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6 회)
제 3 장
1
서울 서대문형무소
1945년 3월
아직은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이다.
권영벽은 마지막통방을 끝냈다. 병감에 누워있는 박달에게 보내는 통방이였다. 감방과 감방을 지나서 얼마후에야 최후의 그 통방이 박달이한테 가닿게 될것이다.
《병에 지지 말고 끝까지 견디여주기를 다시한번 부탁한다. 동지 권.》
이 당부가 다문 얼마간이라도 박달에게 힘이 돼주기를 바라마지 않는 권영벽이였다. 하긴 이미 감옥안의 비밀조직에 대한 책임을 넘겨받은 박달이고보면 이런 당부가 아니라도 이를 강물고 견디여낼것이다. 혁명가란 생명의 심지를 깡그리 연소시킬 때까지 순간도 투쟁을 멈추지 않는 법이다.
미진된 일은 없던가?
두손과 발목에까지 쇠고랑을 찬 그는 눈을 조프리고 사색을 모았다. 여직껏 매듭짓지 못한 일이란 있는것 같지 않았다. 박달에게 넘겨준 비밀조직은 믿음직하다. 조직에는 이전 조국광복회 관련자들만 망라되여있는것이 아니다. 열혈의 청년들과 함께 각양각색의 국내애국자들을 다 받아들인 조직이였다. 민족주의계렬의 나이지숙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종교인도 있었으며 지어는 김삼룡과 같은 서울《콩그룹》의 성원들까지 있었다. 그만큼 조직의 진폭이 커진셈이다.
또 한가지 경사스런 일은 감옥안의 비밀조직이 바깥과의 련계를 가지게 된것이다. 더구나 바깥의 항쟁조직을 이끄는 사람이 안형준이라는것을 알았을 때 그는 기쁜 마음을 금할수 없었다. 안형준은 스무해전부터 박달과 함께 갑산일대의 혁명을 개척해온 사람이였다.
또한 한때 김형권동지의 지도밑에 백산청년동맹의 국내조직을 책임진 경력도 있었다. 1936년 장백으로 파견된 권영벽은 박달을 통해 다섯해나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 안형준을 만나게 되였다.
지내놓고보니 안형준은 견결하면서도 풍부한 지하투쟁경험과 림기응변의 처신술도 가지고있는 사람이였다. 그래서 권영벽은 그를 서울 공작원감으로 점찍어놓고 장군님께 보고드렸다. 당시 장군님께서는 서울지역으로 파견할 정치공작원들을 물색하고계셨던것이다.
안형준은 지금 서울에서 목재회사라는 기업을 차려놓고 그 그늘밑에서 전민항쟁준비를 실속있게 갖춰나가고있었다. 그가 박달을 비롯한 옥중투사들을 위해 가능한껏 온갖 지성을 아끼지 않으리라는것은 조금도 의심할바 없었다.
권영벽은 안형준이와의 련락통로도 박달에게 넘겨주었다. 그밖에도 감옥안에서 조국해방3대로선의 정당성과 생활력을 해설선전하기 위한 대책도 면밀히 세워놓았다. 미결로 남겨둔 일은 없었다. 그가 살아서 할수 있는 일들은 전부 깨끗이 마무리를 지어놓은셈이다.
단지 하나의 아쉬움만이 가슴속에 돌덩이처럼 맺혀있었다. 자나깨나 그리워마지 않는 김일성동지를 다시 뵈옵지 못하고 최후를 마쳐야 하는것이다.
사령관동지!
권영벽의 눈가에는 어느새 물기가 어리였다. 물기어린 눈앞으로는 김일성동지의 자애로운 모습이 어려왔다. 1937년 2월 횡산밀영에서 권영벽에게 장백현당책임자의 중임을 맡겨 떠나보내시던 김일성동지의 모습이였다.
그때 김일성동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장백을 동무한테 맡기오.》
천근무게가 실린 말씀이였다. 장백일대를 틀어쥐여야 조선인민혁명군의 대부대가 압록강을 건너가 국내작전을 성과적으로 벌릴수 있다는 의미가 그 말씀속에 담겨져있었다.
《사령관동지, 신임에 꼭 보답하겠습니다.》
권영벽은 충심으로 우러나오는 맹세를 드렸다. 그리고 그 맹세대로 리제순과 함께 불철주야 뛰고 또 뛰여 장백전역을 조국광복회 조직망으로 뒤덮어놓았다. 불과 반년도 못되는 사이에 장백을 비롯한 압록강연안일대는 말그대로 우리의 세상으로 되였다. 정말 사는 보람이 있었고 혁명하는 긍지가 있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혜산사건》이라 불리우는 전대미문의 대검거선풍이 휩쓸기 시작했다. 수많은 조직들이 파괴되고 수천명의 사람들이 체포되였다. 몇몇 안되는 인간쓰레기들의 저주맞을 배신행위가 빚어낸 결과였다. 그때의 상실감을 무슨 말로 다 표현할수 있으랴. 정말 분하고 정말 가슴아팠다. 더구나 그때문에 김일성동지께 다진 맹세를 지킬수 없게 되였으니 마음속으로는 피눈물이 강물처럼 흘렀다.
하지만 여덟해가 지난 오늘 와서는 그 불행도 먼 옛말처럼 되였다. 지금은 온 나라가 조국광복회 조직망으로 뒤덮이고 조국땅 어디서나 전민항쟁의 준비에 마지막박차를 가하는 세월로 변했다. 혁명의 페허나 다름없던 장백땅에도 백산혁명위원회가 태여나 그 줄기를 혜산과 갑산일대로까지 기운차게 내뻗치고있다고 한다. 처음 이 소식에 접했을 때 감옥동지들이 얼마나 기뻐했던가. 모진 고문을 당하여 운신도 제대로 못하는 불구가 된 박달이 시시각각 덮쳐드는 죽음을 쳐물리치며 기적같이 생명을 이어나갈수 있는것도 다 그때문이였다. 이제 천출명장이신 김일성동지의 총공격명령이 내리면 온 나라가 일제의 멸망을 선고하는 불바다로 변할것이다. 또 그 불바다속에서 민족의 숙원인 조국해방도 현실로 될판이다.
사령관동지! 단 한순간만이라도 만나뵙고싶습니다.
권영벽의 눈귀로는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형장으로 나가게 될 이 시각 김일성동지에 대한 그리움이 천만갑절 더해만지는것이였다.
감방문의 자물쇠 여는 절그럭소리가 났다. 이어 감방문이 열리며 복도의 어슴푸레한 전등빛속에서 간수의 형체가 나타났다. 사형장으로 나갈 때가 된것이다.
간수는 감방문을 열어놓고도 무어라 말을 못하고 고개를 수그린채 묵묵히 서있었다.
《때가 됐단 말이지.》
권영벽은 자리에서 일어나 간수한테로 다가갔다. 말없이 간수의 손을 꽉 쥐였다놓았다. 그의 꾸준한 깨우침속에서 지금은 감방들사이의 련락을 보장해주는 간수였다. 형무소바깥과의 련계도 바로 이 간수가 맡고있었다.
간수는 고개를 수그린채 소리없이 어깨를 들먹이고있었다.
《어서 가기요.》
권영벽은 쇠고랑을 끌며 천천히 감방복도를 걸어갔다. 철저히 격페된 독감방들이여서 마지막길을 떠나는 그를 바래워주는 동지들도 없었다.
권영벽은 쇠고랑을 끄는 발자국소리로 동지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있는셈이였다.
《동무들, 잘 싸우시오.》
밖으로 나오자 음산한 새벽하늘이 그를 맞이했다. 당장 비가 내릴것 같기도 하고 어쩌면 눈이 내릴것 같기도 하였다.
사형장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그는 한데 모여 서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띄여보았다. 그와 꼭같이 황토색수의를 걸치고 가슴에 패쪽을 붙인 알머리들이였다.
그들중의 한사람이 반갑게 소리지르며 달려나왔다.
《권영벽동지!》
《아, 제순동무!》
권영벽이와 리제순은 자유를 박탈당한 두손을 마주잡았다.
《이렇게야 만나보게 되는군요.》
《정말 그렇소.》
권영벽은 어느새 자기를 둘러싼 낯익은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리동걸, 지태환, 서응진… 모두가 이 새벽 권영벽이와 더불어 최후를 마쳐야 할 사형수들이였다. 하지만 그들은 마치 즐거운 들놀이길에서 만난 사람들처럼 밝은 웃음으로 권영벽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때였다.
《다들 조용하라!》
교형리들속에서 한놈이 소리쳤다.
《이제부터 형무소장님께서 말씀이 계시겠다.》
뒤따라 검은 무리들을 헤치며 으리으리한 제복차림의 뚱뚱보가 어기적거리며 걸어나왔다. 그놈은 지어낸 위엄을 풍기며 말했다.
《오늘은 대일본제국의 륙군절이다. 우리 형무소는 제일 위험한 사형수들을 제거하는것으로 이날을 뜻깊게 맞이하자고 한다. 너희들이 바로 그 대상자들이다. 그러나 이제라도 마음을 고쳐먹는 사람에 대해서는 살려줄 용의가 있다.》
《아, 그렇소?》
리동걸이 형무소장의 말을 자르며 한발 나섰다. 사형수들중에서 몸상태가 제일 허약한 그였다.
《구미가 동하기는 한데 여보 소장나리, 그렇게 하면 우리가 너무 손해를 보지 않소?》
《손해?》
형무소장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사형을 모면할수 있는데 뭐가 손해란 말인가?》
《형무소장님은 장사리치를 전혀 모르는것 같군.》
리동걸은 흥정에 이골이 난 장사군행세를 하며 시까슬렀다.
《만약 내가 혁명가의 명예를 팔아 목숨을 건진다고 해도 그게 몇날 가겠소? 얼마 안있으면 당신네가 망할텐데 그땐 내 처지가 죽은것보다 못해질게 아니겠소? 그래서 난 목숨이나 살려주는것만으로는 당신요구에 응할수 없단 말이요.》
《말하라, 뭐가 요구되는가?》
《당신이 <대일본제국 천황페하>의 머리를 베여 쟁반에 담아들고 와서 흥정을 한다면 좀 고려해보겠소.》
《뭣이라구?…》
형무소장은 생벌레를 씹은 상통을 한채 굳어져버렸다. 너무 억이 막혀 할말을 잃어버린 꼴이다.
《이놈들을 당장 끌어내라.》
성이 독같이 난 형무소장이 펄펄 뛰며 고함을 쳤다. 누가 시켰는지 아니면 그놈자신의 고안인지 당치도 않게 교수대앞에서 전향놀음을 벌려놓다가 봉변을 당하는 꼴이란 정말 구경스러웠다.
《어서 끌어내라. 교수대에 매달린 다음에도 네놈들이 그렇게 웃는가를 봐야겠다.》
《잠간만!》
권영벽이 말했다.
《형무소장, 이 시각 당신은 매우 중대한 문제를 내놓았는데 그렇게 생나무 꺾듯 해서야 일이 제대로 되겠소?
우리끼리 좀 의논해볼테니 당신들은 잠간 피해주오.》
《으음?…》
형무소장은 의심쩍게 권영벽을 바라보았다. 그로서는 권영벽이 이런 제의를 하리라고는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을것이다. 그는 권영벽의 말을 믿을수도 없고 안 믿을수도 없어 한참동안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재이기만 했다.
권영벽은 다시금 그놈을 죄여댔다.
《정 싫으면 그만두구려.》
《좋다. 의논할 여유를 주겠다.》
형무소장이 용단을 내렸다. 그놈은 형리와 간수들에게 말했다.
《다들 잠간 물러서라.》
《고맙소.》
권영벽은 놈들이 가까이에서 물러서자 동지들한테로 돌아섰다.
《동지들, 쉽지 않게 얻어낸 시간인데 효과있게 써먹읍시다. 내 생각엔 우리모두 얼마전 리제순동지가 면회온 안해와 딸애를 만나던 이야기나 들었으면 하는데 어떻소?》
《좋습니다.》
모두들 입을 모아 찬성을 표시하였다. 사실상 리제순의 가족면회는 감옥안에 커다란 기쁨을 안겨준 화제거리로 되고있었다.
《제순동무, 오늘 속시원히 그 이야길 들려주오.》
《그 이야기 말이지요?》
리제순의 입이 벙글서 열려졌다. 녀자처럼 해말쑥한 살결에 얼굴도 도리암직한 미남이던 그한테서 옛모습을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단지 총기있게 빛나는 두눈에서 마냥 넘실거리는 미소만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더구나 안해와 딸애를 만나본 다음부터는 내내 벙글벙글 웃음을 거두지 못한다는 리제순이였다.
《그럼 말하겠습니다. 그날 면회장으로 가보니 안해가 웬 단발머리소녀애를 데리고 와있더군요.》
…안해는 리제순을 만나자 딸애를 데려왔노라 했다. 리제순이 집을 떠날 때는 갓난아기였는데 이제는 여덟살이나 됐다는것이였다.
《얘, 저분이 네 아버지다.》
안해는 딸애에게 속삭였다.
딸애는 어머니의 치마자락을 꼭 붙잡은채 눈 한번 깜짝않고 철창너머의 아버지를 쳐다보기만 했다. 눈도 코도 입매도 신통히 리제순을 닮은 딸애였다. 그 애는 점점 어머니의 치마뒤로 몸을 감추더니 나중에는 한쪽 눈만 빠끔히 내놓고있었다. 모름지기 황토색수의를 걸치고 두손에 쇠고랑을 찬데다 해골같이 무서운 얼굴에 검은 수염이 터부룩한 알머리의 이상한 사람을 두고 도무지 아버지라 믿기 어려웠을것이다.
《여보.》
리제순은 홀린듯이 딸애한테서 눈을 떼지 못하며 안해에게 물었다.
《걔가 내 딸이 옳긴 옳소?》
《아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암만 봐두 내 딸같진 않아.》
리제순은 짐짓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 애를 찬찬히 보오.》
리제순은 아연실색하여 낯색이 변하는 안해를 향해 빙긋 웃어보이며 말했다.
《애한테 낯이 익은 구석이 많은것만은 사실이요. 눈이랑 코랑 입매랑…》
《신통히도 당신을 쏙 빼물었지요. 그런데두…》
《그렇긴 한데 여보, 그 애가 이 리제순의 딸이라면 응당 용감하구 씩씩하구 또 얼굴에 환한 웃음이 넘쳐나야 할게 아니겠소. 헌데 저렇게 주눅이 든 애를 어떻게 내 딸이라 하겠소.》
《에이그, 당신은 참…》
그때야 말귀를 알아먹은 최채련은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주먹질을 해보였다.
《당신은 8년이나 감옥살이를 하면서도 사람을 깜짝깜짝 놀래우군 하던 버릇만은 종시 떼버리지 못했군요.
마음을 놓으세요. 얜 당신이 바라는것 이상으로 똑똑해요. 인젠 글도 좔좔 읽고 쓸줄도 안단 말예요.
얘, 아버지한테 네 글솜씨를 보여드려라. 이 엄마의 손바닥에다 <나는 리제순의 딸입니다.>라고 말이다. 자, 어서!…》
최채련은 자기의 손바닥을 리제순의 눈에 잘 보이게 펴들었다.
《자, 이 손바닥에 다 차도록 한자씩 크게 써보여라.》
딸애는 주밋거리며 어머니의 손바닥가까이로 다가갔다.
최채련은 딸애에게 고무를 하듯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딸애는 조그마한 오른손 두번째손가락을 곧게 펴들고 어머니의 손바닥에 새겨넣듯 한자한자 글을 써나갔다.
《엄… 마… 는…》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해졌던 리제순의 두눈이 더욱 주의깊게 딸애가 수놓은 글자를 기억속에 새겨두기 시작했다.
《백산혁명위원회 성원임. 백산혁명위원회는 김파아저씨가 이끌고있음.》
이것은 리제순이로서도 전혀 뜻밖이였다. 안해는 딸애의 손가락글을 통해 지금 장백땅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있는지를 단숨에 죄다 설명해주고있는것이다. 어머니와 딸은 이 묘한 설명방법을 궁리해내고 충분히 련습까지 해본것이 틀림없었다. 또한 그 소식을 전해주기 위해 일부러 딸애도 데려온것 같았다.
리제순의 얼굴은 해빛을 받은것처럼 환해졌다.
《얘야, 네가 정말 대단하구나. 대단해! 이제야 내 딸인줄 알겠다. 너를 만난것이 정말 기쁘다.》
《얘, <아버지>하고 불러봐라.》
최채련이 재촉하자 딸애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불렀다.
《아버지!》
《오냐! 네가 이렇게 장한줄은 미처 몰랐구나.》
《인젠 얘가 저의 농사일을 얼마나 잘 도와주는지 몰라요.》
최채련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별의별 심부름도 다 하구 어떤 땐 어른들도 미처 엄두를 못내는 일까지 척척 맡아하군 해요.》
《음, 리제순의 딸이니 응당 그래야지.》
리제순은 다시금 딸애를 대견하게 바라보고나서 안해에게 눈길을 돌렸다.
《당신의 그 농사일은 잘 되오?》
《잘되지 않구요. 김파아저씨가 주관해서 농사를 짓는데 얼마나 작황이 좋은지… 당신이 농사짓던 때 못지 않게 대풍작을 거두군 해요. 장백은 더 말할것도 없구 멀리 혜산과 갑산에서까지 우리 씨앗을 가져다 농사를 짓는데 정말 잘된다구 해요.》
리제순은 모든것을 알아차렸다.
김파동무가 큰일을 하고있구나!
김파는 리제순이도 잘 알고 권영벽이나 박달이와도 련계가 깊었던 사람이다. 지양개의 애국지주 김정보의 농척조합운전사 김파는 권영벽의 영향밑에 장백일대에서 조국광복회조직건설에 적극 참가했을뿐아니라 국내공작임무도 자주 맡아한 경력까지 가지고있었다. 혜산사건때 일시 몸을 피했던 그가 다시 돌아와 장백일대는 말할것도 없고 혜산과 갑산지역까지 포괄하고있는 백산혁명위원회를 조직하고 이끈다고 하니 실로 엎드려 절을 하고싶은 심정이였다.
《이봐요.》
최채련이 다시 말을 이었다.
《큰집에서도 우리 농사에 큰 관심을 돌려주고계셔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당신에 대한 걱정두…》
《그렇소?》
리제순은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났다. 안해가 말하는 큰집이란 사령부를 의미하고 장군님을 의미했다. 백산혁명위원회가 장군님의 령도를 받는 조직으로 움직이고있다면 그보다 더 기쁜 일이 어데 있겠는가.
고맙소 채련이, 오늘 당신은 온통 기쁜 소식만을 한가득 안고 와줘서…
《여보, 큰집에다는 내 걱정을 너무 말란다고 전해주오. 알겠소?》
그는 목멘 소리로 말했다.
《여보, 내 이제야 당신이 이전보다 별스럽게 더 고와보이는 까닭을 알겠소. 농사도 잘 짓고 애도 기특하게 키우고있으니 참…》
《그런 소리 마세요. 그저 지난날 당신을 제대로 도와드리지 못한게 한스럽기만 해요. 지금은 그 봉창을 하자고 애쓸따름이예요. 이봐요, 전 할말을 다 했으니 애와 좀더 이야길 나눠주세요.》
《알겠소, 그렇게 하지. 얘야.》
리제순은 다시금 딸애에게 정이 푹 담긴 눈길을 돌리였다.
《무슨 이야기를 할가? 그렇지, 할말이 있다. 얘야, 내가 이제 집으로 돌아가면 너한테 제일 고운 옷을 해입히고 제일 고운 색신발을 사주겠다, 학교에도 보내주고.… 그리고 이 세상의 가장 아름다운 노래와 춤도 배워주지. 네가 눈물을 모르고 늘 밝게 웃는 아이가 되게 해주겠다. 그리고 엄마랑 같이 큰집에도 가서…》
《여보, 그만해요.》
지금껏 소리없이 울음을 삼키던 최채련이 그만 두손으로 얼굴을 싸쥐며 목메여 부르짖었다. 도저히 실현할수 없는 약속을 딸애와 수없이 나누는 리제순의 말을 더 이상 듣고만 있을수 없었던 모양이다. 그도 리제순이 사형판결을 받은줄을 알고있는것이 분명했다.
《여보, 제발 애한테 다른 말을…》
《아니요. 난 기어이 애와 한 약속을 지키겠소.》
리제순이도 격한 감정을 터치였다. 그리고는 딸애한테 확신있게 말했다.
《얘야, 아버진 거짓말을 모른다. 아버진 꼭 약속을 지킬테다. 그리 알구 아버지를 기다려라.》
그는 다시한번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형수들앞에서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주고난 리제순은 조용히 말했다.
《동지들, 난 그날 딸애와 빈 약속을 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우리 장군님께서 그 약속을 지켜주실게 아니겠습니까?》
《옳소. 꼭 그러실거요. 》
모두들 입을 모아 리제순의 말에 공감을 표시하였다. 리제순의 약속을 자기의 약속으로 여기는 그들이였고 뒤에 두고가는 부모처자들의 운명을 전적으로 김일성동지께 맡기는 그들이였다.
《동지들.》
권영벽이 정색하고 말했다.
《최후를 앞둔 이 시각 우린 리제순동무를 통해 좋은 이야기를 들었소. 우리가 바라던 모든 소원이 곧 현실로 되고있음을 확인해주는 이야기여서 우리의 마음도 이처럼 가벼워지는게 아니겠소. 믿는데가 든든하길래 우린 죽음앞에서도 이렇게 웃을수 있단 말이요.》
《옳소!》
사형수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라없이 얼굴에 웃음을 담고있었다. 권영벽의 목소리가 비장하게 울렸다.
《우린 장군님전사의 존엄과 영예를 빛나게 지켜냈소. 이제는 그것을 티끌만 한 손색도 없이 깨끗이 마무리지어 조국해방의 디딤돌로 만드는 일만 남았소. 이 마지막순간을 앞에 놓고 우리모두 장군님께 전사의 인사를 올립시다.》
《올립시다.》
하나같이 호응해나섰다.
이어 사형수들은 북쪽하늘을 우러러 경건히 고개를 쳐들었다.
인사를 마치자 권영벽은 형무소장에게 소리쳤다.
《형무소장, 우리의 일은 다 끝났소.》
그들은 교수대를 향해 발걸음을 내떼였다.
처억! 처억!
무거운 발걸음소리가 새벽의 고요를 뒤흔들었다.
그날은 1945년 3월 10일이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