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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불멸의 력사》 14 장편소설
석 윤 기
( 제 8 회 )
11
막막한 백두밀림 한끝에 자리잡은 손바닥만 한 동네, 찌그러져가는 귀틀집추녀에 제아무리 불행의 그늘이 짙게 깔렸다 해도 세상은 알아주지 않는다. 불행이 한둘, 한두가지인가, 온통 불행으로 빚어놓은듯 한 이놈의 세상에 밑천 안드는 위안의 말이나마 푼푼히 나누어주기도 쉽지를 않다. 그래서 불행에 우는 인간들이 잠못드는 깊은 밤에 골고루 바라보라고 실날같은 그믐달이 하늘 한끝에 떠서 바르르 떨고있다.
타향살이 몇해런가 손꼽아 세여보니…
바이올린의 선률이 흐느끼듯 떨더니 김인수는 눈물이 그렁해서 감기에 쉬여버린 목소리로 그가 그중 좋아하는 노래를 불렀다. 《이시가와구미》밥집의 식솔들은 저마끔 귀틀벽에 등을 비스듬히 기대고앉아 그렁한 눈으로 뙤창밖의 그믐달을 바라보고있다. 신문지로 봉한것이 바람에 찢어져서 바람개비처럼 펄럭거리는데 그 짬으로 하늘 한끝이 바라보였다. 너무 담배질을 해서 담배연기와 남포등의 그을음이 마치 굴뚝을 빠져나가듯 그 펄럭거리는 종이구멍으로 꾸역꾸역 빠져나간다. 정섭이네 집에서 귀밀밥이 퍼질무렵에는 벌써 크지 않은 동네에 손님이 들었다는 소문이 퍼져서 사람 그리운 화전촌사람들이 무슨 대사집 찾아들듯하였다. 이웃집 물동지기령감네와 삼수집에서는 두 량주가 다 오고 봉식이며 치갑이또래 정섭이의 동무들도 찾아왔었다. 밥집에는 기왕에 하칠소에 있다가 먼저 넘어온 사람들도 있어서 그들을 앞세우고 목재판로동자들도 우르르 밀려들어 밤이 깊도록 이야기판을 벌리다가 정섭이네 집 형편이 손님들을 다 치르기 어렵겠다고 해서 남정네들은 옆집인 《이시가와구미》밥집으로 옮아앉았다. 옮아앉아봐야 이야기는 뻔한 신세타령이였지만 그래도 물리지 않고 어디 가면 좀 살기 좋은데가 없는가, 이놈의 세상 언제 망한다는 소문은 못들었는가, 요즘 왜놈들이 경비도로요 뭐요 하고 돌아치는것을 보면 암만해도 무슨 일이 난것 같지 않느냐- 하는따위 이야기들을 벌려놓았다. 시원한 소리는 하나도 없었다. 《금천동에 노다지바람이 분다는 소문은 짜합데만 그게 사실은 사실이요?》 한 40나보이는 체소한 사나이가 윤원구곁으로 바싹 다가앉으며 수군거렸다. 《내니 알겠소. 뭔가 불기는 불기다 숱한걸 끌어가지. 우리사 노다지바람이 불면 어떻고 진흙바람이 불면 어떻단말이요.》 윤원구는 피곤하였다. 몸도 지쳤지만 자기자신 무수히 마음속으로 되풀이해온 질문이라 이제는 대답하기도 짜증스러웠다. 《여보, 그래도 일가식솔을 다 거느리고 갈 때에는 무슨 생각이 있을것 아니요?》 상대는 집요하게 파고든다. 풍산 어디에서 이와실이를 왔다가 소를 죽이고 고삐만 감아쥐고 돌아가게 됐다는 사람이다. 《여보.》 하고 윤원구는 풍산사나이를 측은하게 바라보다가 잘라서 대답했다. 《딴마음 먹지 말고 웬만하면 집으로 돌아가우. 뭐니뭐니 해도 태를 묻은 제고장이 그래도 낫소. 나도 스물소리 들을 때 고향을 하직하고 이제는 20년가까이나 떠돌아다니며 안다녀본데 없고 못해본 지랄이 없소만 다 그식이 장식이요. 나라가 망한판에 어디 가서 잘살기를 바라겠소.》 《여보, 그래 내가 잘살기를 바라서 이러는줄 아오? 내, 내 이 고삐를 탈아쥐고 돌아갈 때 우리 집 문전에서 터져오를 통곡소리를 생각해보란말이요. 어이구 답답해라.》 풍산사나이는 입은것도 없는 앞가슴을 와락 잡아헤치며 갈비뼈가 서까래같이 건너간 가슴을 꽝꽝 두들겼다. 저편 구석 남포등의 그을음이 피여오르는 뙤창아래서는 김인수가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바이올린활을 그어대더니 취한 사람처럼 눈을 지그시 감고 울음 섞인 소리로 노래를 부르고있다.
부평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젊은패들은 김인수를 둘러싸고앉아 저마다 마음속으로 그 구슬픈 가락을 따라부르며 버리고온 고향, 눈이 까매서 기다리는 부모처자들을 그리는듯 눈을 감고있었다. 그들은 대개가 《보국대》에 끌려온 남도내기들이였다. 정섭이는 구름노전이 새까맣게 눌어서 부스러진 등디목에 웅크리고앉아 태호의 이야기를 묵묵히 듣고있었다. 태호는 형 만호와 함께 북선제지가 도끼를 들고 백두산원시림으로 쳐들어오던 당초부터 이 증산사업구의 산판들을 두루 옮아다닌 오랜 벌목부였다. 그의 집은 멀지도 않은 운흥땅이지만 벌써 몇해째 집소식을 모르고 지낸다. 그런데 그 형은 며칠전 신개척에 있는 자위대영창에 잡혀갔다는것이다. 《형은 매를 좀 맞겠지. 매한가지야. 둔장질에 어깨가 터지나 매맞아서 어깨가 터지나 같지. 대두박이야 먹여주겠지.》 정섭이는 여전히 입을 꽉 앙다물고 들을만해있다가 노전밑을 들치였다. 비벼던진 담배꽁초 몇개를 주어서 주글주글해진 태호의 담배쌈지에서 신문지쪼박을 찢어내여 두툼하게 말아물고 캑캑 개키며 몇모금 한꺼번에 들이키였다. 아직 다 배우지 못한 담배라 독하고 썼다. 그는 눈물을 찔끔 쏟으며 담배를 다시 노전밑에 쓸어넣고 그 누군가의 목을 비틀듯 힘껏 비틀어 구겨던졌다. 영섭이가 죽은것이나 어머니가 다친것만이 불행이 아니다. 슬픔이 사람들의 가슴마다에 비좁을지경으로 들어앉아있다. 《형은 왜 잡혔나?》 정섭이는 꽉 잠겨버린 목소리로 물었다. 《왜 잡힐게 있나, 그놈들이 아무나 잡아가두었으면 하던차에 형이 말마디나 했으니까 잡아넣었지. 요즘 참 판이 무시무시하다.》 정섭이는 힐끔 태호를 돌아볼뿐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이글이글 불태우며 태호의 입에서 무엇인가 터져나올것 같은 다음말을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형이 그러는데…》 아니나다를가 태호는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고 수군거렸다. 《저놈들이 혁명군이 다 없어졌다고 떠드는것은 멀쩡한 거짓말이래.》 《그건 어떻게 하는 소리야? 누가 보기라도 했다는가?》 《그야 나도 모르지. 형이 어디서 들었는지 그런 소리 하더란말이야. 야- 정말 전년에 보천보를 들이칠 때처럼 장군님께서 한번 이놈들을 되게 족쳐주셨으면 얼마나 좋겠나. 난 그것을 한번 보기만 하면 그자리에서 죽어도 원이 없을것 같다.》 정섭이는 태호의 입을 그냥 지켜보았지만 더는 신통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잔뜩 갈증에 시달리다가 물을 보고도 못먹게 됐을 때 목이 다 타는것처럼 금시 가슴이 터져나올것 같았다. 목을 휘저으며 바라보니 뙤창짬으로 바라보이던 그믐달도 기울어져버렸다. 밤이 이슥하여 문이 벌컥 열리더니 봉식이가 소랭이를 받쳐들고 들어왔다. 《에- 무슨놈의 날씨가 이렇게 쌀쌀한가.》 허우대가 껑충한 그는 등디목에서 진저리를 한번 치더니 《이거 우리고장 인심이 그렇지 않았는데 요즘 살아가기가 힘이 들어서 아무것도 대접할것이 없소다. 다 시였지만 김치국이라도 시원한 맛으로 맛들 좀 보시우다.》하고 소랭이를 방 한복판에 갖다놓았다. 시큼한 냄새를 풍기는 갓김치였다. 철이 늦은 때라 좀 걸어졌지만 보기에도 시원한 김치물이 그득하였다. 《허, 봉식이가 색시를 잘 얻었거던.》 한 친구가 부엌에 나가 보시기와 숟가락을 들고 들어오며 말했다. 《이놈은 언제 봐야 제 형님 고마운줄 모르고 형수만 따르거던.》 하고 봉식이가 괴춤에서 불룩하게 채워가지고 나온 쌈지를 꺼내놓고 제먼저 한대 말면서 우스개소리로 응수를 했다. 모두 시큼한 갓김치를 어적어적 씹기도 하고 김치국물을 마시기도 하였다. 그러느라고 잠시 동강난 이야기의 실머리를 《보국대》에 끌려온 한 젊은이가 투박하게 이어놓았다. 《자위대가 태반 혜산쪽으로 밀려가고 나머지는 소홍단수 건너편에 구뎅이를 파고있다는데 그건 뭘 어떻게 하자는건가? 우리를 모두 그속에 쓸어넣고 묻어버리자는것은 아닌가?》 그러자 온 방안의 주의가 그 이야기에 쏠렸다. 《요즘 자위대가 몹시 갈갠다 했더니 다 그런 쪼간이 있댔구만.》 윤두소를 죽였다는 풍산의 이와실이군이 불안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갈개는게 어디 자위대뿐이요? 여태까지는 경비도로다 하고 고아치더니 래일부터는 또 청결검사를 나오겠다오다. 그 구장놈 놀아나는것은 더 못보겠더랑이.》 태호가 봉식이의 쌈지에 손을 뻗치며 퉁명스럽게 맞받아쳤다. 《해볼대로 해보라지. 아무리한들 죽기밖에 더 할라구.》 봉식이가 이러면서 김인수를 다시 집적거렸다. 《거 어떻게 하면 노래를 그렇게 눈물이 나게 잘하우다? 우리 집에서는 바라지를 열어놓고 형씨 노래를 들으면서 어른 아이 할것 없이 다 눈물들을 흘렸소다. 세상 답답한 이야기 자꾸 해야 소용 있소다? 그 빠요린이나 한번 더 들려주오다.》 다른 사람들도 덩달아 그게 좋겠다고 간청을 하였다. 정섭이는 래일 또 먼길을 가야 할 사람들인데 좀 재웠으면싶었으나 그래봐야 아무도 잠들수 없는 숨가쁜 밤이니 내버려두자 생각하고 저도 귀틀벽에 허리를 기대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이윽고 구슬픈 바이올린의 떨리는 소리가 답답한 가슴들을 우벼대며 또다시 흐느끼기 시작하였다. 정섭이의 코허리는 저도모르게 시큰해났다.
12
강로인은 지팡막대를 짚고 신사동고개마루까지 배웅을 나왔다. 일행은 한걸음 먼저 작별인사를 나누고 고개아래로 사라졌다. 정섭이도 동구앞까지 따라나왔다가 돌아섰다. 로인은 필네의 일이 그중 마음놓이지 않는듯 다심한 부탁을 곱씹으며 어느덧 고개마루까지 올라서고야말았다. 《인심도 모질군. 네가 어린것이 외지에 홀로 가서 어떻게 살겠느냐?》 《할아버지, 이젠 그만 들어가보세요. 여태도 홀로 살았는데 못살게 뭐 있겠어요. 제 걱정 마시고 할아버지 몸조심이나 하세요.》 《나야 몸조심을 안해도 너무 목숨이 질겨서 야단이다. 일행이 벌써 저 굽이를 돌아섰구나. 어서 따라가거라.》 로인은 돌아서서 다시 인사를 하는 필네더러 어서 가라고 지팽이를 들어 앞을 가리켰다. 필네는 자꾸만 뒤로 끌리는 마음을 다잡고 걸음을 다우쳤다. 밤사이 등디목에 앉아 밀린 바느질도 해주고 챙챙 감겨드는 경섭이랑 윤원구네 아이들과 엇섞여 실뜨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영섭이를 여의던 이야기를 눈물속에 들었고 분해서 구들바닥을 치며 넉두리를 하는 정섭이의 어머니를 위로도 하였다. 불쌍한 어머니는 한번 서러운 사정을 터쳐놓자 기가 바싹 성해서 새벽에는 신열이 몹시 높아지고 허리증도 심해졌다. 그래서 밤을 꼬바기 밝히다싶이 하면서 병구완도 해드렸다. 그사이 웃간의 로인과도 세상 살아갈 막막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불과 하루밤, 그것도 어수선한 분위기속에 경황없이 보낸 하루밤이였지만 그 귀틀집 문전에 꼭 자기 집같은 정이 끌리여 발걸음을 무겁게 잡아당겼다. 《참, 할아버지.》 필네는 이깔나무가 듬성듬성 들어선 고개길을 넘어서려다가 돌아섰다. 한자리에 멎어서있던 로인도 서둘러 마주 다가왔다. 《저 노전밑에 제가 수건 한감 끊어넣었어요.》 《그래? 그건 뭘, 저나 쓸것이지.》 《전에 장로네 옷 짓다가 자투리가 났길래… 그럼 편안히 계십시오.》 필네는 다시는 돌아보지 않았다. 노전밑에 넣어둔 그 명주수건은 어쩌면 정섭이의것이 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집의 어려운 형편에서 적지 않은 삯전을 제손에 쥐여주었으니 그걸 돌려주자면 달리는 수가 없었다. 필네는 앞선 일행을 따라잡으려고 부지런히 걸음을 다우쳤다. 그런데 얼마를 못가서 발자국소리가 마주 다가오는바람에 걸음발을 늦추었다. 《왜 이렇게 꾸물거리는가? 저기서 윤원구네가 눈이 빠지게 기다리는데…》 리호철이였다. 이런 산골에서는 아직 흔치 않은 《국민복》, 《국민모》에 각반을 깡뚱하게 둘러치고 딱따구리지팽이를 비껴짚은 모양이 함께 오는 제지회사 자위대 소대장 스즈끼중위보다 더 서슬푸르러보인다. 《아, 이 처녀식모도 리상이 데려가는가?》 스즈끼가 호기심이 가득찬 눈으로 필네를 찬찬히 뜯어보며 별로 감탄한듯한 소리를 질렀다. 《말 마시오. 김장로가 장담하기에 요즘 유럽에서 류행하는 무슨 집단계약같은것을 했지요. 저쪽에 가서 내가 골탕을 먹지 않겠는지 모르겠습니다.》 호철은 일본말로 이렇게 말하고나서 다시 필네를 향했다. 《국경다리에서 흐지부지하거든 스즈끼상이랑 만났다고 하라구. 내 윤원구한테도 일렀지만 앞으로는 모든 일을 빨랑빨랑하고 단체에서 떨어지지 말란말이야.》 필네는 별놈이 별수작 다 한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잠자코 들을만해있었다. 《저쪽은 조선과는 달라. 여기서는 이런 숲속에도 황군이 나와있고 자위대랑 있어가지고 수고를 해주니 마음놓고 아무데나 다니지만 강만 한번 건너서면 비적이 득실거리고 공산군이 아무데나 나타난단말야. 내 인차 뒤따라갈테니 도착하는 즉시로 딴생각들 말고 일이나 잘들 하라구. 그러면 내 다 섭섭잖게 해줄테니.》 그래도 필네는 듣고만 있었다. 필네가 금천동으로 밥집을 따라갈 결심을 한데는 바로 그 《공산군》을 만났으면 하는 생각이 가슴깊이 간직되여있다는것을 호철이 제가 어찌 알랴. 처녀를 떠나보낸 스즈끼와 호철이는 이마에 번지르르 내배인 땀을 훔치며 숲속을 걸어갔다. 두놈 다 겉은 흔연한척하고있지만 실상 마음속은 대단히 번거로왔다. 《스즈끼상, 그래 15도구와 반절구에 나타났던 공산군이 이미 국경을 넘어선 기미가 보인다는것은 무슨 근거가 있는 소리요? 아니면 그저 그러루한 추측이요?》 《그야 나도 모르지, 명령이니까 그대로 집행할밖에…》 스즈끼는 불만을 감추지 못하고 말했다. 《매번 보면 무슨 토벌놀음이 벌어질 때마다 스즈끼상같이 충실한 사람만 고생을 한단말이요. 그래봐야 뭐 특별한 승진도 시키지 않으면서…》 《아, 아 그런 소리는 무엇때문에 자꾸 하는가? 이미 명령이 내렸는데 말을 자꾸 하면 좋지 않아. 그런 소리는 그만두고 여기 형편에 대해 좀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라. 나는 사실 이 지대는 아는것이 없다.》 스즈끼는 날콩 씹은 상을 하고 말했다. 그는 방금 삼장에 있는 중대본부로 가서 중대는 당장 혜산, 포태리계선으로 진출하는만큼 여태 중대가 맡아보던 구역을 소대무력으로 맡아서 보되 종전보다 더 만전을 기하라는 엄명을 받고오는 길이였다. 처음에는 일거리가 좀 늘어나기는 했지만 어쨌든 후방에 떨어진셈이니 괜찮게 됐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리호철을 만나 이 수작, 저 수작 건늬는사이 자꾸만 의심증이 생겨났다. 호철의 말을 들어보면 관동군특수선무공작반원들이 무산대안일대에서 활발히 움직이고있다고 한다. 리호철이도 지금은 광산업주로 변신했으나 그가 군산림주사로 있을 때부터 관동군특수선무공작반장 시마끼소좌의 끄나불이라는것을 스즈끼는 알고있었다. 그런자가 이 일대에 나타났다는것부터가 심상치를 않다. 하기는 이자의 집이 옥암동에 있고 또 기업을 꾸리는 일때문에 화룡땅과 무산사이를 분주히 드나들어왔으니 새삼스러울것이 없다고 볼수도 있다. 그러나 공산유격대가 대판 국경으로 진출하고있는 이때 이렇게 후미진 곳을 텅 비우다싶이해도 일없을것인가. 이 점에 있어서는 이 일대에 가족과 재산을 가지고있는 리호철이도 같은 불안을 느끼고있었다. 그들은 기왕부터 술친구이면서도 상대가 하나는 헌병대의 끄나불이요 하나는 관동군 특수선무공작반의 요원이라는것을 알면서 모르는척하고 지내왔었다. 그러나 같은 불안에 시달리는 지금 어느새 그런 허울들을 벗어버렸다. 두놈 다 이것이 정보사업에서 넘어서는 안될 계선을 멀리 벗어져났다는것을 느끼면서도 바로 이렇게 서로 협조하는것이 도문회담정신이 아닌가 하고 내심으로 변명하고있었다. 사실 그사이 약간의 마찰이 없지 않았던 관동군과 조선주둔군사이에서도 조선인민혁명군이 두 계선을 쳐가르고 국경지대로 진출하자 혼연일체가 되였으며 시마끼소좌가 직접 두 군대의 련계를 짓기 위해 혜산에 나와있다는것이다. 《문제는 백성들이란말이요. 중대가 다 있다 하더라도 군대만 가지고 이 밀림을 메꿀수야 없지요. 유격대가 발을 붙이고있는것이 백성들이기때문에 여기에 주목을 돌려야 한단말이요.》 《그러게 내가 아까부터 당신의 협력을 요청하는것이 아닌가.》 《그런것은 새삼스럽게 요청하고말고 할것도 없지요. 옥암동은 걱정 마오. 거기는 우리 아버지도 있고 또 그러루한 눈이 박혀있소.》 리호철은 회좁은 얼굴에 잔뜩 거드름을 피우며 말했다. 스즈끼는 어쩐지 자식이 놀아나는것이 목이 요골요골해서 저도모르게 한마디 긁었다. 《그 당신이 달고온 하늘소같이 생긴자말인가?》 《허- 스즈끼상 눈이 밝은데…》 호철은 띠끔하였으나 아닌보살하고 너스레를 피웠다. 《여보, 당신네 관동군만 똑 제일이고 우리 눈은 모두 곰발바닥같은줄 아는가. 그러지 말고 툭 터놓고 말하란말야.》 《허허허, 덜미를 단단히 잡혔군. 그러면 내 고스란히 다 게워놓지.》 하고 호철은 별안간 신중한 낯빛이 되여 수군거렸다. 《옥암동에서는 주목해야 할 대상이 류석진이라는 령감네 집이요.》 《나도 그 령감이야기는 알아. 손녀를 찾아 장백땅을 헤매다가 어제 돌아왔다는 보고를 받았는데 그 령감네 집이 본시 이 일대에서 모든 말썽의 중심이라더군. 여차직하면 잡아넣어버리겠다니까.》 《아직 그렇게까지 소란을 피울 필요는 없소. 어쨌든 옥암동에는 우리 집이 있으니 퀴퀴하면 인차 냄새를 맡을거요. 그뒤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것이 중요하지. 그 령감자체야 제 아무리 용을 쓰면 별수 있소? 따귀만 한대 갈겨도 숨을 거두겠는데… 문제는 옥암동이 아니라 이 신사동과 두지바위요. 이게 행정상 다 농사동에 속해있기때문에 우리 집 령감이 구장으로서 자주 드나들기는 하지만 일본제국으로 볼 때는 완전히 통제밖에 있으나 같단말이요.》 《흐흠- 그래서 우리 소대를 여기다 구겨박은게로군.》 스즈끼는 신음소리처럼 중얼거리며 흰자위만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뒤쪽을 돌아보았다. 《그렇다고 뭐 대단할것은 없소. 이러루한것을 알고 감시의 눈만 떼지 않으면 고작해야 제까짓 화전농과 처서군들이 뭘 하겠소. 일없소. 오늘 우리 집 령감도 농사동주재소의 요시다랑 같이 청결검사다 하고 떠났는데 아마 여기 어디서 돌아갈거요. 이렇게 사방에서 각종 명목으로 감시를 하면 샐 구멍이 있겠소? 이 일판에서 한시도 소홀히 할수 없는 대상이 몇이 있소.》 하고 리호철은 스즈끼의 볼에 뜨뜻한 입김을 불어대며 더 낮추 수군거렸다. 《첫째 <이시가와구미>에 만호, 태호라는 형제패가 있소. 이놈들이 그중 불량하고 불평이 많은놈들이요. 들으니 그 형이라는놈은 그제 당신네가 영창에 쓸어넣었다더군.》 《흠, 그놈인가? 지금 조금이라도 수상한 눈치만 보이면 엄단하라는 토벌본부의 지시니까 <이시가와구미>의 요청을 받고 잡아넣기는 했다는데 본시 그런놈이였군. 그렇다면 단단히 조겨봐야지.》 《그래봐야 별건 없을거요.》 하고 호철은 랭랭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놈들이라는게 본시 화전농출신으로 몇해째 처서판을 돌아다니다가 페가를 했으니 걸핏하면 당국을 물고늘어지는것이지 애초에 무슨 사상같은것이 있어서 그러는것 같지는 않소. 문제는 이러루한 기분, 말하자면 분위기란말이요. 스즈끼상은 광산이나 탄광 같은것은 잘 모르겠지만 이런자들의 기분이라는것이 꼭 탄광굴속에 가스가 잔뜩 들어차있는 상태와 비슷하단말이요. 여기에 불만 달리면 튀오. 그래서 냄새를 잘 맡아야 한다는거요. 이런 측면에서 볼 때 제국에 대한 감정이 제일 나쁜것이 강석보라고 아까 그 옥암동 류석진령감과 아주 가까운 령감이 있소. 게다가 강정섭이라고 그 령감의 손자가 다 커서 여태 하칠소토장에서 벌어먹고있소. 이놈이 원체는 나한테 팔려서 금천동에 가게 되여있었는데 딱 맞서서 돈을 떼먹을 차비요. 내가 하칠소에서 알아보니 이놈이 거기서 불온한 말을 많이 했소. 유격대가 쳐나왔으면 좋겠다는 말까지 했소. 그러니 이놈의 집과 가까운것들은 늙은것이나 젊은것이나 다 일단은 점을 치고 봐야 한단말이요.》 《가만, 이제 그 령감 이름이 뭐라고?》 스즈끼는 웃주머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여 제창 그 뒤등에 꽂혀있는 가는 연필의 심을 혀끝으로 추기며 물었다. 《강정섭이 그리고 령감은 강석보던것 같소. 보오, 바로 저놈이요.》 하고 리호철은 마침 나무사이로 바라보이는 동구길을 가리켰다. 《대체 어떤놈이야?》 스즈끼는 서둘러 수첩에다 몇자 적어넣더니 그것을 웃주머니에 건사하느라고 몇번 헛손질을 해가며 호철의 곁으로 다가왔다. 《저 동네로 들어가는놈 있지 않소?》 두놈은 땀내를 맡을만큼 바투 붙어서서 나무사이를 기웃해보았다. 토스레적삼을 걸친 더벅머리 총각이 팔짱을 끼고 생각에 잠겨 터벌터벌 걸어가고있다. 《저건 애숭이가 아닌가? 저런게 그렇게 말썽인가?》 스즈끼는 리호철을 경멸에 찬 눈으로 돌아보며 말하였다. 어떻게 놀았으면 저런 애숭이 하나도 다스리지 못하는가 하는 눈치다. 호철은 속으로 발끈하였지만 참았다. 《난 이제는 아무래도 여기를 떠날 사람이니 스즈끼상이 한번 겪어보오. 어떤가?》 《여보, 여보, 당신네 조선인들은 과연 말을 좋아한단말이야. 무슨 긴말이 필요한가. 말 안들으면 들을 때까지 잡아족칠판이지.》 《흥, 덮어놓고 그래보오. 그들은 몽땅 공산당을 찾아가서 당신을 고발할게요. <일시동인>정책이 왜 나온줄 아오?》 《지금은 비상시국이란말이야. 불온분자는 모조리 잡아족치라는 토벌본부의 엄명이 내렸단말이야.》 그들은 이런 수작을 나누며 산비탈을 다 내려서서 우선 《이시가와구미》현장사무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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