것이다. 그러나 폭발은 순간이다.

그다음 허무, 회의, 좌절감에 빠질것이다. 내가 치명상을 입고 정신적고통에 몸부림칠 때 백근식은 쾌락을 느끼며 전향의 바람을 불어넣을것이다.

《면회는 간수부장의 방에서 하게 됐어.》

간수는 마치 선심이나 쓰듯 이렇게 말하며 그쪽으로 발길을 돌리도록 했다.

한상수가 방에 나타나자 백근식은 하루밤사이에 몰라보리만큼 변한 그의 얼굴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잠을 좀 설친것 같구만. 그래 내가 준 숙제를 풀어봤나?》

《여보, 나와 가까이한 사람들중엔 당신 하나를 내놓고는 그런 비렬한은 없소.》

한상수는 그야말로 한담을 하듯 평온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좋아. 그럼 내가 진실을 말해주지. 고발자는 다름 아닌 당신이 가장 사랑하는 서옥야 당신의 안해요!》

드디여 백근식은 있는 힘을 다해 자기의 가슴복판에 날창을 콱 들이박았다. 한상수의 얼굴은 한순간 흠칫했다. 백근식은 희열에 잠긴듯 여전히 웃음을 짓고 담배를 붙여물었다.

그러나 한상수는 뜻밖에도 천천히 도리머리를 저었다.

《허튼소리 마오. 난 믿지 않소. 그건 날조요.》

《좋네.》

백근식은 타협조로 말했다.

《이제 곧 그 진실성여부를 알려주지.》

백근식은 책상옆에 설치되여 있는 호출신호단추를 눌렀다. 한상수의 뇌리는 복잡해졌다. 그는 젖은 가죽조끼를 입고 불앞에 서있을 때처럼 온몸이 조여들었다. 안해가 자기를 밀고했다는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다. 인간백정들인 이놈들이 무슨 짓인들 못하랴. 그러나 한상수는 백근식의 그 마디마디 쪼아박는듯 한 말마디들이 무서웠다.

《상수군.》 백근식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와 나는 같은 인간일세. 다만 다른것이 있다면 나는 간수부장이고 자네는 수인이라는것뿐일세. 나는 지금껏 내 량심에 묻건대 남을 모함한적도 없고 더구나 날조를 해본적도 없었네. 나는 인간본연 그것으로 여태껏 살려고 애써왔네. 하지만 어찌겠나. 진실을 알려주는것이 고통스럽긴 해도 할수 없는 일이 아닌가. 옥야씨는 어느날 방차장이 친정집에 왔을 때 직접 찾아가 자네가 우리 한국을 반대하여 <빨갱이>짓을 하고있다는것을 고발했네.》

(방차장한테?!…)

한상수의 얼굴은 치명상을 입었을 때처럼 무섭게 이그러졌다. 백근식이 그의 가슴복판에 박고있던 날창을 쑥 뽑은것이다. 한상수는 온몸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듯 해쓱하게 질렸다. 빈혈을 일으켰을 때처럼 머리가 핑 돌며 심장이 마구 뒤틀리우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걸상아래로 나동그라질번 했다. 그러나 간신히 참아내여 그런 치욕만은 모면할수 있었다. 그는 두손으로 걸상모서리를 꽉 그러쥐고있었다.

(어때 친구,이 백근식이한테는 안되겠지?…)

백근식은 사냥군의 총알을 맞고 림종직전에 놓여 몸부림치는 맹수를 내려다보듯이 괴로움과 고통을 애써 참고있는 한상수에게 다정히 말했다.

《이제 옥야씨가 올걸세. 뒤잔등도 남이라는 말이 있어. 한 이불속에 들어있을 때는 자기 색시지만 이불밖에 나서면 다른 놈팽이의 정부로 될수 있는게 녀편네들이야.》

《닥쳐라!》

갑자기 한상수가 고개를 번쩍 들며 실성한듯 웨쳤다. 그는 정조를 헌신짝 버리듯 하는 화냥년들을 빗대놓고 옥야를 모욕하는데는 참을수가 없었다. 그런 측면에서 옥야는 한없이 순결한 인간이다. 한상수가 리성을 잃고 노성을 지른것은 안해에 대한 크나큰 믿음이 있었기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백근식의 말을 반박할 근거를 찾아내지 못했다. 방차장이란자는 옥야가 《작은아버지》로 부르는 놈이다. 그에게 무슨 말인들 못했으랴. 그러나 옥야를 만나봐야 했다. 그는 점점 숨이 가빠짐을 느꼈다. 불안스러웠다.

《하하…》 백근식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수인은 어디까지나 수인이다. 그가 아무리 몸부림친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백근식의 웃음소리가 멎자 방안에는 무시무시한 정적이 깃들었다. 문이 열리는 바람에 그 정적도 산산쪼각이 나고말았다. 한을손이 옥야를 앞세우고 나타난것이다.

《옥야!…》

첫순간 한상수의 입에서 이런 부르짖음이 터져나왔다. 그는 두손을 뻗쳐들고 자리에서 일어나 안해에게로 어정어정 다가갔다. 자나깨나 그립던 녀자, 이 세상 그 누구와도 견줄수 없는 사랑하는 사람! 한상수의 두팔은 폭발적인 반가움으로 후들후들 떨렸다.

《여보!》

옥야도 마주 부르짖으며 남편의 품에 안겼다. 처음에는 알아볼수 없이 변한, 퍼런 수인복을 입은 사람이 다름아닌 자기의 남편이라는것을 알았을 때 눈물의 소나기가 세차게 쏟아졌다.

《여보!…》 옥야는 또다시 목메여 부르며 남편을 두팔 벌려 그러안고 손으로 잔등을 어쓸기도 하고 뼈만 남은 얼굴을 쓰다듬기도 했다.

백근식은 한쪽에 비껴서서 연극의 한장면을 감상하듯이 두사람을 지켜보고있었다.

한참만에야 한상수가 입을 열었다.

《은옥이는 잘있소? 집에서도 별일 없고?》

《예. 다 잘있어요.》

《그럼 됐구만. 내 걱정은 마오.》

한상수는 옥야를 안심시키며 걸상에 천천히 앉았다.

《어쩌면 이렇게도 못쓰게 됐어요?》

옥야는 손수건으로 눈굽을 닦고나서 남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옥야.》

한상수는 젊은시절 련인을 부르듯이 나직이 입을 열었다. 했으나 차마 다음 말이 나가지 않았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되겠는가. 허나 알아야 했다. 괴로와도 사실을 알아야 했다.

《왜 그러세요. 말씀하세요.》

옥야는 남편의 손을 잡고 흔들며 재촉했다.

《내 당신한테 하나 묻고싶은것이 있소.》

《무슨 일이예요?》

한상수는 안해의 얼굴을 뚫어지듯 쳐다보았다.

《당신은 내가 체포되기 전에 그 누구를 만난적이 있소?》

옥야는 한순간 생각을 굴리는듯 했다. 그러다가 생각난 모양인지 《예 있어요. 당신을 구원해달라고 방차장을!… 그게 당신의 체포와 무슨?…》하며 말을 맺지 못했다.

한상수의 손이 맥없이 풀려내렸다. 아니아니 하며 믿지 않으려 했던것이 사실임을 알게 되자 전신의 맥이 쑥 빠져나가는것 같았다.

순간 옥야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새하얘졌다.

《아니 그럼 제가?!…》

옥야는 어정쩡하게 물었다. 그 당황한 어조에서 한상수는 사태의 진상을 깨달을수 있었다. 처음에는 분격보다도 그 무어라 형언할수 없는 공허가 덮쳐들며 아무런 생각도 할수 없었다. 그 다음은 심장이 죄여들었다. 아무리 모른다고 한들 그렇게까지 어리석을수가 있는가. 아, 분하다. 한생의 먼길을 쉬임없이 함께 걷자고 약속한 이 녀자가 나를 다시는 솟아나올수 없는 함정으로 몰아넣다니.…

그는 한쪽가슴을 움켜잡고 비칠거리는 뒤걸음질로 앉았던 걸상에 무너지듯 주저앉았다.

《그렇소. 옥야씬 남편을 잡았소. 그것으로 하여 국가의 안전에 큰 기여를 했소.》

백근식이 입가에 싸늘한 웃음을 띠우고 야멸차게 말했다.

《아!…》

옥야는 손등으로 입을 막으며 경악에 찬 비명을 질렀다. 그 다음은 차디찬 바닥에 쾅 하고 넘어지며 정신을 잃었다.

한상수를 감방으로 보내고 남편을 따라가겠다고 애절하게 울부짖는 옥야를 택시에 태워보낸 백근식은 사무실에 돌아와 걸상에 앉아 두손가락으로 책상우를 다독였다.

(이 백근식이와는 안돼. 한상수군과 옥야씨! 내 앞에서는 전향서를 쓰지 않고서는 못배길걸.…)

백근식의 눈앞에는 만족하여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의 어깨를 두드려주는 방치백차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는 자기가 고등법원의 사치하고도 요란한 방에 틀고앉아 뭇사람들을 호령하는것을 그려보며 빙그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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