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0 회)
제 5 장
더 높은 목표
9
그 시각 정주선은 주광혁이와 같이 바다가 도래굽이에서 최은경을 만나고있었다. 주광혁은 얼마간 사이를 두고 펑퍼짐한 너럭바위에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고있었다.
《그렇게 쉽사리 맥을 놓지 마오.》 정주선이 은경에게 하는 말이였다. 《난 정국이 어머니가 이렇게 속대가 약한 녀자인줄은 정말 몰랐구만.》
다소곳이 머리를 숙이고있던 은경이 눈길을 들었다. 그 눈에 눈물이 가득했다.
《못 견디겠습니다. 비서동지, 하루가 천년맞잡이라는게 무슨 말인지 인젠 뼈에 사무칠 지경입니다. 병이 심할 때마다 인젠 마지막이구나, 인젠 귀여운 정국이도 보지 못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럴수록 그이한테 죄스럽구…》
《죄스럽다니, 은경동무야 남편을 위해서 이렇게 모진 결심을 한게 아니요.》
목메인 흐느낌소리… 정주선은 그가 집을 떠날 때 자기를 찾아왔던 일이 생각났다.
《비서동지, 제가 보기엔 아무 일도 없는것 같지요? 하지만 전 인젠 얼마 더 견디지 못합니다.… 전 떠나가겠습니다. 그것만이 그들을 위해서 내가 할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주선이 안타까와했다.
《우리 기사장동무가 안해에게 관심을 돌리지 못했다고 나무람하지 마시오. 그는 기사장입니다. 장군님께서 주신 공장현대화과업을 완성해야 할 기사장!… 부담이 큽니다. 그런데 은경동무가 그런 생각을 하다니?》
《그래서 떠나려는겁니다. 비서동지, 남편에게 짐이 되고싶지 않아서… 그이를 아프게 하고싶지 않아서… 제발 그이한테는 말하지 말아주십시오.》
그렇게 떠난 녀인이였다. 정주선이 그의 친정집에 알아봤으나 그때 녀인은 거기에 없었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여기 바다가 료양소에 혼자 조용히 왔던것이다. 그를 찾는데만도 정주선은 많은 품을 들이지 않으면 안되였었다.
정주선이 그에게 말했다.
《은경동무, 용기를 내시오. 이곳 병원 원장선생이랑 만나봤는데 인젠 신심이 있다고 하더구만.》
최은경은 머리를 저었다.
《비서동지한테야 그렇게 말하겠지요. 하지만… 난 의사선생들이 근심해서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마 더는…》
《아니요, 아니라는데!》
정주선은 눈물을 머금고 도리질하는 그의 어깨를 붙잡고 마구 흔들어주고싶었다.
《그러지 마오. 마음을 굳게 먹고 병과의 마지막전투를 준비하시오. 이제 대수술이 있겠는데… 그걸 위해선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하오. 알겠소?》
《아닙니다, 난 안됩니다. 이렇게 찾아와주셔서 고무해주시니 정말 고맙기 그지없지만… 어찌겠습니까. 나를 내버려두고 그냥 돌아가주십시오. 전 안됩니다, 안됩니다!》
마지막 그 말은 피타는 절규처럼 바다가에 메아리쳤다. 몸부림치며 바위에 힘껏 부딪치는 세찬 파도, 물갈기가 솟구치며 무수한 물방울을 흩날리였다.
마침내 두손에 얼굴을 묻고 흐느끼던 최은경이 고개를 들고 떠듬거렸다.
《비서동지, 제발 저를 설복하지 마십시오. 대신 제가 남편을 위해서 이날이때까지 이 모든걸 숨겨왔다는걸 말해주십시오. 전 정말 남편에게 아픈 추억을 남기고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는게 더 아픈 추억이 될거요. 그렇게 맥을 놓고 우는것이…》
《무서워서 웁니다. 무서워서… 그이한테 가겠다고 발버둥치며 따라설가봐, 저의 결심이 흔들릴가봐 무서워서 웁니다.》
정주선은 끝내 눈을 감고말았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가정을 떠난 녀인, 애오라지 사랑하는 남편이 맡고있는 중대한 사업에 지장이 될가봐 집을 떠나 가정과 사랑을 떠나 지금껏 병마와 싸워온 이 녀인의 갸륵한 마음… 간혹 우리에게는 한걸음이 모자라 생활의 길에서 떨어지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홀로 먼길을 걸을 때, 힘들어 지칠 때 마중가 부축하여주면 비록 작은 힘이라도 큰 힘이 된다. 안타깝게 모대기며 괴로와할 때 사그라지는 불을 살리는 마중불처럼, 물뽐프에서 물을 끌어내는 한바가지 마중물처럼 마주달려가 부축해주고 힘과 용기를 보태주면 끝까지 생활의 길을 걸을수 있는것이다.
헌데 지금 이 녀인은 여기까지 달려온 그를 완강하게 거절하며 밀어버리고있는것이다.
정주선이 말했다.
《은경동무, 동무도 남편이 잘되기를 바라서 이런 결심을 내린게 아니겠소. 헌데 그렇게 해야만 할가?… 난 다르게 생각하오. 집과 가정은 인간의 힘을 모으는 저장소나 같소. 아니, 매일 매 시각 인간의 힘이 용솟게 하는 샘터이지…》 그는 깍지낀 두손에 지그시 힘을 주며 계속했다. 《따뜻한 정은 성공을 떠밀어주는 힘이요. 동문 지금 남편의 짐이 되지 않겠다고 달아나고있지만 그보다 그의 곁에서 병을 치료하면서 서로 힘을 보태주는것이 진정으로 그를 위하고 사랑해주는것이 아닐가?…》
《비서동지.》
그때 주광혁이 다가왔다.
《비서동지, 원장선생님이랑 오셨습니다.》
그제서야 두사람은 머리를 돌려 보았다. 원장선생과 담당의사가 뒤에 와있었다. 그들도 최은경의 마지막부르짖음소리를 들은듯 했다.
먼저 원장이 입을 열었다.
《은경동무, 고마운 비서동지에게 너무 그러지 마시오. 비서동지가 동무를 위해 귀하디귀한 곰열도 구해왔는데…》
《예?》
《그리구 여기 오기 전에 조선적십자종합병원에도 찾아가 은경동무의 병치료를 두고 진행하는 의사협의회에 여러번이나 참가했다누만. 우리도 방금전에야 그에 대해 알게 되였는데… 은경동무, 힘을 내시오, 힘을!…》
《아니, 그럼?!》
은경의 두눈에서 다시금 눈물이 번뜩이였다.
원장이 계속했다. 이번엔 정주선에게 말하였다.
《비서동지, 조선적십자종합병원에서 방금 전화련락이 왔습니다. 이제 곧 유능한 의사를 보내주겠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까?》
《예, 그 의사가 와서 현지에서 치료를 계속하든가 아니면 평양으로 후송해서 수술하든가를 결정하자고 합니다.》
정주선은 반가왔다. 졸아들던 가슴이 활 열리는듯싶었다. 그는 은경이를 잡아일으켰다.
《은경동무, 들었지? 동문 혼자가 아니요. 혼자서 싸우는게 아니란 말이요.》
《비서동지!》
드디여 최은경이 소리내여 울기 시작했다. 억눌리였던 희망이 되살아났다. 아니, 찾아왔다. 사라져가던 행복이 그를 소리쳐부르고있는것이다.
정주선이 계속했다.
《은경동무, 힘들 때마다 남편이랑 정국이랑 그리구 우리가 다 함께 있다는것을 잊지 마오. 혼자 가면 힘들구 무섭지만 함께 먼길을 가면 절대 힘들지 않소.》
은경은 눈물에 젖은 얼굴을 들었다. 마중해오는 사람, 가장 힘들 때 마중해와 부축해주고 힘과 용기를 주며 끝까지 이끌어주는 당일군…
《고맙습니다, 비서동지!…》
언제부터인지 보슬비가 내리고있었다. 바다가의 찬기운을 밀어내며 후덥게 내리는 보슬비… 모래불에 숨어들었던 작은 게들과 조가비들이 도처에서
기여나왔다. 여느때없이 활기를 띤 그것들은 모래불에 한줄기 뚜렷한 금을 그으며 바다를 향해 열심히, 맹렬하게 움직여가고있다. 자기들이 태여난
생의 보금자리이며 생명이 끓고있는 넓은 바다, 바로 저 바다로 가고있는것이다.…
×
비가 멎은지 오랬다. 밤 10시가 넘은지도 오랬다. 별빛 하나 없는 흐린 밤하늘…
돌연 운전사가 소리쳤다.
《아, 비서동지가 옵니다.》
지운섭이 벌떡 일어났다.
《어디?》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운전사들의 눈은 보통사람들보다 몇배 더 밝은것 같다. 운전사가 대답대신 어둠속으로 마주 달려갔다.
《비서동지, 이제 오십니까?》
정주선당비서가 숨이 차 헐썩이며 걸어왔다. 주광혁이 뒤따랐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당비서의 얼굴은 심각했다. 북대강공작기계공장에서는 그리도 기분이 좋아하던 그였건만…
지운섭이 조심히 물었다.
《비서동지, 갔던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정주선은 한숨을 길게 내쉬였다.
《잘됐소.》
《그런데 왜 안색이…》
정주선은 손을 내저으며 차에 올랐다.
《더 묻지 마오. 인젠 가기요.》
지운섭은 입을 다물었다.
승용차는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밝은 전조등빛이 비에 젖은 산골길을 누비였다.
정주선은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그리도 담차고 여무지던 옛 돌격대녀성중대장, 그리도 강하고 억세던 녀성… 그가 어려운 마지막치료를 이겨낼수 있겠는지?… 이겨낼것이다. 그는 모든것을 각오한 녀성이 아닌가. 하지만 만일…
《불 좀 켜오.》
실내등이 켜졌다.
지금껏 뒤에서 입을 다물고있던 지운섭이 앞으로 목을 쑥 빼들었다. 정주선이 무슨 서류 같은것을 펴들었던것이다.
《비서동지, 그건 뭡니까?》
정주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속이 좋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고싶지 않다. 실내등빛에 비쳐진 종이장의 라틴어글줄들을 정신없이 들여다보며 푸릿한 턱만 문지르고있었다. 구레나룻으로 유명한 그여서 매일 두번씩 면도를 해야만 했다. 그런데 오늘은 저녁면도를 할새가 없었다.
이에 대해 너무도 잘 아는 사람들중엔 지운섭이도 있다. 그는 두눈을 껌벅거리며 계속 정주선이 들고있는 종이장을 넘보고있었다. 거기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며 그는 재빨리 생각을 굴리였다. 이건 정말 모를 일이다. 아무래도 무슨 일인가 생긴것 같다. 그렇지 않다면야 그 어떤 경우에도 침착성을 잃지 않는 우리 당비서동지가 저렇게 심각해질수가 있겠는가. 가만, 저건 무슨 병력서같은데…
갑자기 당비서가 들고있는 병력서를 넘겨다보던 지운섭이 부르짖었다.
《아니, 거기 써있는게 뭡니까. 그거야 죽는다는 소리가 아닙니까?》
이때였다. 주광혁이 다급히 웨쳤다.
《차를 세우시오!》
갑자기 경사진 굽인돌이를 돌던 승용차가 진창에 미끄러지며 아래로 지쳐내렸던것이다. 안깐힘을 쓰며 조향륜을 비트는 운전사… 가까스로 멎어선 승용차가 용을 쓰며 언덕받이로 치달았다. 하지만 차바퀴는 흙탕을 휘뿌리며 제자리에서만 헛돌았다. 또다시 아래로 미끄러지는 승용차…
《위험하다!》
순간 굳어진 눈길들이 차창밖으로 쏠렸다. 급하게 경사진 산비탈과 도처에 뿌리박고있는 큰 바위들 그리고 아름드리나무들…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아래로 승용차가 굴러내리면 단번에 박살나게 되는것이다.
정주선이 차문손잡이를 잡으며 소리쳤다.
《자, 모두 내려서 밀기요!》
허나 때는 이미 늦었다. 비명소리가 터졌다. 승용차가 어쩔새없이 옆으로 기울며 길섶에 있는 홈타기에 구겨박혔다. 모든 사람이 일시에 창턱이나 어느 모서리에 부딪치며 아우성쳤다. 모재비로 딩굴며 터져나온 신음소리, 허우적거리는 팔들…
제일먼저 기여나온것은 주광혁이였다. 쭈그러든 승용차문을 가까스로 밀고 나왔는데 잠바옷 어깨가 찢겨져있었다. 거기에는 상관없이 그는 차안에 머리를 디밀고 당비서를 소리쳐불렀다.
《비서동지, 일없습니까?》
정주선이 한쪽문을 밀고 나오자 주광혁은 구석에 머리를 틀어박고있는 지운섭이를 끌어내였다. 다행히 운전사는 저절로 기여나왔다.
《어떻소? 다친덴 없소?》
정주선이 소리쳐묻자 지운섭이 먼저 비틀거리며 말했다.
《비서동지, 다행입니다. 이렇게 다 살아있으니…》
《에이.》 정주선이 혼자소리처럼 중얼거렸다.《하마트면 생일날 초상날번 했군.》
《예?!》
사람들이 깜짝 놀라며 서로 마주보았다. 그러니 오늘이 우리 당비서동지의 생일이였단 말인가?…
그들이 입을 항 벌리고있는것을 보자 정주선은 손을 홱 내젓고말았다.
《자, 빨리 차나 끌어내기요.》
참으로 기막힌 날, 비상한 날이였다. 운전사가 먼저 당비서와 같이 홈타기에 빠진 차바퀴를 들여다보았다. 주광혁이와 지운섭이도 허리를 잔뜩 굽히고 머리를 디밀었다.
《자, 이젠 어떻게 한다?》
정주선이 묻자 운전사가 풀이 죽어 대답했다.
《지금은 안됩니다. 다른 차가 와서 끌어내기 전엔…》
지운섭이 속이 뒤틀려 중얼거렸다.
《이거 참, 모든게 다 기사장동지의 아주머니때문이지. 하필 제일 복잡할 때 집을 나와가지구.》
정주선이 나무랐다.
《됐소, 그만하오.》
하여 그들은 한마디 말도 없이 추운 언덕길에 서있었다. 오늘따라 오가는 차도 눈에 띄지 않았다. 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흘렀다. 갑자기 지운섭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질렀다.
《비서동지, 옵니다.》
다들 자리에서 뛰쳐일어났다. 지운섭이 또 소리쳤다.
《보십시오, 저기 마중불이 옵니다!》
다들 그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손톱눈처럼 작은 불빛이 아찔한 저 계곡밑에서 마주오고있었다. 다정한 불빛, 더없이 반가운 구원의 불빛…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