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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불멸의 력사》 14 장편소설
석 윤 기
( 제 2 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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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령관동지께서 숙영지로 돌아오시니 어느새 새하얀 광목으로 만든 풍들이 여기저기 일어섰는데 련대들마다 자기 숙영지를 알뜰히 꾸리기 위하여 싱갱이였다. 땔나무를 장만해서 우물정자로 가려놓기도 하고 취사장을 널직이 잡아놓고 소랭이들을 부엌치장하듯 주런이 걸어놓기도 하고 지휘부며 우물로 통하는 길을 내고 하면서 아이들처럼 웃고 떠들고있다. 이 숲속에 아주 뿌리를 내리고 살 차비인듯하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묵묵히 숙영지를 돌아나오시였다. 사령부 장풍가까이로 오시니 두 녀대원이 새로 판 우물가에 앉아 열심히 무엇을 씻고있다. 금숙이를 보시는 순간 사령관동지의 가슴은 띠끔하시였다. 부대에 큰 경사가 났다거나 명절같은 때 모두가 즐겁게 웃고 떠들 때면 의례 살펴보게 되시는 얼굴이였다. 그 얼굴에 그늘이 가시고 가슴속에서 피여오르는 기쁨이 어려있을 때면 그이의 가슴은 실로 하나의 성시를 해방한것과 같은 즐거움을 느끼시였다. 그러나 그 얼굴에서 슬픔을 느끼실 때면 사람의 힘으로써는 허물어내기 어려운 요새같은것을 그 녀자의 마음속에서 느끼시는것이였다. 벌떡 일어나서 경례를 하는 금숙이의 눈가장자리는 발깃하게 물들어있었다. 그러나 얼굴빛은 밝았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일부러 금숙이의 안색에는 큰 관심이 없으신듯 샘속을 들여다보시였다. 방금 판 샘이라 물은 아직 흙빛을 띠고있는데 그밑에서 대지의 맥박과도 같이 가는 물줄기가 퐁퐁 솟아서는 누렇게 흐린 물에 자그마한 소용돌이를 일으키면서 돌을 엎어놓은 도랑뚝으로 넘쳐난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군복소매를 걷어올리고 야전밥통으로 물을 조심스레 퍼서는 무엇에 쓰자는것인지 열심히 돌을 씻고계시였다. 무슨 생각에 골몰했는지 장군님께서 다가가시는 기척도 못느끼는 모양같으셨다. 《우물을 아주 맞춤한데 팠습니다. 물이 잘 나옵니까?》 장군님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놀라서 일어서신 김정숙동지께서는 걷어올린 소매를 조심스럽게 훑어내리시며 말씀드리였다. 《샘이 면바로 터졌습니다. 높은 산속이기때문에 물이 나오겠는지 걱정했댔는데 얼마 안파서 인차 이렇게 샘이 퐁퐁 솟구쳤습니다.》 《저 하늘높이 솟은 백두산꼭대기에 물이 츠릉츠릉 괴여있으니까 웬만한데는 다 물줄기가 뻗었을것입니다. 그런데 산나물이 벌써 이렇게 자랐습니까?》 사령관동지께서는 우물가에 수북이 가려놓은 산나물 한줄기를 집어드시고 물으시였다. 어쩐지 그 만만한 연록색의 푸성귀에서도 이 땅의 만물에서 느껴지는 재생하는 생명의 탄력이 향긋한 풋내속에 풍겨오는듯하시였다. 《음달에 자라는것들이 돼서 아직 성하지는 못하지만 강건너보다는 훨씬 이릅니다.》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도 이렇게 다르단말입니다. 가만 이건 무슨 나물입니까? 청취도 있고 참나물도 있고 별것이 다 있군. 그런데 이건 처음 보는 나물입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산나물무지에서 노르께한 애잎 한줄기를 집어드시여 냄새를 맡아보시며 물으시였다. 《우리 고장에서는 무수해라고 하는데… 청취처럼 쌈을 싸먹으면 맛이 있습니다.》 《무수해라,… 원래 산나물이 좋습니다. 쌉쌀한것 같으면서 어딘가 심산의 향취가 깊숙이 배여있는것이 사람의 손때묻은 냄새와는 다른 탈속한 맛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숙동무는 뭘 그렇게 자꾸 씻습니까? 그건 돌이 아닙니까?》 《저는 이런 돌을 처음 봤기때문에…》 김정숙동지께서는 얼굴을 붉히시며 물에 젖은 돌을 치마뒤로 감추시였다. 《돌을 처음 보다니?》 사령관동지께서는 가볍게 되물으시며 소랭이와 김정숙동지의 얼굴을 번갈아보시였다. 그러고보니 우물둘레는 이미 한절반 자갈을 깔고 단단히 다져놓았는데 소랭이속뿐아니라 삽으로 깎아낸 우물터 저쪽에 무드기 쌓여있는 자갈이 모두 여느 돌과는 달랐다. 《속돌이 아닙니까?》 《저 많은 돌을 정숙언니가 다 날라왔습니다.》 금숙이가 옆에서 말씀드리였다. 《속돌이 돼서 무겁지도 않습니다. 저는 말만 들었지 이렇게 물우에 뜨는 돌은 처음 봅니다.》 김정숙동지의 목소리는 갑자기 젖어들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다시한번 우물터를 돌아보시였다. 누가 팠는지 우물을 파기도 알뜰하게 파고 도랑도 깨끗하고 방정하게 쳤다. 풀을 깎아낸 자리도 네모반듯하고 길도 곧게 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돌을 그냥 깔기도 아까와서 한알한알 씻어 쪽무이를 하듯 자갈을 펴고계신다. 샘속에서는 어느새 흐린 물이 구름무늬를 이루며 흘러가고 샘줄기가 있는 저밑에서 금모래가 바글바글 끓는것이 보인다. 거기에 젖은 손등을 문지르며 고개 숙이고 서있는 녀대원의 모습이 푸르청청한 숲을 배경으로 어리여있다. 물에 뜨는 돌이 있다는바람에 눈이 휘둥그래져서 아까부터 기회를 엿보고있던 재영이와 상철이가 사령관동지께서 말없이 서계시는 사이 닁큼 속돌 하나를 집어들었다. 《이게 뜬단말이야?》 《야- 가볍구나.》 《맨 구멍투성이니까 뜨지, 이런 돌이 왜 여기만 있을가…》 샘물은 한점 흐린데 없이 맑아졌다. 좁다란 수면에 초록빛 숲과 푸른 하늘과 그 한끝에 걸린 하얀 구름까지 선명하게 비쳐있는데 그 밑창에서는 끊임없이 용솟는 맑은 물줄기가 바글바글 금모래를 일어내고있다. 《물맛이 좋겠습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신기한 보물이라도 바라보듯 샘속을 물리지 않고 들여다보며 말씀하시였다. 《정말 얼마나 시원한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물을 계속 마시면 사람의 마음도 깨끗해질것 같습니다.》 금숙이가 밝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드리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서둘러 야전밥통을 정갈하게 부시여 남실남실 샘물을 길어 그이께 받쳐드리시였다. 《원래 이런 물은 두무릎을 꿇고앉아 코잔등을 적시며 흠뻑 들이마셔야 제맛이 나는건데… 어디 맛을 봅시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야전밥통을 받아드시고 껄껄 웃으시였다. 어떻게 닦았는지 칠이 벗겨진 대신 알른알른 은빛을 뿌리는 밥통굽에는 뽀얀 김이 서린듯 가는 이슬이 맺혔는데 밥통속에서도 샘에 어리였던 푸른 숲과 푸른 하늘이 그대로 어리여있었다. 《어, 시원하군.》 단숨에 밥통을 절반이나 기울이신 사령관동지께서는 가슴 한끝까지 찌르르해지는것을 느끼시며 호탕하게 말씀하시였다. 《저는 정말 철이 들어서는 이런 물맛을 처음 보는것 같습니다.》 김정숙동지의 목소리는 기쁨에 떨리고있었다. 《조선의 물과 같이 맑은 물이 이 세상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앞으로 세상사람들이 모두 조선의 물을 마시러 올 때도 있을것입니다. 자, 우리 꼬마들도 이 물을 좀 마셔보지.》 사령관동지의 말씀이 떨어지기 무섭게 상철이가 그이의 손에서 야전밥통을 제먼저 받아들었다. 그러나 재영이가 아까 사령관동지께서 말씀하신대로 우물전에 두무릎을 꿇고 코잔등을 물우에 갖다대자 상철이도 밥통을 놓고 그옆에 꿇어앉았다. 《허허허, 조심들하라구. 다른 사람이 보면 우물을 어지럽힌다고 말듣겠소.》 사령관동지께서는 통쾌하게 웃으시였다. 금숙이는 손등으로 입을 가리고 소리내여 웃었다. 김정숙동지께서도 조용히 미소를 지으시였다. 돌아오는길에 사령관동지께서는 두 꼬마를 한옆에 하나씩 끼시고 숲속을 천천히 걸으시며 백두산부석에 대해 설명해주시였다. 그리고 빽빽이 들어찬 아름드리나무들을 쓸어보며 말씀하시였다. 《부석만 신기한것이 아니요. 나무들을 보라구. 동무들은 내내 밀림속에서 살다나니 나무같은것은 무심히 보는것 같은데 이것은 다름아닌 우리 조국의 나무이고 우리 인민의 재산이요. 얼마나 좋은 나무들이요! 이런 나무들을 가지고서는 큰 집도 지을수 있고 큰 배도 무을수 있소.》 그러시면서 조국을 해방한 다음 이 나무들로 높고 큰 집들을 지어 행복하게 살 그날의 휘황한 전망을 펼쳐보이시였다. 전령병들은 사실 나무에 대해서는 무심히 보아왔기때문에 그이의 말씀을 듣고보니 부끄럽기도 하였지만 갑자기 새로 돋기 시작한 이깔나무의 연록색 새 순이 더없이 찬란하고 아름답게 보이였다. 그들은 꺼실꺼실한 이깔나무의 밑둥을 끌어안고 아스라한 창공높이로 뻗어올라간 우듬지끝을 바라보며 《야- 이건 내 나무다!》하고 소리치기도 하였다. 숙영지에 돌아오시니 사령부 장풍은 이미 일어선지 오래였다. 《중대장동무.》 하고 사령관동지께서는 아직도 무엇인가 미진한지 풍안을 손질하는데 여념이 없는 오백룡을 부르시였다. 《부르셨습니까?》 오백룡은 조그마한 손도끼를 손에 든채 허리를 폈다. 이때 박덕산이 나타났다. 《마침 잘 왔습니다.》 하고 사령관동지께서는 두사람을 향하여 말씀하시였다. 《동무들 생각에는 어떻습니까? 이 숲속에 우리 인민혁명군전사들이 와서 이렇게 기뻐하는것을 오늘은 별로 알 사람도 없지만 그 뜻은 얼마나 깊은것입니까?》 박덕산과 오백룡은 사령관동지의 말씀의 뜻을 더 깊이 새겨볼양으로 잠자코들 있었다. 사령관동지께서는 잠간 두 지휘관의 얼굴을 바라보시다가 감회깊은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이렇게 조국에 오기 위하여 그 무서운 행군을 했고 마침내 적을 치고 오늘은 조국의 품에 안겼습니다. 아까 상철이가 이 땅에 안기기 위하여 우리가 그 어려운 <고난의 행군>을 했구나 하고 생각하니 눈물이 나더라고 하던데 우리 동무들 생각이 모두 그럴것입니다. 우리들의 이런 심정을 인민들이 알게 되면 얼마나 큰 영향을 받겠습니까? 나는 우리 인민혁명군전사들의 이런 심정을 이 숲속에 남겨놓았으면 좋겠습니다.》 오백룡은 비로소 그이의 의도를 짐작하고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 신중한 목소리로 말씀드렸다. 《우리 혁명군대원들의 뜨거운 마음이 담긴 글 같은것을 남겨놓았으면 좋겠습니다.》 《좋을것입니다. 덕산동무, 우리 조선인민혁명군 전사들이 무엇을 위하여 어떻게 싸워왔으며 싸워갈것인가 하는 결의가 어린 그리고 전체 조선인민들을 투쟁에로 불러일으키는 구호를 남겨놓도록 합시다. 나무에 한창 물이 오를 때 나무껍질을 벗기고 좋은 글을 써놓으면 송진이 올라서 오래동안 지워지지 않을것입니다. 그러면 기념도 되고 또 여기에 목재판로동자들이나 나물 캐러 오는 사람들이 있을수 있으니 그런 사람들이 보면 힘을 얻을수 있습니다. 원쑤들은 그것을 보면 질겁할것입니다.》 《알았습니다.》 박덕산은 힘차게 대답하고 달려나갔다. 오백룡이도 서둘러 칼을 찾아들고 뒤따라나갔다.
3
《누나, 빨리요, 빨리-》 상철이가 숨가쁘게 달려오며 소리쳤다. 그뒤를 재영이도 달려오는데 조그마한 손도끼를 한손에 들고 다른 한손에는 비서처의 정지성이가 정찰을 나가면서 맡겨두고 간 붓이며 먹통 같은것이 든 길다란 통을 들고있다. 《아니 왜 이렇게 덤벼요?》 김정숙동지께서는 벌떡 일어서서 꼬마들을 향해 마주 다가가시였다. 금숙이도 웬일인가 해서 우물가에 벌려놓은 일감들을 주섬주섬 거두기 시작하였다. 《작식대의 칼 좀 줘요.》 상철이는 칼도마우에 놓인 칼을 닁큼 집어들며 말하였다. 《아니 작식대의 칼을 가져가면 점심은 굶겠어요?》 금숙이가 얼른 칼자루를 마주쥐고 깔끔하게 말하였다. 《야 참 답답하네. 구호를 쓴단말이예요, 구호를!》 《왜 이렇게 덤벼요? 차근차근 말하지 않구.》 김정숙동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셔서야 상철이는 시무룩해서 설명하였다. 뒤미처 재영이도 와서 지금 사령관동지의 말씀을 받들고 모두 구호를 쓰자고 나무껍질을 벗기는데 작식대 칼을 가져가기만 하면 우리가 단연 일등을 한다는것이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사령관동지께서 왜 그런 지시를 하시였을가 하는것이 마음속깊이 짚여오시였다. 《금숙동무, 서둘러요, 우리도 어서 가자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자신께서 쓰시던 칼을 집어드시고 달리시였다. 그뒤로 금숙이도 달려오고 두 전령병은 어느새 보얗게 앞서 달아났다. 숙영지중심에 오니 통로를 따라 유격대원들이 법석 끓고있었다. 나무꼭대기에 올라가서 두다리사이에 나무그루를 끼고앉아 도끼로 나무껍질을 벗겨내려오는 동무가 있는가 하면 손칼로 두터운 껍질을 벗기노라 서둘다가 손가락을 찔러서 한쪽다리를 들고 냉큼냉큼 뛰는 동무도 있었다. 7련대, 8련대, 독립대대- 구분대들마다 승벽을 부리며 떠들어대는데 사령부부근에서는 의례 붓글씨는 내가 써야 한다는 표정으로 벌써 먹을 듬뿍이 찍은 붓을 입에 물고 수첩장을 번지면서 구호를 고르고있는 오비서의 얼굴도 보이였다. 방금 강철룡소대장이 정찰에 나가고 없어서 그렇지 그가 있었더면 그 소란스러운 목소리와 체격에 어울리는 큼직한 치도로 한몫 단단히 막았겠는데 지금은 오히려 경위중대쪽이 덜 설레이는 편이였다. 여기에 두 꼬마가 달려들어 쨍쨍한 목소리로 숲속을 휘저어놓았다. 《여기요, 여기 이 나무가 제일이라는데… 아지도 없고…》 상철이가 다람쥐처럼 굵직한 이깔나무를 타고 올라가며 김정숙동지께 빨리 오시라고 손을 흔들었다. 정말 곧기도 하고 굵기도 하여 구호를 쓰기는 안성맞춤인 나무였다. 《도끼로 아래우를 어이고 벗겨요. 그렇게 억지로 덤비다간 손만 다쳐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재영이가 가져온 손도끼로 밑껍질을 쳐서 세로 어인 다음 칼을 가져다대면서 말씀하시였다. 꼭대기에 나무를 끼고앉아 억지로 껍질을 벗겨내느라고 갑자르던 상철이는 그제야 《도끼, 도끼, 도끼 좀 올려보내라는데.》 하고 소리쳤다. 눈치빠른 재영이는 잠시 무엇을 생각하더니 천천히 손도끼를 상철이에게 넘겨주고 어디론가 힝하니 달아났다. 김정숙동지께서 칼로 껍질을 벗기시는 사이 금숙이는 도끼를 가지고 다른 나무로 달려갔다. 어느새 숲속에는 갑주같이 두텁게 둘렸던 껍질을 벗기우고 수십년 감추고있던 순결한 속살을 새하얗게 드러낸 나무들이 여기저기 나타났다. 저쪽에서는 벌써 구호를 다 썼는지 쓰는중인지 랑송조로 《꿈속에서 잠잘 때가 아니다… 일본제국주의는 사면포위에 빠졌다!》하고 읽는 목소리도 울려왔다. 오비서도 붓을 들고 나무앞에 붙어서서 아래우를 가늠하고있다. 《누나, 자 여기 올라서라요.》 어느새 재영이가 도끼모태같이 잘라낸 통나무토막을 방금 벗긴 멋진 나무밑에 갖다세우며 소리쳤다. 그의 손에는 먹을 먹인 붓까지 들리여있었다. 벌써 석대째 껍질을 벗기고있던 김정숙동지께서는 깜짝 놀라며 누가 듣지 못하게 말씀하시였다. 《어서 오비서를 청해와요. 난 이런 구호는 써본 일이 없어서 못써요.》 《오비서는 이런거 해보았어요? 사령관동지께서 처음으로 말씀하신건데… 우리가 벗긴 나무는 아무도 못써요. 누나가 써야 해요.》 그렇게 의젓하고 리해성있던 소년이 얼굴이 시뻘개서 고집을 썼다. 《누나, 빨리 쓰라요. 우리 혁명이 승리한 다음에 난 여기 와서 누나가 쓴 구호를 찾아보겠어요. 그때 누나가 쓴것이 없다면 얼마나 섭섭하겠어요.》 상철이가 바로 나무꼭대기에서 이렇게 말하는바람에 김정숙동지께서는 당황해지시였다. 그러는데 금숙이가 재영이 손에서 붓을 받아들고 다가와서 간절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언니, 다같이 혁명을 한다지만 혁명자마다 남다른 심정이 있지 않겠어요. 난 정말 언니의 심정이면 그대로 내 심정일것 같아요. 그런 마음을 여기에 남기자요. 그리고 우리가 여기까지 오느라고 겪은 시련이랑 또 잃어버린 전우들이랑 이런걸 남들이 어떻게 다 알겠어요. 언니가 꼭 써야 해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일손을 멈추고 금숙이를 돌아보시였다. 커다란 눈에 글썽하니 눈물이 괴여있다. 금숙이는 무엇을 말하고싶을가? 그 말에 얼마나 많은 호소가 담겨져있는가. 또 어린 나이에 부모형제 다 잃고 혁명의 총을 메고나선 나어린 상철이며 재영이의 가슴엔들 얼마나 절절한 소원이 간직되여있을것인가. 그것은 김정숙동지자신의 가슴을 두고봐도 그렇다. 실로 몇십권의 책을 써도 다 표현하지 못할 기구한 사연들이 가슴마다에 깃들어있다. 그것을 몇글자의 구호속에 어떻게 다 담으라는것인가. 김정숙동지의 사색은 차츰 깊은 곬으로 파고들어갔다. 상철이며 재영이의 부모형제들이, 부암땅에 묻고 떠난 어머니와 사슴페골짜기에 묻힌 동생이 무엇때문에 왜놈들의 총칼을 맞고 쓰러졌는가. 재주도 뛰여나고 인품도 의젓하던 전우들이 부모처자 기다리는 따뜻한 아래목을 마다하고 눈바람 사나운 《고난의 행군》길에 나서서 청춘의 가슴으로 혁명을 보위하다가 목숨을 바친것은 무엇때문인가. 그것은 조국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것은 헐벗고 굶주리는 근로대중의 자유와 해방을 위해서였다. 혁명의 길에 쓰러진 그들이 오늘 세상사람들을 위하여 웨치고싶은 말이 있다면 그것은 인민의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원쑤와의 결사전에 떨쳐나서라는 호소가 아닐것인가. 《언니, 내 생각을 해서라도 하나 써주세요.》 금숙이가 다시 이렇게 말하며 칼을 받아들고 붓을 쥐여드리였다. 형세가 피할길이 없게 되시였다. 김정숙동지자신의 심중에도 갖가지 감회가 소용돌이치면서 무엇인가 이 세상을 향하여 말하고싶으신 절박한 생각을 몰아왔다. 《내 글씨가 서툴다고 흉보지 말아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세사람을 돌아보며 웃으시였으나 그들은 벌써부터 긴장되여 닭알침을 삼키며 그이의 손만 지켜보고있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재영이가 단단히 뻗쳐놓은 통나무우에 올라서서 잠시 감을 바라보시였다. 글자가 너무 많아도 안될것이다. 그러나 지내 짤막하게 쓰자면 우선 글자가 커야 하겠는데 큰 글씨에는 자신도 없거니와 이 절박한 심정들을 담아낼것 같지도 못하시였다. 《야, 저쪽에서는 벌써 다 쓰는것 같아요.》 하고 상철이가 마른침을 삼키며 재촉하였다. 아닌게아니라 독립대대숙영지에서도 7련대와 8련대의 숙영지에서도 와- 와- 끓어번지는 소리가 울려오고 멀지 않은 곳에서는 오비서를 둘러싸고 기관총소대원들이 웅성거리고있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한번 쓰면 다시는 지울수도 고칠수도 없다는것을 명심하시고 머리속에 그리는 구호의 글자수와 감의 기장이며 폭을 몇번이고 가늠해본 다음 결단성있게 붓을 갖다대시였다. 《일어나라.》 몇자 쓰기도 전에 벌써 나무밑에서는 《일-어-나-라》하고 읽어내려갔다. 《일어나라 단결하라 전체 로력대중들아 자유와 해방을 위하여 싸우자.》 이러한 구호가 새하얀 나무결우에 선명한 먹자국을 남기며 두드러져올랐을 때 밑에서는 숱한 사람이 와- 하고 떠들며 손벽을 두드렸다. 이마에 보송보송 맺힌 땀방울을 훔치며 나무토막에서 내려서시던 김정숙동지께서는 깜짝 놀라서 돌아보시였다. 어느새 주변에는 수많은 유격대원들이 모여들어있었고 저쪽에서는 《김정숙동무가 구호를 쓴다!》하고 웨치며 달려오는 동무도 있었다. 《야, 이건 꼭 내 마음이로구나.》 기관총수 최병규가 이렇게 말하며 전에없이 활달한 태도로 김정숙동지께 악수를 청하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붓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자고 하시였으나 아무도 받자는 사람이 없었다. 그중에는 직관물공작을 하던 동무도 있었으나 기를 쓰고 김정숙동지께서 쓰셔야 한다고 우기고 나섰다. 점심차비가 늦어진다고 걱정하시자 제가 가서 짓겠다고 팔을 걷우고나서는 사람까지 있었다. 결국 자신께서 벗긴 나무는 말할것 없고 다른 동무들이 벗긴 나무에까지 가서 구호를 쓰게 되시였다. 김정숙동지께서 석대째 구호를 쓰셨을 때였다. 농민복으로 변장한 기관총수 장경수가 달려와서 금숙이와 김재영이를 사령부로 불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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