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9 회)
제 5 장
더 높은 목표
8
이름모를 고개밑 숲가에 멎어선 차에서 지운섭은 정주선당비서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있었다. 벌써 땅거미가 지기 시작했다. 바람이 차졌다. 어디선가 승냥이울음소리도 들리는것 같다. 부엉이소리인가, 바람소리인가?… 그런데도 당비서는 돌아오지 않는다. 무엇인가 당장 뛰쳐나올듯 한 컴컴한 수림쪽을 흘끔거리던 지운섭이 두덜거렸다.
《이거 배고파서 살겠소? 기계공장에서 동태국과 입맞춘것도 인젠 다 꺼졌는데…》그리고는 운전사에게 물었다. 《동문 알고있지?》
차상태를 검열하던 운전사가 고개도 들지 않고 대꾸했다.
《뭘 말입니까?》
《당비서동지가 어디 갔는지 말이요? 한배낭 잔뜩 지구… 혹시 누구한테 뢰물을 가져가는게 아닌가?》
운전사가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소?》
《하여튼 운섭동진 사람웃기는덴 유명합니다.》
지운섭이 그에게 바싹 다가섰다.
《그러니 동무도 알고있구만. 말해보오, 왜 비서동지가 이 지운섭이만 쏙 빼놓구 갔는지?》
《나도 모릅니다. 알 필요도 없구요.》 그가 씩 웃는것이 알렸다. 《그런건 알려구 하지 않는게 좋습니다.》
지운섭이 덩둘한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알려구 하지 말라? 동무, 지금 날 뭘로 알고있소?》
운전사는 대답대신 씩 웃기만 했다. 원래 입이 무겁고 말이 없는 사람이였다.
《웃지 말라구!》
지운섭이 소리치자 운전사는 더 크게 웃어대였다. 말수더구가 적은 그로서는 이렇게 웃는것이 아주 드문 일이였다.
《운전사동무.》 하는수없이 지운섭은 빌붙다싶이 했다. 《그게 정말 그렇게 비밀인가? 응?!》
운전사가 내키지 않는듯 시창을 문대며 입을 열었다.
《에, 할수 없구만요. 비서동진 지금 기사장동지의 아주머니한테 갔습니다.》
《뭐, 기사장동지의 안해한테?!》
운전사가 고개를 흔들었다.
《그 이상은 말할수 없습니다.》
지운섭은 밸이 나는것을 가까스로 참고있었다. 그도 기사장의 안해가 집을 나갔다는것을 소문으로 알고있었다. 기사장의 안해 최은경을 잘 알고있는 그는 머리를 기웃거렸다. 도대체 무엇때문에 그런 일이 벌어졌단 말인가? 남편과 어린애를 두고 집을 나가다니… 이에 대하여 정주선당비서는 아무 말도 없었다. 웬일인지 입을 꾹 다물고 생각깊은 눈길로 사람들을 바라볼뿐이였다. 헌데 오늘 불쑥 기사장의 안해를 찾아갔다는것이다. 그런데 당비서동진 왜 주광혁은 데리고가면서 이 지운섭이만 빼놓는가? 내가 그리도 미덥지 못한 사람이란 말인가?
그는 다시금 머리를 기웃거렸다.
《그런데 말이야. 운전사동무, 일이 그렇다구 해서 공장현대화라는 큰 사업을 맡고있는 당비서동지가 집을 나간 녀자한테까지 찾아가야 하는가?》
이번에도 운전사는 입을 꾹 다물고있었다. 아무말없이 고무배낭을 집어들었다. 개울에 가서 물을 길어오려고 생각한듯 했다. 그러나 몇걸음 옮기던 운전사가 고무배낭을 쳐들어보며 중얼거렸다.
《가만, 이놈의 물주머닌 마개가 없지. 젠장, 잘못하다간 물이 말짱 새나가겠군.》
그는 돌따서더니 차에로 되돌아왔다. 차의 짐칸을 열고 구석에서 자그마한 무우를 꺼내더니 그것을 주머니에 쓸어넣었다.
《아니, 그거 무우가 아니요?》
지운섭이 반갑게 소리쳤다.
《예, 아까 공장에서 하나 얻어두었댔습니다. 마개대신 아구리를 틀어막자구요.》
《아구리를?》
지운섭이 앞으로 쑥 나섰다. 무엇인가 번개치듯 머리에 떠오른 생각이 있었던것이다.
《가만, 물은 내가 길어오지.》
운전사는 덮치듯 고무배낭과 무우를 집어들고 아래로 내려가는 그를 바라보며 그가 무엇때문에 갑자기 열성을 부리는지 의아해했다. 그러나 곧 하던 일을 계속했다.
한편 지운섭은 개울로 내려가며 요즘 남달리 침울해보이는 림성하기사장을 상기하였다. 대학동창이라지만 근래에 와선 사이가 떠져서인지 그와 별로 이야기도 나누지 않는다. 한때 공장을 뜬다고 했을 때부터 속으로는 여전히 멸시하는 감정을 품고있는것이 아닌지?… 녀자같이 하얀 얼굴에 새침데기처럼 보이는 림성하였지만 남달리 탐구심이 강하고 학구적인것으로 유명할뿐아니라 일단 고집을 쓰면 질기기도 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안해의 일로 마음고생을 하다니?…
그런데… 그는 또 생각했다. 송해연 그 처녀는 왜 기사장에 대하여 그리도 불만이 많은지, 그 누구보다 기사장을 적극 도와주면서도 매번 마주서면 의견을 내고 불만을 터놓고… 물론 가까운 사람들이 서로 다투군 한다고 한다. 옳은 말이다. 그러나 그들 두사람이 다투는것은 다른 문제이다.
지운섭이도 기사장이 남달리 송해연을 도와준다는 뒤소리를 들어서 알고있다. 하지만 그에 대하여 다르게 생각지 않는다. 그것은 서로 믿고 의지하는 과학자, 기술자들에게만 있는 고유한 인간적관계이다. 서로 론쟁하고 다투고 서로 돕는 그들…
하기에 지운섭이 보는 해연은 입바른 녀자들이 종알거리는 그런 속된 처녀가 아니였다. 자존심도 높고 자기를 지킬줄 아는 처녀, 미인이라고는 할수 없어도 남다른 매력을 가지고있는 처녀이다. 언제나 지혜와 생신함이 샘물처럼 솟아나는 처녀, 그런 처녀에 대해 뒤소리를 하는것은 옳지 않다.
그는 운전사가 눈이 빠지게 기다려서야 물주머니를 안고 올라왔다.
《여 운전사동무, 이걸 빨리 받아달라구…》
운전사가 하던 일을 내던지고 급히 그에게 달려왔다. 물주머니를 받아내리던 그가 놀란 소리를 쳤다.
《아니? 이거 옷이 다 젖었구만요.》
지운섭은 길옆에 비쭉 솟아있는 돌우에 걸터앉으며 젖은 옷을 손으로 비틀어짰다. 이어 자신에게 화를 내듯 얼굴을 찡그리며 말했다.
《아, 글쎄 배가 너무 고프드라니 물아구리를 막았던 이 무우를 조금 갉아먹었지. 그랬더니 이렇게 훌렁해지질 않겠나. 조금만 먹는다는게 그만…》
운전사는 그가 하는 말에 너무 어이가 없어 힝! 하고 코소리를 내였다. 그리고는 절반밖에 안 찬 물주머니를 기울여 한방울이라도 흘릴세라 정성들여 방열기에 물을 부어넣었다.
언제부터인지 찌뿌둥하던 하늘에서 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당비서와 주광혁은 날이 완전히 어두울 때까지도 나타나지 않았다. 떠날 때부터 은근히 걱정하더니 일이 잘 안되는것이 분명했다.
지운섭이 몸을 옹송그리며 또 불평을 늘어놓았다.
《이거야 어디 참고견딜수가 있나. 춥지, 배고프지… 여, 운전사동무, 뭘 좀 건사해둔게 없소?》
《…》
《왜 말이 없소? 먹을게 좀 없나 말이요.》
《없어요, 미안하지만.》
볼부은 소리, 지운섭은 입을 다물수밖에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