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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불멸의 력사》 3 장편소설
천 세 봉
( 제 18 회 )
3
이튿날새벽 차광수는 좀 가라앉은 심정으로 로동복을 갈아입고 털모자를 쓰고 김성주동지께서 하숙하시던 집으로 갔다. 사실 수연이는 벌써 오순희와 함께 아지트로 와서 자기의 결심을 이야기하고 간 일이 있지만 어머니도 올라와있다기에 그 어머니를 만나보려고 가는것이였다. 아직 어둠도 가셔지지 않았는데 그이의 하숙집에선 애들이 떠들썩 끓었다. 얼음판이 된 마당에는 벌써 꼬마 둘이 나와서 팽이를 치고 불이 켜진 방안에서도 꼬마들이 들끓었다. 차광수는 할머니를 찾으며 웃방으로 들어갔다. 기골이 큰 늙은이가 아직도 정정해서 벌써 자리에서 일어나앉았다. 그는 담배를 뻐금뻐금 빨다가 이게 누구냐고 물었다. 《할머니, 신문배달부올시다.》 《어이구, 신안툰에 나가있다더니 어떻게 이처럼 신새벽에 달려들었담?》 할머니는 그전 청년들이 집으로 드나들 때 들은 말이 있어서 신문배달부라니 얼른 알아차렸다. 그전에 익살군인 권태일이며 채경이들이 차광수를 《동경고학생》이니 《신문배달부》니 하고 불렀다. 《신안툰에 가서 그동안 잘 있었나?》 《네, 잘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여전히 건강이 좋으십니다.》 《그래두 인젠 매돌을 겹놓아가지군 못든다네. 겨우 한짝씩 들지.》 그 소리에 차광수는 껄껄거리며 웃었다. 매돌 둘이라면 젊은 사람들도 들어내기가 힘들텐데 그걸 못드노라고 한탄한다. 《할머님댁에 한촌에서 어머니가 한분 와계십니까?》 《계시지. 어머니도 와있구 딸두 와있구… 어이구, 여기 나오는군.》 뒤방에 있던 수연이 어머니가 벌써 차광수의 말소리를 알아듣고 새문을 열고 차광수가 있는 방으로 들어선다. 《한촌어머니, 올라와계신다는 말은 들었는데 일이 바빠서 인제야 찾아와뵙니다.》 차광수는 일어서서 허리를 굽히며 인사를 했다. 《어이구, 얼마나 고생들 하오? 한촌에 함께 왔던 청년이 감옥에 들어가있다니…》 《어머닌 그새 얼마나 고생을 했습니까? 슬픈 소식을 받아안고…》 《어쩌겠소? 제 팔자가 사나와서 일찌기 간걸 누구를 칭원하겠소. 임자들이 돌아올 때도 우리 집에 들렸었다는 소리를 들었다우.》 《어머니, 저희들은 가슴이 너무 터지는것 같아서 잠간 들렸댔습니다.》 이러는데 아래방문턱앞에 수연이가 나서서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두발을 모두고 토목치마를 휩싸쥐고 서서… 《어머니를 좀 만나뵙자고 왔소. 그리고 수연동무는 여기서 며칠동안 기다려주오. 기다리고있다가 어디로 좀 떠나야겠소.》 《네…》 《아니 떠나다니? 여기에도 있지 않고 어디로 또 떠난단말이요?》 떠난다는 소리에 그의 어머니는 눈이 둥그래서 물었다. 인젠 이 길림에 자리를 잡고 무슨 일을 하려니만 생각했던 어머니였다. 《학교로 가야 하겠습니다.》 《학교라니? 글 배우는 학교말이요?》 《그렇습니다.》 《조국광복하는 쌈은 안하고 학교가 어디 있기에 학교로 간단말이요?》 《학교가 있습니다. 쌈을 해도 글을 배워가지고 쌈을 해야 잘할수 있습니다.》 《어이구, 하늘같은 소리를 다 듣소. 인제 저 커다란것이 거기 가서 가갸거겨를 외우겠구만…》 어머니의 소리에 차광수는 껄껄 웃었다. 이 집 할머니도 수연이 어머니의 무르팍을 치며 흐덕흐덕 웃었다. 차광수는 한참동안 수연이 어머니에게 딸을 내놓고 너무 딸생각을 하지 말라고 타일렀다. 늘 딸이 곁에 있거니만 생각하고 마음 썩이지 말고 조국이 광복되는 날까지 오래오래 살라고 했다. 수연이 어머니는 말은 못하고 눈물을 씻으며 고개만 끄덕거렸다. 얼마후 차광수는 밖으로 나왔다. 후더운 인정세계에 들어 따뜻한 말을 주고받고나니 자기의 마음도 후덥고 훈훈해왔다. 지시를 받고 이렇게 자기 참회의 걸음을 하려니 장윤삼의 딸생각도 났다. 그 어린게 별선생님을 그리도 만나보고싶어 뒤따라나와 손목을 쥐고 선생님 있는델 대달라고 하는걸 왜 여기엔 별선생님이 없다고만 했을가. 그렇게 별선생님을 만나보고싶어하는걸 이 길림에다라도 떼여두고 조직의 힘으로 글을 배우게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가. 그 어린게 제 아버지를 따라서 동만으로 간다니 그 멀고 먼길을 제 아버지의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틀어잡혀서 이끌려가진 않을가. 차광수는 가슴이 무둑해지고 눈굽에 이슬이 돌았다. 최창걸의 누이도 수연이처럼 공부를 시킨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수연이를 보는것이 최창걸의 불쌍한 누이를 보는것 같은 생각도 들게 했다. 지금 정임이는 신안툰에서 무얼하고있을가? 최창걸의 누이라고 알리지는 않고 그저 국내에서 들어온 녀자라는 말만 하고 데려다 맡기였으니 신안툰사람들도 마음을 주지 않고 의심스럽게 볼것이 틀림없다. 그 아주머니가 자기 말로 오라버니가 누구라고 했을것 같지 않다. 그러니 외로움과 마음고생이 오죽할것인가? 차광수는 눈덮인 벌판을 걸으며 별생각을 다 했다. 신안툰에 거의 가니 싸락눈이 뿌렸다. 좁쌀알같은 눈이 어떻게 퍼붓는지 앞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였다. 김성주동지의 부탁을 받고나서 최창걸에게 즉시 신안툰에 와서 누이를 만나라는 지시를 띄워보낸후에도 늘 가까이에 있으면서도 최창걸의 누이를 잘 돌봐주지 못한것이 후회되여 차광수는 며칠동안 드나들며 집도 새로 마련하고 여러가지 생활상 편의를 보장해주었으나 누이의 외로움은 조금도 덜어지지 않을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이날도 그길로 신안툰으로 나갔다.
4
차광수의 련락을 받은 때로부터 며칠이 지난 어느날 최창걸은 신안툰에 도착하였다. 마을로 들어선 최창걸은 교장선생네 집으로 향하였다. 전해들은 소식에 의하면 누이는 그 집에 거처하고있다는것이다. 최창걸은 조직의 지시를 받고 누이를 만나러 오면서 내내 마음이 무거웠다. 필경 누이의 신상에 그 어떤 불행이 들씌워진듯하였다. 그렇지 않다면야 혁명조직이 그런 지시를 내리겠는가. 하늘에서는 검은 구름이 낮게 떠돌고있었다. 교장선생네 집을 저만치 바라보며 마을어구에 들어서는데 버드나무가 서있는 우물가에서 웬 녀인이 물을 긷는것이 보이였다. 등을 이쪽으로 돌려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버드나무가지에 앉은 까치가 깍 깍 하고 울자 그 녀인은 드레박을 멈추고 그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고있다. 등에는 아이를 업었다. 어린애의 머리우엔 수탉볏같은 꼭디수술이 달린 털모자를 씌웠는데 얼굴은 보이지 않고 닭알같이 하얀 주먹만 포대기우로 내밀어 제 엄마의 낭자를 쥐여뜯고있다. 녀자는 그러거나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깍 깍 하고 처량하게 울고있는 까치만 쳐다본다. 걸음을 옮기던 최창걸은 낯익은 포대기에 시선이 미치자 걸음을 멈추었다. 분홍색바탕에 감색 꽃무늬가 돋힌 그 포대기천은 언젠가 최창걸이 길림상점에서 사서 누이한테 소포로 부쳐준것이였다. 그때 포대기감에 대해서는 전혀 백지였던 최창걸은 오순희를 데리고가서 그 천을 골랐던것이다. 이제는 물이 날았으나 틀림없이 그 천이였다. 그것을 보니 가슴이 찌르르하고 눈물이 솟았다. 분명 누이의 모습이였다. 일순간에 수만가지 생각이 떠오르고 인간이 체험할수 있는 가장 큰 비극의 절정을 겪는것 같기도 하였다. 저 불쌍한 누이가 이 낯선 이국땅에 오빠를 찾아와서 저리도 처량한 모습으로 구름이 덮인 하늘을 넋없이 바라보고있는것이다! 오랍동생을 생각하는가? 아니면 이미 저세상사람이 된 남편을 생각하는가? 나는 어째서 인간을 사랑하는 그 큰 사상으로 가슴을 불태우지 못하는가. 최창걸은 성큼성큼 우물가로 걸어갔다. 누이가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다보았다. 그러나 이쪽을 얼른 알아보지를 못하였다. 뜻밖에도 누이의 눈언저리에 주름이 잡힌것을 보게 되니 또다시 가슴이 저미는듯 아팠다. 그것은 고달픈 생활의 흔적이였다. 《누님…》 최창걸은 떨리는 입술을 벌린채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아이구 네가 어떻게…》 누이의 손에 들려있던 드레박이 철썩 하고 우물곁에 떨어졌다. 최창걸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누이의 두손을 마주 잡았다. 얼음장같이 차거운, 물에 젖은 손, 거친 손이 그간의 고생을 넉넉히 느끼게 했다. 정임은 최창걸의 얼굴을 다시한번 쳐다보더니 이어 얼굴을 싸쥐고 오열을 터뜨렸다. 그러나 등에 업힌 아이는 외삼촌을 쳐다보며 발씬 웃는다. 이젠 새하얀 앞이발이 나오고 눈도 초롱초롱한게 사람을 알아보는것 같기도 했다. 《누이 미안하오.》 《응, 그래…》 정임은 그렇게 대답을 하며 터져오르는 울음을 삼키면서 머리를 끄덕이였으나 여전히 흐느낌은 계속되였다. 최창걸은 자기의 마음을 달래려는듯 어린 조카애의 손을 잡아 흔들었다. 누구를 닮았을가, 어린것은 모든것을 죄다 알기나 한듯 엄마의 잔등에 살짝 뺨을 붙이며 이편을 건나보더니 또 발씬 웃는다. 볼에 꽃같은 보조개가 패였다. 정임은 네 외삼촌이라고 아이한테 말하면서 띠끝을 들어 눈굽을 훔치였다. 《그래 누이 어떻게 사오?》 《그렇게 살지. 며칠전에 차광수선생이 오셨다 가셨단다. 마을청년들을 데리고 오막살이를 고쳐놓았구나. 오늘래일 그리로 이사를 하려던 참이다. 어떻게나 인정이 많고 싹싹한분인지.… 내 옷 한벌감도 들고오셨더구나.…》 최창걸은 가슴이 후더웠다. 역시 속이 깊은 차광수였다. 그것이 김성주동지의 권고였겠지만 역시 차광수는 그이의 뜻을 받드는데서 그 정신적높이가 자기하고는 대비도 되지 않는다. 자기는 부랴부랴 여기로 오면서도 조카애 손에 들려줄 사탕 한봉지조차 들고오지 않았다는 뉘우침이 컸다. 이날밤엔 신안툰 온 동네가 법석 끓었다. 삽시에 최창걸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아 숱한 사람들이 교장선생네 집으로 모여들었다. 《허허, 난 그 녀인이 최창걸선생의 누이인줄은 꿈에도 몰랐소. 녀자들 둘이 내인을 데리고 나와 길림조직에서 내보내는 녀자이니 당분간 신안툰에 있게 해달라고 하기에 속으로 무슨 혁명에 관계하는 녀자겠거니만 생각하고 어서 그러라고 했지요.》 교장선생은 최창걸의 조카 진옥이를 무르팍에 올려놓고 앉아 뚝떡뚝떡 두드려주며 이야기했다. 《그러니 애엄마두 와있으면서 일체 최선생 말을 안냈겠군요?》 《말이 무슨 말이겠소. 온 이튿날부터 부엌일을 돕기 시작한것이 줄곧 일이였지요. 물을 길어들인다, 설겆이를 한다, 불을 땐다, 돼지물을 퍼내간다, 이 집 내인들은 그저 입이 헝 벌어져 모두 놀랐지요. 혁명가라느니 혁명가가 아니라느니 수군덕대며… 허허, 얘 진옥아, 옳지 옳지 그저 잘 웃는다니까… 네 어미가 진짜 녀자니라!》 교장선생은 그저 좋아서 어쩔줄 몰라한다. 모여온 사람들이 다들 어린애를 들어다가 안아본다. 어떤 사람은 손바닥에 올려세우고 곤두도 세워본다. 《곤두 곤두, 옳지 옳지, 곤두도 잘 서는군.》 어린것은 때때옷에 두다리를 뻗쳐세우고 자지러지게 웃으며 곤두를 잘 섰다. 집에서 제 할아버지나 외할아버지가 곤두훈련을 단단히 시킨것 같다. 아래방에선 마을아낙네들과 함께 뚱뚱한 교장선생의 안해가 최창걸의 누이 정임이를 앞에 놓고 차광수며 최창걸이 이 동네에 와서 녀자들 까막눈 띄워주던 이야길 했다. 웃음집이 헤픈 그는 한참 웃어가며 최창걸이 마을의 꼭자무식쟁이들을 혼내우던 이야기를 늘어놓더니 이렇게 물었다. 《진옥 엄마야 정말 척척박사겠지?》 《저두 꼭자무식이예요.》 《무슨 그럴가? 정작 그렇다면 이제 진옥이 외삼촌한테서 혼뜨검나게 됐어. 호호…》 교장선생의 안해는 또 한바탕 웃었다. 정임이도 웃었다. 정말 혼뜨검을 내줘도 동생 가까이에서 글이나 배우란다면 춤을 출 일이였다. 사실 그는 백판 무식은 아니였다. 웬만한 글은 들여다볼줄 알아서 더러 편지를 보아달라고 들고오기도 했었다. 어쨌든 정임이는 마음이 후끈해지고 눈물이 났다. 오랍동생이 객지에 떠돌아다니며 고생을 하면서도 얼마나 큰일을 했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바로 이렇게 해나가는것이 혁명이란것인가! 그렇다면 혁명이란것이 어떤것이란걸 다소 알듯싶기도 했다. 최창걸은 혁명조직성원들이 꾸려놓은 오막살이집을 찾아가보았다. 벽도 흙을 새롭게 바르고 이영도 새것으로 하였다. 문마다 백로지로 도배를 하여 집은 그야말로 아담하고 산뜻하여 낡은 오막살이라는 느낌은 전혀 없었다. 최창걸은 마당에 쌓아놓은 장작더미며 수수짚으로 엮은 울타리며 어디서 구해들였는지 마당가에 세워놓은 나무절구까지 일일이 살펴보며 마음뜨거움을 금할수가 없었다. 삭주에서 내내 남의 집 세방살이를 하던 누이한테 이런 집이 차례지다니… 실로 누이는 오늘 처음 자기 집을 쓰고 살아보게 된것이였다. 정임이는 오래간만에 만난 오랍동생한테 제 손으로 저녁밥을 지어 대접을 하였다. 어데서 구했는지 좁쌀에 팥을 두고 한 밥이였다. 오래동안 인정에 주려온 정임은 그저 사람이 사는것만 같다고 하였다. 하루밤 더 누이와 함께 있으면서 그동안의 회포를 나누라고 마을사람들이 권고하였다. 최창걸은 아침밥상을 물리자 인차 떠날 차비를 하였다. 《아이구 이렇게 훌쩍 떠나면 어쩌니…》 《누이, 나는 누이를 위해서 쌀 한되박 구해주지 못했지만 우리 동무들은 얼마나 수고를 했소. 동무들이 누이를 위해주고 바란건 무엇이겠소. 혁명을 잘하라는게 아니겠소? 내 누이와 진옥이를 위해서도 일을 많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드오.》 정임은 감격에 겨워 치마자락으로 흐르는 눈물을 훔치였다. 《누이, 내 또 오겠소. 누이 한숨만 쉬지 말고 마을녀인들을 도와서 혁명을 할 생각을 하오. 이 못된 세상을 뒤집어엎고 우리처럼 못사는 사람들을 위한 새세상을 세워야 하겠다는 결심을 품고 싸워야 해요.》 정임은 눈물속에서 그저 고개만 끄덕이였다. 최창걸은 새근새근 자고있는 진옥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것을 알아차린듯 진옥은 잠결에도 볼에 보조개를 지으며 웃었다. 최창걸은 정임의 바래움을 받으며 동구밖에 나섰다. 하늘에서는 싸락눈이 내렸다. 인젠 그만 돌아가라고 두세번 말했으나 정임은 멀리까지 따라나왔다. 그리고 최창걸이 누이의 손을 잡으며 앓지 말고 조카애를 잘 돌보라고 부탁했을 때 정임은 침착한 얼굴로 그렇게 하겠노라고 하였다. 어딘지 모르게 새로운 결심을 다진듯싶은 모습이였다. 최창걸은 눈내리는 들길을 걸었다. 뒤를 돌아다보니 멀리 눈발에 묻힌 누이의 모습이 희미하게 드러났다. 가자! 이 황막한 광야를 우리 세 목숨이 발을 맞추어 함께 걸어가보자. 그러느라면 진옥아, 너에게 행복이 올것이다. 내가 주는것이 아니라 김성주동지가 이끄는 혁명이 너에게 행복을 가져다줄것이다. 눈발을 몰아오는 바람이 우우 더 거세게 마구 불었다. 광야와 하늘이 맞붙고 어데라없이 바람소리만 울리였다. 그랬으나 최창걸은 하늘높이 머리를 들고 가슴을 펴고 힘있게 걸어나갔다. (김성주동무, 고맙소, 고맙소. 우리 누이를 위해서 그토록 마음쓰고 생각해준걸 내 오늘에야 알게 되였소. 나는 그 높은 사랑의 하늘을 지금 저 멀리 바라보고있소. 나도 누이도 어린 조카애도 행복하오. 내 혁명을 잘하지 못할수도 있지만 김성주동무의 그 높은 사랑이야 어찌 잠시인들 잊겠소. 아니 절대로 잊을수 없소. 그것을 잊으면야 사람이 아니지. 내 그 사랑의 하늘밑에서 싸우다가 바로 그 하늘을 바라보며 마지막 생명을 바칠테요.) 최창걸은 더욱 걸음을 빨리하였다. 홧홧 달아오른 얼굴에 내려앉은 눈송이가 순식간에 녹아버린다. 최창걸은 이마의 땀을 훔치며 더욱 세차게 걸음을 옮겨디디였다.
5
광막한 벌판으로 뽀얗게 눈보라가 쳐간다. 앞을 가려볼수 없게 광란하는 눈보라를 뚫고 말파리 한대가 달려가고있다. 휘몰아오는 눈보라는 우우 맹수처럼 울부짖으며 말파리를 쳐갈겼다. 사람과 말이 눈보라속에 들어 그저 둥글둥글 말려가는것 같기도 하다. 재게 울리는 말발굽소리에 어울려 얼음이 바스라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어떤 때는 말파리가 웅뎅이에 풍덩 내려앉았다간 눈보라속에서 불쑥 올려솟기도 한다. 눈보라가 가뭇 멎는듯할 때엔 말파리우의 사람들이 목도리속의 눈들을 빠금히 내밀고 눈에 파묻힌 광야를 살펴보았다. 그러다간 또 눈보라가 달려들면 눈들을 목도리속에 재빨리 감추군했다. 앞에는 며칠전 감옥에서 석방되여나온 한윤이 타고 뒤엔 정임이, 수연이들이 앉았다. 한윤은 감옥에서 김성주동지를 만난후 온몸이 활기가 오르기 시작했는데 또 마침 검사의 사실심문에서 그가 길림청년공산주의자는 아니고 민족주의계렬의 청년이라는것이 판명되여 감옥을 나오게 되였다. 그는 석방에 앞서 김성주동지로부터 남만지역으로 도로 내려가 청년조직들을 새 운동선에 바로잡아세우라는 지시를 받고 나왔다. 그래서 때마침 고유수로 가게 되여있던 정임이와 수연이를 말파리에 태워가지고 광야를 달리게 된것이다. 그자신도 고유수에 있는 김혁을 길림을 거쳐 새 공작지인 할빈으로 가도록 하라는 지시를 전달하기 위해 고유수에 들렸다가 남만으로 향할 작정을 했다. 그는 지금 달리는 말파리우에서 차광수와의 부활된 우정을 생각하며 눈물을 글썽거린다. 감옥에서 나오자 이어 약왕묘지하실로 찾아갔을 때의 상봉은 지금 생각해도 눈굽이 뜨거웠다. 차광수는 힘있는 팔로 목을 휘여안으며 《여, 한윤이!》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자기는 또 내쫓지 않겠느냐고 비꼬아주었다. 그러자 차광수는 껄껄거리며 닁큼 허리를 그러안아 배지개를 뜨는것이였다. 《너 날 배지개를 뜨군했지? 오늘은 내가 그 갚음을 해야겠다.》 차광수는 자기를 둥둥 안고 돌아갔다. 《흐앗하하.》 《하하하.》 그들은 눈물을 씻으며 폭소를 했다. 이날밤 그들은 약왕묘지하실에서 한담요를 덮고 자며 흘러간 고학시절의 이야기며 혁명에 대한 이야기를 끝없이 하였다. 자기는 이번 감옥에 들어가서 김성주동무가 구해들여보내주는 《자본론》을 다 읽었노라고 자랑도 했다. 《한번 더 읽자고 아예 책을 싸들고 나왔네.》 그는 려인숙에 와서 찾은 들가방을 두드리기도 했다. 차광수는 잔등을 갈겨주며 대렬이 백배해지는것 같은 느낌이 드니 열명몫 백명몫을 해달라고 부탁했다. 어쨌든 사그라졌던 지난날의 우정이 되살아난 밤이였다. 동지애의 따뜻한 이 바다, 김성주동무의 후더운 사랑이 펼쳐주는 이 새로운 나의 바다! 내가 이 바다우에 재생의 돛을 올리고 출범의 노를 저을줄이야 어찌 알았을가. 하늘에서 비쳐내리는 저 태양의 빛이 김성주동무의 사랑의 빛은 아닐가. 이 광야에서 눈보라를 휘몰아가고 만유를 소생시켜 꽃이 우거지게 만들고 그 꽃숲속에 동지들을 세워주고싶어하는 김성주동무의 불같은 사랑의 빛은 아닐가! 정말 그런것도 같다. 바로 이 뜨거운 사랑의 바다, 사랑의 동산을 만들기 위해서 자신은 밤거리를 휘돌다가 붙잡히우기도 하고 긴긴날 옥중고초도 겪는 그 사랑의 화신, 빛의 화신이 제 빛 제 사랑을 주기 위해서 곡절은 얼마나 큰 곡절을 겪는가! 한윤은 가슴속에서 뜨거운것이 치밀었다. 《빨리 채찍을 치오.》 그는 말파리군에게 독촉했다. 말파리군도 길림선창의 조직원이였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오늘로는 고유수로 못가오. 가다가 대암촌에 들려 쉬여야지… 이랴 쩌 쩌.》 《어쨌든 빨리 갑시다. 뒤에서들 춥지요.》 한윤은 뒤에 탄 녀성들을 돌아보면서도 한마디 했다. 이들은 또 얼마나 맘이 씌이는 녀자들인가. 정임이는 동지의 누이래서 동정이 가기도 하지만 또 한 처녀는 왕청문의 테로사건때 죽은 최봉의 애인으로서 혁명에 첫발을 들여놓는다고 하지 않는가. 최봉이! 그 듬직한 청년이 자기더러 옳은 길로 나가라고 애가 타게 타이르고 이끄는것을 자기는 도리여 엇서나가기만 하였지. 그 청년이 지금 넋이 있어 하늘중천에서라도 이 광경을 내려다본다면 어떻게 생각할가. 내가 지금 저를 그리워하고 제 애인을 놓고도 가슴쓰린 생각을 하고있다는걸 안다면 저도 울지 않을가. 한윤은 눈에 눈물이 글썽거렸다. 서문밖에서 말파리를 탈 때 수연이 어머니가 따라나와서 바래주던 생각도 떠오른다. 그 어머니는 차광수와 자기의 팔을 쓸어내리며 둘이 다 죽은 최봉이같은 사람들이니 마음놓고 조국광복의 싸움길에 딸을 보내노라고 했다. 《제 애비가 이것 하나 남은걸 놓고 숨을 거두면서 네가 내 뒤를 이어 총 멜 자식이라면 얼마나 좋겠니? 인젠 내 죽으면 내 집에서 총멜 대가 끊어졌으니 죽자 해도 눈을 못감겠구나! 제 애비가 이런 유언을 하면서 숨을 거두었다오. 그러니 이 애가 싸움의 길에 나선다는걸 알면 제 아버지도 편안히 눈을 감지 않겠소. 아가, 어서 타라.》 어머니는 딸더러 말파리에 올라타라고 잔등을 밀어주었다. 그리고 한참 달려와서 뒤를 돌아보니 그때까지도 어머니는 메등같은 언덕우에 치미자락을 날리며 서있었다. 그 광경이 눈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가도가도 눈보라치는 광야였다. 정말 대암촌이란곳에 다달으니 누릿누릿 황혼이 깃들었다. 그런데 달리는 말파리앞에 웬 청년이 불쑥 나타나더니 손을 버쩍 들어올렸다. 《길림에서 오는 말파리가 아니요?》 말파리가 멈칫멈칫하자 청년은 손을 내리며 물었다. 《그렇소.》 《고유수로 가는 한윤동무가 타지 않았소?》 《내가 한윤이요.》 한윤이 대답하자 청년은 그럼 어서 내리라고 했다. 《난 이곳 조직책임자요. 길림에서 온 통신을 받았소. 감옥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소?》 한윤이 들가방을 들고 말파리에서 내리자 청년은 손을 억세게 쥐여흔들며 말했다. 한윤은 광대한 전선이 이렇게 째여있고 통신이 비발치듯 할줄은 몰랐다. 언제 벌써 길림에서 통신이 왔는가! 청년은 말파리에서 내린 사람들을 데리고 길옆에 있는 자기의 하숙집으로 갔다. 다른 한 청년이 오더니 말파리와 함께 말파리군까지 데리고 딴곳으로 간다. 아마 외양간이 있는 집으로 가는 모양이였다. 수연이는 가슴이 두근두근 뛰였다. 여기가 최봉의 어머니 살고있는 대암촌이란말인가. 떠나올 때 차광수는 가다가 하루밤 묵게 되는 대암촌이란곳이 최봉이네가 정착해서 살던고장인데 거기 그의 어머니가 있다고 하니 들려서 인사나 하고 떠나가라고 했다. 여기 그의 어머니가 있다면 아들의 가슴쓰린 소식이나 듣고있는가. 모르고있다면 내가 들려서 그 가슴터지는 소식을 어떻게 전할가. 수연이와 정임이 길옆집 정지방으로 들어가니 수연이 어머니 비슷한 주인어머니가 그들을 맞아주었다. 《어이구 온, 그 추운데 어린애까지 업구… 이게 포대기속에서 숨기가 있나 없나?》 주인어머니는 정임이의 잔등에서 어린애부터 뽑아내리며 혀를 끌끌 찼다. 포대기속에 싸여있던 어린것은 그래도 량볼이 따끈따끈했다. 어린것은 두눈을 도록도록 굴리며 주인어머니를 보더니 발씬 웃는다. 《어이구, 이런 은금보화가 있을가? 그래도 이 바가지속같은 얼굴을 보고 웃는구만… 이게 자지를 단녀석인가?》 《딸이예요.》 정임이는 낯을 붉히며 대답했다. 《딸이면 어떤가? 지금은 남녀평등이라는데… 나두 딸이 낳은 외손주를 데려다 기르는데 그게 벌써 무슨 사회운동을 한다고 우쭐렁댄다네.》 정임이와 수연이는 수집게 웃었다. 둘이는 웃는것도 비슷했다. 그들은 뜨끈한 구들에 들어와 앉으니 인젠 정말 살것 같았다. 말파리에 앉아서 눈보라에 후려갈기울 때같아선 혁명은커녕 들판귀신이 되는것만 같았다. 수연인 모르겠으나 정임이는 정말 그런 눈보라는 처음 보았다. 그는 눈보라치는 들판이 아니라 그 무슨 사람죽이는 전쟁마당을 빠져나온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언니, 기저귀를 갈아줘야 하잖아요?》 《좀 있다.…》 수연이가 속삭이자 정임이는 뒤손질로 수연이의 무르팍을 누르며 주인어머니 못듣게 혀아래소리를 했다. 조심성 많은 그는 누가 보는 앞에선 아이의 기저귀도 갈아채우지 않았다. 《그래 형제간인가?》 주인어머니가 정임이와 수연이에게 묻는 말이였다. 정임이가 형제간이 아니라고 대답하려는데 수연이가 먼저 대답했다. 《네… 우리 언니예요.》 정임이는 얼른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나 어쩐지 기쁘기도 했다. 길림을 떠나기 전날밤 오순희네 집에서 하루밤 같이 자며 그가 혼자 한촌에서 길림으로 올라와 김성주동지를 면회했다는 말을 들었는데 정말 그럴수 있는 처녀라는 생각이 인제 더욱 들었다. 유순하면서도 강의하고 엉큼한데도 있는것 같다. 《어이구, 어쩜 형제가 그렇게도 끌끌할가. 눈세는 형제가 아니래도 속질 않겠네.》 정말 크고 부드러운 눈도 그렇고 볼이 둥근것도 형제간 같다. 그런가위에 정임이의 모습이 약간 칼날질사해보여서 그게 도리여 시집살이의 흔적을 가진 성숙한 형같아보였다. 웃방으로 들어간 한윤은 활기에 넘쳐서 한참 감옥살이이야기를 했다. 《요새 여기엔 왕청문의 고인호가 나타났댔소.》 《아니 그놈이 왜 여기엘 왔댔소?》 청년의 소리에 한윤은 두눈이 커져서 물었다. 《이곳엔 대체로 고인호와 함께 있던 독립군들이 많이 정착해 살고있는데 저도 인젠 그들속에 와서 살아보겠다고 왔댔소. 왕청문도 인젠 개 물어간것 같이 됐다고…》 청년은 한윤이 왕청문의 민족주의자들속에 어깨를 디밀고있었던 청년이라는걸 알기때문에 구체적으로 이야기해주었다. 《그런걸 청년들이 들고일어나 이게 왕청문에서 테로를 한놈이라고 들끓게 되자 바로 어제밤 자다가 야밤도주를 했소. 내 그래서 민족주의운동이 망해가는 수치스러운 말로를 잘 보여주고 갔다고 생각하고있소.》 한윤은 가슴이 후두두 떨리였다. 힘찬 재생의 길을 달리기 시작했는데 검은 그림자를 던져주는것 같은 그 무슨 운명적인 서곡이 울리지 않는가. 고인호를 놓고는 분격이 치밀기도 하고 달리 아버지와의 관계때문에 가슴을 건드리는 안타까운 생각도 있다. 아버지가 고인호를 그렇게도 광복운동의 기둥감이라고 칭찬하던 소리는 지금도 머리속에 떠오른다. 그런놈이 왕청문에서 애동초목을 여섯명이나 살해해치우고 그리고 그뒤에도 저들을 반대한 청년들을 칼을 들고 뒤쫓아 돌아다니고, 저놈이 자기와 조동식을 찾아 길림에도 올라왔댔는지 모를 일이다. 왜 이렇게 그놈과 비비꼬이며 얽히는가. 한윤은 저녁을 먹고 자기들을 처음 맞이한 청년을 따라서 야학방으로 나갔다. 이곳 조직원들은 벌써 조직들도 다 내오고 밤이면 야학도 세차게 밀고나갔다. 그래서 민족주의로부터 공산주의에로 발목을 넘겨놓는 한윤에게 한번 본때를 보고 가서 남만일대에서 그렇게 하라는 심정으로 데리고 나왔다. 야학방에 나오니 정말 온 동네가 다 모여든것 같았다. 야학방이라니 촌집 몇방씩 빌려가지고 글을 배우는줄 알았는데 대여섯 교실 되는 큰 학교를 온통 야학방으로 만들었다. 낮에는 애들이 공부하고 밤이면 밤대로 이렇게 야학을 극성스럽게 해낸다는것이였다. 방마다 사람들이 가득찼다. 청년들의 방, 부녀자들의 방, 농민들의 방, 거기에 소년들도 한방안 가득 모여들어 글소리를 냈다. 한윤은 청년을 따라서 농민들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에도 벌써 사람들이 가득 모여들어서 담배를 피웠다. 농민들속엔 독립군을 하던 사람들이 많은데 한윤이 아버지가 돌아갔을 때 조상을 와서 땅을 치며 울던 독립군도 몇사람 있다. 《아니 이게 한윤이 아닌가? 자네가 어떻게 돼서 여길 왔나? 여긴 운동계통이 다른곳인데…》 한윤을 아는 령감들이 놀라서 쳐다보며 물었다. 《모두들 편안합니까? 전 고유수로 가던길에 들렸습니다.》 《으음…》 그들도 알만하다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저들이 새 운동을 지지하고나서는데 젊은 네가 그 케케묵어 구린내나는 독립군운동에 주저앉아있을테냐고 생각하는것이였다. 이 방안에서도 고인호가 왔다간 이야기가 벌어졌다. 독립군들이 더욱 그놈을 붙잡았더면 당장 왕청문의 죄행을 발가내고 멱을 눌러죽일걸 그랬다고 한탄했다. 《죄는 우두머리들 죄야.》 한사람이 우두머리들 죄라고 하자 곁사람이 팔굽으로 꾹 찔렀다. 한윤이도 그걸 보았다. 그것은 한윤의 아버지도 우두머리들중의 한사람이니 그런 소린 말라는거다. 그담엔 우두머리들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고인호가 죽일놈이라고만 떠든다. 한윤은 앉아있기가 괴로와 이마에 땀이 났다. 고인호가 립신양명에 눈이 어두워 그런 시궁창에 굴러떨어지긴 했지만 그런 시궁창으로 그의 잔등을 떠민것은 그 부대의 우두머리들이였던것이다. 아, 아버지! 잘못된 길을 걸어간 아버지, 로선도 전략도 전술도 없이 마구잡이로 제 피, 남의 피를 제단에 헛뿌리면서 가시넝쿨길을 개척하느라고 몸부림치다가 허무하게 사라져간 아버지! 한윤은 아버지시대의 시꺼멓게 찍혀진 발자욱이 눈앞에 보이는듯 싶어 가슴이 쓰렸다.
수연이는 눈보라길을 헤쳐온 정임이가 피곤해서 애기를 끼고 세상모르게 잠이 들자 주인어머니에게 물었다. 《어머니, 여기 최봉이란 청년이 있었어요?》 《있었지, 어째서 그러나?》 《그저요.…》 《그 사람 아버진 독립군을 하다가 잘못되고 무슨 소린지 그 사람도 어데 가서 잘못됐다고 하데나.》 《그의 어머니가 지금 여기 살고있어요?》 《살고있다네. 막내동이 하나를 데리고… 모두 삼형제였는데 둘째 아들도 고향에서 앓다가 죽었다고 하던가… 어째서 자꾸 묻나?》 《글쎄 좀 물을 일이 있어요. 그 어머니가 살고있는 집은 어데쯤 있어요?》 《바로 이곁 백양나무 선 집 다음집이라네.…》 수연이는 아무 내색을 않고 밖으로 나왔다. 그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조츰조츰 걸어나갔다. 백양나무 선 집 뜰을 지나서 조금 돌아서니 정말 조그만 마가리가 한채 있었다. 최봉은 어느때인가 자기한테 제가 열세살때 어머니와 함께 지은 마가리가 한채 대암촌 허허벌판에 있다고 했다. 바로 그 마가리다. 싸움의 길에 나서긴 열세살때라니 그 어린 소년이 어머니의 힘을 합친다한들 어떻게 이 마가릴 지어냈을가. 그때는 아마도 인가가 없는 허허벌판이였겠는데 재목은 어데 가서 구해들이고 구들돌은 어데가서 구해들였을가. 그래도 마가리엔 수수대울타리도 둘러치고 사립문도 있었다. 막내동이가 있다니 그 어린게 그랬는지 뜰에 눈도 쳐무졌다. 푸른 달빛이 마당에 처량히 내리비쳤다. 수연이의 조심스럽게 걷는 뒤엔 그의 기다란 그림자가 보기에도 눈물이 나게 가뭇 기척이 없이 따라간다. 아무것도 없는 호젓한 허무가 뒤에 묻어다니는것 같다. 집으로 들어가 어머니를 찾아보려던 수연이는 그 사연깊은 은가락지 낀 손으로 사립문기둥을 붙잡고 우뚝 섰다. 가슴이 뛰였다. 창문엔 불그레한 등잔불빛이 어리고 물레질소리가 들려나왔다. 아마 막내동이를 잠들여놓고 어머니가 혼자 물레질을 하는것 같다. 아, 최봉의 넋이 어머니 품이 그리워 이 집에 와있진 않을가. 와있다면 지금 내 모습을 내다보고 얼마나 피같은 눈물을 흘릴가. 어머니는 지금 무얼 생각하고있을가. 이 세상에 자기 아들과 인연을 맺었던 이 불성모양의 처녀가 있다는걸 알기나 할가. 내가 들어가 알리면 고요한 못에 바위돌을 딩굴려넣는것 같이 되진 않을가. 사립문기둥을 잡고 선 수연이는 별 생각을 다했다. 수연이는 종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부엌문앞으로 걸음을 내디디지 못했다. 그만두고 돌아서자. 무엇때문에 어머니의 고요한 가슴에 피눈물 지을 풍파를 일굴가. 《어머니, 오래오래 사세요. 최봉의 뒤를 이을 제가 있으니 마음을 놓으세요. 제가 찾아들어가 문안한다면 어머니가 고통스럽지 않겠어요? 차라리 모든 사연을 모르고계시는게 낫지 않겠어요.》
수연이는 옷고름을 들어 눈물을 씻으며 돌아서 걸었다. 그는 발자욱소리가 날가봐 더욱 조심스럽게 마당을 걸어나왔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