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 회)

제 9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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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승만과 류선민과의 면담은 리승만의 일방적인 욕설과 추궁과 모욕으로 일관되였다.

류선민이 자기에게 날아든 한보따리나 되는 항의문과 서명문건들을 리승만의 책상우에 조심스럽게 놓아주자 리승만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건 일본의 법조인들이 전일에 서울에 와서 저에게 직접 넘겨준 항의문이고 이건 미국과 유럽지역에서…》

류선민은 리승만의 심술과 불만을 이미 예상하고 경무대의 문턱을 넘어선지라 내친김에 빠른 말씨로 설명을 하기 시작하였다.

리승만은 류선민이 말떼기 바쁘게 화가 나서 책상우에 수북이 쌓아놓은 문건들을 주단우로 쓸어던졌다.

《듣기 싫다! 조봉암이 아직까지 용케두 숨이 붙어있다고 괴이하게 생각했더니 그 리유 이제야 알게 되는군.》

리승만이 상판이 시뻘겋게 상혈이 되여 나이와 지체에 어울리지 않게 악을 썼다.

프란체스까가 얼른 차 한잔 따라서 그에게로 다가가 마시게 하고 잔등을 자근자근 두드려주었다. 그러면서 암팡진 눈에 불찌를 날리며 한다는 소리가 명치에 바늘찌르기다.

《장관님! 내가 늘 얘기하잖나요. 각하의 장생불로에 해되는 문서장은 제발 날라오지 말라구요. 그래 이 자리에서 각하가 눈 감으시는걸 보는게 소원인가요?》

《예?》

치마두른 안방계집이 오지랖 넓게 끼여들어 7월 복더위에 된서리를 치듯 하는게 얄밉기는 해도 이제 두 년놈이 무슨 재구를 칠려는지 걱정되여 변명조로 공손하게 대꾸하였다.

《이건 각하께서 꼭 보시고 참고하셔야 될것 같기에… 장관벼슬이라는게 사실인즉 각하께서 정사에 실정이 없도록 잘 보필하는게 아니겠습니까? 이런 중대문제는 숨기지 말고 이실직고해야 장관소임이 될듯싶습니다.》

은근히 밸통머리가 들려있는 소리에 프란체스까의 눈이 유리알처럼 동그래지면서 거기서 새파란 불꽃이 팔팔 일었다.

《뭐라구요? 장관님은 각하가 계셔야 백성도 있다는걸 몰라요? 이런 종이장들이 각하의 장생불로를 좀벌레처럼 갉아먹는다는걸 정말 모른다는거예요? 이제 한시간이 지나면 각하의 장생불로를 위해 부산시장이 골라보낸 경상도 소리군들이 장고, 새납 들고 찾아옵니다. 모두가 이렇게 저저마다 각하의 장생불로를 위하여 지성을 다하는데 장관께서는 이런 문서장만 안고 와서 각하의 심뇌를 어지럽히니 이게 어디 례의가 있는 일입니까? 나라정사우에 각하의 장생불로가 있다는 말 장관님은 들은적 없는가요?》

《?》

류선민은 충동적으로 고개를 들었으나 인차 창문쪽으로 눈길을 옮겼다. 계집의 악청에 속이 욱- 하니 끓었으나 참는수밖에 없었다. 격이 없이 지내는 동료장관끼리 《인의 장막》이요, 《마미의 치마바람》이요 하고 소근거리던게 실감이 갔다.

(프란체스까가 리승만의 장생불로라는 황당한 구실로 귀맛좋은 소리만 듣자고 하니 리승만이 날이 갈수록 저 서양계집이 만들어놓은 장막에 가리워 정국에 대한 현실감각이 완전히 마비되여 사는게 아닌가. 정사라는게 바로 사회의 실태에 대한 가장 객관적인 료해와 판단으로부터 시작되여야 하지 않는가. 나라꼴 엉망이 돼가는것도 모르고 민심의 향방도 파악하지 못하고 어떻게 정사를 한다는거냐. 적어도 집권자라면 백성의 밥상에 찬거리가 몇가지 오르고 점심밥 건늬는 사람 몇할이 되는지 항간에서 쉬쉬하는 말 정도는 알아야 한다. 경무대에 들어박혀 백성의 신음소리, 허덕이는 강토의 맥도 모르고 천상천하유아독존으로 흥타령만 부르니 이 서울이 무슨 꼴이 돼가나. 저눔들을 이 경무대에 두고서는 이 땅이 흥하는걸 보기는 틀렸어. 에익, 참…)

류선민은 년놈들의 무사안일한 독선과 전횡에 절망과 비애까지 느끼며 속깊이 탄식하였다.

병든 이 사회의 종처가 어디서 시작되였는지 어렵지 않게 진단이 된다.

겨레의 번영과 행복에는 티끌만 한 관심도 없는 이방의 계집이 서울의 왕후자리에 독사처럼 틀고앉아 정사를 흔들었다는것은 다시는 이 땅 력사에 용납해서는 안되는 정치만화였다.

프란체스까를 정점으로 하고 리승만의 경호실장 곽영주를 비롯한 간신배들에 의하여 경무대주위에 두텁게 둘러친 《인의 장막》이 어느 정도로 리승만을 눈먼 바보, 귀먹은 허수아비로 만들어놓았는가 하는것은 반년후 리승만이 경무대에서 도망치던 그날에 있었던 비화가 세월을 넘어 전해져 후세의 인간들을 아연하게 한다.

… 리승만은 남조선전역에 제놈을 때려죽이라는 구호를 내건 항쟁이 일어났다는것을 모르고있었다.

경무대의 울타리를 에워싼 폭동군중의 노호한 함성이 들려오자 리승만은 경호실장인 곽영주에게 《왜 바깥이 이리 소란스러우냐?》고 물었다.

곽영주는 천연스럽게 허풍떨었다.

《네번째로 되는 각하의 대통령선거를 축하하러 온 환영군중입니다.》

리승만에 대한 완전한 의미에서의 우롱이고 기만이였으며 장난이였다. 이것이야말로 곽영주나 아첨쟁이들이 저지른 대역부도죄였으나 그들은 그것이야말로 충정이라고 인정하고있었다.

바깥에서 경무대로 돌입하는 봉기자들을 제지하려고 경무대경찰들이 총성을 울리자 리승만이 다시 물었다.

《저 총소리는 뭐야? 시끄럽다! 축하는 내 고맙게 받아들이니 이제는 그만하고 물러들 가라고 해라.》

그러자 곽영주는 또 능청스럽게 둘러댔다.

《각하, 저건 공산분자들과 야당것들이 경무대로 몰래 들어오기에 공포를 쏘는것입니다. 하지만 각하께서 개의하실만 한 일은 아니니 마음편히 집무를 보아주십시오.》

소가 웃다 꾸레미 터질 이런 희극을 놓고 어느 놈의 죄상부터 따져야 할가.

끝까지 집권자를 속여먹다가 종당에는 민중의 주먹에 쓰러뜨려버린 아첨쟁이들이나 그런 얼빠진 놈들을 옆구리에 끼고 최후의 시각까지 민중을 등져온 리승만이나 프란체스까나 같고같은 흉물이다.

리승만은 력사가 이미전에 만들어낸 이러한 교훈을 알려고 하지 않았다. 애초에 그에게는 민중이 력사의 주인이며 력사를 밀고나가는 동력이라는 진리는 안중에도 없었던것이다.

리승만에게서 백성이란 임금의 타고난 령험과 초인간적의지에 따라 움직이는 개미나 벌레와 같은 곤충무리였다. 그 무리가 바로 임금도 만들어내고 영웅도 만들어내며 수틀리면 임금에게 주리대를 안기고 력사의 지경밖으로 내던진다는것을 리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리승만은 제가 길러내고 애지중지하는 간신배들의 요사와 허풍과 최면술에 질식되여 죽는 날까지 맹과니로, 귀머거리로 사는수밖에 없었다.

곽영주는 한시간후이면 다울링을 대신하여 미국대사의 자리에 앉은 맥코노이의 압력에 못이겨 《하야성명》을 하게 되는 리승만에게 이렇게 자뭇 절절하게 간청하였다.

《각하께서는 절대로 흥분하시면 안됩니다. 각하께서 장생불로하시면 백성도 이 땅도 억년입니다.》

이렇게 리승만은 장생불로라는 황당한 구실로 프란체스까가 둘러쳐놓은 《인의 장막》에 갇히워 백성의 하정이나 민심의 소재는 꼬물만치도 몰랐다. 다만 종신집권을 위하여서만 피눈이 되여 민중을 우롱하고 정사를 어지럽혔다. 참으로 웃지 못할 희비극이였다.

정치의 출발점과 현실감각을 잃은 통치자의 정사가 독재로 이어지고 그 독재가 리승만자신을 력사에 짝이 없는 전고미문의 패륜, 불륜의 죄인으로 만들어냈다는것은 이 땅의 력사에 새겨질 민족의 수치이고 불행임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우리 력사의 한토막을 어지럽힌 그 비화는 아직은 일곱달후의 일이였다. …

리승만은 류선민이 프란체스까의 암팡스러운 행악에 쓰거워서 입을 다물고있자 한마디 건늬였다.

《거 나도 임자에게 들려줄게 있네.》

리승만은 탁상초인종을 눌렀다.

비서가 들어서자 지시를 내렸다.

《아까 내무가 가져왔던 록음테프를 가지고 오게. 이 사람이 정신들게 한곡조 들려주라구.》

비서가 류선민을 흘끔 보더니 말없이 방에서 나가 록음기를 안고 들어왔다.

비서가 탁상우에 록음기를 설치하고 보고하였다.

《다 되였습니다.》

《틀어놓게, 크게!》

비서가 록음기스위치를 련결하자 록음테프가 빙글빙글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록음기에서는 오전에 형무소 소장방에서 벌어진 조봉암과 류선녀, 신창균과의 담화가 육성으로 슬슬 풀려나왔다.

류선민은 조봉암의 목소리에 접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홧홧 따가워졌다. 그들의 대화가 애간장을 녹이고 가슴을 허비였다.

하지만 벌써 서너마디에 마음의 금선을 울려주는 이야기들은 이미 인정이라고는 꼬물만치도 없는 랭혈의 야수로 변해버린 리승만에게는 화만 돋구는 흥분제로만 될뿐이였다.

《꺼버려!》

리승만은 록음기의 대화를 들으며 처연한 비감이 떠오르는 류선민의 낯빛을 살피다가 밸이 살아올라 호령했다.

화닥닥 놀란 비서가 얼른 록음기를 정지시키였다. 그가 록음기를 안고 도망치듯 방에서 나가자 류선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군방첩대나 정제관이 형무소 소장의 방에까지 손을 뻗쳤는가? 그놈들이 법무부를 뭘로 보는거냐, 장관이 조직한 일에도 이렇게 신경을 도사리고 못된짓만 벌려놓다니… 이왕 들통이 난 이상 피해설 필요가 없다.)

그러지 않아도 강심을 다져먹고 들어왔는데 리승만이 눈앞에서 놀아대는 꼴이 너무도 눈에 쑤악스러워 더는 입을 다물고있을수 없었다.

류선민은 리승만의 노기서린 눈길을 맞받아 태연자약하게 설명하였다.

《저건 내가 조직한 면회입니다.》

《어째서? …》

리승만이 류선민의 말꼬리를 물어채듯 성급하게 뒤좇았다.

《그건… 오전에도 설명드린바와 같이 조봉암의 개준을 유도해야 되겠기에…》

《그건 어째서? …》

《어째서라니요? … 그건 국내외의 동향을 참작하여 그리고 각하의 대동단결의 뜻을 받들며 각하의 영상도 고려하여 그에게 특사를 베풀어…》

《흥!》

류선민이 슬쩍 추어올리며 하는 말에 리승만은 코방귀부터 야단스럽게 날렸다.

《뭐야? 특사?》

리승만은 살진 주먹으로 책상을 소리나게 내리쳤다.

《말두 안되는 소리! 이태가까이 재판을 끌어오며 내 면상에 실컷 매운재를 뿌려놓고는 이제 와서는 특사야? … 안돼! 임자동생이 극형이 선고된 사형수에게 청혼을 한다고 해서 그년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했더니 이건 그 오라비까지도 미쳐버렸군. 임자 혹 래년선거후 조봉암의 법무부 장관이 되고파 안달복달하는건 아니야?》

리승만이 이 정도로 빈정거리며 야료를 부리자 류선민이 밸통이 우쩍 살아났다. 리승만의 밑에서 지금껏 갖은 수모를 받으며 지내왔는데 더는 굴욕을 참아낼수 없었던것이다.

해가 바뀌고 상종이 잦아질수록 류선민은 독재자에 대한 환멸과 적개심을 금할수 없었으며 언젠가는 이 두상과 결별하게 될것이라고 은연중에 마음의 준비를 익혀왔다.

이제는 때가 온것 같았다. 더는 공생공존할수 없는 인간추물이다.

천하무정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열번도 울리게 할 류선녀의 그 애절한 정과 그를 마다해야 하는 조봉암의 고결한 인간찬가에 접하고도 티끌만 한 가책이나 실오리같은 련민의 감정도 느끼지 못하는 이 비정한 랭혈의 인간을 어떻게 그냥 국부라고 모실수 있느냐. 제 동료, 제 백성이 흘리는 눈물앞에 이렇게도 랭담한 인간에게 어찌 더이상 민족을 맡길수 있느냐. 이제 더는 감정도 리성도 이미 썩어문드러진 독재자의 팔섶을 붙잡고 살수 없다.

류선민은 덧걸이를 치려고 결심했다.

《각하! 내 아무리 각하에게 충정을 바치고저 해도 내 힘과 지혜가 부족되여 마음뿐이니 각하를 더이상 보필하기가 어렵습니다.》

이것은 류선민이 리승만앞에서 처음으로 자기의 인간다운 체면과 존엄을 세워본 소리였다.

그러나 간신배들의 요사와 아첨에 습관되여온 리승만은 류선민의 가느다란 도전까지도 용납하지 않았다.

《옳지! 이제는 뒤잔등에 배수진까지 치고 나서는구만. 하지만 임자는 아직도 이 우남의 장관이야. 제 마음대로 말할수도 운신할수도 없는 공인의 몸이야. 아직까지 임자는 상명하복의 계률에 묶이워있다는걸 명심하게. 좋아! 내가 자네에게 힘도 지혜도 보태주지. 자, 이걸 받게.》

리승만은 책상우에 있는 려권을 그에게 내밀었다.

《이건 뭡니까?》

류선민이 받다말고 거기에 또 어떤 으스스한 흉계가 숨겨져있을듯싶어 저도 모르게 록록치 않게 물었다.

《래일 유럽에 대표단을 떠나보내네. 여러 사람의 숙의끝에 임자를 단장으로 천거하였네. 영국, 프랑스, 스위스, 노르웨이를 돌아보고 오게. 그동안 사실인즉 임자가 내밑에서 로심초사가 컸는데 대처에 나가 바람도 쐬이고 유럽의 문물을 많이 배워가지고 오도록 하게.》

류선민은 리승만이 아직도 들고있는 려권을 선뜻 받을수도 없고 받지 않을수도 없어 무척 난처했다. 리승만이 자기를 멀리 내쫓아버리고 조봉암에 대한 처형을 강행하자는 속심이 틀림없다. 두상의 흉측한 속내가 어렵지 않게 짚이웠다. 그는 마지막으로 다시한번 밸통을 세워보았다.

《난 지금 멀리 려행길에 오를 형편도 못되였습니다. 아시다싶이 근래에 심장증세가 좋지 않아 애를 먹고있습니다.》

《그러면 마침이군. 이번 기회에 심장치료도 받고 오게. 유럽에서 내과질환은 도이췰란드가 앞섰다니 그곳에 가서 진단도 정확히 받고 가능하면 거기 떨어져서 입원치료도 받구 오게. 돈은 대사관에서 융통해 쓰게. 자, 받게.》

류선민은 낯빛이 컴컴해졌다. 더 빠져나갈수 없다는것을 알았다. 하는수없이 려권을 받았다.

이미 타산하고 준비되여온 계책임에 틀림없다. 퀴퀴한 밸속이 들여다보이는 수작이다. 그러니 리승만은 무슨 수를 쓰든지 기어이 당분간 자기 자리를 비워놓게 할것이다.

사실 류선민을 빼돌리려는 계책은 어제 밤늦게까지 벌어진 경무대 밀담에서 제기되여 오늘 전격적으로 꾸며졌다. 밀담에는 대법원의 대법관과 정제관, 검찰총장이 참가하고 미국대사관에서도 정치참사가 참가하였다. 토의된 문제는 조봉암의 처리였다.

리승만이 조봉암의 처리가 늦어진다며 더는 늦추지 말고 사흘안으로 끝내서 세상여론도 가라앉히라고 하니 부산정치파동때 내무장관노릇 하면서 악명을 떨친바 있는 대법관이 그 말을 기다리기나 한듯 한마디 비치였다.

《각하의 령대로 하자면 류선민을 물러서게 해야 합니다.》

《류선민?》

《류선민을 법무자리에 앉혀놓고서는 조봉암을 쉽게 처리할수 없습니다. 류선민법무가 은근히 뒤에서 재판의 뒤다리를 잡아당기고있습니다. 만약 사흘안으로 대법원이 이미 계류중에 있는 조봉암의 항소를 기각시켜 판결을 마무리짓는다고 하여도 그 집행이 빠른 시일내에 될리는 만무입니다.》

《그건 어째서? … 판결이 끝나면 그대로 처리하는데 무슨 또 잡소리야?》

《사형집행은 사법계를 총괄하는 법무부 장관이 비준하여서만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전례를 보면 사형집행은 판결후 대체로 한두해를 지나서 여론을 봐가며 끝내군 하였습니다. 류선민이 관례를 거들면서 사형집행에 제동을 걸면 각하의 령이 있더라도 별수가 없습니다.》

《그것 또 문제로군.》

리승만이 그렇다면 류선민을 즉각 해임시키자고 하니 미국대사관 정치참사가 손을 내저었다. 현시점에 와서 재판진행을 구체적으로 장악하고있는 법무부 장관을 해임시키는것은 시한탄을 묻어두는것이나 다름없다는것이였다.

그 소리가 그럼직하였다. 류선민을 빼돌리는 문제를 걸고 론의가 분분하여졌다. 이리하여 그를 당분간 해외에 몰아내는것이 묘수라고 결정되였다. 두루 탐문하던 끝에 래일 오후에 서울을 떠나는 유럽고찰단의 단장으로 발탁되여 오전중으로 려권까지 발급하게 되였던것이다.

이런 케속까지 모르고있는 류선민이였지만 그대로 물러설수는 없어 려권을 받아들고도 한소리 더 해보았다.

《혹 이것이 조봉암재판과 관련되여 취해진 조치가 아닙니까?》

류선민의 걸고드는품이 만만치 않자 리승만이 본색을 드러내고 다시금 화를 내기 시작하였다.

《그렇다고 하세. 어떻다는건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리가 임자가 간첩 조봉암을 감싸고 돈다는거야. 악질친공판사 홍병삼도 임자가 직접 천거했다면서? … 그녀석이 어떻게 죽을 써놓고 뒈졌나? 게다가 요즈음 자네가 뭐 고등법원이 재판을 날치기로 했다며 으름장을 놓고 대법원에 대고도 삿대질이라면서?》

《각하, 그건 재판에 참가한 사람들의 일치한 평가입니다. 고등법원이나 대법원의 재판장이라는 사람들이 기소장도 다 읽지 않고 판결하였다고 합니다. 내가 알아보니 그 사람들이 그렇게 됐노라 실토했는데 그래 이 법무부 장관은 뭘 하라고 임명장을 준겁니까? 그런 무법, 불법을 발가내서 엄단하고 바로잡으라는게 제 소임이 아니겠습니까.

난 조봉암이 항소를 제기하였다고 해서 이번에는 그런 과오가 재현되지 않도록 하라고 지시하였을뿐입니다. 절제없는 힘은 만능도 아니고 득책도 아닌줄로 압니다. 힘의 절제야말로 정치의 최고미덕인줄 압니다.

지금 여기저기서 고등법원과 이번 대법원 재판에 참가한 법관들을 권력람용과 직무유기죄로 고발해오고있습니다. 꺼꾸로 그 사람들에 대한 재판이 벌어지는 날이 오면 그 후과가 어떻겠는지 저는 두렵습니다. 그에 대한 총적책임은 제가 질게 아닙니까?》

《뭘? 객적은 수작! 그따위들때문에 법무가 손이 떨린다? … 구데기 무서워 장 못 담글가. 자고로 승자에게는 죄상을 묻지 않는 법일세. 그런 놈들은 모조리 립건해서 간첩동조죄를 매겨 족쇄를 채워. 임자도 근신하는게 좋아. 지금까지 임자의 행적을 두루 적어놓으면 임자야말로 <보안법>으로 목 쳐버려야 할 대상이야. 임자 목 노리는 녀석 한둘인줄 아나?

동생의 치마폭에 놀아난다는 말도 무성해! 거드름일랑 작작 피우게. 장관감투까지 씌워주니 세상천지가 눈아래로 보이나? 참새가 황새흉내 내다가는 가다리가 찢어지네. 내 실은 자네를 가상히 여겨 호미난방의 처지에서 잠시 빼돌리니 그렇게 알구 래일 서울을 떠나게. 자, 물러가게. 임자가 서울을 떠날 때까지 신변관리를 해주라고 곽영주에게 말해놓았으니 호의로 알게.》

《신변관리? … 그러니? …》

류선민은 리승만의 귀맛좋은 호의에 깔린 엉큼한 궁냥이 대뜸 가량이 되였다. 이제부터 서울을 떠날 때까지 곽영주의 사냥개들을 붙여 외계와 차단한다는것이다. 일종의 연금이요, 구속이다.

류선민은 분노로 얼굴이 주토빛으로 달아올랐다. 서울에 떨어져있어도 리승만은 팔다리를 묶어놓고 조봉암을 위해서는 그 어떤 움직임도 허용치 않을것이다. 더는 빌어볼수도 없다. 행여나 하는 한가닥의 희망마저 사라져버렸다.

《각하, 떠나겠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말씀드려도 좋겠습니까?》

《임자 말 더 듣고싶진 않네만 꼭 요긴한 말이라면 어디 해보게. 내 들어주지.》

리승만은 선심이나 쓰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류선민은 길게 심호흡을 하고는 잠시 주밋거렸다. 하고싶은 말이라 해서 허락까지 받아놓고보니 신중해졌다.

오늘의 력사는 결코 오늘로써 끝나는것이 아니다. 오늘에 씌여진 력사는 구름처럼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것이라는것을 이 두상태기가 알고있을가. 력사는 반드시 후손들에게 전해져 재인식되며 오늘의 법정이 후손들이 세워놓는 보다 공명정대한 량심의 법정에서 다시 심판받게 되리라는것을, 그것이 력사의 엄정한 계률이라는것을 알고있을가. 인류사에 영원히 사라진 시대가 없었으며 없을것이라는것을 오늘의 권력에 환장이 되여 력사의식이 마비된 저 두상이 과연 알고나 있을가.

저 령감은 지금 더러운 권세를 휘둘러 아름다운 민족의 넋을 끝끝내 매장하려는 비렬한 행위가 이 시대의 눈과 귀를 막으면 력사의 흑막속에 영원히 묻히리라고 믿고있겠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가.

류선민은 드디여 용기를 내여 말하였다.

《각하! 이 려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저도 알만 합니다. 법전문가인 제가 당신에게 감히 진언하고싶은것은 이 시대가 써놓은 력사를 다시 쓸 때가 반드시 올거라는겁니다. 난 력사의 법정에 나의 이름이 더럽게 떠오를가봐 두렵습니다. 때문에 저는 이 려권이 다행스럽기도 합니다.》

《흥! 방자하다! 이 시대가 써놓는 력사가 어떻게 된다구? … 력사의 법정이 어떻구 어떻다구? … 걷어치워!

조정에 식자있는 작자가 없어 끌어들였더니 당초에 교만방자하기란… 이제는 이 우남까지 훈계할텐가! 잠꼬대는 그만 외우고 길떠날 차비나 하게!》

류선민이 홱 돌아서서 나가려고 하는데 《장관님!》 하고 프란체스까가 비린청으로 불러세웠다.

류선민이 그 소리에 발목이 잡혔다.

《어쩌면 장관님이 그런 막말을 여쭐수 있나요? 그리고 각하의 속을 마구 허벼놓고 사죄의 말 한마디 없이 돌아서면 어쩐다는겁니까? 장관들중에서도 성인이라 불리우는 류장관님이 충정은 고사하고 오늘은 어찌된 일인가요?》

프란체스까가 약이 올라 총알같이 쏘아댔다.

《어느것이 충정인지, 언제면 깨도가 돼서 이 땅의 백성들을 귀하게 여기게 되겠는지…》

류선민은 훈계하듯 받아넘기고는 입을 닫아붙였다.

오늘처럼 리승만이나 프란체스까가 하치않은 초라한 존재로 보이기는 처음이다. 지금껏 상대조차 안되는 이따위 족속들에게 눌리워 허리를 굽실거려오다니… 인간된 체모든지 지성에 있어서 금새가 눅거리임이 틀림없는것들을 상전으로 개올려왔으니 가소롭기만 하다.

《아아, 됐네, 됐어! 저 사람이 사죄를 할 사람인가!》

리승만이 하늘 높은줄 모르고 뻗쳐있던 자기 마누라의 위신을 길지 않은 말로 진창에 꾸겨박는 류선민의 여유작작한 태도에 더욱 기광이 나서 살진 볼을 푸들거리고 홱홱 손을 내둘렀다.

《하지만 임자, 단단히 명심하게. 입은 화단의 문이요, 혀바닥은 목을 베는 칼이라 입을 다물고 혀바닥을 깊이 감추어야 간데마다 편안할수 있다는 말이 있네. 일찌기 연산군이 궁궐 시중군들에게 차고 다니게 했던 <신언패>의 글이야. 내 이번에는 믿고 하는 소리로 들어두겠네만 두번째는 용서가 없는줄 알게.》

말을 끝내자 리승만은 손을 연신 흔들며 내쫓는 시늉을 하였다. 어찌도 결이 났던지 삼복철 더위들린 개처럼 헐떡거렸다.

그러나 류선민은 이제는 리승만의 세도정치를 그냥 스쳐넘길수 없다는 오기가 생겨난지라 입아귀에 힘을 넣어 천연스럽게 받아넘겼다.

《연산군이 왜 그렇게 했겠습니까? 그는 자기의 더러운 악정이 세간에 전해지는것이 두려웠기때문이였을것입니다. 연산군은 그렇게 주절거리며 악정을 펴다가 나중에는 교동도에 끌려가 불운의 명을 끝냈습니다. 각하, 속담에 나는 바담풍해도 너는 바람풍해라는 말이 있습니다.》

류선민은 주저없이 응접실의 문을 향해 구두뒤축으로 두터운 주단을 무겁게 찍으며 걸어나갔다.

《뭣이?! 그러니, 네 입건사부터 잘해라? … 발칙하다!》

치밀어오르는 노기를 누를수 없어 또 한번 호통질하려고 하던 리승만은 프란체스까가 서둘러 앞을 막아서는 바람에 자리에 도로 앉았다. 그리고는 코김을 휭휭 불어던지며 병풍을 둘러보았다.

올해초에 벽 한면을 꽉 채웠던 산수화를 걷어내고 그대신 스무폭짜리 대형병풍을 가져다가 방안을 휘감아놓았다. 병풍에는 쇠물처럼 이글거리는 아침바다우로 불타는 태양이 둥실 솟는 동해의 해돋이며 흰구름에 잠긴 층암절벽과 록음속에 갖가지 산새들이 지저귀는 여름의 한나산풍경과 단풍이 빨갛게 물들고 벽계수에 비낀 달빛이 정가로운 계룡산의 가을이며 만상을 황홀한 노을빛으로 물들이며 바야흐로 수평선 한끝으로 미끄러져내리는 저녁해를 그린 서해풍경이며 아름다운 화폭들이 스무폭이나 련이어 펼쳐져 자연의 일만경치를 한눈으로 감상할수 있다.

경호실장 곽영주와 그림쟁이들이 모여들어 이 집 주인의 변덕을 달래고 주인의 취향에 가까이 접근하도록 암중모색을 한 끝에 이 강산의 좋은 풍치를 이것저것 다 담아보려고 의논이 되였다는데 리승만도 백번천번 다시 봐도 싫지 않은 명화중의 명화라고 격찬해온다.

리승만은 이 응접실에 들어서면 대자연의 오묘한 절승경개 한가운데 나선듯싶다고 혀를 차면서 그림을 그려온 경호실장 곽영주와 미술가들에게 여러번 희귀한 물자들을 듬뿍 안겨주기도 하였다. 사실 심술기 심한 리승만이 이 그림을 감상하며 달아오른 속을 가라앉힐 때가 드문하다.

그런데 그의 눈에 이날 비껴든 병풍은 또다시 다른 의미에서 심경을 심히 자극하는것이였다. 마치도 자기의 한생을 정배살이로 명을 끝낸 희세의 폭군 연산군의 말로에 비겨 비꼬아댄 류선민의 의뭉스러운 말이 병풍의 화폭들과 꼭 맞아떨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던것이다.

병풍의 내용을 다시 음미해보니 사품치는 파도를 달고 힘겹게 솟아오른 해가 꽃피는 봄계절과 수목이 푸르싱싱한 여름과 과일이 주렁지고 단풍이 든 가을을 펼쳐놓고는 서쪽바다 한끝으로 미끄러져내린다는것으로 끝나고있다. 그러니 해도 이제는 길이 막히니 서해의 수평선에 이르자 솟아오른 바다너머로 사라진다는것이 아니냐.

《음- 고약하다!》

리승만의 입새로 저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새여나왔다.

《마미!》

《말씀하세요.》

《당장… 저 병풍을 걷어내! 불태워버리게!》

《예? … 어째서요? 령감님께서도 명화중의 명화라고 이만저만 칭찬하시지 않았나요.》

너무도 뜻밖의 말에 그 녀자의 눈이 올롱해졌다.

《그때는 그때구… 걷어내! 어쩐지 불길하다.》

《그러면? … 곽실장더러 어떤 그림을 그려오라구 할가요?》

프란체스까가 벌써 세번째나 걷어내라고 하는 응접실의 그림으로 해서 여느때없이 침통해진 령감의 변덕과 속궁냥이 가량이 되지 않아 조심스럽게 의논조로 물었다.

《그만둬! 시끄럽다! 그녀석들이 흉측하다니깐! 이 우남과 숫제 숨박곡질이야?》

리승만은 마누라의 소리는 들은둥만둥 자리에서 일어나 침실을 향하여 뚱기적거리며 걸어갔다.

프란체스까는 리승만이 자기를 무시하고 화를 내며 자리를 뜨자 올롱하게 패여든 눈이 뎅그래졌다. 이제까지 한번도 없던 일이였다. 여느때같으면 아양을 떨며 리승만을 위로하고 류선민을 죽일놈이라고 욕질하며 부축하여갔겠으나 그 녀자는 그 자리에 못박힌듯 서있었다.

그는 침실로 향하는 리승만의 뒤모습을 불안하게 지켜보았다. 제네바를 떠난지 서른해가까이 동거생활을 하면서 리승만의 변덕에 습관되여온 프란체스까다.

리승만의 정사에서 절반은 욕설과 앙심깊은 복수였다. 리승만은 자기의 말과 행동거지를 놓고 언제나 후회를 몰랐으며 따라서 그 어떤 고민이나 동요나 반성이라는것이 없었다. 자신에 대하여 실망을 느끼거나 락심하는 일도 없었다.

오랜 인생살이에서 터득한 여러가지 경험과 권위와 지식으로 하여 리승만은 자기를 언제나 만능의 인간으로, 사람들을 통솔하기 위하여 태여난 초인으로 자고자대하여왔다. 특히 지난 10여년간 서울통치권을 타고앉은 리승만의 권위의식은 하늘끝에 닿아 미국것들의 비위를 맞추기는 했어도 그밖의 인간들앞에서는 그들의 머리우에 군림한 신같은 존재로 행세하여온다.

리승만은 지금까지 언제 한번도 백성들이나 수하심복들에게 애틋한 정 같은것을 가져본적이 없었으며 그들의 하정이나 비난에 귀를 기울이거나 재음미하는 일도 없었다. 그에게는 오직 자기라는 존재만이 있었고 자기의 말과 뜻이 이 세상의 정의라는 권위의식에 사로잡혀있었던것이다.

그런데 지금 리승만은 류선민의 말에서 완전히 의기소침해졌으며 그 어떤 딱히 이름지을수 없는 불안과 겁에 질려있다.

프란체스까는 이즈음에 령감이 시름겨운 한숨을 내쉬며 큰 까닭없이 화증을 터뜨리는것을 자주 목격하군 한다.

조봉암때문일가?

그럴수도 있다. 조봉암때문에 오랜 세월 속앓이를 해온다. 그런데 조봉암문제도 이제는 끝나게 되지 않았는가.

프란체스까는 령감의 신상에서 나타난 변화가 불안하였다. 그것은 상서롭지 않은 예감을 자아내는것이였다. 오랜 세월 경무대 안방의 군주로 살아온 자기마저도 무시하고 힘겹게 걸어가는 령감의 뒤모습에서 생명의 호흡이 꺼져가는 늙어빠진 호랑이를 보는듯 한 불길한 환영에 사로잡혀있었다. 분명 지금 리승만은 가까워진 황천을 의식하며 걸어가는게 틀림없다.

급기야 프란체스까는 온몸을 오싹하게 하는 소름을 느끼며 리승만이 사라진 곳으로 황황히 따라갔다.

류선민은 다음날 아침 서울을 떠났다.

류선민은 도이췰란드에서 조봉암에 대한 사형소식에 접하자 귀국을 포기하고 리승만의 장관직에서 사임한다는것을 공식적으로 밝혔다. 그리고 도이췰란드에 망명한다는것을 서울에 통보하여왔다. 망명의 리유를 리승만의 반민중적인 악정이라고 명백히 밝혀놓았다.

이때로부터 반년후 폭정 13년이 드디여 종식되여 리승만의 조정에 몸을 담아온 장관들이 줄줄이 감옥으로 끌려갈 때 류선민만은 반리승만계의 인물로 오히려 몸값이 두배세배로 뛰여올랐다.

류선민이 서울을 떠난지 사흘후 대법관이라는자가 이른바 3심판사들을 거느리고 대법원의 기자회견장에 나타났다. 그들모두는 이미 대법원의 항소재판때 재판정을 차지하고있던 어용판사들이였다.

조봉암의 항소처리에서는 법적견지에서 피고로 되여야 할자들이 판사로 류임되여 저희들이 판결한 형벌의 법적타당성과 부당성을 시비하게 된것이다. 그러니 항소처리가 어떻게 되리라는것은 불보듯 뻔한것이였다.

대법관은 기자들에게 조봉암피고인의 항소는 기각결정되였다고 짤막하게 공포하고는 기자들의 질문도 받지 않고 황황히 기자회견장에서 꽁무니를 사렸다.

대법원의 항소기각결정이 변호인단에 전달되였다.

변호인단은 이것은 법륜리에 어긋난다는 성명을 맞받아 발표하고는 한쪽으로 윤기중, 신창균, 우달수까지 달라붙어 밤을 새워가며 고등법원재판부터 항소기각결정에 이르기까지의 대법원의 천인공노할 죄상을 성토하는 항소신청서를 만들었다.

류선녀가 이 소식을 받고 연경이와 함께 오빠의 집으로 달려갔다. 그러나 류선민의 집에서는 오빠가 유럽으로 떠났다는 소식이 그들을 기다리고있었다. 경무대 경호실장 곽영주가 비행장까지 동행하고 환송까지 하였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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