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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편 소 설
최성진, 최광일
( 제 20 회 )
제 2 편
5
《야, 길산아. 어제밤에 무슨 일 있었니?》 아침에 직장출근하는 아버지를 바래드리고 부엌에 내려가 설겆이까지 끝내고 들어온 누이가 앉은책상을 마주하고 우울해서 앉아있는 동생을 보면서 근심스레 물었다. 《누이두, 일은 무슨 일이예요. 아는 동무가 왔댔다고 하지 않았어요.》 서길산은 짜증스레 말했다. 서길녀는 그래도 걱정이 되여 동생의 안색을 살피였다. 《밤에 집에 들어와서두 잠들지 못하고 끙끙 앓더구나. 누이한테야 말 못할게 뭐가 있니?》 《왜 자꾸 그래요? 아무 일도 없다하지 않아요.》 서길녀는 한숨을 내쉬였다. 《짐작이 가는게 있어 그러는거다. 공사장에서 일이 있어 왔다는 사람이 집안구석에나 들어박혀 한주일이 되도록 있다는게 어디 말이나 되니? 공사장에선 하루를 한달맞잡이로 긴장하게 일하고있겠는데말이다. 아버지두 밤에 잠들지 못하는 너를 보구 생각하시는게 있는것 같더라.》 《누이, 정말 아버지가 어제밤 내 없는 사이에 무슨 말씀 하셨어요?》 《말씀은 없으시더라. 한데 괴로워하시는게 분명하더라. 얘, 솔직히 말해봐라. 너 공사장에서 무슨 일 있었지? 영 돌아온건 아니냐?》 서길녀의 말에는 하나밖에 없는 동생의 일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빛이 진하게 어려있었다. 서길산은 어렸을적의 일이 문득 떠올랐다. 서길산을 어렸을 때부터 무던히 사랑해준 서길녀였다. 어쩌다 동생이 잘못을 저질러 부모님들앞에서 꾸중을 듣게 되였을 때에도 누이만은 동생을 두둔해주었으며 아버지나 어머니에게 용서해주자고 사정하군 했다. 그래서 서길산은 누이앞에서는 언제나 솔직했으며 무슨 일이 생기면 털어놓고 의논하군 했다. 지금도 서길산은 자기를 걱정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누이에게서 흘러간 그 시절의 다심하고 사려깊은 정을 느끼는것이였다. 《누이, 이 못난 동생을 욕해주! 난 일을 저질렀소!》 《그래 뭐냐? 이 누이를 믿고 말하렴.》 서길산은 그동안에 있었던 사연을 다 털어놓고 가슴을 쳤다. 《누이, 어제밤 철수 그 친구를 보내놓고 난 생각했소. 사람이란 제 집단과 동지들곁을 떠나서는 자신의 존재에 대해 생각할수 없다는것을 말이요. 난 괴로워서 죽겠어. 세상과 동떨어진 외톨배기가 되였다는 생각에 정말이지 죽을 지경이란 말이요. 그런데 난 얼굴을 들고 동무들앞에 다시 나타나지는 못하겠단 말이요. 수치를 당하기는 싫단 말이요. 난 어떻게 하면 좋겠소? 그런데다가 아버진 정말 무슨 눈치를 챈것 같은데 내가 이런 밸빠진 놈이라는걸 알면 뭐라고 하겠소.》 《얘.》 서길녀는 측은한 눈길로 동생을 바라보다가 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넌 어렸을 때부터 자존심이 강했구 남한테 지는것을 싫어했다. 세상 떠나신 어머님두 그때문에 드문히 말씀하셨다. 너의 그 기질이 사내싸기도 한것이지만 그게 지나치면 자기를 그르칠 일도 저지를수 있다고 말이다. 그 예언이 꼭 맞은셈이구나. 하지만 수치를 당하기 두렵다고 해서 보자기로 얼굴을 가리운다면 그 수치를 피할수 있겠니. 넌 잘못 생각하구 있다. 동무들의 비판을 고맙게 생각하구 받아들일줄부터 알아야지. 자기때문에 수백리길을 걸어온 동무에게 그런 친구가 없다고 말하다니 그게 무슨 본새냐? 사람은 조직과 동지들속에서 성장하게 되는것이구 사는 보람과 긍지도 느끼는거야. 잘 생각해보구 신중하게 처신을 해야 한다. 이 누이는 이제 가겠다.》 《벌써 가요? 왔던김에 하루 더 쉬고가면 안되겠어요? 누이, 사실 오래간만에 만난 누이하고 하루 더 함께 보냈으면 해서 그래요. 누이가 그렇게 훌 떠나가면 아버지가 또 얼마나 서운해하겠어요.》 《아버지한테 가겠다는 말씀을 드렸다. 바쁜 일감들을 두고와서 그러지 않니. 나야 군관의 안해가 아니냐.》 《알겠어요.》 서길산은 자기도 모르게 서운하여 한숨을 쉬였다. 그래도 누이의 말까지 들으니 많은 위로가 되는데 그 누이가 당장 떠나게 되면 자기는 또 외로움을 느낄것 같았다. 누이는 해뜰무렵에 떠나갔다. 서길녀는 될수록 빨리 대대로 돌아가라고 하면서 아버지걱정은 하지 말라고 했다. 《내 어떻게 해서든지 김분녀어머니를 여기에 모셔오겠다. 그러면 네가 없어도 아버님은 고독하게 지내지 않을것이고 직장에도 마음놓고 나갈수 있을거다.》 누이가 떠나가자 서길산은 또 빈방을 지키는 신세가 되였다. 아버지는 오늘도 늦어서야 돌아올것이다. 누이의 말대로 이제라도 대대로 돌아갈가? 온몸에 촘촘히 날아와 박히는 비난의 화살은 어떻게 할것인가? 모든것을 꾹 참고 견디여내느라면 평온을 되찾게 될가? 아버지에게는 뭐라고 말씀드리고 떠나가겠는가? 이제 대대로 가면 성순이나 철수가 나를 용서해줄가? 성순이가 나때문에 당하는 모멸감은 얼마나 클가? 아, 참말이지 나는 이제 어떻게 한단 말인가?… 서길산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착잡한 생각에 잠겨있을 때 대대에서는 뜻밖의 사고가 났다. 일은 대대가 점심을 먹고 나와 금시 일을 시작했을 때 일어났다. 오응세네 소대 작업장에 나와 남자들과 함께 어정을 들어내는 작업을 하던 김명식이 갑자기 들었던 함마를 떨구면서 주저앉았다. 김명식은 비명소리를 지르며 쓰러져 꼼짝하지 못했다. 얼굴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동무들이 일을 중지하고 무슨 일인가 해서 모여들었다. 독고봉희와 함께 맞들이를 들고 어정쪼각들을 나르던 김정옥이 사고가 났다는 소리를 듣고 달려와보고는 얼굴이 대번에 시꺼매졌다. 김명식은 심한 동통을 이겨내지 못하여 의식을 잃은것 같았다. 《명식동무! 여, 김명식이! 어떻게 된 일이요?》 정철수와 한조가 되여 함마질을 하다가 영문모르게 쓰러진 김명식을 잡아흔들며 부르짖는것을 김정옥이 황급히 말리였다. 김명식이 분명 허리를 다시 상했다는것을 그는 벌써 알아차린것이였다. 무거운 함마를 휘두를 때 전에 상했던 척추가 견디여내지 못하고 다시 잘못되였을것이였다. 영문을 알수 없어하던 다른 동무들은 김정옥이 그런 말을 해서야 김명식을 군의소로 후송할 준비를 했다. 누가 알렸는지 군의소에서 담가를 가지고 나왔다. 리영국이 바빠맞아 껑충껑충 달려오고 뒤이어 최진혁대대장이며 오선호정치지도원이 나타났다.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김명식이 담가에 실려 대대군의소로 갔다. 김명식은 그날로 남포시인민병원에 후송되였다. 촬영해본 결과 예견했던대로 종전에 골절되였던 척추부위가 다시 잘못되였다는게 알리였다. 김명식은 자기 몸상태를 전혀 생각지 않고 무리하게 함마질을 하다가 그런 일을 당한것이였다. 남포병원에서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 치료하겠다고 하지만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은 확신할수 없는것이였다. 김명식을 따라갔던 정옥은 환자를 입원시키고나서 인차 대대로 돌아왔다. 그 녀자는 락심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면서 동무들앞에 나타났다. 대대나 중대지휘관들이 다문 며칠동안이라도 떨어져 김명식동무를 돌볼것이지 왜 벌써 돌아섰느냐고 했는데 당자는 오자마자 현장으로 나갔다. 김명식이 병원으로 실려갔는데 소대장임무를 맡아하는 자기까지 자리를 비울수 없다고 김정옥은 생각한것이였다. 김명식이 자신도 자기 하나때문에 공사가 한창 긴장한 때에 또 한명의 전투원이 병원에 떨어지는것을 바라지 않았다. 김정옥이 대대로 돌아오니 작업장에는 전에 없던 풍경이 생겨났다. 커다란 이동속보판들이 수많이 생겨난것이였다. 알고보니 대대에서는 속보전시회를 조직한것이였다. 《강성대국건설의 대통로》라고 멋들어지게 흘려쓴 커다란 글자들이 정신을 쩡 들게 했다. 중대들에도 그림 잘 그리고 글씨 잘 쓰는 재간둥이들이 많아 속보들은 하나같이 특색이 있고 호소성이 강했는데 그중에서도 《깨끗한 량심을 바쳐》라는 제목을 단 속보가 전투원들의 눈길을 제일 많이 끌었다. 대대를 위해, 공사를 위해 자기의 한몸을 아끼지 않고 내댈줄 안 김명식을 소개한 속보였다. 거기에는 미술대학 통신생이라는 대대직관원이 직접 손을 댄것이 분명한 김명식의 칼칼해보이는 얼굴을 방불하게 속사한 그림까지 받쳐져있었다. 그 속보가 전투원들의 류다른 관심을 끈것은 재간있게 그린 그림보다도 김명식의 소행을 직접 목격하면서 받아안은 커다란 충격때문이였다. 공사장은 확실히 새로운 분위기로 끓었다. 전투원들은 말은 하지 않아도 속보에 난 주인공들의 헌신적인 투쟁에 자기를 비교해보며 흙 한짐이라도 더 나르기 위해 달리였고 그중에서도 남자들은 손바닥이 물집투성이가 되다 못해 썩살이 두텁게 박히도록 함마질을 해댔다. 작업실적은 눈에 띄게 올라갔다. 김정옥은 흙을 무겁게 담은 맞들이를 들고 성토장으로 달려갈 때마다 속보에 그려져있는 김명식을 보게 되였다. 그때마다 김정옥은 가슴이 짜릿해지고 눈물이 났다. (명식동무, 봐요? 지금 온 대대가 동무의 모습을 보면서 분발하고있어요. 이 속도로 나가면 오늘 성토계획도 150%는 문제없어요. 동무는 결코 여기에 없는게 아니예요. 동무는 지금도 우리 동무들과 함께 웃으며 일하고있어요. 남동무들과 함께 웃옷을 벗어던지고 함마질을 하고있으며 처녀들에게 그 깨끗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롱말도 주고받고있어요.)하고 김정옥은 사랑하는 사람과 속삭이는것이였다. 한편 공사장에 나붙은 김명식의 싱글싱글 웃는 커다란 그림을 볼 때마다 자기나름으로 생각이 많아지는 처녀가 있었다. 김성순이였다. 김정옥이 사랑하는 사람의 그림을 보며 그와 마음속으로 속삭일 때 김성순은 대대를 떠나간 서길산이와 속으로 말했다. …길산동무, 동문 사내라는게 어쩌면 그 모양이예요? 김명식동무처럼 왜 그렇게 살지 못해요? 김명식동무는 동무의 잘못으로 생긴 오작시공을 하루빨리 퇴치하고 대대가 2차경쟁에서는 기어코 1등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일하다가 그렇게 된거예요. 그 동문 영예군인으로 사회적우대를 받으며 편히 쉴수도 있는 동무지만 여기에 자진해와서 자기를 조금도 아끼지 않고 량심적으로 일했단 말이예요. 그 동무는 병원에 있지만 대대와 떨어져있는게 절대로 아니예요. 대대와 함께 있어요. 그런데 동무는 몸도 마음도 다 떠나겠어요?… 그렇게 속삭이느라니 눈물이 나왔다. 가까이에 있는 많은 동무들이 김명식과 서길산을 대비해서 생각하는것 같았다. 김명식동무는 공사장에 나와 스스로 자기 몸을 내대고 일했는데 서길산이는 대대에 수치만 안겨주고 도망쳤단말이야! 우리 대대에 그렇게 량심없는 인간이 있었다는 자체가 수치란말이야 하고 생각하는것 같았다. 그런데 실은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거나 말하지 않았다. 서길산을 비판하던 그날 그렇게도 감정이 가게 말을 하던 서영옥이까지도 서길산이 정작 대대를 떠나가니 생각이 깊어졌는지 말이 없었다. 어느날엔가는 독고봉희가 식당으로 밥먹으러 가는 길에 김성순의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와서 말했다. 《성순언니, 서영옥언니말이예요. 글쎄 조금전에 휴식을 하는데 그 언니가 속보에 난 명식동지의 그림을 보며 한참이나 무슨 생각을 하는것 같더니 나한테 이렇게 말하지 않겠어요. 〈서길산동무는 다시 오지 않는구나!〉하고 말이예요. 심각해서 그러는걸 보니 진심으로 서동지가 다시 오기를 바라는것 같아요. 그 언니가 그랬다는게 놀랍지요?》 성순은 고운 눈이 동그래서 자기를 바라보는 독고봉희에게 말했다. 《놀랍긴 뭐가 놀랍단 말이니. 서영옥동무도 모든 동무들처럼 공사장에 자진해서 달려나와 일하는 전투원이 아니니. 너두 봤지? 그 동무가 일하는걸 말이다. 흙덩이를 지고 달려두 남자들과 꼭같이 큰 덩이를 골라서 지고다니구 맞들이로 흙을 날라도 한삽의 흙이라도 더 올려놓고 가는걸 말이다. 그 동무라고 뭐 춥지 않구 배고프지 않겠니. 우리와 같은 녀자가 아니냐. 하지만 공사를 하루빨리 끝내겠다는 오직 그 하나의 마음으로 추위도 배고픔이나 힘겨움도 다 이겨내는거야. 물론 결함도 있다. 사람한테는 그 누구에게나 우점도 있지만 결함도 있는거야. 그걸 어떻게 극복하는가가 문제지. 그러니 너도 사람들을 나쁘게 보는 앙큼한 생각을 요 머리속에서 싹 뽑아버려라.》 김성순은 상긋이 웃어보이며 봉희의 까뭇한 이마를 손가락으로 꼭 찔러주었다. 《어야나ㅡ 언닌 참 마음이 곱기도 하네!》 동그랗게 뜬 눈으로 김성순을 빤히 쳐다보며 독고봉희는 감동에 차서 부르짖었다. 김성순은 사실 독고봉희의 말을 들으며 속으로 생각이 깊어졌다. 자기는 지금껏 서영옥이 경망한 녀자이고 동무들을 나쁜 눈으로만 보는 말이 많고 좋지 않은 녀자라고 생각하며 그를 피해온것이였다. 듣고보니 서영옥이 고마왔다. 말 한마디를 통해서 그 사람을 알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는 서영옥이와 속을 터놓고 이야기를 나누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와 마주앉아 흉금을 터놓고 이야기하지 못한것은 자기 김성순이 편협한 녀자이기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김명식의 소행이 전투원들에게 준 영향은 컸다. 어느날 림철중대에서는 점심참에 김명식의 그림이 그려진 속보판앞에 모여앉아 잠시 휴식을 하고있었다. 그때 허광식이며 정철수며 많은 동무들이 속보를 보며 김명식에 대한 좋은 말들을 했는데 특히 오응세소대장의 말이 모두의 심금을 울리였다. 오응세는 학교소년단지도원을 했고 실지로 배운것도 많으니 언제 봐야 말 한마디를 해도 씨알이 박히는 소리를 하는것이였다. …동무들, 우리들중에 누구는 이 고속도로건설장에서 영웅이 될수도 있을것이며 또 누구는 온 나라가 다 아는 위훈의 창조자가 되여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영예의 연단에 나설수도 있다. 그런가하면 사람들의 찬탄의 눈길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평범한 돌격대원으로 남아있거나 또 그렇게 평범하게 한생을 살다가 생을 마치는 사람들도 많을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하나의 공통된 지향이 있다. 그것은 물론 그 어떤 요란한 명예나 보수는 아니다. 높은 직위도 아니다. 그것은 먼 후날에 가서 자기의 지나온 한생을 돌이켜보게 될 때 가장 깨끗한 량심을 지니고 오늘의 시대에 뚜렷한 삶의 자욱을 남겼다는 긍지감을 느끼는것이며 오늘을 자랑스럽게 추억할수 있게 되는것이다. 그렇게 놓고보면 여기 모인 우리들은 참으로 행운아들이다. 왜냐하면 우리 조국의 부강번영의 력사와 더불어 길이 남아 빛나게 될 대통로를 건설하는 전투원들이기때문이다. 하지만 영예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이 시대를 빛내이는 보람찬 전투에 참가하여 우리의 청춘의 피와 땀을, 우리의 깨끗한 량심을 아낌없이 바쳐 일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 시대에 청춘으로 살았다는 긍지와 보람을 느끼지 못하게 될것이다. 영예군인이며 당원인 김명식동무는 바로 그것을 자각했기때문에 불편한 몸이지만 공사장으로 자진하여 달려왔으며 자기를 아낌없이 바친것이다! 온 중대가 요란한 박수로 공감을 표시했다. 휴식이 끝나고 헤쳐들 갈 때 한명국이 옆의 친구들에게 말했다. 《괜찮은데! 우리 〈극복합시다.〉소대장동지가 좋은 말을 했단 말이야. 사람은 찬탄의 눈길에 떠받들리울수도 있고 평범하게 한생을 살다가 소문없이 그 생을 마칠수도 있지만 매 사람에게는 이 시대에 깨끗한 삶의 자욱을 남기려는 하나의 지향이 있다는 그 말이 얼마나 좋은가 말이야. 사람은 그렇게 사는게 훌륭하게 사는것이거던. 여, 려찬호, 안그래?》 《맞아, 그 말이 옳단 말이야. 그러고보니 명식동지가 더 돋보인단 말이야. 명식동진 영예군인이구 당원이 아닌가. 그러니 입당할 목적으로 여기에 탄원해온게 아닐게거던. 깨끗한 삶의 자욱을 남기려고왔단 말이야.》 《이제 보니 너 려찬호도 괜찮게 말할줄 아는구나. 그런데 말이야. 명식동지는 병원에 가있으면서두 결국 저 그림처럼 대대와 함께 있는셈인데 서길산동진 어쩌자는거야?》 《글쎄말이야. 어쨌든 서동지두 보고싶은걸, 달아나기는 했어두 말이야. 사실 괜찮은 서〈대장〉인데. 아니 철수동지, 그저께 밤에 온밤 어디 갔댔어요? 혹시 서동지한테 갔다온건 아니야요? 철수동지야 서동지하구 제일 가까운 친구지간이 아니야요.》 《말시키겠어, 려찬호!》 고개를 짓수긋하고 혼자서 걸어가던 정철수가 까닭모를 화를 내는바람에 려찬호는 기겁할대신 웬일인지 키득 웃었다. 한명국이 려찬호의 귀에 대고 수군거리였다. 《철수동지 왜 저래?》 김성순이 마침 가까이에서 남자들사이에 오가는 그 소리를 다 들었다. 그는 눈물이 나오려는것을 가까스로 참았다. 서길산이 원망스럽다못해 죽도록 미웠다. 김성순은 그날 한나절을 독을 품고 누구와도 말을 하지 않았다. 묵묵히 일만 했다. 남자들도 들기 힘들어할 커다란 흙덩이를 그러안고 앙바라지게 걸어갔다. 분노가, 누구에겐지 모를 분노가 그 녀자를 황황히 태웠다. 김성순의 그러는 모습을 정철수가 보았다. 저녁에 정철수가 녀성소대숙소로 김성순을 만나러 왔다. 그들은 례의 그 기발대가 서있는 숙소뒤의 언덕으로 올라갔다. 《성순동무, 서길산이한테 갔더랬소.》 김성순은 놀라지 않았다. 《동무가요?》 《그렇소. 그저께 밤에 걸어서 갔다왔소. 그 친구가 제발로 다시 올가 하구 어디 기다리고만 있겠더라구. 그래서 갔댔소.》 성순은 이미 짐작하고있었다. 남동무들이 주고받는 말을 귀동냥해서 들어보니 그저께 온밤 정철수가 지휘관들한테도 말하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졌다가 나타났는데 밤새껏 어디에 갔다왔는지 아예 녹초가 되였다는것이였다. 김성순은 그 말을 들으며 짐작을 했었다. 서길산이를 만나러 200리길이 되는 신암에까지 갔다왔을것이다. 낮에 작업장에 나타난것을 보니 정철수는 정말로 입술이 허옇게 되고 눈이 쑥 들어가버렸다. 밤새 학질이라도 앓고난 사람같았다. 김성순은 고맙다거나 고생했겠다는 말보다도 그 순간엔 정철수까지도 얄미워졌다. 어둠속에서 독을 풍기듯 하며 말이 없는 김성순의 이상한 행동에 정철수는 부아가 났다. 《왜 그러는거요?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한게 있소? 미인이 독을 풍기면 더 매서워진다더니.》 《그만해요!》 《…?》 《뭣때문에 그따위 사람한테 찾아갔댔어요. 제발로 달아나가지고 제발로 돌아올줄 모르는 그따위 사람한테 말이예요.》 《그만하오. 성순동무, 뭣때문에 찾아갔댔느냐구? 우리 세사람이야 친구가 아니요. 더구나 동무입에서 그런 소리가…》 《그따위 말은 듣기도 싫어요!》 김성순은 별안간 무너져내리듯 펄썩 주저앉았다. 그는 섧게 울었다. 눈물은 하염없이 쏟아져나와 무릎을 적시였다. 《봤지요? 그래도 동무들은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있단 말이예요. 그런데 뭐예요? 제혼자 동무들앞에 나타나기 딱하면 200리길을 간 정동무를 따라서기라도 해야지요!》 《길산인 괴로워하고있소. 그러나 그 성미에 선뜻 따라 나서기는 어려울거요. 난 성순동무가 다시 갔으면 좋겠소. 나처럼 몰래 갔다올거야 있소. 성순동무가 가겠다면 림철중대장동지한테는 내가 말하겠소.》 성순은 말이 없었다. 두사람사이에는 한동안 괴로운 침묵만이 흘렀다. 흐느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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