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서《불멸의 력사》 3

        장편소설

 

 

                                     천  세  봉  

 

( 제 8 회 )

 

제  5  장

 

슬   픔

 

1

 

마차가 달린다. 채찍소리가 울리고 말이 땅을 굴러치며 뛴다. 말발굽밑에서 고무바퀴밑에서 먼지가 들떠일어난다. 떠오른 먼지는 어둡고 푸르끼레한 공간에서 뭉글뭉글 타래를 짓는다.

《인젠 거의 온것 같군요?》

마차우에서 김성주동지의 굵은 음성이 들린다.

《네, 거의 왔습니다. 그러나 아직 한참 더 달려야 시내로 들어서겠습니다.》

마차부가 뒤를 돌아보며 대답했다. 마차는 개울을 건는다. 물기운때문인지 마차우엔 서느러운 기운이 풍겼다.

《쩌… 쩌…》

채찍소리가 울리자 마차는 더 재게 땅을 구른다.

김성주동지께서 지금 길림으로 돌아오시는길이였다. 카륜일대의 군중지반을 꾸리는데서 제기된 복잡한 문제들을 바로잡아놓으시고는 마차로 길림을 향해 떠나시였다. 그런데 상준이는 오늘 아침 기차를 타고 카륜으로 달리고 그이께서는 마차로 돌아오시고보니 길이 어긋났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마차우에서 길림사태를 놓고 줄곧 생각에 잠기시였다.

얼마후 마차는 서문밖거리로 달려들었다. 아직 초저녁이여서 사람들이 분주히 오고갔다. 쌍을 지은 남녀들이 가로수밑으로 지나가기도 하고 풀밭 장의자에 앉아 웃고 떠들기도 했다. 역시 거리에 벌어진 생활의 겉면은 변동이 없다. 붙잡아가두고 때리고 주리를 틀며 고문하는편과 이를 항거하는 거대한 사상과 의지를 가진, 바로 이 현실을 개혁하려는편의 피투성이의 싸움은 어데 있는지 알수 없다. 그 비밀은 어느 웅심깊은곳에 숨겨두고 생활은 그저 무사태평으로 아무 찡그린 표정도 없이 이렇게 웃고있는것일가! 모든것을 뒤로 숨기고 거짓을 가지고 장식하는게 생활인듯싶다.

《어데다 차를 갖다댈가요?》

마차부가 말을 평보로 몰며 물었다.

《우선 성안으로 들어갑시다.》

마차부는 또 채찍을 후렸다. 성문의 일각이 우렷이 떠올랐다. 편자 박은 말발굽소리가 더욱 요란히 울리였다. 마차는 나는듯이 성문을 넘어섰다. 넓은 거리가 아득히 펼쳐져있다. 여기도 역시 초저녁이라 그런지 사람들이 붐비였다.

그이께서는 독군서앞을 벗어나 선창으로 나가는 길이 있는데서 마차를 세우라고 하시였다. 그리고는 코트를 한팔에 걸치고 얼른 마차를 내리시였다. 신사복으로 변장을 하시니 키가 더 후리후리해진것 같았다.

《성주동무는 인제 어데로 갈 참입니까?》

《난 여기서 누굴 좀 만나야겠습니다. 동무는 꼭 려인숙에 가서 자고 떠나시오. 마방이 있는 려인숙이 이 골목으로 곧추 나가다가 태흥각이란 료리집이 있는곳에서 왼편으로 돌면 곧 있습니다. 어서 가시오. 주의하시오.》

김성주동지께서는 마차부에게 소곤소곤 이르시였다. 마차부는 카륜의 반제청년동맹원이였다.

그이께서는 얼른 돌아서 선창쪽으로 걸어내려가시였다. 청년은 그이께서 장작낟가리가 있는곳을 지나 토담 하나를 에도신 뒤에야 말잔등에 채찍을 쳤다. 털끝에 땀이 번쩍이는 말이 투루루 코투레를 하면서 거리로 내달렸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권태일네 집을 향해 바삐 걸으시였다. 선창쪽길에서 다시 비탈로 취오르며 자주 주위를 살피시였다. 그런데 권태일의 집이 저쯤 바라보이는 언덕진 길에 가셨을 때 지게를 진 권태일의 아버지가 마주 걸어내려왔다. 권성근은 몸이 더 건강해진것 같았다. 그는 지게작대기를 끌며 엉금엉금 내려왔다.

《아버님!》

그이께서는 권성근의 앞으로 다가가 낮은 음성으로 부르시였다. 권성근은 신사가 마주 걸어와 조용히 부르는 바람에 어마지두 얼굴을 들며 쳐다보았다.

《아버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아니 이게 누구요? 회장이?…》

로인은 지게작대기를 내던지며 꺾쇠같은 두손아귀로 그이의 손을 끌어잡는다.

《요새 얼마나 걱정하십니까? 태일동무가 그렇게 돼서…》

《그런 말은 하지두 말게.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콩밥먹기가 일쑤지. 그런데 회장두 길림에 있었댔나?》

《저는 어데 좀 나가있다가 지금 오는길입니다.》

《참 왕청문에 갔다는 말은 들었지. 그런데 왕청문에 갔으문 거기 그대로 있지 이 끔찍한 판으로 무엇때문에 돌아왔나? 가만있자, 이러구있을 게제가 아닐세. 나를 따르게…》

권성근은 잔말없이 돌아서더니 잠간 주위를 빙빙 돌아보고나서 발을 옮겼다. 김성주동지께서는 2년전 길림으로 처음 오시자 이어 권성근령감의 아들 권태일이와 손을 잡고 이 령감네 집을 집합장소로 리용했었다. 그래서 매일밤 모여들어서 끓었다. 그이께서는 철도기관구에 다니다가 뻗장다리 불구자가 되여 놀고있는 권성근을 인의병원 박승훈의사에게 부탁을 해서 다리를 폈다굽혔다하게도 만들어주시였다. 그래서 이 령감네와의 정은 각별히 두터웠다.

《아버님, 어데로 가십니까?》

《어데든 가야 할게 아닌가? 우리 집에 들리려고 왔겠지만 위험해서 못들리네. 이 근방엔 학생들이 많아서 그런지 저놈들이 밤낮 나와서 어슬렁대며 돌아다니네.》

《저는 춘택동무를 만나려고 왔습니다.》

《바로 그 사람 있는데로 가네.》

춘택이란 선창조직을 책임진 청년이였다.

권성근은 가볍게 기침을 하면서 집들이 배겨앉아있는 사이를 빠른 걸음으로 걸었다. 수풀에 가리워진 길이 침침하고 으슥했다. 한참 걸어내려가니 전기톱소리가 싸앙 울려왔다. 목재공장이 있는곳이였다.

권성근은 바로 목재공장마당으로 들어섰다. 외등이 듬성듬성 걸린 마당엔 통나무들이 여기저기 집채처럼 쌓이고 널판자낟가리도 쳐다보이는것이 여러개 가려져있었다. 마당가에 함석지붕을 인 작업장이 있다. 거기엔 촉광이 높은 전등이 걸려서 사람들이 백광속에서 웅성거리며 돌아갔다. 전기톱이 둘이나 놓여있는데 제재공들은 땀방울을 뚝뚝 떨구며 큰 통나무들을 아르릉대는 전기톱들에 들이밀군했다. 전기톱은 무서운 위력으로 통나무의 배를 쩍쩍 갈라냈다. 썰어논 나무가 절칵절칵 군드러져 떨어졌다. 한쪽에선 널판자가 떨어지고 다른 한쪽에선 각자목이 떨어져내렸다. 로동자들 한패는 그것을 마당으로 메내오고 마당에 있는 통나무를 메들여가고 했다.

권성근은 그이께 잠간 통나무낟가리뒤에 서있으라고 하더니 작업장으로 들어가 웬 로동자 한명을 데리고 나왔다. 그전에 가대기를 하던 청년이였다. 청년은 얼른 알아보더니 입을 쩍 벌리며 캡을 벗는다.

《동무, 일자리를 옮겼소?》

《네…》

그이께서는 땀이 질퍽한 청년의 손을 꽉 잡으시였다. 청년은 땀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에 미소를 띠였다. 이어 그 미소가 일그러지며 두눈을 슴벅슴벅하였다. 그는 꽁무니에서 수건을 뽑아 땀을 씻었다.

《이 선창가에 제1아지트가 있다는데 동무는 알고있소?》

《네, 내가 안내하지요.》

그는 앞서며 말했다. 권성근은 청년을 불러내다 세워놓고는 어느새 마당저편 버드나무밑에 나가 섰다. 그는 지게를 벗어놓고 곰방대에 담배를 담으며 사방을 경계하다가 청년에게 어서 가라고 손짓했다.

청년은 김성주동지의 앞에 서서 공장뒤쪽으로 빠져나와 어둑시근한 길을 한참 걸었다. 길옆으로는 버들숲이 우거지고 송화강 물비린내가 지척에서 날아왔다.

춘택이가 어머니를 데려오겠다고 새로 장만한 송화강가 오두막에는 지금 검거선풍의 시련을 겪는 청년들이 가득 모여들었다. 선창의 조직원들도 여럿이 왔다. 거기에 화전에서 련락을 온 청년도 끼여있다. 방금 출판물보따리, 등사기, 백로지퉁구리 같은것을 메내다놓고 앉아 땀을 씻기도 하고 담배를 피우기도 한다. 오늘밤부터는 여기서 삐라를 찍으려는것이였다.

모두 심각한 낯빛들이였다. 시련속에서 고통을 겪느라고 죄다 얼굴들이 훌쭉해졌다. 그래도 화전에서 온 청년만은 여기서 일을 겪지 않아서 그런지 얼굴이 불깃불깃하고 신색이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 집은 한간짜리 오두막인데 부엌이란 사람 둘이 들어서도 비비고 돌아가기 힘들만치 좁았다. 그래도 춘택이는 집을 사자 이어 가마, 물동이, 찬장을 할 석유상자, 지어는 사발들, 또아리 별걸 다 장만해들였다.

한생을 고생한 어머니가 누이동생을 데리고 고향땅에서 피눈물나는 고생을 하고있는데 이역땅에라도 모셔다 함께 살 생각을 하니 오두막이 대궐같은 생각도 들고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리기 위해선 별걸 다 장만해다놓고싶은것이였다.

춘택이는 좁은 부엌바닥에 앉아 벼겨를 아궁속에 밀어넣고 풍구를 다륵다륵 돌리였다. 동무들이 모여왔는데 랭돌이라고 그러는것이다. 그도 집을 사자 이어 조직에서 아지트로 쓰게 되여 신바람이 났다.

《종이를 썹시다. 아무래도 삐라를 뿌리는게 나을것 같소. 경고문이나 써붙여가지고는 시민군중이 다 볼수가 없소. 경고문도 놈들에게 압력을 가하긴 하겠지만 그래도 삐라를 뿌려서 시민전체가 각성해서 들고일어나 압력을 가하는것만은 못할것이요.》

차광수가 말했다. 딴 청년들도 그래야 할것 같다고 했다. 모두 달라붙어 종이퉁구리를 풀었다.

이러는데 김성주동지께서는 문을 두드리며 들어서시였다.

《아니…》

차광수가 먼저 부르짖으며 자리에서 불쑥 일어섰다. 모두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수고들합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청년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시였다.

《카륜으로 상준동무가 다시 떠나갔는데 만나질 못했소?》

차광수가 그이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상준동무가 어째서 떠나갔소?》

차광수는 길이 어긋난것 같아 아무 말도 안했다. 가슴이 후둑거리는것을 가까스로 눌렀다. 모두 자리를 정돈했다. 종이퉁구리도 도로 말아 구석에 돌려놓고 등사판도 시렁에 얹었다.

그이께서는 땀을 씻으며 자리에 앉아 차득보가 카륜에 갔다온 뒤의 정세를 물으시였다. 차광수가 마음을 눅잦히며 자세한 보고를 했다.

《그래 경무청에 들어가있는 동무들과 련계는 맺었소?》

《아직 못맺었지요.》

《이건 무얼 하려고 종이퉁구리를 갖다놓았소?》

《시민을 각성시키는 삐라를 찍으려고 그러오.》

《이런 투쟁을 첨 시작하오?》

《경고문을 더러 써붙였소.》

모두 긴장해서 그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한창 이야기를 하는데 오순희와 경주가 들어섰다. 얼굴이 창백해진 경주는 오순희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섰다. 오빠가 잡힌뒤 내내 오순희네 집에 누워서 앓다가 오늘 밤차로 출판물을 가지고 돈화로 내려가겠다고 아지트를 찾아나온것이였다. 경주는 그이의 얼굴을 뵙자 당장 눈에 눈물이 그렁해져서 얼굴을 수그렸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그런 경주와 악수도 못하시고 그저 가슴이 미여지는것 같아 공연히 머리를 쓸어넘기시였다.

《얘, 편안히 앉어.》

구석쪽으로 들어간 오순희는 경주더러 편안히 앉으라고 소곤거렸다. 모두 해파리같아진 경주를 쳐다보며 잡혀간 채경을 뼈저리게 생각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가슴이 아프시였다.

그이께서는 얼마후에야 아픈 가슴을 누르며 춘택이에게 어머니를 모셔오기 위해서 집을 샀느냐고 물으시였다. 부엌에서 풍구를 돌리던 춘택이는 얼른 일어서며 그래서 샀노라고 대답했다.

《그래, 어머니에게 편지는 냈소?》

《사자 이어 편지를 냈지요. 대궐같은 큰 집을 하나 샀으니 인젠 어머니도 들어와야 되겠다고…》

김성주동지께서는 큰소리로 웃으시였다. 어떻게 하든지 방안에 서린 긴장한 공기를 풀고 팽팽해진 시련의 고비를 좀 여유작작하게 넘기고싶어 춘택이에게 집 산 이야기를 묻기도 하셨는데 그가 또 우스개를 섞어 대답하니 고맙기도 하시였다.

《자, 편히들 앉소. 경주동무는 어디가 아프오?》

김성주동지께서는 경주를 쳐다보며 물으시였다.

《저의 집에서 좀 앓다가 나왔어요.》

경주는 고개를 숙이고 앉아 대답을 못하고 곁에 앉아있는 오순희가 대답을 했다.

《물론 오빠의 일때문에 타격이 되여 그러긴 하겠지만 너무 몸에 태가 가도록 고민을 해서는 안되오. 혁명을 하자면 이런 시련을 이겨내야 하오.》

《알고있어요.》

그제야 경주가 힘겨웁게 대답을 했다.

이러는 사이 차광수는 부엌에 있는 춘택이를 눈짓해가지고 밖으로 나왔다.

《송화강물우에 낡은 짐배들이 더로 있지요? 지금 쓰는 배 말고…》

차광수는 토방으로 나서며 춘택이에게 수군수군 물었다.

《그건 왜요? 낡은 짐배야 많지요. 인제 수리에 착수해야 할 짐배들이 십여척 물우에 떠있소.》

《그럼 그 짐배들을 좀 나가서 돌아봅시다. 배칸이 웬만하면 아지트를 그리로 옮겨야겠소.》

차광수는 숨이 찬 소리로 이야기했다.

《그게 위험하지 않겠소? 선창이란 복잡한곳이기도 한데 배칸에 있다가 습격을 받으면 어떻게 하겠소? 피신할곳도 없는데 물로 뛰여들겠소?》

춘택이 머리를 기웃거렸다.

《걱정 마오. 모두 그렇게 생각할수 있는곳에 아지트를 정하는게 더 안전할수 있다는것을 알아야 하오. 그놈들도 이런데 아지트가 있으리라고는 생각을 못할거요. 그리고 요새 선박수리소 주인놈이 장춘병원에 가서 입원해있다지요. 이런 형편에서 지금 수리소 사업을 모두 걷어안고있는 춘택동무가 선창조직을 잘 발동하여 경계조직까지 짜고든다면 여기보다 더 안전한곳은 없을거요.》

《듣고보니 그게 정말 옳소. 경계조직은 내가 책임지겠소.》

춘택이는 주먹을 불끈 쥐여보이며 입술을 꾹 다물었다.

《어느 배가 좋겠는지 찾아봅시다.》

하고 차광수는 춘택이와 함께 마당으로 걸어나왔다. 권성근이 마당가에 각자목을 깔고 앉아있었다. 아니 권성근이 말고도 숲길에 배군들이 여러명 와있었다. 권성근이 연통을 해서 불러운 사람들이였다.

《보란말이요. 우리가 조직을 안했어도 벌써 군중이 김성주동무의 호위를 위해서 이렇게 떨쳐나서지 않는가.》

차광수는 또 춘택이에게 수군거렸다. 그는 방금이라도 이 아지트로 놈들이 기여들면 각자목으로 후려치라고 배군들에게 일렀다.

《념려마오. 송화강이 가까와 송장처리하기도 제격이요.》

배군들이 대답했다.

그들은 급하게 송화강잔교로 걸어나와 물우에 떠있는 낡은 짐배들을 돌아보았다. 정말 선박수리소가 손을 대야 할 짐배들이 많았다. 차광수는 선실이 널직한 짐배가 없는가 해서 이 배 저 배 다 돌아다니며 보았다.

《좋소, 이 배로 합시다.》

차광수는 강가가 아니고 강가운데 좀 치우쳐 떠있는 배에 올라 선실을 돌아보고는 그 배로 하자고 했다.

《그런데 회장동무가 아지트를 강물우로 옮기는것을 좋겠다고 하겠는지 모르겠소.》

《그건 일없소. 우리가 우겨서라도 신변이 안전할곳으로 아지트를 옮겨야겠소.

이 선실로 아지트를 옮기고 김성주동무의 신변보위를 우리가 책임집시다.》

차광수는 선실바닥을 굴러쳐보기도 하고 사방 벽을 어루쓸어보기도 했다.

차광수가 배칸을 다 돌아보고 들어갔을 때 그이께서는 시급히 해야 할 일들을 놓고 한참 말씀하시였다. 각 지역 조직들의 사업을 한걸음 더 앞으로 내밀기 위하여 조직원들을 파견하는 문제, 그 다음 《국민부》영향하에 있던 《남만청총》산하 단체들에도 조직원을 파견하는 문제 그리고 잡혀들어간 동지들과 시급히 선을 맺고 안팎이 호응하여 투쟁을 전개하는 문제, 그 다음엔 또 일제에게 화살을 집중하는 방향에서 석방운동을 조직하는 문제… 이 문제들중에서도 그이께서는 첫째문제에 더 각별히 의의를 부여하며 말씀하셨다.

《놈들이 우리의 조직들을 파괴하려고 발광하고 또 일부 파괴도 되였지만 우리는 이것을 운동발전의 계기로 삼아야 하오. 때리면 숙어들것이 아니라 더 탄력을 가지고 뛰여올라야 하오.》

김성주동지께서 한창 말씀을 하시는데 별안간 누가 부엌문을 두드리며 불쑥 들어섰다. 목에 수건을 감은 가대기군이였다.

《조용하시오. 순경놈들이 지금 목재공장에 달려들어 공산주의청년들을 내놓라고 로동자들의 따귀를 치며 야단이요.》

가대기군은 숨이 찬 소리로 수군거렸다.

《그럼 불을 끄오.》

그이께서 말씀하시자 춘택이 얼른 일어서 전등을 껐다. 모두가 어둠속에 숨을 죽이고 앉아있다.

《그럼 난 나가보겠소.》

가대기군은 도로 문을 열고 나가며 말을 계속했다.

《저놈들이 만약 이리로 달려오는 눈치가 보이면 그게 누구냐고 소리를 칠테니까 모두들 뒤문으로 빠지시오. 뒤엔 버들숲이 우거져있어서 피신하기가 좋을것 같소.》

밖에 있는 권성근이와 배군들은 버쩍 긴장해서 모두 각자목들을 틀어쥐고 일어섰다. 어느놈이고 집쪽으로 오는놈만 있으면 각자목으로 짓모아줄 잡도리였다. 그리고 숨이 떨어지면 정말 송화강에 죽은 개 끌어내다 버리듯하자고 했다.

그런데 다행히 놈들은 목재공장쪽에서만 떠들어대며 사람들을 치다가 가버렸다. 망을 보던 배군들은 안도의 숨을 후 내쉬였다.

방안에서는 다시 불이 켜지고 회의가 계속되였다.

 

2

 

이튿날 새벽에 아지트를 송화강물우에 떠있는 큰 짐배속으로 옮기는 일이 벌어졌다. 청년들이 출판물보따리, 백로지퉁구리따위를 메고 모두 안개속으로 잔교를 밟아나아가 배에 올랐다. 미열이 있는 경주는 동무들이 부축해서 배의 갑판으로 이끌어올렸다.

배에 오르니 배우에도 안개가 진하게 덮여있다. 어둠과 안개속에서 한사람 두사람 답부리칸의 승강구로 떨어져 내려갔다. 배밑창 선실은 침침하고 습했다. 세간을 모두 들어내서 휑뎅그레한데 쥐가 찍찍거리며 쏘다녔다. 그래도 바닥엔 삿자리가 깔려있었다. 모두 짐짝들을 텅텅 내려놓으며 웅성거렸다. 경주는 눈앞이 휘우뚱 돌아 벽에 가 탁 부딪치였다. 방금 켜놓은 초불빛이 얼굴로 확 날아와 갈기는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얘 나 좀…》

경주는 얼른 오순희의 팔을 걷잡아쥐며 속삭였다.

《또 어지럼증이 오니?》

《그런것 같애.》

《그런데 돈화로 떠나겠다는건 뭐냐?》

오순희는 혀아래소리로 나무라며 경주를 부축해 끼고 잠간 벽에 가 기대섰다. 경주는 방금 춘택이네 집에서 돈화로 떠나가겠다고 하다가 김성주동지로부터 꾸중을 들었다. 그이께선 그런 몸으로는 돈화에 가서 공작할수도 없거니와 당장 돈화로 갈수조차 없다고 하시였다. 무슨 생각이신지 당분간 길림에서 치료를 하다가 교하로 가는게 좋겠다고 말씀하시였다.

맨뒤에 선실로 내려오신 그이께선 선실의 두간방을 돌아보고나서 말씀하시였다.

《물우에서 한바탕 싸움을 시작해봅시다.》

그이께서는 크게 웃으시였다. 차광수는 인제야 좀 마음이 놓이여 우스개소리로 아브로라의 포성을 준비해야겠다고 했다.

이날저녁 날이 어두워지자 선창 가대기군들이 큰 마대 둘을 갑판우에 메여다놓고 쏜살같이 사라졌다. 청년들이 마대 둘을 메고 답부리칸의 사닥다리로 신바람이 나서 내려왔다. 마대 하나엔 만투가 가득 들어있고 다른 하나엔 종이와 등사잉크, 담요따위들이 들어있었다. 선창조직이 기민하게 움직이며 뒤받침을 시작한것이였다.

배칸에선 일이 시작되였다. 각 지방조직들로 내려보낼 선전문과 호소문을 쓰고 시내에 붙일 경고문도 썼다. 한편으로는 삐라도 찍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독군을 너무 야박한 표현으로 치지 말고 그의 각성을 촉구하는 방향에서 치라고 말씀하셨다.

《아직까지는 독군이 일제와 야합되지 않았소. 봉천대도독인 장학량의 립장이 있느니만큼 길림독군이 일제의 품에 넘어가붙을순 없다고 보오. 그러기때문에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독군을 각성시켜야 하오. 지금 일제가 만주침공을 위해서 어떻게 발악하고있는가에 대하여 독군이 주목을 돌리도록 하게 하며 결국 우리와 맞서는것이 누구에게 리로운가, 일제에게 리롭다, 이걸 알도록 말이요.》

차광수가 쓴 경고문원고를 그이께서 직접 고쳐나가며 말씀하셨다. 차광수는 큰 붓에 먹을 흡씬 묻혀가지고 수정된 원고를 앞에 놓고 앉아 쭉쭉 써나갔다.

다른 한쪽칸에선 경주와 오순희가 등사를 밀었다. 경주는 어지럼증은 멎었으나 미열은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제 손버릇대로 이악스럽게 일을 해냈다.

《열이 있는데 그만두렴.》

《그까짓 열때문에 등사를 못밀겠니?》

오순희의 말을 이렇게 받으며 경주는 열심히 등사판의 굴대를 밀었다. 돈화로 안가게 됐으니 집에 들어가 누워있으라고 했는데도 그 소린 들은체 않고 배칸으로 따라나온 경주였다. 아마 돈화로 못갈바에는 여기서라도 제몸을 불사르는것 같은 일을 해야 되겠다고 결심한것 같았다. 오순희도 열심히 종이를 썰고 찍어낸 선전문을 묶어 종이에 싸군하였다. 그는 느닷없이 이 선전문이 신동호 있는데로도 날아가리란 생각을 했다. 참으로 사람의 생각이란 얄밉기도 했다. 이 엄혹한 정황속에서 찬바람같이 달아나버린 신동호의 생각이 떠오를줄이야! 그가 아직 고유수에 있는지? 고유수에선 이런 엄혹한 바람이 불어치지 않을가! 아, 시련의 고배를 안겨놓고 가긴 했으나 어느땐가는 그도 내가 그리워지리라고 믿는 사람, 부디 아무일없이 잘 싸워주었으면…

오순희는 속으로 부르짖었다. 그러다간 《아니 내가 이판에 앉아서 이건 무슨…》하고 놀래였다. 어찌보면 그가 속으로 겪는 고민도 지금 경주가 겪는 아픔만치나 컸다.

아지트를 배칸으로 옮긴 다음다음날 밤에 상준이가 돌아왔다. 그는 배칸에 들어서서 말도 못했다. 카륜에만 갔다온것 같지 않았다. 그이께서 어데 딴곳에라도 가셨는가 해서 여기저기 휘돌아치다가 돌아온것 같았다. 얼굴이 시꺼멓게 되고 눈이 우묵해졌다.

《인젠 맘을 놓소. 배칸이 도리여 카륜보다 나을것 같소.》

차광수가 옆구리를 찌르며 수군거리자 상준은 휘유하고 큰숨을 내쉬였다.

상준이까지 오고보니 배칸은 더욱 흥성거렸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배칸에 들어와서도 공청핵심들과의 협의회를 몇번 더 가지시였다. 엄혹한 정세에 맞게 조직원들의 공작위치를 시급히 바꾸어야 했다.

그이께서는 상준이를 길림에서 공작하게 하며 교하의 지도력량을 강화하기 위해서 차광수를 교하로 보내려는 계획을 특별히 세우시였다. 통보에 의하면 교하지방엔 왕청문과 내통하는 민족주의세력이 생겨나는것 같은데 수준이 낮은 강명수가 아름이 차서 숨가쁘게 뛴다는것이였다. 그래서 처음엔 경주가 건강이 회복되면 교하로 파견할가 하시였는데 아무리 생각해야 경주가 나아서 그리로 떠나가려면 어느 세월이 될지 알수가 없어 차광수를 그리로 보내려고 하시였다.

그리고 또 고유수에 있는 신동호를 불러다가 카륜으로 보내고 카륜과 고유수 중간지점에 있는 대암촌에도 조직원을 보낼 계획도 세우시였다. 대암촌은 이번 고유수에서 카륜으로 오시다가 하루밤 묵으면서 보시니 혁명화의 보습을 댈 필요가 있는 동네였다. 더구나 이 동네는 카륜과 고유수의 련락로를 여는 의미에서도 혁명화를 해야 했다. 그다음 그이께서는 또 《남만청총》산하의 동요가 일어난 단체들에 조직원을 파견하는 문제를 아울러 추진시키시였다.

밤이면 새로운 공작지로 떠나가는 공청원들이 호소문과 선전물보따리들을 지니고 답부리칸의 승강구로 올라왔다. 그들은 갑판우에서 김성주동지와 악수를 하고는 잔교로 내려가 짙은 물안개속으로 사라졌다.

차광수는 떠나기에 앞서 상준이를 보고 혁명전체의 힘으로 호위를 책임져야 할 일이니 그이의 신변보위에 특별히 주의를 돌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지금 배칸아지트가 아주 좋은것 같으니 선창가에 저놈들 눈이 미치지 않는가를 잘 살피며 조직원들의 아지트출입을 각별히 조심하도록 만들라고 했다.

그리고 차광수는 김성주동지와 작별할 때 비로소 왕청문의 한윤이, 조동식이들이 김성주동지를 찾아왔던 이야기를 하고 앞으로 그들이 접근해와도 접촉을 삼가하는것이 좋겠다고 권유했다.

《왕청문의 한윤이? 그들이 어떻게 되여 올라왔소?》

김성주동지께서는 놀라시였다.

《말로는 현묵관이들을 배척하고 새 운동선을 찾아서 올라왔다고 하는데 그건 아무래도 모를 말이요.》

《그래 그들이 지금 와있는데는 어데요?》

《그건 잘 모르겠소. 왕청문으로 도로 내려갔는지 여기 지금 있는지도 알수 없소. 어쨌든 찾아올수도 있으니까 절대로 만나지 마오.》

《하여간 그 문제는 근심 말고 어서 떠나가오.》

그이께서는 신중한 표정으로 굳은 악수를 나누시고 차광수를 떠나보내시였다.

차광수가 떠나간 뒤 김성주동지께서는 한윤이, 조동식이들 문제를 놓고 다시금 생각을 깊이하시였다. 차광수는 한윤이들의 속심을 모르겠으니 절대로 만나지 말라고 속단을 내리지만 김성주동지께서는 그렇게 보지 않으시였다. 한윤이들을 현묵관이들의 테로책동에까지 가담할 청년들로는 보지 않으시였고 틀림없이 그들의 테로사건이후 민족주의운동선에서 뒤걸음을 친 청년들이라고 보시였다. 그렇다면 한윤을 만나야 한다. 그를 손잡아야 한다. 한윤이뒤엔 아직도 광범한 남만지역의 청년조직들이 움직이고있다. 그 조직들을 바로잡아세우는데 한윤이이상 큰 역할을 할 청년이 없다. 바로 이렇게 차광수의 속단과는 달리 큰 구상을 가지고 한윤을 생각하시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어느날 밤 시내로 들어가 한윤이들이 들어있음직한 조선인 려인숙이나 려관들을 찾아가보려고 신사복우에 가을외투를 걸치고 갑판우로 올라오시였다. 그런데 갑판우의 선장실에 경주가 누워서 앓고있었다. 밑배칸에 있는줄 알았는데 어느새 여기로 올라왔는지 담요를 뒤집어 쓰고 누워 신음소리를 내였다. 아마도 배칸에선 신음소리를 내며 앓기가 조심스러워 피해올라왔는지도 모른다.

《경주동무!》

경주는 대답이 없었다. 몸을 와들와들 떨었다. 그이께서는 머리우의 담요를 약간 벗기고 이마를 짚어보시였다. 이마가 불덩이같이 뜨거웠다. 약도 구해들이고 여러가지로 돌보았지만 몸은 더욱더 상해갔다.

《순희야, 나 물…》

경주는 부르짖으며 열에 뜬 시뻘건 눈으로 주위를 빙빙 돌아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얼른 곁에 와 서계신 김성주동지를 띠여보았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정신을 가다듬으며 떨지 않으려고 애썼다.

《음, 여기 물그릇이 있군. 좀 마시오.》

그이께서는 오순희가 떠다놓고 간듯한 물그릇을 들고 말씀하시였다.

《아 아니, 괜찮아요.》

《한모금만 마시오.》

경주는 얼른 머리를 들었다. 그이께서 물그릇을 내밀어주시자 경주는 정말 그이의 말씀대로 꼭 한모금 마시고는 도로 불덩이같은 머리를 베개우에 놓았다.

《순희동무는 어데 갔소?》

《아마 또 약을 가지러 거리로 들어간것 같아요.》

《전날 가져온 해열제는 죄다 없어졌소?》

《네…》

《찬물찜질이라도 좀 하는게 어떻겠소?》

《아니 뭐… 인제 곧 열이 내릴거예요.》

그이께서는 잠간 서계시였다. 오빠에 대한 가슴 허비는 생각이 경주를 더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는것 같아 맘속에 무거운 그늘이 안겨드시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얼른 문을 열고 갑판우로 나서시였다. 그러고는 급히 선실로 도로 내려가시여 거기 있는 조직원 한사람을 데리고 올라오시였다.

《경주동무를 배칸에 두어선 안되겠소. 춘택동무네 집으로 옮기고 더운 구들에서 치료를 받게 해야겠소.》

《네…》

김성주동지께서는 그리고나서도 또 한참 갑판우에서 멈칫멈칫하며 신음소리가 들려나오는 선장실쪽을 바라보시였다. 그러다가 얼마후에야 갑판에서 내려 잔교로 걸어나가시였다.

그이께선 밤의 북대가를 나는듯이 걸으시였다. 아직 밤이 그렇게 깊지 않은 때라 큰거리엔 오고가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이께서는 될수록 붐비는 사람들속에 섞여 걸어가셨다.

마음이 몹시도 초조하시였다. 한윤을 만나볼 일도 급하였지만 방금 보신 경주의 정상이 눈앞에 자꾸 어린다. 약방에 가서 몇봉지 약이나 사다먹여가지고 저 병이 나을수 있는가. 지난해 대시위때의 심한 출혈, 이번 또 오빠를 잃은 슬픔, 지금 경주의 몸에 지워진 병을 가져올 근원의 짐은 너무도 크다. 안됐다. 인의병원에부터 먼저 들리자. 박승훈의사에게 부탁을 해서 경주의 병을 치료하게 해야 한다. 그이께서는 북대가거리와 우마항거리가 마주친곳에서 다시 골목길로 발길을 돌리시였다.

한참 걸어들어가시니 인의병원이 저쯤 앞에 보이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잠간 걸음을 천천히 하시며 이마에 내돋은 땀을 손수건으로 씻으시였다.

병원에 이르러 응접실문을 두드리시자 얼굴이 갸름한 간호부가 나왔다. 박선생이 계시냐고 물으시니 저쪽 응접실에 계신다고 하였다.

《여기가 응접실 아닙니까?》

《네, 여긴 진찰실이고 저 방이 응접실입니다.》

《아, 방을 바꾸셨군요. 선생님을 좀 만나게 해줄수 없겠습니까?》

《어데서 오셨는지요?》

간호부는 알듯한 얼굴이기도 한지 은근히 주의깊은 시선을 보내더니 대답도 듣지 않고 응접실로 달려갔다. 간호부가 응접실로 들어간지 얼마 아니하여 박승훈이 문을 열고 천천히 나섰다. 무엇때문엔지 안경은 쓰지 않았다. 눈언저리가 몹시 꺼져보였다. 그이께서는 박승훈의 앞으로 다가가시였다. 박승훈은 잠간 굳어서서 그이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선생님!》

《아, 이게 누구요? 어떻게 이처럼…》

박승훈은 인차 그이를 알아보았다.

《안녕하십니까?》

《안녕하구말구요. 이렇게 찾아와주니 고맙소.》

박승훈은 그이의 손을 잡고 다시한번 꺼진 눈을 들고 쳐다본다. 박승훈의 뒤에 서있던 간호부가 얼른 처치실쪽으로 피해간다. 아마 찾아온 청년이 누구라는것을 안것 같다.

《선생님, 영숙동무의 일때문에 얼마나 걱정하십니까?》

《고맙소. 걱정을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

《응접실에 좀 들어갈수 없겠습니까?》

박승훈이 창황중 응접실로 들어갈것도 잊은듯해서 그이께서 말씀하시였다.

《들어가야지요.》

박승훈은 그제야 김성주동지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응접실로 들어온 그는 김성주동지께 자리를 권하고나서는 경황없이 담배갑을 꺼내놓았다. 그이께서는 담배갑을 도로 박승훈의 앞에다 밀어놓으시였다.

《담배를 피지 못하던가요?》

《네, 못피웁니다. 그런데 저는 선생님께 부탁이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그이께서는 말씀을 길게 끌 시간이 없는지라 인차 찾아오시게 된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시였다.

《부탁이요?》

《네, 물론 요새 매우 초조하고 불안한 심정속에서 지내시리라는것은 알면서도 중요한 부탁을 말씀드리려고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영숙동무가 체포되였기때문에 오히려 더 선생님께서 다른 엄숙한 감정을 가지고 우리의 사업을 도와주리라는 기대도 가지고 왔습니다.》

《엄숙한 감정이요?》

그는 얼굴에 갑자기 어두운 그늘이 비끼는것 같다. 그러더니 이어 말을 이었다.

《물론 엄숙한 감정으로 되여야 옳겠지요. 그러나 그런 감정으로는 되여지지 않소. 물론 혁명하는 사람들이 감옥으로도 갈수 있고 단두대에도 오를수 있다는것은 나도 잘 알고있소. 그러나 자신이 그런 불행과 맞서고보니 내가 이때까지 상식으로 인식했던것과는 다르오. 회장동무도 잘 알겠지만 나는 그것 하나를 믿고 살아왔소. 그런데 그것이 저런 불행속에 있으니 내가 인제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야 하오? 회장동무는 저것이 살수 있다고 보오? 나는 어제도 경무청에 가서 그 애를 보았소. 그 참혹한 형상을 어떻게 눈뜨고 볼수가 있겠소? 그런데 그것이 살수 있다고 생각하오? 나는 파멸이요. 무서운 파멸이요.》

박승훈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씻었다. 손수건도 새까맣게 어지러워진것이였다.

《선생님, 제가 엄숙한 감정을 가져야 한다는 말의 의미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런 불행이 지금 왜 선생님 한사람에게만 있겠습니까? 지금 학생들이 영숙동무 하나만 잡혀갔습니까? 남학생은 그만두고라도 녀학생들만 해도 영숙동무 이외에 다른 영숙이가 또 얼마나 많이 잡혀갔습니까? 잡혀가지 않은 녀학생들은 지금 행복속에 살고있습니까? 선생님께서 그렇게 애쓰시며 부상을 치료해준 경주도 지금 선창가의 어느 집에서 고열로 신음하고있습니다. 이렇게 한 영숙이가 아니라 수백수천의 영숙이가 지금 감옥안에서 감옥밖에서 고통을 겪고있습니다. 이것이 무엇때문이겠습니까? 그저 젊은 기분과 혈기에 사로잡혀 이러겠습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그들의 가슴속에서 타고있는 그 불덩어리를 그들의 부모가 몰라준다면 누가 알아주어야 하겠습니까? 그들이 조선의 딸들이 아니라면 어째서 형틀에 매달리우거나 지어는 웃으면서 교수대로 나가겠습니까?》

《나두 그걸 아오. 인제도 말했지만 그걸 왜 모르겠소? 나라가 망하면 충신이 욕을 본다는 말도 있지만 민족이 불행해졌는데 개인이 왜 불행하지 않거나 민족이 도마우에 올랐는데 개인이 왜 도마우에 오르지 않겠소? 그러나 인간이란 역시 모든것을 리성만 가지고는 이겨낼수가 없는것 같소.》

《선생님, 리성을 가지고 이겨내야 합니다. 선생님같은분이 엄숙한 마음을 가지고 그것을 이겨내지 못한다면 누가 그것을 이겨내겠습니까? 수많은 조선의 어머니, 아버지들이 그걸 이겨내고있는데 선생님이 절망속에 빠져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저도 선생님을 그렇게 믿지 않았기때문에 사실상 중요한 부탁을 드리려고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인제 그이상 말을 말아주오. 나도 내 심정의 모순을 알고있기때문에 이렇게 괴로와하는것이요.》

《선생님의 괴로움을 리해합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어떤 괴로움이 있어도 내 자식을 당당히 진리의 길에 들어서게 고무하는 립장에 서야 합니다. 그런 립장에 선다면 그런 괴로움이 생겨날수도 없는것입니다. 저는 선생님께 진심으로 권합니다. 팔을 펴고 애국적인 립장에 서서 딸을 생각하고 나라를 생각해주기 바랍니다. 만약 선생님께서 지금과 같은 립장으로 나가신다면 앞으로는 더 큰 괴로움을 안고 오늘을 아프게 회억할 날이 있을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또 겸해서 말씀드릴것은 지금 일어난 이 사건에 대한 옳은 인식을 가져달라는것입니다. 이 사건이 우리 운동에 그 어떤 치명적인것을 가져다주리라고 믿어서도 안되며 또 모든 개인의 운명에 비극을 가져오리라고 믿어서도 안됩니다. 절대로 그렇게는 안될것이며 오히려 이 사건은 우리 운동과 매 개인을 지난해 시위투쟁이 단련시켜낸것과 같이 더 강철로 단련시켜낼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기때문에 류치장안에서나 류치장밖에서 더 억세게 싸우고있는것입니다.》

박승훈은 잠자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유리창앞으로 다가가 한참 어두운 밖을 내다보며 담배연기를 뿜었다. 그러더니 다시 자리로 돌아와서는 반도 안탄 담배불을 분질러 껐다.

《그럼 갑시다. 경주도 내 딸입니다. 중요한 청탁이란것이 그 애를 살려달라는 말이겠지요?》

《그렇습니다. 선생님, 그럼 제가 뒤거리에 갔다올 일이 있어서 좀 다녀올테니까 기다려주십시오. 저와 함께 가야 됩니다.》

《그렇게 하겠소. 내가 꼭 가보겠소. 그것이 고열로 신음하고있다니 가슴이 미여지는것 같소.》

김성주동지께서는 얼른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시였다. 박승훈은 홧홧 단 손으로 담배갑을 끌어다가 또 한대 붙여물었다. 고통스럽던 마음이 어떻게 이처럼 씻은듯 잦아들고 가슴 한복판에서 쾅쾅 큰 물멀기가 치는지 알수 없었다.

그렇다. 내 영숙이 하나를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허구 많은 영숙이들을 생각하고 그 영숙이들이 가슴에 붙안고 나가는 그 결곡한 뜻과 불붙는 사상을 생각해주어야 한다. 나라를 찾으려는 그 높디높은 정신, 그 사상을 내 사상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나도 조선의 아버지이고 진짜로 내 영숙이의 아버지가 아니겠는가.

박승훈은 방금전 자기의 응접실에 무슨 광채가 비꼈던것 같은 착각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나 왔다갔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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