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37 회)
제 5 장
더 높은 목표
6
정국이를 당비서의 어머니에게 맡긴 송해연은 맥없이 분석실에 들어섰다. 효소활성을 분석한 자료를 찾으러 온것이였다. 헌데 실험실은 비여있었다. 어디 갔을가?… 호- 한숨을 내쉬는데 복도창문에서 수첩을 들여다보고있던 어린 처녀가 해연에게 방싯 웃었다. 당과류직장의 단발머리처녀 정춘심이였다.
《실장동진 기사장동지에게 갔어요. 가공과 물엿직장의 분석결과를 가지고…》
분석은 생산공정을 들여다보는 눈이다. 원료로부터 생산제품에 이르기까지 분석실을 거치지 않는것은 하나도 없다. 석탄은 물론 강냉이의 수분과 단백 그리고 공업용수를 비롯하여 사탕, 과자 등 모든것을 분석한다. 수자로 된 그 분석결과는 매일 지배인과 기사장에게 보고된다. 결국 그 수자들은 기사장에게 눈을 달아주는것과도 같다. 기사장은 그 분석표를 보고 하루 공장의 생산실태를 손금보듯 알게 되는것이다.
해연은 춘심이의 손에 들려있는 수첩을 여겨보며 미소를 지었다. 아마 통신대학시험준비를 하느라고 수학공식이나 화학공식을 암송하고있을것이다. 해연은 그가 공장에 나와있는 한정민연구사에게서 배우며 시험준비를 하고있다는것을 이미 알고있었다.
해연은 그를 방해하고싶지 않아 분석실복도에 놓인 장의자에 조용히 다가가앉았다. 왜서인지 서글퍼졌다. 그를 모욕하던 최두만이며 기사장의 아들을 끼고돈다고 뒤에서 말하던 녀인들의 험담… 아무리 성격이 도고한 해연이라 할지라도 그도 역시 녀자인것이다. 이런데 혼자 있으니 저절로 눈물이 고였다. 분하고 노엽고 가슴이 아파서 저도 모르게 솟구치는 눈물… 고깝고 괴로와서 흘리는 눈물이였다.
그때 누군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깜짝 놀라 머리를 들고보니 분석실장인 한순정이였다. 제 생각에만 잠겨있던 해연은 공식을 외우고있던 단발머리처녀가 언제 돌아갔는지도 알지 못하고있었다.
한순정이 그에게 물었다.
《웬일이예요?》
목소리도 부드러웠다.
해연은 급히 손등으로 눈굽을 씻었다.
《아니, 저… 혼자서 생각을 하댔어요.》
《그런데 눈물은 왜? 무슨 일이 있은가부지?》
《아니예요,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저…》
녀인은 해연의 옆자리에 앉았다.
《처녀의 눈물은 값진건데… 그건 그저 아무런 사연도 없이 나오지 않아. 그렇지?》
해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지금 한순정은 아마 그 어떤 사랑의 눈물을 암시하고있는것 같다. 그랬으면, 그런 눈물이였으면 얼마나 좋을가? 어언 로처녀소리를 듣고있는 이 송해연이 사랑때문에 눈물을 흘리고있는것이라면?!…
갑자기 그는 머리를 돌려 한순정의 두눈을 들여다보았다.
《참, 한가지 물어도 좋아요?》
《뭔데?》
《국장동지 말이예요. 엄격하구 무뚝뚝하기두 하구… 그런분이 무섭지 않아요?》
《무섭긴…》
《하긴 그렇게 엄한분들이 더 살틀하다는 말도 있던데… 그러니 실장동진 행복한가보지요?》
한순정은 잠시 생각하고나서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난 그이를 존경해.》
《존경? 어마나… 사랑하면 다지 존경은 또 뭐예요?》
《사랑에는 애정만 있는것이 아니지. 존경도 있다는걸 해연이도 잘 알텐데… 난 그이의 꿈과 리상을 사랑하고 존경해.》
소리없이 웃는 녀인, 그 웃음이 미묘했다. 해연은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왜 웃을가, 저 웃음은 무엇을 의미할가?
《그인》 한순정이 깊은 생각에 잠겨 조용히 말하였다. 《불같은 사람이야. 불같이 살다가 불같이 갈 사람이라구 할가. 그런 사람과 일생을 함께 하는건 행복이 아니면 불행, 둘중의 하나지. 그 뜨거운 불을 그대로 마음속에 받아들이면 진정이 용해되여 행복이 되고 그 불을 무서워하면 불에 타서 불행의 재만 남게 되지.》
꿈을 꾸는듯 한 목소리, 해연은 그 목소리를 한껏 들여마시였다. 그리고 살며시 눈을 감았다. 그렇다, 진정한 사랑은 미칠듯 열중하다가도 싫증나면 그만두는 애정의 유희가 아니다. 깡그리 바칠수 없다면, 깡그리 받을수 없다면 애초에 사랑하기를 그만두라!
사랑도 건설이다. 사랑의 궁전을 지으려면 어느 한 기둥도 기울어져선 안된다. 그런데 나는?…
사실 해연이가 어릴 때부터 오빠라고 부르며 따르던 기사장 림성하, 그를 굳건히 받치고있는것은 그의 안해 최은경이다. 그래서 해연은 최은경을 언니처럼 따르는것이다. 나도 그런 기둥이 될수 있을가?… 될수 있을것이다.
하지만 처녀가 바라는것은 자기에게 억센 기둥이 되여줄 사람, 속대가 바르고 결단성있는 그런 사람이였다. 하다면 이 송해연을 받쳐줄 믿음직한 기둥은 어디에 있을가?…
지금까지 많은 총각들이 그에게 관심을 두고 접근해왔었다. 하지만 해연의 맵짠 성격과 자존심의 담장을 끝까지 넘지 못하고 담너머에서 걸음을 멈추군 했었다.
불현듯 눈앞에 떠오르는 주광혁의 모습. 제대군관이며 직사포와 같은 성격을 지닌 사람… 하지만 할아버지에게 불손했고 이 해연이를 무시하는 사람… 한순간 그가 눈앞에 떠오른것은 무엇때문일가? 왜 그런 사람을 생각한단 말인가?…
또다시 그 어떤 뾰족한것이 처녀의 자존심을 찔렀다.
한순정이 그의 어깨를 쓸어주었다.
《자, 인젠 인상을 밝게 해. 해연이한텐 눈물이 전혀 어울리지 않아.》자리에서 일어나며 한순정은 다시 조용히 웃었다. 《난 요즘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어. 효소분석결과가 더 좋아지고있거던. 할아버지가 말씀하시던데 이제는 본배양에 들어갈수 있는 전망이 확고하다구해.》
《그래요?》
《그럼, 어서 분석표를 찾아야지.》
그들은 밝게 웃으며 함께 분석실로 들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