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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불멸의 력사》 3 장편소설
천 세 봉
( 제 7 회 )
3
회의는 자정이 넘어서 필했다. 농민들이 웅성거리며 벌판으로 흩어져갔다. 패싸움을 깨고 농민조직을 큰덩어리로 만든 군중은 하늘에나 오를것 같은 기세였다. 경상도패가 더 와짝 들고으며 흩어졌다. 회의를 필한 김성주동지께서는 리병모를 비롯한 공청원들을 모여앉혀놓고 한참동안 군중을 지도하는 사람들은 군중의 심리를 파악해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혁명을 지도하는 사람들이 군중의 심리를 파악해쥐지 못한다면 무엇이 되겠소? 덮어놓고 남도사람들이 혁명에 애를 먹인다 이렇게만 보는데 페단이 있었소. 그들이 어째서 애를 먹이는가. 그들의 심리속에 무엇이 있는가. 그들이 혁명을 나쁘게 본다면 어떤 점을 나쁘게 보는가. 또 다 나쁘게 보는가. 어느 한부분만 나쁘게 보는가, 이걸 모르고 앉아서 덮어놓고 혁명에 애를 먹인다. 그렇게만 보는것이야 어데 우리의 지도작풍이라고 말할수 있소? 여기에 문제가 있었소. 군중속에 들어가 혼연일체가 되지 못했기때문에 혁명이 잘 안되는데 어째서 잘 안되는가 진단도 내릴수 없고 진단을 못내리니까 처방도 뗄수 없었소. 결국 혁명이란 대중의 의식화와 조직화요. 그것을 떠나서는 혁명이 존재하지 못하오. 동무들이 이 점에서 교훈을 찾아야 하오.》 백번 지당한 말씀이였다. 이런 의미의 말씀은 이번만 듣는것이 아니고 벌써 여러번 뼈에 배기도록 듣는 말씀이다. 그런데 실천도상에선 늘 원칙이 아닌 곬으로 달아난다. 이게 무엇때문인가? 리병모는 자기 작풍에 대해서 심각히 뉘우쳤다. 사실 리병모는 성격이 단기고 고집이 세여서 《요지부동》이란 별명을 듣는 청년이였다. 길림의 대시위때 시민들속에 베두루마기에 통영갓 쓰고 나온 령감들을 공연히 따로 골라 내세우고 시위행진에 못참가한다고 우겨서 하남가쪽 대렬이 전체 멈춰서서 반나절동안이나 말썽을 일으킨 일이 있다. 그래서 《요지부동》이란 별명도 생겼는데 이런 성격적인 약점이 아직 고쳐지지 않아서 오벽근이와의 관계가 이렇게 되였던것 같다. 리병모가 한창 말씀을 듣고있는데 밖에서 흩어져가던 농민들이 도로 밀려들어오며 뭐라고 요란스럽게 떠들어올렸다. 리병모가 문을 열고 내다보니 경상도사람들 한패가 웬 낯선 사람 한명을 앞세우고 들어오며 그렇게 끓어댔다. 《왜들 그렇게 끓소?》 리병모가 토방으로 나서며 물었다. 《이 사람 조사 좀 해보이소. 까마귀가 틀림없심더…》 경상도농민들이 대꾸하며 또 왁작 떠든다. 그들이 까마귀라고 하는것은 일제의 밀정을 말하는것이였다. 그런데 다부산자를 입고 불빛앞으로 다가오는 사람은 까마귀가 아니라 길림의 차득보였다. 《아니 차득보동무가 어떻게 돼서 이 밤에 왔소?》 리병모가 놀래서 뛰여내려가며 물었다. 《내가 무슨 동무요?》 차득보는 언짢게 흘겨보며 대꾸했다. 《허허허, 걸려서 졸경을 단단히 받은 모양이군. 어서 들어갑시다.》 리병모는 차득보의 잔등을 밀었다. 다부산자잔등이 땀에 떴다. 《여보, 밤낮 카륜이 제일이라고 뽐내더니 그래 대중교양을 이렇게 했소? 사람을 보면 몰라서 나를 까마귀라고? 까마귀는 내가 아니라 저 농민들이 까마귀같소. 하나도 알아듣지 못할 갈가마귀소리를 지껄여대며…》 차득보는 떡 버티고 서서 농민들한테 눈총을 보내며 꾸짖었다. 《일이 잘못됐십니더. 용서허이소. 그렇지만 우리도 의심하게 됐십니더. 지금 기차가 없십니더. 기차로 왔다카는데 어느 기차타고 왔능기오? 그 대답 몬하니까 까마귀로 의심 안받게 됐능기오? 대단히 미안합니더. 어서 들어가이소.》 한 농민이 차득보에게로 다가와 그도 잔등을 떠밀었다. 그러나 차득보는 밀리지 않고 불빛이 번뜩거리는 눈으로 여전히 농민을 흘겨보았다. 공청원들이 모두 달려나왔다. 김성주동지께서도 토방으로 나서시였다. 그제야 차득보는 일일이 돌아가며 악수를 하였다. 《어떻게 돼서 이렇게 왔소? 무슨 급한 일이 있소?》 《온 용무는 이제 말하겠소.》 그이의 물음에 차득보는 간단히 대답했다. 《잘못했드면 제편사람 묶을번 안했능기오.》 《묶길 어떻게 묶능기오? 힘이 장사인데… 계룡산이도 주먹으로 내지르니까 게걸음 안치던기오.》 계룡산이란 오벽근을 말하는것이였다. 《좌우간 신난다. 오늘밤 정말 까마귀라도 한눔 걸렸이문 좋겠다.》 농민들은 이런 소리를 주고받으며 마당앞으로들 걸어나갔다. 그들은 조직을 무어놓으니 팔다리에 힘이 올라 근질거리는 기분들이였다. 방안으로 들어온 차득보는 다부산자를 벗고 로동복웃저고리도 벗었다. 그리고는 얼굴과 목덜미를 한참 문댔다. 키는 작지만 로동에 다지운 다부진 몸집이 어떤 호랑이가 달려들어도 때려잡을수 있을것 같았다. 그는 기관차화부로 일하는 로동청년이지만 조선사람으로 알려지면 걸릴것 같아 중국옷으로 변장하고 왔다. 사실 그는 길림에서 일어난 사태를 김성주동지께 보고도 하고 김성주동지의 신변보위를 위해서 카륜에 그냥 남아있기로 작정하고 달려왔다. 그래서 인젠 기관차화부고 뭐고 다 집어던지고 아예 직업적인 혁명가로 나설 결심도 했다. 조직에선 지금 김성주동지를 절대로 길림으로는 들어올수 없다고 문제를 세웠다. 그래서 운동의 지도를 카륜에서 하시게 하며 그이의 신변보위를 위해서 주먹힘 드센 차득보에게 권총까지 채워서 보냈다. 그런데 차득보는 길림을 떠날 때 웬 께름한놈이 미행하는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카륜을 두정거장 못미친 역에서 기차를 내려 거의 5십여리길을 도보로 달려왔다. 그러니 경상도사람들이 기차로 왔다는 말을 곧이 들으려고 하지 않을수밖엔 없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벌써 차득보의 기색을 보시며 길림에 그 무슨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다는것을 감촉하시였다. 차득보는 침묵을 지키며 한참 앉아서 땀만 씻었다. 급하게 걸어서 속샤쯔까지 죄다 젖었다. 리병모가 차득보에게 신문지를 밀어내놓으며 부치라고 했다. 차득보는 그걸 들어다가 벌거덕벌거덕 소리를 내며 부쳤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리병모들과 하던 이야기를 계속하시였다. 얼마후에야 그이께서는 차득보와 함께 밖으로 나오시였다. 그이께서 숙식하시는 집은 학교에서 퍼그나 떨어진곳에 있었다. 차득보는 그이를 따라 무개하 강기슭을 걸어가며 그제야 길림사태에 대한 보고를 했다. 차득보가 말을 꺼내자 그이께선 얼른 걸음을 멈추시며 차득보를 돌아보시였다. 눈에서 번개가 번쩍 이는것 같았다. 그바람에 차득보는 말을 더 꺼내지 못했다. 《걸으면서 이야기를 합시다. 또 그다음엔 어느 학교 학생들이 잡혔소?》 그이께서 먼저 발을 옮기며 말씀하시였다. 음성이 푹 가라앉은것으로 들리여 차득보는 대답을 하기가 괴로왔다. 《각 학교에서 학생들이 수십명씩 다 잡혀들어갔소. 잡히지 않은 학교가 없소. <인의병원>집 딸 영숙동무를 비롯해서 녀자사범이나 녀중에서도 여러명 잡혔소. 채경동무까지 잡혀들어가고보니…》 《채경동무가?》 그이께서는 흠칠 놀라시였다. 《그렇소. 우리가 감옥이나 단두대를 각오는 했지만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야…》 차득보의 부르짖음은 목이 멘 소리였다. 그다음엔 그이께서도 말씀이 없으시였다. 천근같이 무거워진 발을 옮기는것 같았다. 뒤를 따르는 차득보는 은근히 다부산자앞자락을 틀어잡으며 괴로움을 이겨내느라고 애를 썼다. 길 량옆엔 버들숲이 질펀히 퍼져나갔다. 안개가 버들숲에 흥건히 잠기였다. 마치 대지가 뿜어올린 입김이 서리서리 엉킨것 같은 속에서 늦가을벌레가 씨르륵씨르륵 가느다란 소리를 내였다. 그밖엔 아무 소리도 없고 모든것이 둔중한 기운에 짓눌려있다. 조양촌, 동산리쪽도 안개속에 들어 뿌연데 무개하의 강물줄기가 그저 훤히 틔여있을따름이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어디가 강이고 어디가 들인지 가늠하실 경황도 없으신듯 무개하기슭의 억새 설레이는 어둠속을 자꾸 걸어나가시였다. 안개는 점점 더 짙어졌다. 저쪽 버들숲도, 버들숲너머 광막한 들판도 자욱한 안개에 잠겼다. 바람은 없는데 풋솜같은것이 풀밭우로, 언덕우로, 길바닥으로 소곤소곤 자장가를 부르며 움직여간다. 넓은 늪가엔 안개가 더욱 진했다. 물빛도 보이지 않는다. 어떤 땐 묵중히 서서 자고있는 백양나무들을 꼭대기가지만 그려놓은것 같이 남겨놓고는 밑둥을 둥글둥글 말면서 지나가기도 한다. 모든것이 물기에 젖었다. 하늘의 별빛도 물기에 젖어 끔벅인다. 그 물기로 하여 우주가 갑절은 무거워진것 같다. 그이께서는 천천히 안개속을 걸으시며 생각을 좇고계시였다. 길림사태! 채경의 체포! 충격이 크시였다. 역시 일제놈들과 반동군벌놈들은 검질기게 꼬리를 밟아온것이 틀림없다. 그걸 예상은 하면서도 좀더 일찍 이에 대처해내지 못한것이 분한 일이였다. 따져보면 일제의 급박한 발악이 무엇을 선참으로 노릴것인가를 짐작도 했었고 또 그 발악이 그저 혁명의 역풍이 타격을 가해오는것과 같은 항다반으로 있는 그런 사태와 다르다는것도 짐작을 했었다. 그 항다반으로 있는 반혁명이 혁명에 타격을 가해오는것은 말하자면 혁명이 늘 경계해야 할 상시적인 싸움이랄수 있지만 길림사태는 이 상시적인 싸움이 빚어내는 사태는 아니다. 전혀 다른 성질이 깃들어있는 사태이다. 바로 그 상시적인 대립이 그 어떤 정치적이며 략탈적인 첨예한 계기에 이르러 깜빠니야적이며 광적인 소동으로 혁명의 모든 전선에 검은 구름을 뒤덮고 살인기구를 휘두르고 화약내와 철화를 예감케 하는 온갖 광기를 다 부리는 혁명의 역풍이 절정에 오른 비상사태이다. 일제는 지금 세계를 휩쓰는 경제공황의 더운 가마속에 말려들어가있다. 뒤늦게 말려들긴 했지만 일제가 이 더운 가마속에서 겪는 진통은 심각한 진통임에 틀림없다. 일제의 자본발달이란 략탈로 이루어진것이며 단 한번도 경제공황과 같은 더운 가마를 겪어본 일이 없는 자본발달이다. 그러기때문에 그것을 겪는 진통이란 꼭 초산의 진통을 방불케 해서 군국주의기반의 배창이 찢기며 온 관절이 물러나서 비명을 올리는것과 같은 그런 심각한것이다. 이렇게 되니 일제는 하루속히 이 더운 가마에서 벗어나려고 발광하지 않을수 없다. 그런데 놈들은 이것을 어떻게 벗어나려 하고있는가? 그 하나는 자국내의 피압박대중의 붉은 잔등에 채찍을 더욱 후려치고 다른 하나는 저들의 식민지인 조선의 무산대중을 희생시켜 피와 기름을 짜내는것으로 그것에서 벗어나려고 시도한다. 그 표현이 바로 조선에 있어서는 산업합리화니 토지개량이니 산미증식이니 하는 조선민중을 위하는것 같은 정책적너울을 쓰고 나타난것이다. 허나 이것만 가지고는 안되는것이다. 놈들은 또 새로운 식민지를 손아귀에 거머쥐는 방법으로 이것을 벗어나려고 한다. 말하자면 또 다른 새로운 조선을 정복하기 위해서 출진하려는 태세를 갖추라고 온 군력에 명령을 내리고있다. 놈들의 목표는 우선 만주다. 만주를 타고앉아야 걸음걸음 내디디며 전아시아를 손아귀에 거머쥘수 있다. 이래서 놈들의 피가 선 모든 독기는 만주에 뻗쳐있다. 바로 이 강도적야망을 실현하는 길에서 장애로 된다고 화살을 돌려댄것이 길림사태이다. 이게 현상의 본질이다. 때문에 우리는 길림사건을 반혁명이 혁명을 상시적으로 탄압하는 그러한 사건과 같이 리해할수는 절대로 없다. 이것은 놈들이 만주의 심장부에 칼을 박고 아시아의 전토우에 피묻은 발을 인찍으려는 첫 신호의 악독한 총성이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늪을 지나 버들방천을 멀리 걸어나가시였다. 안개가 짙어 아까는 듬성듬성 보이던 백양나무들도 인젠 젖빛같은 뿌연 연무속에 아주 파묻혀버렸다. 그이의 옷이 축축히 젖어들기 시작하였다. 옷뿐만아니라 얼굴도 안개로 하여 축축히 젖었다. 그러나 그이께서는 자꾸 걸으시였다. 먼 벌끝, 안개가 가리운 계선에서 이물이물 밝아오는 서광을 바라보시며 자꾸 걸어나가신다. 그이께서는 또 생각을 더듬으시였다. 사태가 이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러한 사태를 우리의 승리로 역전시킬수 있는가? 역전시킬수 있다. 역전시킬수 있고말고… 좋은것은 오늘 조선의 혁명력량이 가지고있는 새로운 특징이다. 그것은 그 운동이 의식했든 의식하지 못했든 자기앞에 반혁명의 철화와 화약내가 육박해오고있다는것을 스스로 예감하며 일어서는것 같은 투쟁! 인젠 죽느냐 사느냐 하는 판가리싸움이 있을뿐이라는것을 느끼기때문에 온 운동의 형태가 종전의것과는 다른 폭력적인 진출로 나가는 투쟁! 바로 그게 힘을 주는 특징이 아닌가! 무엇인가 새로운 비약을 지향하는 이 새로운 기운… 이것은 귀중한것이다. 우리가 이것을 능동적으로 조종하고 거기에 힘을 주고 거기에 맞는 전략전술을 세우고 새로운 결정적공세를 조직하지 못한다면 그 무슨 조선혁명의 운전대를 틀어쥔 새 청년공산주의자라 하겠는가! 이것은 공산주의운동자체의 요구로 볼 때에도 기성 공산주의운동의 소부르죠아적인 터전을 갈아엎은 새로운 세대의 대렬이 믿음직하게 이루어진 조건하에서 운동이 새로운 단계에로 비약하려는 지향과도 부합된다. 그럼 우리가 당장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역시 첫째도 둘째도 조성된 새로운 전국을 주동적으로 틀어쥐고나가며 조선혁명을 승리에로 이끌어갈 방침을 세우는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반혁명의 공세에 대처해서 혁명력량을 튼튼히 보존하며 새로운 전국에 상응하게 핵심대렬을 늘이며 군중지반을 축성해야 한다. 다른 길은 없다. 그이께서는 몸이 달아오르고 가슴이 벅차오르는것을 느끼시였다. 아득한 지평선의 안개우로는 려명이 점점 더 밝아왔다. 그이의 얼굴도 점점 더 환한 빛을 뿌리였다. 《득보동무!》 김성주동지께서는 곁에서 걷는 차득보를 부르시였다. 《왜 그러오?》 《지금 차광수동무나 상준동무들은 어떻게 하고있소?》 《조직원들을 한명이라도 더 잡히지 않게 하려고 뛰고있소. 순경놈들이 학교에도 달려들고 집에도 달려드는 바람에 숱한 조직원들이 갈팡질팡하고있는데 그들을 예수교회당에다도 피신시키고 절간에다도 피신시키고, 그런 사업을 조직하며 뛰고있소.》 《알겠소. 그런데 득보동무, 동무는 오늘로 당장 돌아가오. 가서 거기 일을 도와주어야겠소.》 《난 여기 있을 작정을 하고 왔소.》 《동무가 여기서 뭘 한단말이요?》 《솔직히 말하면 김성주동무의 신변보위를 책임지고 왔소.》 《뭐 신변보위? 내가 지금 무슨 위험에 처하기라도 했소. 그런 말은 다시는 하지 마오. 그리고 길림조직이 피해를 받고있는데, 채경동무를 비롯한 숱한 동무들이 감옥에 들어가있는데 난 여기 앉아서 그걸 관망하고있으란 말이요? 나도 여기 사업을 정돈해놓구는 이어 길림으로 돌아가겠소.》 《길림은 위험하우. 지금 김성주동무가 하숙하고있던 집은 놈들의 포위속에 들었소.》 《길림에 있을곳이 그 집 한집뿐이겠소. 일체 그런 걱정은 말고 오늘로 돌아가오. 이런 정황에서 피동에 빠져서는 혁명을 망치오. 오늘로 가서 차광수동무에게 전하오. 우선 한시바삐 경무청으로 들어간 동무들과도 선을 맺고 안팎이 움직이도록 만들며 동지들의 피신조직도 더 빈틈없이 하며 기관구조직, 선창조직을 지켜낼 대책도 든든히 세우라고 하오… 안됐소. 나도 곧 돌아가겠소.》 그이의 말씀은 너무도 확고부동한것이였다. 차득보는 더 이상 카륜에 있겠다는 말을 못했다. 벌써 안개우로는 태양이 솟아올랐다. 자욱한 안개가 분홍빛으로 물들며 설레기 시작했다. 분홍빛 바다가 춤을 추며 가닥가닥 흩어져 이리 날고 저리 난다. 태양의 빛발이 그 사이사이를 뚫고 서서히 땅을 적셔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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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득보는 변장을 더욱 그럴듯이 하기 위해서 중국 꼭다리모자를 하나 얻어쓰고 캡은 벗어서 다부산자 안주머니속에 찔러넣었다. 차득보는 조직의 지시를 관철해내지 못하고 다시 길림으로 돌아오는 떳떳치 못한 생각은 있지만 어쩐지 기차가 달리는 이 광야처럼 앞이 탁 틔였다. 그는 역시 김성주동지의 말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 복잡한 사태가 벌어진곳에 들어가앉아 운동을 틀어쥐고나가야 온 조직을 위험에서 건질수 있지 않겠는가. 어쨌든 좋았다. 김성주동무가 혁명의 중심에 튼튼히 서있다는 생각이 더욱 가슴을 친다. 그가 아니면 누가 이 복잡한 시대의 한복판으로 혁명의 대군단을 이끌고나가며 계속 앞으로라는 힘있는 구호를 웨쳐줄수 있겠는가? 차득보는 차창밖을 내다보며 깊은 생각을 좇기도 하고 공연히 자기앞에 마주 앉아있는 아낙네의 두어살난 어린애의 턱을 손가락끝으로 건드리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그는 자기 입에서 무슨 조선말이라도 튕겨져나올가봐 어마지두 놀라며 손길을 멈추었다. 차득보가 어린애를 건드린 반연으로인지 정말 아이어머니는 여기서 길림까지 몇정거장이나 되느냐고 조선말로 물었다. 차득보는 얼굴이 붉어져 얼른 《부지도 부지도》하고 손을 내저었다. 모른다는 말이였다. (용서하십시오. 이게 다 원쑤들때문에 이러질 않습니까!) 차득보는 속으로 사과를 하며 다시 차창밖을 내다보았다. 그는 해가 뉘엿뉘엿 지는 때에 길림역에서 기차를 내리였다. 오늘도 여전히 정거장엔 경무청 순경들이 득시글거렸다. 승객이 다 밀린 출구쪽에선 순경 두놈이 남학생 한명과 녀학생 한명을 사람들속에서 이끌어내세우고 무어라고 심문을 하고있다. 순경 한놈은 녀학생더러 트렁크를 열라고 을러메고있다. 《어서 열어봐요.》 녀학생은 트렁크의 열대를 내던져주었다. 순경은 눈에 독이 올라서 흘겨보며 땅에 떨어진 열대를 집었다. 놈은 트렁크열대가 잘 말을 듣지 않아 소잡듯해서 자물쇠를 열었다. 트렁크속엔 온통 책이였다. 놈은 트렁크를 아주 뚱구쳐 쏟아놓고 사회주의도서라도 있는가 해서 한책한책 내용을 훑어본다. 거기에 웬 안경쟁이도 한명 와서 여겨보고있다. 이것은 분명 일제의 밀정이다. 차득보는 얼른 출구를 빠져 정거장뜰로 나섰다. 인력거군, 마차군이 와글와글 끓었다. 지게군들도 끓어댄다. 그저 한푼이라도 더 벌어보겠다고 악악 악을 쓴다. 여기에도 행색이 수상한놈들이 널렸다. 요새 일제의 밀정들은 길림에 쫙 널렸다. 이 도시에선 학생공산주의자가 장애로 된다. 일본의 실력진출에 장애가 되는것, 이것을 색출해서 뿌리를 뽑아야 한다. 음험하고 로회한 방법으로! 간교한 술책으로! 잔악한 폭력으로! 무슨 방법이든지 좋다. 그 뿌리, 뿌리를 뽑아야 한다. 그래야 만주를 한칼에 베일수 있다. 이래서 뿌려던진것이 사람들속에서 《뱀눈》이라고 불리운 일제의 밀정들이다. 차득보는 시내로 들어와 희춘리쪽으로 들어가려고 우마항거리를 넘어섰다. 이미 해가 떨어지고 사방이 어실어실 어두워졌다. 가로등이 눈을 떴다. 그래도 어두워진것이 한결 나았다. 《거기 가있기로 했는데 왜 돌아왔어요? 희춘리쪽으로는 가지 마세요. 제3아지트로 오세요.》 웬 녀자가 지나가는척하며 재빨리 속삭인다. 얼른 쳐다보니 중국녀복을 입은 녀자이다. 차득보는 잠간 걸음을 멈추고 벌써 저쯤 걸어가는 녀자를 지켜보았다. 그는 차득보가 따라오기를 기다리는듯 걸음을 한결 천천히 하면서 오순희네 집쪽으로 올라갔다. 차득보는 어째 좀 얼떨떨해졌다. 고쳐 생각해보니 방금 지나간 녀자가 오순희였던것도 같고 오순희가 아니였던것도 같다. 꼭 무슨 속임수에 빠져 놈들의 그물에라도 걸려들지 않는가싶었다. 그는 잠간 머밀머밀하면서 따라가지를 않았다. 그러는데 언덕받이에서 호추알같은 소리가 날아왔다. 오순희의 중국말소리였다. 《오빠, 어서 오세요. 아버지가 찾구 계셔요.》 그제야 차득보는 정신이 버쩍 들어 걸음을 재우쳤다. 역시 오순희는 지혜가 빠른 녀자였다. 혁명의 새매라고들 하는데 그 말이 우연치 않은것 같았다. 그는 삼엄한 거리를 꼭 새매와도 같이 날래게 빠져다녔다. 《득보동무, 어떻게 된 일이예요? 동무는 카륜에 가있게 돼있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돌아왔어요?》 차득보가 언덕길에 올라서자 오순희는 소곤소곤 물었다. 《일이 그렇게 됐소.》 《그래 김성주동지는 만나보았어요?》 《만나보았소.》 둘이는 바삐 비탈길을 걸어올라갔다. 검거선풍이 일어나게 되자 아지트는 인차 제1아지트 제2아지트 제3아지트 이런 식으로 류동아지트를 정했다. 둘이는 바로 그런 류동아지트로 가는것이였다. 오순희는 차득보를 데리고 자기네 집 뒤쪽으로 돌았다. 한참 돌아가면 거기엔 큰 느티나무밑에 그전에 머슴이 살던 행랑채가 하나 있었다. 바로 신동호도 여기 들어서 치료를 한 일이 있는 두칸짜리 마가리인데 지금은 오순희네가 고간으로 쓰고있었다. 독군서가 얼마 머지 않은곳에 있긴 했지만 아지트로는 좋은곳이였다. 차득보가 방안으로 들어가니 청년들이 십여명 모여있는데 차광수도 있었다. 오늘밤 여기선 정말 성밖에 있는 절간이 조직원들의 은신처라는것이 들짱나서 어제밤 순경놈들의 습격을 받았는데 그 일때문에 수군수군 끓었다. 요행 잡히기는 한명뿐이고 그밖엔 다 몸을 피했다. 청년들은 시내에 있는 예수교회당도 습격을 받을수 있으니 오늘밤 거기 있는 조직원들을 빨리 딴 은신처로 이동시켜야겠다고 떠들었다. 이러는데 차득보가 들어섰다. 《아니 동무가 왜 돌아왔소? 거기서 호위를 책임지고있으라고 했는데…》 차광수는 벌써 성이 오른 엄한 눈으로 쏘아보며 물었다. 《김성주동무도 인차 길림으로 돌아오겠다고 하오. 길림조직들이 다 파괴당하는데 카륜에 앉아서 무슨 혁명을 지도하겠느냐고 하면서…》 《아니 뭐요? 동무를 어째서 카륜으로 보냈소? 김성주동무가 거기 눌러앉아서 지시만 하게 하자고 동무를 보낸게 아니요?》 차광수는 성이 올라 부르쥔 주먹으로 책상을 두드렸다. 책상우에 놓여있던 물사발이 출렁거리며 물이 다 쏟아졌다. 밸이 센 차득보이지만 마주 대들질 못했다. 《길림으로 어떻게 들어온단말이요? 저놈들이 오늘은 김성주동무를 내놓으라고 육문중학교 교장선생네 집을 비롯해서 숱한 집에 달려들어서 야료를 하며 뒤졌소. 이런데 길림으로 들어온단말이요? 왜 동무는 그렇게 얼떨떨하오? 조직이 동무더러 그렇게 하라고 카륜으로 보냈소?》 차광수는 격노해서 볼이 다 푸들거렸다. 그는 속으로 자기가 고유수에서 괜히 길림으로 올라왔다고 후회했다. 김성주동무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카륜으로 함께 갔더면 이런 일이 없었을게라고 생각했다. 《다투지 마오. 내가 다시 카륜으로 가야겠소.》 말 한마디 없이 묵중하게 앉아있던 리상준이가 말했다. 《가오. 상준동무가 가서 길림형편을 자세히 이야기하고 절대로 길림으로는 못들어온다고 단단히 이르시오. 김성주동무를 혁명가 한사람으로만 보아선 안되오. 우리 혁명의 전체요. 전체를 보위하는 투쟁으로 생각하고 싸워야 하오. 가지고 갔던 권총은 어쨌소?》 차득보는 품속에서 권총을 꺼내 책상우에 놓았다. 《장탄이 된채로 있소?》 《그렇소.》 차득보는 눈구석에 눈물이 질끔거리기도 했다. 상준이는 얼른 책상우에 있는 권총을 들어다가 품속에 간수했다. 얼마후에야 차득보는 카륜에서 받은 지시를 전달했다. 차광수는 두눈을 부릅뜨고 앉아서 피동에 빠지지 말고 능동적으로 앞질러나가며 투쟁을 조직하라는 말을 신중히 들었다. 《바로 그렇게 카륜에 앉아 지시만 떨궈주면 된단말이요. 알겠소.》 차광수는 인제야 속이 좀 누글누글해오는지 얼굴이 부드러워져서 말했다. 청년들의 얼굴에선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오순희는 랭돌에서 병을 받는다고 장작을 두축이나 안아다가 부엌아궁에 밀어넣었다. 부엌아궁에선 계속 장작 타는 소리가 뿌직뿌직 울리였다. 오순희는 요새 아지트가 자기네 집뒤로 옮겨와서 이 일 저 일 신바람이 나서 뛰였다. 인제도 거리에 련락을 나갔다가 차득보를 띠여보고 아지트로 데려다주고는 부랴부랴 집으로 달려나갔다. 아지트로는 청년 하나가 큰 보퉁이를 메고 들어섰다. 방안에 있던 청년들이 보퉁이를 받아서 풀어놓자 디굴디굴한 만투가 한구들 펼쳐졌다. 모두들 땀을 씻으며 한개씩 가져갔다. 상준이며 차광수도 만투를 한개씩 집어들었다. 고기속을 둔 만투 한보퉁이가 순식간에 다 없어졌다. 청년들은 빈 보자기를 털며 이번에는 오순희가 길어다놓은 랭수동이에 달라붙었다. 물도 잘 들이켰다. 반동이나 되는 물이 인차 바닥이 나서 마지막 사람은 동이를 굽혀대고 물을 퍼냈다.
5
차광수도 만투 두개를 먹고 물도 두어모금 마셨다. 그러나 내내 골은 욱씬거렸다. 부닥친 난관이 너무 벅차니 숨을 쉬기도 힘들다. 그런데 또 자기가 길림에 오면 들리군하던 하숙집에 누가 와서 기다린다는 련락이 왔다. 그는 부랴부랴 아지트를 나와 하숙집으로 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천만뜻밖에도 왕청문의 한윤이와 조동식이 와앉아있었다. 《아니…》 차광수는 이건 또 뭐야 하고 눈이 둥그래서 부르짖었다. 일이 엎치는데 덮치는 판이였다. 《차동무, 밤중에 안됐소.》 둘이는 일어서 맞았다. 차광수는 그들이 내미는 손을 건숭 잡았다. 《언제 올라왔소?》 《어제 올라왔소.》 《그런데 여긴 어떻게 찾았소?》 《수소문을 해서…》 한윤은 벌써 차광수의 낯빛이 심상치 않은것 같아 흘끔흘끔 쳐다보며 대답했다. 《앉소.》 차광수는 방안목에 들어가앉으며 그들도 앉으라고 했다. 벌써 그의 이마에서는 쥐가 풀떡거리며 뛰였다. 왕청문을 떠나오던 날 저녁 쏘아죽이자고 뛰여돌아다니다가 찾지 못하고 온 자식이 제발로 이렇게 낯판대기를 들고 앞에 나타날줄은 몰랐다. 이 자식들이 테로가 있던 그날밤에도 대회준비사업을 다 줴내깔리고 학교에 얼굴도 내밀지 않았지. 《남만청총》의 책임자라는놈이 테로가 있을걸 알고있었거나 아니면 테로에 직접 가담하지 않았다면야 왜 그날밤에조차 학교로 나오지 않았을텐가. 이놈은 분명 테로를 감행한놈들속에 있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차광수는 산같이 떠밀고 일어나는 분격을 용케 내심으로 눌러냈다. 그대신 눈에 분격을 못참는 눈물이 글썽거려지고 제가슴을 치고싶은 생각도 불쑥불쑥 솟았다. 《그래 어떻게 되여 여길 찾아왔소?》 한껏 부드럽게 내려고 애쓰는 말소리였다. 《사실은 김성주동무를 만나보려고 올라왔는데 그를 찾을길 없고 마침 차동무의 하숙집을 알게 되여 들렸소.》 한윤은 차광수가 리성의 힘으로 눌러내는것 같은 분격을 그 표정에서 읽으며 조심스럽게 대꾸했다. 《김성주동무를 만나서 무슨 할 이야기가 있소? 할 이야기는 벌써 왕청문에서 끝이 났는데…》 《왜 그렇게 랭정하게 말하오? 물론 우리를 현묵관이와 한패로 볼수 있겠지만 그건 그때 일이요. 우리도 인젠 눈을 떴소. 그래서 그자들을 배척하고 동무네 운동선을 찾아올라왔소. 우리라고 조선청년이 아니겠소. 혁명하자는 청년들이 아니겠소?》 《뭐, 우리 운동선을 찾아왔다구? 그래 동무네가 김성주동무에게 어떤 피의 상처, 원한의 상처를 안겨놓았는지 알기나 하고 우리의 운동선에 들어서겠다고 찾아왔소? 그렇게 진지하게 타이를 땐 머리를 흔들더니 혁명동지들을 여섯명씩이나 괴모산속에 끌어다가 쏘아죽이고나서야 이젠 눈을 떴노라고? 김성주동무는 최봉의 약혼녀인 수연동무네 집에 들렸다가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피눈물을 흘렸소. 그 집에선 최봉이 돌아오면 잔치를 하겠다고 집을 비워놓고 잔치준비로 뛰고있었소. 그 빈집에서 우리는 터지는 오열을 가까스로 참았소. 김성주동무는 차마 그 집에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아 최봉을 대신해서 마당도 쓸어주고 굴뚝도 고쳐주고… 그리고도 발길을 인차 돌리지 못했소.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김성주동무의 그 심정이 이 가슴에 젖어와서 참을수 없소. 그런데 당신들은 무슨 낯으로 김성주동무를 찾아왔소?》 차광수는 제가슴을 두드렸다. 그의 귀전으로는 최봉의 마지막 말이 날아오기도 했다. 《야, 광수야, 넌 어떻게 하든지 살아라. 김성주동무가 위험하다.》 그 말이 이 시각을 놓고 위험을 신호하는것 같기도 하여 더욱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래 진실을 말하오. 우리의 운동선에 서겠다는건 분명 거짓말이고 현묵관의 새로운 지시를 받고 올라온게 사실이 아니요?》 《차동무, 진정하오. 억측도 그런 억측이 어데 있소?》 한윤은 얼굴이 시꺼멓게 되여 말을 못하고 조동식이 사시나무떨듯하는 차광수의 주먹을 잡으며 애원했다. 차광수는 조동식을 밀어제끼며 벌떡 일어섰다. 그는 둘 다 당장 사라지라고 소리질렀다. 둘이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떻게 혼이 났는지 한윤은 비틀걸음까지 쳤다. 그러는것을 조동식이 옆에 끼고 나갔다. 이런 판에 앉아서 더 무슨 소리를 하랴. 잘못하다간 매를 맞을것도 같은데… 차광수는 문밖으로 나가는 두 청년을 쏘아보며 어깨가 한뽐씩 솟았다 내렸다 했다. 그는 분기가 사그라지지 않아 한참이나 방안을 왔다갔다하였다. 사실 한윤이들은 《남만청총대회》를 준비하다가 현묵관이, 고인호들이 테로를 감행하는바람에 이게 무슨놈들이냐고 뒤걸음을 친 청년들이였다. 더구나 그뒤 삼원포에서 날아온 성토문을 받아읽고는 고민속에 빠져 동요가 일어났다. 현묵관이들은 청년들속에서 동요가 일어나 청년운동을 아주 손아귀에서 놓아버릴것 같으니까 아예 흉기를 들고 청년들을 뒤쫓아다니며 갈개였다. 놈들은 내뺀 청년들을 따라 릉가 삼원포쪽에 가서 헤매돌아가기도 했다. 한윤이들의 신변에도 위험이 각일각 죄여들었다. 그래서 둘이는 왕청문을 박차버리고 길림으로 올라올 결심을 했다… 밖으로 쫓겨나온 한윤이와 조동식은 정처없이 하남가를 걸어 우마항쪽으로 에돌았다. 그리고는 다시 북대가쪽으로 걸어내려갔다. 밤이 깊어질수록 칼바람이 살을 에였다. 신바닥에서 얼음 바스라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그들은 송화강가로 나왔다. 송화강가엔 더욱 찬바람이 불었다. 한윤이도 떨고 조동식이도 우들우들 떨었다. 억울하고 분해서 참을수 없었다. 한윤은 일본 동경에서 고학할 때 차광수와의 옛정도 생각했다. 애오라지 그 우정을 믿고 찾아온 자기를 그처럼 박대하여 내쫓은 차광수가 야속했다. 세상이 허무했다. 《어디 가서 술이라도 한잔 하자구.》 한윤이 부르짖었다. 정말 술에라도 취해 이 고통을 잊고싶었다. 《아닌게아니라 술이나 콱 마시고 운동이고 뭐고 다 잊어버리고싶소.》 그들은 다시 돌아서 거리로 들어왔다. 인젠 밤이 깊어 행인도 그렇게 없다. 그들은 북대가뒤골목 네온싸인이 요염하게 춤추는 《춘흥각》이란 료정으로 들어갔다. 아직도 료정엔 술군들이 많았다. 손벽을 두드리며 녀급을 부르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뻗닿게 들려왔다. 넓은 홀안이 후끈하게 덥고 료리냄새가 가득 차있는데 취담들이 벌어져 떠들썩하게 끓었다. 여기에도 일제의 밀정들이 배겨앉아있는것 같다. 들끓는속에 앉아 눈에 독을 올리고 술잔을 들었다내렸다 하는놈이 있다. 음충스러운 눈매가 녀급을 노려보기도 하고 취흥에 겨워 노래부르는자를 노려보기도 했다. 한윤은 조동식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갔다. 2층은 무슨 다방같은데 음악이 울려나왔다. 《고급료정같은데 돈이 자라겠소?》 《올라가자구.》 조동식의 소리에 한윤이 웨치며 조동식의 잔등을 밀었다. 2층홀에도 술군들이 앉아있었다. 한윤이와 조동식은 종려화분이 놓인 저쪽 창가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한 술군이 녀급을 부르더니 베토벤의 월광곡을 틀라고 소리를 질렀다. 카운다에서는 월광곡이 울려나왔다. 한윤이들도 술과 료리를 청했다. 녀급이 술을 날라왔다. 둘이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독한 배갈이였다. 식탁에 음식물을 가득히 가져다놓았는데 그런것은 여겨보지도 않았다. 기름투성이 중국료리도 저혼자 김을 풀풀 날렸다. 둘이는 련속 잔을 비우고 련속 술병을 들어다가 또 잔에 술을 부었다. 이윽고 취기가 오른 한윤은 실성한듯 《으허허허》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는 식탁을 소리나게 탕 쳤다. 그바람에 홀안의 술군들이 놀라서 시선을 집중했다. 《왜 이러오. 벌써 취했소.》 조동식은 그래도 아직 술이 오르지 않아 한윤을 핀잔했다. 《야, 넌 인제 어떻게 할 작정이냐? 너는 어디로 가고 나는 어디로 가느냐? 우리가 찾는 광복투쟁은 어디에 있느냐, 가슴이 터져 살겠느냐? 독립운동도 조국광복도 죄다 범이 물어갔다. 가슴이 터져 어떻게 산단말이냐.》 한윤은 식탁우에 머리를 떨구고 또 《으허허》소리를 내며 울었다. 조동식이 곁에서 몸을 가누지 못하고 비틀거리는 그를 꽉 붙안았다. 그러나 한윤은 더욱 꺽꺽 목이 메여 울며 우리가 갈길은 어디냐고 소리를 질렀다. 녀급들이 달려와서 소동을 피우지 말라고 했다. 한 녀급은 한윤의 손목을 붙잡으며 조용히 앉아서 술이나 마시고 가라고 애원했다. 《이 이걸 놔라. 내가 조용히 술이나 마시게 됐으면 이 밤중에 료정으로 달려들었을테냐? 나는 세상을 다 잃었다. 희망도 리상도 다 잃었다. 내앞엔 암흑이 있고 절벽이 있다. 아 절벽에 떨어져 죽자! 모든것을 망각으로 몰아갈 죽음, 그 죽음밖엔 없다. 죽자! 죽자! 죽자!》 한윤은 뭉그러쥔 주먹으로 식탁을 바스라지게 두드렸다. 녀급도 어쩌질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온 료정의 술군들이 술도 못마시고 모두 일어섰다. 어떤 술군은 저걸 밖으로 몰아내가라고 소리쳤다. 그러는가 하면 빙긋빙긋 웃으며 이 세상 버리고 꽃같은 시녀들이 맞아줄 저승으로 같이 가자고 롱을 하는 술군도 있다. 술판이 온통 난장판으로 되였다. 얼마후에야 조동식이 비틀거리는 한윤을 이끌고 2층계단을 내려왔다. 한윤은 계단을 내려오면서도 벽에 머리를 부딪치며 소리를 질렀다. 《아, 캄캄하구나. 갈길이 보이지 않는구나. 이 칠칠야밤에 광명을 던져줄 우리의 구원자는 없느냐.》 한윤은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울었다. 《이러지 말라구.》 한윤이 너무 소동을 피우는바람에 조동식이도 감당을 못해 킥킥 울었다. 그들은 지금 자기들의 뒤에 경무청밀정이 따라섰다는것은 꿈에도 몰랐다. 무테안경을 건 눈이 우묵한놈이 한윤이와 조동식을 앞세우고 칠피단화 신은 발을 텅텅 내려짚는다. 《넘어지겠소.》 능청스럽게 놈은 한윤이의 등을 두드리며 주의를 주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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