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1 회)

제 4 장

아침노을

 

10

 

서해기슭… 바다가 도래굽이 저 멀리로 한줄기 작은 발자국이 길게 찍혀져갔다. 모진 고통과 피로에 짓눌린 한 녀인 최은경이 모래불을 걷고있었다. 조용히, 힘들게 걸었다. 몇걸음을 걷고는 또 한동안 숨을 돌려야 했다.

저녁무렵이였다. 저 멀리 넘실거리는 파도우로 한척의 발동선이 지나가고있었다. 그뒤를 따라 무수히 일어나는 잔 파도, 그러나 잠시후엔 다시금 소리없이 잦아드는 물이랑…

은경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마음속에 밀려드는 아픔의 파도… 그 아픔의 파도가 저 잔물결처럼 조용히 잦아들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야 할가?…

썰물때여서 기슭을 씻던 물결이 눈에 띄게 낮아지고 멀어져갔다. 도처에서 게와 조개들이 모래속에 숨거나 감탕바닥에 열심히 금을 그으며 물결을 따라 움직여갔다.

은경은 천천히 걸으며 파도에 밀려나온 하얀 조가비들을 줏기 시작했다. 하나, 둘… 작고 고운 조가비들이 손바닥에 무드기 쌓였다. 한동안 조가비를 고르던 그는 그만 손을 멈추고말았다. 무엇때문에 이런걸 줏는단 말인가? 누구에게 줄 사람도 없고 보내줄데도 없는데…

또다시 아들애와 남편의 모습이 떠오른다. 젖가슴을 파고들던 아들애의 고사리같은 손, 기술서적만 파고들던 남편… 지금 그인 무엇을 하고있을가?… 입만 벌리면 신비한 화학의 세계에 대하여 이야기하던 남편 림성하, 은경에게는 그것이 좋았다. 남편의 지식이 부러웠고 존경이 갔었다. 끝없이 솟구쳐오르는 샘물처럼 그냥 퍼내고 또 퍼내도 마를줄 모르는 지식의 깊은 우물!… 그 탐구의 세계, 지식의 세계에 늘 감탄해온 그였다.

그래서인지 남편이 기사장으로 임명되였을 때에도 별로 기쁜것을 몰랐다. 오히려 연구사업에서 성과를 거두어 더 많은 실리를 가져오는것이 낫지 않을가 하고 생각했었다. 그만큼 자기 남편이 연구사업에 전념하며 집안일에 조금도 신경쓰지 않게 하려고 애썼다. 어떤 집에서는 남편이 집안일에 신경쓰지 않는다고 다툰다지만 응당 녀자가 해야 할 일을 두고 바가지를 긁는것을 그는 질색하였다. 은경은 모든것을 제 손으로, 제 힘으로 하려고 했다.

그래서 더 힘들었다. 남자손이 없이 집살림을 해야 했고 어린것을 돌봐야 했으며 인민반사업도 해야 했다. 도로정리, 나무심기, 창고건설, 농촌동원… 녀맹원들앞에서 마대를 메고 앞장에서 달려야 했고 그들을 이끌고 곡산공장현대화에도 가끔 나가군 했었다.

그때마다 입심 센 녀인들이 《이봐요, 기사장! 곡산공장에 일나왔는데 사탕 좀 먹자구요.》하고 성화를 먹이군 했다.

《내가 뭐 기사장인가요? 이담 공장이 돌아가면 우리 아이들에게 다 사탕을 듬뿍 안겨줄거예요.》

《에그, 기사장보다 정국이 엄마가 이 공장엔 더 어울려. 손탁이 세지, 전개력두 있지. 안 그래요?》

《하긴 저 집은 춘향, 도령이 바뀌였다니까.》

지꿎은 롱담도 나무라지 않았다. 그저 소리없이 웃기만 했었다. 사실이 그랬던것이다. 그지없이 남편을 사랑해온 그, 남편을 위한 일이라면 힘든줄 몰랐던 최은경… 하지만 남편을 두고 때로 저혼자 웃군 하던 그였다. 웃지 않을수 없었다. 기념일에 공장에서 축구경기를 하고 찍은 사진을 가져왔었는데 젊은이들은 물론이고 나이든 사람, 머리가 하얀 사람도 짧은 운동복을 입고 사진을 찍는데 자기 남편만은 양복을 쭉 빼입고 맨구석에 얌전히 앉아있는 모습이였던것이다. 그래서 집안을 청소하다가 책상서랍에 깊숙이 건사해둔 탁구채를 보고도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었다.

《중학교때부터 탁구를 잘 쳤다구?… 아니, 믿을수 없어. 화학밖에 모르는 사람인데 탁구라니, 내 눈으로 보지 못했으니 믿을수 없지.》

그런 남편이 언젠가 출장길에서 지나가는 자동차를 잡아탔다고 하기에 또 소리내여 웃지 않았던가. 지식은 높지만 꼭 아이처럼 돌봐주어야 하는 남편이였다.

그런 사람이여서 은경이 약봉투를 내밀 때마다 남편은 놀라군 했다.

《이건 왜?》

《당신 지금 위상태가 정상 아니예요.》

《그걸 어떻게 아오?》

《나야 당신 전문가이니까요.》

하지만 밥상에서 남편의 눈치를 볼 때도 있었다. 돌을 씹고 골살을 찌프리는 남편을 볼 때의 송구스럽던 마음… 참, 이상하게도 밥그릇의 돌은 남편에게만 가군 한다. 가마속에서 제일 우에 있는 밥을 퍼보기도 하고 중간부분을 푸기도 하건만 어찌된 일인지 돌은 꼭 남편의 입에서만 씹히군 한다. 하여 녀인들이 궁리해낸 말이 《이보세요. 밥그릇의 돌은 제일 귀한 사람에게 간다지 않아요.》라는 변명이다.

평범한 그 생활이 오늘은 왜 그토록 눈물겹도록 그리운것인지… 다시 남편의 눈치를 보고 지청구도 듣고싶다. 평범한 그 일들이 지금은 그토록 그립고 가슴 어이도록 간절하다.

하지만 남편은 이러한 그를 알려고 하지 않았다. 그대신 밤낮 책만 들여다보았다. 화학공식만 중얼거렸다. 가끔 기회가 생기면 어린 자식을 어깨우에 올려놓고 무릎걸음으로 방안을 돌며 웃고떠들었지만 거기에 은경이는 없었다. 사랑과 행복의 자리에 은경이는 끼우지 못했다. 남편의 마음속에 자리잡고있는 은경이는 변함없이 가정에 헌신하는 녀자였을뿐 사랑과 행복을 누리는 녀자는 아니였다. 왜 그랬을가? 그이는 왜 그리도 안해인 나에게 무심했을가?… 사실 은경은 남보다 더 많은것을 바라지 않았다. 남보다 더 많은것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그저 진실한 정을 그리워했을뿐 소리치고 소문을 내며 사랑을 표시하거나 남들이 보란듯이 아껴주기를 바란것도 아니였다. 그럴 은경이 아니였다. 그저 따뜻한 말 한마디, 정이 담긴 눈빛, 그런것만을 바랐었다. 그저 말없이 진심으로 안해를 사랑하고 위해주기를… 그것이 오늘까지 그가 안해로서 바란것의 전부였었다.

은경은 다시 모래불에 발자국을 찍기 시작했다. 천천히, 더 천천히… 석양이 불그레한 빛으로 하늘서켠을 물들인다. 바람이 분다. 날씨는 아직도 차다.

은경은 자기가 지나온 도래굽이를 돌아보았다. 이제라도 불쑥 그가 나타나지 않을가?… 아니, 그런 일은 있을수 없어. 있어서도 안되고…

멀리서 바위벽을 씻으며 밀려가는 파도소리가 들려온다. 파도소리도 어언 힘이 진해가는듯… 다시 걸음을 옮긴다. 무거운 발걸음…

별안간 우뚝 멎어섰다. 가만, 저기 오는 저 사람! 그이가 아닌가?!… 분명 남편의 모습이다. 정국이 아버지이다! 저도 모르게 걸음이 빨라진다. 대바람에 숨이 차오르고 허리둘레로 모진 아픔이 밀려왔지만 멎어서지 않는다. 그이가 오고있다. 나를 찾아 오고있다, 다시는 헤여지지 말자고!…

아니?!… 다시 걸음을 멈추었다. 무엇에 걸채인듯 몸이 휘청거린다. 아니였다. 최은경이 기다리는 그 사람이 아니였다. 남편 림성하와는 판 다른, 조금도 비슷하지 않은 그의 담당의사선생이였다.

《왜 혼자 또 나왔습니까?》 의사선생이 급히 마주오며 소리친다.

《그렇게 무리하면 안됩니다.》

《미안해요. 한번 나오고싶어서…》

《치료도 마음가짐이 중요하다고 얼마나 말했습니까. 맥을 놓으면 병에 견디지 못합니다.》

《잘못했어요.》

《다신 그러지 마십시오. 집에서 손꼽아기다릴 사람들을 생각해서라도…》

기다린다구요? 또다시 가슴을 저미는 아픔… 아니, 난 돌아갈수 없어요. 돌아가선 안됩니다!… 솟구치는 눈물을 참을수 없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시 만날수 없다는것은 정말 무서운 일이다. 가슴을 얼어들게 하는 공포와 불안, 모진 아픔… 한순간 은경은 가슴속에서 울리는 석별의 선률에 귀를 기울이며 무엇인가를 원망했다. 다시는 돌아갈수 없다는 절망에 눈물을 쏟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갑자기 은경은 소스라쳤다. 지난해 12월 어버이장군님께서 공장을 현지지도하시였을 때 친정집과 마을사람들이 정국이의 아버지가 장군님을 모셨다고 이구동성으로 축하하던 일이 눈앞에 떠올랐다. 그렇다. 이래서는 안된다. 석별의 선률이라니?… 마음여린 남편 림성하 그의 곁에는 내가, 이 최은경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과연 내가 다시 몸을 추세우고 일어설수 있을가? 기적이 일어나리라고 과연 믿을수 있을가?…

석양이 스러져갔다. 바다가에 밀려드는 어둠. 파도소리는 점점 더 높아가고있었다.

되돌이

우리민족끼리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E-mail) : urimanager@silibank.com 홈페지내용에 관한 문의(E-mail) : uriminzok@silibank.com
Copyright © 2003 - 2013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
gotop
기사종합
 
도서, 잡지
 
영화, 음악
 
독자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