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3 회)
제 3 장
8
원동 뱌쯔꼬예훈련기지
1945년 4월초
김정숙동지께서는 묵직한 쌀배낭을 통신중대의 녀대원 박경숙의 앞에 내려놓으시였다.
《경숙동무, 이건 조선찹쌀이예요.》
《아니, 이런걸 어디서?…》
《백두산에서 박덕산동지가 보내온거예요.》
김정숙동지께서는 다심한 손길로 찹쌀배낭을 쓸어만지시였다. 오늘 백두산에서 온 통신원이 가져온 찹쌀배낭이였다. 그때 김정숙동지께서는 고마움에 눈뿌리가 화끈해지는것을 어쩔수 없으시였다. 어느때나 말없이 이런 수고를 찾아서 하는 박덕산이였다. 박덕산이야말로 아무리 바쁜 일거리를 가지고있다해도 장군님께서 무엇을 걱정하시는지 신기할 정도로 잘 알아맞히고 필요한 대책을 세우군 했다.
요즘 장군님께서는 훈련기지의 세 위탈환자들때문에 몹시 걱정하고계시였다. 김책, 안길, 강신태… 그 세사람은 다 중국부대의 지휘성원으로 지내면서도 늘 장군님을 가장 크게 보좌하고있는 우리 혁명의 중핵들이였다. 그런데 위탈로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였다.
장군님의 세심한 관심속에 그들의 위탈은 얼마전부터 퍼그나 차도를 보이고있지만 아직 몸들이 퍽 쇠약하였다. 바로 이런 때 박덕산이 이 원동에서는 구경조차 할수 없는 흰찹쌀을 보내왔으니 김정숙동지로서는 눈물을 삼키지 않을수 없으시였다.
《경숙동무가 좀 수고를 해줘야겠어요.》
《내가 무슨…》
《이 찹쌀로 세 동지들의 위탈치료를 해야겠어요. 김책동지, 안길동지 그리고 경숙동무의 강신태동지까지 말예요. 찹쌀로 가루를 내여 지짐을 부쳐서 대접해드려요. 위탈을 다스리는데는 찹쌀지짐만한게 없어요.》
《아니, 이런…》
크나큰 감동에 무어라 할말을 못 찾던 박경숙은 갑자기 놀란 소리를 내였다.
《그렇다구 이걸 다 우리한테만 주면 어떻게 해요. 절반만 갈라 주세요. 장군님께서도 요새 몹시 수척해지셨던데 이제 출장길에서 돌아오시면…》
《그런 걱정은 말아요. 찹쌀이 오면 세분의 위탈치료에 쓰라는건 장군님의 지시예요. 그런데 이걸 대접받자구 하실게 뭐예요. 아마 경숙동무가 아무리 간청드려도 받아들이지 않으실거예요.》
김정숙동지께서는 박경숙의 제의를 밀막아버리시였다.
《그분들의 위탈치료는 이제부터 경숙동무에게 달려있는셈이예요.》
찹쌀을 전부 박경숙이한테 넘겨준 김정숙동지께서는 전에없이 마음이 흐뭇해지시였다. 아마 장군님께서도 출장길에서 돌아오면 이 소행을 두고 못내 기뻐하실것이다.
박경숙이와 헤여진 김정숙동지께서는 곧장 통신중대쪽으로 걸어가시였다. 무선대의 저녁근무교대시간이 거의다 되였던것이다.
통신중대의 건물근처에서 한 대원이 앞을 막아섰다. 조선부대에 소속되여있는 중국인대원 련합동이였다.
《정숙누이, 마침 잘 만났소.》
나이는 어금지금했지만 김정숙동지를 깍듯이 누이라고 존대하는 련합동이였다.
《오늘은 말좀 해보기요.》
잡도리가 심상치 않았다.
《아이, 술을 마셨군요.》
《마셨소. 군률에 어긋나는 일이긴 하지만 이젠 쫓겨나는 판인데 내가 뭘 가리겠소. 속이 너무 타서 후방부에 가서 한병 꼬드겨냈지요.》
《련합동동무, 술을 마시구 이게 뭐예요. 병실에 가지 말고 우리 집에 가서 누우세요, 어서!》
《야, 이거 정말…》
련합동은 안타까운 나머지 가슴을 탕탕 두드렸다.
《이젠 날 주정뱅이취급까지 하자는거군요.》
련합동은 실망을 가득 실은 눈길로 김정숙동지를 바라보았다.
《난 취하지 않았소. 통신중대에 갔다가 누이가 인차 근무를 나온다기에 길목을 지키고있었소.
정숙누이, 김책동지한테 한마디만 해주오. 날 조선부대에 그냥 떨궈두자고 한마디만 비치면 알 도리가 있지 않겠소.》
조선말을 조선사람 못지 않게 하는 련합동의 목소리에는 간곡한 애원이 담겨있었다.
《어서 대답해주오.》
《련합동동무, 동무도 잘 알고있지 않아요? 그런 일엔 내가 간참할수 없다는걸… 우리 부대의 중국동무들을 전부 중국부대로 보내라는건…》
《됐수다. 이젠 다 알만 하오. 정숙누이도 날 조선부대에서 내쫓자구 하는것 같은데 그건 장군님뜻이 아니요. 장군님께선 날 조선으로 데리구 가겠다고 하셨구 평양색시까지 얻어주겠노라 하셨단 말이요. 정숙누이가 암만 그래도 날 내쫓진 못하오.》
련합동은 진짜로 성을 내며 힝힝 멀어져갔다.
어이가 없어 한동안 그의 뒤모습을 바라보던 김정숙동지께서는 가볍게 한숨을 지으며 다시 발걸음을 옮기시였다. 마음은 무거우시였다.
지금 훈련기지는 민족별로 부대를 재편성하는 문제를 놓고 매우 어수선한 분위기에 싸여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들이 불거져나왔기때문이였다.
우선 중국부대의 지휘성원들속에서 재편성을 매우 마뜩잖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들은 김책, 안길, 강신태와 같은 조선지휘성원들을 내놓지
못하겠노라 주장했다. 특히 3지대 같은데서는 왕명귀지대장이하 부대성원전체가 안길을 비롯한 조선지휘성원들을 못 내놓겠노라며 련명으로 된
진정서까지 국제련합군지휘부로 가지고가서 소란을 피웠다. 지어 왕명귀는 때없이 김정숙동지를 찾아와 출장가신 김사령께서 돌아오시면 자기네의 의향을 잘 말씀올려달라고 지꿎게 성화를 먹이였다.
《조선부대 지휘성원들을 빼내가면 우리 3지대는 또 제도루메기가 되고 마오. 우리 지대가 다시 맨 꼬랑지에 서면 정숙동무두 좋을리 없잖소. 그러니
김사령께서 돌아오시면 말 좀 잘해주오.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난 한달이구 두달이구 이 댁에 드러누워 자릴 뜨지 않겠소. 이 왕명귀가
소힘줄처럼 질긴 사람인거야 정숙동무도 잘 알지 않소. 그럼 난 믿고 가겠소.》
이쯤되는 정도니 김책이 가있는 2지대나 강신태가 가있는 4지대는 말할것도 없었다.
그런가 하면 조선부대의 일부 중국대원들은 조선부대를 떠나지 않겠노라 강버티기를 하고있었다. 이전날 중국부대의 일부 지휘성원들이 그들을 구실을 못하는 애꾼들이라며 조선부대에 떠밀어버린 사실이 가슴속에 앙금처럼 남아있었던것이다.
그들의 소동을 다름아닌 련합동이 주도하고있었다. 그래서 김정숙동지께서는 장군님의 손때묻은 사람답지 않게 군다고 호되게 꾸짖으신것이였다. 그렇다고 련합동은 도리여 고까움만 가득해서 더 엇나갔다.
이 일을 어떡하면 좋단 말인가.
《이게 뉘기시오?》
석쉼한 목소리가 또 그이를 멈춰세웠다.
다음순간 시름으로 흐려졌던 김정숙동지의 얼굴에서 불이 켜지듯 웃음이 확 피여났다.
앞에는 큼직한 배낭을 짊어진 최현이 마주서서 벙글서 웃고있었다.
《련대장동지!》
김정숙동지께서는 지금도 최현이만은 원동으로 들어오기 전의 옛 직무대로 부르시군 했다.
《어떻게 갑자기 오셨습니까?》
《어떻게라니, 장군곁으로 다시 오는 길입지.》
하바롭스크에 주둔한 국제련합군의 자동총대대에 가있던 최현은 재편성과 관련한 조치에 따라 조선부대로 되돌아왔다는것이다.
《그래, 다들 무탈하오?》
《예, 예전 그대로입니다.》
《그렇다면 만났던김에 한마디하기요.》
인자한 웃음이 떠돌던 최현의 얼굴이 대뜸 바위돌같이 굳은 표정으로 변했다.
《정숙동문 언제부터 제 본분까지 잊고 사오?》
《네에?-》
《섭섭하구만. 정숙동무가 이럴줄은…》
최현은 마뜩지 않은 눈찌로 김정숙동지를 지릅떠보았다. 몹시 불쾌하거나 성낼 때의 최현은 늘 이런 표정이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영문을 알수 없으시였다. 그러나 최현이 이쯤 화를 낼 때는 분명 까닭이 있었다. 최현은 거짓과 위선을 모르는 사람이였다.
《저, 무슨 말씀이신지…》
《이렇단 말이야.》
최현은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시는 김정숙동지를 향해 손을 내흔들며 개탄조로 말했다.
《내가 곁에 없으면 전부 이 모양, 이 꼴들이니 기막힌 일이 아니요. 내 요전날 우연히 하바롭스크시내에 나왔다가 출장가시는 장군님을 만나뵈왔소. 그런데 미처 알아보지 못할 지경이더란 말이요. 어찌 그리도 수척해지셨소?》
《련대장동지.…》
김정숙동지께서는 고개를 푹 숙이시였다. 눈물이 앞을 콱 가리웠다. 장군님의 신변을 두고 이렇듯 화를 내는 최현의 앞에서 얼굴을 들수 없으시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정성이…》
《정숙동물 탓하는게 아니요.》
최현은 웬일인지 까닭모르게 성을 냈다.
《거 김책이랑 안길이랑 머리큰 량반들이 두눈을 편히 뜨구 뭘하는지 한심하거던.》
《김책동지랑 모두 늘 관심을 돌려주십니다.》
《두둔하지 마오. 난 그 사람 하는짓을 잘 모르겠소.》
최현은 그냥 심술궂게 투덜거렸다.
《장군님의 신색을 보면 척척 알아서 제 할바들을 해야지 그렇게 등신처럼 멍청히 앉아있어서야 되겠소. 하다못해 사냥질이라든가 얼음구멍을 까구 물고기 같은거라도 건져서 몸보신을 해드릴 궁리를 왜 못하느냐 말이요. 그 주제에 날 보기만 하면 미운 며느리 가로 보는 시어미눈을 해가지구 독을 쓰는 꼴이란…》
《아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김정숙동지께서는 놀라서 고개를 쳐드시였다. 최현의 입에서 이처럼 김책을 비난하는 말이 험하게 터져나올줄은 꿈에도 짐작 못하시였다. 이것은 대단히 재미없는 일이였다.
《아무렴 김책동지가 설마…》
《설마일게 뭐요? 그 사람은 나만 보면 장군님을 어렵게 대하지 않는다구 타발인데… 글쎄 나두 좀 지나치기야 했지비. 헌데 어찌겠소? 줄창 떨어져있다가 어쩌다 만나뵙기만 하문 너무 좋아 나도 모르게 조심이란걸 몽땅 잊어버리게 되는걸…》
《저도 다 리해합니다.》
그제서야 김정숙동지께서는 안도의 숨을 지으시였다. 김책에 대한 최현의 비난은 뼈가 있는것이 아니였다.
《이젠 련대장동지두 늘 장군님곁에 계시게 되였으니 저도 기쁩니다.》
《그저 정숙동무가 내 마음을 알아준당이.》
최현은 가느스름한 두눈이 없어지게 웃으며 격에 맞지 않게 친절을 담은 말로 뒤를 달았다.
《내 어떡하나 그전처럼 수렵대랑 어업대랑 꾸린 다음 장군님의 몸 보신할 대책을 세우겠으니 마음을 꽉 놓구 한가지만은 나한테 솔직히 말해달라구. 티끌만큼도 숨기지 말구 말이요.》
《무슨 말씀이게요?》
《저, 다른게 아니구…》
최현은 마치 못할짓을 하는 사람처럼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우리 철호 그 사람 말이요.》
《철호동무가요?》
《응, 그게 혹시 코가 방망이만 한 로씨야군관들과 딴스랑 같이 추면서 바람을 피우지 않습데?》
순간 김정숙동지께서는 웃음을 터치시였다. 맑고도 쟁쟁한 웃음소리는 바쯔꼬예의 넓은 하늘로 즐겁게 울려퍼졌다. 뚝바우같은 최현이한테서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을 듣게 되니 한동안 울적하던 기분이 말짱 가셔지는것이였다.
《련대장동지두 참, 철호동무가 그렇게두 미덥지 못하시던가요?》
《알게 뭐요? 녀자들이란 애들을 한구들 낳아놓기 전에는 절대로 믿을수 없다던데…》
갑자기 최현은 통닭알을 입에 문 사람처럼 더 말을 못했다.
공교롭게도 이야기의 주인공인 김철호가 혁띠를 꼭 졸라맨 솜군복차림으로 걸어왔다.
《오셨군요.》
《어, 그래 왔소. 헌데…》
최현은 김철호의 군복차림새를 아래우로 훑어보더니 웃음을 깨물고 서계시는 김정숙동지한테로 고개를 돌리였다.
《확실히 수상하거던. 이전보다 더 고와보이는게…》
《호호…》
김정숙동지께서는 또 한번 허리를 까부리며 소리내여 웃으시였다. 실로 모처럼 마음껏 웃어보시는 즐거운 한순간이였다. 그리고 최현이 지금 시름을 담은 자신의 마음을 밝게 해주려고 전에없는 롱담을 하고있다는것을 고맙게 생각하시였다. 최현의 배낭을 받아내리던 김철호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김정숙동지에게 물었다.
《정숙이, 갑자기 웬 일이야?》
《별데 삐치각질을 하려드는군.》
최현이 퉁을 주고는 김정숙동지께로 눈길을 돌렸다.
《그래, 부대 재편성은 끝났겠지?》
《아직 끝내지 못하고있습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부대의 재편성문제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불미스런 일들에 대하여 간단히 설명해주시였다.
《장군님께서 돌아오시기 전에 빨리 수습이 되여야겠는데…》
《흥, 걱정을 사서 하는셈이군.》
최현은 전혀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말했다.
《내 당장 바로 잡아놓을테니 마음을 푹 놓소.》
《그랬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글쎄 마음을 놓으라니까.》
허나 일은 최현의 장담과는 정반대로 번져갔다. 그는 먼저 조선부대의 련합동이네를 찾아가 한바탕 정치선전을 해댔다. 우리 장군님의 품은 하늘처럼 넓다, 장군님께서는 절대로 당신네를 버리지 않을것이다, 그러니 조선부대에 남기를 바라는 사람은 가지 않아도 좋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환영할것이다.… 이런 식이였다.
반대로 최현은 중국부대들에 찾아가서는 매우 불손스럽게 굴었다. 당신들이 그만큼 조선사람들을 써먹었으면 됐다, 무슨 체면에 여직도 조선사람들을 붙잡아두려고 하는가, 그러니 조선사람들을 순순히 돌려보내는것이 등탈이 없을것이다.… 하는 식으로 으름장까지 놓았다. 이것은 사태를 한층 복잡하게 만들었다. 조중 두 나라 부대사이의 혈연적뉴대는 어성버성해졌다. 이로 하여 최현은 김책으로부터 되게 닥달을 당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뿐이 아니다. 요즘 국내에서도 매우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지고있다고 한다. 백두산의 통신원이 찹쌀배낭과 함께 그 불길한 소식도 가져왔다는것이다.
빨리 장군님께서 오셔야겠는데…
김정숙동지의 마음은 무거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