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편 소 설

 

 

최성진, 최광일                   

 

                피끓어라 청춘아 불타라 심장아

                  ㅡ 가요에서 ㅡ

 

( 제 14 회 )

 

제 1 편

 

14

 

《난 알겠어. 그게 누군지.》

잠자리에 들어가며 서영옥이 누구에게라 없이 말했다.

모두들 우울해서 잠자리에 들어가 취침구령이 울리기를 묵묵히 기다리고있을 때 서영옥의 입에서 불쑥 나온 그 한마디 말은 이상하게도 방안의 공기를 더욱 싸늘하게 했다.

서영옥이 《난 알겠어.》한 말이 대대의 표식말뚝을 옮긴게 누군지 알겠다는 소리이기때문였다. 사실 말들은 하지 않고있었지만 중대의 많은 사람들이 말뚝사건이 터지자 서길산의 행동이 갑자기 이상스러워진것을 눈치채고있었다. 서길산은 말뚝소리가 나오면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으며 누가 별치 않은 롱말을 한마디 던져도 신경질을 부렸으며 그전처럼 동무들과 섭쓸리려고 하지 않았다. 본래의 서길산이 아닌 다른 서길산이가 되여버린것을 두고 동무들은 그의 마음을 괴롭히는 원인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짐작하고있으면서도 마치 약속이나 한듯이 내놓고 말은 하지 않고있다. 그런판에 서영옥이 《난 알겠어.》하고 말한것이여서 모두들 못마땅해하는 눈치였다. 서영옥의 말이 경망스럽고 야비하게 생각되는것이였다.

동무들의 그런 심리는 아는지 모르는지 언제봐야 서영옥과 곧잘 맞아돌아가는 민옥숙이 《그게 누구란거냐?》하고 물었다.

민옥숙의 그 말은 가뜩이나 제동장치가 풀리여 제멋대로 굴러가는 바퀴에 기름을 쳐준격이 되였다.

《그 잘난 서꺽다리지 누구겠니. 모두들 눈이 어두웠지. 너두 그 사람 행동거지를 보면 모르겠니.》

《너 정말 책임질수 있는 소리를 하니?》

《책임지고 뭐고 있니. 그가 안그랬다면 왜 표식말뚝사건이 터지자 입이 얼어붙었겠니. 중대간부들도 한심하지. 그런 사람을 모범이요 뭐요 하구 자꾸 내세울건 뭐야. 집단을 위한다, 좋은 일을 한다 하는건 다 제 이름이나 내보려 그러는거지 뭐야.》

《그만해요, 서영옥동무!》

다른 녀자도 아닌 서영옥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여서 여태껏 참으며 입술만 잘근잘근 씹던 김성순이 더는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아니, 동문 왜 그래요? 서길산동무에 대해 말하는데 동무가 왜 성을 내는거예요?》

서영옥의 목소리에는 까닭모를 차겁고 날카로운 얼음쪼각들이 끼여있었다.

김성순이 용케 자신을 다잡으며 조용히 말했다.

《서영옥동무, 물론 난 그 서길산동무를 잘 알아요. 뭘 말못할게 있어요. 난 그 동무와 유치원때부터 한 마을에서 자랐구 한 학교에서 공부했어요. 그래서 난 그 동무의 방조도 많이 받아요. 그 동무는 내가 어려워할 때면 자기를 아끼지 않고 많은걸 도와주어요. 난 그 동무를 잘 안다고 생각하구있어요. 그 동무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가지고있어요. 그런데 동무는 왜 사람들에 대해 늘 나쁘게만 생각해요? 전번에 정옥소대장동무와 김명식동무의 관계를 두고 동무가 말한것은 더 말하지 말자요. 서길산동무가 지금껏 동무들을 위해 헌신하고 공사장에 나와 자기를 아끼지 않고 일한게 다 제 몸값이나 올리자고 생색을 낸거라고 말할수 있어요?》

《성순동무의 말이 옳지요 뭐.》

《서영옥동무, 너무했어요.》

옆에서 다른 처녀들이 껴들어 한마디씩 했다.

서영옥은 모두가 김성순의 편역을 든다고 생각하자 더 말이 없었다. 그는 억울했다. 자기는 뻔한 사실을 두고 말한것인데 대중의 리해를 받지 못하고 외톨로 밀려나는것이라고 그는 생각하는것이였다. 하여 서러워 울고라도 싶었다.

밖에서 누군가 《성순동무! 성순동무!》하고 조심스럽게 찾았다.남자의 목소리였다.

김성순은 그가 정철수라는것을 알고 자리에서 일어나기 싫지만 일어나 나갔다.

어둠속에 정철수가 서있었다.

《왜 그래요? 철수동무.》

《나 좀 만나자구.》

정철수는 다짜고짜로 김성순의 팔을 잡아끌었다.

그는 녀성병실안의 다른 처녀들이 자기들의 말을 듣지 못하게 기발대가 서있는 언덕으로 김성순을 끌고 올라갔다.

싸늘한 바람이 불고있었다.

《말해보라구, 성순동무. 동문 알고있지?》

대뜸 밑도끝도 없이 들이대는 말에 김성순은 어안이 벙벙했다. 하지만 그는 인차 불안을 느끼였다.

《뭘 말이예요?》

김성순은 일부러 아무것도 짐작하지 못하는듯한 어정쩡한 목소리로 물었다.

《넨장, 서길산이 말이요. 그가 표식말뚝을 옮겨놓지 않았는가 묻는거요.》

《뭐예요? 동문… 동문 왜 그렇게 화를 내며 소리쳐요? 그가 표식말뚝을 옮겼는지 어쨌는지 내가 어떻게 안단 말이예요?》

성순은 자기 말이 공허하게 울린다는것과 자기가 지금 당치 않게 화를 내고있다는것을 느끼자 까닭모르게 설음이 북받쳐올랐다. 그냥 악에 받쳐 정철수에게 앙갚음이 될수 있는 모난 말들을 골라 내쏘아주고싶었다. 하지만 앙갚음은 무슨 앙갚음을 한단 말인가. 정철수동무가 나한테 무슨 죄되는 일이라도 했단 말인가. 다만 자기를 곤경에 몰아넣기 위해 나타난것만 같은 그가 원망스러웠다.

《맹추! 맹추같은것!》

《뭐라구요?》

《맹추란 말이요! 동무가! 김성순이가 말이요!》

정철수는 그 말을 뱉아놓고 홱 몸을 돌려 어둠속으로 씽 사라졌다.

김성순은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그가 사라진 쪽을 망연히 바라보다가 급기야 얼굴을 싸쥐며 병실안으로 달려들어갔다.

병실안은 모두 잠이 들었는지 조용했다. 자리에 누우니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나왔다. 실컷 소리내여 울기라도 하고싶었지만 참아야 했다. 동무들이 들으면 뭐라고 하겠는가. 자기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며 서영옥이 이불속에서 비난의 웃음을 짓고있는것만 같았다. 서길산이 원망스러웠다. 아, 동무가 정말로 그런 행동을 했단 말이예요? 말해봐요! 어서! 어서요!

 

한편 자기 침실로 돌아간 정철수 역시 잠자리에 들어갔으나 도저히 진정할수가 없어 공연히 뒤치락거리였다.

일은 이렇게 되였다.

중대가 저녁식사를 끝내고 다음일과를 기다리며 잠시 자유휴식을 하고있을 때 경비분대장 김명식이 나타나 서길산을 찾더니 어디론가 데리고 나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정철수는 그저 만나야 할 무슨 일이 있어 데리고 가는거겠지 하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런데 정철수는 마침 3중대쪽에 볼 일이 있어 갔다오다가 누구도 없는 외따른 언덕아래에서 만나는 그들 두사람을 보았다. 동무들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어스크레한 장소에서 만나는것도 이상하지만 얼핏 보니 서길산이 무슨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머리를 푹 수그리고 명식의 말을 듣고있었다. 김명식의 말소리가 바람에 실려왔는데 량심이요 비판이요 하는 몇마디만이 겨우 알리였다.

정철수는 어렴풋이 짐작되는게 있었지만 남의 말을 엿듣는다는게 아무래도 떳떳치 못한 일같아 더 다가가지 못했다.

두사람은 얼마 안있어 헤여졌다. 김명식은 성난 사람처럼 경비분대쪽으로 마구 걸어갔는데 그와 헤여져 1소대병실쪽으로 가는 서길산은 어깨가 축 처져있었다.

정철수는 조금전부터 예감되는게 있었던지라 무작정 김명식을 따라가 불러세웠다.

《좀 만나기요. 솔직하게 말해주오. 이자 내 친구 서길산동무한테 무슨 말을 했소? 그가 대대의 명예에 흙칠을 한것과 관계되는 일을 저지른건 아니요?》

차마 대대의 표식말뚝을 옮겨놓지 않았느냐는 말을 할수가 없어 너무나도 뻔한 소리를 어리석게도 에둘러 말한것이였다.

씩씩거리는 정철수를 침착히 지켜보던 김명식이 대답대신 《동문 정말 그와 가까운 사이요?》라고 물었다.

《그렇소. 우린 서로 친구사이요.그래 사실대로 아는것이 있다면 말해주오. 난 짐작이 가지만 그래도 동무한테서 진실을 듣고싶소.》

김명식은 인차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무슨 생각엔가 옴해있다가 고개를 들어 정철수를 바라보았다.

《그런 사이라니 솔직히 말하겠소. 그 동무가, 동무의 그 서길산동무말이요. 표식말뚝을 정말로 뽑았는지는 확실한걸 모르오. 난 그저 짐작을 하고있을뿐이요. 대대가 청산리에서 진행되는 궐기모임에 갔던 날 난 우물 팔 자리를 고르느라고 병실주변을 돌아보다가 서길산동무가 대대의 작업구간을 재고있는것을 보았소. 그게 다요. 난 이자 서길산동무한테 말해주었소. 동무가 내앞에서는 아무렇게나 말해도 좋다, 그러나 집단앞에서 량심은 깨끗해야 한다, 량심에 저촉되는 일을 한게 있으면 동무 스스로가 동무들앞에 털어놓고 비판을 받으라, 그래야 마음이 가벼워진다라고말이요. 이게 다요.》

《그러니 그 동무가 뭐라고 했소?》

《동문 꼬치꼬치 따지는군. 아무말도 안했소. 내 동무한테 한마디만 하겠소. 동무가 서길산동무의 가까운 친구라니 말이요. 그가 스스로 자기 량심을 헤쳐보이고 집단앞에 나서도록 진심으로 도와주오.》

김명식은 더 할 말이 없다는듯 병실안으로 들어가버리였다.

세찬 바람이 몰아치며 얼빠진듯 못박혀버린 정철수의 온몸에 먼지를 확 들씌워놓았다.

(더러운 자식!)

부지불식간에 속에서 분노가 끓어올랐다.

(뭐, 영웅이 되겠다구? 그따위 량심없는짓을 꺼리낌없이 하구두 여태껏 낯을 들고 다녔단 말이야?)

정철수는 당장 달려가 야, 길산이 이 자식아, 너 어떻게 된거냐고 직판 들이대려다가 김명식이 방금전에 하던 말을 생각하고 그만두었다. 그는 서길산이와 가까운 사이인 성순이를 만나면 가부간 똑똑한 말을 들을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순이만은 알고있을수도 있을것이였다. 하여 방금 녀성소대숙소에 가서 김성순을 불러내온것인데 그 역시 아무것도 모르고있는것이였다. 정철수는 지금에 와서 서길산이 그런 량심없는 행동을 했다는것을 의심치 않았다. 김명식의 말을 들어보면 대대가 궐기모임에 갔던 날 서길산이 작업구간을 재는것을 봤다는데 그가 뭣때문에 혼자서 그런 놀음을 했겠는가. 어쩌면 서길산이 그때 표식말뚝 옮겨꽂는것까지도 보고 김명식이 마치 자기는 그것까지는 못본듯이 말할수도 있는것이였다. 서길산이 스스로 자기 과오를 털어놓기 바라면서 그랬을수 있었다.

정철수는 캄캄한 병실에서 혼자 잠들지 못하면서 생각이 복잡했다. 서길산이 끝내 스스로 말하지 않으려는가? 이 철수가 대신 조직에 보고하면 어떻게 될가? 그러면 서길산의 과오는 더 커질게 아닌가. 집단과 조직앞에 솔직하지 못한 인간으로 될것이다. 서길산이는 서길산이대로 친구의 의리를 배반했다고 나를 원망할것이다.

정철수는 문득 중학교에 다니던 때에 있었던 일이 생각났다.

그때 정철수는 품행이 단정치 못한 다른 학교의 몇몇 아이들과 우연히 사귀였는데 그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나쁜 일에도 어지간히 휘말려들었다.

어느날엔가는 야생생활을 해본다고 집에서 부모들 몰래 쌀까지 꺼내가지고 그 친구들과 함께 멀리 구월산으로 찾아들어갔다. 거기서 생쌀을 먹으며 일부러 《원시인생활》을 하다가 그만에야 산불을 놓았다. 산불은 다행히 주변에 들어와있던 어른들에 의하여 인차 꺼졌는데 한 아이가 붙잡혀 토설하는 바람에 불을 놓은 주범들이 학교에까지 알려지게 되였다.

정철수는 이 사건이 학교에만이 아니라 집에까지 알려지는 날에는 영낙없이 아버지한테 회초리찜질을 당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겁이 났다. 하여 풀이 죽어가지고 돌아오다가 우선 형세부터 알아보자고 가까운 소꿉친구인 서길산이를 찾아갔다.

마침 서길산이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정철수를 만나 깜짝 놀랄 소리를 했다.

《야, 철수 너 큰일 났다. 네가 산불을 놓은 주범이라고 학교에두 알려지구 학교에선 또 너를 찾으려구 집에까지 찾아가는 바람에 너의 아버지가 대단히 노했다. 철수 이놈의 자식 어디 나타나기만 해봐라 하며 벼르고있는 모양이더라. 자식, 어쩌다가 그랬니?》

정철수는 자기가 산불을 놓은 주범으로 몰린다는 소리에 속이 덜컥했다. 함께 갔던 다른 학교의 아이들이 산불은 사실 정철수란 아이가 놓았다고 몰아부친 모양인데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을수밖에 없는 아버지가 자기를 결코 가만 놔두지 않을것은 뻔한것이였다. 철수는 함께 갔던 아이들을 량심도 친구의 의리도 모르는 나쁜 자식들이라고 속으로 욕했으나 죄는 고스란히 자기가 뒤집어쓸수밖에 없었다. 자기 혼자 사실은 그런게 아니라고 아무리 변명해봐야 믿어줄 사람은 없을것이였다.

정철수는 학교에서 비판받는것보다도 아버지를 더 무서워했다. 아버지는 집안에 하나밖에 없는 자식인 철수가 귀했지만 일단 잘못을 저지르기만 하면 사정없이 회초리를 들었던것이였다.

정철수의 그런 딱한 사정을 그래도 가까운 소꿉친구 서길산이 알아주었다.

서길산은 당분간은 정철수가 자기 집에 가지 않게 집에 숨겨주었다. 물론 서길산은 이 일을 자기 부모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부모라고 하지만 아버지는 먼 철도공사장에 나가있고 어머니는 몸이 불편해서 늘 집안에 누워있기 십상이였다. 서길산은 어머니가 눈치채지 않게 웃방의 이불과 포단 한채를 꺼내다가 창고의 어스크레한 구석에 깔아주고 철수에게 하루 세끼 먹을것까지 날라다주었다.

서길산은 생각하기를 이제 정철수의 아버지가 며칠동안 아들이 나타나지 않으면 성도 가라앉게 될것이고 오히려 아들이 어디 가서 잘못되지 않았나 해서 안절부절을 못할것이라고 믿었다. 그때 가서 철수가 집에 척 나타나면 철수의 아버지는 회초리찜질은커녕 안도의 숨을 쉬며 기뻐할것이였다.

어느날 서길산의 어머니가 마침 밖으로 나오다가 먹을것을 들고 창고로 들어가는 아들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러지 않아도 웃방의 이불장에서 이부자리 한채 없어진것을 알고 이상하게 생각하던참인데 아들이 창고안으로 먹을것을 들고 들어가는것까지 본것이였다.

서길산의 어머니는 슬그머니 창고안으로 따라들어갔다가 모든 사연을 알게 되였다.

서길산의 어머니 리선희는 좋게 말했다.

《사람은 나쁜 일을 해서도 안되지만 조직과 동무들의 비판을 받기 두려워해서는 더 안된다. 사람은 량심이 있어야 한다. 철수야, 비판이 두렵다고 여기 숨어있지 말고 어서 집으로 돌아가거라. 아버지가 너때문에 얼마나 걱정하겠느냐. 돌아가서 아버지한테 잘못했다고 빌고 학교에도 나가려무나, 어서.》

그때는 철수가 집에 안들어간지 한주일이나 되여오는 때였다.

그래도 혹시나 아버지가 아직도 성이 가라앉지 않았으면 어쩌나 해서 서길산이 슬그머니 아닌보살을 하고 정철수네 집에 찾아가보니 친구의 아버지는 나타날줄 모르는 아들때문에 속이 타서 죽을지경이였다.

《철수아버지, 이제 철수가 돌아오면 때리지 않을래요?》하고 서길산이 슬쩍 물어보았다.

철수의 아버지는 그게 무슨 소리냐, 우리 철수가 철이 없어 한번 그래본것인데 이 아버지가 때리기는 왜 때린단 말이냐, 그 애가 어디 가서 굶지나 않는지 모르겠구나, 그래서 그 애 어머니와 말이 있었다, 그 애가 돌아오면 닭곰을 하나 해먹이자고 말이다 하고 말했다.

정철수는 서길산이한테서 그 말을 전해듣고서도 기연가미연가해서 집에 나타났는데 아닌게아니라 아버지의 회초리가 아니라 닭곰이 기다리고있었다.

정철수는 이 일이 있은 다음부터 서길산을 의리가 있는 친구로 알게 되였다. 물론 다시는 나쁜 아이들을 따라다니지도 않았다.

정철수는 그러한 서길산이 표식말뚝을 옮겨놓은 장본인이라고 내 입으로 사람들앞에 공개하면 그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그런데 만약 서길산이 스스로 이 사실에 대해 털어놓지 않는다면 일이 어떻게 되겠는가. 아니, 아니야. 정철수는 자신이 그렇게 생각하는것자체가 저조한것이라는데 생각이 미치였다. 우리가 지금 어떤 공사를 하고있는데 이 정철수는 그런 쓸개빠진 생각이나 하고있단 말인가. 소시적 친구와의 의리를 앞세우다나니! 에이, 정철수 너는 똑똑치 못한 자식이다. 너절한 자식이야!

정철수는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더는 참을수가 없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는 어둠속에서 서길산의 자리를 손더듬하여 찾아냈다. 서길산에게 손이 닿자 잠을 자는지 어쩌는지 기척이 없는 그를 무작정 잡아일으켰다.

《자는척 하는거지? 이 자식아, 네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있는지 안다. 밖에 나가자! 좀 말할게 있다!》

《철수, 이건 뭐야? 왜 그러는거야?》

서길산이 정말 자지 않고있다가 풀이 죽은 목소리로 물었다.

정철수는 더욱 결이 났다.

《왜 그러는가구? 너도 내가 왜 그러는지 모르지 않을거다. 어서 나가잔말이야!》

잠들었던 동무들이 깨여나며 왜 그러는가고 했다.

여느때 같으면 승이 나서 뻣뻣이 맞설 서길산이 고삐에 매인 순한 소처럼 엉기적거리며 일어나 정철수를 따라나왔다.

밖은 캄캄했다. 하늘은 흐려있는지 별빛 하나 보이지 않았다.

소슬한 북풍이 불어왔다.

《나를 따라와!》

《어디로 가자는거야? 철수.》

《글쎄 잔말 말구 따라오란말이야!》

정철수는 제먼저 녀성소대숙소뒤의 언덕으로 올라갔다. 그곳은 대대가 여기 도착한 날 밤 서길산이네가 기발대를 세우고 대대기발을 올린 곳이였다. 지금도 기발대는 그 자리에 서있다. 어두워서 장대우의 기발은 보이지 않았다. 기발은 어둠속에서도 바람에 날릴것이다. 괴로와하며 날릴것이다. 자기를 욕되게 한 주인들을 원망하며 괴로와할것이다.

《이 자식아! 동무들앞에서 자기 과오를 털어놓기가 그렇게도 두려우면 이 기발앞에서 털어놔라! 이 기발은 네가 올렸지? 네손으로 기발대를 세우고말이다. 그때 우린 이 기발앞에서 맹세를 했지? 그 맹세를 너도 잊지 않았을게다. 그러니 이 기발앞에서 네가 그 맹세를 어떻게 했는가를 털어놓으란 말이야! 못하겠니? 이 더러운 자식아!》

《철수! 그만하려무나! 네가 이 서길산을 아직도 다는 모르는구나. 이 서길산이 그렇게 더러운 자식은 아니다.》

《야, 그럼 넌 어떤 자식이냐? 그래, 그렇단말이지. 너 굉장한 혁신자구나! 속보에도 자주 나고 동무들도 서길산이 서길산이 하는 그런 혁신자, 아니 영웅인지도 모르지.》

《그렇게 비꼬지 말아!》

갑자기 서길산이 신경이 살아서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두사람사이에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들은 캄캄한 어둠속에서 서로 노려보았다. 어둠속이지만 서로 상대방을 대낮처럼 느끼고있었다.

《그래 싫단말이지? 창피하다는거야? 자존심이 중하다는거야? 그런 서길산이 대대의 표식말뚝을 뽑아 옮기고 그 자리를 누가 볼가봐 돌을 덮어놨어? 그건 뭐냐?》

《그만하지 못하겠어? 이 자식아!》

《…》

《나도 괴롭다. 표식말뚝을 내가 옮겨놓은건 사실이다. 난 사실 대대의 명예를 위해서 그렇게 한거다. 대대가 1등을 하게 하자고 그런것이지 대대의 얼굴에 흙칠을 하자고 그런건 아니란말이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였단말이다. 내가 잘못 생각하구 표식말뚝을 자의로 옮겨놓는바람에 대대에 불명예를 가져왔단말이다. 그때문에 난 괴롭다. 언땅을 까는 함마로 내 머리통을 들부시고싶은 심정이란말이야. 하지만 내가 어떻게… 어떻게 내 입으로 사람들앞에 나서서 그 말을 한단말이냐? 내가, 이 서길산이 어떻게… 이 자식아, 너 친구라는게 내 심정을 그렇게도 리해해줄줄 모르니?》

《그래, 그렇다! 에잇! 이 더러운 자식!》

정철수는 와락 달려들어 서길산의 목을 움켜잡았다.

《너 서길산이가 사람들을 위할줄 아는 좋은 사람이고 누구보다 일을 많이 하는 대대에서 꼽히는 인물이라는 그 명예가 귀중해서 그러는거지? 그런 서길산이가 어떻게 제 입으로 제 량심에 먹물이 가득차있다는걸 말하겠는가 그거지? 그게 틀렸단말이다. 자, 어서 붉은기앞에서 자기 량심을 헤쳐놔봐라! 못그러겠니?》

싸우듯 하는 두사람의 목소리를 잠자리에 든 대대의 적지 않은 사람들이 들었다.

김성순은 그때 불안감에 잠못들고있었다. 정철수가 왔다간 다음부터 다른 불안이 겹쳐든것이였다. 낯이 시퍼래서 돌아간 정철수가 꼭 무슨 일을 칠것만 같은것이였다. 여느때면 쾌활하고 인정이 많고 부드럽다가도 성나면 화독같이 달아올라 리성을 잃어버릴 지경이 되여버리군 하는 정철수였다. 

바로 김성순이 그렇게 불안에 싸여 한숨만 쉬고있을 때 병실뒤에서 남자들의 성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김성순은 대뜸 그게 정철수의 목소리라는것을 가려들었다. 성순은 예감되는것이 있어 자리에서 급히 일어났다. 어둠속인지라 잠자는 동무들을 다쳐서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하면서 옷을 찾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정철수의 성난 목소리는 녀성소대숙소뒤의 언덕우에서 분명 들려오는데 어둠때문에 보이지는 않았다.

성순은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있는것만 같아 급해맞았다. 틀림없이 정철수와 서길산이가 표식말뚝사건때문에 맞붙었을것이다. 주먹이 센 사내들끼리 맞붙었으니 무슨 일이 나기 십상이다.

성순은 발을 잘못 디디여 어푸러지기도 하면서 언덕으로 황황히 올라갔다. 아닌게아니라 언덕우에서는 정철수가 당장 무슨 일을 칠것같이 으르렁대고있었다.

《때리지 말아요, 철수동무! 때리면 안돼요!》

김성순이 새되게 부르짖으며 두사람을 떼놓으려고 달려들었다.

정철수는 순순히 서길산에게서 떨어졌다.

뜻밖에 나타난 김성순이를 보자 정철수는 갑자기 기가 죽어버린듯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그들이 무엇때문에 그러는지 김성순이 리해하기 어렵지 않았다. 성순은 아무런 항변도 못하면서 정철수의 손에서 풀리여나서도 어깨가 푹 처져서 한자리에 못박혀버린 서길산이 불쌍하게 생각되였다.

《리해해요, 철수동무! 진정하고 리해해줘요!》

김성순은 간청하듯 애처로운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정철수는 그 소리에 홱 고개를 돌려 김성순을 쏘아보았다.

《뭘 리해하란 말이요? 뭘?》

《…》

《맹추! 동문 맹추란말이야!》

정철수는 그 말을 남기고 왁살스럽게 어둠속으로 사라졌다.

언덕우에는 두사람만이 남았다.

서로가 무슨 말을 할수 있단 말인가!

두사람은 괴로운 침묵속에 허덕이였다.

서길산이 끝내 그 침묵을 참지 못하고 산산이 깨버렸다.

《동문 왜 나왔어?》

서길산은 수치에 몸을 떨며 김성순을 쏘아보다가 숙소쪽으로 허청허청 걸어내려갔다.

김성순은 그 자리에 서서 한동안 까딱하지 않았다. 가슴속에는 원망과 노여움과 그밖에 알수 없는 감정이 서리서리 엉켜돌아갔다. 하지만 누구한테 하소할수 있단 말인가.그는 서러웠다. 뜨거운 눈물이 두볼을 지지며 흘러내리였다.

 

끝장이다! 이 서길산이 혁신자가 되구 영웅이 되여 고향사람들한테 떳떳이 돌아간다구? 이 서길산이 대대가 내세워주고 동무들이 떠받들어주는 좋은 사람이라구? 아, 내가 무슨 정신으루 표식말뚝을 옮겨놨단말인가. 대대가 별의별 고생을 다 하며 1등을 하자고 일한 보람은 물거품이 되여버리였고 시공에는 혼란을 주어 반복시공을 하지 않으면 안되게 되였으니 지휘관들은 이 서길산이를 두고 뭐라고 할것이며 동무들은 나를 얼마나 원망할것인가. 내 잘못으로 우리 신암대대의 명예에 흙탕칠을 해놓았으니 이 서길산이 이제 어떻게 동무들앞에 머리를 들고 나선단 말인가! 정철수, 그런데 넌 뭐야? 너까지 이 서길산의 심정을 몰라준단 말이야? 더럽고 량심없는 자식이라구? 그래 내가 나 하나의 명예를 위해 표식말뚝을 옮겨놨다고 넌 생각하니? 넌 이 친구를 그렇게 더러운 놈으로 알고있니? 네가 어떻게 내 친구야? 다시는, 다시는 너를 상대하지 않을테다. 너같은 친구는 없다. 기발앞에서 량심을 헤쳐놓으라구? 그래 수치는 내가 당하는것이다. 너한테는 상관없는 일이야. 동무들앞에, 집단앞에 나서는것도 내가 나서는것이고 비판을 받아도 내가 받고 수치의 진창속에 구겨박혀도 내가 당할 일이니 넌 상관이 없는거야. 아, 그런데 성순이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가? 그가 나를 리해할가? 이제 곤죽이 되게 비판을 받는 이 서길산이를 보면 성순이 마음이 어떨가? 이 시라소니가 된 서길산이를 성순이 어떻게 생각할가? 성순이만이라도 나를 리해해주었으면! 내 자신이 나를 헌신짝처럼 만들어놓았으니 난 정말 한심한 놈이다!

서길산은 자신을 저주했다. 어디에든 다른 곳으로 달아나던가 딴딴한 곳에 자기의 머리를 짓쪼아버리고싶었다. 모진 회오와 번민에 싸여 언덕을 내려와 어둠속을 허청허청 걸어가던 서길산은 나무판자같은데 정말로 이마를 되게 짓쪼았다. 눈앞이 번쩍하는것 같았다. 넨장, 이건 또 뭐야? 화를 내며 자세히 보니 그것은 대대속보판이였다. 바로 그 속보판에 며칠전부터 붙어있는 속보의 커다란 제목글자들이 어둠속에서도 눈에 들어왔다.

《달려도 성차지 않아》라는 제목이였다. 속보내용속에 들어있는 《서길산》이라는 이름도 보이였다. 내용은 보지 않고서도 안다. 어깨에 질통을 진채 다른 동무들과 맞들이를 들고 달리여 대대가 다 아는 혁신자 서길산동무를 자랑한다는 내용이다. 오선호정치지도원이 현장에 나와 직접 목격한것을 주인공의 얼굴을 속사한 그림까지 받쳐서 써붙이게 한 속보이다. 그림의 주인공은 수건으로 이마의 땀을 씻어내며 장하게 웃고있다. 서길산은 웃고있는 자기 모습조차도 역겨워졌다. 뭐 혁신자 서길산이라구?

서길산이 대대의 명예를 팔아먹은 너절한 인간이 되였는데 혁신자는 무슨 혁신자인가! 그는 그림속의 자기 모습을 보며 혐오감에 떨다가 고개를 홱 돌리였다. 그는 숙소를 향해 정신없이 걸어갔다. 그때 그의 눈앞에는 자그마하고 납작한 돌 하나가 떠올랐다.

자기가 표식말뚝을 뽑아낸 자리에 덮어놓았던 돌이였다. 정철수가 방금전에 자기를 타매하며 그 돌맹이에 대하여 뭐라고 하던 말이 떠오르며 말할수 없는 수치감에 더더욱 얼굴이 화끈해왔다. 아, 돌! 저주맞을 그놈의 돌멩이! 그놈의 돌멩이가 거기에 있을건 뭔가! 아니, 내가 그때 무슨 정신으로 그놈의 돌멩이로 구멍을 덮어버리였단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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