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55 회)
제 6 장
꿈과 리상
9
석우진은 공장 한가운데를 가로지른 철길을 따라 새로 건설된 보이라로 향하고있었다. 강수일이 뒤따르는줄 알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가슴이 저려나 참기 어려웠다. 강수일의 일을 용서할수가 없었던것이다. 그런데 저 사람은 왜 자꾸 따라오는것인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몸을 홱 돌린다. 그러자 강수일은 가까이 다가오지 못하고 어둠속에서 서성거리고있다. 여느때같으면 한달음에 달려왔을 그였다. 달려와서는 《국장동지, 어데 편치 않습니까.》하면서 그의 팔을 끼고 이끌었을것이다.
석우진이 그에게 다가갔다. 강수일은 주춤거렸다. 한걸음 뒤로 물러서기까지 했다. 고개도 들지 못한다. 몸둘바를 몰라 쩔쩔매는 강수일… 그러는 그를 바라보느라니 어쩐지 혐오감이 솟구친다.
《동무.》석우진은 입을 열었다. 《동무 왜 그래? 왜 배우려구 하지 않아? 왜 현실에서 배우지 않나 말이요, 응?》
왜 그런지 목이 갈리고 말이 잘 되지 않는다. 같은 말을 또 반복하는줄 알면서도 그는 또 입을 열었다. 백번, 천번 더 말해도 시원치 않을것만 같다.
《동무, 지도라는게 뭔지 아는가. 나도 한땐 그랬소. 아래단위에 내려오면 멋대가리없이 소리치고… 그것이 지도인줄 알았지. 지도하려면 우선 배워야 해. 공장사람들과 함께 숨쉬고 의논하고 토론하면서 배워야 한단 말이요. 그런데 동문 뭐요? 듣자니 동문 효소배양이 성공했을 때에도 그저 구경만 했다면서?…》
《저, 사실 전…》
《왜 그 동무들을 얼싸안구 축하를 못해주오? 그새 정말 수고했다고, 최첨단을 돌파했다고 기쁨을 같이 나누며 한잔씩 부어주면 뭐 못쓴다오? 그러면 그 사람들이 얼마나 고마와하겠소. 동무도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잘 알고있겠지? 그래서 그 기술을 소유한 나라들이 그 배양비밀을 목숨처럼 지키고있다는것도 말이요.》
《예, 압니다.》
기여들어가는 소리. 석우진은 울컥했다.
《그렇게 잘 알면서 힘과 용기를 북돋아주진 못할망정 오늘은 또 뭐요? 그렇듯 대단한것을 성공한 기사장동무를 또 믿지 못하구…》
그는 잠시 말을 끊었다. 숨이 차서 견디기 힘들었다. 그는 목단추를 풀며 긴 숨을 내뿜었다.
《그래 동무같은 사람을 어떻게 봐야 하겠소? 까구 부시는 일에선 소리치구 구령을 치는 사람이 필요할는지 몰라두 과학기술에선 눈을 틔워주구 용기를 북돋아주는 그런 사람이 필요한거요. 그래서 내 동무한테 자꾸 말하는거요. 대학을 나왔다구 해서 누구나 다 가르칠수 있는게 아니요. 웃단위에 올라앉았다구 해서 남들보다 더 똑똑해지는것두 아니구. 사람은 배울줄 알아야 해. 특히 정보산업시대인 오늘 우리 지도일군들은 경제관리와 경제계산을 과학적으로 할줄 알아야 해. 이것이 바로 당에서 요구하는것이란 말이요. 그런데 옛날 배운 쥐꼬리만 한 지식을 가지구 머리를 잔뜩 쳐들고 으시대면 되겠소?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열, 백을 알구 하나를 가르쳐야 한다고 가르치시지 않았는가!》
《국장동지, 알겠습니다. 꼭 명심하겠습니다.》
《가만.》 석우진은 급히 손을 내저었다. 《그만하오.》
그는 더 듣고싶지 않았다. 래일이라면 또 몰라도 오늘 당장은 그런 자책어린 말을 듣기가 거북했다. 좀더 생각해보고 말하라, 좀더 자신을 반성하고 말하라!…
부지중 강수일의 허물이자 자기자신의 못난 꼴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의 과도한 열정에 탄복하던 지난 일들이 떠올랐다. 자기의 젊은 시절의 모습과 같다고 여기면서 그가 대견스러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었다. 그의 뒤떨어진 사고방식도, 정열로 감싼 허세도 보지 못했었다. 그래서 강수일의 말만 듣지 않았던가.
그는 깊은 자책에 잠겨 말을 이었다.
《동무, 나도 잘못한게 많았소. 많은 경우 동무같은 사람의 말만 듣고 아래일군들을 평가하군 했으니까. 동무같은 사람이 자기의 좁은 시야로 평가하고 만든 문건만 보고 아래일군들을 덕대에 올려세우군 했었지. 그들의 시점에서 보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저 기사장도 그렇지. 동무말만 믿었다면 그를 처벌할번 하지 않았는가. 결국은 나도 지금껏 동무의 지도를 받아온셈이지.》
그는 몸을 돌렸다. 될수록 그와 멀리 있고싶은 마음… 하여 그는 급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일군에게 실력이 없으면 아래사람들의 노복이 된다, 이런 결론을 주십시오, 이렇게 조직사업을 해주십시오, 여기에 수표해주십시오 등등… 아래사람들이 시키는대로 하게 된다. 실력이 있으면 과학기술적으로 따져보고 이건 내가 수표할게 아니요! 또는 이건 동무가 어느 누구에게 가서 해결해오시오! 하고 주견을 세워 지시하고 집행하게 한다. 그런데 그는 어떻게 해왔던가? 지금의 강수일이야말로 지난날의 석우진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불현듯 황금태박사의 목소리가 가슴을 친다.
《아버지가 살아계셨더라면 아마 임자의 종아릴 쳤을거네. 사람값에두 못 가던 우릴 누가 이렇게 내세워주었나? 또 자네를 이렇게 키워준게 누군가? 임자는 그걸 잊구 살았어. 제가 제일인가 해서 아래 사람들에게 소리치구 하대하구 의견을 무시해버리구… 방해군이 됐어. 곡산공장이 잘되는걸 막는 바위가 됐단 말일세.》
갑자기 비칠거렸다. 콩크리트침목에 걸채인것이다. 또 정신없이 걷는다. 어느 직장건물에서 흘러나온 불빛이 좁은 철길옆에 되는대로 피여있는 갖가지 꽃들을 비쳐주고있었다. 비탈면에 하얗게 핀 냉이꽃이며 그속에 여기저기 섞여있는 작은 보라색꽃, 주단처럼 깔린 토끼풀의 흰 꽃속에 크게 눈길을 끌며 장식처럼 피여있는 민들레꽃…
운동장을 지나고 자력갱생작업반옆을 지난 그는 미분탄건물의 첫 시작인 석탄하차장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시커먼 하탄장, 한쪽에 쌓여있는 석탄무지, 멎어있는 천정기중기…
바로 여기서 그의 아버지 석회령이 한생을 마치였었다.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이 밑바닥 미분탄작업장에서 한생 곡산공장을 받들어 묵묵히, 성실하게 땀을 바쳐왔었다.
언젠가 곡산공장에 바친 그의 집안자랑을 신문에 내자고 했을 때 아들을 꾸짖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러니 조상뼈를 깎아먹겠다는거냐? 지금껏 미분탄공을 해온 이 아버지가 한게 뭐 있다구.… 난 한생 로동을 하면서 자식들에게 넘겨준게 없다. 그렇다구 이 아버지가 로동자여서 너희들에게 피해준건 또 뭐냐? 당에서는 자식들에게 대학공부를 시켜주었구 당원으로 키워주었구 또 일군으로 키워주었다. 그리구 집을 주고 훈장도 주구… 천대받던 이 미분탄공을 눈같이 하얀 자리에 높이 앉혀주신 수령님의 그 사랑, 그 은혜에 무엇으로 보답하겠느냐! 우리 집안의 육신을 다 묻어도 그 사랑을 갚지 못할텐데…》
석우진은 비틀거리며 탄수송관에 기대였다. 뻐근한 아픔이 심장부위를 압박하며 가슴을 짓눌렀다. 그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주머니에서 구급약을 꺼내 혀밑에 넣었다. 차츰 멀어지는 아픔… 그러나 아버지의 준절한 목소리는 더욱 크게 공명되여 울리고있다.
《그래서 내 부탁하는거다. 제일 힘든 일만 골라서 하라구 말이다. 이 아버지의 얼굴에 흙칠하지 말구…》
그는 다시 바삐 걷기 시작했다. 어쩐지 림성하를 만나고싶은 마음… 하지만 그를 만나선 무얼 한다는건가? 새삼스럽게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효소물엿의 성공은 이미 진심으로 축하해준것이고…
마음이 쓰렸다. 식료일용공업성의 한 국장으로서 자기가 기사장인 그를 오해하고 괴롭혔던 지난 일들이 떠오르며 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