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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불멸의 력사》(해방후편)
장 편 소 설
천 세 봉
( 제 25 회 )
제 10 장
3
모두가 잔디밭에 자리잡고 앉자 장군님께서는 아까 서씨령감들이 하던 말을 전하면서 조합장들의 생각은 어떤가고 물으시였다. 장군님께서 무슨 의향으로 말씀을 하시는지 몰라 모두 얼굴들을 숙이고앉아 얼른 의견을 말하지 못했다. 뒤쪽에선 서로 먼저 말하라고 옆을 찌르기도 했다. 그리고 적지 않은 사람들은 장군님을 처음 뵈옵는지라 그이의 환하신 얼굴을 우러러보기에 정신이 없었다. 《장군님, 거 제가 한마디 하겠습니다.》 동흥리농민조합장 김재경이 두손을 배허벅에 붙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씀하십시오.》 《인제 장군님 말씀을 들어보면 저 늙은이들이 지금 씨족관계가 어떻다고 하는 구실을 내대고 저 오봉산앞에 있는 아흔아흡간짜리 지주를 다치지 말아달라고 청원을 한것 같은데 그건 도저히 용서할수 없는 일입니다. 저들은 거지같이 살면서 무엇때문에 서만호는 농민들의 고혈을 짜내며 첩까지 거느리고 흥야라 붕야라 잘먹고 잘살게 하자는건지 모르겠습니다. 저 령감쟁이들은 지금 눈이 멀어도 한정없이 멀었습니다. 우리가 그 눈을 뜨게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옳습니다. 눈을 띄워주어야 합니다. 제스스로 뜨지 못하면 칼끝으로 째놔서라도 눈동자가 세상을 똑바로 내다보게 만들어놔야 합니다.》 결패사나운 다른 농민조합장이 받아쳤다. 《뭐, 뭐라고?》 베감투 쓴 령감이 팔뚝질을 하며 대들었다. 《우리가 장군님께 죄다 말씀을 올리기도 했지만 서만호는 우리 달성서씨의 등걸이야. 그리구 애국자야. 또 같은 서씨로서 제 등걸을 받드는것은 우리 문중의 미덕이구 도리구…》 《그게 잘못 보고 하는 소리요. 서만호가 무슨 애국자란말이요. 그놈이 학도병에 걸린 제 아들놈을 빼내기 위해 총독부를 드나들며 그런 놀음을 벌린걸 누가 모를줄 아는가. 정말 눈들을 째놔야 알겠소?》 《흥, 난 눈알을 째놔도 내 할소리는 해.》 신경질적으로 생긴 베감투쟁이가 순간 장군님께서 옆에 계신다는 생각마저 잊어버린듯 가슴팍을 주먹으로 탕탕 쳤다. 그러자 한 령감이 그의 팔소매를 황급히 잡아끌며 자중하라고 타일렀다. 《그렇습니다. 토론하는 마당에서 저마다 감정을 사며 화부터 내면 합의가 잘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마음들을 진정하고 생각하는바를 차근차근 이야기하도록 합시다. 기탄없이 다 말해보십시오.》 장군님께서는 우선우선한 미소를 지으며 이야기를 새롭게 시작할수 있도록 좌중의 기분을 완화시키시였다. 조순근이들이 농조에서 나간 문제때문에 마음을 쓰며 자책하던 강진건은 령감들의 얼빠진 소리를 듣게 되자 다시금 마음속깊이에 있던 밑불이 되살아났다. 우리 농민이 언제 가야 제 정신을 차리겠는가. 저런 감투쟁이들이 언제 가면 눈을 뜨고 세상을 똑바로 내다보겠는가 하는 안타까운 생각에 속이 타들었다. 강진건은 그래도 장군님의 인내력에 은근히 감화를 받으며 끓어오르는 열기를 눌렀다. 《제 한마디 더 하겠습니다.》 김재경이 또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령감쟁이들의 생활형편은 한심합니다. 농사를 지어서 한해 계량은커녕 동삼석달 죽물을 울궈먹기도 힘든 형편입니다. 제 땅이 모자라 더러 소작도 부치는데 글쎄 거기서 난 곡식을 거꾸로 된 3.7제로 갖다바치다보니 제 땅 소출까지 다 빼앗겼습니다. 조순근의 말에 의하면 태호령감넨 벌써 쌀독이 바닥나서 쪽박을 들고 한되박 달라고 동냥을 다닌답니다.》 태호란 서만호의 8촌동생벌되는 령감인데 그는 제 말이 나오자 이마에 지렁이같은 피줄이 돋아올랐다. 그러나 말은 못하고 곰방대만 자꾸 빨았다. 《그다음 또 그곁에 앉아있는 서만호와 8촌형제간이 된다는 정평집 달호네는 농사지은 벼를 다 갖다바치고 온 겨우내 나깨미국수로 살아갑니다.》 나깨미란 메밀의 새하얀 알속을 뽑아내고 겉가죽을 갈아서 가루낸것을 말한다. 《나도 저 집에 가서 국수를 한그릇 사먹은 일이 있는데 대여섯명되는 어린애들이 국수내리는 더운 가마옆에 모여앉아서 서로 흰국수 달라고 울며 보채였습니다. 시꺼먼 나깨미국수는 지린내가 나서 못먹겠다고, 그래서 내가 국수 한그릇을 사먹고 한그릇 더 달래서는 그 우는 아이들을 모여앉히고 저가락으로 국수를 한오리씩 걸어서 입에 넣어주었습니다. 그러니까 서로 한오리라도 더 먹겠다고 납작납작하는 입들을 제비새끼가 에미 물어온 벌레들을 받아먹겠다고 내밀듯 다투어 내밀었습니다. 나도 속으로 울면서 아이들한테 국수오리를 먹였습니다. 나는 이렇게 하고 나와서는 아무리 국수가 먹고싶어도 저 집에 국수사먹으러가지 않았습니다. 아니 글쎄 제농사 지어서 다 갖다바치고 저는 이렇게 살면서 뭐뭐 왕벌 서만호는 다치지 말아달라고?》 태호령감의 곁에 앉아있는 정평집 달호령감은 비뚤어진 통감투머리를 끄덕거리며 울었다. 다른 령감쟁이들도 낯색이 시뻘겋게 되여 죽은듯이 앉아있었다. 방금 들고일어나며 윽윽하던 기운들이 단매에 넋을 먹은것 같았다. 엇나갈 땐 엇나가더라도 흥정할수 없고 감출수 없는것이 자기의 처지였던것이다. 《장군님, 저 서만호는 때려없애야 합니다. 저걸 그냥 두고는 이 재령벌농민들이 한시도 편안히 살수가 없습니다. 저놈은 사방 100리가 되는 벌을 가지고있습니다. 벌의 소작인들이 몇천명, 몇만명이 될것입니다. 저놈을 그냥 내버려둔다면 그 몇만명이 다 저 태호령감이나 달호네 이상으로 가난에 울수 있습니다. 저놈이 저를 떠받들어올리는 제 문중에 대해서도 그 모양인데 항차 다른 소작인들에 대해서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서만호의 땅은 빼앗아내야 합니다. 한평도 남기지 말고 다 빼앗아내서 농민들을 살궈야 합니다.》 이 소리가 나오자 농민조합장들이 옳다고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쳤다. 한 농민조합장은 일어서며 땅을 빼앗을 때 저따위 령감쟁이들도 서만호와 같이 죽을 구멍에 몰아넣어버려야 한다고 웨치였다. 장군님께서는 껄껄 웃으시였다. 《지주의 땅을 빼앗아내야 한다는것은 백번 옳은 소리입니다. 내 여기서 올려보낸 군내농민들의 청원서를 받아보았습니다. 그런 편지가 지금 온 나라 농촌에서 올라오고있습니다. 나는 거기에서 힘을 얻고있습니다.》 장군님께서는 농민들의 들끓는 기세에 만족한 웃음을 지으시였다. 이때 김재경이 엉거주춤 앉다 말고 두손을 배허벅에 대며 장군님의 얼굴을 송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더 할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녜, 실은…》 김재경은 말을 꺼내기가 거북한듯 운만 떼놓고는 자기 조카의 얼굴을 피끗 훔쳐보았다. 김창규는 삼촌이 그러는 모습을 보고 가볍게 한숨을 쉴뿐 별다른 표정이 없다. 《어서 말씀하십시오.》 장군님께서 재촉하셔서야 김재경은 입술을 깨물며 허리를 폈다. 《실은 말씀드리기 어려운데 꼭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받고싶은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어떤 문제입니까?》 장군님께서는 김재경이 갑자르는것을 보며 어서 말을 하라고 끄덕이시였다. 《장군님, 앞으로 지주의 땅을 다 빼앗은 다음 땅은 어떻게 됩니까. 여기 장군님을 직접 만나뵙고온 조순근의 말을 들을것 같으면 땅은 분명 농민들의 소유가 된다고 했는데 또 다른 소리도 있고 해서…》 《다른 소리라면 어떤 소리입니까?》 《글쎄 지주의 땅을 빼앗아선 농민들한테 노나주지 않고 무슨 집단농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우리 군당비서어른이 저번날 군중대회에서 말하지 않겠습니까.》 《그게 무슨 소립니까, 집단농장을 만들다니?》 장군님께서는 뜻밖의 말에 뒤에 서있는 김창규를 돌아보시였다. 창규는 고개를 숙이며 그런 일이 있었다는것을 말씀드리였다. 장군님께서는 얼굴에 그늘을 짓고 한동안 말씀이 없으시였다. 이제 겨우 눈을 뜨고있는 순박한 농민들에게 허튼 소리를 마구 줴치는 사람이 군당비서의 자리에 앉아있다는것이 믿어지지 않으시였다. 《군당비서는 지금 어디 있소?》 장군님께서 한참만에 창규에게 물으시였다. 《큰 간부가 부른다면서 평양에 올라갔습니다.》 《평양에?… 그래 조직부장동문 어떻게 생각하오?》 《비판을 했습니다. 그러나…》 창규는 군당비서의 전횡과 오만무례한 행동에 대해 말씀을 올리기가 부끄럽고 괴로와 주밋거리였다. 장군님께서는 창규에게 더 캐여묻지 않고 당의 로선과 어긋나는 행동에 대해서는 그 누구든 사상투쟁을 해야 된다고 하시였다. 그리고는 농민들을 향해 돌아서며 물으시였다. 《여기 군당비서가 집단농장을 만든다고 했다는데 그에 대해서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누구도 인차 대답을 못했다. 김재경이도 질문을 해놓고는 안타까운듯 곰방대만 주무르며 입을 꼭 다물고있었다. 《대복이 아버지, 대복이 아버지가 한번 이야기해보십시오.》 장군님의 말씀에 조순근은 무겁게 몸을 일으켰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기는 했지만 얼른 말은 꺼내지 못하고 일순간 푸들푸들 떨었다. 마른침을 삼켰는지 주먹만 한 울대뼈가 목에 두드러져 올랐다. 《순근이, 어서 대답을 올리게.》 곁에 앉아있던 정기수가 조순근의 다리를 꾹 질렀다. 지난번 흑호놈들한테 맞아 한절반 죽게 되였던 정기수는 조순근이 지어온 약을 먹고 완쾌되여 털고 일어났다. 막내아들도 몸이 다 나아 지금 그의 겨드랑이밑에서 새별같은 눈으로 장군님을 우러러 보고있었다. 《장군님, 지금 당장이래두 지주의 땅만 빼앗아내면 전, 전 여한이 없습네다. 그저 이 눈앞에서 지주만 얼른거리지 않으면 제땅이 아니구 나라땅에서래두 농사를 지어먹갔습네다.》 조순근은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장군님을 우러러보았다. 두눈에는 말하지 못한 안타까운 사연이 더 있었다. 땅에 대한 사무치는 생각을 아뢰고싶었으나 입을 꾹 다물고 말을 더 잇대지 않았다. 《대복이 아버지, 됐습니다. 그 심정을 내 다 알겠습니다.》 장군님께서는 일어서며 조순근의 두손을 들어 힘있게 잡아주시였다. 그리고는 좌중을 둘러보며 절절하게 말씀을 계속하시였다. 《여러분, 똑똑히 들으십시오. 우리가 토지개혁을 하자는것은 집단농장이 아니라 여러분들과 같은 농민들에게 땅을 노나주기 위해서입니다. 농민들모두가 제 땅을 가지고 제 농사를 짓게 만들자는것입니다. 왜 그렇게 하려는가? 그게 바로 농민들의 요구이고 소원이기때문입니다. 수천년세월 기원해온 이 나라 농민들의 희망이기때문입니다. 농사와 관련해서는 앞으로도 우리는 농민들이 요구하고 소원하는대로 하지 절대로 다르게는 하지 않을것입니다.》 장군님께서는 고개를 들고 넓은 벌을 바라보시였다. 그렇다. 이제 세월이 흘러 썩 후날에 가서 만약 저 농민들에게 집단농장이 사활적인 요구로 제기된다면 그이께서는 또 집단농장을 만드실것이다. 인민들의 요구와 념원을 원동력으로 해서 력사의 수레바퀴를 굴리여야 한다는것은 일찌기 그이께서 새롭게 찾으신 혁명의 진리였다. 장군님께서는 고전리론들에 크게 비여있는 공백들을 머리속으로 한참 더듬다가 김창규를 돌아보시였다. 《지금 토지개혁에 관여하는 많은 간부들과 파견원들이 어떻게 하면 토지개혁을 잘할수 있겠는지 자주 물어보군 하는데 그때마다 나는 〈그건 농민들에게 물어보라. 그저 농민들의 요구대로, 소원대로 하면 된다〉 하고 대답해주오. 그렇소. 저 대복이 아버지같은 불쌍한 조선농민들이 자기들의 소원대로 땅을 받아가지고 제 땅에서 마음껏 농사를 짓게 해야 하오. 나는 요즘 꿈에서조차 제 땅을 받아안고 대복이와 함께 춤추는 조순근농민을 봅니다.》 《장군님, 고맙소이다.…흐흑…》 조순근은 그만 격정을 억제하지 못해 부지중 장군님의 두팔을 잡고 머리를 푹 떨구었다. 모든 사람들이 장군님의 말씀에 가슴이 쭝해져서 일어섰다. 《군농민조합장동무, 또 한가지 물읍시다.》 장군님께서 문득 이렇게 말씀하시자 키가 작달막한 군농민조합장이 두손을 배허벅에 대고 일어섰다. 《듣자니, 대복이 아버지가 아직도 농조에 다시 들지 못한것 같은데 어떻게 된 일입니까? 대복이 아버지는 누구보다도 빈농민들을 위해서 애쓴 사람입니다. 대복이 아버지가 나한테 가지고 온 혈서에는 이 마을 농민들의 심정과 온 나라 농민들의 간절한 소원이 다 있었습니다. 그가 교활한 놈들에게 일시 속히우기도 하고 일처리를 조금 잘못했다고 칩시다. 그렇다고 이런 농민을 농조에서 영 내쫓는다는겁니까?》 장군님께서는 노한 표정을 짓고 엄하게 꾸짖으시였다. 《녜,… 저 그것은 … 군당비서동지랑…》 군조합장은 떠듬거리며 어쩔바를 몰라했다. 《장군님, 그건 제탓이라구 봐야 합니다.》 강진건이 장군님을 돌아보며 침통하게 뇌이였다. 《허허, 위원장선생이 책임을 다 떠맡겠습니까?》 《장군님, 그 책임은 백번 다 제가 져야 합니다. 그래야 제가 좀 숨이 나갈것 같습니다.》 《위원장선생, 그럼 우리 조순근농민을 비롯해서 농조에서 나간 농민들을 도로 받아들이도록 여기서 락착을 지은것으로 하는것이 어떨가요?》 《예, 장군님, 그리구 제가 여기 좀 남아서 일을 바로잡겠습니다.》 《그렇게 안해도 여기 동무들이 다 잘할것입니다.》 이때 조순근이 옷자락을 만지며 엉거주춤 일어났다. 《저, 장군님.》 《왜 그럽니까?》 강진건과 말씀하던 장군님께서는 의아한 시선으로 조순근을 올려다보시였다. 《전 농조에 안들어두 일없습네다. 제가 농조에 안든들 지주놈과 안싸우겠습니까. 전 우리 신당리에서 농조에 안든 마지막 한사람까지 설복해가지구 그때 같이 들갔습네다. 지금 농조에 들어가지구두 말썽을 일으키는 사람두 많은데 저혼자나 들어가선 뭘하갔습네까.》 《농조에 든 사람들이 무슨 말썽을 부립니까?》 《요새 또 우리 마을에서 지주를 애국자라구 하는 문서에 지장을 찍는 놀음이 벌어져서 문제가 섰습네다.》 조순근은 붉어진 얼굴을 수그리며 구부정하게 서있었다. 그러는것을 장군님께서 손을 잡아 곁에 앉히시였다. 《장군님, 제가 이 신당리일을 잘 도와주지 못했습니다.》 김창규가 송구한 심정으로 말씀올렸다. 그도 여기서 애국지주 보증서를 꾸민다는 상서롭지 못한 소식을 듣고 면에 나왔던것이다. 《앉소, 오늘 여기 와서 보니까 이곳 실정이 좀 복잡합니다. 이런곳일수록 농조를 강화해야 합니다. 자꾸 딸궈낼내길 하지 말고 대렬을 넓혀야 합니다. 알쭌한 사람만 찾다간 지주한테 사람들을 다 떼웁니다. 내 생각같아선 오늘 여기 나와있는 이 서씨농민들도 다 농조에 받아야 된다고 봅니다.》 《녜?》 리농민조합장들이 모두 놀랐다. 《왜 놀랍니까. 이분들의 손을 좀 보십시오. 이 손이 어디 놀고 먹는 사람의 손입니까. 아주 흙이 배인 손인데 왜 안됩니까. 잘못이 있어두 농조에 들어서 고치고 모르는것두 농조에 들어서 깨우쳐야 합니다. 농조는 농민들의 학교가 되여야 합니다.》 장군님께서는 앞에 앉은 서씨농민의 손을 잡아 손의 앞뒤등을 펴보이시였다. 기름기 없고 마른 나무등걸같은 검붉은 손이였다. 손바닥도 터갈린 자리들이 빗살처럼 세로 뻗었는데 손금조차 보이지 않았다. 장군님께 손을 맡긴 서달호는 코물을 들이키며 얼굴을 못들었다. 자기들이 장군님앞에서 그런 얼토당토않은 말을 불손하게 늘어놓아 무슨 처벌을 받을줄만 알았는데 모두 농조에도 들수 있다고 하시지 않는가. 마침내 서달호는 장군님앞에 엎드리며 실토하였다. 《이 미련하고 무지한놈들을 용서해주시오이다. 실은 요즘 서만호지주가 매일같이 저희들을 모아다놓고 술잔을 권하며 토지개혁이요 3.7제요 하는건 조순근이같은 타성놈들이 서씨문중일이 잘되는게 배가 아파서 하는 고약한짓이라고 꼬드겨서 저희들이 오늘 군에 진정을 하러 가던길이였소이다. 그러던차에 장군님께서 오셨다는 말을 듣고…》 서달호는 말끝을 채 여무리지 못하고 온몸을 떨었다. 장군님께서는 금시 옆으로 쓰러질것같은 서달호의 어깨를 부축해주시였다. 《다 알고있습니다. 이젠 농조에 들어서 땅을 되찾아야 합니다.》 얼마후 이야기는 농사에 대한 의논으로 번져졌다. 장군님께서 목책을 꺼내고 이것저것 질문하시자 농민들은 연방 밭농사, 벼농사 이야기를 펼쳐놓았다. 순박한 농민들은 땅이 분명 차례진다는 장군님의 말씀에 기세가 충천하였다. 소출이 어떤가, 지질이 어떤가 넌지시 꼭지만 건드려도 다투어 일어나서 알고있는 농사지식을 장황하게 엮어대였다. 농사물계에 들어선 서씨농민들도 만만치 않았다. 땅을 손금보듯 하고 농사물계가 책장번지듯 밝은 이들이 땅을 다루고 곡식을 키우는 일에서 누구에겐들 뒤지려 할터인가. 땅은 하느님도 지주의것도 아니였다. 아직은 선포되지 않았지만 바로 이들이 응당 주인이 되여야 하고 또 되고도 남을 사람들인것이다. 이렇게 생각을 더듬던 장군님께서는 문득 지난해 가을 황해도 파견원으로부터 가슴아픈 서면보고를 받았던 양평마을에 대한 생각이 떠올라 김창규에게 눈길을 돌리시였다. 《조직부장동무, 여기서 양평이 한 70리 된다지?》 《그렇습니다.》 장군님께서 갑자기 양평마을을 화제에 올리시자 농군들모두가 류다른 관심을 가지고 듣고있었다. 한때 소문이 자자했던 마을이기때문이다. 《그 마을에선 3.7제가 잘됐소?》 《우리 군이 아니기때문에 직접 가보지는 못했지만 아주 잘됐다고 합니다. 양평에 있는 전답들도 여기 서만호지주의 땅인데 그 마을에서는 농조투쟁이 잘되는것 같습니다. 장군님께서 작년 가을에 파견원을 통해 숱한 쌀과 고기를 그 마을에 보내주셔서 영양실조에 걸렸던 병자들도 다 회복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처구니가 없는것은 그 쌀과 고기를 조만식놈이 내려보내준것으로 세상에 헛소문이 퍼진것입니다. 저도 엊그제야 그게 헛소문이라는걸 알았습니다.》 《허허, 소문이야 어떻게 나든 무어라오. 병들이 다 낫고 3.7제 투쟁도 잘했다니 됐소.》 장군님께서는 웃음을 지으며 농군들을 돌아보시였다. 그러나 농군들은 눈이 둥그래진채 서로들 마주보며 수군거리였다. 무엇보다도 그들을 경악하게 만든것은 장군님께서 내려보내주신 쌀이 조만식이 보내준것으로 와전된 사실이였다. 얼마나 무엄한 일인가. 물론 그 랑설의 근원을 캐여보면 양평리 의원의 잘못으로 생겨난것이다. 그는 지주를 신칙하고 농군들을 살려줍시사 하는 하소의 편지를 조만식에게 띄운 그무렵에 난데없이 마을에 쌀과 고기가 내려왔기때문에 조만식이 보낸것으로 짐작하고 기뻐서 소문을 퍼뜨렸던것이다. 조순근은 다른 농군들과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있었다. 그는 양평마을에 쌀을 보내준 고마움이 커서 조만식에게 무릎을 꿇고 감사의 절을 올렸던 지난해 가을을 회고하며 낯을 붉히였다. 그때의 조만식의 얼굴은 태연하였다. 아니 이제와서 돌이켜보니 조만식은 무엇인가 당황하고 어리둥절해한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제가 보내준척하고 양평마을을 대신한 조순근의 절을 받아주었던것이다. (고현놈, 나는 여태 사람들을 웃기는 어리석은짓을 얼마나 많이 했는가.) 조순근은 가슴속 상처가 새롭게 통세를 일으켜 입술을 깨물며 머리를 수그리였다. 장군님의 목소리가 조용히 울리였다. 《조직부장동무, 그동안 양평마을같은데선 3.7제가 말썽없이 잘된것 같은데 신당리에선 왜 그렇지 못했소? 그 원인이 어디에 있소?》 《장군님, 제가 일을 쓰게 못했기때문입니다. 군당적으로 제가 신당리를 담당해서 지도하도록 과업을 받았는데 일을 옳게 못했습니다.》 김창규는 고개를 떨구고 힘없이 대답을 하였다. 《원인을 찾지 않고 그저 내가 잘못했소 하면 앞으로도 일을 바로잡아나갈수 없소.》 장군님께서는 김창규를 애틋이 바라보며 천천히 잔디밭에서 일어나시였다. 그이께서는 토지혁명의 앞길에 날카롭게 솟아있는 하나의 암초를 지금 이 재령강기슭에서 발견한듯싶었다. 수천년동안 뿌리깊이 박혀있는 문벌관념을 지주놈이 악용함으로써 무시할수 없는 난관을 조성시켜놓은것이다. 돌이켜보면 여기 신당리처럼 지주의 문벌이 크게 자리잡고있는 마을에서는 거의 례외없이 3.7투쟁이 순조롭게 되지 못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문벌관계로 장애받고있는 농촌마을이 적지 않은것이다. 장군님께서는 앞으로 신당리에서도 토지혁명을 잘해나가자면 반드시 문벌의 장애를 해결해야 되겠다는것을 새롭게 절감하게 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지금까지는 로동계급출신의 일부 사람들을 농촌혁명에 파견했다면 이제는 보다 적극적으로 로동계급집단이 토지혁명을 도와주게 해야겠다는 결심이 굳어지시였다. 이날 장군님께서는 김창규를 따로 만나 여러가지 당사업방법을 가르쳐주고 달성서씨농민들을 잘 교양할데 대하여 특별히 강조하시였다. 그러느라 장군님께서는 날이 퍼그나 저물어서 신당리를 떠나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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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김창규는 장군님을 바래드리고나서 곧장 신당리에 눌러앉아 동회를 소집하도록 하였다. 장군님을 만나뵈온 무상의 영광을 마을의 전체 농민들에게 전하고 그자리에서 농조대렬을 확장하는 모임도 가지려는것이였다. 그리고 그 기회에 장군님 앞에서 망녕을 부린 서가마을 로인들을 단단히 신칙을 하여 고질화되여있는 그들의 문벌관념을 아예 깨버릴 작정이였다. 저녁 어스름이 지자 회합에 나오라는 징소리와 고함소리가 집오래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동회 모이시오! 동회요! 아래마을 정기찬아저씨네 집으로 모이시오!》 한껏 즐거움에 들뜬 청년들의 목갈린 고함소리는 날이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 울리였다. 동회를 하게 된 정기찬네 집 앞마당엔 불이 환했다. 밖에다 여기저기 홰를 해세워서 안팎이 밝았다. 오늘저녁엔 농조원이 아닌 사람들도 다 모여와 방안과 퇴지, 마당안에 사람들이 꽉 들어차서 들끓었다. 《이사람, 이젠 올 사람은 다 온것 같네 》 출석인원을 장악하고있던 조순근이 이렇게 방안에 대고 알리자 농민들과 장군님 이야기에 열중했던 김창규가 일어나서 토방으로 나왔다. 《서가마을에서두 다 내려왔습니까?》 《빠짐없이 온것 같네. 눈에 띄는건 다 그것들뿐이네.》 장춘하가 볼부은 소리로 대꾸했다. 김창규가 처음 동회를 소집하자고 할 때 그는 서가마을것들은 부르지 말자고 했다. 생각하면 괘씸하기 그지없는데 그것들때문에 수고를 할 필요가 무엇인가고 하였다. 그리고 그들을 농조에 받아들이자는 의견에는 더욱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김창규는 장군님께서 그들을 눈띄워주려고 그만치 애쓰시였는데 그렇게 고립을 시키면 되느냐고 했다. 그래서 그는 할수없이 김창규 하자는대로 서가마을사람들도 모이게 하였던것이다. 《자, 방안에서두 이야기 그만하고 여길 보라구요. 그리구 마당 사람들도 좀 가까이 모여오시우. 오늘 이렇게 다 모이자고 한건 알겠지만 김일성장군님께서 우리 마을에 오셨던 경사도 다 알게 하고 장군님께서 우리 신당리 농민조합에 주신 과업두 잘해나가야겠기에 동회를 연것입니다. 그럼 먼저 군당조직부장어른이 말씀하겠수다.》 장춘하가 목을 빼들고 퇴지우에서 소리쳤다. 김창규가 머리를 가볍게 숙여 인사를 하고 웃는 얼굴로 마당에 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여러분, 오늘 우리들은 뜻밖에도 이 신당리앞벌에서 우리 조선민족의 위대한 령도자 김일성장군님을 만나뵙는 영광을 지녔습니다. 사실말이지 오늘 이런 경사는 우리 재령벌이 생겨서 처음입니다. 나는 이런 영광스러운 일이 있었다는것을 알리면서 신당리농민 여러분에게 한가지 섭섭한 말을 안할수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더러 이야기를 전해들었겠지만 여기 신당리 일부 농민들은 무엄하게도 장군님앞에 달려가 지주의 땅을 빼앗지 말아달라는 불손한 청을 드렸습니다. 인사불성두 이런 인사불성이 어데 있습니까. 장군님께서 찬날씨도 마다하지 않으시고 우리 농민들에게 땅을 분여해주시려고 그처럼 애쓰시는데 도리여 땅을 받아야 할 당자들이 그런 얼빠진 소리를 아무렇게나 마구 해댔으니 이게 례절이 옳습니까. 우리 장군님은 정말 도량이 넓으신분입니다. 장시간 그 한지에서 그런 청을 드린 령감들의 잘못된 생각을 깨우쳐주려고 설복하고 또 설복하시며 해를 보내셨습니다. 제가 오늘저녁 말씀드릴것은 이제부터 이 신당리에는 달성서씨니, 조씨니, 박씨니 하는 구별이 없다는것입니다. 있다면 오직 가난한 농민과 지주가 있을뿐입니다. 그래서 오늘저녁 이자리에 모인 모든 서씨농민들은 다 농조에 가입해서 한덩어리가 되자는것입니다. 어떻습니까?》 김창규는 마당사람들에게 소리쳐 말하고 사랑방에 앉아있는 서가마을 로인들을 돌아보았다. 누구도 대답이 없어 한동안 회합장은 쥐죽은듯 조용했다. 여기저기 매놓은 홰에서 탁탁 불꽃튀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서씨로인들은 웬일인지 음울한 표정들을 하고 모두 서달호를 지켜보았다. 불안스럽고도 침울한 그 눈길들을 보고 김창규는 서달호에게 분명 무슨 일이 있었던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의 예감은 옳았다. 이날 장군님을 만나뵈온 서가마을로인들은 마실방으로 쓰는 서달호네 웃방에 모여앉아 장군님의 이야기를 하며 해를 지웠다. 모두가 장군님은 하늘이 낸 분이 분명하다는 탄사들이였다. 저녁이 되자 이 집 부엌에서는 가마에 분틀을 들여놓고 나깨미국수를 누르려고 서달호의 안해와 맏딸이 땀에 떠서 돌아갔다. 갈비뼈가 알른알른한 조무래기들은 짜장 어미제비가 물어오는 먹이에 저마끔 부리를 내대며 짹짹거리는 제비새끼들처럼 부뚜막에 주런이 앉아서 분틀에서 떨어지는 국수오리를 지켜보며 목젖을 꼴깍거리였다. 나깨미국수란 분밑으로 주르르 잇달려 내리는법이 없고 똑똑 끊어져내려서 더운물가마에 들어가면 고투리가 다 여기저기 흩어져 조리로 건져낼수도 없었다. 그래서 아예 딸이 조리를 가마에 넣고 국수오리를 받아서 한참 붙들고 앉은채로 조리속에서 익혔다. 어머니도 딸도 이렇게 나깨미국수를 누를 때면 부뚜막에 모여앉은 올망졸망한 애들을 보며 눈물을 흘리였다. 다 누른 국수는 세그릇도 될가말가해서 어이딸이 한숨을 짓고있는데 느닷없이 문밖에서 《자, 만호삼촌네가 이 집에 쌀 한말을 보냅니다. 나깨미국수로 끼를 에운다는 말을 듣고 적선하는 쌀이니 어서 받으소.》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굶주린 어린것들이 좋아라고 손벽을 치며 달려나가서 쌀자루를 정지방으로 들여왔다. 《이게 뭐냐?》 애들의 들끓는 소리를 듣고 서달호가 웃방에서 달려내려왔다. 《왕벌 큰아버지가 쌀을 보냈어요. 흰쌀밥 해먹자요. 응 아버지.》 애들이 발을 구르며 아버지에게 매달렸다. 서달호는 애들을 밀쳐버리고 쌀자루를 들어서 구석쪽에 쾅 처박았다. 그리고 독을 뿜는 눈길로 쌀자루를 메고온 사람을 쏘아보았다. 《내가 쌀을 달랬어? 장군님께서 하신 말씀에 비추어보면 내 땀을 흘려서 지은 쌀이 10여석 서만호네 고간에 들어가있어. 내가 그걸 도끼를 메고들어가 고간을 깨고 내 쌀을 찾아내온다면 몰라도 고양이 쥐생각하듯 한되박 두되박 주는 그걸 내가 받아먹어? 당장 도루 가져가라!》 주위의 령감들이 그 말이 옳다고 곁들었다. 《임자도 들었지? 장군님께선 저 양평리 사람들이 농사지은 쌀이 몇백섬이 되지만 서만호한테 빼앗겨 굶을 지경이 되였다고 하시지 않았나. 그 사람들 신세나 내 신세나 뭐가 달라? 무에 적선? 싹 가져가!》 서달호는 정지방구석에 처박아놓은 쌀자루를 다시 힝 들어올려다가 메고온 사람에게 집어던졌다. 하마트면 쌀자루를 메고온 서만호의 9촌조카가 쌀자루에 맞아서 뒤로 벌렁 자빠질번했다. 그는 할수없이 쌀자루를 둘러메고 일어섰다. 방안에 앉은 령감들은 모두 가래를 돋구어올리며 대통을 두드렸다. 《엥이, 인젠 문중이구 뭐구 개 물어간걸로 알아야 해.》 《개가 물어가두 좋고 쇠가 물어가두 좋수다. 그까짓 도깨비헝겊막대 같은걸뭐…》 그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뱉었다. 서만호의 9촌조카가 혼비백산해서 쌀자루를 메고 쫓겨나갈 때 《꽤엥-》 《꽤엥-》마을아래쪽에서부터 양푼 두드리는 요란스러운 소리가 울려왔다. 개들이 문밖에 달려나가 컹컹 짖었다. 여기저기서 아이들이 우야 하고 달려다니는 소리가 일어났다. 그러자 서만호의 6촌형벌이 되는 서만길로인이 깜짝 놀라며 문을 벌컥 열어제끼였다. 《아, 이 정신보지. 오늘저녁 정기찬네 집에서 동회가 있다는 말을 들었는데 여태 잊어버리구있었군.》 만길로인은 앉아있는 사람들에게 어서 동회에 가자고 휘동했다. 《무슨 일로 동회를 한답디까?》 《글쎄 그거야 낸들 알겠어. 아까 흥묵이 사위가 나더러 사람들을 다 데리구 오라두만.》 모여앉았던 마실군들은 서만길의 손에 이끌려 마당으로 나오면서도 어리둥절하여 서로들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러던 그들은 사립문밖으로 나가자 모두 흠칫 놀라며 굳어져버렸다. 몸집이 한아름되는 서만호가 몽둥이같은 굵은 단장을 들고 막아섰기때문이였다. 《어디들 가는가?》 서만호는 노기를 띤 목소리로 으르듯이 말하고는 다들 도로 들어가자고 하였다. 로인들을 웃방으로 몰고 들어간 그는 정지방을 넌지시 내려다보았다. 그때 정지방에서는 서달호네 조무래기들이 파리떼처럼 밥상머리에 오그그 달라붙어서 후룩후룩 나깨미국수를 들이삼키고있었다. 다른때 같으면 지린내가 난다고 또 타발을 했으련만 오늘은 저녁이 늦어져 그런것을 가리게 못되였다. 《달호, 내 애들이 저렇게 나깨미국수만 먹는다게 가슴이 아파 쌀 한말을 보냈는데 형제지간에 그게 뭔가, 아던정 보던정 없이…》 서만호는 대뜸 이렇게 핀잔하며 서달호를 노려보았다. 사실 그는 마음이 뒤숭숭해서 저녁을 먹자 마을형편을 돌아보려고 서가마을로 내려오는 걸음에 쌀자루를 도로 메고 쫓겨오는 9촌조카를 만났던것이다. 그한테서 달호네들이 하는 소리를 구체적으로 전해들은 서만호는 홍두깨같은 밸이 치받쳐서 곧장 여기로 온것이다. 서달호는 정지방으로 통하는 새문을 후려닫았다. 아무리 구차해도 서만호한테서 애들 나깨미국수 해먹인다는 소리를 듣는것이 역스러웠다. 서만호는 올곱지 않은 서달호의 기색을 한참 지켜보다가 외투주머니에서 은지가 빨각거리는 권연 한갑을 꺼내 테놓았다. 그러나 누구 하나 권연갑에 손을 가져가지 않았다. 《어서 피우라는데…》 서만호는 담배갑을 들어 한사람한사람에게 권했다. 령감들은 마지 못해 한가치씩 뽑아들었다. 안피우겠다는 서달호에게도 강요하다싶이해서 한대 뽑게 했다. 이윽고 서만호는 서달호에게서 눈을 떼고 목소리를 한결 가라앉히며 말머리를 돌리였다. 《자네들이 오늘 김일성장군한테 달려나가서 우리 문중을 봐달라고 청을 올렸다는데 그건 참 잘한 일이네. 그래야 해. 암, 우리 달성서가가 어떤 성씨라구. 난 어렸을 때 밤이면 고조할아버지의 무릎에 앉아 임진왜란때 혁혁한 전공을 세운 달성서씨의 무훈담을 옛말처럼 들어왔네. 서씨조상들이 의병을 일으킨곳이 저 경상도 달성에 있는 비슬봉이라는데야. 조상들은 그 산에 진을 치고 앉아 락동강을 굽어보며 창과 칼을 갈았고 1년 삼백예순다섯날을 하루같이 산에 봉화를 지폈다네. 왜적은 그 불빛을 보면서도 얼씬을 못하구. 우리 달성서씨는 환난이 있을 때마다 몸과 마음을 합쳐서 가문을 지키구 나라를 지켰지.》 서만호는 눈을 지그시 감고 옛일을 추억하는듯 했다. 령감들은 묵묵히 앉아 장죽을 놓고 서만호가 준 권연에 성냥을 그어대였다. 얼굴빛이 모두 밝지 못했다. 조금전까지만 해도 서만호와 인연을 끊겠다고 윽윽 했지만 그 당자가 이렇게 마주앉아 가문의 력사를 풀어대니 더 억지를 부릴수도 없다. 피줄이야 아니라고 할수 없지 않는가. 령감들은 저도 모르게 한숨까지 내쉬였다. 《생각해보라구. 우리가 선산을 함께 쓰고있으면서 문중끼리 치고받는 싸움을 벌린다면 저 지하에 있는 조상들이 뭐라고 할텐가. 응, 당장 봉분을 털고일어나 불효막심한놈들이라고 종아리를 치지 않으리란말인가. 이런 흉흉한 세월일수록 힘을 모아야 하네. 그래서 요즘 문중에서 내 과거지사들을 세상에 알리고저 합심하여 진정서도 만들지 않았나. 그런데 일조에 변심이 생겼나? 난 달호의 행실이 여간 섭섭치 않네.》 서만호의 목소리는 절절했다. 붉게 상기된 그의 두눈에서는 피가 떨어질듯 괴로운 빛이 번뜩였다. 그는 좌중을 둘러보며 계속하였다. 《내가 달호나 여기 문중어른들을 생각하는 마음이 그렇지 않아. 난 우리 문중사람들이 남들보다는 배불리 먹고 옷가지라도 허술히 입고다니지 않게 하려구 늘 마음을 쓰고있어. 문중사람들 등 덥구 배부르게 하는 일이라면 입에 넣었던것두 꺼내주고싶은게 내 마음이야.》 서만호는 머리를 쳐들고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서달호는 무릎걸음으로 한걸음 다가앉았다. 《형님, 그럼 한가지 물읍시다. 그렇게 생각이 깊은이가 어째서 다른 사람들은 3.7제를 물구두 든든해있게 하구 우리 서씨들한테서는 추가소작료까지 다받아자셨소, 예? 그래 이게 돌봐주는거요? 그래 우리가 남들보다 배불리 먹고 헐벗지 않고 지내는게 뭐가 있소? 자 보오. 이 집에 무슨 세간같은게 있소? 형님은 나깨미먹는다고 걱정한다는데 그래 그걸 혀끝에 한번 대보기나 하셨소?》 서달호는 후려닫았던 새문을 쩡 열어던졌다. 부엌과 정지에는 뜬김이 서려돌았다. 찬장 하나 없는 부엌드렁에 자시물그릇에 애들 국수먹은 빈사발이 한가득 담기고 독 한개가 덩그랗게 놓여있다. 정지에는 맨 노전방에 애들이 여기저기 군드러져 코를 박고있다. 어이딸은 국수가 모자라 국수 익혀낸 물을 한사발씩 마시고 노그라졌다. 덮을것이란 헌 이불 한뙈기뿐이여서 모두들 넝마같은 옷을 그냥 입은채로 통잠을 잔다. 기실 서발막대를 휘둘러도 거칠것이란 오롱조롱 헐벗은 애들뿐이였다. 《너무해요, 너무해! 빨아먹을건 다 빨아먹구 쌀 한말 주며 적선한다구요?… 돌봐준다구요?》 《어허, 여보게 달호, 그만하게. 형님이 어찌다 오셨는데 그게 무슨 말버릇인가.》 령감들이 서달호를 나무랐다. 그래도 가문의 등걸인데 그렇게 맞서면 되는가 하는 핀잔이다. 그러나 서달호는 숨을 씩씩하며 말리는 령감들을 쏘아보았다. 그만큼 속아살았으면 됐지 계속 참으라는가 하는 밸통이다. 《놔두게, 집안끼리두 할말이야 하구 살아야지. 그래 달호, 타성놈들이 3.7제를 물었다구 우리까지 조상전례에 없는 그런짓을 따라야 옳나. 그것들이 해방이 되자 제멋대루 지랄을 쳐두 몇날 못가. 두구보라구. 앞으루 저놈들한테서 못받은 도조만 뺏아낼줄 알아. 땅두 다 뺏아낼테야, 고현놈들.》 서만호는 손을 들어 문밖을 가리키며 을러메였다. 밖에서는 지금 동회나오라는 징소리, 고함소리가 그치지 않고 울려왔다. 《흥, 땅을 뺏아요. 형님이 지금 가지고있는 땅이나 잘 건사하시우. 꽹당꽹당하는 저게 무슨 소린지 알기나 하슈. 형님 땅을 뺏자는 소리웨다.》 《뭐, 뭐 어쨌다구?!》 서만호는 참아오던 노기를 폭발하며 주먹으로 방바닥을 두들겼다. 《그래 이놈아, 내가 땅을 빼앗겨서 너 씨원할게 뭐냐? 이 배은망덕하는놈. 문중사람들이 어느 땅에 목줄을 걸구있니, 그 땅을 빼앗기면 서씨문중 삼백호가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돼서 나앉을건 생각 안하느냐 이놈!》 《걱정 마시우. 토지개혁하문 서씨문중이라구 땅 안주겠소. 땅없는 사람에겐 다 준답디다.》 서달호도 점점 열기가 올라 입에서 구렝이가 나오는지 뭐가 나오는지 가리지 못하고 휘뚜루 뇌까렸다. 한평생 살아오면서 서만호앞에서 감히 얼굴 한번 들지 못하던 그가 무슨 배심으로 저렇게 맞서는지 모두들 경악실색하였다. 그것은 서달호자신도 알수 없는 분노의 대결이였다. 《옳지, 네놈이 알구보니 토지개혁덕을 볼가 해서 괘사를 부리는구나. 엑끼, 간에 붙었다 섭에 붙었다 하는 요사한놈! 실컷 덕을 봐라! 토지개혁은 한뙈기라두 제 땅을 가지고있는 너같은 자작농, 중농의 땅두 다 빼앗는다. 호박쓰고 돼지굴에 들어가봐라. 이놈!》 서만호는 고함을 내지르고는 결별하려는듯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겁이 많은 서만길로인이 허둥거리며 그의 팔소매를 부여잡았다. 《만호적은이, 너무 노염을 타지 말게. 그 그런데 이자 중농들 토지두 뺏는다는 말이 적실한 말인가?》 다른 령감들도 이구동성으로 따져물었다. 《허허, 절 모르고 시주한다니까. 난 없는 소리 지어내지 않소. 내가 여기 이렇게 촌구석에 들어박혀있지만 세상 돌아가는 일을 다 보구있소. 토지개혁을 하문 개인토지를 가지고있는 자작농까지도 다 청산해버리네. 그러나 애국공적이 있는 사람의 땅은 다치지 못하게 됐기에 내가 서씨문중을 내세워 진정서두 쓰구 힘을 쓰는게 아닌가.》 《아, 그럼요. 형님 토지야, 아니 우리 문중토지야 대대손손 장만한 땅인데 누가 감히, 그리구 형님은 세상이 다 아는 애국자구.》 령감들은 자작농토지를 빼앗는다는 말에 속이 뜨끔해서 앉은자리에서 서만호의 편으로 넘어갔다. 《흥, 자작농토지를 누가 뺏는단말이요? 다 허튼 소리요. 그리고 형님이 애국자는 무슨 애국자요. 서강이때문에 편지질 한것이 애국자라면 그런 애국자는 쌔구 넘칠거우다. 형님, 사람 앉혀놓구 생거짓말 꾸며대려면 당장 올라가시우. 쩍하면 달성서씨가 경상도에서 봉화를 지피고 칼을 갈았다구 하는데 거기서 곽재우 의병장이 붉은바지를 입고 싸웠다는 소리는 들었어도 달성서씨가 비슬봉에서 싸웠다는 소리는 듣다가 처음이요. 이젠 그만하구 가슈. 없는 소리 지어내지 말구. 앉았던 구들장까지 파던지겠수다.》 서달호는 문을 열며 나가라고 소리쳤다. 서만호는 그의 서슬푸른 눈빛을 보자 오싹 소름이 끼쳤다. 온몸의 피가 혈관을 쓸면서 머리끝으로 세차게 거슬러 올라가는것 갈았다. 《조상을 헐뜯는 이 벼락맞아 죽을놈! 좋다. 나두 이젠 널 돌아보지 않겠다. 여기 문중어른들두 내가 싫으면 좋을대루 하게. 그러나 이다음 땅 다 떼우구 알거지가 돼가지고 나한테 찾아와서 울고불고하진 말게.》 서만호는 선언조로 부르짖고 문밖으로 나섰다. 퇴지를 내려서는 그의 두다리가 학질을 만난 사람처럼 떨었다. 누구인가 단장을 쥐여주자 후들거리는 손으로 받아서 내짚었다. 단장이 한곳을 찍지 못하고 여기저기 헛짚었다. 서달호는 내다보지도 않고 방안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방안은 한여름 소낙비가 두드리고 지나간 뒤처럼 고요했다. 등골에서 식은 땀이 흘러내려 허리까지 내려왔다. 무서운 싸움을 치르고난 그의 가슴속으로는 무어라 형언할수 없는 불안이 엄습하였다. 그는 력대적으로 서만호와 의가 덧난 사람들은 모두가 무사치 못했다는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었다. 서만호에게는 그런 악마와 같은 힘이 있었다. 사실 서가문중사람들도 그것이 무서워서 지주에게 더욱 굽실거리고 순종해온것이다. 서만호를 바래우고 들어온 령감들도 불안에 잠겨 묵묵히 담배를 태웠다. 이따금 정지에서 들려오는 가위눌린것 같은 아이들의 잠꼬대소리가 서달호를 더욱 불안하게 하였다. 《가만, 거 이자 서만호가 적실한 말이라구 했지?》 서만길이 입에서 장죽을 떼며 물었다. 《형님, 무슨 말이 적실하다는거요?》 서달호가 휙 돌아앉으며 역증을 냈다. 《무슨 말은 무슨 말. 자작농토지두 몰수한다는 소리지…》 《헛 참, 그건 거짓말이라는데두요. 아까 장군님께서두 땅없는 농민에게 땅을 준다고 하셨지 언제 자작농토지를 몰수한다고 하셨소?》 《그래두 그 사람이 그렇게 엉뚱한 소릴 지어내겠나. 이제 와서 가만 생각해보면 장군님께선 우리를 저 조순근이같은 알짜 소작농으루 아신것 같아.》 서만길은 점점 더 낯빛이 컴컴해졌다. 《좋수다. 여기서 벙어리 랭가슴앓듯 말구 마침 동회를 한다는데 거기 가서 알아봅시다. 씨원히.》 서달호가 먼저 일어나서 령감들을 내끌었다.… 서가마을로인들이 제일 늦어서 회합장에 나타난것은 바로 이런 사연이 있었기때문이였다. 물론 김창규는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지 알수 없었지만 그들의 얼굴에 하나같이 그려진 불안의 그림자가 심상치 않게 생각되였다. 그러나 그는 하던 말을 계속하였다. 《서씨농민들도 농조에 들어야 합니다. 그러니 이젠 다른 농민들도 지주 서만호와 맺힌 원한을 그 무슨 서씨문중에 대한 원한과 같이 생각해선 안되겠습니다. 저 장춘하아저씨나 조순근아저씨까지도 그렇게 생각해왔기때문에 서씨농민들이 오늘까지 농조를 더 경원해왔습니다. 이게 잘된 일입니까. 다같이 제 땅을 못가지고 가난한 소작살이를 하면서 넌 서가가 돼서 싫고 넌 박가나 조가가 돼서 싫다, 이렇게 짓몰아댈내길 하면 농조는 해서 뭘하자는것입니까. 그리구 또 말해둘건 자작농들은 앞으로 토지개혁을 해도 리해관계가 없다고 생각하고있다는데 그건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래서 오늘 장군님앞에 달려갔던 농민들중에 자작농들이 대부분인것 같은데 말 좀 해보십시오. 서만호가 그 땅을 자손대대루 붙여서 잘살라고 그냥 놔둡니까. 이 신당리에두 자작농을 하다가 소작살이로 떨어진 농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땅도 땅같은걸 못가지고 반자작 반소작을 하면서 왜 토지개혁이 자기네와는 상관이 없다고 보십니까. 나라에서는 앞으로 정평집 서달호농민처럼 땅이 적은 자작농민들, 중농들에게도 땅을 더 주고 나쁜 땅은 좋은 땅으로 바꾸어도 줍니다. 그런데 지주편에 가붙어서 토지개혁을 강건너 불보듯 한다면 그게 한심하지 않습니까. 오늘저녁 이자리에 모인 달성서씨농민들은 다 토지개혁의 혜택을 받게 됩니다.》 김창규는 두손을 내흔들며 땅을 노나주는 시늉을 했다. 김창규의 연설은 정통을 찔렀다. 바로 그 문제를 알아보려고 왔던 서가마을로인들의 눈은 금시 별처럼 반짝거리였다. 서달호의 눈귀에는 굵은 이슬이 맺히였다. 김창규의 이야기가 끝나자 장춘하가 농조원명부책을 들고 퇴지에 나와서 새 사람들을 농조에 가입시키는 일을 시작하겠다고 하였다. 《그럼 이렇게 합시다. 이미 조합에 든 사람들은 그냥 그자리에 있고 이제부터 들 사람들은 이름을 부를테니 한사람씩 나와서 여기 제 이름자곁에다 지장을 찍던가 십자를 긋던가 해야겠습니다. 그새 내가 일을 잘못했습니다. 군당조직부장한테 말을 들었지만 이제까지 서가마을과 담을 쌓고 산건 사실이요.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을터이니 서루 마음을 엽시다. 자, 서만술, 농조에 들겠소?》 장춘하가 퇴지밑에 서있는 농민을 굽어보며 물었다. 《녜, 그런데 농조에 들긴 들겠는데 저…》 《어서 말하오.》 농민은 발끝을 내려다보며 대답을 못했다. 조순근이 옆에서 왜 그러는가고 다시 물어서야 머리를 들며 래일 와서 대답하면 안되겠는가고 했다. 그 소리에 주위사람들이 와 하고 웃었다. 《거 안사람하구 의논을 해봐야겠다는군.》 《챠, 그런 잡스런 말은 왜 꺼내? 내가 농조에 안들가봐 그래?》 서만술은 뒤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그러더니 목을 빼들고 울밖을 발돋움해서 휘 둘러본다. 《다른게 아니구 내 아까 들어오면서 보느라니 울밖에 국둑발이랑 몇이 와서 엿보더군. 그것들이 가서 저 만호형님한테 고해바치면 래일부터 당장 땅떼고 빚갚으라고 지랄을 할게 아니야.》 그 소리에 조순근이 눈을 부릅뜨며 울밖을 내다보았다. 딱히 얼굴은 안보이는데 검은 그림자가 두서넛 얼른거리다가 울바자밑에 숨는것이 보였다. 《괘씸한놈들, 영길아! 너들 총 있지. 그걸루 저 울밖에 와서 어슬렁거리는놈들을 갈겨라!》 사람들이 모두 돌아서고 굴뚝옆에 앉아있던 영길이가 장총을 절컥거리며 마당으로 달려나왔다. 그 소리에 기겁을 한 검은 그림자들이 후닥닥 일어나 달아났다. 영길이와 청년들 몇이 따라가며 《이놈들, 서라!》 하고 소리질렀다. 그들을 따라가는 자위대원청년들의 뜀박질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이어 설레던 군중이 다시 정숙해졌다. 장춘하는 서만술에게 지장을 누르게 한 다음 련이어 서가들을 불러내였다. 조순근이 장춘하의 옆에 서서 일을 돕고있는데 누군지 옆에 와서 그의 손을 움켜잡았다. 《이건 뭐요?》 조순근은 눈이 둥그래져서 손을 움켜잡은 사람을 쳐다보았다. 《순근이, 우릴세, 우릴 용서하라구. 먼저번엔 정말 안됐어.》 말하는 사람은 오봉산비탈밭을 서만호한테서 소작받았다고 하면서 제 밭처럼 돌아보던 사람이였다. 제 사촌동생도 함께 지장을 찍겠다고 나와섰다. 《우리가 땅이 없어 그랬지 그 돌밭이 무슨 욕심이 나서 그랬겠나. 우리 서로 화해하자구.》 《허허, 그게 뭐, 자네들 잘못이겠어… 서만호의 롱간질에 그렇게 된거지.》 조순근은 얼굴을 붉히며 어서 지장을 찍으라고 고개짓을 했다. 지장을 찍고 돌아서는 그들은 땅이라도 분여받은것 같은 기분으로 입이 벌어져 벙글거렸다. 《다음은 서달호아저씨 나오시오.》 조순근이 사랑방에 대고 손짓했다. 그러자 군중들속에서 그 령감은 농조에 들 자격이 없다고 웨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령감은 그 성을 갈기전에는 안돼요. 농조가 뭐 저런 령감들 가난구제하는데요. 실컷 나깨미국수나 눌러먹다가 북망산에 가라구 내버려두자요.》 한 농민이 송편을 입에 문듯 볼이 부어서 소리쳤다. 그러자 일어서 나오려던 서달호가 그 소리를 듣고 어쨌으면 좋을지 몰라 같이 온 령감들을 둘러보았다. 그 령감들도 같은 처지인지라 모두 어깨가 축 늘어져 눈길을 허둥댔다. 《달호아저씨, 일없습니다. 어서 나와 지장을 찍으십시오.》 조순근의 곁에 서있던 김창규가 웃음을 짓고 말했다. 서달호는 사람들 어깨를 누르며 발을 빼였다. 걸어나오는품이 어쩌면 술에 취한 사람같았다. 걸음을 옮겨짚을 때마다 다리가 비틀거리고 손이 허우적거렸다. 얼굴은 수수떡처럼 뻘개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지경이다. 사람들은 더 말을 걸지 않고 그의 거동을 지켜보았다. 서달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조순근이 가리키는 곳에다 지장을 꾹 눌렀다. 그러더니 풀썩 주저앉으며 아이들같이 울음을 터뜨렸다. 《으으으… 내가 등신이웨다. 오늘저녁에두 우리 집에선 에딸이 나깨미국수를 눌렀시다. 내가 환장을 했지. 그 사람 못먹을걸 먹으면서두 서만호의 땅을 다치지 말아달라구 장군님께 진정을 해. 이, 이놈은 골통이 박살나두 아까울게 없어요. 날 왜 모아붙어 두들겨패질 않소? 난 아까 여기 들어와서부터 맞아죽던지 동리에서 쫓겨나던지… 그럴 각오를 하고 기다렸시다. 으흐흐흐…》 서달호는 복장을 두드리며 울었다. 조순근은 그러지 말고 어서 일어서라고 어깨를 잡아당겼다. 《날 농조에 받아주니 고마우이. 난 성을 갈겠시다. 이제부턴 서달호라구 하지 말구 박달호라구 불러두 좋아요. 윤달호라구 불러두 좋구요. 글쎄 저놈이, 저 살괭이같은놈이 오늘저녁에두 내 집에 쌀 한자루를 내려보냈수. 서만호! 이 이 구미여우 같은놈, 내가 그 쌀 받아먹고 장창 따라지목숨으루 죽어살줄 아느냐? 갈아먹어두 씨원치 않을놈! 어이구, 내가 미쳐두 바루 못미쳤지.》 《저런 마른 벼락맞을놈 봤나.》 서만호가 쌀 보냈다는 소리에 귀가 떠서 모두들 주먹을 떨었다. 《이 사람들! 우리 집이 왜 정평집인줄 아나? 우리 조상들이 뭐 정평에서 살기라두 한줄 아우? 우린 정평이 어데가 붙어있는지두 모르오. 정평이 옛날 제일 못사는곳이 돼서 그곳 사람들을 정평짜드래기라고 했답디다. 우리 집이 너무 못살다보니 옛날 내 나기전에 벌써 정평집이라는 패호가 붙은거요.》 서달호는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주위사람들이 모두 눈물이 그렁해서 얼굴을 돌리며 한숨을 쉬였다. 조순근은 옷소매로 눈언저리를 닦아내리며 서달호더러 어서 일어서라고 코멘 소리를 했다. 옆사람들이 들어일구어서야 서달호는 겨우 일어나 방안으로 비칠거리며 들어갔다. 그의 얼굴에서는 눈물 코물이 범벅이 되여 불빛에 번들거렸다. 서달호까지 가입하자 조순근은 마음이 후련하였다. 그는 신기한 생각에 잠겨 농민들의 이름이 적히고 붉은 지장이 찍힌 명부책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어제까지만 하여도 다투고 경원하던 여러 사람들이 하나로 뭉쳐진것이다. 사람이 개심되는것이 이렇게 되는것인가. 조순근은 가슴속에서 뜨거운 정이 끓어올라 번쩍 고개를 쳐들고 서씨농민들이 들어가있는 방안과 마당을 살펴보았다. 《여러분들, 이밤에, 나는 서씨들한테 고맙단 인사를 따루 하구 싶쉐다. 이렇게 다 농조에 드니 정말 고맙시다.》 조순근은 허리를 굽혀 방안과 마당에 인사를 했다. 사람들은 느닷없이 서씨들을 향해 인사를 하는 조순근을 의아쩍게 바라보았다. 그러거나말거나 조순근은 숨을 크게 들이긋고는 하고싶은 말을 계속하였다. 《이젠 우리가 김일성장군님 말씀대루 힘을 합쳐서 저, 저 서만호를 치게 됐시다. 우린 김일성장군님을 믿고 장군님 하라는대루 하면 됩네다. 내 일전에두 군중대회에 나가서 소리쳤지만 우리의 하늘이 바로 김일성장군님이시우다. 서씨문중두 이젠 김일성장군님을 믿고 따라야 살길이 열린다는걸 똑똑히 알아야 해요. 서만호같은놈을 아무리 두손끝에 받들구다녀야 땅 한평 거저 생깁디까. 배가죽에 비게가 한뽐이나 되는 저놈은 평생 우리 작인들의 뼈국물을 울궈먹고있다는걸 잊어선 안돼요. 내가 성미가 우락부락해서 서씨들한테 눈에 거슬리는 일이 많았겠는데 다 용서해주슈!》 조순근의 목소리는 갈려있었다. 그는 또한번 손을 배허벅에 대고 허리를 굽혔다. 《그만하우. 잘못이야 우리한테 더 있지.》 서씨들이 여기저기서 소리질렀다. 얼굴에 웃음이 함뿍 실린 김창규는 박수를 쳤다. 농민들이 다같이 박수를 따라쳤다. 창규는 문득 장군님께서 토지개혁은 다름아닌 사상개혁이며 인간개혁이라 하던 말씀이 떠올랐다. 스무대를 내려온다는 서씨문중의 얼음산이 눈녹듯 녹아내리는 마당에서 자신을 회개하는 농민들의 절절한 목소리를 듣느라니 그 말씀의 의미가 더욱 뜻깊어져 그는 흥분을 눅잦힐수가 없었다. 방안에서 마당을 내다보는 서달호의 얼굴에도 미소같은것이 어려있었다. 아, 내가 서만호와 맞서서 그렇게 해댈수 있은것이 결국은 내 등뒤에 이 사람들이 뭉쳐있고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기때문이였구나. 서달호는 가슴이 확 열려 두터운 손으로 더 세차게 무릎을 쥐였다. 회의가 끝나고 흩어질 때에는 서씨들도 타성사람들과 한동아리가 되여 이야기를 나누며 걸었다. 그것은 마을이 생겨 처음보는 희한한 광경이였다.
5
이튿날 마을에는 어제밤 동회에서 서씨농민들이 앞을 다투어 몽땅 농조에 들었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그 말은 마름을 통해서 서만호의 귀에까지 들려왔다.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였다. 《아, 이렇게 서씨문중이 망한단말인가?》 종일 화술을 퍼마신 서만호는 저녁녘에 으슥한 솔숲을 거닐면서 황혼이 깃든 선산을 자꾸 바라보았다. 어쩌면 조상을 받드는 지성이 부족해서 분묘속에 묻힌 조상의 망령들이 자기에게 벌을 내리는것 같아서였다. 그는 무서운 고독감을 느끼였다. 그러고보니 오늘 문중중에서 찾아오는 사람도 하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날이 어두워지자 스스로 서씨마을 몇집을 돌아보았다. 만나는 서씨마다 그전처럼 곰살궂지 못하고 무우를 먹고 체한놈들처럼 시뿌둥해서 묻는 말도 순탄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이지숙한 령감들은 예나 다름없이 《참의 형님》, 《큰집 형님》하며 존대를 해주지만 무엇인가 진짜 속마음은 뒤에 감추어두고있는것 같았다. 서만호는 집으로 돌아오는길에 어제밤 동회가 있었다는 정기찬네 집앞을 지나며 은근히 동정을 살펴보았다. 불이 환하게 켜져있는 안방에서 세상이 다 들으라는듯이 법석 떠들어대는데 어느 땅은 지질이 좋고 어데가 지질이 나쁘다는 그런 이야기들을 하고있다. 벌써 벌을 통채로 빼앗아내여 가로세로 찢어서 서로 노나가질 궁리들을 하는것이 분명했다. 서만호는 눈앞이 아뜩해졌다. 몸이 휘청거리며 넘어질것 같았다. 그는 후줄근해져서 자기 집으로 비틀걸음을 쳤다. 그는 자기가 주추돌우에 외따로 세워놓은 기둥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오자 누구도 없는 조용한 사랑방에 드러누워서 물끄러미 천정을 올려다보며 천사만념을 굴리였다. 분명 아흔아흡간 대가가 기울어지고있는것 갈았다. 《아니다! 기울어져서는 안된다. 안된다!》 서만호는 주먹을 움켜쥐고 치를 떨며 부르짖었다. 이때 문밖에서 갑자기 개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이상한 예감을 느끼며 개짖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였다. 바깥 대문앞에 내다매놓은 두마리의 개는 검은색안경을 낀 두 사람이 다가오는바람에 으앙 하고 앞발을 쳐들며 달려들고있었다. 개들은 목에 건 사슬이 끊어져나가게 잡아당기며 악악 소리를 질렀다. 이발들을 무섭게 드러내놓고 달려드는품이 물리기만 하면 당장 숨주머니가 결단날것 같았다. 다가오던 두사람은 뒤걸음을 치며 개를 말려달라고 소리쳤다. 그래도 대문안에서 사람들이 나타나지 않자 그들은 련못가근방에 나와서서 소리를 질렀다. 《여보시오! 집안에 누가 없소? 빨리 나와서 이 개들을 좀 붙들어주시오.》 그들은 손바닥을 입에 오그려붙이고 목소리를 합쳐 쌍나발을 불었다. 그제야 대문밖으로 허리구부러진 장서방이 나타났다. 그렇게 이악스럽게 대들던 개들은 장서방의 바지가랭이를 핥으며 꼬리를 저었다. 《그 개를 좀 붙들어주시오. 우리가 이 집으로 들어가야 하겠소.》 《그 눈에 건 시꺼먼 안경들을 벗수다. 그런걸 걸구다니니까 개들이 사람으로 보지 않고 짐승으로 보구 갈개지요.》 련못가에 선 사람들은 흐흐흐 웃으며 모두 색안경을 벗어서 주머니에 넣었다. 《이놈! 짖지 말아.》 장서방이 발을 탕 구르며 개를 욕질했다. 개들은 그제야 련못가의 사람들이 다가와도 짖지 않고 꼬리를 저었다. 그들은 버릇이 됐는지 대문을 넘어서면서부터 또 검은색안경을 꺼내서 눈에 걸었다. 벌써 서만호는 사랑마루에 나와있었다. 그는 걸어들어오는 사람들을 엄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이 댁 참의아버님이십니까?》 두사람은 대돌밑에 가서 허리를 수그리며 물었다. 《그렇소. 어디서 온 사람들이오?》 《저흰 서울에서 들어왔습니다. 서강선생이 보내서 이렇게 참의아버님을 찾아왔습니다.》 《뭐, 뭐 우리 강이가? 이런 반가운 일이 있나. 어서들 올라오시오.》 서만호는 두손을 내밀어 끌어올리는 시늉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둘이는 대돌로 올라왔다. 그들은 마루우에 올라와서 다시한번 허리를 굽히며 서만호에게 인사했다. 《아, 인사는 무슨 인사를 자꾸 한단말이요. 어서 들어갑시다.》 서만호는 두사람을 데리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는 덧문을 후려닫고 미닫이도 밀어닫았다. 《그래, 우리 애가 보내서 왔단말이요. 그 애가 지금 어디 있소?》 서만호는 아래목자리에 올방자를 틀고앉으며 다시 물었다. 《예, 그렇습니다. 서강선생은 요즘 서울에 나와있습니다. 뒤따라 평양에 들어온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임무를 주며 평양에 가던 길에 참의아버님을 만나보라고 하기에…》 《무슨 임무요?》 《저, 그건 아직 말씀드릴수 없습니다.》 《음, 그럴수도 있겠지. 복잡한 시대에 쌍방이 싸움을 하고있으니까.》 서만호는 며칠전 마름이 조만식에게 갔다와서 전하던 말이 생각났다. 지금 중앙에서도 민심이 적지 않게 공산당쪽으로 쏠리고있기때문에 사태가 급해졌다는것이였다. 그래서 조만식도 토지개혁을 반대하는 성명서나 항의문을 낼 준비도 하는 한편 공산당과 결사적인 각오로 맞설 태세라는것이다. 분명 이 사람들도 그런 급한 사태와 련관이 있어 들어오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둘이 다 색안경을 끼여서 어떤 얼굴인지 딱히 알수는 없으나 한사람은 키가 크고 딴사람은 키가 중키나 되는 사람이였다. 둘이 다 뼈다귀가 굵고 몸집이 든든하게 생겼다. 키가 큰 사람의 이름은 고택이고 중키의 사람은 한상배라는자였다. 사실 이들은 서강이 미군정청 통역관을 하면서 첩보계통에 발을 들여놓던 초기에 그의 휘하에 끌려든 졸개들이였다. 이들은 서울에서 좌익세력을 탄압하는 일에 몰두하다가 서강의 지령을 받기 바쁘게 입북한자들이였다. 서만호와 잠간 이야기를 나누고난 고택이는 들고온 번쩍거리는 들가방을 열고 거기서 횡서로 쓴 상표가 붙은 곽 하나를 꺼내였다. 《저 이건 미국제보약입니다. 늙은이들이 쓰면 청춘이 되살아난다는 고가약입니다. 서강선생이 아버님건강을 걱정하며 들어오는 길에 가져다드리라고 해서 가져왔습니다.》 《음, 그놈이…》 서만호는 중얼거리며 약곽을 받았다. 약곽부터가 놀라왔다. 곽에 은지를 입혀 상표가 더욱 번쩍거리였다. 상표엔 손에다 무엇을 든것 같은 미녀가 그려져있었다. 그곁에 까불거려 써넣은 횡서가 있는데 무슨 말인지 알수 없었다. 《그 미녀가 바로 미국 베드로섬에 서있는 자유의 녀신입니다. 자유국가인 미국을 상징하는 녀신인데 이 약을 쓰면 사람의 생명도 그 녀신의 영원성과 같이 만년장수를 한다고 합니다.》 《오, 그런가. 그런데 이 손에 들고있는건 뭔가?》 《하나는 홰불이고 하나는 방패입니다.》 《놀라운 나라군.》 서만호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감탄했다. 《게 장서방 있느냐?》 그는 새문을 두드리며 장서방을 찾았다. 《예, 여기 있소이다.》 《빨리 가서 술상을 차려오라구 일러라.》 《예, 알겠소이다.》 장서방은 새문도 열지 않고 대답하며 돌아섰다. 뒤문밖에 숨어서 남편방의 이야기를 엿듣던 월미가 장서방이 나오는것 같아 얼른 기둥모서리저편으로 비켜섰다. 날이 갈수록 남편에게 싫증을 느끼며 서울로 내뺄 생각을 하던 월미였다. 그리하여 그는 남편의 머리맡에 놓여있는 큰 금고의 열쇠를 노리고있었다. 금고속에 있는 돈을 한보따리 훔쳐내서 트렁크에 넣어들고 뛸 생각이였다. 그런데 좀체로 열쇠를 훔쳐낼 기회가 오지 않았다. 열쇠에 끈을 매서 배에 휘감고있다고 하기에 밤에 한자리에 들어 잘 때 배를 어루만져보기도 했다. 그러나 열쇠는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야 열쇠둔곳을 알수가 없었다. 그래서 노상 마음을 조이며 남편의 방에서 무슨 소리만 들려와도 뒤문옆에 숨어서서 엿듣군 했다. 서만호의 방으로는 술상이 들어왔다. 서만호는 마음이 흐뭇해서 젊은 사람들에게 술을 권했다. 그는 자기 형편이 각박하게 죄여오는것 같은 때에 서강이 밀파한 젊은 사람들을 앞에 앉혀놓고보니 속이 후련해지고 앞날이 환히 빛을 띠는것 같았다. 무슨 임무를 맡고 들어온다고 하면서도 말을 못하겠다고 하니 십상 중대한 임무일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과는 서울형편이고 또 서강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묻지 말아야 옳을것 같다. 이때 장서방이 새문을 비써 열며 대문밖에 마을사람들이 찾아와 주인어른을 만나겠다면서 기다린다고 했다. 《뭐, 이밤중에? 무슨 일때문에 왔다더냐?》 《예, 농조에서 주인어른께 꼭 할말이 있다나봅니다.》 《뭐 농조에서? 가만 그럼 둘이 앉아 술을 나누게. 내 잠간 나가보구 올테니.》 서만호는 구리주전자를 들어 술을 부어주며 말했다. 《어서 그렇게 하십시오.》 서만호는 자리에서 일어서 장서방방으로 내려왔다. 《누가 왔다구?》 《예, 물방아간 정기수와 조순근, 장춘하 그리고 한두어명 더 따라왔습니다.》 《무엄한놈들.》 서만호는 욕을 퍼부으며 마당으로 나갔다. 대문안에는 흑호가 찾아온 사람들을 경계하며 뻗치고 서있었다. 조순근이며 장춘하, 정기수들이 곰방대를 빨며 걸어나오는 서만호를 쏘아보고있었다. 뒤에 따라온 두 청년은 어깨에 총까지 메였다. 마을 자위대원들이였다. 《무슨 일들인고? 이 재밤중에?》 《밤에 이렇게 찾아서 안됐시다. 그래두 꼭 알려야 할게 있어서 왔시다.》 장춘하가 한발 나서며 배를 내밀고 서있는 서만호에게 점잖게 말을 했다. 《뭔데?》 《다름이 아니구, 어제 여기 서가마을농민들이 모두 농조원으로 가입했다는걸 알리면서 동시에 농조의 결정대로 그들이 추가로 문 소작료를 돌려받아야겠다는걸 통고하자는거웨다. 말하자면 3.7제결정을 정확히 집행하자는것이지요.》 조순근이 쥐고온 장부책을 펼치며 새로 가입한 농조원이 50여명 되는데 이들이 추가로 가져온 소작료 120석을 다 내놔야겠다고 했다. 서만호는 조순근을 쏘아보다가 머리를 뒤로 제끼며 너털웃음을 웃었다. 《그건 그렇게 못해. 그리구 농조결정이라는건 나하구 상관없는 놀음이야. 난 땅임자로서 계약대루 받았을뿐이구…》 어둠속에서 서만호는 이를 갈고있었다. 《그럼 응하지 않겠다는거요?》 조순근이 따져물었다. 《물러가게, 되지도 않을 소릴 들고다니며 야밤중에 소란을 피우지 말구.》 《좋시다. 그럼 우린 이 댁에서 읍에다 도매한 쌀을 회수할테유.》 장춘하는 주먹을 쥐고 내흔들었다. 같이 온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서만호의 거동을 살폈다. 《엑끼! 이 불한당같은놈들! 이놈들을 내쫓지 못할가?》 서만호는 발을 구르며 흑호에게 소리쳤다. 조순근이들은 이젠 할말을 다했으니 돌아가겠다고 했다. 그들이 돌아서자 총을 멘 두 자위대원청년들이 뒤에서 따라걸었다. 《야, 이 시라소니같은놈아, 저놈들을 왜 때려눕히지 못해? 뭐, 도매한 쌀을 빼앗겠다구.》 서만호가 발광이 나서 옆에 서있는 흑호의 등을 갈겼다. 그바람에 대문을 나서던 청년들이 뒤를 돌아보며 눈알을 굴렸다. 그들을 따라나가려던 흑호는 기겁을 해서 그자리에 굳어져버렸다. 《아하, 통탄할 일이로다! 저 거지같은것들이 언제부터 저런 무엄한짓을 하게 됐단말인가. 내 저놈들 껍질을 벗겨 나무에 매달지 못하면 이 성을 갈겠다. 이, 이놈들, 어디 두고보자.》 서만호는 온몸을 와들거리며 대문밖에 뛰여나가 조순근이네들이 가는 앞길쪽에 대고 웨쳐댔다. 대문의 수장목에 쓰러지듯 기대선 그의 입에선 짧은 비명같은 소리도 울려나왔다. 서만호가 조순근이들한테서 뜻밖의 봉변을 당하고있을 때 월미는 서울사람들앞으로 들어가 술잔에 술을 부어 권하며 서울이야기를 듣고있었다. 서울로 도망칠것을 꿈꾸며 요새는 내내 서울을 생각하는 월미인지라 가만히 있을수 없었다. 《서울은 아주 좋습니다. 지금은 미국 신사들과 조선 신사들이 얽혀돌아다니며 료정출입도 하고 한강백사장으로 나가 산책도 한답니다.》 《지금도 종로거리, 남대문거리가 붐비겠지요?》 월미는 목구멍까지 호기심이 가득차서 물었다. 《붐비다뿐이겠습니까. 그런데 서울에 대한 관심이 보통아닌데요.》 《저는 꿈은 서울에 두고 육신만 여기 와있어요.》 《아니 육신만 여기로 오다니? 꿈도 가지고와야지요.》 고택이와 한상배는 무르팍을 치며 껄껄거렸다. 그들은 인차 이게 서만호의 돈을 먹자고 달라붙은 서울태생의 첩이라는것을 알아먹었다. 그러지 않고야 나이 푸름푸름한 젊은 녀자가 무엇때문에 늙은 령감을 끼고 살겠는가. 월미는 무슨 노래인지 머리를 숙이고 군노래까지 부르며 또 술잔에 술을 따랐다. 《좀 크게 부르시오. 내가 장단을 칠게.》 고택이 이러며 상머리에 저가락을 대고 다드락거렸다. 《아이, 그만두세요.》 월미는 얼굴을 붉히며 손을 저었다. 밖에서 서만호의 발걸음소리가 났다. 월미는 얼른 저고리앞자락을 여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새문미닫이를 열고 제 방으로 꼬리를 감추었다. 《첩이 괜찮은데, 신녀성인것 같애 》 고택이 한상배에게 수군거렸다. 서만호가 방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치떨리는 소리를 듣고 와서 얼굴이 시꺼멓게 동해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분기를 담차게 눌러내며 술상머리에 들어앉았다. 《아니, 이거 그새 술들을 안한 모양이군.》 《참의아버님, 많이 들었습니다. 그저 우린 술만 있으면 그만입니다. 서울에서도 저녁마다 명월관으로 간다, 카페로 간다 합니다.》 벌써 아까와는 다르게 혀끝이 까부라진 소리였다. 《음, 가야지. 젊은 때인데 취흥이 없이 한세상을 살수가 있겠나.》 《아버님, 술 많이 먹는다고 욕하지 마십시오. 우린 아무리 취해도 제정신을 잃지 않습니다. 저 아버님도 한잔 드시오.》 고택이 아까 서만호가 들다가 나간 빈잔에 술을 따랐다. 한상배는 곁에 앉아 그저 빙긋빙긋 웃기만 했다. 서만호가 술을 들고 빈잔을 놓자 고택은 또 한잔 따랐다. 《참의아버님, 술도 마음껏 드시고 무슨 고민이 있으면 우리들한테 말해주십시오. 우리가 참의아버님한테 고통을 가해오는자가 있다면 그저 이렇게 해던지겠습니다.》 그는 손을 들어 목을 베는 시늉을 해보이였다. 《내가 무슨 고민이 있겠소. 그리고 무슨 고통을 가해오는 대상이 있겠소?》 서만호는 시침을 뗐으나 목소리는 저절로 처량하게 울리였다. 《그래도 서강선생은 북조선에서 이제 곧 토지혁명이 일어난다고 하면서 아버님한테 가서 잘 위안해드리라고 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이미 전쟁을 선포한 사람들입니다.》 《뭐, 뭐 전쟁?》 《참의아버님, 백만장졸이 있어야만 전쟁을 하는줄 압니까. 우리는 혼자서도 하고 둘이서도 합니다.》 을러대는 잡도리가 꼭 갈바람이 일것 같다. (음, 이게 자객들이구나, 테로패들이야. 하긴 무슨 방법으로든지 공산당패들과 맞서나서야지…) 서만호는 마음이 든든해지는것을 느끼며 고택이들을 고쳐 쳐다보았다. 그들은 생김새가 기운도 쓸만하고 담력도 있어보였다. 고택이는 코가 둥실하고 입이 큰데 곁에 앉은 한상배는 작은 코에 작은 입이고 그 입에 줄곧 늠실거리는 웃음이 어려있다. 주먹을 거머쥐면 무슨 일이든지 해낼것 같은 인상들이다. (좋아, 정치라는것도 이런 힘을 안받침해야 하고말고, 전쟁을 선포했다는 말이 그럴듯해. 암, 전쟁을 해야 하고말고.) 《자, 둘이 다 내 잔을 받게.》 서만호는 자기의 빈잔을 고택에게부터 내밀어주고 술을 따랐다. 고택이 다 마신 다음에는 그 잔을 또 한상배에게 내밀어주고 술을 따랐다. 그저 자기의 량손에 장검을 거머쥔듯 한 생각이 들어 가슴이 후련해왔다. (네 이놈들 보자! 내 네놈들의 사지가 찢어지는걸 내 눈으로 보구야말테다.) 그는 더운물 끓듯 치밀던 격분을 누르며 입속으로 부르짖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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