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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불멸의 력사》(해방후편)
장 편 소 설
천 세 봉
( 마지막회 )
제 16 장
3
은거해있던 무장테로단은 일망타진되였다. 강진건은 뿌듯한 긍지와 안도감으로 해서 오히려 현훈증이 일어나며 발걸음이 잘되지 않았다. 강진건은 이 기쁜 소식을 장군님께 어서 보고드리고싶어 군당비서실로 달려갔다. 장군님께서는 그때 마침 평남도일대의 농촌마을들을 돌아보고 집무실에서 사업하시는 참이였다. 강진건은 정중히 문안인사를 올리고 기쁨에 들뜬 목소리로 승리의 보고를 올리였다. 《수고했습니다. 정말 수고했습니다. 이번에 선생님이 거기에 가서 큰일을 막아냈습니다》 송수화기에서 들려오는 장군님의 정다운 목소리에 강진건은 눈굽이 젖어들어 잠시 전화기만 붙들고 서있었다. 《이번엔 상한 동무가 없습니까?》 《보안서원 한 동무가 경상을 당해서 병원에 입원을 시켰습니다. 그밖에는 별로 불상사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이번에 결국은 신당리농민 한명이 희생되였군요. 그 농민을 생각하면 참 분합니다. 땅을 받아보지도 못하고 죽었습니다.》 장군님의 목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으며 뚝 끊어졌다. 희생된 농민을 생각하시는지 한동안 수화기에서는 유도음 흐르는 소리만이 가늘게 들려왔다. 《강선생님!》 한참만에 부르는 장군님의 목소리는 퍼그나 갈리시였다. 《그 사람은 어떻게 됐습니까? 나쁜놈들때문에 자살을 기도했던 그 부농말입니다.》 《무사합니다. 치료를 잘 시켰더니 아무 일없습니다. 부농의 아들도 다시 서무과에 들어와서 일을 잘합니다. 그 동문 벌써 여러번 군중앞에 나서서 토지개혁이 얼마나 정당한 인도주의적인 개혁이고 공산당안에 기여든 종파놈들이 얼마나 나쁜놈들인가를 말하며 훌륭한 선동연설을 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아무튼 그 동무가 우리 당을 믿고 옳게 살아가도록 잘 이끌어줘야 합니다. 그런 사람일수록 따뜻이 품어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신뢰단〉이라는 그 반동무장단원들에 대해서도 일률적으로 취급해서는 안됩니다. 그속에는 반동놈들의 기만에 넘어가서 그런짓을 하게 된 사람들도 있을것입니다. 그들도 좋은 사람이 되도록 잘 교양해야 합니다.》 강진건은 전류를 타고 흘러오는 사랑의 음파가 온몸의 피부와 혈관속으로 따뜻이 스며드는것 같아 지그시 눈을 감았다. 이런분을 수령으로 모신 우리 인민이 얼마나 행복한가싶었다. 장군님께서는 강진건을 다시 부르시였다. 《거기 서분이라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재령강에서 만났던 처녀종이 생각나겠지요? 그 애의 남동생을 찾았습니다.》 《예?!》 강진건은 무엇때문인지 자신도 모르게 외마디소리를 질렀다. 그의 눈앞으로 재령강 빨래터에서 눈물지으며 구슬픈 재령강의 노래를 부르던 처녀의 얼굴이 밟혀왔다. 여태 반동무장단놈들과 접전을 하느라 까맣게 잊어버리고있었던 처녀다. 《강선생님, 그런데 그 애의 부모들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방랑을 하다 로상에서 굶어죽었습니다. 황해도와 평남도 접경의 어느 들판에서 그 애 부모들의 눈을 감겨준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통해서 모든걸 알게 되였습니다. 서분이 동생 막동이도 지주집 꼴머슴을 하며 이만저만 고생을 하지 않았습니다.…원래 조순근농민이 서분이를 딸처럼 생각하고있으니 그 집에서 서분이 오랍누이가 함께 살도록 해줍시다. 서분이는 제 땅에서 농사를 짓게 하고 그 애는 학교를 다니게 하고…》 강진건은 말문이 막힌 사람처럼 멍청히 서있었다. 그제야 그는 서분이와 대복이 실종된 사실을 생각하게 된것이였다. 언제인가 그런 말을 얼핏 들었댔으나 여태 구체적인 실태를 알아보지 못했었다. 그런데 장군님께서는 지금 막동이를 찾아놓고 서분이의 행복한 미래에 대해서 이야기하고계시는것이였다. 이름도 없는 서분이의 오랍동생을 찾느라니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셨을가싶었다. 바다가의 넓은 백사장에 떨어진 한알의 보석을 찾는것과도 같이 힘들고 어려웠을것이다. 그럴수록 강진건은 그들에 대하여 너무도 무관심했다는 생각에 죄스러움을 금할수 없었다. 《강선생님, 이제는 그 서만호지주를 빨리 청산하고 서분이처럼 그 집에서 고역을 치르던 모든 머슴들과 종들을 해방시킵시다. 지금 다른데서는 벌써 머슴들이 집과 땅을 받고 새 생활을 시작하고있는데 거기서는 반동놈들의 준동때문에 좀 늦었습니다. 참 그곳 지주의 아들놈이 이번에도 반동음모의 주모자로 나섰다는데 그놈은 어떻게 됐습니까?》 강진건은 반사적으로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번에 반동무장단을 일망타진해버렸는데 분하게도 주모자인 서강이 한놈만은 놓쳐버린것이였다. 그놈은 참으로 못된짓을 너무도 많이 한 놈이였다. 《그놈을 놓쳐버렸다?》 강진건의 보고를 듣고나신 장군님의 목소리는 무중 높아졌다. 그리고 갑자기 무슨 예감이라도 드는듯 서분이의 안부를 서둘러 물으시였다. 《그 애가 지주집에 아직 그냥 있습니까?》 강진건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대복이, 서분이들이 실종된 사실을 말씀드리였다. 《아니 그 애들이?》. 놀라시는 장군님의 목소리가 수화기를 크게 울리였다. 장군님께서는 한동안 말씀이 없으시였다. 강진건은 두손으로 붙들어쥔 송수화기에 마치 근심에 잠긴 장군님의 영상이 비쳐오는것만 같았다. 《아이들을 찾기위해 무슨 대책을 세웠습니까?》 《장군님, 솔직히 말씀드리면 그 반동무장단놈들과 접전을 하느라 그 애들한테 미처 생각을 돌리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서강이놈을 붙들기 위해 보안서, 자위대원들은 물론 온 동네가 떨쳐나섰습니다.》 《대복이, 서분이를 빨리 찾아야 합니다 》 강진건은 무거운 자책을 느끼며 잠자코 서있었다. 《세상을 다 뒤져서라도, 그 애들부터 찾아내야 합니다. 구원해야 합니다. 온 동네가 대복이, 서분이를 찾게 하십시오.》 장군님께서는 대복이, 서분이들이 실종된것은 분명 악질지주놈의 작간일것이라고 하면서 우선 지주집을 뒤지고 알아보라고 하시였다. 《강선생, 생각해보십시오. 수천년 세월을 두고 사람들이 공상으로만 생각해온 토지혁명을 우리 대에 실현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종살이를 해온 대복이와 서분이는 토지혁명이 가져다준 행복을 마음껏 향유하여야 할 새세대들입니다. 그런 아이들을 잃어버리고 토지혁명을 한들 그게 무슨 기쁨이겠습니까. 조순근농민이 땅을 받은들 웃음이 나오겠습니까. 땅이란 무엇입니까? 무엇때문에 땅이 귀중합니까?》 《장군님! 알겠습니다. 꼭 그 애들을 찾아내겠습니다.》 강진건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무연한 대지가 깊은 의미를 띠고 가슴에 확 안겨왔다. 나라를 잃고 헤매이던 그 시절에 이 땅의 흙 한줌이 왜 그리도 귀중히 생각되였던지 그제야 명백히 알게 되는것 같았다. 강진건은 얼마후 차를 만속으로 몰아 김창규들이 있는곳으로 갔다. 《위원장동지, 장군님께 보고를 올렸습니까?》 두눈에 피발이 선 보안서장이 먼저 성급하게 물었다. 《그렇소, 다들 어서 차에 오르시오.》 강진건은 앉은 자리에서 뒤문을 열어주었다. 차는 안개가 걷히기 시작하는 젖빛 장막을 뚫고 신당리로 질주하였다. 《동무들, 우리가 이번에 큰 실책을 했소. 실종된 대복이, 서분일 감감 잊어버리고있었거든… 이제부터 모든 력량을 그 애들을 찾는데 돌립시다. 보안서장동무, 곧 그렇게 지시하시오.》 《그럼 서강이놈은 어떻게 합니까? 우선 그놈을 붙들어야지요.》 보안서장이 벌떡 일어서다가 머리가 풍에 닿는바람에 도로 앉았다. 《그놈을 붙들어 군안의 농민들앞에서 회술레를 시켜야 합니다. 안그렇습니까?》 보안서장은 옆에 앉은 김창규를 돌아보았다. 그의 눈에서는 아직도 불이 펄펄 일고있었다. 《그애들부터 살려내야 하오.》 《위원장동지, 그놈을 붙잡는건 이 고장 전체 농민들의 소원입니다. 얼마나 못된짓을 한 놈입니까. 그런데 우리가 그런놈에게까지 어떤 양보를 한다면, 그건 계급성이 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안서장의 관자노리에서 퍼런 피줄이 펄떡거리였다. 그는 그 악착한 원쑤놈을 자기 손으로 붙잡아서 앙갚음을 하지 않으면 그 어떤 다른 일도 할수 없을것 같았다. 《서장동무! 원쑤를 치는것만 계급성이고 자기 계급을 구원하는건 계급성이 아니요? 원쑤를 치는것도 자기 계급을 지키기 위해서겠지? 서장동문 서강이놈을 미워할줄은 아는데 대복이, 서분이들을 사랑할줄은 왜 모르오? 서강이놈이야 제 졸개를 다 잃어버리고 죽은 목숨이나 같소. 어딜 가두 그런놈은 제명에 못죽소.》 강진건은 노여운 표정으로 보안서장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결연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내 정확히 말하겠소. 그애들을 구원하라는건 장군님의 의도요. 장군님께선 아마 이제부터 식사도 안하고 소식을 기다리실게요. 장군님께서는 서장동무의 누이동생이 실종됐다고 해도 바로 그렇게 걱정하실게요. 장군님은 바로 그런분이시오. 그걸 알아야 하오. 그분께선 사랑, 그것이 바루 혁명이라구 하셨소. 총을 쥐고있는 서장동문 특히 그 말씀을 명심해야 하오.》 보안서장은 몸을 꿈틀하며 무릎우에 얹어놓았던 주먹을 슬며시 풀어버렸다. 놀라서인지 차가 들추어서인지 앉은자리에서 자꾸 엉덩방아를 찧었다. 보안서장은 고개를 돌려 차창밖을 내다보았다. 차창으로는 아지랑이 가물거리는 들판이 날아지나갔다. 《우리는 인민을 사랑하고 인민을 위해 복무합시다. 그것이 장군님의 뜻이요.》 강진건의 조용한 목소리가 다시금 보안서장의 가슴을 울리였다.
4
일망무제한 옥토가 바라보이는 오봉산기슭의 나지막한 언덕에 봉분 하나가 새로 생겨났다. 마른 잔디를 한벌 덮은 봉분앞에는 《고 애토 리흥묵》이라고 쓴 비목이 꽂혀있는데 이름도 모를 산새 한마리가 고인의 령혼을 위로하는듯 곡진하게 우짖으며 산기슭을 날아옜다. 조순근은 봉분앞에서 찬이슬을 맞으며 하루밤을 지새웠다. 해가 떠오르자 산기슭을 하얗게 덮었던 안개가 가뭇없이 사라지고 옥토벌을 옆에 끼고 들어앉은 신당리마을이 한눈에 바라보이였다. 스무나무가 설레이는 마을길을 지나 저쪽에 흥묵이네 이영집도 까뭇하게 내다보이였다. 조순근은 어제저녁에 널을 묻고 흥묵이네 가족들과 함께 성묘를 한 다음에도 좀처럼 슬픔이 가라앉지 않아서 온밤 혼자 앉아있었다. 비목에 새긴 《애토》라는 별호는 땅을 사랑한 흥묵의 마음과 평시의 소원을 담아서 마을사람들이 지은것이였다. 지금 흥묵의 안해는 졸지에 남편을 잃고 상심하여 집안에 누워있고 아들 영길은 원쑤놈들을 복수하겠다고 보안서원들을 따라 읍으로 갔다. 어제밤에는 분명 읍에서 무장테로단과의 접전이 벌어졌을텐데 아직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조순근은 날이 밝아오면서부터 반동무장단과의 접전이 어떻게 됐는지 궁금해져서 마음을 진정하지 못했다. 그는 반동무장단과 큰 싸움을 벌리는 일에 지장이 될가봐 여직 지주집에 갇혀있는 서분이에 대한 말을 누구에게도 입밖에 내지 않고 참아오는터였다. 그래서 서분이가 지주집에 갇혀있다는것을 알고있는 사람은 죽은 흥묵이와 조순근당자밖에 없었다. 생각같아서는 왕벌의 대문짝을 패고 들어가서 흥묵의 복수도 하고 애들도 구원하고싶었지만 반동무장단과 전투를 벌리는 이 기간에 분별없이 제멋대로 움직이면 안되겠기에 어금이를 깨물며 참고있는것이다. 그러느라니 그는 가슴속이 다 타서 재먼지로 되는것 같았다. 어쩌면 악귀같은 지주집놈들이 서분이를 이미 죽여버렸을것 같은 끔찍한 생각이 자꾸 갈마들어 몸서리가 쳐지며 머리끝이 곤두섰다. 이틀째나 굶다싶이하며 지낸 조순근은 얼마후 요기도 하고 소식을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에 마을로 들어갔다. 마침 장춘하네 집앞에 이르렀을 때 총을 멘 영길이가 비지땀을 흘리며 마주 달려내려오고있었다. 그는 조순근을 보자 우뚝 멎어섰으나 숨이 턱에 닿아 미처 말을 꺼내지 못했다. 조순근은 그의 허둥거리고 다급해하는 모습에서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눈을 치떴다. 《어찌된 일이냐?》 《아저씨, 저 서…서강이놈이…》 《서강이놈이 어쨌어?…》 조순근은 괜히 가슴이 철렁해져서 영길의 팔소매를 붙들고 다우쳐 물었다. 《무장테로단놈들은 다 요정냈는데 글쎄 그 서강이놈이 빠져나갔어요. 그놈을 놓쳤어요.》 《뭐 그놈을 놓쳐?!…》 조순근은 자기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다른놈 열놈을 놓쳐도 그놈은 어떻게 하나 잡아서 온 재령벌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릉지처참을 해야 해.》 조순근은 주먹을 떨며 부르짖었다. 《그래서 몽땅 떨쳐나서 그놈을 수색하고있는데 방금 매부가 와서 자위대원들을 데리구 빨리 지주집으로 가라지 않아요.》 《판이 이렇게 됐는데 그놈이 제 죽자구 집으로 왔을가? 아무튼 서만호놈이래두 도망치지 못하게 해야지.》 조순근은 불이 이는 눈으로 지주집을 노려보았다. 영길은 곧 자위대원들이 대기하고있는 장춘하네 집으로 달려갔다. 조순근이도 길목에 있는 어느 한 집에 들어가 쇠스랑 한개를 집어들고나왔다. 쇠스랑자루를 휘두르며 서만호네 집을 향해 달려가는 조순근의 머리에선 대복이와 서분이에 대한 생각이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그애들이 정말 살아있을가? 죽었을가?) 흑호놈에게서 불길한 소식을 들은 때부터 무시로 겹쳐오던 그 불안과 초조감은 극도에 이르러 온몸의 피를 말리우는것 같았다. 제발 죽지 않고 살아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기원을 걸음마다 외우며 그는 내처 달리였다. 조순근이 솔숲을 지나 련못가를 돌아서 지주집 대문앞에 이르자 말승냥이같은 두마리의 개가 버티고 서서 으르렁거리였다. 지주집에서 벌써 무슨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솟을대문을 안으로 잠그고 문턱짬으로 고삐를 빼서 개를 대문밖에 내놓은것이다. 어느 놈이 대문안에서 고삐를 쥐고있는듯 사나운 두마리의 세빠드는 붉은 이몸과 날카로운 흰 이발을 드러내고 달려나오다가는 고삐에 끌려 뒤로 물러나군 하였다. 조순근은 대문앞으로 더 접근하지 못하고 쇠스랑으로 개의 대갈통을 노리며 서있는데 별안간 와아-하는 함성이 등뒤에서 터져올랐다. 쇠스랑, 괭이, 도끼, 낫 등속의 쟁기를 든 수많은 농민군중이 리자위대원들과 함께 지주집으로 몰려오고있었다. 《서만호를 때려엎자!》 농민들은 고함을 지르며 빗장을 지른 대문짝을 도끼와 괭이로 조겨대기 시작했다. 서만호집을 들이친다는 소식을 듣고 동네 부녀자들까지 밀려나왔다. 방안에 누워서 괴로운 심회를 하던 흥묵의 안해와 조순근의 안해도 머리에 수건을 동인채 허둥거리며 달려나왔다. 기실 서만호에 대한 이 마을녀인들의 원한은 하늘에 사무쳐있는것이다. 그네들의 아버지와 남편과 오빠 그리고 사랑하는 아들딸들이 이 아흔아홉간 대가에 눌리여 얼마나 많은 피눈물을 쏟으며 죽어갔던가. 바로 이때 강진건의 일행이 많은 군중들이 운집해있는 지주집대문앞으로 급하게 들이닥쳤다. 김창규가 사람들을 헤치고 들어가 대문앞 돌계단우에 올라서서 군중들을 향해 손을 쳐들었다. 《여러분, 조용하시오. 떠들지 말구 내 말을 들으시오. 여러분들을 여기로 모이게 한것은 단지 지주놈을 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는 이제부터 빨리 대복이, 서분이를 찾아야 합니다. 그애들을 구원해야 합니다.》 김창규는 무엇인가 뜨거운것이 목구멍으로 메여올라 기침을 깇었다. 군중들은 술렁거리였다. 《여러분, 우리 민족의 영명한 지도자이신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세상을 다 뒤져서라도 대복이, 서분이를 찾아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은 장군님의 그런 사랑을 받고사는 해방된 새 조선의 농민들입니다.》 그는 계속하여 장군님께서 온 나라의 정사를 맡아보는 그 바쁘신 가운데도 이 나라 방방곡곡을 뒤져서 서분이의 남동생 막동이를 찾아주신 이야기를 하였다. 뜻밖의 소식을 들은 농민군중은 고마움에 눈물을 지으면서 술렁거리였다. 군중들속에 가슴을 움켜쥐고 서있던 조순근은 북받쳐오르는 감격의 오열을 참아내지 못하고 어깨를 떨기 시작하였다. 《장군님!》 어디에선가 한 녀인이 땅바닥에 엎드리며 울음을 터뜨리였다. 대복이 어머니였다. 그는 땅바닥에 두손을 짚고 머리를 깊이 수그리며 전신을 떨었다. 《장군님… 장군님… 장군님!》 대복이 어머니는 그저 이렇게 뇌이며 장군님을 부를뿐이였다. 마침내 조순근이도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두손으로 흙을 허비면서 소리내여 울었다. 김창규도 연설을 하면서 군중과 어울려 같이 울었다. 김창규가 연설을 마치자 보안서장이 불쑥 나서서 허공에 주먹을 뻗치면서 구호를 부르듯 웨쳤다. 《어서 지주집을 차지하고 대복이, 서분이를 찾아냅시다.》 그러자 군중이 우야 소리치며 지주집 대문앞으로 밀려갔다. 시우쇠가 촘촘히 박힌 널대문은 빗장을 꽉 물려놔서 어깨로 밀고 발로 차도 끄떡하지 않았다. 그러자 농민들은 들고있던 쟁기로 대문을 까부시기 시작했다. 조순근은 쇠스랑으로 대문을 쾅쾅 내리찍었다. 두꺼운 참나무널은 마를대로 말라서 오히려 쇠스랑끝이 낚시처럼 구부러지였다. 청년들 10여명이 어깨를 들이대고 어이샤 어이샤 하며 힘을 모아서 밀었다. 돌고삐가 빠졌는지 수장목이 떨어졌는지 몇번 움씰거리던 문짝 하나가 떨어져나갔다. 사람들은 막혔던 물목이 터지듯 사태를 일구며 대문안으로 마구 밀려들어갔다. 밀려들어가다가 언뜻 보니 《호신병》들이 여기저기 서있다가 행랑채쪽으로 줄행랑을 놓았다. 놈들은 행랑채 뒤로 가서 모두 담장으로 올리붙었다. 이것을 본 한 자위대원이 그놈들을 잡으려고 부리나케 바깥대문으로 돌아나왔으나 그사이에 벌써 그놈들은 죄다 담장을 넘어 오봉산으로 올리기였다. 어떻게 빠르게 기는지 나무밑을 기여 가는 꿩을 련상시키였다. 자위대원이 공포를 쏘며 추격하자 몇놈이 손을 들고 주저앉았다. 한편 바깥채마당으로 몰려들어간 군중은 사랑문앞에 성을 쌓고 고함을 질렀다. 《서만호, 이놈 나오라! 서분이, 대복이를 내놓아라!》 분노한 군중들이 연방 소리를 쳤으나 사랑방문이 열리지 않았다. 《왕벌이 이놈 나서라! 문열고 나오너라!》 《네가 한당대 잘 처먹구 순편히 죽을줄 아느냐? 여기 신당리 농사군들이 다 왔다. 오늘 결판을 지어보자!》 자위대원들은 총을 겨누고 곤봉을 틀어쥐였다. 쇠스랑, 도끼, 낫, 걸이대들이 창검처럼 머리우로 올라갔다. 그래도 기척이 없자 조순근이 대돌을 디디며 사랑마루우로 성큼 올라섰다. 《이놈!》 그는 서만호의 사랑방문을 젖뜨리고 문안에 있는 미닫이도 열어제끼였다. 문틀이 깨여져나갈듯 와지끈 소리를 냈다. 그러나 서만호는 없었다. 문이 열려 굴속같이 된 금고가 나딩굴고 방안엔 무슨 문서책, 옷가지따위가 널렸다. 조순근은 방안으로 성큼 들어서며 월미의 방문을 활 열어제끼였다. 그 방도 란가가 되였다. 월미가 이고 도망을 치자고 꿍져놓았던듯싶은 무슨 옷보따리같은 큰 보퉁이 하나가 방안에 딩굴었다. 줄이 끊어져나간 가야금, 바스라진 경대, 세간이 온통 란장판으로 되였다. 《이놈이 어디루 가 뒈졌어?》 조순근은 월미의 방에서 뒤로 통하는 문을 발길로 걷어찼다. 거기에도 작은 방이 하나 있다. 《아니?!…》 어두컴컴한 방안에 곰같은것이 웅크리고앉아있었다. 방안이 훤해져서야 사람이 앉아있다는것이 알려졌다. 《네놈이 여기 있었구나. 이, 이놈아!》 조순근이 달려들어 서만호의 멱살을 들어일구었다. 문서보따리를 아이품듯 하고 앉아있던 서만호는 식은땀이 좔좔 흐르는 머리를 들고 반항없이 일어섰다. 어떻게 된 일인지 띠가 풀어져 겉바지가 흘러내렸다. 뒤따라 들어온 농민이 그가 부둥켜안고있는 보따리를 빼앗았다. 그러자 성난 두꺼비처럼 배가죽을 풀덕거리던 서만호는 발광을 하기 시작했다. 조순근을 뿌리치고 농민에게 달려들어 보따리를 빼앗았다. 한아름되는놈이 발광하며 돌아가자 한둘의 힘으로는 당해내기가 힘들었다. 《그건 못가져간다. 내 목숨은 빼앗아두 내 땅문서는 못다친다. 이 무도한놈들아!》 눈덕이 핑핑한 서만호가 보따리를 부둥켜안고 말승냥이 울부짖듯 째지게 소리를 질렀다. 《뭐 내 땅? 이 이리같은놈아, 그게 네 땅이라구? 네놈이 그 땅에다 땀 한방울 흘린적이 있어? 그리고 이 손모가지로 호미 한번 쥐고 놀려본적이 있게 제땅이야?》 조순근이 문서보따리를 쥔 서만호의 손목을 비틀며 부르짖었다. 그리고 대복이, 서분이를 내놓으라고 다그쳤다. 《난 모른다. 이건 안된다. 이건 내 땅문서다. 어어이구, 땅 빼앗긴다. 집안에 누구 없느냐-》 조순근이 죽은아이 싸놓은것 같은 보따리를 빼앗아내자 서만호는 벽에 태를 치며 넘어갔다. 이어 농민들이 좁은 방으로 달려들어와 서만호를 짓밟았다. 이마며 얼굴이며 배며 마구 짚신신은 발로 쾅쾅 짓밟고 들이차고 했다. 처음에는 몇번 그 발길질을 막겠다고 허우적거리던 서만호는 더 반항을 못하고 네활개를 벌리며 멱찔린 돼지처럼 늘어졌다. 시퍼렇게 질린 입으로는 게거품이 부글부글 괴여나왔다. 사실 서만호는 이날 새벽에 은밀히 집에 기여들어온 서강이와 함께 도망치려고 했다. 그래서 금고속의 돈이란 돈은 다 꺼내서 보에 싸고 딴 궤속에 있는 토지문서, 무슨 채용증 같은것도 꺼내서 또 한보퉁이 쌌다. 서강은 보퉁이 두개를 달구지에 내다싣고 아버지더러 타라고 하고는 안방에 들어가 제 에미를 업어내왔다. 《얘야, 서강아. 어디로 가는거냐?》 《어머니, 서울로 갑시다. 서울로 가야 살아요.》 《이 집은 어떻게 하구?》 《이 집에선 이젠 못살아요. 여기서 살다간 공산당한테 죽어요.》 《그럼 가자. 아들이 아들이구나.》 에미는 등에 업혀나오며 아들의 어깨팍을 차닥차닥 두드려주기도 했다. 달구지 있는데로 나오니 기미를 알아차린 월미가 벌써 제옷고리짝을 내다 달구지에 싣고있었다. 《아니, 요 에무나이, 너두 서울루 가? 내 령감 빼앗아가지구 그만치 살았으면 됐지 또 서울로 따라가 살겠다구?》 서강이 자기 에미를 달구지우에 내려놓자 에미는 령감곁에 바싹 다가앉으며 월미의 고리짝을 훌쩍 밀어던졌다. 밑에 서있는 서강이가 또 땅바닥에 떨어진 고리짝을 뒤발질해서 차던졌다. 달구지곁에 가서 고리짝을 올려놓고 자기도 달구지에 타려고 어물거리던 월미는 굴러난 고리짝에 가서 몸을 쓰러뜨리며 애고 소리를 질렀다. 《여보 령감, 나를 내버리고 가요? 그렇게 정붙이고 살다가 나를 헌신짝같이 내버리고 가요? 애고 원통해라… 날 살려요. 령감!》 월미는 고리짝을 두드리며 서만호에게 애원하였다. 서만호는 땅바닥에 치마폭을 깔고 통곡하는 젊은 첩을 가엾이 내려다보았다. 그의 흰눈섭밑 붉은 눈에서 굵은 물방울이 괴여오르더니 유들유들한 두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옆에 대기하고 서있던 마름도 쿨쩍거리면서 달구지를 몰았다. 뒤에서 월미의 통곡소리가 더 처량하게 울려왔다. 《여보, 령감!-》 《얘 서강아, 저걸 아주 없애버리지 못하구 가겠니? 궁상스럽구나.》 에미가 서강을 보고 눈짓을 했다. 그러지 않아도 밉게 보아온 더러운년인데 떠나는 순간에 발악을 하는것이 듣기가 역했다. 서강이 권총을 뽑아들고 돌아섰다. 《이놈아, 너 어쩌자구 그러니?》 서만호가 달구지우에서 발을 굴렀다. 서강은 애비의 소리는 들은체도 않고 월미에게로 다가갔다. 《야, 이놈! 그만두지 못하겠니?》 서만호가 달구지우에서 기여내리며 고함을 질렀다. 서강은 애비가 그러자 권총을 도로 집어넣으며 침을 퉤 받고 돌아섰다. 《더러운년!》 《너희들이나 가거라. 난 못가겠다.》 서만호는 달구지우에서 보퉁이들을 끌어내려 안았다. 그는 벌써 제정신이 아니였다. 보퉁이들을 안은 그의 눈에 뿌연 안개가 끼는듯 하더니 흰자위가 유난스레 드러났다. 달구지에서 물러나는 그의 걸음이 비틀비틀했다. 《아버지, 왜 이래요? 여기 있단 다 죽어요!》 《죽어두 좋다. 집과 땅을 그대루 두군 암만해두 못가겠다. 너나 네 에밀 데리구 가거라… 아, 선산에 천변재화가 왔는데 내 어딜간단말이냐.》 서만호는 고개를 들고 솔숲너머 산언덕을 바라보았다. 서분이가 정화수를 길러다니던 그 언덕길 너머에 아흔아홉간대가의 길복을 대대손손 지켜준 선산이 있는것이다. 《저 선산에 뻗쳤다는 령기는 어찌되고 집안이 이 모양 되느냐!》 서만호는 사랑마루로 달려올라가 기둥에 머리를 지끈 들이받았다. 두어번 기둥을 들이받은 서만호는 뒤골을 메치며 마루에 기절해 넘어졌다. 그의 손에서 보퉁이 두개가 빠져 대돌밑으로 디그르르 굴러내렸다. 서강이 마루우에 올라가 기절해넘어진 애비를 흔들며 정신차리라고 소리치는데 달구지우에서 또 째지는것 같은 새된 고함이 일어났다. 《저년이 저걸 가지구 뛴다!》 어느새 월미가 대돌밑으로 굴러내린 보퉁이 하나를 끌어안고 련못가쪽으로 내뛰였다. 돈보따리였다. 서강의 에미는 그것을 붙잡으라고 소리를 치는것이였다. 서강은 제 에미의 소리는 들은체도 않고 기절해넘어진 애비를 들어일구려고 했다. 《아, 아이구- 나 죽는다.》 달구지우에 있던 서강의 에미가 두부물자루같은 덩저리를 땅에 메치며 비명을 올렸다. 돈보따리 안고 뛰는년을 잡겠다고 온전치 못한 몸뚱이를 놀리다가 굴러떨어진것이다. 《아니, 그깐 돈이 뭐게 그러우. 죽느냐 사느냐 하는판에.》 서강은 혀를 찔 갈기며 에미쪽을 흘겨보았다. 그러고나서 애비를 둘쳐업고 퇴마루를 간신히 기여내렸다. 물독같은 비게덩어리를 업고보니 허리펴고 일어설 기운도 없다. 낑낑 갑자르며 한두걸음 내짚던 그는 그만 대돌을 헛짚고 앞으로 꼬꾸라졌다. 애비는 밑둥잘리운 통나무같이 나동그라지고 서강은 대번에 코밀이를 해서 코끝에 선지피가 빨갛게 내배였다. 《제길, 잘은 돼간다. 이러다가 언제 빠지는가?》 서강은 달구지채를 메고서서 새김질을 하는 둥글소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그러다가 문득 자기가 어리석은짓을 하고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겐 못간다. 운신도 제대로 못하는 저 늙은것들을 쳐싣고 여드레팔십리걸음을 하는 짐승을 끌고가다가는 다 녹는다. 보안서원들이 오죽이나 잘 따라오겠는가.) 그는 동그라진채 기신없는 애비와 달구지밑에 쓰러져 허우적거리는 에미쪽을 멀거니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였다. 《얘, 서강아 뭘하구있냐? 날 어서 부축해다구. 저 쌍 월미년 잡아야겠다.》 에미는 헐떡거리며 간신히 비틀어짜는 소리를 내질렀다. (하는수 없다. 나라도 살아야 한다. 다 몰살되면 누가 이 원쑤를 갚아줄테냐. 나라도 살아서 가문의 원한을 기어코 풀어야 한다. 젠장!) 서강은 강심을 먹고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에미곁을 씽 스쳐 달려나갔다. 《얘 서강아, 어딜 가?》 에미가 눈이 퉁사발같이 되여 덴겁한 소리를 했다. 《어머니, 할수 없어요.》 《할수 없다니, 뭘 할수 없단말이냐?》 에미는 벌써 뭔가 눈치를 챈 모양인지 겁먹은 소리를 했다. 《아버지를 끌구는 못가요. 다 죽어요 》 《아버지? 그럼 얘야, 나만이라두 데리고 가야 한다. 나만이라도!》 《어머니, 며칠만 기다려줘요. 내 나갔다 다시 올테니.》 《얘 이놈아, 그땐 이 에민 이 세상에 없는 몸이 돼!》 《걱정마세요. 내 꼭 와요.》 《에미애비 다 버리구 혼자 살겠단말이구나. 이, 이 불효막심…》 서강은 짐승같이 울부짖는 에미의 욕지거리를 등뒤로 들으면서 피눈물을 머금고 오봉산비탈로 내달렸다.… 군중이 밀려들어와 집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이젠 없어진 서분이를 찾아내야 했다. 그 애가 어느 방에 갇혀 아주 죽은것만 같아 사람들은 눈에 달이 올라서 뛰였다. 사람들은 행랑채고 어디고 방이란 방은 다 문을 열어보았다. 그들은 중대문을 넘어가 안채로 들어갔다. 조순근은 서분이를 영영 찾아내지 못할것 같은 무서운 생각에 허둥거리며 행랑채의 이 문 저 문을 열어보았다. 어느새 대복이 어머니도 따라와서 행랑채의 방들을 서캐훑듯이 샅샅이 뒤져나갔다. 그러던 그는 퇴마루에 맥을 놓고 주저앉아 주먹으로 무릎을 치며 곡성을 터뜨렸다. 《아이구, 너희들이 죽은가보구나! 대복아! 서분아!》 안해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조순근은 마지막 행랑채 문고리를 쥐였다. 그 방에마저 아이들이 없으면 모든것이 끝장이라고 생각되였다. 문득 조순근의 눈앞에 서강이놈이 서분이의 시체를 끌어다가 련못에 처넣는 무서운 환각이 떠올랐다. 그놈이 결국 그런짓을 하고 뒤가 저리여서 몰래 제혼자 도망친것이 아닌가? 조순근은 마지막 행랑채문을 쥐고 오래도록 서있었다. 어쩐지 그 마지막문을 선뜻 열수가 없었다. 조순근은 눈을 감고 서분이가 있기를 하늘에 빌면서 천천히 문고리를 잡아당겼다. 언뜻 눈앞에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는것 같았다. 그는 방안으로 뛰여들어와 사방을 둘러보았다. 부엌바닥에 녀인들 넷이 어깨들을 붙이고 몽켜앉아있었다. 그들은 지주집 부엌데기들이였다. 이 순박한 녀인들은 서만호를 공양한 죄로 자기들도 벌을 받아야 되는것으로 생각하고 공포에 떨고있었다. 《서분이가 분명 죽었구나!》 조순근은 절망에 차서 중얼거리며 녀인들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흐트러진 머리칼과 흐리멍텅해진 눈을 보고 녀인들은 더욱 겁에 질려 구석쪽으로 몰려가서 사시나무처럼 몸을 떨었다. 이때 영길이 달려와서 서분이 있는데를 알아냈다고 하였다. 《서분일 고간에 가두었대요.》 《뭐라구?!》 조순근은 용수철에서 튀여나듯 후닥닥 뛰쳐일어났다. 《아니 그걸 어떻게 알아냈느냐?》 조순근은 영길을 따라 달려가며 물었다. 《성배놈을 붙잡았어요.》 조순근이 안채마당을 지나자 벌써 숱한 사람들이 서분이를 가둔 《감방》앞에 모여있었다. 누구인가 쇠스랑뒤등으로 고간자물쇠를 내리조기고있었다. 얼마후에야 자물쇠는 손가락같이 굵은 대못들을 물고 편철채로 절라당 떨어졌다. 조순근은 사람들을 헤치고 문안으로 들어섰다. 찬바람이 씽 불어오면서 역한 피비린내가 확 풍기였다. 그는 어둑시그레한 고간 한구석에서 시체같은것을 언뜻 띠여보고 얼어붙은 사람처럼 멍하니 서있었다. 찢어진 몽당치마를 걸친 서분이가 선지피 엉켜붙은 머리태를 풀어헤치고 눅눅한 흙바닥에 엎어져있었다. 이때 숱한 농군들과 함께 묻어들어온 대복이 어머니가 어푸러지며 서분이를 그러안았다. 《서분아!… 얘 서분아!》 대복이 어머니는 땅바닥에 퍼더버리고앉아 서분이를 무릎에 안았으나 처녀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눈을 감은채 백랍같이 핼쑥한 얼굴을 젖히고 대답이 없었다. 시꺼멓게 피가 죽어 박등같이 부어오른 한쪽 팔이 녀인의 무릎옆에서 건등거렸다. 《서분아, 이게 어찌된 일이냐… 팔이 부러지고 온통 피멍이 들구… 어느놈이 이 지경으로 만들었단말이냐? 서분아, 서분아, 어서 눈을 떠라.》 대복이 어머니는 넉두리를 하며 서분의 얼굴에 볼을 비비였다. 조순근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서분이앞에 다가왔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껄껄한 손바닥으로 처녀의 얼굴을 쓸어만지였다. 《서분아! 천하 용해빠지구 어질디어진 너에게 무슨 죄가 있다구… 어서 눈을 뜨거라. 네가 눈을 떠야 막동이두 보구…》 조순근은 서분이의 눈언저리를 어루만지였다. 설음에 겨워 울다가 굳어졌는지 말라터진 처녀의 입술은 샐그러졌고 역겨운 이 세상을 보지 않으려는듯 살눈섭이 무겁게 내리덮인채 까딱없었다. 《서분아, 어서 눈을 뜨거라! 네가 죽으문 안된다.》 조순근은 안해의 무릎에 안긴 서분이를 안타까이 잡아흔들었다. 한쪽에서는 녀인들이 서분이의 손과 발을 주무르고 미간을 비비였다. 얼어붙은것 같던 서분이의 속눈섭이 차츰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했다. 코끝에서는 따뜻한 온기가 흘러나왔다. 《됐어요. 애가 죽진 않았어요. 손끝에두 온기가 돌구 맥이 뛔요.》 서분이의 몸을 주물고있던 어느 한 녀인이 생명의 불꽃을 발견하고 환성을 지르듯이 말하였다. 그러자 숱한 사람들의 입에서 안도의 더운 숨이 확 뿜어나왔다. 《여보, 그 애를 방으로 들여가자우.》 조순근은 서분이를 안아서 주방칸에 들여다눕혔다. 녀인들이 대문쪽에 있는 부엌에 불을 지펴 구들을 덥히였다. 보안서 추격조들을 따라 오봉산쪽으로 갔던 강진건이 지주집으로 돌아온것은 바로 이때였다. 강진건이 웬일인지 현훈증이 일어나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손수건을 꺼내며 처녀의 머리맡으로 다가앉았다. 《나쁜놈들!》 그는 손수건을 쥔 손을 부들부들 떨면서 서분이의 머리칼과 얼굴에 엉켜붙은 피딱지들을 훔쳐내였다. 한쪽에서는 녀인들이 더운물을 들여다가 서분이의 발과 손을 씻어주었다. 얼마후에 서분이는 혼수상태에서 깨여났다. 그는 자기의 얼굴을 어루만지는 늙은이를 어정쩡히 올려다보다가 그 누구를 찾는듯 방안을 둘러보았다. 《서분아, 나 여기 있다.》 강진건의 뒤에 앉아있던 조순근이 앞으로 나앉으며 퉁퉁 부어오른 서분이의 손을 잡았다. 《대복이 아버지-》 《오냐 서분아, 지금 네 얼굴을 닦아주는분이 누구신줄 알겠느냐?》 서분이는 다시 강진건을 한참 올려다보더니 두눈귀로 주르르 눈물을 굴리였다. 《장군님 오셨을 때 같이 오셨던…》 《네가 나를 알아보았구나… 장군님께서 널 살려내라고 해서 내가 이렇게 왔다. 서분아!》 강진건은 눈시울이 붉어져 머리를 끄덕였다. 《김일성장군님께서요?》 서분이는 갑자기 놀라면서 눈이 커지더니 격정이 북받쳐올라서인지 울어버릴듯이 입귀를 실그러뜨리며 강진건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 손에서 열기가 느껴지였다. 《그렇단다. 서분아, 네가 어떻게 살아났는가를 한평생 잊어서는 안돼. 장군님께서 널 얼마나…》 강진건은 뜨거운것이 메여올라 눈을 꾹 감았다. 한동안 그의 목에서 울대뼈가 세차게 오르내리였다. 그는 이 어린 처녀앞에서 오열을 터뜨릴것만 같아 지게문을 열고 밖으로 얼굴을 돌리였다. 하늘에는 벌써 별들이 총총하였다. 넓고도 높은 밤하늘에 가득찬 별들도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듯 유난히도 물기를 띠고 반짝이였다. 이때 김창규가 나타나서 방금 사과움에서 대복을 찾아냈다고 하였다. 그 소리에 조순근은 용수철에서 튕겨나듯 벌떡 일어났다. 《사랑채에 눕혔어요. 그애도 상처가 심합니다.》 《됐소. 됐소. 이젠 시름을 놓게 됐소.… 그러니 그놈은 대복이두 잡아놓구 모르는척했구만. 악독한놈!… 자, 이젠 애들을 병원으로 싣고갑시다.》 강진건은 무릎을 짚고 일어나서 같이 따라온 한 보안서원에게 차를 불러오게 하였다. 얼마후에 적재함에 풍을 친 풀색자동차가 대문앞에 도착하였다. 보안서원들이 대복이와 서분이를 이불채로 감싸들어서 짚을 깐 짐칸에 눕히였다. 김창규, 보안서장들이 보안서원들과 함께 짐칸에 올라서 나란히 누운 대복이와 서분이의 머리맡에 앉았다. 자동차가 전조등을 켜며 경적을 울리자 강진건이 운전칸문앞에 서서 마을사람들과 작별인사를 하였다. 《여러분들, 안녕히 계시오. 이제는 이 신당리에 지주가 없어졌습니다. 래일부터 이 아흔아홉간 집을 농조와 농촌위원회의 사무실로 쓰시오. 빨리 토지를 분여하고 땅에 씨를 묻으시오!》 《고맙소이다!》 마치 약속이나 한듯 늙은 농군들이 소리를 모아 답례하였다. 자동차는 다시금 경적을 울리고 천천히 조심스럽게 바퀴자국을 떼였다. 조순근은 담벽에 손을 짚고 자동차불빛이 곧추 내비치는 마을길을 내다보았다. 수천년세월 농군들의 피와 땀과 눈물로 얼룩진 들판길, 수난의 그 땅에 희망찬 력사의 새 길을 다지면서 자동차는 멀어져갔다. 하늘도 땅도 어둠에 잠겨있었으나 조순근은 모든것이 밝고 눈부신 불빛으로 바라보이였다.
마감이야기
훈훈한 봄바람은 정원의 애어린 나무가지들을 가벼이 어루쓸며 쉼없이 어리광을 부린다. 바늘대같이 올려민 풀대들은 따스한 해볕에 노그라지듯 야들야들한 잎들을 한들대고있다. 겨우내 꽛꽛이 얼어붙었던 땅은 봄물에 부풀어 괭이날로 뒤집을 때마다 입김같은 가느다란것을 피워올린다. 턱아래에 들가말가한 정원의 사과나무는 금시라도 터질것 같은 부푼 순들을 가지마다 촘촘히 내밀고 흘러가는 바람과 따스한 해볕속에 취한듯 서있다. 합숙쪽으로 미끄러지듯 흘러들어간 두줄기 은빛전기줄에는 언제 날아왔는지 청제비들이 녹두알같은 눈알을 굴리며 지지배배를 열심히 외우고있었다. 웃옷을 벗어 사과나무가지에 걸어놓은채 흙을 긁어올려 북을 돋구던 장군님께서는 허리를 펴며 천천히 이마의 땀을 훔치시였다. 흙내, 풀내가 바람을 타고 날아와 페부에 스며든다. 들이킬수록 가슴이 시원히 열린다. 그이께서는 환한 미소를 지으시였다. 얼마나 좋은 날인가. 만시름이 일조에 녹아내리는것만 같다. 어제저녁 농림국장은 토지개혁의 완전결속을 집계한 통계자료를 한아름 안고와서 밤새 흥분에 들떠 진정을 못하다가 돌아갔다. 그런데 벌써 오늘아침에는 서기장이 춘기파종준비에 대한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결정서초안을 잡아가지고와서 의견을 물었다. 그는 우리 농민들이 수난과 질곡의 땅에 자기의 첫보습을 들이박는 그 력사적인 문건을 들고와서도 그답게 보통있는 례사로운 일처럼 조용히 종곡, 비료, 축력, 농기구 같은것을 보장하기 위한 실무적인 의논만 했다. 이 봄날의 위대한 전변은 이렇듯 사람들에게 제나름의 기쁨과 흥분을 안겨주고있었다. 수천년 내려오던 봉건적인 잔악한 소작제를 철페하는 토지개혁은 스무날동안에 회오리바람같은 속력으로 완전승리를 이룩하였다. 전국적으로 70여만호의 농가가 토지를 분여받았다. 소작주던 토지면적의 99%가 몰수되여 농민들의 손으로 넘어갔다. 이런속에서 우리 인민의 새 조국 건설의 열망을 담은 20개조정강이 발표되여 남북삼천리 온 강토가 물끓듯 솟구치고 뒤번져지며 끓어오르고있다. 지금 북조선의 수백만농민은 얼씨구나 춤을 추며 봄의 대지로 달려나가고있다. 모두다 자기의 땅이 된 농토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있을것이다. 장군님께서는 며칠전 어느날 대동군에 나갔다가 돌아오는 밤길에 밭가운데 비석처럼 앉아있던 농민을 만나본 생각이 나시였다. 그날 승용차의 불빛이 벌을 엇쓸며 달리는데 밭가운데 웬사람이 난데없이 허리를 펴고 앉아있는 모습이 비껴들었다. 앉아있는곳이 밭머리가 아니고 수수그루가 삐죽삐죽한 밭고랑인데 거기에 벼짚방석을 깔고 올방자를 괴여올린채 앉아있었다. 장군님께서는 그에게 인사를 하며 여기서 무얼하는가고 물으시였다. 농민은 머밋머밋하다가 《저, 저》소리만 내며 말을 떼지 못했다. 얼마후에야 그는 토지분여시에 이 밭을 분여받았노라고 했다. 《그런데 왜 밭고랑에 나와앉아있습니까?》 《글쎄 이 밭이 내밭으로 넘어오긴 했다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꿈같기만 하고 거짓말같기만 해서 땅을 눈에 익히기도 할겸 나왔습니다.》 《이젠 들어가 편히 주무십시오. 거짓말도 꿈도 아니고 땅을 들어갈놈도 없으니 밤마다 편안히 쉬며 밭갈이준비나 하십시오.》 장군님께서는 그에게 담배를 권하시였다. 《간부어른, 밭갈이를 해도 일없겠지요?》 《자기 땅인데 제가 밭갈일 하지 누가 하겠습니까?》 그 말에 농민은 고개를 숙이고 울었다. 담배대 쥔 우둘투둘한 손이 자꾸 눈가로 갔다. 그날밤 일이 지금도 눈에 삼삼하시였다. 울고있던 그 농민의 모습이 지워지지 않는다. 그런 광경이 여기서도 보이고 저기서도 보인다. 정말 온 나라 농민들이 다 그렇게 자기가 받아안은 땅을 자기품에 끌어안고 이게 정말 꿈이 아닌가 하는 생각들을 할지도 모른다. 피와 눈물의 력사가 지나간 대지로는 봄바람이 흘러가고 부푼 땅에서는 어디서나 땅김이 아지랑이처럼 서려오르리라. 시체처럼 싸늘하게 식어있던 땅에서 문득 이 땅, 이 나라를 찾자고 피를 뿌린 사람들의 넋이 더운 입김을 불며 떠올라서 곳곳에 만첩으로 붉은 꽃을 피워올릴듯싶었다. 이제 논밭마다 지경마다 패말이 지심깊이에 박히면 이 나라의 땅에 더는 눈물이 고이지 않을것이다. 애오라지 즐거운 로동의 구슬땀을 받아 풍요한 이삭을 주고 행복만을 주게 될 땅, 아, 땅은 이렇게 인간을 즐겁고 행복하게 할수도 있었단말인가. 장군님께서는 천지개벽이 일어난 땅의 황홀한 꿈과 미래를 그려보며 괭이질을 멈추고 풋솜같은 흰구름이 둥둥 떠가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시였다. 늦은 철새들이 창공높이 아아히 떠서 북으로 깃을 치고있다. 한일자로 늘어선 기러기떼는 때늦은 느낌이라도 있는 모양 분주히 헤염쳐가며 시야에서 멀어져간다. 간고한 봄이기도 하였다. 새 생활, 새 인간, 새 력사가 태여나며 장쾌한 서곡을 울린 봄이였다. 땅만 천지개벽을 일으킨것이 아니였다. 땅의 주인으로 될 새 인간들이 자라나 자기자리에 굳건히 들어선 인간전변의 봄이였다. 력사밖에 밀려나 암담한 세계를 저주하며 울던 눈물의 후예들- 조순근이, 대복이, 서분이 그리고 무지와 몽매의 보이지 않는 쇠사슬에 얽혀 인간 아닌 인간으로 살아오던 베감투쟁이의 달성서씨들, 지금은 농촌위원으로까지 되였다는 나깨미국수집 서달호, 언제인가 투박한 손가락으로 한일자를 가로건너긋던 갈촌의 머슴농민, 바로 그들이 지금 새 인간으로 갱생하여 자기땅을 되찾고 그 땅에다 새 생활의 패말을 박는것이다. 새 인간으로 갱생한것이 어찌 농민들뿐이랴. 지주에게 예수의 자비를 베풀고 그들에게 선심을 호소하여 토지개혁을 할수 있다고 생각하던 송신일- 그는 이 땅의 전변을 거쳐 진정한 인도주의와 참인간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였고 그래서 진실로 정의로운 인생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고있다. 화승대를 메고 흘러온 과거를 탄식하며 이 나라 농민들에게 환멸을 가졌던 강진건- 그는 지금 누구보다도 농민들을 믿고 사랑하는 농민운동의 지휘관으로 자라나 자기 몫을 해내고있다. 재령벌의 김창규는 또 얼마나 믿음직하고 기둥같이 굳건한 우리 당의 일군으로 성장했는가. 토스레옷을 입고 류랑걸식하던 소년시절의 로동청년은 놀랄만치 강한 의지로 자기 고향을 꾸려가고있다. 이렇게 태여난 새 인간들이 이 나라의 어디에 가도 우후죽순처럼 일어나 자기자리에 들어서고있다. 참으로 토지혁명을 거쳐 이 민족이 몰라보게 키를 훌쩍 솟구었다. 이것이야말로 몰수한 100만정보의 토지보다도 더 큰 재부이고 자랑이고 힘이 아니겠는가. 후세의 사람들은 토지개혁의 력사를 쓰면서 100만정보의 지주땅을 몰수하여 땅없는 농민에게 무상분여하였다는 사실을 똑똑히 기록할것이다. 그러나 이 위대한 땅의 전변과 더불어 일어난 민족의 전변, 인간의 전변에 대해서는 몇페지의 글로 적어내지 못할것이다. 조선의 토지혁명은 바로 그것, 세기를 두고 력사가 바라마지 않은 인간혁명을 가져온것으로 하여 인류앞에 공헌한것이 아니겠는가. 장군님께서는 벅차오르는 가슴을 지그시 누르며 스적스적 괭이질을 계속하시였다. 이 나라의 모든 땅을 그렇게 가꾸듯 흙을 제껴선 괭이등으로 부스러뜨리고 긁어올리시였다. 검붉은 흙은 사과나무밑둥에 쌓이고 또 쌓이여 나무그루를 감싸안고 메같이 두드러져올랐다. 이 나라에 찾아든 새봄의 기쁨을 날새들도 알고있는지 흑곤색깃을 넓게 편 제비들이 푸른 하늘로 솟구치고 누런 대지로 내리꼰지며 끊임없이 사과나무주변을 날아옜다. 제비들은 아지랑이같은 연무속에서 미소를 그리며 김을 문문 날리는 재령벌의 드넓은 대지우로도 날고있었다. 얼어붙었던 재령강은 개안이 그득해서 출렁출렁 흘러간다. 주먹처럼 뻗쳐오른 벼락바위에 부딪칠 때마다 해빛에 수천수만의 은구슬이 부서져내린다. 《쭁 쪼르르, 쭁 쪼르르.》 흰배에 청저고리를 입은 물촉새, 할아버지의 갖저고리를 입고 나온것 같은 할미새들이 개버들사이를 오고가며 봄의 송가를 읊조린다. 《이랴!》 황소고삐를 잡은 조순근이 대복이와 팔에 부목을 댄 서분이 그리고 얼마전에 찾아온 막동이를 저만치 앞세우고 재령강방축길을 걷고있었다. 이젠 한집안식구가 된 서분이와 막동이를 바라보며 그는 흔연한 미소를 짓고있었다. 바구니에 점심밥그릇을 담아이고 조순근의 옆에서 걷는 안해도 대지우에서 비단무늬같이 가물거리는 아지랑이를 바라보며 기쁨에 눈시울을 적신다. 오늘은 밭에 패말도 박고 그 밭을 다 갈아엎을 때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을 차비들이였다. 재령강을 건너 장사래밭에 이르자 조순근은 소고삐를 놓고 밭이랑들을 세여나갔다. 고랑을 밟으며 스무고랑을 세고 또 스물다섯고랑을 세였다. 그 마흔다섯고랑이 다 조순근의 차지가 되였다. 그리고 그만큼 더 고랑을 밟아나갔다. 그것은 서분이, 대복이, 막동이 몫으로 더 받은것이다. 그옆으로 정기찬이네와 정기수네가 삼천오백평씩 나누어가졌다. 새벽이슬이 내렸는지 밭고랑들은 축축히 젖었다. 눈물이 배여있는것 같기도 하다. 머나먼 저승에서 날아온 두 농사군들이 기쁨의 눈물로 밭이랑들을 적시며 인젠 옳은 재판이 내렸다고 수군수군 이야기라도 나누는것 같았다. 조순근은 팔굽을 들어 눈물을 뿍 씻어던지였다. 《얘, 대복아, 패말을 여기다 박자.》 조순근은 조끼를 벗어 안해에게 던져주며 소리쳤다. 대복이가 제 키만큼 높은 패말을 안고와서 밭최뚝에 곧추 일으켜세웠다. 조순근은 서분이 쥐고서있는 떡메를 받아쥐였다. 《잘 붙들어라, 패말이 놀지 않게.》 조순근은 이러며 뒤로 한발 물러나 패말에 쓴 글자를 다시한번 들여다보았다. 네모지게 깎은 면에 《조순근 밭 3000평》이라고 내려쓴 참먹글이 윤이 번쩍인다. 조순근은 떡메를 거머쥐고 매질을 시작했다. 패말끝이 땅에 박히자 떡메를 머리우에 쳐들었다가 내려치기 시작했다. 한 두어개 치고났는데 벌써 헉헉 하며 메질소리가 약해졌다. 《아버지, 왜 그래요?》 《잘 보이지 않는구나.》 《그럼 제가 박을가요?》 대복이 패말중둥을 쥐고앉아 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아서라. 오늘은 내가 박아야 한다.》 조순근은 다시 메를 쳐들어 떵떵 내리쳤다. 그래도 메바람이 약하다. 둘에 하나는 빗때리며 중심을 잃고 몸을 비틀거렸다. 허공에 떴던 떡메가 기운없이 패말꼭디에 와서 퍽 하고 군드러졌다. 《아버지 웬일이예요?》 《…》 조순근은 눈을 감고 대답을 안했다. 다시 떡메를 머리우로 쳐들었는데 눈을 감은채로 내려치는바람에 빗때린 떡메가 그의 손에서 빠져나갔다. 대복이는 얼른 잡았던 패말을 놓고 아버지를 붙잡았다. 《아버지, 왜 이래요? 정기찬아저씨랑 패말을 다 박았는데 이러구있으면 어떻게 해요?》 《우리두 박자꾸나.》 조순근은 간신히 떡메를 그러당기며 중얼거렸다. 벌써 맞은켠 밭머리에 패말을 박은 정기찬이네는 끌고나온 소를 밭에 들여세우고 멍에를 메우고있었다. 그것을 보자 조순근의 눈앞으로 또다시 허우적거리며 재령강 물속으로 빠져들어가는 아버지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서슬을 마시고 떠나간 김창규의 부모들, 장구배미를 받는다면서 논두렁을 베고자다가 흥타령을 부르며 올라오던 그 밤의 흥묵이…어찌된 일인지 땅과 더불어 떠나간 사람들의 얼굴이 연줄연줄 떠오르면서 가슴을 허비였다. 《이제 농민들이 잘살수 있는 좋은 세상이 올걸세.》 문득 어디선가 저 만경대 할아버님의 다정한 음성이 들려오는듯 했다. 참으로 할아버님의 예언은 옳았다. 그리운 할아버님을 생각하며 평양쪽 하늘을 바라보느라니 장군님 저택의 자그마한 닭장도 보이고 쇠독이 거밋거밋 내배인 호미 두가락을 받아안던 일이 꿈같이 떠올랐다. 재령강가에 오셔서 자기의 팔을 끼시고 나무다리로 힘있게 건너가시던 장군님, 우리 대복이와 서분이를 살려주고 이렇게 넓은 땅을 주신 장군님, 아, 백골이 진토된들 이 은혜를 어찌 잊을소냐. 《으흐흐…》 조순근은 밭에 엎치듯 풀썩 주저앉았다. (이게 이젠 내 땅이란말이구나. 내 땅!) 조순근은 눈물배이는 흙을 볼에 갖다대였다. 흙이 부스러져 목깃을 타고 선뜩선뜩 가슴으로 흘러내렸다. 검붉은 얼굴과 목에 눈물젖은 흙이 진흙처럼 진득진득 게발렸다. 《아버니임!ㅡ》 조순근은 또 황소울음을 터쳤다. 가슴에 몽켰던 용암이 기둥처럼 올려뻗치며 목구멍이 꺽 막히였다. 불찌같이 뜨겁게 단것이 볼을 지지며 두르르 굴러떨어졌다. 《아버지, 울긴 왜 자꾸 울어요. 이 기쁜 날에…》 대복이는 갈린 목소리로 툭 내뱉었다. 《오냐, 안우마 안우마. 어서 말뚝을 박자.》 대복이는 손바닥에 침을 텍 받고 떡메를 거머쥐였다. 《떵, 떵》 메질소리는 아까보다 여무졌다. 둔중한 음향은 느물느물 여운을 흘리면서 온 들에 울려간다. 《할아버지도 이, 이 소릴 들으실거예요.》 대복이는 힉힉거리며 말했다. 《암, 들으시구말구, 깊이 박아라. 어느놈이 와서도 뽑아던지지 못하게.》 조순근은 엉금엉금 기여가 안잡아도 될 패말을 잡아주며 소리쳤다. 조순근의 안해도 그 모습을 보구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어깨를 들먹였다. 서분이는 대복이 어머니의 어깨에 눈물젖은 볼을 대고 다정하게 속삭이였다. 《어머님 어머님, 우리 아버지, 어머니도 지금 여기 와있는것 같아요. 그러지 않고야 여긴 바람도 없는데 왜 저렇게 풀대들이 한들한들 하겠세요.》 력사가 뒤바뀌는 대지로는 따사로운 바람이 숲을 핥으며 불어왔다. 땅에는 패말이 박히고있다. 온 나라 방방곡곡 눈물의 후손들이 조순근이네처럼 원한을 가시며 패말을 박고있다. 대성통곡을 터뜨리며 떠나간 원한의 선대가 머나먼 저승에 가서라도 들으라고 억세게 매질을 하고있다. 《아버지, 어서 이 호미루 북을 주세요. 패말이 넘어가지 않게.》 대복은 아버지의 손에 호미자루를 쥐여주고 자기도 호미를 들어 패말옆의 흙을 긁어모으기 시작했다. 한낮의 붉은 해빛에 쇠날이 번뜩이는 호미, 장군님께서 주신 그 호미로 전야의 곡식들에 북을 돋구듯 두 부자는 자기의 땅, 자기의 패말에 북을 주고있는것이다. 스적스적 부드러운 흙을 어루만지며 대대로 흘러온 피눈물의 자욱을 긁어던지는 호미, 이 땅에 행운을 가져다준 그 호미로 북을 돋군 농민의 지경패말은 이제 세세년년 더 크게 자라고 억세게 뿌리박혀서 수호병처럼 농민의 행복을 영원히 지켜주리라. 어디선가 건드러진 타령이 들려왔다.
이랑 길고 뚝높은 밭에 님 넘겨볼래기 목 늘어나누나 에헤루 에헤루 에헤루요
조순근의 밭옆 앞머리에서 정기찬이 소를 몰고나오며 부르는 타령소리였다. 그는 몸에서 빈열이 나는지 버선도 벗어버리고 새빨간 발로 번져진 흙밥을 밟으며 소잔등에 채찍을 후렸다. 한여름 논물보는 사람처럼 바지가랭이도 걷어올려 허연 장딴지살이 해빛에 번쩍이였다. 《여보게 기찬이, 이젠 프로트가 됐는데 한가락 더 뽑으라구.》 《허 말버릇 고약스럽다. 내 밭갈래기 짬이 없어 쌈을 못거는줄이나 알라구. 와와와, 이놈의 소 어디다 족다리질이야, 그렇지, 곧추 나가자.》 정기찬은 입이 함지박같이 벌어져 우걱뿔이를 쩌쩌 몰아나갔다. 그리고는 또 들판이 떠나가게 혀뻐드러진 가락을 뽑았다.
아래논엔 찰벼 심고 웃논에는 메벼 심고 한숨소리 웬말이냐 에헹 에라 재령강 재령강아
찰벼 베서 찰떡치고 메벼 베서 메떡치고 임당수에 안빠져도 밝은 뉘만 오는구나 에헹 에라 재령강 재령강아
노래소리에 화답이라도 하듯 흰두루미 한쌍이 복받은 대지를 내려다보며 춤을 추며 돌아간다. 《끼륵 끼륵…》 아지랑이 낀 재령강기슭에서 종다리는 분주히 깃을 치며 날아오른다. 《지종, 지종…》 봄의 서곡인양 노래소리 메아리친다. 아, 봄노래! 영원한 봄노래 울리는속에 천지개벽의 1946년 봄은 새 력사의 대문을 활짝 열어제꼈다.
1986. 3. 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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