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7 회)

제 8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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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기붕과 그의 처인 박 마리아가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그들을 영접하였다.

대사일행이 차에서 내리자 박 마리아는 풍만한 몸을 휘감은 꼬리치마끝을 한손에 감아쥐고 교태가 무르녹는 얼굴로 허리를 갑삭 숙여보였다.

《어서 오세요. 대사님을 뵈온지 여러달이 되네요. 건강은 어떠하신지요?》

녀인은 능란한 영어로 인사를 하였다.

《부인, 안녕하십니까? 부인은 언제 봐야 아름답습니다.》

《뭘요. 이제는 돌아봐주는이도 없답니다. 한물 건너갔지요. 호호.》

박 마리아가 아양을 떨며 다울링의 사교적인 말을 받아주자 모두들 유쾌하게 웃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롤만박사와 함께 왔습니다. 지금은 스탠포드대학에서 국제학을 연구하고있답니다. 리기붕의장님과 긴히 상론할 일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아, 그래요? 롤만선생, 찾아주시여 감사합니다. 다들 방으로 들어갑시다.》

그들은 대나무가 꽉 들어찬 정원을 지나 덩지가 크고 겉모양이 화려한 저택안으로 들어갔다.

박 마리아가 인차 자기처럼 통실통실하게 생긴 하녀에게 다반을 들려가지고 왔다.

하녀가 넓고 해빛이 잘 드는 응접실에 둘러앉은 사람들에게 차잔을 놓아주고 나가자 박 마리아가 자기도 차잔을 들면서 권하였다.

《이건 보성이라는 곳에서 만들어진 록차입니다. 이 보성록차는 벌써 천년전부터 궁궐에서만 맛보던 오랜 전통을 가진 명성이 자자한 차랍니다. 커피란건 일종의 각성제로서 심장에 무리한 부담을 준다지만 이 보성록차는 늙음을 억제하고 기를 돋구어준답니다. 특히 남성들에게 효과가 좋답니다. 옛날 궁궐에서 제왕들이 삼천궁녀를 거느리자니 아래기운을 돋구는게 중한 일이 아닐수 없었겠지요. 이 차가 임금님들의 그 중한 일을 도와주었다나요.》

박 마리아의 달변에 사나이들은 너털웃음을 치며 차잔을 기울였다.

《참, 롤만선생님은 인천에서 10여년세월을 보냈는데 우리 음식중에서 어떤것을 좋아하시는지요? 대사님의 식성이야 제가 알고있으니 걱정없구요.》

《에- 저는 아무렇게나 먹고 마시는 사람입니다. 더구나 서울음식에 정이 들었지요. 그러니 서울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식은 아무거나 다 좋아합니다. 사시사철 입맛을 돋구는 국수도 좋구 쫄깃한 찰떡도 좋구요. 냄새도 맛도 구수한 숭늉맛 역시 늘 잊지 않고있답니다.》

《아유, 숭늉! 선생님의 그 말씀 정말 숭늉처럼 구수하네요. 오늘 점심끝에 숭늉 한사발 잘 끓여올려 선생님의 서울방문을 환영하겠습니다.》

박 마리아는 또 이렇게 좌석의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들어주고는 생긋 웃으며 응접실에서 나갔다.

《하하, 부인은 소문대로 사교의 녀왕입니다.》

다울링은 약간의 지성과 애교가 묘하게 어울린 그 녀자의 세련된 사교술에 찬탄을 금치 못하며 리기붕에게 인사삼아 한마디 건네였다.

사실 박 마리아는 필요한 상대라면 마음먹은대로 주무르고 간담을 녹여낼줄 아는 신비로운 마술을 도통한 요물이였다.

《롤만선생이 미국으로 떠나갈 때 우리가 너무 소홀히 한것 같습니다. 생소한 서울에 와서 오랜 기간 우리를 도와준 최장수자인데 작별연이라도 크게 차리고 적어도 태극훈장을 드렸어야 하는건데…》

리기붕이 롤만을 향하여 속에 없는 입담을 부렸다.

리기붕은 삼복철의 무더위에도 아랑곳없이 흰 샤쯔에 넥타이를 꼭 죄여매고 회색공단조끼를 받쳐입고 그우에 회색양복을 걸치였다.

응접실에서는 선풍기가 돌아가고있었으나 조금만 움직여도 줄땀을 짜내는 무더운 계절이라 리기붕의 옷차림은 보는 사람조차 답답하고 땀발이 쭉 서게 한다.

하지만 병색이 도는 여윈 몸에는 짜올릴 땀샘이 메말라버렸는지 리기붕은 땀 한방울 없이 어설픈 미소를 짓고있다.

롤만도 입가에 연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자기가 미국으로 쫓겨간데는 리기붕의 입김도 서려있다는것을 알고있었다.

《아니, 미안해하실게 없습니다. 나는 10여년동안 두 나라 사람들사이에 다리를 놓아준것으로만도 만족합니다. 제가 찾아온 사유를 말씀드리지요.

의장선생! 나는 이번에 워싱톤을 떠나올 때 국무장관을 만났고 아시아정책담당관들도 접촉하였습니다. 주요한 론의거리는 조봉암선생에 대한 재판이였습니다. 미국무성과 정계는 조봉암선생에 대한 사형판결에 대하여 큰 우려를 표시하고있습니다. 내가 도꾜에서 만나본 일본의 법조계인물들도 상당한 관심을 보이면서 여러가지로 걱정하였습니다. 나는 내가 10여년간 복무하여온 이 나라가 국제사회에 어지럽게 비쳐지는것이 괴롭습니다. 그래서 대양을 넘어왔습니다.》

롤만이 조봉암의 문제를 화제에 올리자 리기붕은 이마살을 찌프리며 입을 꾹 다물었다. 왼쪽눈에 경련이 일어나 푸들푸들 뛰였다.

요즈음에 고질적인 신경통이 발작하여 사실은 집에서 안정치료를 하자고 바깥출입을 삼가하고있는데 조봉암에 대한 판결때문에 돌쩌귀에 불티가 날 지경이다.

매일처럼 로성팔이 찾아오고 당안의 중진들도 찾아와 조봉암을 내놓아야 한다고 시비를 캐고 훈계하고 위협도 한다.

군부안의 장성들도 찾아온다. 리승만의 눈에 들어 큰별들을 무겁게 어깨에 얹고있긴 하지만 그들도 독재자의 전횡에는 신물이 나있었던것이다.

오늘 오전에는 강화도에서 민중대표단이라는 이름을 단 나이지숙한 농군들이 찾아와 마루바닥에 엎드려 울며불며 분노를 터뜨리다가 경찰들에게 끌려갔다.

찾아드는 사람들에게 자기는 립법권의 책임자이니 사법권에는 관여하지 않는다고 발뺌을 하면서 자리모면을 하는데 서울통치권의 생리를 너무도 잘 알고있는 롤만앞에서는 그런 식으로 모르쇠를 할수도 없었다.

《다울링대사도 그 일때문입니까?》

리기붕은 공단조끼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들여다보며 불쾌한 어조로 물었다.

당초에 다울링이 이 자리에 나타난것이 의아쩍었다. 조봉암을 처형하는데 깊이 관여하여온 인물이 항의차로 온것이 틀림없는 롤만과 동행하여 자기를 찾아온것이 어쩐지 의심쩍었던것이다.

미국의 견해가 달라졌는가? 혹 미국이 세계의 여론앞에 굴복하여 조봉암에 대한 처형을 중지시킬것을 결심하였는가?

롤만의 거동을 보면 국무성의 공식적인 견해를 가지고 온것 같지는 않다.

며칠전에 리기붕은 리승만과 함께 다울링을 만나 조봉암을 이번 기회에 완전히 제거할데 대한 최종합의를 매듭지었다.

그 자리에서 다울링은 침묵으로 일관하였다. 그것은 말없는 공감이요, 지지며 결론이였다.

지금 미국은 조봉암문제가 세계적인 도전에 부닥치자 당황해하고있다. 바빠맞은 미국무성은 이따금 세계앞에서 체면을 지켜보느라고 불만과 우려도 표시하고 심사숙고할데 대한 건의도 공개하고있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은 한시바삐 조봉암을 제거하여 일단 터진 불집을 빨리 가라앉힐것을 바라고있다.

미국의 본심은 버드가 대표하여왔고 다울링은 세계여론과 숨박곡질을 하면서 버드를 가리워주는 외교를 하고있을뿐이다.

리기붕은 리승만과 함께 미국이 적극 지지하고 저들이 벌려놓기까지 한 일인데 세상이 제아무리 까불며 콩튀듯 한들 주춤거릴게 없다는 배포다.

그래 리기붕은 미국의 대사 네가 대답을 주라고 다울링을 슬쩍 대화에 끌어들인것이다. 리기붕은 여유작작하게 회중시계를 조끼주머니에 넣으며 롤만을 넘겨다보았다.

롤만의 표정은 여전히 착잡해보였다.

다울링은 리기붕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차잔을 들어 목을 추긴 다음 두사람에게 다 마땅한 대답이 되게 묘하게 연막을 쳤다.

《나는 미국대사로서 조봉암재판을 오래동안 끌어오는데 대하여 실망을 금할수 없습니다.》

다울링의 대답에 두사람의 표정은 금시 달라졌다.

다소 긴장되여있던 리기붕의 안면근육은 풀리고 흡족해하는 기색이 어리였다. 리기붕에게는 다울링의 말이 왜 이리 재판을 오래 끄느냐, 그러니 시끄럽지 않느냐, 어서빨리 끝장을 내라는 독촉지령으로 들렸다.

롤만은 아연해진 표정이였다. 그는 어깨를 으쓱거려보였다.

롤만에게는 다울링의 불만기어린 대답이 괜히 지금껏 끌어온 재판문제에 개입하여 미국을 더 난처하게 만들지 말어라 하는 일종의 경종으로 들렸다.

롤만은 분연히 고개를 들어 다울링을 쏘아보며 따져물었다.

《국무장관이 나와 협의한 사항을 의장에게 전달하여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소리에 다울링은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담으며 맞받아 대꾸하였다.

《나는 국무장관으로부터 이 문제와 관련하여 립장표명을 전달할데 대한 위임을 받은적이 없습니다.》

《그래요?》

롤만은 갈기를 쳐드는 분노를 억누르며 반문하였다.

국무장관도 국무성의 아시아담당관들도 자기를 위선적인 말로 업어넘겼다는것을 비로소 알게 된것이 어이없고 자신이 수치스러워졌다. 어떻게 그럴수 있는가. 국무장관이 자기와 만난 자리에서 어렵지 않게 자기의 요구를 받아들인것이 수상쩍었는데 한갖 기만과 감언리설에 불과한것이였다.

미국이라는 체통 큰 나라의 세번째 인물인 국무장관이 이렇게도 비렬하고 이렇게도 교활하고 속될수 있느냐.

미국! 미국! …

이 순간 롤만은 자기가 자주 체험해온 미국에 대한 혐오로 하여 구역질이 났다.

《하느님의 사도》라고 자칭하는 나라, 《세계를 이끌어 세계를 일체화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나라, 《자유의 성지》라고, 《정의와 진리의 상징》이라고 끝없이 나발을 불어대는 미국!

그 화려한 면사포를 한꺼풀만 벗기여도 벌써 악과 불의로 곪아있고 위선과 허위로 썩은내를 풍기는 더러운 정체가 들여다보인다.

롤만은 다울링을 앞세우고 온것이 후회가 되였다. 얼굴에 언제나 느긋한 미소가 떠도는 이 미국의 사나이도 알고보면 악과 술수로 빚어진 악인이 틀림없다. 미국이 통채로 악의 복마전이니 그속에서 오염된 인생이 다르게 될수 있으랴. 지금도 다울링은 리기붕에게 조봉암에 대한 재판을 빨리 끝내라고 은근히 부추기고있지 않느냐.

롤만은 희색이 만면해진 리기붕을 향하여 통분한 어조로 력설하였다.

《의장선생! 세계가 서울에서 벌어지고있는 이 재판을 지켜보고있다는것을 잊지 마시오. 나는 조봉암선생과 오래전부터 사귀여왔습니다. 그런 훌륭한 인간을 비명에 숨지게 하는것은 현대의 야만들이나 할짓입니다. 권력을 잡았다고 승리자가 되는것은 아닙니다. 권력을 잘 쓰면 성인으로 력사를 풍미하지만 권력을 잘못 쓰면 력사에 영원한 추물로 전해지게 됩니다.》

리기붕은 비주름히 웃으며 천연스럽게 받았다.

《고견입니다, 롤만선생!》

《나는 우리 국무장관이 나에게 하던 말을 그대로 되풀이하렵니다. 최소한 조봉암의 목숨을 아껴주어야 합니다.》

롤만의 절절한 부탁에 리기붕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리기붕은 또다시 조끼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들여다보고나서 목에 두른 넥타이를 더 바싹 죄였다. 속이 답답하고 울화가 쌓일 때면 뭇사람들은 죄여맸던 넥타이를 풀어던지고 걸친 옷도 벗어놓지만 이 병신같은 인간은 성격이 찌글써해진탓인지 오히려 그 반대다. 그는 속이 달아오를수록 넥타이를 죄여매고 풀어진 단추도 꼼꼼히 채우는 괴이한 습벽이 있었다.

사실 리기붕은 이 시끄러운 대화를 어서빨리 끝내야 되겠다고 결심하고 짐짓 정중하게 롤만에게 말했다.

《롤만선생! 선생의 그 간곡한 청을 소중하게 받아들이렵니다. 나는 무척 감동되였습니다. 최선을 다하겠다는것을 확언합니다.》

입으론 여우의 웃음을 피워올리며 간특하게 뇌까렸으나 속으로는 딴 수작을 늘어붙이고있었다.

(네가 듣던바 그대로구나. 세상흉물들이 모여사는 미국에 희한하게도 선한 양이 있었는가?)

롤만은 갑자기 호의적이고 공경스럽기까지 한 리기붕의 태도변화에 의아쩍어지기는 하였으나 그 정도의 대답으로도 속이 가벼워져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게 말씀하여주시니 다행스럽습니다. 기쁜 소식을 기다리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당신과의 회견내용을 래일중으로 기자회견을 열어 공개하겠습니다. 조봉암문제와 관련하여 크게 떠들고 걱정하고있는 세계여론에 서울에도 지각있는 지도급인물이 있다는것을 알려주면 마음을 놓을것이며 리승만의 후계자로서의 당신의 영상도 훨씬 좋아질것입니다.》

그러자 덩달아 자리에서 일어나던 리기붕이 은근히 권했다.

《롤만선생, 우리 집에 수고로이 오셨다가 그냥 가겠습니까? 점심식사를 하고 가십시오. 우리 마누라가 선생을 위하여 뭘 좀 준비하는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나에겐 시간이 없습니다. 나는 서울에서 사흘이상 체류할수 없습니다. 이건 당신네가 나에게 베풀어준 혜택입니다.》

《하, 그래요? 사죄합니다. 우리 외무부에서 일을 잘하지 못했군요. 귀빈을 알아봐야 하는건데…》

리기붕은 비꼬는듯 한 롤만의 말에 급해맞아 서둘러 변명하였다.

다울링의 볼도 삽시에 벌겋게 타들었다.

그들에게는 시끄러운 일을 가지고 온 롤만이 반갑지 않은 나그네였다. 그것으로 하여 롤만의 체류기일을 사흘로 한정시키는데서 그들은 공범자로 되였었다.

롤만은 자리에서 일어서기는 하였으나 책임감이 결여된 대답을 듣고 물러나는것이 찐덥지 않아 다시 말을 걸어보았다.

《의장님, 나에게 더 선명한 대답을 줄수 없을가요? 어떻게 하든 조봉암선생은 살려내야 합니다.》

《하, 롤만선생! 당신은 학계에로 돌아앉았는데 우리의 일에 왜 이렇게도 지극합니까? 그것이 미국공민 롤만선생에게는 선행이나 자선으로 되겠지만 우리에게는 내정간섭이 된다는것을 알아야 되지 않을가요?》

《뭐요? 지극하다구요? 내정간섭이라구요?》

롤만이 격한 어조로 리기붕의 말을 되씹었다.

(도대체 너희네가 정치에서 제 소리 내보는 놈팽이들이냐. 주제에 내정간섭이라구?)

그 소리가 새삼스럽다. 다름아닌 미국의 충견노릇을 자랑하는 리기붕의 입에서 튀여나온 뇌까림이기에 놀랍고 역스럽다. 궁지에 몰린 체면을 살려보느라고 방금전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한마디 해본것도 알쭌히 공리공담이였다.

롤만은 볼과 이마에 얼기설기 지나간 주름살과 누렇게 말라든 리기붕의 얼굴을 보느라니 불시에 가슴이 답답해오고 역기가 치밀어올랐다. 분명 인간의 넋이 메말라버린 미이라를 보는듯싶었다. 론리적인 사고도 감정의 티끌도 사라져버린 인간에게서 인간다운 목소리를 기대하는것부터 어리석은 일이다.

이놈은 지금 어둠속에 서식하는 박테리아처럼 빛을 싫어하면서 한다리는 영원한 어둠인 무덤속에 묻어놓고있다. 리승만의 뒤자리를 노리면서 권력야심이라는 용렬한 인생의 실오리를 붙잡고 신성한 인간의 박동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제가 파놓은 령혼의 함정으로 말려들어 인간고유의 향기도 즙도 다 잃어버렸다. 이런 인간이 권력을 틀어쥐려고 바질거리다니… 미꾸라지가 룡꿈을 꾸는 격이다. 권력에 대한 아부와 욕망, 인간의 선한 마음에 대한 악과 간계로 빚어놓은 몸뚱이에서 벌써 시진한 곰팡내가 풍기고있었다. 석양이 비낀 인생, 멸망해가는 인간, 인간족보에서 이미 추방되여버린 흉물! …

네놈같은 무뢰한들이 하늘아래서 자취를 감추어야 이 서울땅에도 새날의 려명이 비껴들것이다. 이제 두고봐라! 네놈의 명이 얼마나 남아있겠는가를! 불원간에 네놈은 인간세상을 등지게 될것이다. 그날은 온다, 반드시 온다!

롤만의 감정과 그의 예상은 어찌 보면 시대와 인간에 대한 매우 선견지명있는 통찰력이였다.

롤만이 갑자기 어조를 눙치더니 타협조로 말을 이었다.

《의장선생! 내가 좀 객적은 얘길 하나 해볼가요?》

《예, 말씀하시오. 들어봅시다.》

리기붕은 깊은 지성과 열정이 얼씬거리는 롤만의 강한 주장에 다소 얼떠름해있다가 그가 고삐를 늦춰주는듯싶어 막 꾸겨진듯 한 이마의 주름부터 폈다.

《나의 조상들은 프랑스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나도 프랑스에 특별한 애착을 가지고 자주 찾아가기도 하고 조상의 나라의 문물도 남다른 눈으로 관찰하군 합니다. 거기로 갈 때마다 생각되는게 있습니다. 뭔가 하니… 민족적자존심이라 할가요? 프랑스라면 나뽈레옹보다도 먼저 생각되는게 발자끄와 함께 꼬냐크지요.》

《꼬냐크? … 그럴듯 한 말이지요. 발자끄의 책을 읽지 않는 나라가 없고 프랑스의 꼬냐크를 마시지 않는 나라가 없을겁니다. 세상사람들은 꼬냐크를 들면서 프랑스를 생각할겁니다.》

다울링이 무슨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말을 꺼내는가고 시들해있다가 저도 모르게 끌려들어 맞장구를 쳤다.

《그런데 말입니다. 프랑스의 꼬냐크의 진미를 맛보자면 호텔이 아니라 빠리의 골목을 찾아가야 합니다. 골목마다에 있는 선술집에 가야 진짜 꼬냐크의 맛을 알게 된다 그 소리입니다.》

《선술집에 가야 진미를 본다구요? 하, 그럴수가 있습니까?》

리기붕이 반신반의하였다.

《예, 들어보시오. 한번은 내가 선술집에 가서 그 사람들이 내놓는 꼬냐크를 마셔보고는 시비를 쳐봤지요. 호텔에나 미국과 다른 나라에 보내는 꼬냐크는 이것보다 썩 못하다구요. 한즉 선술집주인이 하는 대답이 사뭇 의미심장하였지요. <여보시오, 미국어른! 우리는 호텔에나 다른 나라에는 두번째나 세번째 부류의 꼬냐크를 보내준단 말이요. 1등품이야 이렇게 우리 사람들이 마셔야 될게 아닌가요. 불평부릴게 없수다.> 뭐 이러루했답니다.》

《하, 프랑스사람들이 참 흉물이군요.》

《아니, 그 사람들이 결코 흉물이 아니지요. 나는 그때 내 조상의 나라가 얼마나 돋보였는지 몰랐습니다. 눈물이 납디다. 애국주의라는 인간의 고결한 감정, 민족의 자존심과 민족의 존엄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지켜지는가 하는데 대한 가장 통속적인 대답을 찾았던겁니다. 1등품의 꼬냐크는 프랑스사람들이 마셔야 한다, 바로 이겁니다.》

《음?》

리기붕이 롤만이 그 어떤 범상치 않은 문제를 이제 들고나올것 같은 아니아니한 심정으로 그 뒤말이 기다려지며 저도 어쩔새없이 신음소리같은 코소리를 냈다.

《내가 말하자는것은 서울의 정치가들속에 자기 민족을 아끼고 지켜주고 내세우는 민족적인 자존심이 상당히 결여되여있다는겁니다. 권력자들이 아끼고 지켜주어야 하는 민족의 재부중에서 제일 귀한것은 민족이 낳은 재사들입니다.

프랑스사람들이 꼬냐크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게 있으니 그것은 쟝느 다르크와 같은 애국충신들이며 발자끄와 같은 지성인들입니다. 영국녀왕 엘리자베스는 자기네의 문호 스코트가 이딸리아유람에 나섰을 때 13만파운드를 내서 군함에 태워 보내주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사람들은 함대에 례포까지 쏘면서 아프리카에 대한 자기네 문호 뒤마의 유람을 보장하였다고 합니다. 왜 그네들이 승벽내기로 그렇게 하였겠습니까? 이걸 황당한짓으로만 봐야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네들은 저들이 세계문명국들의 앞자리에 있다는것을 과시하고싶었던것이였습니다.

나라의 지성을 무시하고 인재를 중히 여기지 않는 나라는 영원히 미개한 후진국으로 남을수밖에 없는것입니다. 그런데 당신들은 조봉암이라는 자기 민족이 배출한 출중한 인재를 정치의 상대인물이라는 리유로 함부로 찍어넘기려고 하니 이게 될말입니까?》

롤만은 다시 속이 확확 달아오르는 열기를 가라앉히려는듯 잠시 말을 끊었다가 보다 강한 어조로 리기붕을 직사로 호되게 답새겼다.

《의장선생! 당신들은 왜 이렇게 모집니까? 이 서울땅에서는 권력자들이 제 민족, 제 동포를 아끼는 미덕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사상에 대한 선택은 민중의 기본권리에 속합니다. 정신을 구속하는것은 육체의 구속보다도 더 잔학한 린치입니다. 정의에 대한 도전은 력사의 심판을 반드시 받는다는것을 잊지 마시오.》

《롤만선생, 좋은 얘길 들려주어 감사합니다.》

리기붕은 버쩍 마른 상통에 어설픈 웃음을 지었다.

《나는 미국의 언론과 함께 당신들을 지켜보려고 합니다. 미국의 언론이 어떤 마술력을 가지고있는가는 의장선생도 아시겠지요?》

롤만은 약간 위협적인 암시를 주면서 오금을 박았다.

리기붕이 롤만의 공박에 목을 움츠리면서도 애써 태연하게 받아넘겼다.

《알다뿐이겠습니까? 미국언론이 대통령다음으로 미국을 지배하는 권력자라는거야 세상이 다 알지요. 하지만 미국언론을 의식해서 우리가 제 할 일을 걷어치우지는 않을것입니다. 여하튼 조봉암문제는 우리가 다시 심사숙고하겠다는것을 언명하는바입니다.》

《좋습니다.》

그러면서 롤만은 자기 가방속을 헤쳐보였다. 거기에서는 자그마한 록음기가 뱅글뱅글 돌아가고있었다.

롤만은 록음기를 꺼내보이며 위협조로 설명하였다.

《우리의 담화는 여기에 다 수록되였습니다. 서로 자기의 발언에 대하여 책임지자는것을 당부합니다. 정치인들에게서 신의란 생명과 같은것이라는것을 나도 압니다.》

리기붕이 록음기의 스위치를 끄고 다시 가방을 꼼꼼히 채우는 롤만을 거칠게 쏘아보다가 이내 표정을 바꾸었다.

《그건 무례한 일이 아닐가요?》

《무례한 일? 당신들이 어떻게 감히 례의에 대해 론할수 있습니까? 다시 우리의 대화를 출발점에서 시작해볼가요? 례의라는 개념해석으로부터 시작합시다.》

롤만은 겸양을 버리고 공격적인 자세를 취하며 옹골차게 들이댔다.

《하, 롤만선생은 역시 빈틈이 없군요.》

다울링이 크게 탄복한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리기붕은 더 깊은 나락에 빠져들지 않으려고 서둘러 대화를 끝냈다.

《좋습니다. 모처럼 만났는데 더 론쟁을 하지 맙시다. 당신에게 다시 확언합니다. 조봉암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울링도 그들의 론쟁에 차단봉을 내렸다.

《나도 약속합니다.》

롤만은 얻어낸 말이 고작하여 최선을 다하겠다는 책임과 의무감이 희박한 대답이여서 기가 막혔으나 이자들에게 더 의지해볼 여지가 없다는 생각에 물러나는수밖에 없었다.

리기붕은 상대의 끈질기고도 위엄있는 공세에 기진한듯 오만상을 해가지고 어깨를 죽신죽신 두드렸다. 젊은 시절에 생겨난 신경통으로 때없이 고생하는 리기붕이다. 회중시계를 꺼내 들여다보군 했다.

리기붕의 무례한 거동이 이제는 물러나달라는 하소연같기도 해서 롤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좀더 속이 후련하게 욕이라도 퍼붓고 보다 책임이 부여된 대답을 끌어내고싶은데 상통을 찡그리고있는 리기붕에게서 더는 선의의 대답을 얻어낼수가 없다고 판단되였던것이다.

사개가 물린 롤만의 시비론조와 록록치 않은 비난에 땀개나 뽑은 리기붕은 더는 붙잡지 않았다.

자기는 여기에 좀 지체하겠다고 하면서 자기 차를 타고 호텔로 가는것이 어떠냐는 다울링의 호의에 응한 롤만은 인차 리기붕의 집을 나섰다.

다울링은 리기붕과 함께 롤만을 바래주고나서 방에 되돌아오자 엄하게 지시하였다.

《의장님, 즉시 정제관을 찾아서 명령하십시오.

첫째, 반도호텔에 숙소를 정한 미국공민 롤만의 3일 체류기간 일거일동을 장악해야겠습니다.

둘째, 서울의 관계기관들, 법무부, 내무부, 법원, 형무소들과 주요언론사들에 대한 롤만의 출입을 불허해야겠습니다. 특히 롤만의 기자회견을 철저히 차단해야겠습니다.

셋째, 롤만이 가지고있는 록음기를 출국전에 처리해야겠습니다.》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미군사령부와 미국의 현지기관들에는 내가 직접 통보하겠습니다.》

리기붕은 다울링의 지령이 떨어지기 바쁘게 송수화기를 들고 여기저기를 찾아 지시하였다.

전화를 마치자 리기붕은 다울링에게 사례를 표시하였다.

《고맙습니다. 며칠안으로 거사를 끝내겠습니다.》

갑자기 쌓이고쌓였던 죄의식이 그만 목구멍으로 치밀어올랐던지 리기붕은 발작적으로 기침을 터뜨려놓았다. 왼쪽볼과 눈시울이 그냥 푸들푸들 뛰고 한쪽다리가 뻣뻣해왔다.

사실상 리기붕은 방금전에 롤만이 치를 떨며 락인을 찍은것처럼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멸망해가는 인간페물이였다. 미국에서 보내온 고가약을 닥치는대로 쓰고있었으나 당뇨의 수치가 자꾸만 상승하여 한시간도 지탱하지 못하고 하품하고 졸고 해서 요새는 공식장소에 나서는것도 극력 삼가한다. 안면근육이 자주 마비되고 좌골신경통도 심한데다가 때없이 줄기침증세까지 발작하군 하면서 육체가 온통 페인이 되여가고있다. 게다가 정신적으로는 다음 또 다음기에는 리승만을 대신하여 경무대를 차지할수 있다는 환상에 사로잡혀 리성이 황페화되고 때이른 로망기에 녀편네까지 진저리를 칠 때가 많다.

리기붕은 이 순간에 이제부터 반년이 지나 자신이 자결이라는 비참한 인생말로를 맞게 되리라고는 추호도 내다보지 못하고있었다.

죄는 지은데로 가기마련이다. 가는 방망이에 오는 홍두깨라 조봉암모살에 앞장섰던 리기붕은 다음해 3월에 있은 선거에서 부정협잡으로 《부통령》감투를 쓰게 되였으나 4월인민항쟁에 혼이 빠져 피신처를 찾아 산지사방을 헤매였다.

분노한 민중은 리승만과 함께 리기붕의 목을 쳐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그 어디서도 리승만의 손아래동료로 못된짓만 일삼아온 리기붕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심지어 미군과 남조선군부의 장성들까지도 보호하여달라고 애걸하는 그의 앞에 대문빗장을 단단히 지르게 하였다.

격노한 민중에게 덜미를 잡힐가봐 전전긍긍하던 리기붕은 끝내 제손으로 녀편네인 박 마리아와 자식들에게 총탄을 박고 죄많은 제 몸뚱이에도 연덩이를 처넣고야말았다.

력사의 법정이 추악한 패자에게 내린 준엄한 징벌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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