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서《불멸의 력사》 3

        장편소설

 

 

                                     천  세  봉  

 

( 제 3 회 )

 

제  2  장

 

사나운 바람이 불기전

 

1

 

길림엔 벌써 가을이 다가왔다. 하늘엔 흰구름이 바삐 날고 가로수들이 활랑거리며 설레였다. 현천봉 원천령 할것없이 북산일대의 푸른 숲도 누릿누릿 빛이 변해가고 소란한 갈바람에 이리 뒤치고 저리 뒤치였다. 모든것이 바삭바삭 마르며 무엇인가를 급히 몰아오는듯싶다.

가을! 가을과 함께 이곳엔 새로운 정세가 닥쳐들었다. 정말 일제의 만주침략에 대한 준동이 확연히 드러났다. 놈들의 령사관이 숱한 밀정들을 풀어놓았다는 소문이 떠들썩 돌았다. 경무청 순경놈들은 때없이 갈개며 사람들을 붙잡아갔다. 걸핏하면 공산당이라고 뺨을 갈기고 거리바닥에서도 달려들어 사람을 묶었다. 숱한 사람들이 잡혀들어갔다. 학생들을 따르는 뒤그림자가 많다는 소문도 자자하게 돌았다. 정세는 폭우가 드리울 하늘처럼 컴컴해보였다.

그러나 길림의 공청이나 반제청년동맹조직들은 끄떡없이 투쟁을 조직해나갔다. 일제의 만주침략에 대한 준동이 본격화된다는것은 김성주동지께서 이미 왕청문으로 떠나시면서 말씀하시였다. 그러나 그이께서는 이런 급격한 정세의 변화가 조선혁명에 불심지를 꽂아주는 자극으로 되여 혁명이 새로운 높은 단계로 올라설수 있는 계기로 된다고도 말씀하시였다. 바로 이것은 정세를 혁명의 리익에 맞도록 역전시킨다는것을 의미하는것이였다. 그래서 그이께서는 이미 묶어놓은 조직들을 더욱 튼튼히 꾸리는 문제, 새 지역을 개척하며 조직망을 확대하는 문제 등 일련의 당면과업들을 제시해놓으시고 떠나가시였다. 지금 길림조직들은 이 과업을 밀고나가며 놈들의 준동을 주의깊게 살피고있었다.

어느날 밤 공청은 조직의 확대를 위해서 각 지역으로 떠나갈 문제를 놓고 회의를 열었다. 채경, 리상준, 권태일, 오순희를 비롯한 십여명의 공청원들이 북산 약왕묘의 지하실에 모여들어 토론을 했다. 누구나 다 사나운 바람에 닦이운 세련된 풍모가 드러났다. 차득보처럼 성격이 과격했던 청년들도 미끈히 씻기운것 같은 점잖은 자세로 앉아 수군수군 이야기했다.

회의를 하고난 그들은 왕청문소식이 궁금해서 또 한참 왕청문이야기도 하였다.

이러는데 사닥다리를 밟는 소리가 나더니 릉가에 가서 공작하고있는 신동호가 로동복 웃저고리를 둘러메고 와이샤쯔바람으로 지하실에 불쑥 들어섰다. 한손엔 바이올린케스도 들었다.

《아니 신동무가 어떻게 된 일이요?》

모두들 놀라서 쳐다보며 물었다.

《그래 어떻게 돼서 왔소? 이 밤중에… 지금 오는 길이요?》

모두 반갑게 악수를 하고난 뒤 채경이 물었다. 그래도 신동호는 말없이 불을 뿜듯 큰숨을 회파람소리가 나게 내뿜었다.

《바요링은 뭘 하러 들고왔소. 신동무도 음악을 공부하오?》

《아니요.》

모두 신동호를 오래간만에 만나서 반가운 정으로 웅성거렸다. 신동호는 누구보다도 오순희를 보자 가슴이 두근두근 뛰였다.

그러지 말자곤 하면서도 그래지는 심정이였다. 그는 땀을 씻고 자리에 앉아서야 말을 꺼냈다.

《방금 오는길이요. 급한 일이 있어서 달려왔는데 개자식들이 덕승문앞에서 사람을 덮치려고 들더군요. 그래서 두놈을 재빨리 피해서 염천샘물이 있는 뒤골짜기로 빠져서 이리로 달려왔소.》

《그래 어떤놈들이요?》

《순경놈들이였소. 두놈이 다가오며 서라고 하는 꼴을 보니 심상치를 않더군요.》

《개자식들이 정말 삼엄하게 구는군. 그래 무슨 급한 일이게 이렇게 달려왔소?》

《좀 급한 일이 있어서 아지트로 곧장 왔소.》

조직에선 약왕묘지하실을 아지트로 정해놓고 지방조직들과의 련락을 위해서 이 지하실을 늘 비워두지 않았다. 신동호도 그걸 알고 이리로 곧장 달려온것이였다.

신동호는 한참 더 땀을 씻고나서야 바이올린케스속에서 종이두루마리를 꺼내놓았다.

《이게 무어요?》

채경이 눈을 흡뜨며 물었다.

《왕청문에서 <국민부>패거리들의 백색테로가 있었소. 그래서 그것을 치는 성토문을 작성해서 지금 각지에 뿌리고있소.》

《백색테로요? 아니 대회는 끝났소?》

《대회가 무슨 대회겠소. 대회를 준비하다가 <국민부>놈들이 그따위짓을 저질렀지요.》

《그래 김성주동무는 지금 어데 있소.》

《릉가에 와있다가 지금은 성토문투쟁을 위해서 최창걸동무가 있는 삼원포에 가있소.》

《신변호위는 잘되오?》

《되다뿐이겠소.》

채경은 그제야 맘이 놓이는지 얼룬 성토문두루마리를 풀었다. 거기에 김성주동지께서 시급히 등사로 더 밀어서 길림은 물론 카륜, 화전, 무송, 돈화, 교하 지방들에까지 내려보내라고 하신 지시문도 들어있다. 지시문에는 이 성토문을 통하여 민족주의파쟁분자들을 단죄할뿐아니라 각 지역에서 우리 조직들을 더욱 확대강화하는데 매진해야 한다고 강조되여있었다.

사실 지금 남만일대엔 큰일이 일어났다. 현묵관이들의 악랄한 죄행을 치는 성토문이 삼원포에서 작성되여 각지에 뿌리는 일이 벌어졌다. 밤이면 청년들이 성토문꾸레미들을 안고 류하현, 반석현, 흥경현 일대로 뛰였다. 성토문이 뿌려지는것과 함께 곳곳에서 성토대회도 열렸다. 여러곳에서 희생된 동지들에 대한 추도회도 열리였다. 이리하여 《국민부》와 《혁명당》에 대한 총공격이 가해지고 저주가 퍼부어졌다. 사람들은 분노에 떨었다. 《국민부》에 대해 일정한 환상과 기대를 가지고있던 사람들조차도 환멸을 느끼며 돌아섰다. 결국 《국민부》니 《혁명당》이니 하는 이름은 졸지에 수치와 배신과 저주의 대명사로 되여버렸다. 그대신 공산주의청년조직들이 더욱 확대되고 강화되여나갔다.

신동호는 담배 한대를 피워물고 앉아 성토문 읽는 동무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릉가에 가있으면서 무시로 그리웠던 얼굴들이 지금 방안에 가득히 앉아있다. 오순희! 이자리에 오순희가 앉아있어서 더욱 그런 감회를 불러일으키는지 모른다. 어쨌든 혁명이란 시의 련속, 랑만의 련속인것 같다. 처처에서 그 무엇인가가 충동을 주고 뜨거운 생각을 치밀어올린다.

다감한 시인은 이자리에서도 눈물이 글썽거렸다. 성토문을 읽던 오순희도 얼른 신동호를 훔쳐보며 코허리가 시큰해졌다. 그는 최봉이들이 괴모산속에 끌려들어가 쓰러졌다는 대목을 읽고는 자기도모르게 성토문을 쥔 손이 떨리고 얼굴은 하얗게 질리였다. 오순희는 입술을 깨물며 눈구석을 훔쳤다. 채경이며 상준이들도 얼굴이 검붉게 동해올랐다. 모두 기척이 없이 앉아서 성토문들을 재삼 읽었다.

《아니, 이 자식들한테 복수는 들이대지 않을 모양입데까?》

차득보가 먼저 소리를 질렀다. 리상준이와 함께 기관구에서 일하는 화부인데 그는 하찮은 일에도 인차 달아오르는 성미였다. 한번 욱하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덤벼치는데 투쟁과정에 좀 달라지긴 했으나 아직도 그 밸통은 남아있었다.

《이게 복수가 아니요? 그놈들을 쏴죽이거나 찔러죽여야만 복순가요. 이런놈들에 대한 보복은 사회적으로 매장해버리는게 몇배 더 낫다구 보우.》

신동호의 말이였다.

《그 말은 옳소. 그렇지만 이걸 어떻게 참는단말이요.》

차득보는 지하실바닥을 두드렸다. 모두 분이 치밀어 펄펄 뛰였다. 오순희는 종시 모로 돌아앉아 소리를 죽여가며 울었다. 혁명동지들이 여섯명이나 희생됐다니 이 무슨 불상사인가!

《진정들하고 빨리 일을 시작해야겠소. 아지트에서 눈물은 무슨 눈물이요? 순희동무!》

법정학교를 다니는 채경이 꾸짖는 소리에 오순희는 가느다랗게 대꾸하며 울음을 딱 그쳤다.

《빨리 이 성토문을 더 밀어야겠소. 원지가 있겠지요?》

《지시문에 무어라고 했소?》

권태일이 이러며 얼른 지시문을 가져다가 읽었다. 노란 눈알이 예리하게 돌아갔다. 김성주동지와 함께 육문중학에 다니는 청년이였다. 키는 작지만 주먹은 다부졌다.

《빨리 찍읍시다. 원지도 있고 등사판이 두개나 되니까 제꺽 밀어낼수 있을거요. 역시 현뚱뚱이 그놈이 몸이 근질거려 제 죽을 날을 앞당겨온것 같소.》

권태일의 말이였다.

채경은 밤중으로 그 일을 다 제껴낼 계획을 세우고 부랴부랴 분공을 했다.

《그럼 나는 떠나야겠소.》

신동호는 로동복저고리를 입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니, 그렇게 빨리 간단말이요? 가만, 김성주동무한테로 가는 답장이나 받아가지고 가우.》

채경이 쳐다보며 말했다.

《답장은 그만두오. 난 이길로 고유수로 가야 하오. 고유수엔 언제 기별이 갔는지 김혁, 계영춘동무들이 지금 복수대를 무어가지고 왕청문을 치러 내려온다오. 그래서 김성주동무가 날 보고 빨리 가서 그걸 눌러놓으라고 하며 길림에 갔다가 급히 돌아서 뛰라고 했소. 그리구 이 바요링두 김혁동무에게 갖다주고 선률을 가지고 혁명하도록 단단히 타이르라고 했소.》

《뭐, 선률을 가지고 혁명을… 하하하, 성주동무답군. 그래 집에도 안들리고 가겠소?》

《내려가다가 잠간 들리겠소.》

《그럼, 어서 떠나오.》

채경이도 길을 재촉해주었다.

얼마후 신동호는 바이올린을 들고 지하실 사닥다리를 올라왔다. 그는 가슴이 뻐근해졌다. 약왕묘주위에 서있는 나무 하나, 풀 한포기가 죄다 정겨워보였다. 그는 상나무잎새를 쓸어보며 내리막길을 급히 걸었다. 덕승문을 빠져들어가면 거리가 가깝긴 하지만 아까 순경놈들의 습격에 혼도 나서 그리로 갈 생각은 없었다. 그는 북극문쪽으로 내려갔다. 북극문을 넘어서 청향국 뒤쪽길로 걸어들어갔다. 문득 형수의 시신을 들것에 들고 이 길로 나오던 생각이 떠올랐다. 형수는 종시 지난 이른봄 페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쌍둥이들의 손목을 량손에 잡은채 숨이 졌다. 어머니는 그 손아귀에서 애들의 손목을 뽑아내며 이 몹쓸것아 세상이 아무리 고달파도 이것들 클 때까지 왜 못사니 하며 통곡을 터뜨렸다. 페병이라고 들여다보는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채경이, 차득보들이 와서 시신을 들것에 메고 이 길로 나왔다. 그 생각이 가슴쓰리게 떠오른다.

집에 이르니 온 집안이 무덤속같이 조용하고 새까맣게 어두웠다. 한밤중이여서 모두 잠이 든 모양이다. 신동호는 조심조심 걸어들어가 마루우에 걸터앉았다. 어머니가 마루우에서 자고있다. 백발을 베개머리에 흩어던지고 자기 엄마처럼 앓고있는 인동일 품에 끼고 자는데 어린것의 팔이 할머니의 목을 휘감았다. 어머니도 아이도 숨기가 없다. 그렇게도 잠귀가 엷던 어머니인데 사람이 곁에 가서 마루에 걸터앉아도 모른다. 고달픈 생활의 중하가 인젠 어머니마저 죽음의 문전에 너부러뜨려놓은것 같다.

문을 열어놓은 어두운 방안에선 누님과 봉숙이, 이순이 그리고 선동이가 자는것 같은데 거기선 더 뼈저린 누님의 숨소리가 들려나온다. 푸르르하고 한참씩 끊어졌다간 또 들리였다. 지금도 내내 송화강으로 나가 고기를 사이고 량식을 바꾸러 촌으로 돌아다니는지 모른다. 누님곁에선 봉숙이가 그러는지 이순이가 그러는지 애쿠애쿠 하며 잠꼬대소리도 낸다. 살아있는 사람의 집에 들어온것 같은 생각은 없다. 죽음의 그림자가 문밖에도 드리우고 문안에도 드리운것 같다.

가자! 식구들을 깨워선 무엇하랴! 어머니나 누님한테 돈 한푼 쥐여줄수 없는 빈 주머니로 왔는데 식구들을 깨워앉히고 눈물을 씹어삼키며 무슨 이야길 하랴! 곧바로 나가야 한다. 혁명하는 청년공산주의자가 이런 정상을 놓고 울음보를 터뜨릴텐가? 큰 발자욱을 찍으며 곧바로 나가자!

신동호는 바이올린케스를 들고 불쑥 일어섰다. 그는 소리 안나게 마당으로 내려서 밖으로 걸어나왔다. 길로 나서자고 하는데 거기 버드나무밑에 오순희가 와서 기다리고있었다.

《아니, 여긴 어떻게?》

《뒤따라 내려왔어요. 왜 집에 들렸다가 그렇게 조용히 나오세요?》

《시간이 급한데 까짓거 식구들을 깨울게 있소.》

《아이참, 그래두 그렇게 슬그머니 왔다갈바에야…》

신동호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얼른 오순희의 옆을 비켜서 재빨리 걸어나갔다. 오순희는 주춤거리다가 신동호의 뒤를 따랐다. 신동호는 혼자 앞서서 걸었다. 지금 그의 가슴은 복잡하였다. 방금전 약왕묘지하실에서 오순희를 띠여보았을 때만 해도 가슴이 후둑후둑 뛰였었다. 그 차분하게 내리덮인 속눈섭밑의 온화한 눈길을 대할 때는 기뻤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자기를 도사리자고 애쓰게 되는가? 그는 괴로왔다.

사실 오래전부터 서로 련모의 정을 간직하고있던 그들은 지난해 대시위때 더욱 가까와졌다. 그때 신동호는 학생대렬에 섞여 밀려나가기도 하고 시민대렬에 들어서서 구호를 선창해주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날엔간 녀학생대오에 끼여 노래를 부르며 놈들이 소방차로 쏘아대는 폭우속을 헤쳐나갔다.

그런데 이날 놈들의 공세는 무서웠다.

앞을 막는놈들이 있는가 하면 총칼로 뒤를 추격해오는 놈들도 있었다. 시위는 격렬해졌다. 놈들은 어떻게 해서든 물밀듯이 덮쳐드는 시위대오를 멈춰세워보려고 발악했다.

대렬선두에서 팔을 휘두르며 노래를 부르던 신동호는 곤봉에 어깨를 심하게 맞고 꺼꾸러졌다. 곁에서 노래를 함께 부르며 나가던 오순희는 쓰러진 신동호를 동무들과 함께 휘여안고 우마항쪽 언덕받이길로 줄달음을 놓았다.

《놓소. 어서 놓소.》

《놓으면 어떻게 해요. 피가 흐르고 이렇게 부어오르는데…》

오순희는 신동호를 부축해가지고 자기 집뒤에 있는 고간으로 쓰는 오두막으로 숨어들어갔다. 그는 신동호의 상처에 붕대를 감고 병원으로 달려가 상처에 붙일 약을 구해가지고 왔다. 신동호는 그 오두막에서 여러날동안 응급치료를 했다. 그러다가 오순희의 오빠 오학천이 국내공작을 위해서 서울로 떠나간 뒤에는 그가 차지하고있던 사랑방으로 나갔다. 오순희의 아버지 오동진이가 거처하던 족자가 걸린 방이였다. 그 방엔 풍금도 놓여있었다. 오순희는 하루에도 몇번씩 붕대를 고쳐 감아주며 신동호가 우울해할가봐 풍금을 치며 노래도 불러주었다. 노래를 부를 때에는 행복에 겨운 량눈에 눈물이 가랑가랑 맺히기도 하였다. 오순희의 어머니조차도 신동호가 사랑방에 숨어서 치료하는걸 각별히 보살펴주었다. 병원에 가서 약도 뻗닿게 날라다주었다. 이렇게 되니 신동호는 집으로 돌아갈 생각도 잊고 그 사랑방에 숨어서 한달나마 치료를 했다. 그는 치료를 하면서 수없는 시를 썼다. 대시위의 랑만을 노래한 시를 쓰기도 하고 인생의 비애를 읊조린 시를 휘갈기기도 했다. 상처가 거의 아물어갈무렵 어느날엔 오순희에 대한 불같은 련모의 정을 토로한 시 한편을 써서 그에게 주었다.

 

우리들의 모든것의 연소!

둘이 함께 가며 불태우는 그것때문에

혁명은 더욱 기쁨이 되고

혁명은 더욱 나의 노래가 되옵니다.

 

이 시가 오순희를 얼마나 격동시켰던지 모른다. 그는 그 시를 가슴에 붙안고 웨쳤었다.

《아, 어쩜 동무는 남의 심장에 이렇게 무서운 불을 안겨주어요. 난 그 불이 좋아요. 나의 기쁨, 나의 행복도 그 불길속에 있어요. 영원히 그 불길속에.》

이 시가 둘의 심정을 터뜨려놓았다. 모닥불같은 사랑이였다.

사랑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모르는 그런곳으로 줄달음치는 사랑이였다. 시도 사랑을 위해 존재하고 사랑이 행복의 전부인것만 같았다.

그런데 그 불길이 신동호의 가슴속에선 차츰 사그라져갔다. 그것은 수양이 어린 그의 욱하는 성격적약점과도 관계된다고 할가, 혁명이 준엄해지고 우여곡절속을 걸어가게 되자 신동호는 둘이 숨어서서 속삭이는 세계, 그게 무슨 사랑인가 하는데 눈이 갔다. 부르죠아속물들이나 할 장난질에 빠져서 혁명이 아닌데 정력을 소모해? 이건 무산혁명을 위해 일생을 바치려고 한 자신의 타락이다.

이렇게 달아나기 시작한 그의 심정은 릉가에 가서 공작하면서 점점 더해졌다. 그리고 혁명동지를 여섯명씩이나 잃고 달려다니는 이 순간엔 오순희가 곁에 있는것조차 얼굴이 뜨끈뜨끈한 생각이 들었다.

《거기 가서 공작하는데 뭐가 불편한건 없어요?》

북극문밖으로 나서자 오순희가 급히 따라서며 물었다.

《없소. 언제 자기가 불편하다는걸 느껴볼 새도 없구요.》

신동호의 대답은 무뚝뚝하였다.

《집에서 살림이 어떻게 어려워진다는걸 알기나 하고 떠나야 할것 안야요? 요새 이순이는 한 학자선생네 집에 부엌일을 하러 들어갔어요.》

《그 어린것이 부엌데기로말이요?》

《그렇게 됐나봐요.》

신동호는 땅이 꺼지게 숨을 들이그으며 무거운 걸음을 옮겼다. 선들바람이 불어왔다. 그러나 신동호는 그것도 느끼지 못하였다. 오순희는 입을 다물고 묵묵히 뒤를 따랐다. 그는 서글픈 생각에 잠겨들었다. 신동호가 왜 이렇게 랭담해졌을가? 어째서 보는적마다 점점 더 달라져갈가? 아무리 혁명의 거센 바람을 안고 나간다 한들 이렇게 사람이 서리발같이 돼갈수 있을가!

《순희동무, 인젠 들어가우. 무엇때문에 이렇게 멀리까지 따라나오우?》

《신동무는 맘이 엄청나게두 변했나봐요. 난 그때 그 시를 아직도…》

《그런건 잊어버려주오. 그게 지금 우리들에게 무슨 소용이 있소?》

《그게 어째 소용이 없겠어요. 소용이 없는걸 빈말로 적어서 나에게 주었다곤 느껴지지 않아요. 거기엔 정말 신동호동무의 높은 지향과 랑만이 있었어요. 아무렴 그런 공감이 빈말에서야 오겠어요?》

《순희동무, 지금 그런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눌 흥미가 있소? 혁명전우들이 여섯명씩이나 괴모산속에서 희생되여 모두 그 분노로 부글부글 끓고있는데 그런 소부르죠아송가를 읊조릴 흥미가 있소? 그건 소부르죠아지의 련애지상주의송가요.》

《소부르죠아련애지상주의요? 그렇게 저주를 퍼부을 시를 어떻게 남의 심장이 아닌 제심장으로 써서 남에게 주었을가요?》

《그땐 나에게도 그런 소부르죠아적인 타기할 정열이 있었댔소. 인젠 혁명을 위해서 피차에 그런 놀음을 피해야 하오.》

《어쩜…》

신동호는 걸음을 급하게 놓았다. 북산기슭을 휘감고 나간 좁은 길을 줄담음치듯 걸었다.

오순희는 걸음이 더디여졌다. 따라가고싶은 생각이 없어졌다. 무엇인가 멸시를 받는것 같은 모욕감때문에 가슴이 떨렸다. 부르죠아지의 련애지상주의라고? 너무도 분했다. 사람이란 이렇게 무서운것인가. 남의 순정에 못을 박아놓고도 어쩜 저렇게 찬바람같은 모습으로 달아나버릴수 있을가.

오순희는 힘을 잃고 길가의 활엽수에 몸을 기댔다. 눈에선 짜고 독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2

 

신동호가 떠난 이튿날 두개의 등사판으로 찍어낸 성토문은 모두 각지로 발송되였다. 조직이 째이고 활동이 민활해져서 무슨 일이든 번개치듯 해냈다. 모두들 배포가 든든해서 채경의 지휘밑에 성토문들을 들고 각지로 떠나갔다.

길림시내에 뿌리는 성토문은 채경이가 직접 들고 다니며 뿌렸다. 유지들, 종교인들, 지어는 민족주의자들과 정미소기업을 하는 사람들까지도 성토문을 받아읽고는 왕청문의 현묵관이패들을 분기에 차서 규탄했다.

채경은 일조에 고립무원한 존재로 되여 민족의 저주속에 빠진 현묵관, 고인호들의 초라한 몰골을 눈앞에 보는듯싶었다. 그럴수록 김성주동지의 투쟁방법과 전술에 경탄을 금할수 없었다. 한장의 성토문으로써 칼부림도 서슴지 않는자들을 매장해버린 이 로숙한 투쟁방법과 능숙한 수완, 채경은 배가 되는 힘을 느끼며 성토문을 뿌리고 또 뿌렸다. 그는 지금 왕청문의 현묵관이들을 단매에 쳐눕히는듯한 심정으로 길림시내를 부리나케 돌았다.

《이게 뭔가?》

리갑무로인은 마침 아침상을 받다가 채경이 내밀어주는 성토문을 받으며 물었다.

《성토문입니다.》

《누구를 치는 성토문인가?》

《왕청문에서 현묵관이패가 테로를 해서 청년들을 죽였습니다.》

《뭐뭐 청년들을? 거기 회장이 갔다고 했는데 그래 회장은?》

리갑무로인은 주글주글한 눈가죽을 한뽐이나 밀어올리며 숨이 차서 물었다.

《회장은 무사합니다.》

《다행일세. 하지만 자네들이 그런곳으로 회장을 어째서 보냈나? 보낼 사람이 그렇게도 없어?》

리갑무로인은 분격해서 성토문 쥔 손을 내흔들며 소리를 버럭 질렀다.

《일이 잘못됐습니다. 그렇지만 현묵관이, 고인호패들이 이렇게 더러운 몰골로 돼버리리라고야 누가 믿었겠습니까. 좌우간 한번 보십시오.》

채경은 얼른 밖으로 나왔다.

리갑무로인은 밥상을 받은채 부랴부랴 돋보기를 꺼내서 걸었다. 그리고는 한참동안 성토문을 읽었다.

다 읽고난 로인은 수전이 난 턱을 더욱 떨며 밥상을 내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숟가락 들 경황도 없어졌다.

《서근하가 왔다고 했지? 이놈이 그따위짓을 해놓고 기여올라왔군. 이 이놈! 독립운동을 못하면 말았지 젊은 사람들을 죽여?》

리갑무는 혼자 소리치며 일어서 벽에 걸린 베두루마기를 떨쳐입었다. 어제밤 서근하가 왔다기에 그가 왔으면 의례히 자기부터 찾아올 일인데 기척이 없으니 이상하다 여겼는데 결국은 이런짓을 저지르고 와서 얼굴을 내밀지 못하는것 같다고 여겨졌다. 리갑무로인은 일이 너무도 분했다. 자기는 길림에서 벌어지는 젊은이들의 운동에 뜻을 걸고 인젠 희망이 보이지 않는 놀음에서 물러서긴 했으나 그래도 《국민부》라는것이 광복운동에 한가닥의 보탬이라도 해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보탬은커녕 저 악독한놈들이 바로 자기자신이 뜻을 걸기도 한 독립운동의 앞이 창창한 골간들을 산속에 끌어다가 요정을 냈다니 땅을 치며 통곡을 터뜨릴 일이 아닌가!

집을 나선 리갑무로인은 북대가의 큰 거리를 경황없이 걸었다. 로인의 눈에선 불이 타기도 하고 눈물이 굴러내리기도 했다. 이런 타기할 죄악이 독립운동선상에 그 몇번이나 반복되였던고? 이런 무뢰배들이 운동을 이끈다 어쩐다 하니 2천만생령이 어찌 하루빨리 살아날 길을 얻겠는가! 불의가 정의를 억압하여 창생이 도탄에서 신음하는 때를 당하면 의례히 의를 지팽이삼아 일어서서 불의를 치는것이 력사상 우리 민족의 유풍이며 정신이어늘 이 무슨 일인가!

성밖으로 나온 리갑무로인은 앞이 보이지 않아 이 골목 저 골목 한참 헤매고나서야 겨우 서근하의 집을 찾았다. 서근하네 퇴마루밑엔 벌써 구두며 고무신 같은 신발들이 여러컬레 놓여있었다.

리갑무로인이 밖에서 인기척을 내며 주인을 찾자 서근하가 문을 열고 맨발로 내달아왔다. 그는 리갑무앞에 송구히 허리를 구부리며 인사를 했다. 리갑무는 인사도 받지 않고 침중한 낯빛으로 제먼저 퇴마루우로 올라섰다. 이웃로인들이 와 앉아있다가 어서 들어오라고 안내를 했다. 리갑무로인은 방안으로 들어가 점잖게 자리에 앉았다. 수염이 내내 후들후들 떨었다. 서근하는 얼굴이 붉어져 어찌할바를 몰라했다. 그는 벌써 로인이 성토문을 읽고 달려왔으리라는것을 짐작했다.

《제가 어제저녁 오는길로 댁에 들리려 했는데 그만 들리질 못했습니다.》

《내 집에 그 무슨 들릴 일이 있겠소? 그래 내 인제 청년들이 뿌리는 성토문을 읽고 왔는데 왕청문에서 그런 사건이 적실하게 일어났단말이요?》

《할말이 없습니다. 청년들이 없는 사실을 있다고 하겠습니까?》

그 소리에 로인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 무슨 연고로 청년들을 여섯명씩이나 살해를 했는고?》

《선생님, 이 서선생도 왕청문에서 청년들을 두둔하다가 하마트면 칼침을 맞을번했답니다. 위급한 정황속에서 겨우 빠져 도망해 올라왔답니다.》

리갑무로인이 음성을 높이는바람에 곁사람이 참견을 들며 설명했다. 고정한 성품인 로인이 화가 오른것으로 보아 이 좌석에서 무슨 실수라도 저지를것 같은 위구심이 없지 않았다. 어느 독립군단체때의 일화도 있었다. 물론 그때는 리갑무로인이 이렇게 늙어빠진 때와는 달랐지만 군대편성문제를 토론하다가 갑론을박끝에 주먹으로 책상을 쳤는데 책상모서리가 뻐개졌다는것이다. 그때 그 일을 목격한 사람들은 리갑무로인한테서 처음 범같은 기상을 보았다고들 했다. 바로 그런 기상이 지금 얼굴에 나타나있는것이였다.

《그럼 국민부라는것이 아주 저 저 인간백정들 손에 넘어갔단말인고?》

《넘어가고말고가 있습니까? 국민부의 기본세력이 물러앉는바람에 첨부터 그 불망종들 손에 넘어간거지요.》

《괘씸한지고…》

리갑무로인은 곁사람의 말에 크게 한숨을 내쉬며 한마디 통탄했다. 그제야 서근하가 땀을 씻으며 한참동안 왕청문에서 일어난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하였다. 리갑무로인은 부르르 일어섰던 수염이 축 처져내리고 관자노리의 근육만 풀떡풀떡 뛰였다.

《회장은 거기 당도하자부터 로선과 기발싸움을 반대하면서 어떻게 하든지 청총대회를 청년들세력을 한덩어리로 묶는 대회로 만들자고 주장해나섰습니다. 현묵관이들을 찾아가 시종 그걸 설복했습니다. 그런데 그놈들은 저들이 주도권을 틀어쥐기 위해서 그걸 테로로써 대답했습니다.》

서근하가 안절부절하며 설명을 했다.

《괘씸한놈들, 그런 백정들을 처단해야지. 처단해 없애고라도 조국광복할 대도를 펼쳐야 해. 회장이 가진건 그저 공산주의가 아니야. 조국광복할 대업이란말야. 그런 진리가 용을 못쓰고 사람만 희생당해? 분한 일이로다. 종묘사직이 무너진 때만큼이나 가슴이 터지는구나! 독립운동의 종말이 저런 쓸개빠진것으로 될줄 뉘 알았을고?》

리갑무로인은 어찌나 분이 치밀었는지 눈에 피발이 서서 벌떡 일어섰다. 문을 열고 나가는 로인은 굵은 새 베두루마기가 까들어 들려올라가고 베고이속으로 여위디여윈 두다리가 무릎우까지 환히 들여다보였다. 서근하가 곁사람에게 눈길질을 했다. 로인을 집까지 모셔다드렸으면 좋겠다는 눈짓이였다. 그러자 곁사람은 얼른 일어서서 로인의 뒤를 따랐다. 벌써 그와 서근하사이엔 리갑무로인이 왕청문사건을 알기만 하면 무슨 변고가 일어날는지 모르겠다고 걱정들을 하고있었던것이다. 그랬는데 요행 인차 분노를 수그리고 큰말이 없이 물러가주니 서근하는 저윽 고맙기조차 하였다.

부채질을 하는 서근하는 눈에 눈물이 괴였다. 로인과 함께 풍찬로숙의 길을 걸어온지도 십년이 넘는다. 그 험난한 로정을 걸으면서도 깍듯이 스승으로 섬기며 오늘까지 살아왔는데 그의 생의 만년을 이렇게 괴롭히고있으니 송구하기가 이를데 없었다. 그 무슨 자기자신의 죄악으로 일이 이렇게 되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 과묵한 성품이 상례를 깨뜨리고 격노해서 찾아왔다가 돌아가는 생각을 하면 죄를 지어도 무서운 죄를 지은것 같았다. 저 늙은이가 인제 살면 얼마나 더 살고 그렇게 애쓰던 조국광복을 보기나 하고 돌아갈텐가? 서근하는 가슴이 저렸다. 왕청문에서부터 로인을 생각해온 가슴이 이 순간엔 더욱 저렸다.

거리로 걸어나온 리갑무로인은 침통한 마음을 안고 힘없이 걸었다.

로인은 후유 한숨을 지었다. 한바탕 꿈같은 력사가 수치스럽게 빛을 묻고만다는 생각이 들어 얼굴에 더 한층 비장한 그늘이 덮이였다.

조양문을 넘어선 리갑무로인은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 눈앞에 펼쳐진 고색이 찬연한 시가를 바라보며 잠간 걸음을 멈추었다. 아침해빛이 비쳐들었건만 아직도 성안엔 밤을 샌 안개가 가닥가닥 흩어져 흐르고있다. 뜯어던진 솜같은 안개가 꼬리를 끌며 검은 흙지붕들을 핥기도 하고 성밑을 배회하기도 했다.

《저기 저 근방이 공설운동장이지?》

리갑무로인은 뒤따르는 사람에게 아득하게 펼쳐진 대도시의 중심부를 손가락질하며 물었다.

《네, 그쪽이 공설운동장입니다. 갑자기 공설운동장은 왜 찾으십니까?》

《그 굵고 청청하던 회장의 목소리를 또 한번 들어보았으면 싶어서 그러이.》

《인젠 운동이 그런 단계가 아닌가봅니다.》

뒤따르는 사람은 얼른 리갑무의 말뜻을 알아듣고 이렇게 대답했다. 그의 말인즉 회장이 이끄는 운동이 지금은 대시위를 벌리고 투쟁하는것 같은 그런 단계가 아니라는것이다. 리갑무로인도 그걸 짐작 못하는바가 아니였다. 그러나 지금 그의 눈앞엔 대시위가 시작되던 날 광경이 그대로 떠오른다.

…공설운동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학생들이 몇만명인지 알수 없다. 대렬을 정돈하라고 여기저기서 구령을 지르며 끓는다. 큰 바다가 움씰움씰하는것 같다. 저녁바람이 불어와서 기발들이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펄럭거린다. 사처에서 기발이 날지 않게 걷잡으라고 소리친다. 대오를 정돈하는 사람들이 마분지로 만든 나팔을 입술에 대고 질서를 바로잡으라고 소리친다. 운동장바깥도 소란했다. 순경들과 헌병들의 떼도 밀려와서 골목골목에 장사진을 쳤다. 운동장주변의 거리도 구경군들로 바다를 이루었다.

갑자기 운동장에서는 박수소리가 일어나고 와아 함성이 터져올랐다. 높은 연설대우에 회장이 나타났다. 검은 교복을 입은 회장은 흰구름 둥둥 나뜬 하늘을 배경으로 하고 서서 잠간 눈아래 광장을 내려다보며 미소를 짓는다. 손을 들어 제지시켰으나 환호소리는 멎지 않는다. 얼마후에야 환호소리가 잦아들었다. 장내에서는 기발들만 펄펄 날린다.

《여러분! 동지들!》

회장은 다시한번 말을 끊고 여기저기 날리는 기폭과 그 밑에 펼쳐진 맑은 눈동자들의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우리에게 가장 고귀한 임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잃어버린 조국을 일제의 마수로부터 찾아내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임무를 떠나서는 조선사람으로서의 그 어떤 보람도 삶의 의의도 찾아볼수 없는것입니다. 그 임무가 어깨우에 지워져있기때문에 우리는 이처럼 굳세고 이처럼 가슴속에서 피가 뛰고 이처럼 지혜와 슬기로 차있는것입니다.》

우뢰소리같은 박수갈채가 온 운동장을 뒤흔든다.…

리갑무로인은 자기가 력사수기에도 남겨놓은, 들으면들을수록 자랑이 생기고 힘이 생기는 그 연설소리가 지금 귀에 우렁우렁 들려온다. 1년전 일이 너무도 방불히 눈앞에 펼쳐졌다. 그저 가슴이 울렁울렁 뛴다. 마치 그날의 광경은 조선을 일으켜세울 영걸이 하늘에서 날아내려와 힘이 될 연설을 하여준것 같다. 로인은 회상을 더듬으며 눈에 눈물이 글썽거려졌다. 아, 서광을 안은 주인공은 이처럼 해와 같이 솟아올랐는데 아직도 운동선상이 이렇게도 분분하고 어지러움은 저 걸레쪼박같은 안개의 쪼박들이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해빛을 헤살놓는것과 같은 리치임이 아닐고? 리갑무로인의 생각에는 꼭 그런것만 같았다. 그러니 그러한 헤살은 조만간에 진리앞에 자리를 내주고 온 우주에 광명이 차고 운동이 거보를 내디디며 내달을것이 아닌고…

리갑무로인은 그쯤 생각하니 눈에 힘이 올라서 길게 뻗친 장미가 푸득푸득 뛰였다. 그는 집에서 받아읽고 베조끼주머니에 지르고 나온 성토문을 만져보며 거기서도 회장의 천하를 들어일구는 놀라운 수완을 감득했다. 저 쓸개빠진놈들은 운동이 안되니까 칼을 들고 갈개지만 회장은 한장 성토문으로 천하를 눈뜨게 만들고 그 타기할자들을 일조에 매장시켜버리고있다. 그렇다, 매장이지. 인제 저 악한들이 《국민부》라는 너울을 둘러쓰고 다시 일어설수 있을가.

리갑무로인은 휘이 긴숨을 내불며 여윈 다리를 옮겨짚었다.

 

3

 

길림시내에 성토문을 다 뿌리고난 채경은 며칠후 돈화행 렬차에 올랐다. 새로운 정세에 맞게 돈화조직에 내려가 박철민과 경주의 뒤를 떠밀어주고 올라오려는것이였다.

《두만강연안쪽으로 조직을 확대하는덴 돈화조직이 크게 짐을 져야 한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새 정세에 맞게 당면활동방향을 제시하시면서 이렇게 강조하시였다. 그래서 돈화에서 뛰고있는 박철민을 도와주라고 지난 겨울 병원에서 퇴원한 경주를 파견하기도 했었다. 그뒤 돈화지역에선 투쟁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조직들이 시내에 꽉 들어배기고 대황구, 락수천 일대를 거쳐 푸르허가까이까지 선이 뻗어내려갔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채경은 이 활발해진 투쟁에 더욱 불꽃을 달자고 마음먹고 떠났다.

렬차에 오르니 가슴이 뻐근해졌다. 기차도 오래간만에 타본다. 불이 붙는 길림의 황홀한 무대우에서 정열과 환희, 아니 청춘의 모든것을 송두리채 쏟아부으며 완전히 도취경속에서 살아온것만 같다. 꿈과 랑만이 뒤엉킨 투쟁이였다. 그것은 지금도 계속되고있다. 결국 이런 소용돌이속에서 희생의 쓰라림도 이겨내고있다.

채경은 차창밖을 내다보았다. 차창밖으로 산이 나타나는가 하면 들판이 펼쳐지기도 했다. 대지는 흙빛이 보이지 않고 어디나 자기의 기름을 뽑아 키워올린 풍성한 록음으로 덮여있다. 우불구불 은실을 늘인것 같은 작은 개울이 보이는가 하면 시원하게 번쩍이는 큰 강물도 보였다. 점점 붉은 꽃, 노란 꽃들이 피여있기도 했다. 그것이 바람에 불려 살랑살랑 고개를 젓는다. 채경은 무언지 모르게 고마와 눈물이 글썽거려졌다.

기차는 저녁때가 거의 되여 돈화역에 와닿았다. 푸파푸파 시꺼먼 연기를 뿜는 화통대가리들이 지축을 울리며 서로 엇갈리였다. 채경은 정거장뜰을 바삐 걸어나갔다. 그는 최봉이 와서 펼쳐놓았던 구멍가게를 찾아갔다. 구멍가게는 책방으로 변했는데 최봉의 뒤를 이어 공작하는 박철민이 책장에다 책을 쌓느라고 법석했다. 가게앞에 손수레가 있는걸 보니 어데 가서 고서를 사온것 같기도 했다.

책장을 향해 돌아서있는 박철민은 베적삼잔등이 온통 땀에 떴다. 그는 가게앞에 사람이 온줄도 모르고 책마대 묶은 새끼를 끊느라고 윽윽 힘을 썼다.

《수고하십니다.》

《수고고 뭐고 오늘은 손님을 돌아볼 새가 없습니다. 래일 오시오.》

박철민은 돌아보지도 않고 굵은 새끼를 끊어던지며 말했다.

《그래도 긴히 보아야 할 책이 있어서 왔는데요.》

《긴히 보아야 할 책이 무슨 책이요?》

박철민은 그제야 땀이 흐르는 얼굴을 돌리며 손님을 쳐다보있다.

《아니 이게…》

《허허허, 안녕하오?》

《이게 정말 어떻게 된 일이요?》

《그새 수고를 했소. 행색이 제법 고서점이나 해먹을 사람같구려.》

그 소리에 박철민은 껄껄거리며 채경에게로 다가와 다부지게 악수를 했다.

《엥이, 오늘은 아무래도 죄다 정리하기가 틀렸군. 뒤로 들어갑시다.》

박철민은 꽁무니에 찔렀던 수건을 뽑아 땀을 문지르며 가게앞으로 나와서 뒤로 돌아갔다.

《점포는 비우고 돌아가도 괜치 않소?》

《그까짓 비우면 어떻소? 사회적진보를 위해선 책도적이란 있을수록 좋은것이요.》

뒤에 들어오니 넓은 마루방이 있었다. 그 방에 들어가서야 박철민은 교하조직에서 전해온 성토문 받은 이야기를 하며 은근히 눈물을 머금었다.

《두눈이 검실검실한 최동무가 지금도 내앞에 앉아있는것 같소.》

박철민은 얼른 수건으로 눈가장을 훔쳤다.

《그만둡시다. 지금은 슬픔을 이야기할 때가 아니요.》

《암, 그렇구말구.》

박철민은 코멘소리를 했다. 그는 손수건으로 눈가장을 누르며 물었다.

《그런데 어떻게 돼서 내려왔소?》

《싸움을 좀더 떠밀어보자고 내려왔소.…》

《떠밀어주오. 그러지 않아도 일이 생겼소. 내 지금 사온 책이나 정리해넣군 하평, 대북쪽으로 내려가려던 참이요. 바로 거기에선 왕청문사건이 저 종파쟁이들한테 흉한 코걸이를 만들어주고있소.》

《흉한 코걸이라니?》

《오늘 낮에 급보가 올라왔는데 저놈들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봐라, 주의와 주의간에 칼침쌈이 벌어지는데 어떻게 공산주의조직을 어중이떠중이 다 걷어넣는 조직으로 만들수 있느냐? 반제청년동맹, 그것은 공산주의조직이 아니다, 공산주의조직이란 오직 공산주의정수분자들만이 뭉쳐야 한다, 이렇게 판을 치기 시작했다오. 그래서 동맹원들은 얼떠름해져서 그 수작에 공감을 가지기도 하고 또 민족주의운동에서 떨어져나와 동맹에 들어온 청년들은 머리를 못들기도 하고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오.》

채경은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만 있었다.

《오늘밤 당장 내려가야 하겠소. 왕청문사건과는 당치도 않게 코를 걸어 공격을 가해오는 놈들을 어떻게 그냥두겠소?》

박철민은 부리나케 얼굴과 목덜미를 문질렀다. 시뻘건 얼굴이 점점 더 커지는것 같고 주먹도 뒤웅박만치 커보였다.

《지금 왜놈들의 준동은 어떻소?》

얼마후 채경이 딴 이야기를 물었다.

《일제도 준동이 심해졌소. 정탐이 처처에 숨어들어왔다는 소문이 돌고있소.》

《명월구쪽으로는 선을 더 내려밀지 못하고있소?》

《더 내려밀지 못하지요. 하평, 대북쪽에서 머물러있지요. 인제도 말했지만 그 종파쟁이들의 저애를 물리치지 않고는 선을 박기가 곤난하오. 그쪽은 더욱 그놈들판이니까.…》

채경은 얼마후에야 침착히 자기가 어째서 돈화로 내려왔노라는 이야기를 하였다. 정세가 급박하게 변해가는데 따라서 혁명을 새로운 단계에로 밀어올려야 한다는 김성주동지의 구상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려주었다. 박철민은 흥분을 누르며 긴장한 표정으로 듣고있었다.

《우선 빠른 시일내로 각 지방 반제청년동맹 책임자들 회의를 열도록 준비해주오. 장소는 시내로 하지 말고 어느 적당한 농촌으로 한다든가.… 그리구 혼란이 벌어졌다는 하평과 대북쪽엔 오늘밤 나와 함께 내려가봅시다.》

《그렇게 합시다.》

박철민은 그제야 가슴이 후련해졌다. 그는 또 한참 시뻘건 얼굴을 수건으로 문질렀다.

《그런데 경주는 어데 가있소?》

《참, 그 동무는 지금 신창동이란데 나가있소. 시내주변 가까운 농촌에 나가서 그 지방 부녀회를 지도하고있소. 그런데 건강이 말이 아니요. 너무 고달프게 뛰지 말라고 해도 어데 말을 듣소.》

채경은 가슴이 쭝해졌다. 경주가 이곳으로 나올 때에 누이동생의 약해진 몸을 걱정했댔는데 그 몸을 아직 추세우지 못했단말인가.

《내가 그럼 신창동에 좀 나가보겠소.》

《나갑시다. 오빠가 가서 몸을 좀 돌보면서 뛰라고 타일러주오.》

박철민이도 함께 가자고 일어섰다. 밖에 나서니 아직 해가 적잖게 남아있었다. 들판이 저녁해발속에 누렇게 누워있다. 여기는 조를 많이 심었다. 죄다 이삭들이 패서 어떤 이삭은 개꼬리같은게 저녁바람에 설렁설렁 흔들리고있다.

둘이는 조밭사이를 우불구불 꿰지르고 나갔다. 그리고는 밋밋스름히 넘어간, 역시 조가 우거진 언덕을 넘어갔다. 거기 신창동이란 동네가 있었다.

경주가 하숙하고있는 집을 찾아가니 주인아낙네가 나와서 마당질하러 갔다고 했다.

《마당질이라니요?》

박철민은 눈이 둥그래서 물었다.

《저기 올라가다가 삼손이네라고 하는 집이 있는데 그 집주인이 지난달 돌아갔다오. 그래서 도조를 못바쳤댔는데 어제 아래마을 왕가가 와서 도조를 안바친다고 개화장으로 그 집 아낙네의 눈통을 쥐여박았다오. 그래서 오늘은 부녀회원들을 동원시켜가지구 도조 바칠 낟알을 턴다오. 아까 올라가보니 그 아낙네의 눈덕이 이렇게 부었습데다.》

주인아낙네는 제 눈덕우에 주먹을 붙이며 그렇게 부었다고 설명했다.

《괘씸한놈, 그놈이 지주로서도 제일 악독한놈이요. 가봅시다.》

박철민이 이러며 앞섰다.

둘이 큰 버드나무가 서있는 뒤로 돌아들어가니 조그만 초가집앞마당에 정말 아낙네들 대여섯이 늘어서서 도리깨질을 했다. 모두 누런 얼굴에서 땀들을 좔좔 쏟았다. 창자가 비여 치마말기가 흘러내리고 팔심이 다부지지 못해서 도리깨열이 허공에서 비치럭대다간 툭탁툭탁 마당에 내려와 맞는다. 곰팽이와 먼지가 뿌옇게 떠올랐다. 주인이 세상을 뜨는바람에 가을한 보리를 여태 가려두어서 좀이 폈던것 같다. 그 아낙네들속에서 경주도 도리깨질을 했다. 그래도 그의 도리깨질이 그중 세찼다. 도리깨열이 공중에서 우뚤우뚤 힘을 쓰며 땅에 내려와 맞군했다.

《허허, 아주머니들 수고하십니다.》

박철민이 마당으로 들어서며 인사를 건늬였다. 그제야 아낙네들이 모두 도리깨질을 멈추며 쳐다보았다.

《아니…》

경주가 오빠를 띠여보고 눈을 흡뜨며 오빠앞으로 다가왔다.

《그새 잘 있었니?》

경주는 대답을 못하고 그저 오빠를 쳐다보기만 했다. 채경은 누이동생이 더 살핏해졌다는것을 느꼈다. 병원에서 치료를 하고 나오긴 했으나 심한 출혈의 후과가 정말 여기 와서 더해진것 같았다. 그렇게 땀을 흘리며 도리깨를 치고있는데 얼굴엔 피빛 한가닥 없고 핼쑥하다. 그 예쁘고 둥글던 뺨도 무척 더 여위여졌다. 눈가장앞엔 그전에 보이지 않던 주근깨도 다닥다닥 드러나있다. 목이 설렁해져서 그런지 키만 더 커진것 같았다.

경주는 얼른 외면하며 적삼고름으로 눈물을 찍었다. 채경이의 눈구석에도 은근히 눈물이 괴였다.

《오빠, 언제 왔어요?》

얼마후에야 경주는 얼굴을 돌리며 물었다.

《응, 방금 차에서 내렸다.》

《길림엔 별일이 없으세요?》

《그럼 무슨 별일이 있을테냐? 넌 아직 몸이 시원히 추서질 못했구나.》

《이만하면 건강하죠뭐…》

경주는 억지로 짓는듯한 밝은 웃음을 지었다.

박철민은 아낙네들더러 모두 물러서라 하고 도리깨를 들고 나섰다.

《왕가 그놈을 답새기는 심정으로 두드려패야 합니다. 그래 왕가에게 바칠 도조가 모두 얼마나 됩니까?》

박철민이 도리깨를 치며 물었다.

《다섯마대는 가져가야겠어요.》

주인아낙네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며 대답했다. 왕가에게 찔렸다는 눈덕이 정말 주먹처럼 동했다. 엄마가 불성모양이니 품에 안은 어린것도 머리가 조그만 수팜송이만 했다. 아이는 젖이 안난다고 젖꼭지를 물고 늘어지며 울었다. 엄마도 함께 울었다. 아낙네들이 방안으로 들어가 젖을 빨리라고 눈기질을 했다. 그제야 그는 애기를 안은채 토방으로 올라서 방안으로 들어갔다.

채경이도 도리깨를 들고 나섰다. 그는 도리깨질이 처음이였다. 도리깨열이 공중에서 비틀비틀하자 애 둘이 술취했다고 짝짜그르르 끓었다. 아버지를 잃은 이 집 애들인 모양이다.

《술에 취한게 아니라 인제 걸음마를 타느라고 그러지 않니.》

채경이도 씽긋씽긋 웃으며 애들의 소리를 받았다. 그는 이어 도리깨질이 제격으로 되였다. 두 도리깨가 먼지를 뽀얗게 일구며 땅을 벼락치듯 내려쳤다. 아낙네들은 토방앞에 늘어앉아서 서글픈 눈을 하고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채경은 가슴속에서 뜨겁고 괴로운 생각이 뭉클뭉클했다. 짓밝힌 불쌍한 생활이 여기 펼쳐져있다. 바로 누이동생은 이 생활속에 혁명의 불씨를 붙안고 와서 이악스럽게 뛰고있다. 이 현실이 눈물을 비틀어짜는건 두말할것도 없지만 이 현실속에서 연약한 자기를 불사르며 뛰는 저 열정은 또 얼마나 가긍하고 기특한 노릇인가! 그 죽일놈들이 건강하던 애의 몸에서 피는 왜 다 빼앗아갔는가?

그는 지난해 대시위때 놈들과 결사전을 하다가 하마트면 목숨을 잃을번했던 누이동생을 눈앞에 그려보며 가슴이 후두두해졌다. 둘이 도리깨질을 하는동안 경주는 어데 가서 마대와 저울을 얻어메고 왔다. 오늘저녁으로 설겆이를 다해서 알을 마대에 퍼넣고 뜨려는것이였다. 그는 남편을 잃고 캄캄한 생활속에 주저앉아있는 한 부녀회원의 생활을 이렇게 뒤받침하며 들어일구는것이였다.

《아주머니들, 우린 인제 짚갈비를 끌어내고 키로 다듬어야 되겠어요. 봉수아저씨가 이어 달구지를 가지고 오겠댔으니까 오늘밤으로 도조를 실어날라야겠어요.》

경주가 이런 소리를 하며 먼저 갈퀴를 가지고 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는 알이 다 털린 짚을 갈퀴로 늪을 쳐서 한아름씩 안아냈다. 다른 아낙네들도 달려들었다. 채경이와 박철민은 한쪽귀퉁이로 밀려나가며 소탕전을 벌렸다. 둘이 다 얼굴에서도 팔뚝에서도 땀이 뚝뚝 떨어졌다. 짚을 걷어낸 마당엔 보리가 한마당 깔렸다. 아낙네들은 한쪽으로 그걸 키에 담아서 날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바람이 약해서 까부는것만 못했다. 모두 들어앉아 키로 까불기 시작했다. 본디와 껄끄러미가 뽀얗게 떴다. 껄끄러미가 눈에까지 날려들어가 눈물을 짜냈다. 아버지를 잃은 주인집아이도 한몫 한다고 나섰다. 그는 마대아가릴 벌리며 알을 쏟아붓게 했다. 알이 다 차면 그걸 옮겨다놓느라고 가는 목에 힘줄이 뻗쳐서 디뚝디뚝 밭은 장딴지를 옮겨짚군했다.

《결국 이렇게 해서 왕가네 고간으로 실어간단말이지…》

도리깨질을 다 하고난 박철민은 이러며 입이 쓴지 허허 웃었다. 채경은 땀을 씻으며 아무 말을 안했다. 그저 여기 와서 무엇이 사람들의 생활을 어떻게 짓이기고있다는것을 또 한번 본다는 생각을 했을뿐이였다.

날이 어슬어슬해서야 보리 다섯마대를 달구지에 실었다. 그런데 경주는 다섯마대의 보리를 싣고나서 잠간 생각하더니 달구지군에게 한마대는 도로 부리우라고 했다. 달구지군이 어정쩡해 서있자 그는 자기 손으로 부리나케 보리 한마대를 딩굴려내렸다. 그러더니 핼쑥한 목에 피빛을 올리며 보리마대를 안아들고 토방쪽으로 갔다.

《이건 량식을 해야겠어요.》

《그렇게 해도 일없을가요?》

아낙네들이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도조만 물자구요. 장리쌀리자로 한마대 더 내라는건 물수 없다고 버텨야겠어요. 어떻게 부녀회원들인 우리들이 그런 도적놈심보에 순순히 응해주겠어요.》

《하긴 그렇지. 한마대 더 내라는건 순전히 업신여기고 더 내라는것이지.》

아낙네들이 이구동성으로 경주의 말을 받았다. 부엌문앞에서 가엾은 눈을 하고 바라보던 주인아낙네는 한숨을 지으며 돌아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보리달구지가 떠나갔다. 그러고보니 결국 껄끄러미와 짚갈비섞인 한마대쯤 돼보이는 조그만 보리무지와 보리 한마대가 이 불쌍한 마가리의 몫으로 남았다.

경주는 마당의 보리무지는 래일 까불어야겠다고 하면서 멍석을 들어다가 둘러치고 돌로 지질러놓았다. 아낙네들은 시종 경주에게 신뢰의 눈길을 보내며 한숨을 짓기도 하고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주인아낙네는 그래도 수고를 해준 사람들을 대접한다면서 감자 한가마를 쪄냈다. 그리고는 채경이와 박철민을 웃방으로 청해들이고 경주더러 감자 담은 옹배기를 올려가라고 눈짓을 했다.

경주는 감자옹배기를 들고 웃방으로 올라와 저도 함께 앉아 감자껍질을 벗겼다. 부엌바닥에서도 아낙네들이 뜨거운 감자를 한개씩 들고앉아 껍질을 벗기느라고 후후 불며 야단들을 했다.

《너는 심각한 체험을 겪고있구나.》

채경이 감자를 먹으며 이야기했다.

《이런 현실을 모르고야 어떻게 혁명을 하겠어요.》

《힘들지 않냐?》

《오빠두, 힘들긴 뭐가 힘들겠어요. 설사 힘든들 어때요? 힘든게 혁명 안야요?》

경주는 감자를 벗겨놓으며 오빠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눈망울 변두리엔 오빠도 박철민이도 모르게 은근히 이슬이 돌았다. 참으로 얼마만에 보는 오빠인가! 그 그리운 오빠가 당장 이렇게 공작지로 찾아올줄은 꿈에도 몰랐다. 길림에 그대로 두고온 제비둥이같은 집이 떠오르기도 하고 대문설주에 매달은 메기입 작은방울이 떠오르기도 했다. 오누이는 인젠 다 성장해서 그 제비둥이를 박차고 대공에 날아오르지 않았는가! 그러게 인젠 서로서로 제 하늘을 날며 만나기도 이렇게 어려운것 아닐가!

《오빠, 김성주동지는 왕청문으로 갔다가 아직 길림으로 돌아오시지 않았어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단다.》

《몸은 건강하신지?》

《크게 념려하지 말아라. 요새 신동호동무가 와서 소식을 전하고 내려갔다.》

《신동호동무는 릉가에서 활동하고있다고 했죠?》

《그럼…》

《인젠 죄다 넓은 무대우로 뻗어나갔군요.》

《혁명의 폭이 그렇게 넓어지는것 아니냐?》

《그런것 같아요. 그러니까 그만치 혁명이 더욱 담차지기도 하나봐요. 저도 이번 최봉동지의 희생에 대한 비보를 듣고는 가슴이 아프기도 하고 달리 느껴지는바도 많았어요. 결국 혁명이란 몇백몇천고비의 작은 승리가 합쳐져 큰 승리, 완전승리가 올것인데 그 몇백몇천고비의 승리가 죄다 우리들에게 류혈을 강요할수도 있지 않겠는냐고 그런 생각도 해보았어요.》

《그건 새삼스럽게 생각하지 않아도 좋을 문제가 아니냐. 바로 그 힘든 투쟁자체가 혁명이 아니겠니?》

《저두 그렇다고 보아요.》

경주는 시종 눈굽에 이슬이 돌아서 오빠를 쳐다보았다. 어딘가 더 무척 숙성해진것 같은 대신에 보이지 않는 밑바닥엔 차고 날카로운것이 배여있는것 같은 느낌도 주었다. 채경은 역시 준엄한 현실이 사람을 강철로 단련시키는가보다 하는 생각을 했다.

먼 산봉우리우에 달이 떠올랐다. 달빛이 방안에 비쳐들어 그 빛을 받은 경주는 더욱 살핏하고 푸르러졌다. 채경이로서도 어째 누이동생을 대하는것 같은 생각은 없고 어느 먼 이방의 낯모를 녀자를 마주하고 앉아있는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경주는 모습도 몹시 변했다.

《경주야, 옜다. 내가 이걸 가지고 왔다.》

채경은 무언가 양복주머니속에서 푸른 천에 싼 넙적한걸 꺼내서 경주에게 주었다.

《이게 무어예요?》

《네가 아침이면 마주앉아 들여다보며 머리단장하던 거울이다. 이걸 왜 집에 내버리고 왔니?》

《오빠두…》

경주는 목이 갈린 소리를 했다. 자기가 길림에서 중학을 다닐 때 아침이면 유리 깨진걸 하나 벽에 붙여놓고 얼른얼른하는 그림자를 들여다보며 머리에 빗질을 했는데 그게 민망해서 오빠가 사다주었던 거울이다. 사각형에 뒤뻗치개까지 달려있어서 어느 온돌바닥에 놓고라도 제 얼굴을 환히 들여다볼수 있는 거울이다.

《인젠 거울을 놓고 앉아서 네 얼굴 축가는것도 들여다보며 일을 해라.》

《오빠두…》

경주는 눈물을 떨어뜨렸다.

《엥이, 사람을 울리는군. 건 뭘 그따윌 주머니에 넣고 다녀?》

박철민이 채경의 잔등판을 갈기며 그도 눈을 슴벅거렸다.

길림의 오두막같은 집에서 두 오누이가 비둘기처럼 살던 정상까지를 보았더라면 그는 더 격정을 터뜨렸을것이다.

채경이는 누이동생더러 몸을 조심하라고 각별히 타일렀다. 경주는 거울을 풀지도 못하고 앉아 자꾸 눈물을 씻었다.

이날밤 채경이와 박철민은 신창동에서 감자 몇알씩 먹고는 그길로 하평 대북지역을 향해 떠났다. 경주도 15리밖에 있는 어느 동네의 부녀회모임을 지도하러 간다면서 그들과 함께 마을앞으로 나와서 갈리였다.

《혼자 다니기가 일없겠니?》

《괜찮아요. 여긴 산이 많은데라곤 하지만 범이 있다는 소린 못들었어요.》

누이동생의 소리에 채경은 껄껄 웃었다. 경주도 웃었다. 눈물에 씻기운듯싶은 맑은 눈이 달빛에 유난히 빛났다. 그런 얼굴을 보니 채경이도 맘이 좀 훈훈해졌다.

경주와 갈리인 채경이와 박철민은 한시간안에 40리길을 대일 작정하고 나는듯이 걸었다.

박철민은 지름길을 걷느라고 나무 우거진 산비탈을 춰올랐다. 어떻게 기운이 센지 가파로운델 기여오르며 매돌같은 돌을 뽑아 굴리기도 했다.

《엥이, 운동화를 다 판을 내는군.》

그는 혀를 낄낄 갈기기도 했다. 채경은 굉장히 덤비는 친구라고 생각하며 허허 웃었다.

《자, 손목을 쥡시다. 잘못하다간 굴러날테니까.…》

바위등에 먼저 기여오른 박철민은 채경의 손목을 잡아 이끌기도 했다. 일은 그렇게 안했겠는데 손바닥살이 말가죽같이 억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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