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9 회)
제 3 장
2
조봉암은 당의 진로를 생각하며 매우 착잡한 심정으로 법정에 들어섰다가 검사의 기소를 들으면서는 점차 속이 휘연히 트이는것 같았다. 검사가 기소장의 페지를 넘겨갈수록 조봉암은 자신감이 열배로 강해졌다.
구태여 자기가 변론에 나설 필요조차 없을것 같았다.
조인수가 지금 자기의 경력을 개괄하면서 가장 치명적인 락인을 찍고싶어하지만 그것이 완전히 역반응을 일으키는것이다.
조인수는 지금 조봉암이 역적이라는것을 재판정과 청중에게 납득시키려고 끝없이 주절거리지만 결과는 애국자 조봉암을 방불하게 그리고있는것이다.
거기다가 그 무슨 반론이라고 제기할 여지가 없다.
조인수가 가장 중요한 범행이라고 먼저 그루를 박아놓고 통일문제를 떠올려놓자 조봉암은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검사가 기소장을 넘길수록 조봉암의 속은 더더구나 가벼워졌다.
조인수는 지금 리승만의 법정에서 리승만의 《북진통일》론을 옹호한다고 하면서 북에서 제기한 통일방안들을 조목조목 해설하고있다. 그것도 북에서 전쟁직후부터 끊임없이 공세를 펴온 통일론의들을 력사적으로 내려오면서 그 세부들까지 일일이 소개한다.
북의 통일방안들은 아이들도 리해할수 있고 손벽을 칠수 있게 하는 매우 통속적이고도 공명정대한 내용으로 일관되여있다.
… 나라를 시급히 통일하자, 통일을 하되 평화적으로 하자, 평화통일을 위하여 전조선적인 자유로운 총선거를 하자, 그걸 위해 우선 남북의회에서 선출된 대표들로 전조선위원회를 조직하자, 전조선위원회는 총선거법 초안을 연구하며 동시에 남북간의 통상, 재정, 운수, 주민통행, 서신거래, 과학문화교류를 실현하도록 한다, 총선거를 치른 후에는 남북의 정부들을 해체하고 통일정부를 수립하자…
얼마나 애국에 넘치는 제안들인가!
조봉암도 검사가 줄줄이 이어가는 북의 통일방안을 법정에서 구체적으로 다시 들어보니 어느 한 조항도 빈틈이 없고 편견도 없다. 남과 북이 다같이 접수할수 있는 훌륭한 제안이라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다.
조봉암은 그냥 기소장을 읽어내려가는 조인수를 바라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녀석! 잘은 떠든다. 꼭 북의 선전원같군. 보라! 《북진》전쟁을 일으켜 통일을 하겠다는 리승만의 허황하고도 반민족적인 통일론보다 얼마나 리성적이고 문명하며 애국적인 발기인가! 그러니…)
조봉암은 이렇게 흐뭇해서 사색을 이어가다가 조인수의 말에 귀를 기울이였다.
조인수가 진보당의 통일정책에로 화제를 몰아가고있었던것이다.
검사는 평화통일론을 당의 강령으로 진보당이 확정하게 된 경위와 진보당의 통일강령의 구체적내용을 해설하기 시작하였다. 조봉암의 얼굴에 또 한번 미소가 떠올랐다.
(허, 그녀석, 이제 나가면 우리 당 선전원으로 초청해야겠군. 언변도 그만하면 괜찮아. 대목대목에 강약도 박아주며 귀에 쏙쏙 들어오게 하거던.)
조인수는 장시간에 걸쳐 북의 통일방안과 진보당이 강령으로 내세운 통일방안을 소개하고나서 여기에다가 범죄적인 성격을 자기식으로 들이먹이기 시작하였다. 그 분석이라는게 완전히 허점투성이고 억지론리여서 황당무계하기 그지없다.
《문제는 피고 조봉암은 북을 남과 동일한 선상에서 분석하고 평가한것입니다. 피고는 측근의 여러 인물들과 여러차례의 협의를 거쳐 다음과 같은 합의를 이루어냈습니다. 즉 통일방안으로는 첫째, 유엔감시하의 북에서만의 선거, 둘째, 남북협상에 의한 련립정부구성, 셋째, 중립화에 의한 통일방안, 넷째, 유엔감시하의 남북총선거가 있는데 조봉암은 이중 첫째는 북이 반대하고 국제적으로도 공정치 않다는 지탄을 받고있으므로 비현실적이다, 따라서 남과 북의 군대와 관리기구를 해체하고 국제감시하의 총선거실시가 가장 리상적이라고 한것입니다.
그러면 왜 이 문제가 <보안법>에 의하여 극형을 언도해야 할 중대범죄로 되는것이겠습니까?
그것은 감히 남의 행정권을 북의 행정권과 일대일로 대치시킨것이며 통일준비명목으로 감히 우리의 합법통치기구와 군대의 해체를 주장한것이며 유엔을 감히 무시한것이며 북의 통일방안을 대폭 수용한것입니다.》
조봉암은 우달수를 돌아보며 말없이 웃었다. 검사가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수작을 늘어놓는게 이 법정에서는 참으로 다행스럽기만 하다.
우달수도 조봉암의 속심을 읽었는지 싱긋이 웃어보인다.
진보당의 평화통일론에 대한 조인수의 법정시비론조는 마치도 선뜩한 칼날처럼 법리론으로 갈고 닦이우고 세련미까지 풍겼으나 어느 한 조항도 청중의 공감을 불러내지 못하고있었다.
조봉암이나 법정에 나앉은 피고들전체가 검사가 열을 올리고 화려한 법정수식사까지 인용하면서 떠들고있는 기소장랑독에서 범행의 흔적이나 죄의식의 자그마한 쪼각마저 느낄수가 없었다.
조봉암은 조인수의 말에 온 신경을 모으면서도 어지간히 긴장되여있던 속이 숙부드러워지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저놈은 어쨌든 판단감각이 혼미해지고 의지가 상실된 기소장을 엮고있는것이 틀림없다. 아니, 저 인간자체가 이미 리성이 흐려져있으니 시비론조가 저렇듯 온통 뒤죽박죽이 될수밖에 없다. 심문장에서는 등에처럼 집요하게 찔러들던 검사가 이 법정에서는 제법 여유있는 모습을 보여주느라 하는것도 보기 좋다.
(흥! 네놈이 계산을 잘못하였구나. 네놈은 여전히 우리 당의 주장의 공정성과 객관성과 진리성을 그 좋은 언변으로 부각시키고있다. 북을 통일협상의 회담상대로 인정할수 없다는 《보안법》이야말로 얼마나 역설적인 생억지인가! 네놈이 바로 그걸 해설하고있는것이다.)
조봉암이 일견 속이 흐뭇해서 입속으로 중얼거리였다.
조봉암의 예상대로 방청석에서도 웅성거리기 시작하였다. 군중의 눈은 밝다. 군중의 감각은 예민하다. 그들은 검사의 론점이 얼마나 황당무계한 궤변인가 하는것을 순간에 포착해낸것이다.
법정에 가벼운 조소의 파문이 일어나자 재판장이 큰소리로 주의를 주었다.
《가만, 검사! 잠간… 방청석에서 정숙을 보장하기 바랍니다. 검사의 기소에 집중하여주시오.》
방청석이 조용하였다.
조인수는 통일론에 대한 기소를 끝내자 최고의 형벌을 언도해야 한다는 법적주장으로 조봉암이 《체제전복을 기도》했다는 문제를 언급하기 시작하였다.
조인수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러하였다.
조봉암이 자신은 물론 해방전부터 공산주의운동을 하였거나 해방후에 좌익권에 참여하였던 인물들을 56년 선거와 58년의 《국회》선거에 출마시켜 《대통령》권력을 장악하고 《국회》를 통제하는 방법으로 리승만의 집권을 뒤집을것을 기도하였다는것이다. 그 다음에는 진보당의 정강을 분석하면서 남조선땅에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건설하려고 기도하였다고 강도높이 떠들며 당장 남조선땅이 꺼질듯이 수선을 떨었다.
조봉암은 여전히 온화한 미소로서 인간의 온기라고는 티끌만치도 느껴지지 않고 다만 형리의 간특한 궤변과 피비린 회초리가 울고있는 랭랭한 강변을 받아들이고있었다.
조봉암은 조인수가 법이라는 좁은 골목으로 문제를 끌어가려고 무진 애를 쓰고있지만 정치적으로 대단히 둔감하고 사람들의 심리를 무시하고있으며 인간세상에 대한 시야가 좁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기는 밤낮으로 사람들의 뒤구멍만 쑤시고 어지러운 세계에서 살고있는 저들이 인간의 아름다움을 엮은 소설 한권 품을 들여 읽어보았으랴.
조인수가 기소에 객관성과 진실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말마디
마디들을 무척 사색을 기울여 선택하였다는것은 느껴졌다. 아마도 사건의 중대성과 상대인물들의 무게가 그렇게 하도록 압박하였을것이다. 그러나 그 의도적인 타산과 노력이 오히려 기소의 전반에 빈구석을 만들어 재판에서 자기를 궁지에로 몰아넣을수 있다는것은 미처 타산하지 못한것 같다. 전반적인 사건의 가설과 그에 대한 증명이 범죄로 구성되도록 성급하게 지향되여 미끈하게 만들어진것 같으나 그 전체적인 흐름과 주장이 청중의 호응이나 공감을 살수 없게 되여있는것이다.
조봉암은 조인수가 이제 또 어떤 파격적인 자료로 사태를 뒤집을지 모르는지라 얼굴에는 미소를 떠올려놓고 그냥 신경을 도사려 귀를 기울였다.
세번째 문제로 넘어간 조인수는 조봉암과 진보당이 국제공산당과 긴밀한 련계를 가져온데 대하여 장소와 시간을 꼭꼭 짚으면서 렬거하기 시작하였다.
첫째로 찾아낸것이 바로 체포직전부터 신문에서 법석 떠들어댄 북의 파견간첩으로 묘사한 강무호와의 관련설이였다.
리승만일파는 자기네 세력권에 도전하여나선 강무호라는 인물을 감옥에 끌어다 넣고 《북에서 밀파한 간첩》이라고 법석 떠들어대기부터 하였다. 그렇게 하다가 진보당사건이 터지기 얼마전에는 그를 바로 조봉암의 배후인물로 둔갑시켜놓은것이다. …
조인수는 강무호에 대하여 소개하고서는 그를 통하여 조봉암이 북과의 련계를 가지고 당도 조직하고 통일강령을 만들었다고 강짜를 부렸다.
조봉암도 심문때에 이런 소리를 들은적이 있었다. 한바탕 웃어버리고말았다. 리승만이 언제나 집권위기에 빠져들 때면 상투적으로 써먹는게 바로 《북의 간첩》설이다. 그것으로 민중의 이목을 딴데로 돌리고 위기에서 벗어나군 한다.
조봉암이 그렇다면 여기다가 강무호라는 미지의 인물을 불러들여 대질심문이라도 해보라고 하니 조인수는 그것만은 안된다고 잡아뗐다. 강무호는 이미 사형선고를 받고 항소를 제기한 상태이므로 움직일수 없다는것이다. 따라서 그에 대한 기소자료를 증명자료로 리용한다는것이였다.
두번째로, 실체도 몽롱한 국제공산당과 련결시킨것은 부산에서 잡아들인 재일교포기업가였다.
정명갑이라는 재일교포가 북과 일본공산당의 밀령을 받고 부산에 잠입하여 친구지간인 우달수와 여러번 만나 지령을 전달한바가 있고 부산 해운대에서 조봉암과도 직접 만나 접촉하였다는것이였다. 이것 역시 조봉암의 체포전야에 남산의 숲속에 있는 검찰청의 대공분실에서부터 흘러나와 지금 언론에서 집요하게 짖어대고있는 소리였다.
심문장에서 조인수가 이를 화제에 슬쩍 띄워놓았을 때 역시 조봉암은 껄껄 웃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여기 데려오라고 하였다.
조인수는 그에 대하여서도 그 인물이 현재 재판을 받고있는중이므로 데려오기 힘들다고 우물쩍하게 넘어가버렸다.
조봉암의 랭소에 부딪쳐 간단하게 넘어갔던 사실인데 이렇게 기소장의 여러 페지에 장황하게 라렬하여놓은것이다.
조인수는 두 사건을 밝히고는 별안간 목소리를 높여 이들과의 접촉사항은 의심할바 없는 《간첩련루죄》, 《기밀루설죄》, 《적성국과의 내통죄》로 극형으로 다스려야 할 범죄라고 단죄하였다.
(흥, 이제는 그 사람들을 내앞에 내세워도 일없다는거지? 네놈들의 계략에 호락호락 넘어갈가? 이제 두고봐라, 그 사람들이 이제 너희들을 벼랑턱에 끌고가 차던져버리지 않는가!)
조봉암은 이렇게 배심있게 속으로 되뇌였다.
혹 저놈들이 끈질긴 회유와 야만적인 고문으로 그 사람들을 굴복시켜 저들이 원하는 말을 이 법정에서 하도록 할수도 있을것이라고 예상도 하였다.
조봉암은 설마 그런 일이 있더라도 크게 걱정할바가 아니라고 무시하여버렸다. 그들이 정말로 통일운동에 나선 인물들이라면 이 법정에서 리성을 다시 찾도록 도와주면 피차간에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였던것이다.
《자, 이것은 피고 조봉암의 집을 수색할 때 나온것입니다.》
조인수가 이렇게 말하자 검사보가 앞으로 나서면서 처음에는 손바닥만 한 반도체라지오를 재판석과 방청석을 향하여 보여주었다.
《이것은 피고인이 북방송을 들을 때 리용한 반도체라지오입니다.》
조인수가 설명하였다.
검사보는 라지오는 내려놓고 이번에는 소책자를 쳐들었다.
《이것은 북 령수의 연설문과 북의 소책자들입니다.》
조인수가 설명을 계속하였다.
《보다싶이 피고 조봉암은 북의 방송과 소책자들을 체계적으로 듣고 보면서 정책을 세우고 당을 이끌어갔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북의 방송청취는 우리 사회에 대한 로골적인 도전이며 자유민주주의체제에 대한 배신입니다.》
마지막으로 조인수는 검사보가 내미는 자그마한 권총을 받아들고 재판정을 향하여 들어보였다. 그리고는 기소장랑독을 이어갔다. 적당하게 목소리도 한음계 높이였다.
조인수는 이 권총은 피고가 북으로부터 받은 보신용무기라는 자료가 있는데 이에 대하여서는 아직 추적중이라고 애매몽롱하게 언급하였다. 그리고는 서둘러 무기불법은닉죄는 중형을 면치 못할 범행이라고 해석을 달았다.
조인수는 조봉암에 대한 기소장랑독을 마치자 이어 우달수를 비롯한 조봉암의 전우들에 대한 《범행자료》를 일사천리로 랑독하였다.
조인수의 기소장랑독은 련 사흘간 계속되였다. 조인수는 기소장랑독을 끝내자 재판정에 앉아있는 재판장과 배석판사들을 향하여 고개를 멋스럽게 숙여 인사를 하고는 자못 틀스럽게 자기자리에 가서 앉았다.
그는 안경을 벗어들고 손수건을 꺼내 천천히 닦았다.
《력사적인 소명》을 마친것이다. 수하의 검사보들과 머리를 맞대고 밤샘까지 해가면서 만들어낸 조서를 공개하여버리고나니 얹혀있던 체증이 풀린듯 하면서도 자기로서는 딱히 이름지을수 없는 새로운 불안이 갈마드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진짜싸움은 이제부터이다. 지금까지는 다만 전투를 앞두고 벌린 포사격정도이다. 이제부터 적병과 맞붙어 백병전을 벌려야 한다. 상대를 꺼꾸러뜨리지 않으면 자기가 쓰러져야 하는 싸움이므로 말그대로 필사의 혈투다.
온통 진실을 가리우고 사실을 날조한 기소장이라는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는 조인수는 피고석에 앉아있는 《범인》들을 보면서 자기가 지금부터 벌려야 하는 싸움이 얼마나 힘겨운것일가 하는 불안이 더욱 짙어갔다.
사실 조봉암에 대한 기소가 끝났을 때부터 조봉암과 그의 전우들은 두려움이나 초조감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검사에게 오히려 감사를 주고싶은 심정들이였다.
조인수는 검사라는 공직자의 명함을 걸고 각계각층이 참가한 리승만의 법정에서 리승만을 반대하는 조봉암의 리념과 진보당의 정책을 선전하여준것이다.
그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물론 리승만의 손짓에 따라 하느라고 했지만 진실은 가릴수 없다. 군중은 자기의 눈과 귀와 리성으로 재평가를 내리기마련인것이다.
조인수는 법조인답게 극히 메마르고도 교묘하게 기소를 하느라고 했지만 수많은 문제거리를 만들어놓았다. 그로서는 도저히 막아낼수 없는 공세전을 펴놓게 해준것이였다.
그럴수밖에 없다. 제아무리 거짓이라는 알맹이를 진실이라는 패쪽을 붙여 보자기로 꽁꽁 싸매도 그것은 드러나기마련이다. 더구나 이 법정의 피고석에는 조인수따위는 눈꼽만치도 여기지 않는 정객들과 모사군들, 법전문가들과 전략전술에 능하고 생활의 풍파에 부대끼고 닦이여온 로련하고 담대한 인간들이 앉아있는것이다.
조봉암은 자기 전우들의 굽힘없는 배포유한 모습들을 보면서 누데기처럼 더덕더덕 기워맨 경찰과 검찰의 기소장을 능히 제압할수 있다는 신심으로 용기백배하여졌다.
《오늘 재판은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
홍병삼이 재판봉을 들고 앞탁을 세번 두드렸다.
《래일 재판은 9시에 시작하겠습니다.》
홍병삼은 기소장랑독이 사흘에 걸쳐 끝나자 어쩐지 불안하던 속이 거뜬해짐을 느끼며 일어섰다.
배석판사들도 그를 따라 일어섰다.
《전체 기립!》
법정을 채운 사람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재판장석의 뒤문으로 빠져나가는 홍병삼일행을 지켜보다가 피고석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호송경찰들이 들어와 피고들의 손에 수갑을 채웠다.
조봉암과 그의 전우들이 방청석을 향하여 손을 흔들어보이며 퇴정하였다.
검사석을 차지한 조인수와 그의 보좌성원들이 자리를 뜨고 그뒤로 방청객들이 여러개의 문을 거쳐 밖으로 나갔다.
텅 빈 법정에는 두사람만이 움직이지 않고 서있었다. 그들은 연경이와 최금룡이였다.
증인석과 방청석에 각각 앉은 두사람은 한동안 눈싸움을 벌렸다. 그 눈싸움에서 먼저 눈초리를 접은것은 최금룡이였다.
최금룡이 방청석과 피고석을 막아놓은 나무란간대를 훌떡 뛰여넘어오자 연경이는 냉큼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향하였다.
최금룡이 빠른 걸음으로 뒤따라 와서 그의 어깨를 잡았다.
《연경이!》
연경이 《이걸 놔요!》 하며 어깨를 잡은 총각의 손을 쳐버리였다.
《내 말 좀 들어보오!》
《뭘 들어볼게 있겠다구요. 아버지에게서 떨어져나오더니 이제는… 뭐, 변호를 하겠다구요? 흥!》
《아버진 이번에 변호를 사절하지 않았소?》
《그래서 아버지를 물어메치려구 검사측 증인으로 나선단 말이예요? 어쩌면 이럴수가 있는가요? 난 정말 실망해요.》
《아, 내 말 들어봐. 그런게 아니고…》
《됐습니다. 이제는 난 거기 말 듣고싶지 않아요. 증인석에 어떤 인간페물들이 앉아있습니까? 한번 둘러보기나 했어요? 서정후, 탁준의… 그옆에 나란히 앉아있는 모습 보기가 참 좋군요. 이제는 최금룡이라는 인간의 금새가 가량이 되는가요? 좋아요. 어디 말 좀 해보자요. 도대체 우리 아버지가 자기한테 무슨 한을 끼친게 있다구 그냥 아버지를 욕되게 하고 제 얼굴에까지 먹칠을 하고있는겁니까?》
《연경이, 내 말을 들어보오.》
《아니, 거기 말 들어보나마나 뻔하지요 뭘. 박쥐더러 왜 새가 됐다, 쥐가 됐다 하냐 물어보면 박쥐에게도 둘러댈 변명거리는 있다고 해요.》
《연경이, 진정하오. 우리의 싸움은 감정을 앞세워서는 안되는 싸움이요. 랭철한 리성과 의지로 현상을 분석하고 본질을 찾아내야 하오.》
《랭철한 리성과 의지?》
연경이는 싸늘하게 최금룡의 말을 받았다.
《그렇다면 저도 분명히 찍고 넘어갈 얘기가 있습니다.》
연경이는 눈가에서 흔들거리는 머리칼을 쓸어넘기며 말을 이었다.
《저는 두해전 금룡씨가 우리곁을 떠나갈 때 배신자요 뭐요 속을 허비는 말을 쏟아놓기는 했어도 그래도 한가닥의 기대는 가지고있었답니다. 아버지의 투쟁에 대한 불만, 진보당의 구성원들에 대한 회의적인 평가, 그런가 하면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는듯싶은 금룡씨의 고민… 저도 요즈음에 와서 때늦기는 했어도 아버지의 위업에 대하여 새로운 시각으로 보면서 금룡씨의 불만에 대하여 공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눈을 뜨기 시작한셈이지요.
헌데 저는 더이상 금룡씨를 리해하여줄수 없군요. 검사측 증인으로 나선 금룡씨가 권력욕에 사로잡혀 신념도 의리도 다 버린 서정후나 탁준의따위와 다른게 뭐가 있습니까?》
《연경이! 고맙소, 나를 채찍질해주어서… 하지만 기대를 버리지 말아주오. 부탁하오. 끝까지 나를 지켜봐주오.》
최금룡의 말은 절절하였다.
그러나 처녀는 더는 타협의 여지를 남기고싶지 않았다.
《아니요. 제모습을 잃은 금룡씨에게 더는 구걸하고싶지 않습니다. 믿음이란 바란다고 차례지는것이 아니지요. 그건 너무도 소중하고 고상한 개념입니다. 안녕히 가세요.》
연경은 그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보이고는 오연히 돌아서서 전차가 방금 도착한 정류소로 총총히 걸어갔다.
자기의 끓고있는 감정을 억누르고 차분하게 자기의 주장을 펼쳐보이는 처녀의 성숙한 모습에 최금룡은 한순간 얼떨떨해졌다.
최금룡은 다급히 연경이를 뒤좇아갔다.
그러나 연경이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이제 떠나기 시작한 전차에 뛰여오른다.
최금룡은 길바닥에 두발을 박은채 전차문안으로 사라지는 처녀의 뒤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연경이를 태운채 멀어져가는 전차를 보며 오래도록 서있었다.
《기다리자! 때는 오리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