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0 회)

제 9 장

1

 

 

《너희들이 왔구나!》

조봉암은 철창을 사이에 두고 와락 안겨드는 자매와 사위를 두팔을 내밀어 안아주며 벌씬 웃었다. 그는 훌쭉 여윈 두 딸의 얼굴을 측은한 눈으로 여겨보다가 물었다.

《어찌된 일이냐? 오늘은 너희들만 왔구나.》

《아버님, 윤기중선생과 신창균선생이 오늘 면회는 저희들만 가도록 관심을 돌려주었습니다.》

김봉무가 대답하였다.

《음, 그래? …》

《어머님은 고열이 나서… 바깥일을 일일이 맡아 주관하느라고 어머님이 수고가 많으십니다. 차입품들도 어머님이 챙겨주시군 합니다. 아버지에게 되도록 운동을 많이 하시란다고 전해달랬어요.》

《그래? 음, 고맙구나. 그런데… 연경아!》

조봉암은 연경이가 류선녀를 어머니라고 례사스럽게 부르는것이 마음에 걸리여 타일렀다.

《선녀선생을 어머니라고 부르지 말아라.》

《왜요?》

《그래선 안된다.》

《선녀선생님이 오늘 아침 저희들보구 하신 말씀이 있어요. 이제부터 그렇게 불러달라고… 여러 말씀을 하셨는데… 아버지, 저희들도 선생님의 말씀이 옳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그렇게 부르기로 하였습니다.》

《음… 그건 인륜이 아니다. 그리고… 지금 내가 선녀선생의 마음을 받아줄 처지가 됐느냐. 됐다, 그 말은 그만하자. 그런데 맏이는 왜 눈물만 흘리느냐? 과히 상심을 말아라. 길가던 사람도 차에 치워 비명에 숨지기도 하고 침실에서 자다가 급사하는 사람도 있는데 륙십이 넘도록 제 하고싶은 일을 하다가 그 일때문에 죽는다면 그리 한될게 없다.》

조봉암이 맏딸의 눈굽을 닦아주며 타일렀다.

《아버지!》

효경은 조봉암의 가슴에서 머리를 떼지 못하고 그냥 흐느꼈다.

《그쳐라. 내가 3심에 불복하여 항소는 했으나 마찬가지일게다. 리승만이 날 살려둘리 만무하다. 난 다만 내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의 통일과 민주발전에 거름이 되기를 바랄뿐이다.》

장인이 어쩌면 마지막말을 남기고있다는 비장한 생각이 들어 김봉무는 눈물이 왈칵 솟구쳐올랐으나 강잉히 눌러놓으며 그에게 힘을 주고싶어 왼심을 썼다.

《아버님! 절대로 맥을 놓지 마십시오! 힘을 내십시오! 아버님의 구명운동이 서울은 물론 세계적판도에서 벌어지고있습니다. 자유당과 사법, 행정권의 고위인물들도 적극 나서고있습니다. 법무부 장관도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로성팔선생도 뛰고있습니다. 미국대사도 만나고 리기붕이도 만났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도 그렇고 미국에서도 항의투쟁이 거세게 일어나고있습니다. 천령배선생이 큰몫을 담당하고있습니다. 북에서도 민주인사 조봉암선생을 석방하라고 들이대고있답니다.》

《북에서도?! …》

《예.》

《음… 정말 고맙구나! 북녘의 사람들을 언젠가는 꼭 찾아가 만나고싶었는데… 그 사람들 살아가는 모습을 꼭 보고싶었다. 참, 최금룡이 지금 어떻게 하구 지내는지 모르겠느냐?》

연경은 갈린 어조로 대답하였다.

《고생하는것 같습니다. 그가 속한 민주쟁취청년동맹의 비밀을 내놓으라고 그냥 달구는것 같습니다. 그의 석방을 요구하여 각지에서 청년들과 대학, 고등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벌리고있습니다. 그 조직이 간단치 않은것 같습니다.》

연경은 자기도 그 조직에 정식 가입하였다는것을 암시라도 할가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 역시 조직비밀이라는 생각이 언뜻 들었던것이다. 민주쟁취청년동맹은 확실히 진보당과는 그 성격과 기질이 완전히 판판 다르다. 전투적이며 생기발랄하고 고도로 째여있는 조직이다. 연경은 조직활동에 직접 참가하게 되면서 이런 확신과 자부심이 갈수록 커져갔다.

《그래서?》

《그 사람이 쉬이 입을 열 사람입니까?》

《그래, 최금룡이야말로 뜻이 높고 리상이 크며 억세인 이 땅의 참된 젊은이다. 그 사람이야말로 투사다. 변혁의 새시대가 필요로 하는 젊은 투사야. 연경아! 난 요새 그 사람을 자주 꿈에서 본다. 용서도 빌고 그 사람과 언쟁도 해본다. 그 사람 말이 아마도 옳은가부다. 이 조봉암이라는 정치가는 자기 시대를 다 산것이 확실하다. 이제는 우리도 그 사람들에게 자리를 비켜주는것이 현명할가부다. 새 력사의 탄생은 새 인간의 탄생으로부터 시작되는가부다.》

《아버지, 그런 말씀 마세요. 아버지는 어제도 오늘도 래일도 민중이 사랑하는분이세요. 누구도 아버지를 대신할수 없었어요. 그 사람도 법정에서 아버지를 자랑하지 않았나요? 나도 아버지를 자랑스럽게 생각해요.》

《음, 고맙다. 하지만… 이제는 최금룡이네 시대다. 최금룡이처럼 세속에 오염되지 않고 개인의 리해관계나 당리당략을 떠나 오로지 민족의 장래만을 생각하는 순결한 정치인들이 보다 현실적이고 과단성있는 정치무대를 펼쳐야 할 때가 왔다. 최금룡… 정말 보고싶구나. 그녀석과 해종일 론쟁하고도싶다. 나는 요새 사람의 가치에 대하여 자주 생각하여본다. 이를테면 삶의 질에 대해서 말이다.》

조봉암은 자기가 꺼낸 말에 스스로 흥분되였다.

《삶의 질이란 무엇일가? 삶의 가치를 계산해내는 공통분모가 무엇일가? 그건 매개 사람들이 사회와 겨레에게 얼마나 유용한가 하는것에 따라 평가되여야 한다고 생각된다.

우리 세대는 분렬세대다. 분렬세대의 사람들의 질은 나라통일에 바쳐진 성의와 노력으로 평가되여야 한다. 그렇다고 본다면 우리는 자기 삶을 부정할수는 없다. 나나 우리 진보당은 나라의 통일을 위하여 힘자라는껏 싸워왔다. 그거면 된다. 난 사실이지 자기 삶을 이렇게 총화짓는것이 더없이 행복하다.

사람은 최후의 순간까지 자신을 다듬어야 한다. 한생 제대로 살다가도 개죽음때문에 그 인간의 질이 저질로 평가될수도 있고 한순간의 실책때문에 저주로운 락인을 받는이도 있다. 난 이런 불행한 인간을 적지 않게 보아왔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자신에 대하여 기쁘게 생각한다.》

그때 면회실문이 열리더니 김정두를 대신하여 새로 임명되여온 간수부장이 들어섰다.

《시간이 되지 않았나?》

간수부장이 립회간수에게 물었다.

《예, 3분정도 남아있습니다.》

《그래? … 죽산선생님! 이젠 끝내주십시오. 나와 함께 형무소 소장방으로 가야 합니다. 법무부에서 선생님과 담판을 하겠답니다.》

《담판? 나하고 말이요? 음, 좋소. 끝내야지. 자, 얘들아!》

효경이가 먼저 아버지에게 절을 올리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은채 소리내여 울었다.

김봉무가 그를 부축하였다.

효경이가 자리를 비켜주자 연경이가 아버지앞에 나서며 애써 방긋 웃어보였다.

《아버지… 웃는 모습 보여주어요.》

《우리 덜렁이… 사랑한다!》

조봉암이 철창사이로 팔을 내밀어 둘째딸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아버지, 약속해요. 이렇게 웃으시며 여길 나오시겠다구.》

《허허… 약속하구말구. 금룡이를 자주 찾아가거라. 내 인사도 전하구. 나도 정말이지 민중세상에서 살고싶다. 아마도 그 민중세상은 이 조봉암이 아니라 최금룡이네가 만들어낼것 같구나. 이 말도 꼭 전해라.》

《예, 꼭 그렇게 전하겠어요.》

조봉암은 면회실문을 열고 긴 복도를 걸어가면서도 호탕하게 웃었다.

《효경아! 연경아! 봉무! 내 웃으면서 신당동집으로 돌아가마, 허허허…》

청높은 조봉암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복도를 쩌렁 울리였다.

조봉암은 간수부장을 따라 형무소 소장의 사무실로 갔다.

감방들은 썩은 냄새가 코를 찌르고 여름이라 습기가 찬 비좁은 방들인데 소장의 방에 들어서니 서양향수내가 진동하고 사면에 바다풍경을 그린 산수화가 붙어있어 마치도 해솟는 바다가에 선듯 시원하다.

넓은 방에는 남녀가 나란히 앉아있다가 문기척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들은 류선녀와 신창균이였다. 법무부의 담판이라는 소리를 듣고 무겁게 걸어왔는데 뜻밖의 귀한 손님들이다.

조봉암의 너부죽한 얼굴에 기쁨이 물결쳤다.

《선생님!》

두사람이 일제히 조봉암을 부르며 달려왔다.

《허허, 이게 어찌된 일이요? 법무에서 담판하러 왔다기에 그쪽 사람들이 온줄 알았는데…》

《예, 그렇게 되였습니다. 방금전에 선녀선생님 모시고 류선민장관을 만나고 오는 길입니다.》

《그렇소? 나도 방금 애들을 만나고 오는 길이요. 선녀선생이 고열이 나서 몸져누웠다고 하더니 몸조리 좀 할게지 어째 바람을 쏘이고있소? 여름철의 감기나 고열은 좋지 않다오. 선녀선생 얼굴이 그사이 제일 상했소.》

《바깥에 있는 저희들이야 고열이 난들 뭐랍니까? 형무소 접수대기실에서 방금 롤만선생을 만났습니다.》

《롤만? … 롤만선생이 어떻게? …》

《선생님일때문에 오셨답니다.》

《어, 나때문에 대양을 넘었단 말이요?》

《예.》

《그러면 왜 들어오지 않구… 오늘은 면회일이 되여 일없겠는데.》

《우에서 특별지시가 내렸는지 가는 곳마다 자기에게는 대문을 열어주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음, 그럴거요. 원래 롤만선생이 서울에 있을 때도 나와 사귀는걸 리승만이나 대사나 버드 같은 족속들이 싫어했소. 나중에는 모해를 해가지고 추방하여버렸소. 그러니 그 사람을 받자고 할탁 없지. 하여튼 고맙구만. 만리 하늘길을 날아오다니…》

《이제 따님들이 나오겠으니 함께 신당동집으로 가시라고 했습니다. 체류기일은 사흘밖에 주지 않아서 래일 떠난다고 했습니다. 워싱톤을 떠나올 때 국무장관도 만나고 아시아담당관들도 만나 호의적인 대답을 받아가지고 왔답니다. 서울에 오자바람으로 다울링대사와 리기붕도 만났다고 합니다. 물론 그들에게 환상을 가지지 말아야 하지만 절대로 삶을 포기하지 말라고 선생님께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류선녀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롤만의 말을 전하였다.

신창균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죽산선생님에게 전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자기는 이제 돌아가면 국적을 포기하겠다고, 미국이라는 나라를 절대로 조국으로 인정할수도 없고 부르고싶지도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

《프랑스로 돌아가겠다고 하였습니다. 이제라도 인생을 다듬겠다고 하였습니다.》

《음, 그래? … 정말 반갑고도 반가운 소식이구만! 롤만에게 전해주오. 내가 자기 조국을 찾은 롤만박사를 축복한다구. 그는 자기의 선친들처럼 훌륭한 인간으로 될거요. 지금 프랑스에서는 자유와 해방을 위한 로동대중의 투쟁이 치렬하게 벌어지고있소. 정말 그 사람이 귀한 선물을 안고 먼길을 왔구만. 롤만… 보고싶소!

그래, 법무부의 담판이란건 뭐요? 형무소 소장이 자기 방까지 내준걸 보면 간단한 일 같지 않은데…》

조봉암은 롤만의 소식을 듣고 감개무량해하다가 시간의 촉박을 느낀듯 화제를 바꾸었다.

《저… 선녀선생!》

신창균이 말꼭지를 떼다가말고 류선녀에게 말고삐를 넘겨주었다. 막상 조봉암을 만나고보니 류선민의 제안을 제 입에 올리기가 난감하였던것이다.

류선녀는 손가방을 열어 거기에서 오빠가 만들어준 종이를 꺼냈다. 그러나 그도 살이 떨리고 속이 떨리는 일이라는 생각에 선뜻 내밀지 못하였다.

《그게 뭐요? … 이리 주오.》

조봉암이 소심해진 녀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저… 사실은 오빠가 만든겁니다. … 선생님일로 오빠도 마음고생을 많이 합니다. 이걸 가지고 가서 리승만과 특사문제를 론의하겠다고 해서… 죽산선생님께 어울리지 않는 일이나 자기를 도와주는셈 치고 눈 한번 감아달라고 했습니다.》

류선녀는 속이 졸아들고있었으나 어찌하든 일을 성사시켜야 한다는 절박한 생각에 다몰려 이렇게 침착하게 할 말을 다하고 그에게 종이장을 내놓았다.

종이장을 눈으로 훑고난 조봉암의 선하던 얼굴에 대뜸 서리발이 섰다. 그리고는 류선녀로부터 신창균에게로 노여움과 놀라움이 어린 눈길을 천천히 옮기였다.

그 눈길의 의미를 재빨리 포착한 신창균이 조봉암의 앞으로 달려가 그의 한팔을 부여잡으며 부르짖었다.

《선생님은 너무나 중한분입니다. 벌이 무리를 이룬들 녀왕벌 하나에 비기겠습니까? 우선은 이 고비를 넘겨야 되지 않겠습니까? 선생님만 계시면 진보당도 살아남고 민중의 래일도 밝아집니다.》

《그러니? … 신부장, 임자도 이 제의에 손을 들어주었다는건가?》

조봉암이 엄하게 물었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신창균의 진속을 헤집어낼듯 세차게 번뜩거렸다.

《사태가 너무 급하다보니…》

신창균은 찌르는듯 한 눈빛에 허둥거렸다. 더없이 신성하고 고귀한것이 온몸을 누르고있었지만 물러설수 없는 그였다.

난감해하는 신창균을 류선녀가 나서서 구원하여주었다.

《선생님! 신부장님 잘못은 없습니다. 저를 탓하십시오. 오빠도 막다른 골목에서 어찌할수 없어 내놓은 수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 일만은…》

《음-》

조봉암의 입에서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새여나왔다.

아직도 안타깝게 팔을 꽉 틀어잡고있는 신창균의 손을 뿌리친 조봉암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꺼운 판자를 깔아놓은 사무실의 바닥을 뚜벅뚜벅 거닐다가 도로 자기 자리에 와서 두사람의 물기어린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도 하고 종이장을 들여다보기도 하였다.

조봉암은 퍼그나도 가라앉은 목소리로 자기 립장을 밝히였다.

《이보게, 신창균부장! 이건 일종의 전향서일세. 왜놈때 전향서라는게 별게였는줄 아나?

선녀선생, 내 선생의 지성을 몰라서 하는 소리가 아니니 리해해주오. 오빠가 날 위해주려는 마음도 몰라서두 아니요. 그 마음은 정말 고맙소.

신부장, 자기 당수더러 끝까지 힘내서 싸우라고 용기를 주고 기운을 돋구어주어야지 그 사악한 독재무리앞에 무릎을 꿇으라니 이 어찌된 일인가?

난 감방에서 자주 리순신장군이 옥에서 외우군 했다는 글귀를 읊군 한다우. <필사즉생, 필생즉사>! 죽음을 각오하고 싸우면 살고 살 생각만 하면서 싸우면 죽는다는 소리요. 재판도 전투였고 감옥도 전투장이요. 내 이제 걸어가게 될 교수대도 나의 결전터요. 난 죽어도 영원한 승리자로 될 그런 생을 가지고싶소.

신부장! 선녀선생! 난 지금껏 나의 리념을 바꾸어본 일이 없소. 난 공산주의자로 한생을 살진 못했지만 인터나쇼날의 리상에 대한 사랑만은 변치 않았소. 더구나 권력의 횡포앞에 허리숙여본 일은 한번도 없었소. 물론 시대환경에 따라 조금씩 걸음새를 수정하기도 했지만 내 인생에 전향이란 없었소. 그런데 나를 따라선 민중을 배신하고 그 포악무도한 독재자와 협력하겠노라 공개선언을 한단 말이요?

신부장! 우리가 세워놓은 리상의 표대에 닿자면 전술에 있어서는 림기응변해야 하지만 대의명분에 어긋나는짓은 하지 말아야 하오. 대의명분만은 허물지 말아야 한단 말이요. 그렇게 되면 우리는 력사에 영원한 패자로 치욕스럽게 전해질거요. 난 죄없이 굴복하느니 차라리 교수대를 택하겠소. 나를 인간으로, 정치가로 아름답게 살도록 끝까지 도와주오.

선녀선생, 오빠에게 전해주시오. 성의는 고맙고 나때문에 고초를 당하는게 죄스럽기 그지없으나 이것만은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민중의 눈이 무섭고 내 량심의 회초리가 무섭다고 전해주오. 미안하오.》

류선녀는 조봉암의 뜻높은 기개에 감동하면서도 너무도 절통한 비분에 휩싸여 어깨를 떨며 말을 이었다.

《선생님! 저를 용서하여주십시오.》

자책과 흥분으로 끓어번지는 가슴을 달래며 묵묵히 서있던 신창균은 그제야 이들만의 호젓한 시간을 위해 자리를 피해주어야겠다는데 생각이 미쳐 서둘러댔다.

《그럼 저는 좀 먼저…》

《가만!》

조봉암이 바삐 방을 나서려는 신창균을 엄숙하게 불러세웠다.

신창균이 문가에 이르러 손잡이를 잡은채 돌아섰다.

《우달수부위원장에게 전하오. <당을 재건하라! 나의 자리를 넘겨받으라!>》

《선생님!》

《신부장! 난 그대들을 믿소. 우리의 뜻을 지켜주오. 맹세를 주오!》

《알았습니다. 맹세합니다!》

신창균은 허리를 쭉 펴고 부르짖었다.

《그리고 명심하시오! 이제 재건될 당은 명실공히 민중의 당으로 되여야 하오. 나는 민중, 민중하고 웨치면서 민중을 위해 뛰여다녔지만 그 민중을 민중정치를 구현하기 위한 주도적인 세력으로 보지 못하였고 그 민중에게 의거하지 못했소. 고작해야 민중을 선거표나 바쳐주는 우리의 지지세력으로, 아껴주어야 할 정치의 대상으로밖엔 생각하지 못했단 말이요. 민중의 당으로 자처하여온 우리 당에 도대체 바위쇠 같은 농군과 로동자들이 얼마나 들어와있소? 피의 교훈이요!》

《알았습니다. 페부에 새기겠습니다.》

《또 한가지, 재건된 당의 첫째 과녁은 미제국주의가 되여야 하오. 우리는 과녁의 순서를 바꾸어놓고있었소. 이 땅에 미군이 존재하는 한 독재청산도 통일조국도 공리공담이요!》

《알았습니다!》

《금룡에게도 전달해주오. 너희들도 청년학생들뿐아니라 민중속으로 들어가며 민중에 의거하라! 이것이 승리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이 죽산이 평생을 헤매다가 비로소 찾아낸 진리이고 정의라고!》

《알겠습니다! 꼭 전달하겠습니다!》

방안을 나선 신창균은 참고참던 더운 눈물을 왈칵 쏟았다. 철퇴같은 주먹으로 가슴을 텅텅 두드리며 부르짖었다.

《저 샘물같은 인간! 저 바위같은 인간! 아름다운 리상을 흐리게 하는 그 어떤 사소한 티라도 용납하지 않는 고결한 인간! 저런 인간의 넋을 함부로 롱락하려들다니…

이 땅의 량심은 그대로 살아있으련만, 이 땅의 백성은 살아있으련만 어찌하여 저 아름다운 넋을 구할수 없단 말이냐. 더럽고 용렬하고 좀상스러운 인간쓰레기들이 던지는 비렬한 간계의 올가미를 사나이들의 담벽같은 가슴들이 정녕 막아줄수 없단 말이냐.

하늘아! 너도 이 땅의 하늘이 아니냐. 저 값진 인간을 모살하려는 야만들의 협잡을 굽어보면서도 그렇게도 태연할수 있느냐. 그리도 무심할수 있느냐. 구름을 몰아와 벼락을 내려다오!

바다여! 노도를 일으켜다오! 저 사악한 무리들이 틀고앉은 죄악의 복마전인 경무대를 쓸어버리고 저 간특한 미국의 악마들을 수장해다오!

하늘과 땅에 내 맹세한다! 우리 기어이 당을 재건하고 죽산의 뜻대로 민중세상을 위해, 겨레의 통일을 위해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바쳐 싸우리라!》

신창균은 이날의 맹세에 충실하였다. 그는 다음해에 우달수와 여러 전우들과 함께 진보당의 맥을 이은 사회대중당을 만들어내고야말았다. 사회대중당은 비록 얼마 못 가서 정권을 가로챈 군사불한당들에 의하여 파괴되고 당위원장으로 선출된 우달수마저 학살되였으나 신창균은 끝까지 조봉암의 훌륭한 동지로 조국의 통일을 위하여 싸웠다. 평생을 통일성전에 바친 신창균은 구십이 지나 심장의 고동을 멈출 때까지 조국통일범민족련합 남측본부 본부장, 고문으로 정력적으로 활동하였다. …

류선녀는 잠시 흥분을 가라앉히고나서 가방에서 또 하나의 문서장을 꺼냈다. 그는 그 문서장을 두손에 받쳐들고 조봉암에게 내밀었다.

《선생님, 여기에 선생님의 마음을 담아주세요.》

《내 마음을? … 그건? …》

조봉암이 방금까지 류선민이 작성해준 문서장때문에 흥분하였던지라 류선녀가 내미는 또 한장의 문서장을 받다말고 의심쩍게 물었다.

류선녀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였다.

조봉암이 그 고개짓의 의미가 짚이지 않아 머리를 기웃거리다가 문서장을 들여다보았다. 문서장을 대충 훑고난 조봉암이 후닥닥 놀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선녀선생! 이래선 안되오! 선생이 지금 무슨 일거리를 가지고 왔소? 안되오!》

《왜 안된다는겁니까? 제가 미덥지 않습니까? 저의 성의가 부족해서입니까?》

류선녀가 지금까지 보여주던 단아하고 수집고 조심스럽던 태도는 언제였더냐싶게 다기차게 따져물었다.

《글쎄 저는 선생님을 주인으로 섬길만 한 그런 녀자가 아직은 못된다는것은 압니다.》

《아니, 아니요. 그런게 아니요. 원, 그런 소릴 하다니… 내 마음을 잘 알면서 나를 각박하게 몰아대지 마시오.》

조봉암은 류선녀에게 결혼동의서를 내밀며 완고하게 거절하였다.

《선생님, 저의 마음속에 애오라지 선생님만 계시는걸 선생님도 아시겠지요?》

《그래서는 안되오. 선녀선생은 빨리 자기의 행복을 찾아야 하오.》

《저의 행복은 선생님이십니다. 선생님곁에 나란히 서고싶은것이 저의 소원이고 행복의 전부라는것을 선생님은 정말 모르십니까?》

조봉암은 난처한 표정으로 선녀의 애절한 모습을 바라보았다.

정결하고 가식이 없는 사랑, 파들거리는 기대와 애모의 정이 그윽히 어려든 애잔한 얼굴이 다가들자 조봉암은 속깊은 곳에서 불덩이같은것이 울컥 치밀어올랐다. 세상끝까지 떠안고 가고픈 녀인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쓰라린 비분으로 하여 더구나 심장은 밖으로 튀여나올듯 와당탕거렸다. 그러나 이내 웅글고 석쉼한 목소리로 대답하였다.

《난 이 문제도 선녀선생의 뜻을 따를수 없소. 나를 용서해주시오. 난 지금 북망산에 한발을 얹고 사는 사람이요. 난 정말 선녀라는 착하고 훌륭한 녀인이 지난 몇해동안 내곁에 와준것만 해도 그지없이 고맙고 행복하오. 선녀선생은 보답을 할수 없는 나를 위해 온갖 성의를 고여주면서 자기의 명예도 인격도 육체도 다 희생하여왔소. 생각할수록 고맙고… 그리고 죄스럽기 그지없소.

그러나 더이상 자신을 희생시켜서는 안되오. 그건 이 조봉암을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게 하는 또 하나의 괴로움이요. 이걸 리해하여주오.》

조봉암은 자기의 진정을 절절한 어조에 담았다.

그는 진심으로 이 사랑스러운 녀인에게 자기가 마지막으로 남겨줄수 있는 정이란 끝이 없는 고마움과 함께 그의 순결을 지켜주고 그의 행복을 축복해주는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류선녀에게는 아직도 새로운 행복을 마련할수 있는 아름다움이 안팎으로 비껴있다는것을 믿어마지 않고있는 조봉암이였다. 류선녀가 더는 그 어떤 고뇌도 불행도 눈물도 없이 오래오래 살다가 자기가 그렇게 념원해왔고 그를 위해 넋을 묻은 통일된 조국을 보게 될것을 진심으로 바랬다. 이것만이 자기를 그지없이 아껴준 이 녀인에게 바치는 자기의 보답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조봉암의 그 진심에 류선녀의 사랑의 심장은 더욱 아프게 비틀리고 타오르는 애모의 불길은 백배로 활활 치솟는것이였다. 녀인은 가쁜숨을 몰아쉬며 동가슴을 두손으로 꼭 눌러잡고 열렬하게 자기의 애정을 쏟아놓았다.

《저는 언제 한번 선생님께 자신을 희생한다고 생각한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저의 희망이고 기쁨이였습니다. 녀자의 행복이였습니다. 선생님은 만사에 대범하시고 속속들이 헤아려주시지만 우리 녀인들의 세계를 너무도 몰라주십니다.》

류선녀는 눈물이 그렁해졌다. 자기의 진심을 받아주지 않는 조봉암이 너무도 야속해서 흑- 하고 오열을 터치고야말았다. 책상우에 이마를 박은채 소리내여 섧게 울었다.

조봉암은 불덩이같이 달아오른 애모의 더운 바람에 속대가 흔들릴가봐 두려운듯 두주먹을 꽉 틀어쥐고 부들부들 떨었다. 이제 자신을 다잡지 못하면 녀인을 끌어안고 나는 당신을 사랑하였다고 그리고 지금도 사랑하고있다고 속삭이며 결혼동의서에 이름 석자 정하게 올려줄것만 같았다. 그 연연한 감정의 분출을 리성이라는 차겁고도 준절한것이 꺾쇠처럼 그악스럽게 눌러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류선녀는 련인의 속깊은 곳에 바위처럼 들어앉은 마음을 기어이 움직이고저 눈에 물기가 자욱해가지고 말을 이었다.

《선생님! 오빠도 신부장도 처음에는 놀랐지만 저의 결심을 지지해주었어요. 특히 오빠는… 선생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끝내는 저의 마음을 받아주었답니다. 그렇게도 저의 심정을 받아주지 않던 오빠까지도 오늘은 이렇게 결혼동의서에 이름을 적어주면서 죽산선생님을 매부라고 부르고싶다고 저희더러 전해달라고 하였습니다.》

《류장관이?! 오빠가 그런 말 했단 말이요? 사람두… 류장관이 그럴줄은 몰랐소. 내 처지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 참… 음-》

조봉암이 고마움에 목이 메여 이렇게 갈린 소리를 내자 류선녀가 더욱 가슴에 사무친 정을 바닥채로 안겨주고싶어 눈물겹게 부르짖었다.

《저를 아껴주세요! 저의 마음을 받아줘요! 저에게 행복을 주세요! 제가 죽어서라도 선생님의 녀인으로 곁에 가게 해줘요! 제가 눈을 감을 때까지 선생님을 저의 하늘로 받들고 따르며 살도록 해주세요! … 저 악귀같은 놈들은 저에게서 제일 소중한것을 빼앗아내려고 날뛰고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기어이 지켜내렵니다! 우리의 사랑을 지켜내렵니다! 그건… 그건 목숨보다 귀한겁니다!》

류선녀는 그만 오열을 터치며 애원하였다. 조봉암의 발치에 몸을 던졌다.

《흐윽-》

순간 조봉암의 두툼한 입새로 심장의 흐느낌이 뿜어져나오고 우둥퉁한 볼로는 동막이가 터진듯 눈물이 주르륵 쏟아졌다.

아, 이것이 사랑인가!

사랑하는 심장은 쇠처럼 강하다. 사랑의 힘은 하늘도 움직인다. 사랑은 무한의 열정이며 무한의 기상이다.

사랑의 정열로 더 억세여지고 더 아름다워진 녀인!

사랑의 노래에 이끌려 인간 아름다움의 무상함을 더욱 뜨겁게 절감하며 행복의 무아경에 취해든 사나이!

한동안 인간고행의 복마전인 감옥의 제일 죄많은 우두머리의 방에서 무한한 사랑의 세계를 펼쳐놓고 정과 정을 나누는 두사람의 흐느낌이 그쳐지지 않았다. 그 어떤 바람에도 흔들림없고 덞어지지도 않은 고결한 두 심장의 교감은 길지 않았다.

조봉암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류선녀를 부축하여 일으켜세웠다.

《선녀선생, 나를 용서하오. 이 동의서는 두고 가오. 내 심장에 소중히 보관하겠소.》

《선생님, 정녕…》

《너무 시간이 지체되였소. 자, 작별합시다.》

조봉암이 이렇게 그 무엇에 쫓기듯 서둘러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류선녀가 그 손을 잡고 조봉암의 품에 와락 안기며 그의 굵은 허리를 끌어안았다.

두사람은 방 한복판에 그렇게 굳어졌다. 만단사연을 담은 정과 정이 부딪치고 얼싸안는 시간은 야속하게도 너무나 짧았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 한생의 전부를 서로의 밀착된 가슴에 심장의 빠른 진동으로 통채로 넘겨주고있었다.

류선녀는 상대의 눈빛과 눈물과 급한 심장의 고동에서 조봉암이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여왔으며 얼마나 아끼고싶어하는가를 목메인 심정으로 접하고있었다. 녀인은 조봉암의 억센 가슴에 온몸을 맡긴채 입술을 바들바들 떨었다. 온몸이 나른해져서 조봉암이 그러잡은 두팔을 풀기만 하면 금시 방바닥에 노그라져버릴것 같았다.

(사랑하는이의 가슴에 이렇게 안긴채 영원히 굳어져버릴수는 없을가? 아, 그럴수만 있다면… 그럴수만 있다면 얼마나 행복하랴. 이 자리에서 명이 꺼진들 무슨 한됨이 있으랴. …)

잠시후 먼저 밖으로 나온 류선녀가 형무소의 정문을 향하여 얼굴을 싸쥐고 비칠거리며 달려가는데 그를 기다리고있던 신창균이 따라서며 불렀다.

《선녀선생! 어떻게 되였습니까?》

그 소리에 고개를 들었던 류선녀가 또 대답없이 눈물만 흘렸다.

《선생님, 잠간만…》

류선녀의 표정에서 짐작이 간 신창균이 오던 길로 급하게 뛰여갔다. 형무소 소장방에 다시 들어선 신창균이 눈을 감은채 쏘파에 앉아있는 조봉암에게 다가갔다.

《선생님!》

신창균이 격한 어조로 불렀다.

《선생님!》

다시한번 불렀다.

조봉암이 그제야 신창균을 의식한듯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축축히 젖어있는 눈시울을 죄수복소매로 닦았다.

《어찌된 일입니까? 저도 보증하였습니다. 선녀선생의 청혼을 받아주십시오.》

《신부장! 나를 더 괴롭히지 말아주오.》

《선생님의 괴로움이 리해됩니다. 그러나 선녀선생의 생각도 해주십시오. 선녀선생의 청혼은 변덕도 아니고 허영심은 더욱 아닙니다. 선녀선생은 진심으로 선생님을 한생의 벗으로 따르고저 합니다.》

《안되오. 그것이 나는 괴롭소. 적어도 사나이가 할짓이 아니요. 신부장, 우리는 평생의 동지였고 벗이였지. 난 선녀선생의 행복을 신부장네가 마련해주리라 믿고싶소. 자, 손을 주오!》

《에 참, 선생님도… 이래서는 안됩니다. 선녀선생이 이제 다르게 녀성의 행복을 찾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참, 선생님도… 깊이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선녀선생은 평생토록 선생님을 모시고 살아갈겁니다. 선생님은 선녀선생이 법적인 담보를 받을수 있도록 도와주셔야 합니다. 또 오겠습니다.》

신창균은 고개를 흔들며 조봉암이 내미는 손을 잡으려고도 하지 않고 방안에서 훌쩍 나가버렸다.

《신부장! 신창균이-》

조봉암이 이렇게 그를 부르며 따라서다가 출입문이 무겁게 닫기자 더 방안을 나서지 못하고 그 자리에 못박힌듯 우두커니 섰다. 그는 헐금씨금하며 걸어가는 신창균의 뒤모습을 창문으로 한동안 내다보았다.

성미가 결곡한 신창균의 한맺힌 부탁이기에 더욱 가슴이 저려온다.

(후- 난 인생의 채무를 또 하나 걸머지게 되였구나.)

조봉암은 눈앞에 뽀얀 안개가 서리는것을 느끼며 뼈저리게 탄식하였다.

요즈음 자기 인생의 저녁노을을 지켜보느라니 아직도 미결로 남아있는 빚이 너무나 많다. 성취보다 좌절로 끝난 미완의 과제들중에는 거창한 사회적문제들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매듭을 짓지 못한 신변잡사들도 적지 않다. 그 리유를 캐여보느라면 여러가지이지만 크게는 자기의 성의가 부족했거나 옳은 리해를 가지지 못했거나 혹은 과단성이 없었던탓에 있다.

류선녀와의 관계도 지금 와서 돌아보면 벌써 50년 그 설날에 그 녀인이 문득 다가서던 그때에 한걸음 내디뎠으면 수나롭게 해결되였을게 아닌가. 그랬더라면 저 사랑스러운 녀인의 가슴에 저렇게 한서린 못이 박히지는 않았을것이다.

(아니, 아니다. 선녀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은것이 어쩌면 다행일지 모른다. 내가 이미전에 그와 결합되였더라면 아마도 선녀는 또다시 인생의 쓰디쓴 절망과 비애의 눈물을 마시며 살아가야 했을것이 아닌가. 그래… 나는 아마도 옳게 처신한것 같다.)

그러나 조봉암은 다시 가볍게 도리질을 하였다. 방금전에 눈물을 머금고 오열을 터치던 류선녀의 목갈린 부르짖음이 다시 귀전을 때리고 흉중을 마구 허비였던것이다.

《저에게 행복을 주세요! 제가 죽어서라도 선생님의 녀인으로 곁에 가게 해줘요!》

조봉암은 또다시 마음이 산란해지고 걷잡을수 없어 괴롭게 신음소리를 냈다.

(아! 녀인의 행복이란 참말로 무엇일가? 어느것이 정녕 인간의 도의이고 사나이의 성실일가?)

세상만사를 쉽게 헤아리고 인간세상의 참과 거짓, 선과 악을 척척 갈라내던 예지있고 결패있는 백전풍운아도 이 크지 않으면서도 미묘한 이성의 교감을 놓고서는 그냥 해답을 찾지 못한채 고뇌에 시달렸다.

불쑥 그의 눈앞으로 또 한명의 소중한 녀인의 모습이 가까이 다가왔다.

이옥이… 이옥의 모습이다.

기적소리 울리던 이역의 역두에서 눈물을 감빨며 하던 그 녀자의 애절한 부르짖음이 귀전을 울린다.

《이봐요, 저를 놓아주세요. 당신은 큰일을 하셔야 할분이예요. 그래서 제가 물러가는겁니다. 제가 곁에 있어야 당신에게는 짐밖에 될수 없지 않아요. 저는 당신을 그지없이 사랑하기에 당신을 위하여 물러서는겁니다.》

(이옥이! …)

조봉암은 입속으로 조용히 불렀다.

(나는 그때 당신을 기어이 붙잡았지. 오늘은 내가 당신과 같은 대답을 주어야 했소. 선녀는 지금 나에게 다른 대답을 기다리고있소. 난 괴롭소. 그리고 두렵소. 아, 이옥이! 내가 그 녀인에게 어떤 대답을 주면 좋겠는지 당신이 한번 말해주구려. 난 그 녀인도 사랑하오. 사랑하기때문에 그 말은 입에 담을수 없구려. 사랑하기때문에…)

조봉암은 이렇게 두 녀인의 모습을 떠올려놓고 끝없는 사색의 미궁에 빠져 괴롭게 허우적거리였다.

형무소를 나선 류선녀와 신창균은 법무부로 향하였다.

《에 참!》

류선민은 신창균으로부터 두통의 문서장에 끝내 조봉암의 수표를 받아내지 못하였다는 소리를 듣자 크게 랑패스러워하였다.

《음- 내 그 사람이 그럴줄 알았네. 그래서 죽산이지… 에, 그런데 이 일을 어떻게 한다? … 리박사가 자네들이 떠난 다음에 인차 전화를 걸어왔댔어. 죽산문제때문이지. 불호령이였소. 왜 질질 끄느냐고 그냥 삿대질이더구만. 그래서 내가 이 문서장소리를 약간 비쳤더니 하여간 그걸 갖고 오후 첫 시간에 경무대로 오라고 하더구만. 그러니 이를 어쩐단 말인가. 두상태기 이제 또 미쳐버리겠는데… 무슨 수라도 써야 될게 아닌가.》

류선민은 불안에 잠겨 탄식하면서 방안을 급하게 거닐었다.

《오빠, 정말 미안해요. 저때문에 이렇게 속을 썩이게 해서… 그리고… 고마워요. 저를 용서해주세요.》

《뭐? 고맙다구? 용서해달라구? … 뭘 용서하구 뭘 고맙다는거냐? 이렇게 일은 다 꼬였는데… 어휴- 네가 종시 나를 조상유지 줴던진 불초자식으로 되게 하는구나. 이 류선민이 불효자가 분명쿠나!》

류선민은 락심천만해서 류선녀의 말에 화증을 내며 걸상에 가서 무너지듯 몸을 실었다. 그리고 팔꿈치를 책상에 박고 두손으로 머리를 부둥켜안았다.

뜻밖에 불효자소리가 류선민의 입에서 절통하게 튀여나오자 류선녀도 신창균도 속이 덜컥하였다.

《오빠, 불효라니요? 그런 말씀 마세요! 그런 말씀 말아요!》

류선녀는 그에게 급히 다가가서 절절한 목소리로 위로하였다.

《전 오빠의 마음을 다 알아요. 얼마나 저때문에 괴로워하시는지 다 알아요.》

《네가 내 마음을 다 안다고? … 네가 도대체 뭘 안다는거냐? 어, 신부장! 자리 피하느라 달아뺄거 없으니 게 앉아서 들어보구려. 선녀야! 넌… 너는 이 오빠의 속을 십분의 하나도 몰라…》

《오빠!》

《좋다. 내 오늘은 말해보자. 40년 묻어두고온 이야기다.》

류선민은 자세를 고쳐앉더니 여느때없이 비감에 젖어 말을 시작하였다.

《무슨 얘긴고 하니 아버님께서 남기신 유언이다. 너도 그걸 대강은 알고있지만 내가 들려준 얘기는 전부가 아니다. 내 지금껏 이 말은 굳이 속에 고여담고 왔는데 오늘은 너에게 해야 되겠다. 아버지는 운명직전에 내 손목을 잡고 너를 고이 키워달라는 부탁만을 남기셨다. 이건 뭐 너에게 들려준 얘기고…》

류선민은 이렇게 말꼭지를 떼여놓고 잠시 가슴이 후더워오르는 회억에 잠겨 이내 말을 잇지 못하였다.

이것은 류선녀도 잘 알고있는 얘기다. 뼈와 살에 새겨두고있는 아버지의 유지이다.

(오빠가 새삼스럽게 아버지의 유언을 다시 꺼내놓는 리유는 무엇일가? 40년동안 속에 고여담아온 얘기란 또 무얼가?)

류선녀는 그 어떤 충격적인 사연이 40년만에 비로소 튀여나올듯싶어 은근히 불안을 느끼며 오빠의 말에 귀를 강구었다.

《아버님의 말씀이 이러하시였다. 잘 새겨들어라.

<… 선녀를 잘 돌봐다오. 그애는 사실 너와 피줄이 다른 애다. 남도에서 왜놈들을 벌벌 떨게 한 의병장이 남긴 일점혈육이다. 백정자손이던 그 사람이 임오폭동때 주동분자의 한사람으로 나섰댔지. 폭동이 실패하자 남도의 산악지대에 틀고앉아 의병대를 무어 왜놈을 족치다가 전장터에서 전사했다. 그때 나는 경상도일대를 돌며 군자금모연을 맡고있었는데 마침 그날에 의병대에 가있었지. 그분은 내 무릎에서 눈을 감으며 고향에 있는 안해와 딸을 부탁하였다.

의병장의 부탁대로 고향에 들려보니 그의 안해는 이미 왜놈들에게 잡혀 욕을 당하고 제손으로 명을 끊고 세살잡이 딸이 아빠라고 부르며 내 목에 감겨들더구나. 나도 실은 그 전해에 네 어미 잃고 홀아비가 된 몸이였으나 더 생각할것 없이 선녀를 안고와 이 서울에 발을 붙였다. 그때 네가 피신 겸 류학으로 유럽에 가있어서 동생이 생겨난 자초지종을 모르게 된게 다행이였다. 어떤이들은 선녀를 내가 대처를 돌아다니다가 재미끝에 벌어온 애라고 쉬쉬하는데 실은 그렇게 되여 너에게 스무살아래 동생이 생긴거란다.

내 부탁을 명심하거라. 그애는 금지옥엽으로 키워야 할 의병장의 후손이다. 그러니 크거들랑 재산을 다 날려서라도 그애를 너 못지 않게 공불 시켜 부디 고생살이를 하지 않도록 해라. 그애에겐 부디 복만 안겨주고 비명에 숨진 부모님명까지 길게 살도록 해주어라. …>

이게 아버님께서 림종직전에 나한테 남기신 유언이였다.》

《!》

류선녀는 한동안 정기가 풀린 눈으로 오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잠시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시 무너져내릴듯 힘들게 걸음을 옮겼다.

류선민은 한걸음한걸음 다가서는 동생의 눈굽에 넘을듯말듯 찰랑거리는 눈물을 보자 천정에로 고개를 들었다. 쓰라린 회오가 가슴을 때렸다.

(괜히… 이 무슨 실언인가? 수십년 묻어온 사연을 이런 순간에 털어놓다니…)

그러나 류선민은 속 한귀퉁이가 휘영청 들리는듯 한 감을 느끼며 이제는 만사를 너에게 맡긴다는 체념으로 눈을 감아버렸다.

등뒤에 다가선 류선녀가 걸음을 세웠다. 다음순간 류선민은 목덜미가 선듯해졌다. 달아오른 그의 목에 류선녀의 눈물방울이 툴렁 떨어진것이다.

류선녀가 류선민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그는 한동안 무아몽중에 빠져 아무 말도 할수 없었다. 그저 눈물만 펑펑 쏟을뿐이였다.

비명에 돌아가신 친부모들을 그려보며 울었다. 그리고 자기를 그 어려운 시절 혈육으로 받아주고 고이 키워온 양아버지와 그리고 오빠가 고마워 울었다.

류선민도 동생이 울음을 그칠 때까지 그의 손목을 꼭 잡은채 더 말이 없었다.

류선녀는 오빠의 사랑속에 살아온 지나간 나날들이 더듬어졌다.

그에게는 의병장아버지는 물론 두번째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얼마 없다. 두번째 아버지마저 서울에 정착한지 두해만에 의병대에서 받은 부상자리가 도져 사망하였던것이다. 그래서 류선민을 오빠가 아니라 아버지처럼 따르며 살아왔다.

돌이켜보면 왜놈때에도 해방후에도 류선녀는 오빠의 슬하에서 그 어느 대궐집 규수 부럽지 않게 살아왔다. 사는 걱정은 아예 모르고 살았다. 그 무슨 세파에 부대낀적도 없었으며 학문과 교단을 벗삼아 구김살없이 세월을 넘어왔다.

오늘의 류선녀는 류선민이 마련해준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류선녀는 세월의 비바람에 스러질세라 자기의 신상을 세심하게 돌보아준 오빠의 사랑에 이렇게도 눈물겨운 선친들의 유지와 그 유지를 받들어온 오빠의 남다른 고뇌가 깃들어있는줄은 미처 몰랐다.

《오빠!》

한동안이 지나서 류선녀는 류선민에게서 고개를 들며 애틋하게 불렀다.

《오빠, 난 두 아버님과 오빠의 그 마음에 어떻게 해야 보답이 될가요?》

《선녀야, 그런 소리는 말아. 내 왜 이 말 꺼내놓은가 하니, 오랜 세월 묻어온 이 사연을 들려준고 하니 내가 선친들의 유지를 끝내 받들지 못하여 네게로 닥쳐든 불행을 미처 막아주지 못했고 오늘은 이렇게 또 너를 솟아날수 없는 고통의 함정에 빠져들게 했기때문이다.》

《오빠, 그건 무슨 말씀이세요.》

《내가 참 우유부단한 놈이지. 속이 여린 놈이야. 애초에 죽산이 시한탄을 안고있는걸 알면서도 너의 걸음을 막지 못하였지. 지금도 난 이렇게 너를 돌려세우지 못하는구나. 너도 이제는 후회가 되겠지? 다 내탓이다. 나를 욕해라. 그런즉 내가 우리의 의로운 선친들앞에서 면목이 됐느냐? 금지옥엽으로 아껴야 할 네 신세를 망쳐버리지 않았느냐?!》

류선민이 이렇게 뼈저린 탄식을 그냥 이어가자 류선녀가 도리머리를 저었다.

《오빠! 난 후회하지 않아요. 신세를 망쳤다고 생각한적은 더우기 없어요. 오빠의 이야기까지 듣고보니 저의 선택이 옳았다는 생각이 더 들어요. 아버님들의 그 고마운 뜻을 받들었다는 생각에 자랑스러워져요. 아버님들의 뜻이 무엇이였나요? 백정후손이였다는 의병장아버님이 왜 칼을 들었겠나요? 나라를 찾고 백성이 주인된 땅에서 살기 위해서가 아니였겠나요! 그분들의 그 거룩한 뜻이 죽산선생님께 그대로 이어졌어요. 그러니 제가 죽산선생님을 사모한것은 어쩌면 아버님들의 뜻을 받든 저의 행운이고 숙명이였어요. 오빠, 저는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요. 이건 저의 진심이예요. 끝까지 제가 의병장의 후손답게, 그 의병장의 뜻을 이어준 아버지의 딸답게 살게 해줘요.》

《뭣이?! … 그게 정말이냐?》

류선녀가 고개를 깊이 끄덕여보였다.

류선민은 커다란 감동에 휩싸였다. 그는 지금껏 선녀가 조봉암에게서 떨어지지 못하는것이 자기가 미덕이라고 새겨안은것은 끝까지 지켜내는 올곧은 성미라고만 생각하여왔다. 그런데 이제 보니 보다 심원한 뜻과 정이 깃들어있었다.

그는 자리에서 솟구치듯 성큼 일어서더니 돌아서서 선녀의 량어깨를 두손으로 꽉 틀어잡았다. 뜨거운 격류가 몇해동안 고목등걸같이 인생의 즙이 없는 관직에 묶이워 정에 주려있던 흉곽을 세차게 들이받으며 굽이쳤다.

류선민은 방안을 쩌렁하게 울리는 큰소리로 부르짖었다.

《좋다! 내 지금 서울장안에 짝이 없는 맹추와 마주섰는지 아니면 세상에 다시없는 렬녀와 마주섰는지 모르겠다. 아니, 너의 사랑을 지켜주는것이 선친들의 유지를 받드는 길이라는 네 말이 정녕 옳을듯싶구나. 하여튼 이제부터 나도 너와 함께 힘껏 뛰여보자! 내 이 방에 틀고앉아 숱한 죄보따리만 걷어메게 되였는데 동생에게라도 선행 한가지 만들어보련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늘도 움직인다 했으니 너의 그 마음이면 죽산을 살려낼거다.

신부장! 지금은 일단 돌아가게. 난 경무대에 들어갈 준비를 해야겠네. 단단히 차비를 해야 령감과 맞설수 있다네. 마지막주패장이 남아있네. 너무 걱정은 말라구. 이제 사형을 대법원에서 확정하여도 사형집행은 장관의 결재권에 속하는거요. 내 동의나 수표없이는 절대로 사형판결을 집행할수 없단 말이요. 판결하고도 한두해 미루어서 집행하는게 법정관례이니 내가 판결집행을 끌어보겠네. 그러느라면 뭐이 또 변통이 생기겠지.》

《오빠!》

《선녀야, 그 아까운 사람을 한두해 옥에서 썩이는건 죄되는 일이지만 하는수 없구나. 기다려보자꾸나. 래년 선거까지는 길어야 이제 반년남짓하다. 신부장네는 이제 대법원에서 항소심을 하면 다시한번 변호단을 휘동하여 항소를 제기하시오. 앞뒤로 시간을 끌어봅시다! 선녀야, 맥을 놓지 말아!》

류선민이 두사람을 위로하며 기가 하늘에 뻗쳐 큰소리로 장담하였다.

그 어떤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 조봉암의 산악같은 기개와 그를 구출하기 위하여 뛰고있는 류선녀와 신창균의 헌신적이고도 애절한 모습에 접한 류선민의 메말랐던 심장에 드디여 번개불이 날아들어 잠자고있던 량심과 사나이기질에 불을 지른것이다. 하여 감히 아부와 무조건적인 복종이라는 통치권의 계률에 용감히 도전하여 비로소 운명을 내건 용기를 한번 크게 떨쳐본것이다.

《고맙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신창균이 류선민의 담기있는 소리에 저으기 마음이 놓여 크게 숨을 내쉬였다.

류선녀도 자리에서 일어나 코멘소리로 인사를 하였다.

《그럼 우린 돌아가겠어요. 오빠, 정말 고마워요.》

《또 또, 고맙긴…》

류선민이 눈을 흘겼다.

두사람은 인차 류선민의 방을 나섰다. 들어올 때와는 달리 가벼운 걸음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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