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7 회)

제 5 장

3

 

그때로부터 열흘이 지나갔다.

재판이 재개되였다.

법원장은 우의 지시라고 하면서 홍병삼에게 이제부터 열리는 재판을 제2회 재판이라고 부르라고 하였다. 홍병삼은 세상여론이 두려워서 취한 조치라는것을 알고 별생각없이 접수하였다.

자리를 잡은 홍병삼은 잠시 피고석을 내려다보았다. 조봉암의 얼굴에 눈길이 가자 얼른 고개를 돌렸다.

저 사람들은 지금 승자의 희열에 취하여있다. 자기 위업의 정당성을 깊이 인식하고있으며 재판의 결말이 승리적으로 결속되리라고 락관하고있다. 그럴법도 하다. 사실상 이제 와서 검찰의 기소장따위는 재론할 여지도 없다. 판결은 무혐의즉시석방과 당국의 보상으로 예견되여있다. 처음부터 외부의 조종으로 고개를 기우뚱거리군 하던 배석판사 최창섭이도 너무나도 뻔드름해지는 재판결말을 놓고 더는 빠져나갈수 없다는것을 인식하고 될대로 되라는 식으로 체념하고있다.

그런데 갑자기 사태는 뒤집어졌다. 어제 오전에 재판을 개정하라는 법원의 지시가 내리자 뒤를 이어 기소측이 추가기소장을 보내왔는데 그야말로 그대로 확인된다면 이미 벌려온 재판을 완전히 뒤집어놓을수 있는 폭탄공세였다.

추가기소장에는 강치부라는 전혀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였다. 오래전부터 북의 련락관으로 조봉암과 련계를 가지고 활동하였다는것이다. 북의 특수기관과 조봉암과 강치부와의 삼각형이 일목료연하게 그려졌다. 구체적인 사실들이 시간과 장소, 관계인물들을 들어가며 미끈절싸하게 렬거되여있다. 기소장에는 조봉암도 북에 여러차례 다녀온것으로 방불하게 그려져있었다.

홍병삼은 경찰이 또 한차례의 피비린 조작극을 벌렸다는것을 직감하였다. 우에서 재판의 중지를 지시했던것은 바로 이 조작극이 미처 마무리되지 않았기때문이였을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강치부라는 미지의 인물이 오늘 법정에 나서게 된다는 엄연한 현실이 쉽게 단정할수 없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있었다. 그 인물이 이제 여기 나타나 자신의 조작된 범죄를 실토하고 그에 대한 재판이 벌어진다면 과연 조봉암이 통치권이 새로 던진 그 간악한 루명에서 쉽게 벗어날수 있을가.

새로 나타난 피고의 소속과 신분이 사태의 전망을 더 어둡게 하였다. 그의 소속은 미8군소속 인천첩보대이며 기소에 제기한 기관도 경찰따위가 아니라 미8군방첩대이다. 미군첩보대의 인물을 이런 무대에 내놓자면 어차피 미군사령부의 동의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홍병삼은 미군사령부가 동의정도가 아니라 주동적으로 새로운 날조극을 만들어냈을것이며 따라서 재판은 보다 험악한 방향으로 꺾어들게 되였다고 속셈을 하고있었다.

홍병삼은 이윽고 방청석까지 휘둘러 살피고는 무거운 어조로 재판을 개정하였다.

《제2회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2회재판 첫 순서로 조인수검사가 추가기소장을 제기하겠습니다. 피고 강치부를 출두시키시오.》

홍병삼이 지시하자 피고들이 나드는 출입문이 열렸다.

호송경찰이 양복을 입은 사나이를 안내하여 재판정에 들어섰다.

모두의 시선이 고개를 축 늘어뜨리고 들어서는 그 사나이에게로 쏠리였다.

조봉암은 강치부라는 호명에 혹시나 하고 의아해했는데 피고석으로 걸어나오는 사람은 틀림없이 서른해가까이의 연고가 있는 인물이라 자못 놀라움을 금할수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되여 저 사람이 우리와 나란히 피고석에 앉게 되였을가? 저 사람은 미군쪽에 있는 사람인데 어찌되여 죄인으로 몰리게 되였을가? 추가기소장이란 또 무엇이냐? 오늘 재판에서는 검사구형과 재판장의 선고가 예견된다고 하였는데 또 무슨 놈의 꿍꿍이냐? 그러면 재판을 더 끌어가려는가? 무엇으로? … 더 끌어갈 시비거리가 있다는거야? … 추가기소장? … 뭘 또 추가하려는가?)

갑자기 여러개의 의문부호가 조봉암의 눈앞에서 어지럽게 춤을 추며 속을 뒤숭숭하게 하였다.

재판이 시작된지도 이제는 어느덧 여러달이 되여온다. 《국회》선거도 엊그저께 다 치르었다고 한다. 이제는 리승만이 적당한 명분을 세워 재판을 중지하든지 아니면 얼른 결속하여 자기들을 풀어놓으리라고 생각하였다.

그래 조봉암은 다소 가벼운 마음으로 새로운 용기와 희망을 안고 이제 밖에 나가 전개할 투쟁을 설계하여왔다. 당의 합법을 빠른 시일안으로 회복하고 조직을 완비하는 사업에 신속히 돌입하며 2년후에 예견되는 《대통령선거》를 겨냥하여 용기백배 진군하여야 한다.

법정투쟁으로 진보당은 또 한번 자기의 정당성을 내외에 과시하였다. 그만하면 당의 전투력도 보여주었으니 《국회》진출은 좌절되였으나 총체적으로는 한걸음 크게 전진한셈이다.

지난 10일간 감방에 홀로 앉아 이렇게 법정투쟁을 분석하고 총화하다가 마지막 돌파전에 나서는 장쾌한 기분을 가지고 왔는데 무엇인가 때없이 검은구름이 이 법정을 무겁게 짓누르고있는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며 쳐다보니 재판석에 앉은 재판장이나 배석판사들의 거동도 여느때와는 다른것 같다. 무겁고 침통하고… 불안하고 초조하고…

재판관들이 흔히 하는 말이 있다. 대상이 어떤 인물이든지, 어떤 성격의 범죄이든지 검사의 구형보다 형량을 덜어 선고를 내리는게 속이 편하다고 한다.

판사들의 어두운 표정은 무엇때문인가? 재판의 결과에 대한 비관적인 예측때문일가? …

끝없이 밀려드는 불안에 대답하듯 검사석에 있는 기소자들의 표정은 긴장하며 새로운 결투장에 나선 검투사와 같이 비장하고 의기양양하다. 또 한바탕 법정을 흔들어놓을 회오리를 안고 온것이 틀림없다.

조봉암도 아직은 딱히 짚어내지 못할 그 무슨 불길하고도 심상치 않은 예측으로 가슴이 죄여들었다. 저놈들이 또다시 싸움을 걸어오면 맞붙어보는수밖에 없다.

(음, 하여튼…)

조봉암은 오금에 지그시 힘을 주었다.

조인수검사가 다시 두툼한 문건을 들고 마이크앞에 나선다. 그는 재판석과 청중들을 향하여 고개를 건성 끄덕여보이고는 갑자기 커다란 목소리로 추가기소장랑독을 시작하였다.

《추가기소장

피고자 강치부

죄명 간첩활동죄

범행자료…》

조인수는 예까지 큰소리로 읽고는 다시금 피고들과 방청객들의 반응을 살피듯 그 올빼미같이 올롱하게 박혀든 새까만 눈망울을 굴리였다.

조봉암은 조인수의 살기등등한 기소에 아연실색하였다. 순간에 리승만일파의 엄청난 꿍꿍이가 짐작이 갔던것이다.

저놈들은 오래동안 교제하여온 강치부를 간첩으로 둔갑시켜 법정에 세워서 나와 북을 련결시키려고 꾀한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하필이면 강치부가 걸려들었을가? 강치부가 간첩이라니…

조봉암은 놈들이 이제 벌리려 하는 또 한차례의 비렬한 모략이 예상되자 치가 떨렸다.

(이제부터 저놈들과 너무도 황당하기 짝이 없는 싸움을 다시 벌려놓고 아까운 시간만 흘러보내며 기운을 소모해야 될것이 아니야? 언제까지 이 무익하고도 가소로운 입싸움에 말려들어야 하는가. 저 강치부가 물러서면 또 어떤 흉계를 꾸며가지고 덤벼들가? 에, 더러운 놈들! 악착한 놈들! …)

조봉암은 끓어오르는 분격을 금할수 없어 입술을 피나게 악물고 걸상을 틀어쥔 주먹에 힘을 주었다.

조인수가 기소장을 넘기기 시작하였다.

자신감에 넘친 말투로 강치부의 경력을 소개하고 북의 특수기관에 포섭된 경위를 길게 내리엮었다.

아니나다를가 강치부의 범행에 조봉암이라는 이름이 겉묻어 도간도간 오르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북의 특수기관이 조봉암의 동향에 관심을 보였고 조봉암 역시 북의 특수기관들과 주요인물들에게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자료》를 떠올리더니 점점 조봉암에게로 몰아가기 시작하였다. 어느덧 강치부의 《범행자료》라 해놓고는 그 당자는 가장자리로 밀려나고 조봉암이 기소장의 중심에 서게 되였다.

조봉암은 추가기소장이라는 의미가 리해되였다. 지각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추가기소장이라는게 조봉암말살을 위해 만들어졌고 저 강치부라는 인간도 조봉암을 노리여 《간첩》이라는 패쪽을 받게 되였다는것을 누구나 쉽사리 짐작할수 있게 되였다.

《조봉암포섭》이라는 말이 드문히 오르더니 드디여 포섭되였다는것으로 비약이 되여갔다.

점차 조인수는 강치부라는 인물을 중간지점에 세워놓고 그 앞뒤에서 북의 모기관과 정보교환도 하고 지시를 주고 집행을 하며 공작금과 다량의 희귀물자들을 주고받는 삼각관계로 구체적으로 사건을 묘사하였다. 이렇게 거의 두시간에 걸쳐 장황하게 전개되다가 나중에는 조봉암이 간첩방조나 동조가 아니라 아예 간첩으로 활동한것처럼 범죄가 구성되고 활동의 성격이 규정되였다. 누가 들어도 쉽게 납득하고 수긍할수 있도록 그림처럼 선명하면서도 틈사귀가 없이 다듬어져있었다.

피고인들이 경악하고 방청석도 너무도 엄청난 기소에 접하여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고개를 기웃거리며 반신반의하는 표정을 가무리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다만 조봉암만이 입술을 성문처럼 닫아붙이고 조인수를 뚫어지게 보고있을뿐이였다.

(나쁜 놈들! 악귀같은 놈들! 사기군들! 협잡군들! 강도배들!)

입을 떼기만 하면 세상 추한 인간들에게 붙이는 더러운 말만이 폭포치듯 쏟아져나올것이다. 자리에서 일어나기만 하면 당장 검사녀석의 목덜미를 틀어쥐고 주리를 틀어놓을판이다.

지금 조봉암은 초인간적인 의지력으로 자기를 다잡으며 리성을 잃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세상이 더럽다한들 이렇게까지 더러울수 있느냐. 이렇게까지 썩어빠질수 있느냐.)

아버지로부터 대여섯걸음 뒤에 앉아있는 연경이도 조인수의 기소에 너무도 분통해서 온몸을 와들와들 떨고있었다.

류선녀는 자기도 속이 터질것 같았으나 좌우에 앉아있는 두 딸들이 금시 목놓아울거나 기절해버릴가봐 《연경이, 효경이! 진정해!》 하고 속삭이며 그들의 손목을 꽉 잡고있었다. 그는 모지름을 쓰고있는 조봉암의 떡판같은 잔등을 애절하게 지켜보았다. 산악처럼 웅건한 자세로 분노와 억울함을 지르밟고있는 조봉암의 뒤모습에서 힘과 용기를 얻으며 자기를 이겨온 그였다.

류선녀는 속으로 안타깝게 부르짖었다.

(죽산선생님! 이 일을 어떻게 하나요? 어쩌면 좋아요?)

그러면 조봉암의 목소리가 들려오는듯싶었다.

(선녀, 속지 마오! 떨지 마오! 저놈들이 언제 바른말을 한마디라도 해보는 놈들이요? 이번에도 나는 이겨낼거요. 암, 이겨내구말구! 정의는 죽지 않는다오.)

(그래요! 저는 선생님이 반드시 승자가 되리라는것을 믿습니다.)

류선녀는 그냥 조봉암과 마음속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문득 조봉암이 자기의 등뒤에서 오열을 참아내고있는 가족들의 격렬한 숨소리와 류선녀의 애타는 마음의 목소리를 가려들은듯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연경의 눈길을 받는 순간 서리발같던 조봉암의 얼굴이 순식간에 풀리더니 정겨운 미소가 함뿍 피여올랐다.

억척의 심장과 바다같은 배심을 가진 승리자만이 지을수 있는 그 미소가 죽음을 확정적으로 예고하는 검사의 살기등등한 기소를 일격에 무시해버리며 두 딸과 류선녀의 속에 봄바람처럼 날아들어 얼어붙던 속을 화락하게 해주었다.

《아버지!》

연경이가 나직이 목메여 불렀다.

조봉암이 그들의 수천마디의 부탁과 마음을 다 헤아린듯 미소를 지은채 고개를 힘있게 끄덕였다.

(얘들아, 걱정말아라!)

조봉암은 이렇게 속삭이는것 같았다.

오전재판은 조인수의 추가기소장랑독으로 끝났다.

홍병삼이 휴정을 알리려고 재판봉을 쳐들었을 때 조봉암이 오른팔을 쳐들며 소리쳤다.

《재판장!》

홍병삼이 앞상을 재판봉으로 내리치려고 하다가 그에게로 눈길을 보냈다.

타끓던 속을 눅잦힌 조봉암은 흔들림이 없는 자세로 돌아가 침착하게 제기하였다.

《세가지 문제를 법정에 제기하겠습니다.

첫째, 이 시각부터 본인은 자체변호를 중지하기로 하겠습니다. 추가기소장에서 게재된 이른바 범행자료는 본인이 옥에 묶이워있는 이상 자체변호를 원만히 보장할수 없습니다.

둘째, 오후 증인심문에 앞서 본인과 강치부피고인과의 대질심문을 조직해주기 바랍니다.

셋째, 본인이 이미 제기한 증언자중에서 강무호, 정명갑이 아직도 출정하지 않았습니다. 법원의 결정이 리행되도록 조처해주기 바랍니다. 이상입니다.》

그러자 홍병삼이 좌우에 앉아있는 배석판사들을 둘러보며 뭐라고 물었다. 배석판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는것으로 홍병삼의 제기에 지지를 표시하였다. 최창섭이도 반대할 리유가 없었다.

《피고인의 제기를 접수합니다.》

홍병삼은 이렇게 말하고 재판봉으로 앞상을 세번 두드렸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피고석을 내려다보았다. 좌절감과 실망으로 분노한 피고들이 조인수를 당장 찢어발길듯 칼날같은 눈을 번뜩거리고있었다.

조봉암만이 아직도 쓰거운 미소를 머금은채 눈을 감고 무거운 생각에 잠겨 바위처럼 앉아 움직이지 않는다.

홍병삼은 그 태연자약한 기색에 다소 마음이 놓이기는 했으나 불쑥 솟구치는 련민의 정에 명치가 찌르르해왔다.

리승만세력은 끝끝내 조봉암을 도륙을 내고싶어 안달복달이다. 추가기소장이 리승만의 심술궂고도 야수적인 흉심을 그대로 드러내고있다. 이제 저 사람이 분명 미국이 공공연하게 끼여든 이 어마어마한 공세를 이겨내고 자기를 기어이 지켜낼수 있을가?

엊그제 저녁에 자기 딸과 함께 찾아온 연경이를 만나던 일이 느닷없이 생각났다.

《연경아, 마음을 놓아도 될것 같다. 검사가 별수작을 다해도 일없을거다. 무혐의석방이 틀림없는줄 알아라.》

그 소리에 연경은 앉은절을 곱게 하였다.

《고맙습니다!》

연경은 홍병삼의 발부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그냥 울었다.

그래 홍병삼은 그의 두팔을 잡아 일으켜주며 위로하여주었다.

《연경아, 내게 인사할게 없다. 원래 죄없는분들이다. 법이 고약해서 지금까지 풀어놓지 못하고있었으니 내가 죄스럽기만 하다. 그리고 죽산선생님은 쉽게 꺼꾸러져서는 안되는 이 서울사회의 동량이다.》

그게 바로 이삼일전에 있은 일인데 이렇게도 사태가 뒤집혀지다니…

홍병삼은 그도 어쩔새없이 피를 토하듯 거친 숨을 내쉬였다. 죄악의 복마전을 어서빨리 떠나고싶어 그는 황황히 재판석을 내려 뒤문으로 빠져나갔다. 이어 검사석의 검찰족속의 무리가 기고만장해서 앞문으로 빠져나갔다. 피고인들도 반대쪽의 출입문으로 법정을 떠나갔다.

피고인가족들이 효경이와 연경이를 에워쌌다. 이겨내자고, 이겨낼거라고 서로서로 고무하고 확신하며 붙잡고 울기도 하다가 하나, 둘 밖으로 나갔다.

그때 제일 뒤쪽에서 《연경!》 하는 사내의 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최금룡이였다.

최금룡은 오늘 검사구형이 있을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법원에 가서 겨우 입장권을 하나 구해가지고 들어왔던것이다. 그도 무척 흥분되고 절통한 모습이였다.

최금룡은 연경이네 자매와 류선녀, 김봉무가 서있는 앞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그는 《선생님!》 하며 류선녀에게 먼저 허리를 굽혔다. 그리고 김봉무와 효경에게도 인사를 하였다.

최금룡은 연경을 흘끔 보고나서 효경에게 말하였다.

《누님, 절 욕했지요?》

《욕이라니요. 우리도 크게 깨닫는바가 있었어요, 연경이도 그렇구…》

《연경이도? …》

최금룡이 이렇게 효경의 말을 받으며 연경이에게로 다가갔다.

《연경이!》

《!》

류선녀가 연경의 잔등을 떠밀어 금룡의 앞에 세워주었다. 그리고는 금룡이에게 살틀한 정을 담아 말을 건네였다.

《어려울 때 나서주어 정말 고마워요. 이젠 우리 연경이를 절대 놓치지 말아요. 그럼 천천히들 따라오세요. 연경이, 우린 먼저 가!》

류선녀는 김봉무와 효경이를 이끌고 밖으로 향하였다.

최금룡이 그들을 눈으로 바래우고나서 연경에게로 돌아섰다.

《연경이! 똑똑히 봤지? 저놈들이 어떤 수작을 늘어놓고있는지…》

최금룡이 격분하여 말하였다.

《우리도 갑시다. 할 말이 있소.》

최금룡의 소리에 연경은 두말없이 그를 따라섰다.

그들은 길가에 있는 음료점에 들어갔다. 방금 구워낸듯싶은 먹음직스러운 단빵그릇을 받아놓았으나 입안이 소태처럼 쓰거워 먹을수가 없었다.

더 권하지 않고 인차 자리에서 일어난 그들은 한강변으로 향하였다.

바야흐로 강변에는 봄계절이 무르녹고있었다. 연록색의 잎새를 가득 매단 버드나무가지들이 치렁치렁하게 드리워져 하늬바람에 흐느적거리고 물면으로는 물오리 한쌍이 비행구름같은 두줄기의 물곬을 째며 쏜살같이 미끄러져간다.

두사람은 잠시 바람에 옷자락을 날리며 정오의 해빛이 자글거리고있는 강반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연경! 그놈의 법정, 막 부시고싶었소!》

최금룡이 불쑥 큰소리로 절규하였다. 침통한 기색이 력력한 얼굴에서 크고 정기어린 눈망울이 불덩이처럼 이글거렸다.

《!》

연경은 최금룡의 흥분과 웨침을 자기나름으로 해석하며 물기어린 눈으로 상대를 찬찬히 쳐다보았다.

《이 땅은 부패의 천국, 암운이 칭칭 서린 동토대, 독재의 독버섯이 속속들이 잠식해있는 불모의 땅, 미군이라는 강점자의 압제에 숨소리도 제대로 낼수 없는 식민지요! 법도 도덕도 인간성도 황페화된 멸망해가는 사회란 말이요!

하지만 미국놈들과 리승만일파는 허물어져가고있는 권력을 하루라도 더 지탱하기 위하여 이 땅의 량심과 정의를 저렇게 모조리 파멸시키고있소. 그래, 집권을 위함이라면 매국도 살인도 협잡도 불법무법도 서슴지 않는 저 악의 원흉을 말로써 이겨낼수 있는가?》

최금룡은 자기를 잃은듯 활활 타오르는 비분을 쇠물처럼 내뿜었다. 마치도 연경이가 론적이나 된듯 처녀의 앞을 성급하게 오락가락하며 주먹을 흔들었다.

아직도 연경은 최금룡이 왜 자기를 여기로 끌고왔으며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 영문을 알길없어 눈물을 닦으며 상대의 번쩍거리는 눈을 지켜볼뿐이였다.

최금룡의 증언을 들은이래 그에게로 향하는 마음이 크게 달라져 한번 만나보고싶었고 만나면 하고싶던 말들이 많았던 처녀였다. 그런데 재판정에서 크게 위축되여 나온데다가 최금룡이 만나자마자 흥분하여 떠들자 속깊이 차곡차곡 포개두었던 말마디들은 홀연히 잦아들고말았다.

하지만 처녀는 그래도 최금룡에게서 그 무슨 정깊은 얘기를 기다리며 다소곳이 그의 뒤말에 귀를 기울였다.

《독재란 힘으로 까부셔야 하오. 나는 길을 찾아 방황하였소. 아버님이 찾아낸 <제3의 길>이란 백년 걸어봐야 끝이 보이지 않는 무모하고 어리석은 꿈속의 유희라는걸 나는 똑똑히 보았소.》

연경은 감히 아버지의 거룩한 위업을 단칼로 찍어버리는 금룡의 결론에 그만 속이 헝클어졌다.

이거야말로 상가집에 가서 혼사말 꺼낸다는 소리나 같지 않느냐. 따뜻한 위로의 말은 한마디도 없이 아버지의 위업을 놓고 시비질부터 하니 정말 기대밖이다.

아니, 모를 일이다. 최금룡은 그렇게 눈치없고 도덕이 없는 마구잡이가 아니다. 최금룡이 결코 때에 어울리지 않게 아버지를 비난하고 진보당의 강령이나 시비하려고 이 착잡한 시각에 이런 심각한 자리를 만들지는 않았을것이다.

연경은 아직은 명료하지 않은 또 하나의 야릇한 불안을 느끼였다.

최금룡이 연경의 반발은 개의치 않은듯 그냥 열정적으로 열변을 토하였다.

《난 좀 오늘은 길게 말해야겠소. 난 사실 리승만의 정치를 해부하고 리승만을 내세워 세계제패의 야망을 강행하고있는 미국의 정체를 밑바닥채 파헤치고싶어 경무대로 갔댔소. 그 다음에는 리승만독재정치에 공개도전장을 던진 우리 사회의 유일한 진보정치지도자인 아버님과 진보당의 리념이 마음에 들어 연경이네 대문안으로 들어섰소. 이태후에 나는 거기서도 물러났소. 아버님의 선택, 진보당의 길을 다 알게 됐기때문이였어. 한마디로 실망이였소. 아버님이 평생을 바쳐온, 아니 해방후 10년세월을 이어온 간고분투에 실망했소.》

《가만… 제가 일전에 말했지요, 저도 이젠 금룡씨의 불만이 리해가 된다고. 그런데 이런 시각에 그걸 상기시키는 리유는 뭔가요?》

《연경! 내 말 들어보오. 아버님은 지금껏 꿈을 꾸어왔소. 오늘과 같은 가장 악질적인 반공의 칼날과 정정당당하게 시비를 캐가지고 이겨보겠다는건데 이게 천진한 꿈이 아니요? 보오, 이 재판을! 독재가 앙탈을 쓰며 도전세력의 사소한 진출에도 힘과 모략과 사기협잡을 능사로 벌리고있는것을! 그래 진리와 량심의 페허에서 인간의 정의와 리상이 구현된 민중세상을 일떠세울수 있는가. 나는 오늘 재판을 보면서 내가 2년전에 내렸던 결론과 결단이 옳았다는것을 다시금 재확인하였소!》

《금룡씨! 지금 어디 그런 소릴 할 땐가요? 나에게는 지금 아버지에 대한 비난이나 들을 마음의 여유가 없답니다.》

연경이는 지친 기색으로 대답하고나서 돌아섰다.

최금룡이 그를 막아섰다.

《비난이라구? … 좋소, 아무렇게나 해석해도 좋소. 하지만 이 최금룡의 말을 마저 듣구 작별을 해야 될게 아니요.》

연경은 상대의 정서나 아픈 상처에는 아랑곳없이 자기 생각에 흥분되여있는듯싶은 최금룡에게서 왠지 서름서름한것을 느끼며 느닷없이 엇서서 박아주고싶은 아기뚱한 욕망을 금할수 없었다.

《좋아요. 말해봐요. 도대체 금룡씨는 어떻게 하는게 진리라는겁니까? 리승만과 사이좋게 타협하자는건가요?》

연경이 론쟁조로 걸고들었다.

최금룡은 서슴없이 큰소리로 대답하였다.

《타협? 무슨 왕청같은 소리요? 난 감히 주장하오. 항쟁이요!》

《항쟁?》

연경의 입에서 비명같은 웨침이 튀여올랐다. 그는 매끄럽고 차디찬 고드름같은것이 목으로 불쑥 솟구치는듯싶었다.

《그래! 힘에는 힘으로 맞서야 하오. 독재의 칼에는 항거의 철퇴로 대답해야 하오. 종이장놀음이나 입싸움이나 표벌이놀음으로써는 절대로 독재를 이겨낼수 없소. 도대체 아버님이 52년도나 56년도 그리고 지금도 지지표가 부족해서 리승만독재에 푸른 신호등만 켜주게 했소? … 항쟁이요! 투쟁이요! 그것만이 민중에 대한 사랑이고 썩어빠진 이 사회를 구원하는 길이요! 목숨같은 정의와 자유를 지키는 길이요!》

《항쟁이라구요?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 일이예요?》

연경은 온몸을 휘익- 스쳐가는 벼락을 느끼며 진저리를 쳤다. 그는 비명치듯 부르짖으며 최금룡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다른 길은 없소! 항쟁! 바로 그 길뿐이요. 대중적항거를 조직해야 하오.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고 추파를 던지지 말고 그들의 면상에 주먹을 내대고 <물러가라!> 하고 용기있게 소리치고 쫓아버려야 하오!》

《이봐요, 너무 거창해서 듣기가 숨차군요. 다른데 가서는 제발 그 말을 다시 꺼내지 말아요. 지금 금룡씨는 너무 흥분했습니다. 자, 가요.》

연경은 폭탄이 옆에서 떨어지는것 같아 겁이 나고 두려운 생각이 앞서 주위를 돌아보았다.

《연경! 난 흥분은 했지만 들뜬 궤변을 늘어놓는게 아니요. 나는 지금 운명적인 이야기를 하고있소. 난 사실 이태전에 버티고개로 연경이를 불러낼 때 나의 방황과 고민과 내가 찾아낸 진로에 대하여 다 말해주고싶었소. 그러나 난 그때 버티고개까지 가기는 했어도 마침 연경이가 제시간에 나타나지 않았고 또 아직은 시기상조라는 생각도 들어 그만 자리를 떴던거요. 나와 너, 우리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 이건 내가 삶의 진로를 모색하여온 어제날에 대한 총화요. 우리 동지들이 피의 란무속에서 얻어낸 진리요.》

《우리 동지들?》

연경의 눈이 또 휘둥그래졌다. 들을수록 그냥 미궁에 깊이 빠져들게만 한다.

(우리 동지들이라니? 그러니 금룡이가 그 어떤 결사에 가담하였다는 말인가?)

연경의 속내를 알아차린듯 최금룡이 시원스럽게 말을 이었다. 오늘은 연경의 앞에 자신을 깡그리 드러내놓기로 결심하고 나타났던것이다.

《난 이미 고려대학교시절부터 해맞이모임이라는 비밀결사의 조직원이였소. 얼마전부터 우리는 조직의 이름을 민주쟁취청년동맹으로 고쳐부르고있소. 우리 조직도 이젠 뼈와 힘을 키우던 요람기에서 벗어났거던. 우리는 이미전에 우리 사회의 암적존재를 들어내자면 내과적인 방법이 아니라 외과적인 방법만이 유일한 선택이라고 견해의 일치를 보게 되였어. 그래서 내가 아버지의 슬하를 괴로워도 떠났던거요.

인천의 우리 아버지도 이미전에 내게 말해준바가 있소. 절대로 죽산의 방법으로는 민중세상 세우지 못한다구, 힘으로 만들어내는 길만이 옳은 길이라고. 그런데… 우리 아버지를 나와 같이 보지는 마오. 아버지는 무모한 길에서 비켜서서 주저앉고말았다면 난 무모한 길에서 비켜서서 새 길을 찾아내고 그 길에 들어선거요.

하지만 난 죽산아버님의 위업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아버지를 그지없이 존경해. 그래서 나는 내나름으로 아버님을 도왔던거요. 아버님의 안전과 진보당의 해산을 막기 위하여 성의를 고였던거요.》

《그럼? …》

순간 연경의 뇌리를 치는것이 있었다.

《혹시 사모하는 민중의 벗?》

《그래, 조직의 지시에 따라 아버님의 신변을 지켜드리는 사업이 벌어지게 되였소. 내가 그 사업을 책임지고 조직했소.》

《!》

순간 바늘끝처럼 예리해졌던 처녀의 심경도 극에서 극으로 바뀌여 서름서름해지던 두사람의 공간을 순식간에 뛰여넘어 사랑의 감정으로 날아올랐다.

연경은 지금 황홀한 소녀의 눈으로 최금룡의 진지한 모습을 새삼스럽게 쳐다보았다.

《사모하는 민중의 벗!》

그 짧은 두마디에는 수천수만의 말로써도 다 설명해낼수 없는 웅심깊고도 명료한 의미가 담겨져있었다.

《정말? …》

연경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가냘프게 속삭이였다.

최금룡은 언제나처럼 그윽한 웃음을 눈가에 담고 부드러운 시선으로 지켜보고있었으나 연경에게는 어떤 눈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그 어떤 힘의 중압에도 의연한 그 모습이 너무도 숭엄해보였다. 뜻밖에 찾아보게 된 애인의 새 모습이였다. 자기따위는 함부로 범접할수도 없고 리해할수도 없는 투사의 모습이였다. 

최금룡이 다시 입을 열었다.

《연경이!》

그의 목소리는 저 하늘우에서 울리는 우뢰처럼 웅장하고 신비롭고 꾸밈이 없다.

연경이는 자신도 모르게 최금룡이 펼쳐놓는 그 위대한 세계에로 성큼 들어서고있었다.

《저놈들이 하는 수작을 보오. 못하는 지랄이 없소. 저놈들은 이번에 또 몰리면 두번째, 세번째 강치부를 만들어낼것이요. 강치부가 정말 간첩일가? 천만이요!

이제 또 세월이 없는 말싸움을 벌리겠지. 갑론을박… 그끝이 무엇일가? 몸서리쳐지오. 그리고 지겹소, 막 지겨워! 이기면 다행이지만 지면 끝장이요. 언제까지 우리는 이렇게 당하기만 해야 하나? 민중을 위한 그 고상한 리념을 언제까지 웨치기만 하겠나?

리승만은 그 진부한 싱갱이마저 눈에 쌍심지를 켜달고 총포를 내대고 미국놈들은 돌아앉아 웃고있소. 아니, 뒤에서 살살 부추기고있소.

안돼! 더는 승산없는 말싸움, 승패가 묘연한 지지표구걸로 민중을 우롱하고 력사를 우롱하면서 독재자의 명만 길게 해줄수는 없소. 우리의 고민은 끝났소. 우리의 방황은 끝났소. 행동해야 하오. 바야흐로 눈이 떠가는 청년학생들을 변혁의 광장으로 불러내야 하오.

아버님은 미개하던 우리 민중의 정치의식에 눈을 틔워준 선각자로서 시대적과제를 수행해냈소. 변혁의 폭풍을 우리에게 마련해주었지. 한마디로 자기 세대의 임무를 다 해놓은셈이요.

이제 싸움은 우리 몫으로 되였소. 미국의 눈치를 보면서 국회에나 진출하고 표밭을 넓히기 위해 왈가불가할 때는 지나갔어. 행동해야 하오. 새로운 시대는 새로운 구호를 내걸어야 하오.》

《그러면? … 금룡씨는…》

《우리 동맹은 변혁의 첫 돌파구를 바로 저기, 아버님이 고군분투하는 그곳에서 열어제끼려고 했소. 거기서 불꽃을 일으키기로 했소. 이제 이 암흑의 천지가 그 한점의 불꽃으로 밝아진다면 우리는 그것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가질거요. 철권과 암흑의 50년대가 저물어가고 민중의식의 동토대가 끝나가고있소.

우리는 료원을 휩쓸게 하는 불길로 60년대로 치달아오를거요. 이제 한해 남짓 남아있소. 리승만과의 힘의 결산은 그때에 가서 보게 될거요. 우린 다그쳐야 하오. 더는 헛눈팔지 말고 공격에로 넘어가야 하오. 한시바삐 아버지를 결박한 독재의 철쇄를 풀어드리기 위해서라도 우린 서둘러야 하오.》

《그러면? …》

연경은 최금룡이 북받치는 흥분속에 펼쳐놓는 엄숙한 정서에 휘말려들어 비장하고도 전투적인것을 느끼면서도 그가 그냥 거두지 않는 진하디진한 안개속을 헤쳐보고싶어 안타깝게 바질거렸다. 아직 자기는 상상조차 할수 없었던 그 어떤 거창한 운명의 세계가 커다란 울림을 가지고 자기를 향해 그 운무속에서 숭엄히 다가드는듯싶었다.

무엇인가 폭풍과 노도가 일어번질 그 신비의 운명의 세계에로 들어서는 쪽문을 빠끔히 열어보이던 최금룡은 급하게 뛰노는 애인의 심장의 박동을 들은듯 급기야 닫아버리고 더이상의 진속은 가무려두고 우물쩍 스쳐넘었다. 그는 마치도 그 어떤 차분하고 부드러운 감정에 애써 세워놓은 심대가 엷어질가봐 념려되는듯 재빨리 화제를 틀어갔다.

《한가지 부탁하고싶어서 연경이를 여기 버들숲으로 데려왔소.》

《말해요.》

《이제부터 가끔 우리 집으로 찾아가주오. 우리 아버님은 외로운분이요. 투쟁을 기피하고 일찌기 정치에 담쌓고 돌아앉았어도 민중이 주인된 사회를 학수고대하며 살아가는분이요.》

《난 아버님을 리해해요. 그리구 존경합니다. 우리모두가 아버님과 정과 정을 나누고있답니다.》

《그래? … 고맙소, 연경이! 그럼 됐소. 난 아버지를 뵈온지도 오래되오. 지난 몇달동안 부산에 가서 살다가 왔지. 자, 가기요. 더 할 말이 없소. 하고싶었던 말을 다 뱉아놓고나니 속이 후련하구만. 난 예나제나 연경이가 좋아. 난 연경이가 언젠가는 나를 이렇게 리해하여주리라고 믿었소.》

최금룡이 말끝에 그 인상좋은 밝고 순진한 웃음을 떠올리였다. 그리고는 연경의 팔을 장난스럽게 척 끼고 성큼 걸음을 옮겼다.

《아니요. 난 아직 금룡씨를 다 리해하지 못했어요. 대체 어데로 가자는거예요?》

《어데로? … 이 세상 끝까지…》

최금룡이 벌쭉거리며 엉너리를 쳤다.

《딴전을 피우지 말고 말해요!》

《에- 그럼 여기서 헤여집시다. 이제 재판이 끝나고 마음이 가라앉을 때 이 사람을 찾아가보오. 내가 보내서 왔다고 하면 되오.》

최금룡은 준비해가지고 온듯 웃주머니에서 종이장을 꺼내 내밀었다.

연경이 종이장을 받아들고 거기에 써있는 주소와 이름을 눈으로 더듬고나서 물었다.

《이건 뭐예요? 이 사람은 또 누구고요?》

《더 묻지 마오. 이건 연경에 대한 나의 신임장이요. 이 신임장의 의미는 그 사람더러 물어보오. 거기에 가보면 이 최금룡에게 붙여놓은 연경의 미지수가 다 풀릴거요. 내게는 가장 가까운 친구요. 그 사람도 연경이를 잘 알고있소. 그는 내가 섰던 자리에 연경이를 세워줄거요.》

《오늘은 알쑹달쑹한 소리만 하네. 자기 섰던 자리에 나를 세워준다는건 또 무슨 소리예요? 날 대신 세우고 금룡씬 대체 어데로 간다는거예요? 그리구 아까 변혁의 돌파구를 아버님이 고군분투하시는 그곳에서 제낀다고 하는 소리는 또 무엇이구요?》

연경이는 안타까이 소리쳤다. 불길한 예감에 그자신도 걷잡을새없이 눈물이 왈칵 솟구쳐올랐다.

《말해요! 어서 말해요, 금룡씨! 난… 난 왜 자꾸 이럴가? 사람들은 날더러 세차다고 하는데 난 너무 연해요. 요새는 너무 쉽게 눈물만 나요, 금룡씨!》

연경은 불시에 최금룡의 넓은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소리쳐울었다. 그 어떤 야릇하게 다가드는 쓰라린 공허감을 물리칠수가 없었다. 적막한 강산에 자기만 세워놓고 모두들 사라지는것만 같아 야속하기만 하였다. 그는 련속 덮쳐드는 비감에 애인의 허리를 꽉 그러안고 눈물을 펑펑 쏟았다. 오래전에 자기곁에서 영영 떠나간듯싶던 사랑을 드디여 다시 찾은 환희와 감미로움에 취해보기도 전에 연경이는 또다시 쓸어드는 래일에 대한 불안과 공포를 예감하며 비감에 떨고있었다.

최금룡도 오열을 터뜨리고있는 처녀를 끌어안은채 한동안 망두석처럼 강변에 서있었다. 하고싶은 말, 쏟고싶은 열렬한 사랑의 감정이 가슴에 꽉 들어차 쇠물처럼 끓고있었으나 더이상 사실을 말해줄수 없다는 생각에 굳이 입을 다물었다. 그는 싸늘해진 처녀의 이마에 열기가 오른 자기 볼을 붙이였다. 이제는 작별해야 한다. 어쩌면 영원한 작별일수도 있다.

최금룡이 뜨거운 포옹에서 벗어나려고 팔을 내리웠으나 연경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이렇게 떠나가면 최금룡이도 다시금 자기곁으로 돌아올것 같지 않다. 숨막힐듯 한 공포가 처녀의 온몸을 옥죄이고있었다.

연경은 그냥 몸부림을 쳤다.

《싫어요! 싫어요! 다들 이렇게 날 버리고 떠나면 난 어떻게 해. 제발 날 버릴 생각을 하지 말아요. 함께 가요! 살아도 죽어도… 항쟁을 해도 함께 해요!》

최금룡은 이내 돌아서지 못하였다.

해는 하늘중천에서 서쪽으로 약간 기울어지고있었다. 은빛으로 반짝이던 수면이 갑자기 부드러운 바람결에 출렁이기 시작했다. 치렁치렁 가지를 드리우고 조으는듯 가벼이 흐느적거리던 버들숲도 우수수 설레이였다.

두사람은 마치도 자기들의 운명에 들이닥친 새바람을 예감한듯 서로 얼싸안은채 숲을 흔드는 바람소리를 듣고있었다. 그 어떤 무시무시한 운명의 계시와도 같이 음산하게 느껴지는 바람이였다.

되돌이

우리민족끼리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E-mail) : urimanager@silibank.com 홈페지내용에 관한 문의(E-mail) : uriminzok@silibank.com
Copyright © 2003 - 2013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
gotop
기사종합
 
도서, 잡지
 
영화, 음악
 
독자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