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 회)
제 1 장
1
간밤에 눈이 내렸다.
시민들이 깊은 잠에 든 삼경무렵에 슬그머니 내렸다.
꽁꽁 얼어든 서울시가지가 하얀 이불을 쓴것 같다.
한 청년이 아침일찍 전차에서 내려 숫눈우에 발자국을 푹푹 찍으며 신당동의 조봉암의 집대문을 열고 들어섰다.
청년은 잠시 대문가에서 감회깊은 눈으로 2층집을 쳐다본다. 마당복판에 흰눈을 수북이 떠인 느티나무가 우뚝 솟아있다. 청년은 마당의 여기저기를 휘휘 둘러보다가 걸음을 옮기였다. 꼭 이태만에 이 집을 찾아온 최금룡이였다.
최금룡은 출입문쪽으로 가다말고 토방우에 있는 비자루를 들고 스적스적 눈을 쓸기 시작하였다.
최금룡이 이 집에 있을 때는 마당안을 정결하게 거두는것은 그의 몫으로 되였다. 그전에는 조봉암의 새벽일과였다고 하는데 최금룡이 들어서자 그에게 양보하였다.
새벽에 깨여나면 여기서 오백보가량 떨어져있는 덕수터로 뛰여가서 랭수마찰을 하고 돌아와 마당을 쓰는것으로부터 첫 일과를 시작하군 하던 금룡이였다.
그가 마당안에 엷게 깔린 눈을 말끔히 담장밑으로 쓸어냈을적에 출입문이 열리였다.
솜외투를 걸친 연경이가 큼직한 보따리를 가볍게 들고 나왔다.
처녀는 서울경찰청 사찰과 분실에 갇혀있는 아버지에게 찾아가는 길이였다. 대한추위에 옥고를 치르고계실 아버지에게 류선녀가 여러날 밤새워가며 한뜸두뜸 바느질하여 지은 두툼한 명주솜옷을 갖다드리려고 아침밥을 드는둥마는둥 하고는 바삐 나선 길이다.
연경은 금방 마당의 눈을 다 쓸어내고 비자루를 잡은채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지우는 총각을 보자 《에그머니! …》 하고 깜짝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이내 자신을 수습한듯 그 두리두리한 눈을 새초롬하게 해가지고 쌀쌀하니 인사말을 건네였다.
《어떻게 오셨는가요? 법률상담소에서 시간내시기가 무척 어렵겠는데요?》
처녀의 새침한 태도에 오래간만에 애인을 만난 반가움으로 환해졌던 사내의 낯이 찡그려졌다. 슬픔에 잠겨있을 이 집 사람들을 만나면 비애의 감정을 어떤 인사말로 표현해야 할지 두루 생각이 많아 대문턱을 넘어섰다가 애인에게서 비양조의 인사말을 듣자 속이 울컥했던것이다.
《연경이, 그새…》
그래도 최금룡이 처녀의 도전적인 눈길을 아량있게 받아주며 위로의 말을 꺼내려고 하는데 연경이가 자못 정중한 어조로 상대의 말을 가로챘다.
《전 지금 아버님 뵈오러 가던 길이랍니다. 누굴 만나러 오셨습니까?》
련이어 찔러드는 가시돋힌 인사말에 최금룡은 더는 참아낼수가 없어 그만 역증을 냈다.
《연경이, 그게 정말 내게 하는 말이요?》
하지만 연경의 말투는 더욱 랭랭해지고 그 깍듯한 례의는 최금룡을 점점 더 무색하게 만들었다.
연경은 보따리를 내려놓더니 옆구리에 두손까지 척 올린다. 싸늘한 웃음까지 띠우고 최금룡에게 한걸음 다가선다. 그냥 총각의 가슴을 마구 휘저어놓았다. 지금껏 참고참아오던 최금룡에 대한 분노요, 성풀이였다.
《왜요? 최선생님께서 신당동을 찾아오실 일은 없겠는데요? 박수 한번 쳐주실라고 나타났는가요? … 돌아가세요! 금룡씨의 방문을 반겨줄이가 이 집에 더는 없답니다.》
《이거 정말, 연경이! 왜 이래? 지금 내 속은 편한줄 알아?》
《뭐라구요?!》
연경의 시원스러운 얼굴에서 지어낸 웃음조차 가뭇 사라지더니 고추알같이 맵짠 소리가 새되게 튀여나왔다.
연경이 대들듯이 그에게 또 한걸음 나서자 최금룡은 뒤로 두어발자국 물러섰다.
《그래 찾아온 리유나 말하세요. 아버지에게는 반대표를 던지고, 장하죠. 그 다음엔 법원에 들락날락한다고 하더니 오늘은 이 연경이를 구치소에 메가려고 왔어요?》
문앞에서 두사람이 옥신각신하며 떠드는 소리에 효경이가 놀라 뛰여나왔다.
바투 다가섰던 두사람이 효경이가 나타나자 흠칫 뒤로 한걸음씩 물러섰다.
최금룡은 효경에게 숫접게 허리부터 굽석 숙여보였다.
《소식 들었습니다. 정말로 저도 잠들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찾아왔습니다.》
최금룡은 왈칵 목젖너머에서 치밀어오르는 비분과 설음의 덩이를 꿀꺽 삼키며 격한 어조로 인사를 하였다.
《이렇게 와줘서 고마와요. … 얘, 연경아! 내가 가마.》
효경이는 토방마루에 있는 솜옷보따리를 들면서 동생에게 눈을 흘겼다. 오래간만에 찾아온 금룡이와 얘기나 나누라는 심드렁한 속대사다.
《얘, 금룡씨를 데리고 어서 방에 들어가. 친구를 마당에 세워놓구 이게 뭐냐?》
《친구? 됐어요, 언니!》
연경이가 언니의 손에서 보따리를 나꾸어채며 대꾸하였다.
《난 이 사람과 할 말이 없어요! 돌려보내요!》
연경이는 앞을 떡 가로막아선 최금룡을 돌아 대문쪽으로 빠른 걸음으로 달아났다. 효경이가 그의 뒤에 대고 소리쳤다.
《연경아! 너 그게 무슨 례절이냐? 거기 서지 못하겠어?》
찌꾸덩- 하는 아츠러운 소리를 내며 쪽문이 매정스럽게 닫히는것과 함께 연경의 모습은 사라져버렸다.
얼굴이 꺼매진 최금룡은 쓰다달다 말이 없이 키넘는 울담만 뚫어지라 바라볼뿐이였다.
《얘, 연경아! 돌아서! 돌아오래두…》
효경이가 대문밖으로 좇아나가면서 재차 불렀으나 연경이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뻐스정류소를 향하여 휭하니 달아났다.
《누님, 됐어요. 들어오십시오. 저도 시간이 없어 인차 돌아서야 합니다.》
《애두 참, 저렇다니깐. 미안해요. … 연경의 마음 리해해주세요. 둘이 다 모진 사람들이야. 뿔만 잔뜩 세워가지고 만나면 뿔질만 한다니깐. 한쪽에서 한걸음 내밟으면 다른쪽에서 한걸음 물러서주기도 해야 되겠는데… 나라통일을 해야 한다고 큰소리들을 치면서도 두사람의 속도 통일을 못시키다니… 야속해!》
여느때는 말수더구가 적던 효경이였지만 언제부터 최금룡에게 하고싶었던 소리라 말꺼낸김에 속을 헤쳐보였다.
《누님말씀이 옳습니다. 그사이 제가 잘못한게 있죠. 또 뒤날에 옛말로 전할만 한 딱한 사정두 있구… 온다온다 벼르다가 이제야 나타났는데 용서해주십시오. 이렇게 급히 온건 다른게 아니구 아버님의 일때문입니다.》
최금룡이 서둘러 화제를 바꾸었다.
《아버지일? … 어서 들어가요, 추운데 밖에서 떨지 말구.》
효경이가 앞서자 최금룡도 더 사양하지 않고 그를 따라 응접실로 올라갔다.
최금룡은 응접실에 들어서자 가슴천정을 쿡 치받는 비분의 감정을 이겨내기 힘들어 조봉암의 고정좌석으로 되여온 가운데쏘파를 눈여겨보다가 시적시적 걸어가 그 옆자리에 조심히 앉았다.
효경이는 최금룡의 거동을 지켜보다가 쏘파에 앉는것을 보면서 뜨아한 어조로 물었다.
《어느 아버님 일인가요? … 우리 아버님?》
《두루두루… 두 아버님 일들이 겹쳐있지요.》
《그래요? … 말해봐요.》
《다름이 아니라… 선생님일이 상서롭지 않습니다. 저놈들의 잡도리를 보니 어떻게 하든지 선생님을 이번 기회에 되게 물어메칠 심산입니다. 리승만이 이미 내무부 장관, 치안국장, 검찰총장을 불러 훈시를 했답니다. 그래서 지금 경찰과 검찰이 서로 치적경쟁을 하면서 승이 나서 경쟁수사를 벌리고 이 소리 저 소리 함부로 줴치고 만고역적이나 잡은것처럼 기고만장해있습니다.》
《우리도 대강은 알고있어요.》
효경은 옷고름으로 눈굽을 닦으며 고개를 끄덕거리였다.
《하지만 너무 겁먹지는 마십시오. 지금 반대세력들이 악을 쓰지만 아직까지는 괜찮아요.》
최금룡이 진보당의 핵심간부들을 잡아간 후 벌어지고있는 정세를 간단히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 경찰과 검찰은 리승만일파가 너무 독을 쓰는 바람에 새해에 들어서자마자 세칭 진보당사건을 만들어 불집부터 먼저 쑤셔놓았다. 그런데 한주일이 지나도록 크게 형량을 매길만 한 건덕지가 없어 당황망조해하고있다. 그래 우선 여론전부터 펴고있다.
사건을 담당한 조인수검사가 검찰총장이 직접 하달한 지시에 따라 진보당은 북의 《남침》구호를 그대로 받아문 《간첩집단》이니 엄단할 결심이라고 발표하자 기다린듯 경찰과 검찰의 주요 인물들이 언론에 나타나 제가끔 함부로 떠들고있다.
조인수가 발언한 이튿날에 치안국장이 나서서 조봉암과 진보당은 여러 국제간첩단과 련계되여 북의 전략에 놀아나 평화통일방안을 자기 당의 강령으로 내걸고 《국시》로 책정된 리승만의 《북진통일》론에 정면도전하였다고 공언하였다.
뒤이어 검찰총장이 기자회견장에 나타나 조봉암과 그 주변인물들이 북의 평화통일주장과 자기들의 통일주장이 본질상 일치하다는것을 고백, 시인하였다고 장중하게 선포하였다.
그 다음날에는 담당검사 조인수가 검찰청에서 만들어준 발언원고를 가지고 다시 기자들앞에서 조봉암은 지난 시기 박헌영을 비판하고 그의 배척을 받고 출당처분을 받았을뿐이지 공산주의사상으로부터 전향한것은 아니라고, 죄과를 시인하였다고 발표하였다. 그러면서 그의 통일방안은 진보당의 비밀회의에서 채택한것인바 분명 북에서 파견된 인물들의 참석밑에 한것이 틀림없다고 사실과 예측이 뒤섞여진 아리숭한 말을 주절거렸다.
며칠후 검찰청 대변인이 진보당에는 특수부와 그에 소속된 당원들도 있는데 이는 변란을 목적으로 특수하게 조직된 부서이다, 따라서 진보당은 폭력단체로 규정해야 한다고 떠들었다.
경찰과 검찰이 이렇게 련이어 뻗닿게 늘어놓는 악담들이 기만적인 허구와 여론을 노린 유인책략으로 오히려 세상의 비난만을 크게 받고있다. …
최금룡은 될수록 태연자약하려고 애쓰며 사건이 터진이래 지금까지 조성된 긴박하고 복잡한 정황들을 조리있게 단참에 내리엮고는 자기주장을 내놓았다.
《누님, 이렇게 돼있습니다. 여기서 볼수 있는건 경찰이나 검찰이나 기어이 선생님의 활동을 끝내도록 하라는 리승만의 지시를 받았을뿐 그 어떤 물증이나 확신도 없이 수사에 착수했다는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공판이 벌어져도 능히 이길수 있다고 봅니다.》
《우리라구요?》
효경이 상대를 의심쩍은 눈초리를 하고 찬찬히 살피였다.
《누님, 내가 지금껏 자기소개를 하지 않았군요. 난 이번에 선생님의 변호인이 될것을 결심했습니다.》
《뭐, 금룡씨가 아버님의 변호인? … 어떻게요? 뭘로?》
네가 무슨 자격이 있다고 변호사노릇 하겠다는거야, 그리고 아버지슬하에서 도망쳐간 사람이 아버지를 위하여 나선다는게 당한 소리냐 하는 의미였다.
최금룡은 효경의 말과 얼굴빛에서 이런 속내를 알아차렸으나 무시하듯 간단하게 자기를 소개하였다.
《저는 지금 법률상담소에 이름을 걸어놓고있습니다.》
《그 말은 언젠가 연경이가 하더군요. 수입이 좋다고 하던데…》
효경의 말에는 은근히 비양과 질책기가 어려있었다. 법률상담소나 변호사직업은 어떤 의미에서는 돈에 가까운 자리다. 민중을 위한 혁신과 진보의 정치지망생으로 뜻을 두었던 최금룡이는 피해야 할 일이다.
최금룡이 인차 낯빛이 벌깃해가지고 좀 기가 눌려서 변명조로 말을 이었다.
《제가 그새 법관고시에 합격하여 변호사자격을 쥐였지요. 뭐 사정이 있었는데 차차 알게 될겁니다.》
《그러니 금룡씨가…》
여전히 효경은 미덥지 않아하였다.
《왜요? 믿음이 가지 않습니까? 내가 고려대학교 법과 수석졸업생이라는건 잊지 않으셨겠지요?》
최금룡은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최금룡의 웃음에 효경은 약간 당황하여졌다. 최금룡은 효경의 의심을 해소시키고싶어 말을 계속하였다.
《문제는 년한이 아닙니다. 나이도 아니구요. 립장입니다. 확신이지요. 재판에서 상대를 잘 알고 피고측을 잘 알고 이길수 있다는 자신을 가져야만 이기는 변호를 할수 있습니다. 저를 한번 믿어주십시오.》
이렇게 말하는 최금룡의 말투가 그전처럼 결패있고 자신있는 어조다. 그리고 일단 결심했으니 물러서지 않겠다는 배짱있는 자세다.
《믿어달라구요?》
효경이는 뜨아한 말투로 최금룡의 청을 되받아넘겼다.
《한번 믿어주십시오.》
귀에 익은 그 말에 효경은 문득 지나간 시절의 감미로운 추억이 떠올라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벌써 네해전 일이다.
최금룡은 조심스럽게 꺼낸 사랑의 고백에 연경이가 너무 깔깃깔깃 태가락을 부리며 대답을 주지 않자 이 일에서는 당자보다도 더 발언권이 있을듯싶은 언니 효경이를 찾아왔다. 루루한 설명과 애원끝에 최금룡은 간곡하게 부탁하였다.
《누님, 동생을 저에게 주십시오. 난 절대로 연경이를 불행하게 하지 않을겁니다. 한번 믿어주십시오.》
사내의 진정에 감동된 효경은 그를 도와나섰다. …
효경이는 동생과 금룡의 사랑으로 해서 더욱 즐겁고 행복했던 어제날에로 솔깃이 잠겨드는 감회를 밀어내며 물었다.
《연경이가 달아나는것을 방금 보지 않았어요? 금룡씬 언젠가도 날더러 그랬었지요, 믿어달라구…》
《내가 그 믿음을 헌신짝 차버리듯 했다는겁니까?》
최금룡의 말투가 거칠어졌다. 불덩이같은 눈망울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져나왔다. 그의 말투에도 표정에도 깨져버린것 같은 사랑에 대한 책임이라든지 고민이라든지 혹은 자기에 대한 가책의 빛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이 효경에게는 뜻밖이여서 당황해졌다.
우리 집에 들어와서 아버지의 사랑을 쉽사리 차지하였던 사내가 이런 철면피한이였더냐. 우리 연경이 청순한 순정을 바친 사내가 이렇게도 지각이 없고 부도덕한 인간이였더냐. 선과 악에 대한 분별력이든지 반성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제편에서 오히려 노염을 쓰고 걸고들며 분격해하고 억울해한다.
효경은 최금룡에게서 뿜어져나오는 서늘한 기운에 질식될것만 같아 그의 눈길을 피하며 인차 돌아서려고 구실을 찾았다.
최금룡이 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방금전에 연경에게서 문전축객을 당할번 했던데다가 효경이마저 로골적이고도 적의에 가까운 의심과 질시를 드러내보이자 젊은 혈기에 자기를 참아낼수 없었던것이다.
《누님! 난 아직도 그 믿음을 잊은적이 없습니다. 나를 위해준 그 진정에 티끌만 한 오점도 남기지 않았구요. 난 그때나 지금이나 연경이를 좋아합니다. 평생토록 사랑할겁니다, 아버님도…
누님, 지금은 그걸 가지고 미주알고주알 캘 때가 아니지요. 지금은 일을 해야 합니다, 불끄는 일을. 우리의 관계는… 때가 올겁니다. 누님, 다시한번 믿어주십시오.》
최금룡은 무심중에 입밖으로 튀여나간 부탁에 저도 면구스러운듯 숫접게 씩 웃었다.
사내의 그 웃음이 효경의 마음에 차분히 젖어들었다. 최금룡의 순박하고 거짓을 모르던 예전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던것이다. 야릇한 련민의 정까지 느낀 효경이는 마음착한 성미대로 싹싹하게 어투가 바뀌여졌다.
《뭐가 뭔지… 왜 우리를 찾아왔나요?》
《아버님이 손수 쓰신 당강령초고를 건사해둔게 없습니까? 당강령초고가 완성되였을 때 제가 회람조직을 하고 건사해두었던 생각이 나서 왔습니다. 특히 제가 당의 통일강령작성을 위해 여기저기서 자료를 수집하여 보고드리고 선생님이 다 보신 다음에 따로 묶어서 보관하였는데 그게 혹 있지 않을가 해서 왔습니다. 그게 있으면 저에게 주십시오.》
《그건 왜요?》
《글쎄 쓸데가 있어 그럽니다. 요긴하게 써먹을데가 있습니다.》
《가택수색을 당할 때 다 가져가고… 그전에 일부 문건을 따로 보관하여둔것도 있는데 아버님이 보시던 참고자료들은 다 있는것 같애요. 그런데…》
효경이 따로 아버지가 건사한 문건을 내놓는것이 어떠할는지 결심이 쉬이 되지 않아 바질거리자 최금룡이 그의 손목을 꼭 잡아흔들었다.
《됐습니다, 그게 있으면 됐습니다. 누님, 그걸 저에게 다 주십시오. 저놈들은 지금 진보당통일강령이 부산에서 활동하던 우달수부위원장을 통하여 북에서 받은것이라고, 그걸 그대로 복사해서 내놓았다고 생억지를 부리고있습니다. 이것부터 철저히 분쇄하여야 합니다. 그게 거짓말이라는것은 그때 그 자료들을 선별하여 선생님의 강령초고작성에 참고하시도록 발취도 하고 종합도 해드린 제가 너무나 잘 알지요. 그래서 제가 변호사로 나선겁니다. 그때 선생님이 리승만의 <북진통일>방안과 유엔에서 결의된 통일방안 그리고 북에서 제기한 통일방안, 이렇게 세가지를 구해오라고 해서 제가 직접 여기저기서 구입해왔거던요. 그때 일은 선한데 물적증거가 있어야겠기에 이렇게 왔습니다. 누님, 그걸 어서 좀 봅시다.》
최금룡이 이렇게 너무 기뻐 큰소리로 떠들썩거리자 효경이는 두말하지 않고 뒤뜨락의 김치움에 가서 천에 둘둘 말아둔 종이말이를 찾아가지고 왔다.
최금룡은 그것을 받아들자 마루바닥에 펴놓고 종이장들을 꼼꼼히 훑었다.
잠시 자리를 뜬 효경이가 차를 끓여가지고 들어왔다.
《자, 들면서 봐요.》
효경은 그에게 차잔을 내밀며 곰상스러운 어조로 권하였다.
최금룡은 차잔을 받아 한모금 마시고는 다시 신문기사들을 잘라낸 쪼박들과 조봉암이 국문과 한자를 뒤섞어 란필로 써놓은 문건초고들에 눈길을 묻었다.
《아, 이거다!》
최금룡이 문득 환성을 올렸다.
일본신문 《산께이신붕》에 실린 짤막한 기사였다. 거기에는 1955년 4월에 공포된 북의 평화통일정책이 소개되여있었다.
《이건 제가 그때 <산께이신붕>에 실린 기사를 오려내서 선생님께 드렸던겁니다. 그런데 저놈들은 지금 선생님이 국제공산당에서 파견한 인물로부터 북의 평화통일방안을 넘겨받았다고 떠들고있습니다. 그러니 이거 한장만 가지고도 그놈들이 제일 힘을 넣어 강변을 하고있는 그 요진통을 어렵지 않게 무찔러버릴수 있습니다.》
최금룡은 이렇게 기쁨에 젖어 설명하고는 그걸 접어서 안주머니에 정하게 건사하였다. 그리고 다시 신문종이들을 뒤적이는 일에 열중하였다.
효경은 그의 옆에 앉은채 총각에게서 의혹에 찬 눈길을 떼지 못하고있었다.
연경이 못지 않게 자기도 이 사내때문에 얼마나 커다란 상실과 좌절감을 가지고 지난 두해를 지내왔던가.
아버지인 최기오가 그냥 조봉암댁에서 나오라고 성화를 먹인다니 처음에는 그럴법도 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끝내 최금룡이 집에서 나가버리자 총각에 대한 립장이 싹 달라질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나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신문지상을 통하여 진보당의 강령과 활동에 환멸을 가지고 조봉암의 슬하를 박차고 나왔다는 소식에 접했을 때에는 사내에 대한 배신감과 분노를 금할수 없었다.
최금룡을 몇해 가까이에서 지내면서 무척 아껴주고 대견해하던 조봉암의 측근들마저 믿던 나무 부러졌다며 억하심정을 금할수 없어하였다.
조봉암은 한마디 이렇다 저렇다 말이 없었으나 식솔들중에서 혹 최금룡의 말을 꺼내놓고 욕사발을 퍼붓기라도 하면 엄하게 함구령을 내리고 불편한 속을 다잡느라고 애를 썼다.
뒤날에 전해오는 말이 치안본부의 특수공작부에 취직했다느니, 법률상담소에 들어갔다느니 하는 소리들이 엇갈려 들려와서 사람이 변해도 더럽게 변하여간다고 정치운동에 등을 돌린 최기오까지 거들면서 그 애비에 그 자식이라고 모두들 분해하였다.
선거때에는 아버지에게 반대투표까지 한다고 해서 더욱 미운살이 뻗치게 한 사내다.
그런데 어지러운 후문만 날리며 이 집 대문안에는 얼씬도 않던 그 사내가 이렇게 집안이 온통 란가가 되고 진보당이 쑥밭으로 되고있을 때 자진해서 귀인이 되겠노라 찾아든것이다.
믿기 힘든 일이였으나 뿌리칠수도 없다. 경찰의 눈이 무서워 누구나 대문가에 다가설념도 못하고있을 때 용감하게 뛰여든 사내가 의심쩍기도 했으나 그에 못지 않게 고마움부터 앞서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요새는 그 어디서 전화로라도 위로의 말 한마디 해줘도 눈물이 찔끔 돋는다.
남편과 함께 최금룡을 타매하며 그의 아버지가 보낸 돈을 돌려보냈다는 얘기를 했을 때 호되게 꾸중하며 가슴치게 타이르던 아버지생각에 최금룡을 적의로 대할수도 없는 효경이였다.
더우기 아버지가 감방으로 가기 전에 최기오와 눈물겨운 정까지 나누었다는 얘기를 들은바 있는지라 효경이는 아린 속을 누르고 사내의 눈치를 살피고있었다.
《이것도 주십시오.》
최금룡은 또 여러장의 문건을 종이집게로 한데 묶어놓은 두툼한 문건철을 찾아들었다.
그것은 조봉암이 오래전부터 자금지원을 받아온 사람들에게 보낸 감사장이거나 령수증들이였다.
《그건 왜요? … 자금지원을 해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것 같아 따로 보관한건데…》
《예, 딴은 그렇기는 한데…》
최금룡은 효경의 위구심에 공감을 표시하며 문건들을 대충 훑었다.
놀라운 일이였다. 자금지원자들속에는 로동자, 농민, 지식인들뿐아니라 대자본가도, 군부의 장성도, 큰 대학교의 학장도, 자유당의 부위원장과 최고위원들 지어는 행정권의 장관을 포함한 도전세력의 중진들까지 있었다. 지금 우익계에서 진보당을 헐뜯고있는 신문사들의 사장들도 있고 고명한 작가들과 유명배우 혹은 인기방송원들도 있었다.
그리고 문건철에는 자금지원자들이 자금과 함께 보내온 《어서 빨리 통일시켜주세요.》 하는 부탁의 글과 자기가 두고 온 북녘의 고향주소를 적어놓은 필적도 있었다.
최금룡은 마치 조봉암을 따라나선 각계각층의 굳세고도 열화같은 대오를 보는것만 같아 흉중이 쇠물처럼 끓어올랐다.
(이런데도 평화통일론이 국시위반이냐?)
최금룡은 벌써부터 법정에 나선 심정이 되여 주먹으로 문건철을 내리쳤다. 그는 문건철의 마지막장까지 다 훑고나서 도로 문건을 내밀었다.
《좋습니다. 지금은 그냥 둬둡시다. 저놈들이 아마도 통일론에서 퇴각하면 또 다른 주패장을 내들자고 할겁니다. 지금 경찰에서 가택수색을 할 때 북에서 보낸 공작금과 인삼이 나왔다고 떠들어대는데 그게 사실인가요?》
《멀쩡한 거짓말이예요. 돈은 회수해갈것도 없었어요. 그리고 개성인삼이라는걸 몇뿌리 가져갔는데 그건 강치부아저씨가 지난해 가을에 아버지 몸보신에 써달라고 가져다준거예요.》
《그것 보십시오. 저놈들은 유령같은 국제간첩단을 만들어놓고 어떻게 하든지 아버님과 련결시켜놓으려고 갖은 오그랑수를 다 쓰는게 분명합니다. 깊이 간수하십시오. 긴하게 써먹을 때가 올겁니다.》
최금룡이 말을 마치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좀 있다가 가요. 차도 마저 들고.》
《인차 가야 합니다. 시간을 놓치면 만사를 잃을수 있거던요. 나도 요즈음은 잠잘새도 없답니다. 자료준비, 법률연구, 신문조사, 상대역료해… 만나야 할 사람도 많구…》
《그래두… 오래간만에 집에 왔는데… 좀 있으면 연경이도 돌아오겠는데 만나보구 가세요.》
《아이구, 그 따벌! 콕콕 쏘기만 하니 정말 한대 때려주고싶은게…》
《호호, 됐어요. 어쨌든 우리 연경이는 처녀가 아닌가요? 아무렴 사내들의 궁냥에 비길가?》
《하하… 그 덜렁이 내가 벼른다구 하십시오.》
마음이 무른 효경이가 인차 자기에게 정을 주어버리자 최금룡은 속이 넓어져서 크게 웃었다.
효경은 최금룡의 앞에서 여태껏 묻어온 한이 봄눈녹듯 씻겨져내리는것을 어찌할수 없었다. 그에 대한 믿음과 정이 되살아나고 속안이 따스해왔다.
그러고보니 최금룡이 지난 이태사이에 안팎으로 크게 달라졌다는 느낌이 새삼스럽게 들었다. 볼과 코밑에 수염터도 잡히고 언행에 무게가 실리고 름름해보였다. 말씨도 무척 다듬어지고 군소리가 없이 기품이 어려있다. 하지만 예나제나 소탈하고 꾸밈없는 한모습이고 말마디마디에 변함없이 후더운 정이 넘친다.
효경이는 최금룡의 옷자락을 잡으며 곡진하게 권하였다.
《그러지 말고 동생을 만나고 가요.》
《아니, 난 정말 인차 가야 합니다. 11시까지 서울지방법원에 가야 합니다. 이번 재판에 누가 재판장으로 나서는지 알아봐야겠습니다.》
《재판장?》
효경이 재판장이라는 소리에 비로소 몸가까이로 다가선 위험을 의식한듯 흠칫 몸을 떨었다.
《놀라실건 없습니다. 아무튼 맞다들어보기는 해야 할 판이니깐요. 지금 돌아가는 말이 여러명이 내정되였다가 법무부 장관대리에게 다 퇴박을 당했다나봐요. 홍병삼판사가 새로 물망에 올랐다는데 이제 가봐야 알겠습니다.》
《홍병삼? …》
효경은 어데서 듣던 이름 같아서 입속으로 되뇌였다. 생각해보니 몇번 아버지를 따라서 만나보기도 했던 사람이다. 천령배가 국제공산당프락찌야사건의 주범으로 몰려 재판정에 나섰을 때 아버지가 알게 된 판사가 분명하다.
그때 검사측은 리승만일파의 지령을 받고 그를 잡아넣기는 했으나 현행으로 걸어챌것이 없으니 나중에는 해방후에 좌익권의 한 지도적인물로 있다가 두해동안 감옥살이를 했다는것을 다시 들고나와 사형을 구형하였다.
아버지는 홍병삼을 찾아가 그것은 이미 전쟁전에 판결이 되여 복역으로 다 계산된 일이고 또 사실상 그마저도 법에 저촉되는것이 아니였다고 루루이 설명해주면서 재판에서 눈치보기나 짜맞추기를 해서는 안된다고 력설하였다. 권력이란 어차피 바꾸어지기 마련이니 뒤날에 오심으로 제기되여 후세의 량심법정에 끌려나가 지탄을 받는 일이 없도록 해야 된다면서 법관의 량심에 죄되는 일은 하지 말라고 따끔하게 호소하기도 하였다.
그후 홍병삼은 천령배에게 무죄를 선포하였다가 리승만세력의 압력을 물리칠수가 없어 5년으로 선고하여 재판을 결속하였다. 당시 홍병삼은 그 재판을 치르고나서 두해동안 재판권을 잃었다. 그리고 2년후에는 고등법원에서 서울지방법원으로 내리먹기까지 하였다.
《홍병삼판사는 우리 아버지가 좀 아시는분이예요.》
효경이 기억을 더듬어내자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하였다.
《그렇습니까? 그렇다면 더욱 좋습니다. 홍병삼판사는 법계에서 <앉은뱅이판사>라는 별명이 붙여져있는 사람입니다. 그냥 판사자리에 눌러있다고 해서 그렇게 부른답니다. 같이 일보던 판사들이 대법원이요, 법무부요 한데 가서 뜨르르하게 설치는데 그 사람만은 고등법원에서 밀려난 뒤 늘 말단법원 판사직에서 맴돌다가 이제는 정년퇴직나이가 되여온다구 합니다. 그런데 홍병삼판사의 사위가 바로 저랑 같은 대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딸두요. 연경이와도 잘 아는 사이지요.》
《그래요? … 아, 이제 생각나요. 방학철이면 종종 우리 집에 왔어요. 언젠가 자기 아버지가 홍병삼판사라는 그의 말을 듣고 우리 아버지가 판사를 칭찬하는 말씀을 하시던게 생각나요. 키가 좀 작고 눈매가 곱고 입모습이 또렷해서 인상적이였는데 홍명옥이라고 불렀던가봐요.》
《옳습니다, 홍명옥! 우리 선배와 대학때부터 친하게 지냈는데 지금은 결혼해서 아들까지 있지요.》
《그래요? … 에, 우리 연경이는 이래저래 손해많다. 남은 애까지 있다는데.》
효경이는 이렇게 말하며 곱게 눈을 빨았다.
《하하… 연경이는 뜻이 크거던요. 리상도 높구요. 이제 두고보십시오. 서울의 녀걸로 솟아 아버님과 어깨를 겨루는걸.》
《에, 그럼 앞으로 금룡씨는 어쩌구?》
《아, 거야 난 시중군노릇 하면 되지요. 못할거 있나요? 원체 우리사이에는 그런 약조가 되여있었답니다. 그 따벌이 그것도 다 까먹은것 같애.》
《호호호…》
《난 가겠습니다. 겁먹지 마십시오. 고생은 좀 하시여도 오히려 화가 복이 되여 재판에서 아버님이 또 한번 대공에 솟아오를겁니다.》
최금룡이 헌걸차게 소리치고는 서둘러 방을 나섰다. 그는 마당을 가로질러 대문가에 이르러 걸음을 멈추더니 쪽문을 열다말고 돌아섰다.
《참, 이 정신 봐! 우리 아버지가 이걸 보냈습니다.》
최금룡은 바래주러 따라나온 효경에게 두툼한 봉투를 안주머니에서 꺼내 내밀었다.
《?!》
《받아주십시오.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 지금 그 집 자매가 죽산선생 옥바라지때문에 제일 어려울 때인데 아무때나 필요하면 오라고 했어요. 죽산선생을 위하는 일에 돈을 아끼지 말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변통하겠노라 했습니다.》
《금룡씨 아버님이?!》
효경은 순간 눈굽이 젖어들어 울먹거렸다.
《누님, 안녕히 계십시오. 어서 들어가세요, 찬바람 맞지 마시고.》
최금룡은 대문밖에서 쪽문까지 꼭 닫아주고나서 빠른 걸음으로 큰길을 향해 걸어갔다.
효경은 그의 발자국소리가 멀어져가자 갑자기 주위세계가 텅 빈듯 한 허전함과 서글픔에 휩싸여 느티나무의 밑둥에 기대고 흐느꼈다.
어느결에 부드러운 손이 그의 잔등을 따뜻하게 쓰다듬었다.
《울지 말아요, 효경이!》
류선녀가 축축한 눈으로 효경을 지켜본다.
《선생님!》
효경이가 류선녀의 가슴에 고개를 묻으며 몸을 떨었다.
《아버님을 생각하며 힘을 내자요. 눈물만으로는 아무 일도 할수 없어요. 우리가 눈물이나 흘리고 맥을 놓고 지내면 아버님 옥고가 더 힘들어져요.》
《선생님, 죄송합니다.》
류선녀가 수건을 꺼내 효경의 눈굽을 닦아주며 다심하게 타이르자 효경이는 낯을 붉히며 대답하였다.
조봉암이 감옥으로 간 후 이 집에서는 자연스럽게 류선녀가 기둥이 되여 그 주위에 효경이와 연경이, 김봉무까지 한덩어리로 뭉쳐졌다.
조봉암이 떠나간 저녁에 류선녀는 식탁에 둘러앉은 자매와 김봉무가 슬픔에 짓눌려 숟가락을 들념을 하지 않자 짱짱 강심이 다져진 어조로 책망을 하였다.
《왜들 이래요? 이렇게 울고만 있으면 어떻게 해요? 평생을 싸움터와 감옥에서 보내신 선생님이시지 않나요. 마음들을 굳게 먹어요. 선생님이 감방에서도 힘을 내여 싸워 이기시게 하자면 바깥에 있는 우리도 주저앉지 말고 선생님을 위해 뛰고 또 뛰여야 해요.》
류선녀가 이렇게 말하며 그들의 손에 숟가락을 쥐여줄 때 효경이자매는 녀인의 품에 와락 안기며 《선생님!》 하고 목메여 불렀다.
그날부터 류선녀는 뜻밖의 재변에 반정신이 나가있는 이들의 중심에 수레바퀴의 축처럼 확고히 자리를 잡고 부닥치는 일들을 차근차근 밀고나갔다. …
《선생님, 금룡씨 아버님이 이 돈을…》
효경이 돈봉투를 류선녀에게 넘겨주며 말끝을 흐렸다.
《나도 방금 들었어요. 선생님이 금룡의 아버님께 전화로 하신 당부도 들었구요. 최금룡에게 곡절이 있는듯싶으니 그냥 두고봐요.》
《알겠습니다.》
《이렇게 하자요. 난 오후에 오빠를 찾아가겠어요. 그 홍병삼이라는 판사가 나을듯싶다면 그 사람을 붙여달라고 해보겠어요. 연경이도 홍병삼의 따님과 말을 붙여보라고 하자요.》
《예.》
효경의 얼굴에 한가닥 기대가 어리였다.
점심녘에 찾아가겠다고 오빠의 집에 전화를 하고난 류선녀는 조봉암이 늘 앉아서 일을 보던 책상을 마주하고 잠시 앉아보았다. 그리운 사람의 체취가 후덥게 느껴졌다.
류선녀는 눈앞에 조봉암의 모습을 떠올려놓고 애모쁜 추억에 잠겨들었다.
류선녀가 슬픔이 가득찬 이 2층집의 주인으로 조봉암을 대신하여 그자신도 어쩔새없이 자연스럽게 자리잡게 된것이 쉬운 일은 아니였다. 이 집 처마밑에서 제일 큰 슬픔과 고민을 그러안고 착잡하게 서려드는 번뇌에 시달리고있는것은 류선녀였다.
인생의 전부를 의탁하여온 조봉암이 옥에 갇히고 그에 대한 엄청난 여론이 세상을 들썩하게 하자 류선녀에게도 여러가지 시름겨운 바람들이 기다린듯 쉴새없이 날아들었다.
오빠도 자주 전화를 걸어왔고 형님도 두어번 대문가에까지 왔다가 돌아갔다. 류선녀는 그들과 만나는것을 애써 피하면서도 그들이 무엇때문에 자기를 찾겠는가 하는것이 쉽사리 짐작이 갔다. 여러 생각말고 이 집에서 그만 나오라는 소리를 하자고 했을것이다.
사실 그에게는 이 집에 꼭 눌러있어야 한다는 법적인 의무도, 도덕적인 채무도 없었다. 훌렁 떠나버리면 모든 구속과 시름거리에서 벗어나게 된다. 조봉암도 이제는 돌아가라고 간곡하게 부탁을 했으니 그 말을 따른다고 탓할 사람도 없다.
그를 지켜보는 주변의 눈들도 갈래가 복잡하다. 그러지 않아도 법적인 절차를 밟지 않고 이 집에 들어온 일을 두고 제나름으로 의아쩍어 하고 질투하고 혹은 이색적인 눈으로 보아오던 사람들이 그냥 눌러앉아있는 자기를 보며 갖가지 빛갈을 보이고있다. 대학을 떠나올 때 함께 교단에 섰던 동료교수들도 각이한 눈으로 류선녀의 처사에 대하여 분석하고 뒤말을 돌려왔는데 지금은 대체로 동정적이다. 그들중 적지 않은 사람들이 전화로 혹은 직접 찾아와 진심으로 위로해주기도 하지만 그 뒤끝에는 꼭 《이제는 여린 정에 발목을 잡히지 말고…》 하고 한마디씩 힘들게 주를 달아놓는다.
류선녀는 잠자리에 들 때마다 누가 볼세라 이불을 뒤집어쓴채 눈물을 쏟으면서도 억세게 마음의 보짱을 버티고있었다.
(그분은 죄인이 아니다. 잠시잠간 새로운 전투장에 나서시였을뿐이다. 그이는 절대로 자기를 지키는 어려운 싸움에서 무력하게 넘어질 허약한분이 아니다. 돌아오신다! 반드시 승리자가 되여 돌아오신다!)
류선녀는 이렇게 하루에도 열번, 스무번 심장에 덧금을 새겨가며 침착하고 사려깊게 식솔들을 다스리고 자기 할바를 찾아하고있다.
조봉암이 승리하고 돌아오리라는 철석같은 믿음은 류선녀를 이 신당동에 붙잡아두고있는 여러가지 리유중에서 제일 현실적이고 제일 유력한 리유이기도 하였다.
효경은 점심무렵이 다 되여서야 돌아온 연경에게 최금룡이 찾아왔던 사연을 들려주었다.
다 듣고난 연경은 코웃음부터 쳤다.
《흥! 변호사로 나선다구요? 한번 쑥대우에 올라서보겠다는거야? 기회선택은 만점이야.》
《말하는걸 들어보니 그럴듯도 하더구나. 일을 챙기는품두 믿음이 가더라. 금룡씨는 역시 사람이 진국이야. 뭘 보구 분석하구 평가하는걸 보면 수준도 있고… 크게 달라졌더라. 우리가 뭔가 잘못 생각하나봐.》
《아유, 언니같다면 세상살이가 얼마나 편할가? 세상사람을 좋은 사람, 나쁜 사람 두패로만 갈라보구…》
《얘가 오늘 왜 이래?》
효경은 동생이 전에없이 그냥 빈정대며 자기 말에 왼새끼만 꼬자 약이 올라 어성을 높였다.
정색해진 연경이도 지지 않고 살차게 대꾸했다.
《언니, 그 사람 말 믿지 말아요. 믿던 도끼에 발등 찍힌게 언제라구… 언니 말이였지요? 키운 강아지한테 발꿈치 물렸는데 이제 와서 미련을 가진다는게 우습지 않아요?》
《아버지가 감옥 가시던 날에 전화로 다 용서를 하시고 부탁도 했다지 않아. 너는 직접 들었잖니?》
《글쎄, 아버지는 속이 바다같은분이니깐 그럴수 있었지만 난 더이상 용서 못해! 우리가 제일 어려울 때 도망간 사람, 아버지한테 반대표를 던진 사람… 이제 와선 변호를 해주겠다고? 언닌 그가 집을 나간 후 벌써 몇번째나 내 마음을 우롱했는지 알기나 해? 버티고개에서 만나자고 했을 때도, 신문에 비방하는 말을 실었을 때도 그리고 아버지에게 반대표를 내겠다며 병원을 떠나갈 때에도 난 그의 행동을 변명해주고싶었구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랬어. 리해에도 정도가 있어. 아니, 용서는 한번뿐이야.》
《너, 정말… 그러면 못써! 나무도 너무 세면 부러져. 좀 휘여들어보렴. 금룡씨 아버님이 아버지 옥바라지에 쓰라구 돈까지 보내오셨어. 아버님 구하는 일에 아끼지 말구 쓰라구 하셨다나봐.》
《뭐라구요?! 그 돈 어데 있어요?》
《류선녀선생님께 드렸어.》
《왜 받아, 왜? … 돌려보내요. 병주고 약주기지 뭐나. 사람들속을 박박 허벼놓고서는 이제는 불쌍한 처지가 됐다구 쪽박에 동냥쌀 채워준다는거야?》
《얘, 그게 너 무슨 소리야? 다시 말해봐. 금룡씨도 네가 콕콕 쏠 때면 매 한대 먹이고싶다더니 너 정말 한대 맞아볼래? 너 왜 자꾸 못나게만 굴어? 너야 어쨌든 그 집 문턱을 넘어설 사람이 아니냐. 그런데 그 말본새 뭐냐?》
《난 그 집 문턱을 죽어도 안 넘어가! 박쥐같으니…》
《뭐야?! 그건 아버님께서 감옥에 가시며 다시 이어주신 인연이야.》
《그래도 난 싫어요!》
《아직두?! 너무하지 않아? 지금은 고양이손이라도 빌려야 할 때다. 돕겠다고 남먼저 대문간을 넘어온 사람보고 너 어쩌면 그럴수 있어?》
《짐승도 한번 빠진 구뎅이는 피해간다구 했어요. 우리 집 대문을 그런 인간에겐 절대로 열어줄수 없어!》
《이애가 정말?!》
효경이가 그냥 앵돌아져서 양양거리는 동생에게 다가들어 그의 왼쪽볼을 찰싹 호되게 쳤다.
연경이는 언니의 뜻밖의 매에 볼을 싸쥔채 멍하니 쳐다보았다.
《언니야?!》
전에 없던 일이라 너무 놀라 연경의 두눈이 단번에 사발만 해졌다. 한동안 얼이 나가 언니를 쳐다보고있던 연경은 불시에 설음이 차올라 《으앙-》 하고 소리쳐 울며 달려나갔다.
효경이도 그 자리에 무너지듯 주저앉아 두손에 얼굴을 묻고 섧게 울었다.
아까부터 그들의 대화에 귀를 솔깃하고있던 류선녀가 아래웃방에서 제나름의 설음에 겨워 왕왕 우는 소리에 자기 방에서 나왔다. 그는 울고있는 효경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살래살래 젓고는 말을 붙이지 않고 조용히 연경의 방으로 건너갔다.
류선녀는 섧게 흐느끼는 연경의 등뒤로 다가가 처녀를 두팔로 포근히 그러안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속삭이였다.
《그러지 말어. 연경은 죽산의 딸이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