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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불멸의 력사》(해방후편)
장 편 소 설
천 세 봉
( 제 31 회 )
제 13 장
1
평양시가의 집들은 평온한 고요속에 잠들고 총총한 별들도 잠에 취해 조으는듯 가물거리였다. 당조직위원회 청사 창문만이 밤이 깊도록 환한 불빛을 내비치고있었다. 불빛이 꺼질줄 모르는 그 창문으로는 사람의 그림자가 끊임없이 지나다니고 전화기소리, 발자국소리들이 계속 울려나오는데 초저녁부터 청사마당에 줄지어 서있는 승용차들은 몇시간이 지나도록 꼼짝 움직이지 않았다. 정문에 서있는 경위대원들은 목갑총끈을 움켜쥐고 예리한 눈초리로 주변을 감시하였다. 이따금 밤바람이 슬렁슬렁 불어와서 음산한 랭기를 풍기며 겨우내 눈속에 묻혀있던 젖은 락엽들을 몰아갔다. 기실 이날은 당조직위원회의 모든 방들에서 긴장한 사무들이 벌어지고있었다. 이날밤은 교환수들도 모두 목이 잠기였다. 자정이 가까와올 무렵에 함흥을 찾는 교환수의 목소리가 아래층 구석쪽에서 계속 애타게 울리였다. 장군님의 집무실에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 서기장과 강진건, 농림국장 등 여러사람이 손에 땀을 쥐고 앉아있었다. 3.1시위가 있은 날 저녁부터 벌써 며칠째 이렇게 밤을 새고있다. 이미 각도에는 토지개혁지도를 위해 전권대표들이 떠나갔고 파견원들에게 강습을 줄 강사들도 다 내려갔다. 래일이면 토지개혁법령을 공포하게 된다. 그런데 방금전에 함흥에 내려간 김책으로부터 긴급통보가 올라왔다. 함흥에서는 《함흥고등학생회》라는 반동단체의 사촉밑에 래일아침 전 시적으로 학생들의 반혁명적인 시위가 예상된다는것이였다. 그래서 오늘밤 방안의 분위기는 더욱 팽팽해졌다. 문건들을 검토하고 토론을 진행하는속에서도 사람들의 마음은 함흥에 쏠리고있었다. 장군님께서만은 그냥 문건을 보다가 이따금 이사람 저사람에게 짧게 한마디씩 질문을 하고는 자신의 의견을 말씀하군 하시였다. 《서기장선생, 토지개혁법령에도 개혁실행을 이달말전으로 끝내는것으로 박은것만큼 이 결정서에도 3월 31일 이내로 한다는것을 찍어 강조하는것이 어떻겠습니까?》 장군님의 물으심에 서기장은 자기의 문건사본을 들여다보았다. 《장군님,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좋습니다. 그럼 4조에는 〈도인민위원회는 토지개혁실시기한인 3월 31일 이내로〉 이렇게 문장을 고칩시다.》 《예.》 《강진건선생, 농촌위원회구성을 순수 빈농으로 하면 식자가 부족하여 업무가 걸릴것 같다는 의견들이 더러 있는데 일없겠습니까?》 장군님께서는 강진건의 긴장해있는 표정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물으시였다. 《장군님, 그건 념려마십시오. 땅을 나누는 일인데 우리 농민들이 여북 잘해내겠습니까. 이렇게 좋은 법령이 있고 또 림시인민위원회의 결정서에 실행세칙, 림시조치법까지 다 밝혀놓았는데 못할것 없습니다. 장군님, 이젠 우리 농민들 일은 마음을 놓으십시오.》 강진건이 느슨한 웃음을 띠고 시원한 대답을 올렸다. 장군님께서는 농림국장을 마주보며 웃으시였다. 《나도 동감입니다. 이제 토지개혁법령을 지지하는 정당, 사회단체 공동성명서도 나올것이 예견되는데 이렇게 되면 전체 인민이 이 사업을 지원할것입니다. 여러분들에게 제가 토지개혁실행을 시급히 해야 한다는것을 자꾸 강조하는것은 두가지 요인입니다. 하나는 국제적으로 해방된 우리 인민의 자주적인 힘을 시위하자는것이고 또 하나는 토지개혁자체를 적들의 큰 반항이 없이 순조롭게 해내자는것입니다. 이걸 명심하고 이달말까지 무조건 해내야 하겠습니다.》 장군님께서 말씀을 끝내기 바쁘게 전화종이 울렸다. 장군님께서는 서둘러 송수화기를 드시였다. 《함흥, 알겠소, 교환수동무, 소리를 좀 크게 할수 없소?》 장군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서시였다. 얼마후 공명판을 윙윙거리던 유도음이 사라지고 먼곳에서 목소리가 울려왔다. 《김책동무요?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장군님께서는 침착한 어조로 물으시였다. 수화기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비상조치를 취하기로 했습니다. 오늘밤안으로 무장대를 보내서 주모자로 예상되는자들을 체포하고 로동자들을 동원하여 거리들을 제압하자는것입니다.》 장군님께서는 잠간 송수화기를 귀에서 떼였다가 다시 올리고 물으시였다. 《그러니까 래일아침이 틀림없단말입니까?》 《그렇습니다. 5일입니다.》 《음, 적들도 벌써 우리가 래일 법령을 공포한다는걸 알고있었구만.》 《예, 그래서 사태가 더 엄중하다고 봅니다.》 김책의 목소리는 마디마디가 다급했다. 《그런데 김책동무, 총을 안쓰고는 안되겠습니까?》 《예?》 방안의 사람들도 놀랐다. 그들도 조급하여 자리에서 일어나 전화목소리에 귀를 강구었다. 《오늘밤에 무장대를 동원하겠다는것말입니다.》 김책의 목소리는 옆방에서 말하듯 더 깨끗했다. 《장군님, 반동들의 배후조종이 분명하고 그리고 시위도 단순한 시위로만 끝날것 같지 않고 폭력행위를 기도하고있다고 합니다.》 《음…》 장군님께서는 송수화기를 든채 심중한 표정을 짓고 몇걸음 옮기시였다. 방안에서는 그이의 발걸음소리에 마루가 약간씩 삐꺼덕소리를 내였다. 《그들의 요구는 뭐라고 봅니까?》 《예, 땅의 국유화를 반대한답니다.》 《허허, 국유화라? 기막힌 일이요. 이게 다 오기섭의 교조주의 후과입니다.》 장군님께서는 강진건이와 서기장을 마주보며 한참 웃으시였다. 《김책동무, 놔둡시다. 오늘밤에 우리가 먼저 불집을 일구지 맙시다. 분명 학생들이 꾀임에 넘어간것이 알립니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수천명 학생이 다 가난한 사람들의 자식들이겠는데 우리의 토지개혁을 반대할수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몇몇 주모자들만 제거하면 방지할수 있을것 같습니다.》 《주모자이든 누구든 한사람도 다치지 말고 그대로 놔둡시다.》 장군님께서는 단호하게 말씀하시였다. 너무도 뜻밖의 지시에 놀란듯 수화기에서는 아무 응대도 없었다. 방안사람들도 눈이 둥그래진채 의아히 장군님을 지켜보았다. 금시 란동이 벌어지려고 하는데 그대로 놔두면 어떻게 하시려는것인가? 장군님께서는 천천히 시계를 들여다보시였다. 전화를 거시는 사이에 팔목시계의 시침과 분침이 12점에 합치되여있었다. 아니, 벌써 분침이 12점에서 약간 미끄러져나갔다. 드디여 토지개혁법령을 발포하는 력사의 날 3월 5일이 되였다. 이제 몇시간이 지나면 날이 밝을것이며 전국의 농민들이 춤을 추며 돌아갈것이다. 이 경사스러운 날에 총소리부터 내야 하겠는가? 이밤에 주모자를 잡는다고 뛰여다니느라면 충돌이 일어나고 그러느라면 잠자던 함흥의 온 시내가 소동이 일어날것이다. 이것은 바로 원쑤놈들이 바라는 일이였다. 장군님께서는 그것이 미국놈들의 작간이라는것을 대번에 간파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조용히 말씀하시였다. 《미국놈들의 교활한 음모책동에 말려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놈들이 무엇을 노리고있는가? 이달 20일에 쏘미공동위원회가 열립니다. 이러한 때 북조선에서 실시하는 첫 민주개혁인 토지개혁이 처음부터 총소리를 내면서 혼란에 빠지면 그들에게 얼마나 유리한 언질이 생기겠습니까. 미국놈들은 우리 림시인민위원회를 비법적인 정권이라고 고아댈것이고 민주개혁을 취소하라고 덤벼들것입니다. 그땐 우리가 20개조 정강을 공포해도 무의미하게 됩니다. 그래서 순진한 학생층을 꼬드긴게 분명합니다.》 《장군님의 말씀을 들으니 저도 짐작이 됩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주모자들조차 다치지 않고 가만 있으면 현실적으로 사태는 더 엄중해질것 같습니다. 3월 5일 아침에 온 시내에 소동이 일어나게 됩니다.》 장군님께서는 잠시 덤덤히 계시였다. 어쩌면 송수화기에 김책의 컴컴한 얼굴이 내비치는것만 같으시였다. 《김책동무,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화를 복으로 만들수도 있습니다. 반혁명적인 시위를 혁명적인 시위로 전환시킬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토지개혁은 근로인민의 리익을 옹호하는 개혁이기때문입니다. 그것은 정의이며 진리입니다.》 장군님의 목소리가 격해지시였다. 《청년학생들은 정의와 진리를 누구보다도 사랑합니다. 우리도 학생시절을 체험해보지 않았습니까. 문제는 그들에게 우리의 토지개혁이 어떤 개혁이라는것을 정확히 알려주면 됩니다.》 장군님께서는 확신에 찬 어조로 계속하시였다. 《이렇게 합시다. 오늘밤에 대형확성기들을 곳곳에 설치하는게 좋겠습니다. 기왕 사람들을 소집한바에는 그 인원들로 학생들이 모이게 될 곳들에 확성기를 내다 걸게 하는게 어떻겠습니까?》 《예?》 《래일 오전에, 이젠 오늘 오전이라고 해야지, 오전에 말이요, 방송으로도 토지개혁법령을 공포하려는데 벌써 법령문을 넘겨주려고 방송국장을 불렀습니다. 우린 그걸로 대답합시다. 우리 법령이 나가면 학생들이 스스로 진정될게 아닙니까. 다른 지방에서도 반동놈들의 악선전으로 함흥과 같은 현상이 나올수 있지만 우리의 방송을 들으면 모두가 토지개혁을 지지해나설것입니다. 김책동무, 마음을 진정하시오. 별일 없습니다. 여기서도 일이 다 잘됩니다. 민주당에서도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조만식일당이 쫓겨났습니다. 다른 동무들에게도 놀라지 말라고 전하시오. 인민은 우리를 신임하고있습니다.》 《장군님!… 알겠습니다.》 장군님께서 송수화기를 놓으시자 방안에 서있던 사람들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강진건은 부르쥐였던 두주먹을 풀며 장군님의 상기된 얼굴을 우러러보았다. (장군님은 정말 조선의 구세주이시다!) 강진건은 손수건을 꺼내여 땀으로 질벅해진 이마와 목덜미를 훔치였다. 얼마후 방안사람들은 이젠 돌아가서 다문 몇시간이라도 눈을 붙이라고 하시는 장군님의 권유에 못이겨 자리를 뜨게 되였다. 그들이 차를 타고 하나둘 집으로 돌아갈 때 경위대원이 장군님곁으로 다가왔다. 《장군님, 만경대할머님께서 오셨습니다.》 《할머님이?》 장군님께서는 저으기 놀라시였다. 《이 밤중에 할머님이 왜 오셨단말이요?》 《녜, 벌써 오신지 오랜데 댁에서 기다리다 못해 여기 합숙에 나와계십니다.》 장군님께서는 현관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돌아서 합숙으로 향하시였다. 희미한 외등밑에 무명치마저고리를 입은 할머님께서 서성거리고계시였다. 장군님의 발소리가 들리자 할머님은 두팔을 벌리며 다가오시였다. 《이게 장군 아닌가?》 《할머니, 어두운데 잘 알아보십니다.》 《내가 눈이야 무슨… 이젠 바늘귀도 잘 못꿰구 귀도 어두워졌지만 장군의 발소리만은 먼발치에서두 알아듣지.》 할머님은 장군님의 손등을 잡고 쓸어보시였다. 문득 할머님의 뜨거운 눈물이 장군님의 손등에 떨어졌다. 《할머니, 왜 그러십니까? 왜 이렇게 찬바람을 맞으십니까?》 장군님께서는 할머님의 무명겹저고리를 만져보며 시름겹게 말씀하시였다. 외등에 비친 굵은 주름으로 엉켜진 할머님의 얼굴에는 수심이 비껴있었다. 할머님은 장군님의 손을 꼭 쥔채 토방마루에 앉으시였다. 《할머니, 날이 찬데 방으로 들어갑시다.》 《아니, 여기가 좋구나.》 할머님께서는 하늘의 천만성좌를 바라보듯 고개를 쳐들고 잠시 묵묵히 있다가 장군님을 돌아보시였다. 《듣자니 네가 늘 밤을 패운다는데 사람이 쇠가 아닌 다음에야 견디여내겠느냐?》 《할머니 걱정마십시오. 산에서 싸울 때에도 저는 조금씩 눈을 붙이며 지냈습니다. 이젠 습관이 됐습니다. 저는 한시간을 자도 남이 여덟시간 자는것만큼 깊이 자기때문에 일없습니다. 허허허…》 《네가 축지법을 쓴다더니 별재간이 다 있구나… 이 할머니를 속이지 말거라. 너는 내 손자이기전에 나라의 장군이 아니냐. 네가 건강해야 나라가 튼튼해진다. 그런데 장군은 제 몸을 돌보지 않는것이 큰 야단이다. 위험한 일은 도맡아하구… 도맡아 찾아다니구.》 할머님의 목소리에는 노염이 실리였다. 《할머니, 그건 무슨 말씀입니까?》 《무슨 말이라니? 전번 기미년 만세대회때 무슨 일이 있었느냐? 우리 늙은것들은 오늘낮에야 그날에 있은 일을 알구 속이 떨려서…》 할머님께서는 갑자기 몸을 떨면서 말씀을 잇지 못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그러시는 할머님의 어깨를 안으시였다. 무어라고 말할수 없는 련민의 정이 그이의 가슴속으로 저릿하게 흘러들었다. 할머님은 눈굽을 찍으며 목메인 소리로 말씀을 이으시였다. 《알고보니 너희들이 나를 속였더구나. 내 오늘낮에 그런 소릴듣구 만세대회에 나갔던 형록일 불러앉히고 그런 일이 있은걸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몰아대니 장군이 말하지 말라고 해서 여태 속여왔다는게다. 오늘에야 그런걸 알게 된 네 할아범두 머리를 동이구 걱정하면서 점심저녁을 다 건네였다.》 《그러니 할머님은 그 일때문에 오셨습니까? 일없습니다. 산에서 싸울 때도 왜놈 총알은 나를 피했습니다. 그리고 수백만 인민들이 나를 보호해주는데 몇놈의 반동놈들이 쏠라닥거린다고 무슨 변이 나겠습니까.》 《그래두 할머니 마음은 그렇지 않구나. 백성을 위해 애쓰는 장군에게 왜 폭탄을 던진단말이냐?》 할머님께서는 통분하여 어깨를 떨며 우시였다. 《오늘 여기 와서 또 들으니 함흥에서 무슨 변이 일어났다면서? 그래 장군이 또 그리로 갈지 모른다구들 하는데 장군이 거기로 가겠다면 이 할멈도 같이 따라가려고 한다.》 할머님께서는 목이 꽉 메이시였다. 장군님께서는 할머님을 그러안은채 밤하늘을 올려다보시였다. 은하수는 벌써 남쪽으로 기울어지고있었다. 한평생 근심속에 살아오신 할머님의 마음을 해방된 조국땅에 와서도 편안하게 해드리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미여지는것 같으시였다. 《얘, 성주야!》 할머님께서는 갑자기 어릴적이름을 다정히 부르시였다. 《내가 열네살난 널 천리길에 보내고 소메골기슭을 돌아내려올 때 마음이 어쨌는지 아느냐. 난 그때로부터 지금까지 발편잠을 못잤다. 병인년에는 네 아범이 잘못되였다는 소식이 오더니 임신년에는 네 어멈이, 을해, 병자년에는 철주와 형권이… 이렇게 자식을 앞세우다 못해 두벌자식까지 앞세운 이 늙은게 무엇을 보구 살아가는줄 아느냐?》 할머님은 옷고름을 눈에 대고 설음을 그치지 못하시였다. 《할머님, 제가 왜 할머님의 마음을 모르겠습니까. 그래서 부모님들의 뜻을 헛되게 하지 않을려고 불철주야 마음을 쏟는게 아닙니까. 할머니 그렇지 않습니까?》 《오냐 오냐…》 할머님은 터져나오려는 흐느낌을 참으며 고개를 끄덕이시였다. 《할머님, 저는 부모님과 삼촌, 동생뿐아니라 조국에 데리고 오지 못한 사람들이 얼마인지 모릅니다. 저 백두산밑 어느 알지도 못할 골짜기에 얼음을 까헤치고 묻고온 사람이 수백명도 넘습니다. 그들은 모두가 떠나가면서 저에게 꼭 조국을 광복하고 모든 인민들이 잘살수 있는 나라를 세워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제몸이나 돌보면 그들앞에 면목이 서겠습니까?》 《나두 알지. 잘 알지. 그래두 내 한 10년 더 살면 살겠는데 마지막날까지 이렇게 속에다 불갈구릴 달구야 어떻게 살겠느냐. 응… 그저 그래서 하는 말이다.》 《할머님, 알겠습니다. 할머님이 더 걱정을 안하시게 하겠습니다. 그러니 이젠 맘놓고 편히 주무십시오.》 장군님께서는 승용차가 있는곳까지 할머님을 모셔오면서 살뜰한 말씀을 더 해드리지 못하는것이 안타까우시였다. 그러나 할머님은 그만치라도 말씀을 들으니 가슴속이 후련해진듯 밝은 웃음을 지으시였다. 두분이 차에 오르시자 자동차는 어둠속에 잠든 시내길로 조용히 굴러갔다. 려명을 차비하는 새날의 거리로 별빛이 세차게 부셔져내리고있었다. 그속으로 이따금 류성이 긴 꼬리를 끌며 비껴내리기도 했다. 그로부터 몇시간후에 드디여 토지개혁법령이 발포되였다. 온 나라 방방곡곡에 민족의 대사변을 알리는 방송원의 목소리가 우렁차게 울려퍼졌다. 수많은 시련의 언덕을 넘어 세상에 발포하게 된 법령, 그러나 아직도 넘어야 할 언덕이 얼마나 많은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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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해빛은 풋솜같이 떠도는 안개무더기를 휘저어놓고 사그라뜨리며 대지를 따뜻이 애무하고있었다. 흩어진 안개무더기도 살랑거리는 바람에 실려 서서히 산기슭으로 몰려갔다. 머리에서 날새들이 날아일어나 금빛처럼 쏟아져내리는 해빛속으로 자맥질해가고있다. 《꾸엉, 꾸엉》 이따금 마을 뒤산에서 장꿩의 울음소리가 정적을 깨치며 메아리치고있었다. 장군님께서는 마을뒤 비탈밭에서 지평선까지 아스라하게 뻗어나간 논벌을 흐뭇한 시선으로 바라보고계시였다. 뒤에서 강진건이 이곳 농조위원장과 제강소에서 온 면 실행위원을 데리고 조용히 걸었다. 이들은 오늘 아침 뜻밖에 장군님께서 자기 마을에 오시여 농촌위원회를 조직하는 일을 봐주시겠다는 바람에 몸둘바를 몰라하다가 그냥 뒤따라 밭으로 나왔다. 농민총회를 준비해야 했으나 당하는 일이 너무도 꿈만 같아 그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마음이 흥청거려 제먼저 따라나선것이였다. 장군님께서는 오늘 평양 가까운 군에서 제일 먼저 파견원들이 내려가고 리에도 실행위원들이 닿았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이 갈촌마을로 오시였었다. 평양에서 100리되나마나한 거리에 있는 마을이여서 아침에 집무실에서 간단한 회의도 하나 끝내고 나오시였다. 이 마지막실천단위에서 일을 마무리하는것을 보고싶으시였다. 함흥사건이 수습된후 전국적으로 큰 편향은 별로 제기되지 않아서 이제는 토지분여를 위한 실무적인 사업을 계획대로 3월말일전으로 끝내는 일이 남아있었을뿐이였다. 비탈을 내려 바둑판같이 펼쳐진 논배미들가운데로 들어간 장군님께서는 미소어린 눈길로 땅을 살펴보다가 괭이로 찍어보시였다. 일매지게 검은 찰흙인데 채 녹지 않아서 뼈다귀같이 꿋꿋했다. 땅거죽만 녹고 속에는 아직 얼음이 들어박혀있는것 같았다. 보기만 하여도 걸어보이는 그 검은 찰흙에 물기가 내배여 끈적끈적 발에 묻어나기도 한다. 가을에 갈아엎은 논고랑에는 손바닥같은 눈얼음이 붙어있는데 괭이로 두드리면 밑은 궁근 항아리속처럼 풍풍 빠져들어간다. 땅속에서 촐랑촐랑 얼음물 녹아떨어지는 소리가 들려오는것을 보면 분명 봄이 찾아오고있었다. 장군님께서는 어쩌면 봄이란 제스스로 오는것이 아니라 바로 이 농토가 봄을 끌어당겨오는것 같은 생각이 드시였다. 아니면 겨우내 땅속에 묻혀있다가 근면한 농민들의 발자국소리를 듣고 슬그머니 머리를 쳐드는지도 모른다. 장군님께서는 물기배인 차지고 끈기있는 흙을 한덩이 집어드시였다. 손에 흙찌가 묻는것도 아랑곳없이 꾹꾹 다져도 보고 부스러뜨려도 보시였다. 그 한줌 흙에 농민들의 깊은 사연이, 그들의 운명과 인생이 담겨져있는것 같아 무심할수가 없으시였다. 땅에 봄이 오는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봄이 오면 이렇듯 얼음이 녹고 땅이 풀리고 그러면 이 땅에 씨앗이 떨어진다. 어머니처럼 부드럽고 사랑이 깊은 이 거무스레한 땅은 자기 품에 떨어진 씨앗을 애기처럼 흙포단으로 포근히 감싸안고 싹을 틔우고 뿌리를 내려서 이쁘장한 낟알의 잎새를 피워올린다. 그다음은 잎새를 다독이며 온 여름 해빛과 바람과 비를 불러 줄기와 가지를 자래우고 무르익는 가을을 재촉한다. 그래서 종당에는 이삭을 뽑아올리고 열매를 익히는것이니 땅은 참으로 오곡백과를 안아키우는 어머니이다. 생명의 모체인 땅, 그 선량하고 부드럽고 사랑깊은 어머니땅앞에서 누구도 악한짓을 하지 말아야 할것이다. 그러나 오늘까지 세세년년 이 땅은 권력과 총검을 휘두르는자들의 발밑에 짓밟혀 피의 참극이 어느 하루도 그쳐진 날이 없었다. 땅의 력사는 피의 력사였다. 놀부와 같은 패악한 지주들의 치부욕으로 이 땅에는 농민들의 쓰라린 눈물과 더운피가 뿌려졌다. 그렇게 장구한 슬픔의 력사가 기록된 이 땅우에 바야흐로 농군의 설음을 영원히 가셔버릴 환희로운 새봄이 찾아오고있는것이다. 땅을 위하여 피흘리고 눈물뿌린 농군들 그리고 우리의 유명무명의 렬사들의 념원이 화창한 봄날의 꽃으로 피여날 때가 왔다. 장군님께서는 눈물겨운 심정으로 손에 쥔 한줌의 흙을 보고 또 보시였다. 옆에 서있는 강진건이도 장군님의 그 심중을 읽는듯 깊은 생각에 서있었다. 그는 이 흙을 한줌 들고가지 못해 감옥벽을 치며 울던 때의 일이 생각났다. 강진건은 장군님의 뒤를 따라 논두렁길을 걸으며 지나가는 말로 말씀을 드렸다. 《장군님, 제가 토지개혁을 끝내면 동만에 한번 갔다올가 합니다.》 《동만에요?》 장군님께서는 걸음을 멈추며 뒤를 돌아보시였다. 《예, 김선생님의 묘소를 찾아뵈옵고 이 흙도 가지고가서 놓아드릴 생각입니다. 그리구 아주 조국으루 모셔올 준비두…》 《참, 선생님도 지금 그럴 겨를이 있습니까. 우리가 새 나라를 다 세운 다음에 모셔와도 저의 아버님은 욕하시지 않을겝니다.》 장군님께서는 논두렁길을 곧추 걸어나가며 말씀하시였다. 《장군님, 그래두 난 사정이 좀 다릅니다.》 강진건은 장군님의 뒤를 바싹 따르며 간청을 드렸다. 《제가 왜 선생님의 심정을 모르겠습니까. 선생님, 고맙습니다. 그러나 그 일은 제가 자식으로서 아버님유훈대로 할터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장군님께서는 머리를 수굿하고 서있는 강진건을 그윽한 눈매로 지켜보시였다. 그러느라니 괴로운 추억이 일어나시였다. 지금은 낮아진 무송의 산기슭, 한갈피 떼장밑에 누워계실 아버님과 어머님에 대한 생각이 간절하시였다. 생전에 그리도 일구월심 바라시던 조국광복이 성취된것을 알고나계시는지… 장군님께서는 추연히 고개를 들고 동북쪽 하늘을 바라보시였다. 《아버님은 너무 일찍 가셨습니다. 그러나 강선생님과 같은 아버님의 친우가 살아계시니 정말 기쁩니다. 그래서 더욱 선생님이 귀중하게 생각됩니다.》 장군님께서는 정겨운 눈으로 강진건을 바라보시였다. 어느덧 강진건의 눈에는 이슬이 어려있었다. 《선생님, 토지개혁을 끝내면 함북에 있는 선생님의 가족들을 다 데려와야겠습니다. 아들, 며느리도, 손자도…》 장군님께서는 천천히 논두렁을 넘어서시였다. 그리고 농조위원장에게 시선을 주며 말머리를 돌리시였다. 《금년날씨가 어떻습니까?》 《예, 올봄엔 농사가 한절수 앞서려는지 우수전에 벌써 비가 한줄금 잘 내렸습니다.》 농조위원장이 장군님께서 드신 괭이를 황급히 받아들며 말씀올렸다. 《논에는 물이 장수라는데, 세월도 알아주는가보군요.》 장군님께서 허리를 짚고서서 벌판을 둘러보시였다. 이 벌판으로 땅을 받은 농민들이 우야- 하고 소리치며 달려나오는 광경을 상상해보시였다. 그날은 가까와오고있으나 아직은 앞에 있었다. 토지개혁법령으로 모든것이 해결된것은 아니였다. 빨리 땅을 나눠주어서 농민들이 지경마다 패말을 박고 땅의 주인이 되였다고 세상에 대고 웨쳐대는것을 보아야 만시름이 풀릴것 같으시였다. 《농촌위원회를 조직한다는데 어서 가봅시다.》 장군님께서는 해빛이 란사되는 시내물을 다시 건너 큰 돌배나무 서있는 집앞으로 가시였다. 마당에는 농민들이 벌써 적지 않게 모여와있었다. 집앞에 어설프게 쳐놓았던 수수바자를 걷어버려 안마당 바깥마당이 없게 된 넓은 마당에는 사람들이 편안히 앉을수 있도록 벼짚을 한벌 깔아놓았다. 《판을 아주 크게 벌렸구만. 이만한 회의장이면 몇동네도 들어앉겠소.》 장군님께서 호탕한 음성으로 말씀하며 마당으로 들어가시자 그곳에 모여앉아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나왔다. 누구인가 두손을 추켜올리며 《김일성장군 만세!》, 《토지개혁 만세!》 하고 웨치자 삽시에 마당안은 만세의 환호로 들끓었다. 낡은 삼베옷에 초신을 신은 중늙은이 하나가 사람들을 비집고 나오더니 장군님앞에 털썩 무릎을 꿇고 큰절을 하였다. 《장군님! 우리 농군들에게 땅을 주도록 법령을 내리신 장군님, 정말 고맙소이다.》 《이러지 마십시오. 이거 무얼 어러십니까?》 장군님께서는 땅바닥에 엎디여있는 늙은이를 잡아 일으키시였다. 《장군님, 우리 농군들은 토지개혁법령을 받구 요즘 내내 춤을 추며 돌아갑니다. 지금도 한바탕 춤을 추다가 무슨 토지를 노누는 회합을 한다기에 왔소이다. 그런데 장군님께서 이 험지를 찾아주시니…》 늙은이는 너덜너덜한 옷소매로 눈굽을 닦았다. 하나같이 헐벗고 굶주려온 모습이였다. 그러나 땅을 받게 된다는 희망으로 한껏 밝아진 얼굴들이였다. 장군님께서는 무어라 이름할수 없는 애틋한 련민에 가슴이 젖어들어 그들모두를 안아주는 심정으로 곽지같은 농민들의 손을 하나하나 잡아주시였다. 농민들은 한뉘 호미자루밖에 잡아보지 못했던 자기들의 손으로 장군님의 손을 잡아보게 된 꿈같은 사실이 놀랍기도 하고 황송하기도 해서 어쩔바를 몰라하였다. 《장군님, 이젠 방안에 들어가셔야 하겠습니다. 점심을 준비했습니다.》 《점심을?…》 농조위원장의 말에 장군님께서는 놀라는 표정으로 강진건을 돌아보시였다. 부엌에서는 아낙네들이 모여들어 들락날락했다. 함지에 무엇인가 가득 담아 들여가기도 하고 담아내오기도 했다. 《장군님, 변변치 못하지만 저희들의 성의오니 들어주십시오.》 농조위원장이 두손을 배허벅에 대고 말씀드렸다. 《언제 점심 먹을새가 있겠소, 농민들이 모여오는데.》 《장군님, 회의를 12시가 넘어서 한다고 했는데 농민들이 앞질러 모여오고있습니다. 어서 방으로 들어가십시오.》 토지개혁지원을 나온 평양학원학생이 말씀올렸다. 《장군님, 거절하시면 이 동무들이 섭섭해합니다. 장군님 오셨다고 이 동무들이 몽땅 떨쳐나서 점심차비를 한것 같습니다.》 강진건이 장군님을 앞세워드리며 정지문을 열었다. 장군님께서는 하는수없이 토방에 올라서시였다. 방으로 들어서자마자 이어 점심상이 올라왔다. 점심상은 장군님과 강진건의 상이 네모배기 소반이고 그밖에는 모두 둥글상이였다. 콩나물이 한접시씩 놓이고 김이 피여오르는 닭고기국도 올라왔다. 소반들에는 깍지를 까밝힌 닭알들도 놓이고 모두부도 놓여있다. 《장군님, 술을 좀 가져오랍니까? 술도 있습니다.》 《그건 두었다 토지개혁이 끝나면 마시시오.》 장군님께서 말씀하시자 농조위원장은 부엌에 대고 술주전자는 올려보내지 말라고 눈짓을 했다. 《장군님, 죄송스럽습니다. 식상이 변변치 못해서…》 《변변치 못한게 아니라 너무 지나친 대접을 받소. 무엇때문에 닭까지 잡소.》 장군님께서는 닭고기가 무드기 담긴 국사발을 잠시 내려다보다가 몇술 뜨시였다. 농촌집에서 흰쌀밥을 하고 닭을 잡는것은 귀한 손님이나 올 때에 하는 대접이다. 그것도 농량이나 푼푼한 집에서… 언제 우리 농촌의 모든 농가들이 이런 륭숭한 대접을 해서 손님을 기쁘게 할가, 아니 래년부터는 흰쌀밥에 고기국을 먹는 세월이 분명 올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장군님께서는 오늘 이 농촌집 노전방에서 받는 식사가 더욱 뜻깊은 느낌이 드시였다. 《밥맛이 구수하구만… 이게 3.7제 밥이겠소, 허허.》 장군님께서는 몇숟갈 뜨고나서 풀기가 많은 쌀밥을 내려다보며 웃으시였다. 《그렇습니다. 장군님, 3.7제를 해서 겉곡을 보관했다가 얼마전에 찧은것입니다.》 농조위원장이 무릎을 세우고 앉아서 정중히 말씀올렸다. 《아, 그래서 이렇게 기름기가 돌고 구수한게로구만. 허허… 농조위원장동무, 3.7제 밥이 이렇게 맛있는걸 보면 올가을에 제 땅에서 거둔 벼로 지은 밥은 더 꿀맛이겠구만!》 《아무렴, 그렇습지요. 장군님께서 올가을에 꼭 다시 와주십시오. 그땐 우리가 제땅 농살 잘 지어 천석군만석군이 돼서 떡치고 소두 잡겠습니다.》 농조위원장이 물기어린 눈을 슴벅이면서 소청을 드리였다. 《오겠소, 꼭 오겠소. 온 동네가 모여서 제땅에서 난 쌀로 큼직하게 잔치를 차리시오. 그런데 소는 잡지 마오. 소를 잡겠다면 난 안오겠소. 허허허.》 장군님의 말씀에 방안에서는 웃음이 터졌다. 《장군님, 그땐 햇곡으로 독한것두 좀 고아놓겠습니다.》 《가만, 농조위원장동무가 아까부터 술소리를 자꾸 하는걸 보니 술을 꽤 하는 모양이구만.》 《장군님, 알고보니 농조위원장은 한때 광산에서 돌을 캐면서 술을 배웠는데 술독을 지고는 못가도 마시고는 간답니다.》 제강소로동청년이 웃음을 지으며 롱말을 했다. 《그렇다? 그러구보니 대단한 술고래하고 마주앉았구만. 술을 마실 때는 마셔야지요. 그러나 술을 독으로 퍼마시는건 백해무익하오. 더구나 오늘처럼 회의를 조직해놓고 술마시자는 소릴 해선 안되고… 허허허.》 장군님께서는 웃으며 농조위원장앞으로 찬그릇과 모두부를 넘겨놓아주시였다. 장군님께서 무흠하고 소탈하게 대해주시여 방안에는 활기가 넘쳐흘렀다. 조심스러워하던 농군들이 어느덧 어려움을 잊고 자유스럽게 수저를 놀렸다. 부엌에 대고 큰소리로 덧국을 요구하는 사람도 있었다.
부엌에서는 녀인들이 흰 김이 문문 풍겨오르는 뜨끈한 국그릇을 연방 올려보냈다. 장군님을 모신 이 소박한 《농민오찬회》는 이 마을이
생긴이래 처음 있어보는 가장 경사스러운 명절과도 같은것이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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