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편 소 설

 

 

최성진, 최광일                   

 

                피끓어라 청춘아 불타라 심장아

                  ㅡ 가요에서 ㅡ

 

( 제 3 회 )

 

제 1 편

 

3

 

서길산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들었다가 깨여났다. 몸이 떨리는데다가 배가 출출해났다. 추우니까 배고픔도 더한것 같았다. 엊저녁에 정철수며 동무들이 덜어주는 음식들로 배를 채우느라 했는데 그것들이 벌써 말짱 소화되여버린 모양이였다.

(제기랄것, 난 왜 남들보다 위주머니가 특별히 커가지고 이런 고생이야. 성순이처럼 남들보다 조금 먹고서도 견디여낼수 있을뿐만아니라 노래도 부르고 손풍금도 타주면서 사람들을 위해 더 많이 일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가. 에이, 사람이 먹는 생각만 하는건 저조한거야. 다시는 그런 생각을 말아야지.)

서길산은 애써 배고픈 생각을 잊어버리려 했다.

한데 그렇게 하는게 쉬운 일이 아니였다. 눈앞에선 낮에 성순이 꺼내주던 사탕가루를 넣어만든 달콤한 밀빵이 얼른거리는가 하면 배속에선 꼬르륵 소리가 그칠새 없었다.

(에이, 또 배고픈 생각이야. 그러다간 이 서길산이 시시한 사내가 되고말겠는걸. 하긴 사람이 다른것은 다 참고 견디여낼수 있어도 배고픈것 하군 타협을 못한다고 하지 않았어. 그러고 보면 오응세소대장의 말이 딱 맞는 소리같지도 않단 말이야. 사람이 물과 불만 있으면 어떻게 생명을 보존할수 있단 말이야. 무엇보다 밥을 먹어야 살수 있을게 아니야.)

서길산은 스스로도 자기 생각이 우스워 키득 웃었다. 얼굴을 무릎사이에 틀어박고 서길산이한테 기대여 잠을 자던 정철수가 그 소리를 들었는지 입을 쩝쩝거리면서 《왜 그래?》하고 절반 코소리로 웅얼거리였다.

《의지를 키우는중이야.》

《의지?》

《자라구.》

정철수는 또 입을 쩝쩝거리다가 코를 골기 시작했다.

서길산은 김성순이 배낭속에 남겨놓았을 밀빵에 또 생각이 미치였다. 김성순이 앞으로 일이 힘들고 배고플것을 예견하여 남겨놓은 비상용빵을 넘겨다본다는것이 좀 멋적은 일이지만 그래도 그게 자꾸만 눈앞에서 얼른거리며 배안에선 더 참지 못하겠다는듯 쪼르륵 소리가 잦아졌다. 다른 녀자도 아니고 성순이한테야 말 못할게 뭐 있으랴 생각했다가도 에라, 참고 견디자꾸나 하고 자신을 달래였다. 아직 전투가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요만한 배고픔을 참지 못하면 앞으로 어떻게 이보다 더한 어려움을 이겨내겠는가. 군당책임비서동지가 여기로 떠나오는 우리들에게 뭐라고 말했는가. 미국놈들때문에 앞으로 형편이 더 어려워질수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하지만 우리 청년들은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기어이 대통로건설을 기한전에 끝내여 조선청년들의 불굴의 의지와 신념을 세상에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그러자면 어려움을 참고 견딜줄부터 알아야 하는거야. 에라, 그러니 차라리 잘된 일이다. 이 기회에 이 서길산이 배고픔을 참고 견디는 훈련이나 하자. 내가 얼마나 참을성이 있는지 어디 한번 보잔 말이야.

한번 깨여나자 다시는 잠이 오지 않았다. 서길산은 눈을 지써 감은채 배고픔을 참기 위해 애썼다. 사람은 결심을 지어먹기에 달렸다더니 정작 참자고 마음먹으니 그게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것 같았다. 자기가 괜찮은 사내라는 생각조차 들었다. 그는 집에 계시는 아버지를 생각했다.

서길산은 아버지가 눈앞에 떠오르자 죄스러운 생각부터 들었다. 나이가 많은 아버지를 혼자 있게 하고 서길산이 고속도로건설장에 탄원하여 훌쩍 달려온것이였다. 아들조차 없으니 아버지 혼자 때식을 끓여자시며 직장에 출근할것이다. 옹진에 있는 누이가 자주 와서는 며칠씩 붙어있으면서 집안의 밀린 일들을 거들어주기도 하고 또 성순이네 부모님들도 남같지 않게 관심을 가지고 도와주지만 그래도 이 아들이 늘쌍 곁에 있는것만이야 하랴.

아버지를 생각하면서부터 서길산은 정말 배고픈 생각을 잊었다. 서길산은 부지불식간에 가슴이 짜릿해왔다. 아버지일을 생각하면 마음이 여리여지는 서길산이였다.

서길산의 아버지 서문혁은 원래 철도건설로동자였다. 열여덟이라는 홍안의 나이에 해주ㅡ하성간철도공사장에서 일한것이 그의 로동생활의 시작이였다. 그때로부터 그는 늘쌍 집을 떠나 철도건설자들의 《집》인 유개화차에 청춘의 꿈도 생활도구들도 다 싣고 조국의 철도가 뻗어가는 곳이라면 안간데가 없었다. 그는 주로 새 철길을 늘이는데서 일했으며 그후에는 철도전기화공사장에서 일했다.

그가 안해 리선희를 처음으로 알게 된것은 어느 철도전기화공사장에서 일하다가 휴가를 받고 고향에 가서였다.

이웃에서 살며 서문혁의 사람됨됨을 어느 정도 알고있는 제대군관출신인 현이순이 집에서 휴가기간을 보내는 그에게 리선희라는 처녀의 사진을 보여주었다. 얼굴에 피기가 없어 보이지만 자세히 볼수록 이목구비가 나무랄데없이 잘 생긴 처녀였다.

처녀는 영예군인이였다. 평양하늘을 지키는 고사포부대의 자동차운전사로 복무하던중 번개치고 우뢰울고 벼락이 내리꼰지던 무시무시한 밤에 탕수가 흘러드는 좌지에 올라가 고사포를 움직이다가 척추를 상하였다. 큰 병원에 가서 오래동안 치료를 받았으나 불구의 처지를 면할수 없게 되였다. 그만큼 상처는 치명적이였다.

처녀는 자기 운명을 두고 번민에 잠기였다.

병원에서 퇴원하여 고향으로 가는 리선희가 옛 중대장인 녀성제대군관 현이순을 려행중 렬차칸에서 우연히 만난것은 영예군인처녀에게 있어서 행운이였다.

현이순은 옛 부하였던 리선희의 남편감으로는 영예군인인 남같지 않은 그의 처지를 리해하고 일생 변함없이 사랑해줄 성실하고 깨끗한 남자여야 하겠다고 생각해오던중에 마침 휴가를 왔다는 한동네의 총각 서문혁에게 생각이 미친것이였다.

결혼을 하기까지는 곡절이 없었던것도 아니였다. 서문혁은 한생을 철도로동자로 일하면서 늘쌍 집을 떠나 살아야 하는 자기 처지에 몸이 남들 같지 않은 영예군인처녀를 안해로 맞아들인다는것이 결국은 두사람 모두에게 한생의 불행을 사게 되는 일같아서 주저했다. 처녀 또한 자기 처지를 생각해서 선뜻 현이순의 제의에 응해나서지 못하였다.

《조건같은거야 무슨 문제예요. 진정으로 사랑하면 행복은 오는거예요. 난 두사람이 가정을 이루면 서로 돕고 위해주면서 행복의 장미를 훌륭히 가꾸어내리라고 믿어요.》

웅심깊은 녀인인 현이순이 하는 말이였다. 물론 그 말속에는 생활의 진리도 있는것이지만 그보다도 조국을 위해 가장 귀중한 처녀시절을 바친 영예군인인 옛 부하를 행복하게 해주고싶어하는 사려깊은 인정이 뜨겁게 스며있는 말이였다.

두사람은 결혼하였다.

서문혁은 사실상 사랑해서라기보다 불행한 처녀를 동정해서 결혼에 응했다고 할수 있었다. 한데 서문혁은 일단 결혼하자 진정으로 그 녀자를 위해 애정을 쏟았다. 안해에게 조금이라도 육체적부담이 될수 있는 집안일은 자기가 도맡아했으며 지어 안해가 감기에 걸리거나 다른 사정으로 몸이 불편해하면 밥을 하거나 설겆이를 하는것 같은 부엌동자질까지도 자기가 했다.

하지만 서문혁은 철도로동자였다. 늘 안해곁에 있으면서 그를 위해줄수는 없는것이였다.

안해 역시 그러한 남편의 안해가 되여 그의 발목을 붙잡고 부담만 끼치는것 같아 미안해하였으며 어떤 때에는 그와 결혼한것을 후회하기까지 하였다. 차라리 시집이란것을 애당초 오지 말았으면! 그랬더라면 저이 한사람만이라도 자유로워지고 나 또한 마음만은 편할게 아닌가! 하고 리선희는 생각한것이였다.

리선희에게 마음속으로 바라던 커다란 행복이 찾아들었다. 딸애에 이어 아들애가 태여난것이였다.

이름을 길산이라고 지었다. 먼 철도공사장에서 안해의 생남소식을 받고 서문혁이 지어보낸 이름이였다.

그런데 아들애가 무럭무럭 자라는 즈음에도 남편에 대한 미안한 생각은 리선희의 가슴에서 조금도 덜어지지 않았다. 커가는 아들애의 일로 마음 쓸 일도 자주 생기였으며 가정적부담 또한 더 많아졌다.

그러한 그들의 가정일을 가까이에서 사는 현이순이 많이 도와주었다.

실은 현이순이 자신도 군인민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되면서 무척 바삐 돌아가야 하는 몸이지만 그래도 짬을 내서 리선희의 일이 걱정되여 자주 들려보군 했다. 휴식날같은 때면 그의 집일도 해주었다. 남편을 공사장에 보내놓고 불편한 몸으로 지내는 리선희를 위해 남편과 함께 와서 구멍탄도 빚어주고 바람벽이나 부뚜막손질도 해주었다.

서문혁은 석달에 한번이나 집에 오군 했으며 와서는 한주일도 못있어 떠나가군 했다. 그래서 리선희는 자기 집을 남편의 출장소라고 웃으며 말하군 했다. 남편이 사회를 위해서 많은 일을 한다는 긍지감과 행복감에 충만되여 해보는 말이기도 했다. 서문혁이 주요국가적인 명절이 되여 집에 오는 때면 현이순이네 내외가 그의 집에 오기도 하고 또 서문혁이네가 현이순이네 집에 가기도 하면서 즐거움을 나누기도 했다.

서문혁의 아들애가 태여난지 두해 지나 현이순이 딸을 낳았다.

아들 둘을 거퍼 낳고 딸이 하나 있었으면 하고 바라던 집안에 생겨난 외딸이였다.

잘 생긴 현이순을 닮아서 딸 성순은 크면서 점점 이쁘게 번지였다.

한집안식구처럼 간격이라고는 조금도 없이 살아오는 두 집이여서 서문혁내외에게는 성순이 친딸이나 다름없이 생각되였으며 현이순이네 또한 서길산을 친아들처럼 대해주었다.

두 집의 세대주들은 좋은 일이 생겨 마주앉을 때면 사돈맺을 소리도 롱말로 입에 올리군 했다.

롱말로 오가는 소리이지만 실상 서문혁의 집에서는 그렇게 되기를 은근히 바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이루어질수 없는것이라고 생각했다.

현이순이 군에서 한다하는 일군인것으로 하여 그 집과 친척이나 다름없이 지내면서도 은연중 거리감을 느껴오는데다가 부모들이 귀한 딸로 애지중지 키워오는 성순은 대학공부까지 한 한다하는 고급재단사이고 손풍금도 잘 타고 목소리도 고와서 어쩌면 예술무대로 발전할수 있다고까지 하지 않는가. 그뿐이 아니다. 인물은 또 얼마나 잘 나고 마음씨는 얼마나 고운가!

하여 둘 다 마음이 어진 서문혁이 내외로서는 그애를 장차 며느리로 맞아들인다는것이 도무지 분수에 어울리지 않는 일로 생각되는것이였다.

성순은 서문혁이네 내외의 그런 속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언제나와 같이 밝고 명랑한 본색그대로 그 집을 제 집처럼 드나들군 했다. 현이순이네 내외가 영예군인인 서길산의 어머니를 잘 도와주어야 한다고 늘쌍 말해주는데도 있지만 그보다도 성순이자신이 부모님들한테서 의협심을 유전받아서인지는 몰라도 어쨌든 아름다운 마음씨를 천성으로 타고난 처녀였다. 처녀는 서길산이네 집에 와서 제 집처럼 마음놓고 웃고 떠들어 집안의 분위기를 한껏 밝게 해주었으며 몸이 불편한 리선희를 대신하여 집안팎을 일신시켜놓군 했다.

리선희는 그러는 성순을 보면서 남모르게 한숨을 쉬군 했다. (에구, 저 성순은 마음씨는 어쩌면 비단결같이 곱고 인물은 또 어떻게 저처럼 삐여지게 잘 났을가 .)하고 생각했다. 그때문에 마음놓고 며느리로 데려올수 없는것이라는듯. 천성이 명랑한 김성순은 나이가 들어가면서도 서길산을 어려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여전히 철없는 소녀애처럼 오빠, 오빠 하며 무랍없이 따랐고 게정도 곧잘 부리였다.

서길산이 또한 그렇게 대하는데 습관되였다.

하지만 생활이란 그저 단순명백하고 고정불변한것이 아니였다.

두사람에게 청춘이라는 인생의 보라빛시절이 온것이였다.

중학교를 졸업한 서길산이 광산로동자가 되여 일할 때 김성순은 대학에 갔다. 몇해후에 대학을 졸업한 성순이 키가 쭉 빠지고 도시의 류행바람에 촌때를 말끔히 벗은 미모의 처녀가 되여 고향에 내려왔다.

도시물이 좋기는 좋다! 처녀가 나서면 온 읍거리가 환해지는듯 했다. 나이찬 총각들은 멋모르고 처녀를 넘겨다보았다.

그러는 가운데 서길산은 한숨정도가 아니라 거의 절망에 빠져버리였다.

이때에 이르러 서길산은 벌써 사춘기도 아니였다. 이성앞에서는 심장이 뛰고 공연히 주눅이 들어버리기도 하는 시절이였다. 철없고 멋모르던 소년시절이나 사춘기때처럼 성순을 친동생처럼 대해주고 보호해주며 아무런 구속감이나 두려움도 없이 순진한 마음으로 《얘, 성순아!》하고 부를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하지만 그것은 지나가버린, 저 멀리 추억의 기슭에서 가물거리는 신기루처럼 되여버린것이였다.

청년기란 사랑을 동반하는 시절이기도 하다. 그래서 더우기 아름다운 시절이 아닌가. 그런데 서길산의 앞에 나타난 김성순은 한갖 광산로동자이며 기껏해야 청년동맹초급위원회 위원이고 광산축구팀의 중앙공격수인 자기가 넘겨다보기에는 너무나도 아득한 높이에 올라있는 존재였다.

이제라도 당위원회에 찾아가 나도 대학공부를 해야겠다고 제기할가부다. 이 서길산이는 뭐가 모자라서 대학에 못간단말이야, 가면 가는것이지. 그런데 처녀의 사랑을 위해 대학에 가겠다는것은 좀 우습지 않아. 에이, 서길산이 이게 무슨 꼴이야.

서길산은 그제서야 자기가 성순을 사랑해왔다는것을 느꼈으며 그와 동시에 그 사랑이 실현될수 없는 사랑이라는것도 느끼게 되였다. 그것은 무딘 칼로 가슴을 마구 허비여대는것과 같은 아픔이였다.

성순을 만나기조차 두려웠다. 어쩌다 마주칠라치면 서길산이 제먼저 그 녀자를 피하군 했다.

그러한 서길산의 행동이 처녀를 노엽혔다.

어느해 추석(한가위)날이였다. 성순이네 식구들은 서길산이네와 함께 서길산의 어머니묘에 갔다. 두해전에 서길산의 어머니 리선희는 자리에 누워있다가 끝내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것이였다. 성순은 대학에 가있는 사이에 있은 일이여서 리선희녀성의 장례식에 참가하지 못했는데 그때문에 추석날 그의 묘를 찾자 더더욱 슬픔이 북받쳐올랐다. 하여 고인을 위로하는 술 한잔을 붓다가 끝내 목놓아울었다. 실컷 울고나니 한결 마음이 가라앉았다.

돌아오는 길에 성순은 울적해서 걸어오는 서길산을 따로 만났다.

《길산오빠, 말 좀 할래요.》

서길산이 돌아보니 성순의 표정이 별로 심각했다.

《왜 그러오?》

서길산은 예전처럼 철없는 동생 대하듯 할수 없이 어정쩡한 말투를 썼다.

《오빤 왜 그래요?》

《?…》

《왜 나를 피하는가 말이예요? 말해봐요.》

서길산은 그제서야 처녀가 노한 까닭을 알고 괴롭게 한숨을 내쉬였다.

한참만에야 그는 자신에게 까닭모를 화를 내며 마음을 도슬러먹었다.

《성순이, 그러지 않아도 난 성순일 만나 말 좀 하려던참이였소. 인젠 우리 집에 어머님을 도울 일도 없으니 때없이 다니질 마오. 우리야 그전처럼 철없는 아이들이 아니지 않소. 사람들이 보고 뭐라고 하겠소. 성순인 집안도 그렇지만 대학까지 나온 처녀인데 우리 집에 다니다가 헛소문이라도 나면…》

《그만해요!》 성난 목소리가 회초리처럼 날아왔다.

《성순이…》

《그때문에 나를 피했단말이예요?》

한결 부드러워진 그 목소리에 서길산은 의아해서 돌아보았다.

뜻밖에도 처녀는 소리없이 웃고있었다. 눈언저리에는 발그레한 색조가 타올랐다.

《남자의 자존심이 그게 뭐예요?》

《성순인…》

《됐어요. 앞으로도 나를 그저 〈성순이〉하고 그렇게 불러달라요. 친동생으로 생각하구말이예요. 제가 부모가 일군이면 어쩌구 또 대학을 나왔으면 어쨌단말이예요. 길산오빠의 부모님들은 뭐 훌륭한 부모님들이 아니란 말인가요? 나라를 위해 청춘을 바친 영예군인어머니가 그래 사회가 떠받들고 존경하는 훌륭한 어머니가 아닌가 말이예요. 난 간부집 딸이라고 코대나 높이는 경망한 녀자가 되고싶지 않아요. 앞으로도 이 성순일 그렇게 피하기만 하면 길산오빠를 정말로 시시한 남자로 알겠어요.》

성순은 돌아서서 내려갔다. 장난많던 소녀시절처럼 한묶음 꺾어쥔 들국화를 휘휘 휘두르며 내려가던 처녀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고개를 숙이며 키득 웃었다.

서길산은 그 모양을 지켜보다가 자기도모르게 허거픈 웃음을 웃었다. 그의 귀전에는 《남자의 자존심이 그게 뭐예요!》하던 말이 다시 울리는것만 같았다. 누군가 책에다 그렇게 쓰지 않았는가. 사내의 장점은 자존심에 있는것이라고. 그 장점이 사내를 강하게도 만들고 훌륭하고 아름답게 만들기도 하는것이라고. 그 말이 다 옳은것인지 몰라도 성순이의 말이야 옳은것이지 뭐야.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자기를 《친동생으로 생각하구…》하던 성순의 말이 가슴을 아리게 했다. 서길산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홱 저었다. 에이, 이 서길산이 정말 한심하기 짝이 없는 사내야. 시시한 생각을 다하다니! 성순이를 따라가자면 아득히 멀었는걸. 어떻게 하면 이 서길산이 뚝 삐여지는 큰일을 해서 다시는 성순이한테 그런 소리를 듣지 않게 될가.

김성순은 그런 일이 있은 다음에도 의연히 밝고 명랑한 웃음을 날리며 서길산이네 집에 다니였다. 녀인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먼지가 앉기 시작하는 부엌에 들어가 거두매질도 해주었다.

서길산은 남모르게 영웅이 될 꿈을 꾸었다.

김성순이에 대한 이루지도 못할 시시한 생각은 애써 잊어버리자고 했으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그러는 가운데 드디여 기회가 왔다.

위대한 장군님께서 평양과 남포사이를 련결하는 고속도로건설을 발기하시고 그 거창한 과업을 청년동맹에 통채로 맡겨주신것이였다.

그날이 바로 1998년 11월 1일이였다.

수많은 피끓는 청춘들이 고속도로건설전투에 탄원해나섰다. 조국이 준엄한 시련을 헤쳐나가는 때에 사회주의강성대국건설의 대통로를 열어제끼는 건설전투에 자기들을 불러주신 그이의 믿음과 사랑이 수백만 이 나라 청년들의 심장을 미래에 대한 락관과 승리에 대한 신심으로 더욱 세차게 고동치게 한것이였다.

서길산은 격동의 와류속에서 생각했다. 가자!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우리 청년들에게 맡겨주신 대통로건설장이야말로 오늘의 시대와 함께 력사에 길이 남을 위훈이 창조될 활무대가 아닌가! 이 서길산이 여기에 빠진다면 어떻게 이 시대에 산 청년이라고 말할수 있겠는가. 서길산은 이제 세월이 흐르고흘러 후세의 인간들이 오늘을 돌아보게 될 때 김정일시대를 빛내일 거창한 전투인 대통로건설전투에 참가한 건설자들의 이름과 함께 자기 이름도 기억하기를 바랐다. 서길산은 누구한테 뒤질세라 맨 처음으로 탄원자명단에 자기 이름을 올리였다.

마침 옷공장에 다니는 김성순이도 탄원하여 서길산은 더욱 사기가 났다. 어머니의 산소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성순이는 자기를 친동생처럼 계속 생각해달라고 말했지만 그 일이 있은 다음부터 두사람사이에는 오히려 오빠동생하던 관계가 노래의 아름다운 후렴이 끝나듯 사춘기에 대한 마지막추억이라는 여운만 남기고 끝나버렸다. 대신 이성의 관계라는 새로운 사고가 둘사이에 확고히 들어앉았다.

그것으로 하여 그들은 서로 만나면 부자연스러운 감을 느끼였다. 그러면서도 서길산의 마음속에는 속이 깊고 명랑하며 용모나 마음씨까지도 삐여지게 아름다운 처녀가 더 깊숙이 들어앉았다.

서길산은 다만 아버지의 일이 걱정되였다.

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 더욱 과묵해진 아버지였다. 이제 자기까지 집을 나가게 되면 때식마저도 혼자 끓여자시며 일을 나가야 할것이였다. 옹진에 사는 누이라도 공사가 끝날 때까지 집에 와있었으면 좋으련만 그러자면 그 집 일이 또한 문제일것이였다.

이래저래 마음이 무거워진 서길산은 고속도로건설장에 탄원했노라는 말을 선뜻 못하고있다가 이틀이 지나서야 말씀드릴게 있다면서 아버지앞에 나앉았다. 했건만 인차 말이 나가지 않았다.

심사가 편안치 않은 아들의 말없는 표정을 지켜보던 아버지가 무슨 일이냐고 물어서야 서길산은 사연을 말했다.

아버지는 한동안 말없이 아들의 기색만 살피였다. 그러다가 말했다.

《네가 이 아버지생각을 했구나. 걱정말아라. 이 아버지는 이래뵈도 아직은 기력이 남아있다. 또 성순이네랑 고마운 이웃들속에서 사는데 무슨 걱정이냐. 난 네가 그런 결심을 한게 더없이 기쁘다. 장군님께서 이 어려운 시기에 우리모두의 운명을 지켜주시려고 시련을 앞장에서 헤쳐가고계시는데 이런 때일수록 장군님의 뜻을 더 잘 받들고 걸음걸음 따라나서야 하지 않겠느냐. 피가 펄펄 끓고있는 젊은 시절에 많은 일을 해야지. 공사장에 가서두 그렇다. 이 아버지걱정을 할게 아니라 함께 일하는 동무들을 위해줄줄 알고 어려운 일이 나서면 제 몸을 먼저 내댈 생각을 해야 하는거다. 알겠느냐?》

《말씀을 명심하겠어요. 아버지, 그런데 떠나기 전에 제가 꼭 아버지한테 말씀드릴것이 있어요.》

《말하렴.》

서길산은 자기를 의아해서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길을 피하여 고개를 숙이였다. 오래전부터 해온 생각을 정작 터놓으려고 생각하니 부지불식간에 목이 메여오고 눈물이 나올것만 같았던것이다. 너무도 일찍 세상을 떠난 어머니앞에 자기가 죄되는 일을 하는것만 같았다.

어머니, 하지만 어머니는 리해하실거예요. 그리고 이 아들은 영원히 저를 낳아주신 어머니의 사랑을 잊지 않겠어요. 영원히 어머니를 사랑하겠어요 하고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서길산은 이윽해서야 힘들게 입을 열었다.

《아버지, 인젠 어머님이 세상을 떠난지도 세해가 지나지 않았습니까. 아버지, 계속 혼자 계실수야 없지 않습니까. 제가 떠난 다음에라도 옹진누이네와 잘 의논하셔서 새어머니를 모셔오도록 하십시오. 제가 아버님께 이런 말씀을 드린다고 그게 돌아가신 어머님한테 죄되는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돌아가신 어머님도 그렇게 하는걸 바라실거라고 생각합니다.》

《…》

방안에는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서길산은 고개를 들어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돌조각처럼 움직이지 않는 아버지의 거뭇한 얼굴에는 짙은 고뇌가 실리였다. 어머니가 사망한 다음 머리에 흰오리가 눈에 뜨이게 많아지고 살이 빠진 얼굴에는 주름살들이 늘어났다. 서길산은 새삼스럽게 아버지의 변한 모습에 눈물이 나오려는것을 억지로 참았다.

이윽하여 아버지는 무거운 한숨을 쉬였다.

《이 아버지를 생각해서 그러는 네 마음은 고맙다. 네가 누이한테두 그런 소릴 했다는걸 안다. 일전에 네 누이가 그러더라. 새 녀자를 데려오면 나도 한결 쉬워지고 너희들도 이 아버지때문에 마음 쓸 일이 적어진다는것을 내 생각 못한바두 아니다. 하지만 이 아버지를 리해해다오. 난 너희 어머니를 잊을수가 없다. 네 어머니가 불편한 몸이니 이 아버지가 고생이야 했지. 그때문에 그 사람은 살아있을적에 항상 미안해했구 집안일을 조금이나마 맡아안지 못해 마음을 썼던것이다. 그래서 난 너희 어머니를 더우기 잊을수 없는것이구 이제 새 사람을 맞아들인다는것이 그 사람한테 죄를 짓는것만 같아 차마 그런 결심을 못하겠다. 재삼 부탁이다.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아다오.》

《아버지!》

서길산은 목이 꺽 메여 더 말을 못했다.

아버지는 답답한 분위기를 가셔버리려는듯 얼굴에 밝은 미소를 실었다.

《다른 생각일랑 말구 가서 일을 많이 해라. 남들보다 뒤떨어진다는건 사내로서 수치다. 더우기 장군님께서 너희들 청년들을 믿고 맡겨주신 도로건설이 아니냐. 그리구 성순이를 잘 돌봐주어라. 거기 가면 애로되는게 많을게구 일두 힘들겠는데 연약한 녀자의 몸으로 힘들어할게다. 집안의 외딸로 사랑만 받으며 자라온 성순이 아니냐.》

《알겠어요, 아버지.》

서길산은 헌헌히 대답했다. 그는 어떻게 해서나 아버지의 기분을 밝게 해주고싶었다. 그리고 아버지가 고마왔다. 이제 대통로건설에 나가 세상이 다 아는 위훈을 세우고 돌아오리라. 아버지도 나한테 영웅이 되라고 내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속으로는 그것을 바랄것이 아닌가. 서길산은 그렇게 떠나왔다.…

서길산은 아버지에 대하여 생각하다가 두번째로 잠이 들었다. 배고픔을 잊어버린것이였다.

그런데 또 깨여났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알수 없었다. 추위때문에 몸을 움직이기 싫은것을 억지로 놀려 손목시계를 보았다. 사위는 훤한것 같은데 시계바늘은 어디에 가있는지 알리지 않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니 별이 총총했다. 사위가 훤한것은 별빛때문이였다. 대동강쪽에서 들려오던 맹수의 울부짖음같은 바람소리는 어느새 잦아들었다. 주위는 쥐죽은듯이 고요했다.

서길산은 꼬부리고 누워있자니 오금이 저려나고 또 뼈짬으로 지독스레 파고드는 추위때문에 더 참을수가 없어 일어나 앉았다. 부시시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활활 기세좋게 타오르던 모닥불은 다 사그라들고 불티 하나 보이지 않았다. 재만 날리는 모닥불주위에 바투 바자를 친 처녀들에게 눈길이 미치였다. 더러는 꼬부리고앉아 무릎사이에 얼굴을 묻고 잠들었는가 하면 어떤 처녀들은 서로 꼭 껴안고 새우잠을 잤다. 처녀들의 바람막이가 되여 원을 지은 남자들도 추위를 이겨내느라 솜옷속으로 잔뜩 몸들을 옹송그린채 푸푸 코들을 골았다. 온종일 차우에 앉아오느라 피곤하다나니 그런대로 잠이 든것이였다.

김성순이쪽을 찾아보니 그는 다른 처녀를 꼭 껴안고 누워자고있었다. 서길산은 자기의 솜옷을 벗어 그들 두 처녀에게 살그머니 덮어준 다음 모닥불을 살려야겠다는 생각을 하고 그 자리를 떴다.

어둠속을 걸어가면서 보니 주변은 나무꼬치 하나 얻을수 없는 논벌이였다. 엊저녁에 보이던 멀리 있는 마을의 희미한 불빛들마저도 다 꺼져서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지금쯤은 새벽이 가까와올 시간같은데 아직 불을 켠 집들이 하나도 없는것을 보면 정전인 모양이였다.

어디에나 불빛 한점 보이지 않으니 더 을씨년스러워보이였다. 그런데 서길산은 추위때문에 으쓸해지면서도 마음은 그닥 무겁지 않았다. 오히려 긍지감비슷한것을 느끼였다. 사람들이 모두 자기집아래목에서 단잠을 자고있을 때 우리는 대통로건설을 위해서 수백리길을 달려와 별이 돋은 하늘을 지붕삼아 허허벌판에서 잠을 자고있지 않는가, 배고픔도 이겨내면서. 서길산은 그렇게 생각하니 자기가 장하게 여겨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서길산은 또 배고픔을 느끼였다.

그는 그 생각을 잊어버리려고 모닥불을 피우는데 쓸만한 나무가지같은것을 찾아 돌아치다가 거뭇한 무지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이게 뭐야? 아하, 낮에 뜨락또르에서 부리여놓은 장작이로구나. 최진혁대대장이 모닥불을 지피는데 쓸것을 조금씩 나누어주고는 식당용으로 쓸거라며 누구든지 한가치도 승인없이 가져가면 안된다고 엄격히 지시하던것이 생각났다. 그는 어떻게 할가 하고 머뭇거리다가 에이, 동무들이 한지에서 꼬부리고 잠을 자는데 몇가치만 날라가자. 누구도 보지 않는데 알게 뭐야. 자리가 날것도 아니고 하는 생각을 했다.

그가 장작더미에 손을 대려는찰나에 코앞에서 《누구야?》 하는 목소리가 돌멩이처럼 날아왔다.

《에크! 이게 뭐야?》

서길산은 들켰다는 생각에 당황하기도 하고 또 어색하기도 하여 자기도 모르게 그런 소리가 나갔다.

서길산의 그런 모양을 지켜보는듯 누구냐고 되알지게 소리치던 상대가 《히히》 하고 웃었다.

장작가리안에서 시꺼먼 형체가 움지럭거리더니 이번에는 전지불이 서길산의 얼굴을 향해 면바로 날아들었다.

《난 또 누군가 했더니 광산친구로군.》

전지불의 임자는 장작더미에서 몸을 일으키고 앉아 늘어지게 기지개를 켜더니 하품 뒤끝에 빈정거리듯 말했다.

《장작을 훔쳐가면 안된다구ㅡ》

알고보니 낮에 같이 타고온 박정수라는 담배공장 친구였다. 서길산은 그제서야 마음을 놓고 히쭉 웃었다.

《제기랄, 훔친다는건 무슨 소리야? 한소대사람끼리. 그래 동문 장작경비를 서나?》

《수호신이지.》

《수호신?》

《장작을 지키고 도적을 막는 수호신. 오응세소대장이 나를 여기로 파견하면서 말하더군. 장작이 없어지면 대대가 아침밥을 굶게 된단말이요, 그러니 누구도 춥다고 장작을 훔쳐가지 못하게 오늘 밤은 수호신이 되라구, 좀 추울수 있는데 대대를 위해서 극복하자구, 혁명적으로 하구 말했단 말이요. 에이, 떨린다. 속을 좀 덥히지 않겠어? 광산친구.》

《속을 덥힌다는건 뭔가?》

《모른척 하지 말라구. 자, 이걸 한모금만 넘겨보게. 속이 얼었던게 대번에 녹아 뜨끈해지지.》

박정수는 품속에 찔러두었던 납작하게 생긴 병을 꺼내 서길산에게 내밀었다.

《이거 술이 아닌가.》

《말조심하라구. 이건 약으로 쓰는거야. 추위를 극복하는덴 이것두 괜찮아.》

《약이라구? 그럼 추위를 좀 극복해봐? 에크, 이게 무슨 약이야? 60프로는 되고도 남겠군.》

한모금 넘기다가 불에 덴듯 기겁을 하는 서길산을 보며 박정수가 좋다고 히히거렸다.

《그건말이야, 사실 60프로짜리 불개미술이야. 내가 관절염이 좀 있다고 해서 식료가내반에 다니는 우리 이모가 특별히 제조해서 준것이라구. 관절염이 심해지면 고속도로건설장에 나가서 남만큼 일을 못한다는거지. 그러니 그게 약이야 약이지, 사실말이지. 어때, 속이 화끈하지?》

《사내들은 이렇게 해서라도 추위를 극복할수 있지만 처녀들이야 어디 그래. 지금 우리 처녀들이 다 사그라진 모닥불곁에서 오돌오돌 떨고있단말이야. 처녀들이야 연약하구 또 사랑해주어야 할 꽃이 아닌가.》

《이 친구 키가 꺽두룩해가지고 엉큼하군. 장작을 달라는거겠지. 에라, 우리 소대를 위한것인데 이 박정수 한번만 눈을 꾹 감는다. 몇가치만 가져가라구. 경비책임자가 순찰할수 있으니 걸려들지 말라구.… 이거 내가 과오를 범하는게 아니야?》

《경비책임자가 누군가?》

《김명식이라던지. 거 얼굴이 별로 핼쑥해보이는 친구 있잖아. 식료공장에서 왔다던지. 그가 경비분대장으로 임명되였다더군.》

박정수는 별들이 총총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긴 하품을 하더니 장작가리속으로 다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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