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서《불멸의 력사》 14

        장편소설

 

 

                                     석  윤  기  

 

( 제 29 회 )

 

10

 

산 하나를 넘자 대밀림이 시작되였다. 백두산에 뿌리를 박고 동서로 길게 내뻗은 큰 산줄기에 잇달린 산들은 오를수록 산세가 웅장하고 험해졌다. 게다가 키가 20m씩 되는 아름드리 이깔나무의 바다가 끝간데없이 펼쳐져있었다.

밀림속으로 얼마 들어가지 않아서 날이 어둡기 시작하였다.

하늘은 흐리고 밀림은 깊어서 묵은 잡초덤불속에 가까스로 드러나던 희미한 오솔길은 인차 어둠속에 묻혀버렸다.

어느 산등에서 숙영지를 잡았을 때 지휘관들이 사방을 둘러보니 그것이 그 아근에서는 그중 높은 봉우리라는것을 알수 있었다. 어찌다 성긴 나무 정수리사이로 별 하나가 반짝거렸는데 그것은 숙영지와 거의 수평으로 바라보였다. 머리우에서는 별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대원들은 지쳐서 인차 잠들어버렸다. 급히 동네를 떠나기는 했지만 깊은 숲속에 들고보니 적정이 당장 있으리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우등불가에서 잠들지 못하시는 사령관동지의 근엄한 안색을 읽은 오중흡은 아무래도 이 자욱하게 흐린 숨가쁜 밤이 무사하게 끝나지 않을것만 같은 예감이 들었다.

그는 한 우등불가에서 중대장 박태진과 함께 근 1시간이나 말없이 앉아있었다. 그자신이 말수더구가 적은 사람인데다 박태진이 역시 말이 없는 사람이였다. 몸매가 담찬 대신 키가 작고 눈이 반짝거리는 이 청년은 무슨 일에나 몸가짐이 무겁고 침착하였다. 실수는 없었지만 아무 일을 맡겨도 너무 재는것이 많은 그를 데리고 급한 정황에 부닥치게 되면 안타까울 때가 많았다.

《중대장동무, 잠이 오지 않으면 나하고 같이 바람이나 쏘이지 않겠소?》

오중흡은 일어서며 태진을 넌지시 바라보았다.

《그러지요. 그럼 누굴 데리고가는것이 어떨가요?》

《그래, 하지만 아직 안자는 동무들이 있소?》

《신길남동무네를 대기시켜놓았습니다.》

오중흡은 이윽히 태진을 바라보았다. 그런것을 지시한적은 없었다. 그러나 생소한 산중에서 더구나 사령관동지께서 적정이 있을수 있다고 말씀하신 뒤끝이라 대원들을 다 재우고도 그중 끌끌한 소대만은 재우지 않고있는 그가 새삼스럽게 미더웠다. 그러나 오중흡은 자기 심중을 일체 내색하지 않고 앞서 걸음을 옮겨놓았다.

그가 100m도 못 갔을 때 박태진이 소리없이 따라왔다. 뒤돌아보니 신길남이를 비롯한 10여명의 대원들이 뒤따르고있다.

아까 별빛이 보이던 등성이에 나섰으나 그 별빛은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보면 두껍게 흐려있던 중천의 구름이 어느새 하늘전체를 삼켜버린듯 하다. 캄캄해서 뭐가 뭔지 가려볼수 없었다. 다만 숨가쁘도록 내리누르는 흐린 공기만이 력력히 느껴진다.

산등성이를 타고 한참 올라가니 숲은 더욱 빽빽해졌다. 숙영지가 그리 멀지도 않겠는데 방향도 가려볼수 없을만큼 깡그리 어둠속에 파묻혀버렸다. 음향도 별빛도 모든것이 녹아없어졌다.

한 대원이 무엇에 걸리여 나가넘어졌다. 넘어져서는 어디에 또 걸렸는지 인차 일어나지도 못하고 비칠거린다. 맨뒤에 따라오던 오중흡이 그를 부축해주며 낮게 속삭였다.

《조심하오. 저쪽은 비탈이요.》

《묵은 칡넝쿨이 마구 엉켰소다. 그렇다면 그렇다고 말할게지.》

그는 보이지도 않는 무릎의 흙을 털며 앞사람들이 듣도록 일부러 크게 중얼거렸다. 목소리를 들어보니 강정섭이다. 정섭이를 특별히 입대시키신 사령관동지의 뜻을 받들자면 처음부터 신을 단단히 신겨 그를 어엿한 유격대원으로 길러내야 할것이다.

오중흡은 정섭이의 소매를 잡아채며 엄하게 속삭였다.

《조용히!》

《왜 그럽니까? 적정이 있습니까?》

정섭이는 놀라서 목소리를 죽이고 물었다.

《그 누구요? 떠드는게?》

저만치 앞서가던 박태진이 어둠속에 걸음을 멈추고 엄하게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요. 어서 나가오.》

오중흡이 쭈밋거리는 정섭이의 앞을 막아서며 이렇게 말하자 박태진은 마음이 놓이는지 다시 발걸음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멀어져갔다.

정섭이는 뗑해서 련대장을 힐끔 돌아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순찰을 나간다고 해서 따라서기는 하였지만 이 어두운 밤 철문속에 든것 같은 밀림에서 그처럼 목소리를 죽이면서까지 조심을 해야 할 대상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한 그였다. 차라리 어둠과 숲이 무시무시하게 느껴진 그는 이럴 때 좀 여럿이 떠들썩하게 걸었으면 을씨년스런 생각이 덜할텐데 하는 생각까지 해보았었다.

《오늘밤 적정이 있을수 있다는 말을 들었지?》

오중흡이 그의 귀전에 대고 속삭였다.

《들었습니다. 마을에서부터…》

정섭이는 무엇인가 풀리지 않는것을 느끼며 그런 기분을 타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건 누구의 말씀이요?》

《제 듣기엔 사령관동지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는것 같던데요.》

《그렇다면 적이 이 어방에 있는거요.》

오중흡의 말은 겨우 알아들을만큼 낮았으나 쇠뭉치같이 묵중하게 울리였다.

《이 숲에 말입니까?》

정섭이 놀라서 새삼스럽게 사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앞에서 《쉿》 하는 목소리가 전류처럼 흘러왔다.

정섭이는 그자리에 굳어지고 오중흡은 소리없이 잡초덤불사이를 빠져 앞으로 갔다.

《무엇이 있소?》

《모르겠습니다. 잘못 봤는지…》

신길남이와 나란히 무릎을 꿇고앉은 박태진이 자신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잘못 보다니? 동무가 잘못 본단말이요?》

오중흡은 그럴수 없다는듯이 어둠속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산의 밋밋한 륜곽이 가까스로 느껴질뿐 실지 육안에 걸리는것은 없었다. 산의 륜곽이 느껴지는것을 보면 무던히 높은데 올라온 모양이다. 그래서 그런지 습기찬 바람이 나무잎들을 흔들며 지나간다.

《보오!》

오중흡이 태진의 무릎을 흔들었다.

막막하도록 넓게 펼쳐진 어둠의 바다 한가운데 빨간 점이 피여올랐다. 바늘구멍만 한 그 점은 광막한 공간에 떠오른 오직 하나의 점으로서는 너무나 작았지만 유일하다는 그때문인지 선명하였다.

태진이 조금이라도 거리를 가까이 해보려고 몸을 앞으로 구부리며 목을 뽑았지만 그때 벌써 그 점은 사라지고 없었다.

《반디불 아닙니까?》

신길남이 옆으로 다가오며 속삭였다.

《이게 어느때게 반디불이란말이요? 보오, 또 나타났소.》

오중흡은 무엇인가 짚이는것이 있는지 이제는 별로 긴장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하였다.

《담배불이요.》

《예?》

《냄새가 나오. 한 5리 되는것 같소 》

5리라는 말에 대원들은 설마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저마다 떡심이 풀리여 련대장곁으로 다가왔다.

《중대장동무가 몇동무 데리고 가보시오. 틀림없이 놈들의 숙영지 같소. 얼마나 되는지, 어디서 오는놈들인지, 뭘 가지고있는지 알수 있는껏 알아오시오. 난 사령부에 돌아가야겠소.》

1시간 지나서 습격전투가 진행되였다.

대마록구방향과 현성쪽에서 몰려온 경찰《토벌대》들의 혼성부대는 래일새벽에 옥돌골, 휘풍동 일대를 포위하여 유격대를 《일망타진》하려다가 불의습격을 당하여 숱한 주검을 질질 끌고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격전이 끝난 새벽녘부터 드디여 비가 쏟아졌다. 동은 트려다가 말고 어둠은 자욱한 비안개뒤에 숨어 물러가지 않았다.

오중흡이가 7련대의 일부 력량으로 적을 달고 곧장 북상하였다.

기본대렬은 은밀히 동북방향으로 구붓하게 선회하였다. 7련대의 나머지성원들은 곽성규중대장의 지휘하에 사령부대렬과 함께 행군하였다. 신대원 강정섭이도 여기에 끼여있었다.

 

11

 

얼마를 갔는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비는 그냥 쏟아진다.

《이런, 제기-》

강정섭이는 너무 비가 퍼붓는바람에 잠시 눈을 감고 걷다가 아름드리나무에 부딪쳐서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졌다. 벌써 몇번이나 넘어졌는지 모른다.

처음에 련대장이 련대의 기본력량을 데리고 떠나가버렸을 때 어쩐지 자기는 축에서 빠진듯 하여 섭섭한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러던게 행군을 시작하여 반나절쯤 지나자 그런 생각 저런 생각 다 없어지고 그저 쉬고싶은 생각뿐이였다.

비발이 눈코를 뜰수 없게 들이치는데 너무 숨이 가빠 입을 벌리면 입안으로 비물이 마구 쓸어들어왔다.

격검채로 얻어맞은 어깨, 허리, 구두발에 채인 정쟁이, 칼에 찔린 넙적다리며 어깨-온갖 상처가 다 쑤시고 결린다. 머리가 훗훗하는게 열도 나는것 같다. 첫째 숨이 가빠서 못견디겠다.

(내가 이럴수가 있는가?)

너무 가쁘다나니 이런 생각도 떠올랐다. 처서판에서는 힘꼴이나 쓴다는 축이였고 산이나 숲에 들어서는 자기도 막힐데가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못견디겠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한줄로 늘어서서 말없이 걷는데 무슨 생각들을 하는지는 몰라도 자기처럼 나무에 부딪치거나 넘어져 뒹구는 사람은 없었다. 대오에서 떨어졌다가 헤덤비며 달려가는 사람도 없고 힘들다고 두덜거리는 사람도 없다. 그러니 이 대오에서 제일 병신같은게 강정섭이 자기다. 기분이 나쁘지만 사실이 그런것을 어떻게 하는가. 한참을 더 가니 기분나쁜것도 다 없어지고 나는 신대원이니까 그럴수밖에 없지 않느냐, 좌우간 좀 쉬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나 휴식명령은 아무리 기다려도 내리지 않는다.

다시 산 하나를 넘어서자 이깔나무숲은 성기여지고 봇나무와 쇠스래가 듬성듬성 들어찬 혼성림이 나타났다. 얼마후에는 드문드문 공지도 보이였다. 이어 모래와 돌자갈이 깔린 골짜기다. 가운데로 탕수가 흘러간다.

틀림없이 여기서 휴식하겠지 하고 사위를 두리번거리는데 어둠을 째는 번개처럼 《행군속도를 높일것!》 하는 구령이 들려왔다.

주춤거리던 대렬은 또다시 숨가쁘게 내달렸다.

골짜기를 건너가서 다시 앞을 막아선 산 하나를 넘어서서야 비가 억지로 멎었다. 멎어가지고도 시원히 개일 생각은 않고 이슬비를 날리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정섭이는 입안에서 욕설을 퍼부었다.

《더러운놈의 하늘!》

다시 골짜기를 건느고 산 하나를 또 넘어서서야 비로소 휴식이 선포되였다.

마른나무를 찾는다는것은 행군보다 결코 헐하지 않은 일이였다. 그러나 구대원들은 진창을 밟고다니면서도 어디서 쏘시개감을 구해와서는 곧 우등불을 피워올렸다.

정섭이는 우등불곁에서 한심하게 해여지고 부풀어난 발바닥을 들여다보며 기가 막힌 생각이 들었다. 물집이 잡힌데다 물속을 차며 걷다나니 발바닥의 굳은살이라는것이 온통 불어나서 제갈래로 밀리고 헤쳐져 새빨간 생살이 석류속처럼 입을 벌리고있다.

다시 행군을 시작하면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저러나 온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오르는것이 우등불의 화기가 따갑도록 바투 다가앉아도 턱이 덜덜 떨리고 이가 절로 맞쪼인다.

기가 막혀 고개를 들어보니 우등불에서 피여오르는 연기와 젖은 옷가지들이 마르는 김이 한데 어울려 골짜기에는 푸른 안개가 자욱히 서리였다.

열걸음도 못되는곳에 작식대의 우등불이 있었다.

김정숙동지께서 주런이 내건 소랭이안을 주걱으로 저으며 연신 재채기를 하는 철구아주머니를 불안스럽게 곁눈질해보신다.

《담요를 쓰고 불곁에 좀 눕지요.》

이런 따뜻한 목소리가 울리여온다. 그러니 저 아주머니도 나처럼 행군에 녹초가 된 모양인가.

별안간 급한 발자국소리가 울려왔다.

모두 놀라서 돌아본다. 방금 지나온 큰 산마루에서 총소리가 터져올랐다.

행군명령이 떨어졌다.

이런 일에 익숙한 유격대원들은 어느새 행장을 갖추고 늘어섰다. 벌써 선두대오는 골짜기를 건너 저쪽에 길게 뻗어나간 산턱으로 붙었다. 그 산너머에는 비구름에 가리워 형국을 가려볼수 없는 산그림자가 첩첩히 이어져있었다.

정섭이가 가까스로 발싸개를 다시하고 일어서니 구수한 강냉이냄새가 창자를 우벼내는듯 하다. 오늘 종일을 굶었다. 다 익어가는 저 강냉이를 어떻게 하는가?

그가 허리를 구부리고 신들메를 하는 사이 작식대에서도 바삐 돌아갔다.

《이 일을 어찌오?》

철구아주머니가 벌렁벌렁 끓는 밥가마를 내려다보며 한심한듯이 중얼거렸다.

《배낭을 얼른 꾸려요.》

김정숙동지께서는 불타는 우등불을 이리저리 헤쳐놓으며 말씀하시였다.

채옥이와 금숙이가 달려왔다. 재봉기를 뜯어 진 금숙이는 제 배낭우에 맹물이 끓던 소랭이 몇개를 포개서 덧짐쳐얹었다.

《철구아주머니, 먼저 떠나세요. 채옥동무, 철구아주머니를 좀…》

빨갛게 익은 얼굴에서 줄줄이 흘러내리는 땀을 소매로 씻으며 김정숙동지께서는 채옥이를 미덥게 돌아보시였다.

채옥은 잠시 냉과리가 진 연기를 피워올리는 우등불을 기가 찬듯이 내려다보더니 《알겠어요.》하고 짧게 대답했다.

《녀성동무들이 더 고생이구나.》

정섭이는 서글픈 어조로 중얼거리고 길을 떠났다. 배고픔도 고달픔도 참을수밖에 없다. 그런데 나는 왜 이렇게 힘이 드는가? 그놈들한테 매를 맞은때문인가? 신대원이 돼서 그런가?

다시 행군을 하자니 반지빠른 휴식이 오히려 더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을 주는것 같았다.

엎친데덮친다고 또 비가 쏟아졌다.

풀밭도 다 안고넘어가도록 탕수가 쏟아져내리는 물매 급한 산을 톺아올랐다.

모두 물참봉이 된데다가 진탕을 뒤집어썼다.

정섭이는 앞사람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깐힘을 썼다. 창대같이 쏟아지는 비속에 길도 없는데를 한줄로 늘어서서 톺아오르기때문에 대렬에서 떨어지기만 하면 영낙없이 외토리가 되고만다. 나무밑에 누가 쓰러져서 신음소리를 낸다 해도 알아볼 사람이 있을것 같지 않았다.

정섭이는 대렬에서 떨어질가봐 겁이 나서 걸음을 다우친다는것이 아래도리가 휘청거리는바람에 엉덩방아를 찧고 미끄러졌다. 겨우 일어나서 푸-푸- 비물을 불며 앞을 내다보면 삼대같이 들어찬 이깔나무숲속을 비줄기가 채찍처럼 마구 두들겨대는데 한줄로 늘어선 행군대렬이 아득히 멀어져뵈여서 다시는 따라잡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는 유격대생활이 이렇게 시작될줄은 상상도 못해보았다. 산속에서 살며 싸우려니 고생을 하리라는것은 짐작했지만 설마하니 비때문에 이렇게 못견딜 지경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보지 못했다.

(야, 급하구나-)

이런 소리가 종시 입밖으로 새여나오려 하였다.

이때 저만치 떨어진 곳을 두사람이 지나간다.

《넨장, 지난 겨울에는 눈도 퍼붓더니 이제는 또 비로군. 어디 실컷 퍼부어봐라. 아무렴 눈속에서 견디였는데 비를 못견딜가…》

박인섭의 목소리다.

《비도 급해요.》

최병규가 기관총을 추스르며 대답한다.

이제는 후위로구나. 저런 유명한 기관총수들도 급해하는구나. 이런 생각을 하니 어느 정도 위안도 되였다. 그러나저러나 저 사람들까지 지나가버리면 뒤에는 적들이 있을뿐이다.

(에- 일어나야지, 내가 주저앉아버리면 나를 특별히 입대시켜주신 장군님께서 얼마나 섭섭해하실것인가.)

정섭이는 총대를 지팽이삼아 짚고 가까스로 일어났다. 그리나 얼마를 못가서 아까 그 가파로운 굽인돌이에서 다시 미끄러졌다. 그는 진창속에 머리를 구겨박은채 역증을 터뜨렸다.

《에잇, 차라리 놈들이 오면 쏘아제끼고말겠다!》

그러고는 마침 옆에 서있는 이깔나무밑둥에 등을 대고 퍼더앉아 고개를 푹 떨구고 눈을 감았다.

《개같은놈들, 오기만 해봐라. 내가 여기서 후위노릇을 할테니…》

다시 중얼거렸으나 말끝은 잘 맺혀지지 않았다.

가슴이 허전하고 쓸쓸한 생각이 들었다.

혁명을 하겠다고 따라나선 내가 이런 무인지경에 홀로 앉아 죽기를 기다리다니… 그래도 손가락 하나 움직여지지 않았다.

《어디 다쳤어요?》

따뜻한 목소리가 울려왔다. 정섭이는 꿈속에서처럼 그 소리를 들으면서 별안간 울고싶은 생각이 났다. 사람의 목소리가 그렇게도 그리웠다.

《못걷겠어요?》

정섭이가 대답을 안하니 부드러운 손길이 한쪽팔을 부축한다.

꿈속에서 듣는 소리가 아니였다. 정섭이는 고개를 돌렸다.

김정숙동지시였다. 커다란 배낭에 배낭만한 자루를 덧짐쳐얹고 그우에 소랭이를 세개나 포개서 지셨다. 거기서 문문 김이 피여오른다. 그러다나니 어깨에 걸치신 짧은 기병총은 자리를 잡지 못하고 가로 서있었다. 빽빽한 나무사이를 지날 때면 총신때문에 고생하실것이다.

《웬일입니까?》

정섭이는 놀라서 되물었다.

《식사준비하던거 거두고 오느라고 늦었어요, 시장하지요? 시장해서 앉아있어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정섭이의 멍든 자리가 푸릿푸릿한 얼굴을 들여다보며 살틀한 어조로 물으시였다.

《아니요. 배고프지는 않아요. 넘어져서… 넘어진김에 쉬여간다지 않아요.》

정섭이는 어쩐지 김정숙동지의 맑은 눈동자앞에 방금전의 자기 마음속이 비치일가봐 겁이 났다.

《그래 좀 쉬였어요?》

《예-》

정섭이는 투정을 하듯 억지로 대답하였다.

《그럼 얼른 일어나세요. 방금 출발했는데 벌써 쉬면 되겠어요. 사령관동지께서 인차 따라오시게 됐어요.》

《예?》

정섭이는 후닥닥 일어났다.

《사령관동지께서 뒤에 계십니까?》

《모두 힘들어하기때문에 사령관동지께서 몸소 후위부대를 거느리시고 오시지 않아요.》

정섭이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겨우 더께가 앉았던 입술이 터져서 피가 배여나왔다. 그는 말없이 걸음을 옮겨놓았다.

아까 미끄러졌던 굽인돌이에 이르자 김정숙동지께서 먼저 올라가서 손을 뻗치시였다. 그러나 정섭이는 그 손을 차마 잡을수가 없었다. 아까 작식대 우등불에서 본 어수선한 정경이 떠올랐다.

지금 지고계시는 짐만 해도 여느 대원들의 곱이나 된다. 그런데 이 비속에 김은 왜 저렇게 피여오를가? 정섭이는 이런 생각을 하며 김정숙동지의 손은 못본것처럼 하고 그중 가파로운 모퉁이를 성큼 올라섰다. 마음만 먹으면 이렇게 올라서는건데…하고 생각하는 순간 아래도리가 비칠하였다. 한쪽 무릎을 꿇으며 다시 미끄러져내리려 할 때 김정숙동지의 두손이 뻗어왔다. 가까스로 몸을 가누고 일어서자 커다란 배낭과 자루가 얼굴을 스쳐지났다.

후끈하는 더위가 온몸을 덮치였다.

《아니?》

새삼스럽게 배낭을 바라보니 배낭에서도 자루에서도 세찬 김이 피여오른다.

(강냉이로구나. 삶던 강냉이로구나…)

정섭이는 언덕마루에 멍하니 서버렸다. 벌렁벌렁 끓던 소랭이가 떠오른다. 황황 불타던 우등불이 눈을 지지였다. 출발명령이 떨어졌을 때 우등불을 헤치며 냉과리를 여기저기 쥐여뿌리며 덤벼치던 녀대원들의 모습이 얼른얼른 눈앞을 스치였다.

(녀대원들이 고생을 좀 더하는것쯤으로 생각했지, 반편같이 …)

그 벌렁벌렁 끓던 소랭이를 그대로 쏟아넣어가지고 오신것이다. 저 배낭에서 줄줄이 흘러내리는 물은 비물이 아니라 끓는 물이다.

《이제는 내리막길이 돼서 숨은 덜 가쁘겠지만 더 잘 미끄러져요.》

김정숙동지께서는 걸음을 옮겨놓으며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밝게 웃고계시는 그이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정섭이는 진심으로 사과하고싶은 생각이 치밀어올랐다.

《그 자루는 저한테 주십시오.》

《예?》

김정숙동지께서는 놀란듯 되묻더니 말씀하시였다.

《정섭동무, 고마와요. 그러나 그런 생각은 안해도 일없어요. 어서 가자요. 이번에 휴식하게 되면 꼭 식사를 보장하겠어요. 강냉이가 이제는 거지반 흐물흐물해졌어요. 구수한 냄새가 나지요?》

정섭이는 이처럼 놀라운 일을 하면서도 그렇듯 소박하게 말씀하시는 김정숙동지의 숭고한 인품을 온몸으로 느끼며 김일성장군님의 전사가 되기 위하여서는 사람으로서 어느 정도의 깊이와 높이 그리고 힘을 가져야 하는가 하는것을 어렴풋이 깨달은듯 하였다.

 

×

 

행군대오에서는 새벽에 7련대장이 적을 달고갔는데 무슨 적이 또 뒤에 달렸는가 해서 모두 웅성웅성하였다. 그러던것이 김준삼이가 포로 한놈을 잡아와서 그 의문이 풀리였다.

그놈을 통하여 지금 뒤따르고있는 적이 백일평일대에 새로 나타난 봉천려단의 한개 대대이며 얼마전 압록강쪽에서 백두산줄기를 타고 넘어오는 강행군바람에 대원들의 사기는 다 죽은데다 이번에 또 《토벌》에 내몰리여 장마비속에서 개고생을 하는 과정에 극도로 지쳐빠졌는데 왜놈지도관놈이 하도 무섭게 굴어서 억지로 따라온다는것 등을 알아내였다. 포로는 본시 봉산동의 소작농으로서 강제에 못이겨 군대복무를 하고있는 어수룩한 사나이였다. 그에게 침략군대의 본질을 깨우쳐주고 왜놈들의 개노릇을 하지 말라는것을 타일러서 돌려보냈다. 밥을 먹이고 로자까지 후히 주었더니 어지러운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자기는 벌써 오래전부터 김일성장군님을 마음속으로부터 존경하고있었는데 이제 다시 장군님의 뜻을 어기겠는가고 거듭 맹세를 다지며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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