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서《불멸의 력사》 3 장편소설
천 세 봉
( 제 2 회 )
3
소낙비는 저녁때에야 멎었다. 삽시에 검은 구름이 흩어지고 눈부신 해빛이 비쳐내리기 시작했다. 비에 씻기운 대지가 김을 물물 날리고 나무잎새들이 가는 바람에 설렁거린다. 김성주동지께서 왕청문에 당도하신것은 찬란한 석양이 마지막빛을 부어내리는 때였다. 깨끗이 씻긴 거리가 눈부신 해발로 단장하고 그이를 맞아들였다. 길바닥이 거울같이 정갈하고 서느러운 저녁바람에 가로수들이 절을 하듯 가지를 가볍게 휘저었다. 록음속에선 매미가 울었다. 한창 매암매암 청을 뽑아 우는놈이 있는가 하면 미임 하고 마지막 여운을 흘리고 날아가는놈도 있다. 그 무슨 뜻이야 있으련만 매미소리조차도 이 시각 더욱 소란해진것과 같다. 《최봉동무!》 김성주동지께서는 가벼운 걸음으로 거리를 걸어가시다가 골목길로 나오는 최봉을 발견하고 소리치시였다. 《아니…》 최봉은 그이께서 들어서시는것을 보고 아연해서 웨쳤다. 김도균을 류하쪽으로 련락을 띄워놓고 인젠 김성주동무가 이 삼엄한 판으로는 들어서지 않으리라고 믿으며 어떻게 하든지 자기 힘으로 대회를 밀고나가려고 분주히 돌아치던 최봉이였다. 《왜 이렇게 왔소. 련락을 띄웠는데…》 최봉이 이러며 그이의 손을 잡았다. 뒤따라온 도균은 막아내지 못한 자책으로 시리죽은 상을 하며 괜히 모자를 구겨쥐고 이마를 문지른다. 《수고를 하오. 도균동무로부터 자세한 형편을 알았소. 형편이 그렇기때문에 더욱 와보고싶었소.》 그이께서는 최봉의 손을 억세게 잡아흔드시였다. 최봉은 말을 못하고 얼굴이 시뻘개졌다. 그는 김도균이를 괘씸스럽게 생각했다. 중요한 임무를 맡고 달려간 그가 길을 막아내지 못하고 도리여 앞세우고 들어오다니? 《최봉동무, 우린 오다가 한촌에 들려 하루밤 쉬면서 수연동무도 만나보고 왔소. 참 좋은 처녀더군. 청총대회를 끝마치고 돌아가선 결혼식을 하기로 했다는 말도 들었소.》 《원 그걸 다 알고 왔소? 그까짓걸뭐…》 최봉은 게면쩍은듯 뒤더수기를 긁었다. 홍두깨가 치밀던 속이 좀 누글누글해진다. 《우린 은가락지도 보고 왔소. 최봉동무가 보긴 뚝박쇠같은데 다르단말야!》 차광수가 또 최봉의 떡함지같은 잔등판을 갈기며 한마디 했다. 모두 소리내여 웃었다. 《혁명도 하고 가정도 꾸리고 얼마나 좋소? 그래서 우린 회의를 끝마치고 돌아가던길에 한촌에 들려 최봉동무네를 축하해주자는 약속도 했소. 둘이 백년가약주를 드는 량옆에 서서 차동무는 수연동무의 잔에 술을 따라주고 나는 최봉동무의 잔에 술을 따라주고… 하하하.》 그이의 말씀에 더 큰 웃음소리가 터졌다. 모두 려관을 향해 걸었다. 최봉은 정황이 뒤바뀌여 가슴이 두근거리는 속에서도 남들이 못보게 두눈을 슴벅거리며 걸었다. 수연이의 생각이 날아드는것이였다. 가슴 한복판에 너무도 소중히 들어앉아있는 수연이! 맑은 이슬을 머금은 함박꽃! 아, 이 뚝박쇠한테 수연이가 있다는것은 얼마나 큰 기쁨인가! 정말 대회를 끝내고 혁명동지들과 함께 돌아가다가 결혼식을 치르게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최봉은 꿈이 부풀어 얼른 눈가장으로 손을 가져갔다. 지금 려관방에선 청년들이 법석 떠들었다. 방마다 이야기판들이 벌어지고 웃음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어떤 방에선 장훈이야 멍훈이야 하며 장기를 두는 소리도 들렸다. 문앞 기다란 마루우에도 청년들이 늘어앉았는데 여기에선 방금 학교에서 다투던 문제가 화제에 올라 모두 피줄이 일어선 얼굴들로 열을 올리였다. 그속에는 《국민부》계렬 청년들도 여러명 들어있다. 왕청문일대의 집집에 지방대표들이 가득 들었는데 들다가 남은 청년들이 모두 여기에 들었다. 현묵관이들은 다른 청년단체 대표들을 신칙하게 하느라고 자기네 계렬 청년들도 여기에 밀어넣은것이였다. 그들은 일체 말이 없었다. 모두 침울한 얼굴로 한방에 모여앉아 수군수군하다간 려관밖으로 나가기도 하였다. 얼마후 김성주동지께서 차광수, 최봉이들과 함께 려관마당으로 들어서시였다. 마루우의 청년들이 우르르 일어섰다. 김성주동지를 아는 청년들이 많았다. 다들 마당으로 달려내려왔다. 《야! 인제야 왔단말이요?》 청년들은 너무도 반가와 싱글벙글 웃으며 인사를 했다. 굴간에서 일하는 남포군같이 단벌수건을 이마에 또아리틀듯 동인 그대로 달려내려와 악수를 하는 청년이 있는가 하면 시뻘건 맨발로 뛰여내려와 손을 잡는 청년도 있었다. 그이께서는 얼굴이 환해지도록 웃으시며 청년들의 손을 잡아흔드시였다. 《수고들했소. 나는 이렇게 걸음이 늦어졌소. 아 병환동무, 명호동무… 다들 만나는군요.》 랭수마찰을 하던 청년 둘은 몸의 물기도 닦지 못하고 젖은 팔에 와이샤쯔소매를 끼느라고 덤비였다. 한 청년은 아예 앞단추를 하나도 못채우고 시뻘건 가슴팍 그대로 달려왔다. 《나를 기억하겠소? 길림대시위때 신안툰대렬에 끼워 전보대 정금석이와 함께 구호를 웨치던…》 《기억하다뿐이겠소. 북을 멋들어지게 치던걸 본 기억이 생생하오.》 마당에선 웃음소리가 일어났다. 얼마후에야 최봉이들이 그이와 함께 방안으로 들어갔다. 방문앞엔 청년들이 가득 늘어섰다. 김성주동무가 오면 《혁명당》의 책동을 짓부실수 있다느니 현묵관이들을 그전에 길림에 왔던 상해림시정부의 안창호처럼 납작하게 만들수 있을것이라느니 하며 떠들던 청년들이다. 바로 그 기대에 찬 눈들이 성을 쌓았다. 방안에선 그이의 큰 웃음소리가 울려나왔다. 최봉이 랭수를 한대접 떠왔다. 복지경 날씨에 먼길을 걸어왔는데 목이라도 추기고 땀을 들이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는 랭수를 두어모금 마시고난 그이의 손에서 물대접을 받아들고 도로 부엌으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갔다. 이날밤 왕청문엔 김성주동지께서 오셨다는 소식이 쫙 퍼졌다. 《국민부》계렬 청년들속에서도 파문이 일어났다. 그들은 숙소들에서 지난해 초겨울 길림에서 벌어졌던 대시위의 이야기를 벌리며 운동은 바로 그렇게 해야 된다고 떠들었다. 《길림독군도 움찍을 못하고 일본놈 령사관은 호된 벼락을 맞구 넘어졌다네. 그리구 송화강에 쳐던진 일본상품은 몇천만원어치인지 모른다네.》 《길림에서 그 투쟁이 벌어지는통에 할빈에선 일본상품 선박을 뒤집어엎었다는거야.》 《그것도 할빈자체가 일어난것이 아니라 길림의 줄이 뻗어들어가 들어일궜다네.》 《그러기에 리갑무선생이 1년 남짓한사이 사해를 들어일궜으니 이것을 어찌 사람들이 꾸민 일이라고 하겠는가고 경탄을 했다지.》 《경탄인게 아니라 서근하선생이 말하는데 그 령감 력사책에다 그렇게 썼다고 하데.…》 《어쨌든 대단해. 운동을 하려면 그쯤 해야지. 이건 뭐 청년단체 대표들 몇명 모아놓고 싸움을 붙이고있으니 한심하지 않아? 권모술수를 써가며…》 《기발 들고 북치며 행진하겠는데 제 기발 들어달라는것 아니야.》 《글쎄 제 기발이 뭐야. 그래 우리 청년들은 남이 내려먹이는 기발이나 들고나갈테야? 무엇때문에 저들이 남만청총을 구속하고있는거야? 물론 우리가 이때까지 국민부는 지지해왔지만 별안간에 정당은 무어고 부르죠아민주주의는 또 무언가? 난 거 민주주의란 말은 좋은데 부르죠아란 말은 딱 싫어서 죽겠어.》 현묵관이들에 대한 로골적인 불만이 터져나왔다. 그래도 당의 지도층이자 곧 《국민부》의 지도층이기도 해서 일정한 환상들이 없지도 않았는데 김성주동지께서 오셨다는 말을 들으니 웬일인지 맘이 들썽거리고 현묵관이들따위는 저쯤 아래로 내려다보인다. 려인숙에 있던 한패는 웅성거리며 거리로 나섰다. 김성주동지를 만나서 무슨 이야기라도 들어보고싶어 견딜수 없는것이였다. 왕청문의 밤거리는 오고가는 사람들로 흥성거렸다. 불시에 왜 이렇게 설레는지 알수 없었다. 물기 벗어진 둥근달이 거리를 푸르게 내려비쳤다. 어디선가 가느다란 호궁소리도 들려온다. 어느 중국사람 집에서 켜는 소리같다. 청년들은 거리로 걸어가다가 현묵관이들에게 불려가 밤새 땀을 빼운 한윤이 마주 걸어오는것을 만났다. 《어데로들 가는길이요?》 한윤이 물었다. 《려관에 좀 가보려구요.》 《려관엔 어째서요?》 《소식을 못들었소? 백산청년동맹대표가 도착했다오.》 《공산주의선전을 듣는건 삼가는게 좋지 않을가요?》 한윤은 침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는 방금 현묵관, 고인호들로부터 공산주의프락치야에 빠져 대회준비의 키를 바로잡지 못한다고 두드려맞았기때문에 은근히 주의를 주는것이였다. 청년들은 멈칫멈칫했다. 한윤은 두어깨가 처져서 걸어갔다. 《그까짓 소리를 들을게 있소? 우린 가봅시다. 공산주의라고 일면적으로 다 배격할건 없단말이요. 길림에서 벌어진 운동은 공산주의라도 로선이 새롭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옳은 말이요. 새롭게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진리의 힘을 가지고있기에 온 길림을 하루아침에 들어일궜지요. 어서들 갑시다.》 청년들은 이런 소리를 주고받으며 려관을 향해 걸었다. 려관안마당으로 들어서니 삥 돌아간 마루우에 사람들이 가득 들어앉았다. 마당에도 무슨 널판자같은걸 깔고 청년들이 앉아있는데 벌써 개인집들에 들어있던 청년들도 수태 와있었다. 모기불을 피워놓고 한창 좌담이 벌어져있었다. 《동무들이 요새 내내 그 문제로 론쟁을 했다 하기도 하고 또 그 문제에 대한 나의 견해를 물어오기도 하니 아무래도 함구무언을 할수가 없습니다. 아주머니, 또 콩 한가치 이리 주십시오.》 흰 와이샤쯔를 입으신 김성주동지께서 풋콩까는 식모에게서 콩가치를 달래서 함께 까시며 이야기를 하시였다. 최봉으로부터 왕청문형편에 대한 자세한 보고를 들으신 그이께서는 벌써 싸움을 어떻게 내밀어야 되겠다는 결심을 든든히 품으시였다. 그래서 우선 청년들속에서 일어난 그릇된 리론을 바로 깨우쳐주시려고 말씀을 시작하신것이였다. 새로 들어간 청년들도 이야기하는 청년이 김성주동지라는것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마당구석에 배겨앉았다. 《우리 조선에서 민족자본을 발전시킬수 있는가? 이런 문제를 토론하는데 공중 띄워놓고 남의 명제를 외우거나 남의 방법을 력설해선 안됩니다. 구체적인 조선의 실정을 깊이 연구하고 거기에서 된다 안된다 하는 결론을 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방금 들어와앉은 청년들은 바로 론쟁의 초점이 되여있는 문제에 말씀이 미치는바람에 버쩍 긴장해졌다. 아니 그 청년들뿐만아니라 모든 청년들이 다 그랬다. 《우리 어디 20년대에 들어와서 우리 나라 경제형편이 어떻게 됐나 좀 봅시다. 1920년에 일제는 소위 <회사령>이란것을 철페하면서 조선인자본에 대한 구속을 해소하는것 같은 놀음을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일본인자본에 대한 관세의 철페, 그에 대한 적극적인 보호, 일본자본의 급격한 수출로써 조선인자본을 다른 방법으로 눌렀습니다. 그래서 조선인자본이 줄어드는 반면에 일본인자본은 조선에 본점을 두고있는 회사의 자본만 해도 8,300만원대에서 일약 2억 3,000만원대로 비약하였습니다. 이게 재작년통계입니다.》 청년들은 모두 숨들을 후 내쉬였다. 이제야 무엇인가 정말 과학적인 이야기를 듣는것 같았다. 《일제의 자본이 홍수처럼 밀려드는통에 조선인자본은 급속하게 내리막길을 달리고있는데 그래도 일정하게 성장을 가져오는 조선인자본이 있다면 그것은 일제의 비호밑에 있는 예속자본입니다. 김연수의 방직회사를 비롯하여 은행 기타 신용기구들에 투자되는 자본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아직 생산에 대한 본격적인 투자는 없고 말하자면 산업발전과는 관계가 없는 착취가 그들의 자본축적의 원천으로 되고있습니다. 이것은 일제가 예속자본을 기른다해도 산업의 기본분야는 내맡기지 않는다는것을 말하는것입니다. 물론 개중에는 일제의 자본과 결탁하여 동업으로 하는 산업자본이 있기는 하지만 이건 철도회사, 동척, 불이상업회사 등에 극히 미미하게 발목을 밀어넣고 리윤을 핥아먹는 자본입니다. 이 예속자본은 이렇고 지금 중소기업은 어떤 형편인가? 아주머니, 콩단을 아예 마루우에 올려놓으십시오.》 《제 한가지 묻겠습니다.》 마당가운데서 불쑥 한 청년이 일어서며 말했다. 낮에 학교에서 자유경쟁을 력설하던 조동식이였다. 그는 중학교도 졸업한, 왕청문에서 멀지 않은곳에 있는 청년인데 한마디 겨루어보자는것 같은 자세였다. 《무슨 이야깁니까?》 그이께선 달빛에 안광을 번쩍이며 물으시였다. 《일제가 <회사령>을 철페한것은 그놈들이 어떤 속심으로 하였든지간에 조선인회사의 자유로운 설립을 허용하는것인데 이 자유경쟁의 길을 민족자본이 잘해내지 못하기때문에 발전하지 못하는 점은 없지 않겠는가 하는 그것입니다.》 《자유경쟁의 길?》 그이께서는 웃으시였다. 《그걸 자유경쟁의 길이라고 보는것은 엄청난 잘못입니다. 놈들의 이 <회사령>이란 무업니까? 이건 조선민족자본의 장성을 로골적으로 억제하면서 일본자본의 투자를 촉진시키기 위해서 만들어낸 법령인것입니다. 놈들은 이 법령을 휘두르면서 1910년대에 이미 조선의 경제명맥을 다 장악해쥐고 산업분야에서도 저들의 지반을 꾸렸습니다. 동시에 정치적지반도 강화시켰단말입니다. 이렇게 송곳들어갈 틈이 없게 만들어놓은 조건에서 <회사령>을 철페한것인데 이걸 자유경쟁의 길이라고 본단말입니까? 여기 어느 구석에 일제의 독점적투자권을 침범할 구멍이 있다고 봅니까? 바로 이 <회사령>철페를 자유경쟁의 길로 믿는데서 민족자본을 발전시킬수 있다고 보는 착오가 나올수 있습니다.》 그이의 말씀은 무척 부드러우시였다. 조동식은 정통을 두드려맞았다. 마루우의 청년들이 낯을 수그린 그를 괘씸스럽게 쏘아보았다. (빌어먹을자식, 저자식은 뭘 안다고 밤낮 자유경쟁이야? 남만청총엔 별 도깨비가 다 있어.…) 그이와 좀 동안이 뜨게 마루우에 앉아있는 차광수, 최봉이들도 신중한 표정으로 조동식에게 날카로운 시선을 보냈다. 그들은 지금 그이의 신변을 념려하여 어디서 바스락소리만 나도 긴장해지는 판이였다. 그이의 말씀에 조동식은 인젠 입이 아주 얼어붙었다. 곁에 앉아있는 청년들도 쓸데없는 질문을 한다고 해서 그러는지 그를 곁눈질로 흘겨보았다. 그이께서는 웃으시며 다시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씀을 이으시였다. 《우리 나라에는 자유경쟁의 길이 있을수 없습니다. 그것은 모래터우에 집을 짓겠다는것과 같은 허황한 공담입니다. 생각들 해보시오. 일제에게 주권을 빼앗기고 땅을 빼앗기고 온갖 경제명맥을 다 빼앗기여 살자리조차 없어 조국을 떠나 이역땅으로 류랑해오는 형편인데 어디서 어떻게 자유경쟁을 하고 자본을 발달시킬수 있습니까?… 가만, 여기 동무들중에서 머슴을 사는 동무가 없습니까?》 그이께서는 이렇게 물으시며 장내를 돌아보시였다. 청년들이 모두 머리를 숙이고 앉아있는데 뒤쪽에서 한 청년이 여기 한명 있다고 말했다. 《누굽니까?》 그이께서는 눈빛을 빛내며 물으시였다. 청년들이 어서 일어서라고 떠들자 토목중의적삼을 입은 청년이 푸시시한 머리를 긁으며 일어섰다. 《어디서 머슴을 삽니까?》 《여기서 한 30리 떨어진 옥수동에서 사우다.》 그이의 물음에 일어선 청년이 거북스럽게 대답했다. 《그래 머슴을 살아가지고 돈을 모을수 있을것 같습니까?》 《돈말이우다? 먹고 입지도 못하는데 돈을 어떻게 뫃는다구 하우다?》 머슴군청년의 퉁명스런 말에 그이께서는 호방하게 웃으시였다. 마당에 앉아있던 청년들도 웃었다. 《옳습니다. 머슴을 살아가지고 무슨 돈을 모을수 있겠습니까? 지주의 채찍밑에서 지주의 땅을 호미질해가지고야 동전 몇잎인들 주머니에 들어오는것이 있겠습니까? 우리 나라에서 민족자본을 발전시키자는것은 바로 지주의 집에서 머슴을 살면서 돈을 모아 부자가 되자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 나라는 일제의 식민지입니다. 말하자면 일제의 노예이고 머슴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자유경쟁을 하고 민족자본을 발달시킬수 있겠습니까?》 《우리 지주령감두 일만 잘하면 부자가 될수 있다구 날 얼리군하우다. 헹, 내가 그따우 소리에 속을줄 아우다?》 머슴군청년이 저혼자 분기가 올라 한마디 내뱉으며 주저앉는바람에 청년들은 폭소를 터뜨렸다. 그이께서도 잠간 웃으시고나서 말씀을 이으시였다. 《옳습니다. 머슴군이 부자가 될수 없듯이 식민지나라에서는 민족자본을 발달시킬수 없습니다. 민족자본을 발달시킨다고 하는것은 우리 나라같은 식민지가 아닌 나라, 주권이 있고 자기 민족이 자기 마음대로 자기 땅을 디디고있는 나라에서나 들고나설수 있는 주장입니다. 그런 주장을 우리 나라에 가져다가 휘두르는것은 너무도 엉터리이고 뜬 공담입니다. 왕청문엔 지금 우리 나라 현실과는 맞지 않는 이 엉터리 주의주장을 기발처럼 들고나서서 떠드는 사람들이 있는것 같습니다.》 청년들은 모두 머리를 숙였다. 현묵관이들을 아주 발가놓지 않고 치는 말씀이 더욱 충격을 주는것 같았다. 그들은 서로 몽둥이질하듯 리론투쟁을 하긴 했는데 어쩐지 죄다 땅에 발을 붙이지 못하고 공중에 떠서 웨친것 같은 생각만 들었다. 역시 김성주동무가 다르긴 다르다고 느껴졌다. 현실분석의 깊이, 거기에 사람을 납득시키는 강한 힘이 있는것 같다. 《국민부》청년들은 그이의 얼굴을 다시 우러러보았다. 달빛받은 환한 얼굴이 내내 유순하게 웃고있다. 손을 잠시도 쉬지 않고 풋콩을 한줌씩 까선 려관식모앞에 있는 큰 함지박에 담군한다. 상상이외로 너무도 소박하다. 《이런 공담으로 시간을 보내선 안됩니다. 지금 우리 민족앞에 나선 선차적인 과업은 일제를 치고 나라를 찾는것입니다. 그러자면 정견의 차이와 사상대립을 극복하고 2천만 민족이 하나의 단합된 큰 불덩어리가 되여 일제를 타승하는 싸움에 궐기해야 합니다. 우선 나라를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번 <남만청총대회>도 바로 이 목적을 들고 나서야 합니다. 그런데 회의를 하기전부터 이런 쓸데없는 싸움판을 벌려놓아서야 되겠습니까? 우리의 앞에는 이러저러한 유혹이 나타날수 있습니다. 우리의 눈을 현혹시키는 그런 리론, 그런 주장들이 앞에 장막을 칠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유혹에 빠져들어가지 말고 어느것이 진리인가를 똑똑히 가려보고 바로 그 길로 나가야 합니다. 그 길우에서 한마음한뜻으로 굳게 뭉쳐 하나의 강철대오가 되여 일제를 치며 앞으로 달려나가야 합니다.》 그이께서는 콩을 까시던 손을 들어올려 뭉그려쥐시고 흔드시였다. 그렇게 온화하시던 얼굴우에 무엇인가 위압하는것 같은 빛이 얼른 비꼈다가 사라진다. 《옳소.》 《옳소.》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올랐다. 은근히 심호흡을 하는 청년도 있었다. 김성주동지께서 무슨 말씀을 더 하시자고 하는데 대문간쪽에서 큰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길림에서 회장이 왔다구?》 서늘한 베옷을 입은 서근하가 둥글부채를 들고 활개를 휘저으며 들어왔다. 그는 김성주동지께서 길림류길학우회의 회장이래서 그렇게 불렀다. 《아 선생님, 그러지 않아도 찾아뵙자고 했댔습니다.》 그이께서는 와이샤쯔우에 웃옷을 걸치시며 토방으로 내려서시였다. 서근하가 청년들이 앉아있는곳으로 비집고 들어와 마당에 내려선 그이의 두팔을 꽉 부여잡았다. 《우린 몹시 기다렸네. 그래 리갑무선생이랑 다 별고없으시겠지?》 《네, 건강히 지내십니다.》 《반갑네. 왜 좀 빨리 와주질 못했나. 우리도 요새 당을 하나 결성했다니까. 우리가 결성한 당두 사회적평등을 위해서 민생문제를 중요시한다네. 말하자면 로동자, 농민문제를 보는데 공산주의적요소가 좀 있다니까…》 《그러지 않아도 그 이야기를 자세히 들으려던 참입니다. 마루우로 올라가시지요.》 그이께서는 몸이 더 불은것 같은 서근하를 앞세우며 마루우로 올라가시였다. 그통에 마당에 앉아있던 청년들은 우르르 일어섰다. 모두 대문쪽으로 밀려나가며 서근하가 쓸데없이 달려들어 판을 깬다고 욕설을 했다. 《흥, 나무군첨지같은것이 달려들어 <혁명당>선전을 하네그려.》 《선전을 하는데 공산주의요소가 좀 있다 어떻다 하는 소리는 왜 하나?》 《그건 현묵관선생의 전술을 배워서 필요한 때 떠는 아양이라네.》 《아양을 떨려면 기생을 하지 혁명을 할게 있어?》 청년들이 와그르르 웃었다. 그들은 들끓으며 거리로 밀려나왔다. 바로 이런 때 한윤은 자기 하숙집방안에 골을 동이고 누워있었다. 자기가 고통을 겪는 일이 분해서 견딜수 없었다. 아무래도 현묵관이들의 말이 옳은 말인것 같다. 그들의 영향밑에 있는 《남만청총》이라면 의례히 《혁명당》기발을 들고 대회준비를 적극 내밀었어야 할 일인데 자신은 공산주의프락치야에 빠져들어가 얼떠름한 자세를 취했다. 누구보다도 최봉이탓이였다. 그가 아니라면 일이 얼마나 편안히 됐겠는가. 현묵관이들이 하라는대로 했으면 자기는 고통받을 일도 없었을것이다. 더구나 《혁명당》의 정강이라는것이 밑바닥엔 사회주의와 상통한것이 있다고 볼수 있는데… 한윤은 그동안 자기가 사방에서 압력을 받아온것이 최봉이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자 명치끝에서 치밀어오르는 울분을 억제할수가 없었다. 그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앉았다. 골을 동였던 수건도 풀어던졌다. 그리고는 기가 차서 자꾸 담배를 피웠다. 이러는데 누가 문을 두드리며 들어섰다. 뜻밖에 차광수였다. 《아니…》 《한윤동무!》 차광수는 그의 두손을 꽉 부둥켜잡았다. 《이게 얼마만이요?》 《정말 오래간만이구만.… 나도 동무가 길림에 와있다는 소식은 들었소. 그래 김성주동무와 함께 왔소?》 《함께 왔소. 참 동경에서 헤여졌다가 여기 와서 다시 만날줄은 몰랐소. 키도 어방없이 커지고… 몸도 동경에 있을 때보다…》 《동경에 있을 때가 언제라구 그러오.…》 《하긴 그렇지.… 하하하.》 둘이는 손을 맞잡은채 자리에 앉았다. 《아버지는 아직도 독립군을 하오?》 《지난해에 돌아가셨소.》 《음… 그래 아버지의 뒤를 잇느라고 여기서 뛰고있군?》 차광수가 웃자 한윤이도 시들하게 웃었다. 사실 둘이는 일본 동경에서 함께 고학을 했다. 둘이는 학업에 정진하면서 저들의 장래를 조국광복하는 싸움에 바쳐야 한다는 결심도 든든히 다졌다. 더구나 한윤은 자기 아버지가 어느 독립군에서 중진이라는 자랑도 하며 학교를 마치고는 압록강을 건너가 아버지가 있는곳으로 찾아가보아야겠다는 소리도 했다. 바로 한윤은 벼르던대로 그렇게 했다. 그런데 결국 둘의 길이 오늘에 와선 이렇게 달라졌다. 한윤은 반갑던 정도 잠간이였다. 자기를 짓뭉개는 압착기는 현묵관이들뿐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산주의편에 점점 더 만만치 않은 사람들이 가담해나서는것 같아 은근히 가슴이 죄여들었다. 그의 표정은 더 어색하게 변해갔다. 얼마후 차광수는 대회준비가 어떻게 돼가느냐고 물었다. 한윤은 준비가 돼간다고 데면데면하게 대꾸하였다. 《왜 어데가 아파서 그러오?》 《골이 좀 아프오.》 그는 풀어던졌던 수건을 도로 끌어다 골을 동였다. 차광수는 한윤의 심정을 꿰뚫어보았다. 그는 그의 립장이 흔들리지 않도록 단단히 바로잡아세워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바로 이러는데 고인호가 문을 열고 쑥 들어섰다. 《왜 꾸지람을 좀 들었다고 골을 동이고 앉아있나?》 고인호가 방안으로 들어서며 눈길이 거칠어져 한마디 건늬였다. 한윤은 대꾸를 안했다. 차광수는 이게 바로 《혁명당》패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꺼내려던 말을 그만두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누구야?》 고인호가 밖으로 나가는 차광수에게 턱질하며 물었다. 《동경시절의 동창생입니다.》 《공산당은 아닌가?》 한윤은 또 대꾸를 안했다. 《인젠 공산당비슷한 청년들과는 일체 접촉을 말게. 접촉을 해도 정신을 똑바로 가지고 접촉을 해야 돼. 내가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 자네를 너무 혹독히 두드린것 같아서 가슴이 아파 찾아왔네. 난 자네를 그저 자네 하나로만 보지 않고 돌아가신 자네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보네. 무슨 소린지 알아듣나?》 《네, 들어요.》 고개를 숙이고 앉아있는 한윤이는 기여들어가는 소리로 대꾸했다. 지난해 류하에 계시던 아버지가 돌아갔을 때 고인호가 달려와서 아버지의 여윈 다리에 수의가랭이를 끼워주며 《형님! 형님!》하며 목놓아 통곡하던 그 광경이 떠올라 한윤은 두눈을 슴벅거렸다. 《더두 말구 자네는 자네 아버지 절반만큼만 똑똑한 사람이 되여주길 바라네. 독립군들속에서도 자네 아버지가 제일 대바르고 예견성도 있고 한번 마음먹은 일이라면 못해내는 일이 없었네. 나두 자네 아버지밑에서 독립운동가로 된 사람이야. 그런데 자네가 그 좋은 기골에 아버지의 뒤를 잇지 못하고 그렇게 공산당프락치야에 들어서 놀아? 자네 아버지가 살아계신다면 그 대바른 성미에 벽산이 무너져나가게 소리치며 자네 종아릴 치지 않았겠나?》 한윤은 수건을 벗어서 눈물을 씻었다.
4
현묵관은 울기가 뻗쳐서 시간을 보냈다. 그는 인젠 《혁명당》정강이나 선전해가지고는 일이 안될줄 알고있었다. 우선 그 정강이라는것이 공산주의계렬 청년들이 끼여들어 기염을 올리며 론쟁을 벌리는바람에 숭숭 구멍이 나기 시작했는데 백산청년동맹대표가 당도하자 아주 넝마가 되고 헌신짝같이 배척을 당했다. 이야기를 들은즉 청년들속에선 제 나라 현실을 놓고 제 머리로 사고하고 제 정신으로 나갈 길을 찾자는 바람이 일어났다는것이였다. 현묵관이 듣기에도 그 주장에는 반박할 근거가 없었다. 남의것을 그대로 옮겨놓자니까 무언가 갈팡질팡하게 되며 모순속에 빠지는것 같았는데 바로 그것을 호되게 후려쳐넘기는것 같았다. 현묵관은 헤여날 출로라도 찾아보려는듯 등의자에 기대앉자 눈을 꾹 감았다. 눈을 감은 그의 기상은 더욱 사나와보였다. 눈덕이 우둥우둥하고 관골도 주먹같이 두드러졌다. 약간 희여지기 시작한 머리, 꾹 다문 검푸른 입술, 무언가 만만치 않은 풍상을 헤쳐온듯싶은 의지가 드러나보인다. 그는 무슨 신음소리같은 소리를 내며 몸을 뒤채다가 등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는 뒤짐짚은 손을 돌멩이같이 틀어쥐였다폈다 하며 마루우를 열심히 거닐었다. 이러는데 흰 다부산자를 입은 고인호가 단장을 휘저으며 안마당으로 들어섰다. 그는 마루우로 올라서듯마듯 부채를 꺼내서 부치며 무슨 말인지 《인젠 다 틀렸소.》 하고 부르짖었다. 현묵관은 잠시 말없이 고인호를 쏘아보았다. 고인호는 방금 현묵관이 잠을 청하던 그 등의자로 가서 주저앉으며 땀이 번질거리는 이마를 손수건으로 닦았다. 《인젠 모든것이 다 저쪽에 넘어가버렸소. 한놈도 그쪽을 반대하는놈은 없단말요. 공산주의의 민족허무적인 본질을 까밝히라고 그만치 뒤를 쑤셔주었는데 그 소리를 들고일어나는놈이 없단말이요. 내 의견은 인제라도 현선생이 나서서 직접 대회준비를 틀어쥐는 길밖에 없다고 보우. 그러지 않고는 수습할 길이 없소.》 그래도 현묵관은 말이 없었다. 두눈에 독이 올라서 마루우를 거닐기만 했다. 불시에 백산청년동맹대표의 말이 머리속에 되살아나는것이였다. 나라의 광복을 위해선 자본발달이요, 민생문제요 하는 공리공담을 할것이 아니라 조선인민이 단결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운동이 대체로 파쟁때문에 피해를 입었으니 그 페단을 철저히 가셔버려야 한다, 그리고 자신은 그런 주장, 그런 포부를 안고 청총대회에 왔노라고 했다. 현묵관은 그게 진심이 느껴지는것 같은 말이라는데서 주춤거려지는 생각도 있었다. 무엇인가 커다란 정의에 순응하지 못하는것 같은 자기자신이 두드러져보여 한편 괴롭기도 했다. 《우리가 지금 이렇게 수수방관하고있어서야 되겠소? 난 이제라도 현선생이 직접 나서서 준비위원들부터 재검토하고 일을 고쳐 내밀어야 한다고 보우. 백산청년동맹대표가 왔다 해도 지금 그렇게 할수 있는 여지가 얼마든지 있소.》 고인호는 등의자의 팔굽받이를 치며 불쑥 일어섰다. 그는 헐떡거리며 말을 이었다. 《이게 무슨 꼴이요? 당을 결성해놓듯마듯 기발이 뺨따귀를 맞으니 세상이 웃을 일 아니요. 이런 당을 의당치국의 정당이라고 일러주겠소?》 현묵관은 큰숨을 씩 내쉬며 이번엔 그가 등의자로 가서 한아름되는 몸집을 집어던진다. 그는 백산청년동맹대표의 말을 숨가쁘게 다시 새겨보며 처진 볼을 푸들푸들 떨었다. 《빨리 뒤손을 쓰오. 모두 테로해서 없애버리오.》 현묵관은 등의자의 팔굽받이를 가볍게 치며 낮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뭐 테로요? 난 인젠 그런짓은 못하겠소. 내가 독립군 우두머리들밑에서 그짓을 해온것만도 지금 끔찍스럽게 느껴지는데 또 동족의 피를 손에 묻혀요? 난 못하겠소.》 고인호는 마루끝에 나서서 재게 부채질을 하며 현묵관의 지령을 거부했다. 《못하면 우리가 아주 뜨물바가지를 뒤집어쓴단말이요. 내가 나서서 바로잡을 일이면 이러질 않겠소. 인젠 다 틀렸소. 내가 사태를 정확히 파악해쥐였소. 인젠 뒤손을 쓰는 길밖엔 없소. 오늘밤 곧 집행하오.》 《난 정말 못하겠소. 내가 생전에 동족의 피로 손바닥을 매질하고야 죽어서 저승엔들 바로 가겠소?》 고인호는 제 가슴을 두드렸다. 《못하면 당을 개 물어간것 같이 만든단말이요? 이것도 조국광복을 위한 싸움이요. 싸움을 집어내던지고는 저승에 바로갈수 있을것 같소? 저승에 먼저 가있는 독립운동자들이 싸움을 피해서 온놈이라고 뭇매로 사등이뼈를 부러뜨리자고 들거요. 집행하오. 명령이요.》 현묵관이는 또 등의자의 팔굽받이를 두드렸다. 고인호도 그제야 큰숨을 내쉬였다. 그도 그러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하는것이다. 사촉을 받고나서야 가슴속에서 검은 피가 굽이치고 사나운 세월 뒤장난질을 해온 잔인성이 지렁이같은 긴 몸뚱아리에 구핏구핏 그대로 드러난다. 그는 화닥화닥 부채질을 하며 담배 한대를 꼬나물었다.
5
이날밤이였다. 면사를 가리운듯한 뿌연 하늘에 달무리가 섰다. 모든것이 멀끄럼하게 보였다. 종일 긴 칼을 뽑아들고 목젖이 닳게 호령을 지르던 정두진이 독립군 수십명을 데리고 중학교주변의 수수밭속으로 숨어들어갔다. 뒤엔 캡을 쓰고 색안경을 낀 고인호가 등을 굽히고 따랐다. 그도 오늘밤엔 군복을 입고 각반을 쳤다. 수수밭속은 훅훅 무더웠다. 며칠전 내린 소낙비로 하여 아직도 밭고랑의 흙이 물씬거리고 어떤덴 물이 차있기도 했다. 《소리들을 내지 말어.》 뒤따르는 고인호가 독립군들에게 주의를 주었다. 그러나 수수대잎이 고랑을 덮어서 그걸 헤치고 나가려니 아무래도 소리가 났다. 어데서 물에 빠지는것 같은 철버덕소리도 들려왔다. 《흉물같은것들!》 이번엔 앞에서 정두진이 두덜거렸다. 얼마후 그들은 중학교 정문앞에 이르렀다. 모두들 땀을 씻느라고 야단들이였다. 고인호와 정두진은 정문앞에 우뚝 나서서 운동장 저쪽의 교사를 살펴보았다. 두개의 교실에 불이 켜져있었다. 한 교실에선 박수소리가 요란히 울려나왔다. 울멍줄멍한 청년들의 머리가 유리문너머로 바라다보인다. 누가 연설을 하는지 우렁우렁한 음성이 들려나오고있다. 《어떻게 된거야? 오늘밤에도 연설이 벌어졌단말인가?》 고인호가 캡의 채양을 올려밀며 중얼거렸다. 정보에 의하면 오늘밤엔 준비위원들만 모여들어 대회문건을 작성한다고 했는데 교실엔 다른 광경이 벌어져있지 않는가! 역시 백산청년동맹대표가 또 무슨 연설을 하고있는것 같다. 《조동식이, 그놈두 나쁜놈의 새끼 아닌가? 연설회가 있는걸 준비위원들만 모인다고 거짓말을 해?》 고인호가 욕지거리를 했다. 《좀 기다려봅시다.》 정두진이 고인호의 팔소매를 이끌고 수수밭속으로 도로 들어갔다. 독립군들은 기척이 없이 앉아있었다. 풀벌레가 요란히 울고 무엇이 수수밭속을 푸륵푸륵 날기도 했다. 수수대에 부딪쳐 깩소리를 내는걸 보니 매미였다. 독립군 한명이 담배를 피우다가 정두진이한테 꾸중을 들었다. 한참 앉아서 기다리는데 뒤에서 또 철버덕소리가 났다. 누가 미끄러져 넘어지는것 같다. 《뭐야?》 고인호가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어느 녀석이 뒤를 보느라고 그러는것 같습니다.》 《망할놈의 새끼, 저런걸 뒤손으로 해제껴야 해.…》 그저 뒤손이였다. 인젠 흥분이 와서 아무나 쳐죽이고싶은 심정이다. 배속에서 홍두깨가 치밀어 저희들끼리 윽윽했다. 독립군 하나는 제 볼따귀에 붙은 모기를 때려잡다가도 정두진이한테 총살을 해서 죽일놈이란 호된 욕지거리를 들었다. 밤이 적잖게 깊어서야 연설회장이 터져서 청년들이 밖으로 밀려나왔다. 수백명 되는것 같은 청년들이 김성주동지를 옹위하고 학교마당으로 밀려나온다. 모두 제 정신, 제 방법으로 혁명을 해야 한다는 연설을 듣고 왁작 떠든다. 《음, 눈이 떠지는것 같군!》 《참말이요. 그 누가 저런 연설을 해낼수 있겠소!》 어떤 청년은 즉흥시를 읊기도 했다. 《오 <조선혁명당>기발이여! 가라! 찢어져라! 우리의 창공엔 너의 휘날릴 자리가 없다.》 《거기에 한마디 더 붙여야 해.》 《뭐라고?》 《오 현씨여! 너의 집은 거미줄 드리운 빈 집, 진리가 없는 빈 집, 철학이 없는 빈 집, 갈개지 말고 자중하라! 자중하라!》 폭소가 일어났다. 고인호들은 괴멸된듯 숨기가 없었다. 모두 밭고랑에 머리를 처박고 앉아있었다. 이런 경우에 들고일어났다간 뼈도 못출것 같아 은근히들 떨었다. 그들의 머리우로는 개똥벌레들만 작은 초롱을 켜들고 분주스럽게 날았다. 이날밤 학교에서 연설을 끝내고 돌아오신 김성주동지께서는 그길로 한윤을 찾아가시였다. 그동안 차광수가 몇번 찾아다니며 바로 서달라고 설유했는데 오늘밤에도 그는 학교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그래서 오늘밤엔 그이께서 직접 찾아가시였다. 그런데 그는 현묵관이 불러서 나갔다는데 돌아오지 않았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땀을 씻으며 한참동안이나 기다리시다가 려관으로 돌아오시였다. 인젠 부득이 한윤을 제외해놓고라도 대회를 내밀어야 되겠다는 생각도 하시였다. 그런데 려관앞에 이르시니 청년들이 뜰에 나와 법석 끓고있었다. 대회문건을 작성하던 차광수가 언제 왔는지 달려들며 《성주동무!》하고 소리를 질렀다. 《왜 이러우?》 《성주동무, 문건을 작성하던 동무들이 죄다 결박당했소. 나도 결박을 당했댔는데 요행 탈출해왔소.》 《어느놈들한테?》 《고인호들이 독립군을 몰고 달려들었소. 성주동무, 여기도 위험하오. 독립군들이 다 들고일어났소.》 《무슨 소리요? 빨리 가봅시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급하게 뛰시였다. 려관에 있던 청년들도 모두 뒤따랐다. 차광수는 넋이 빠진듯 뛰지 못하고 휘적휘적 뒤따라 걸었다. 정말 문건을 작성하던 교실이 온통 수라장이 되였다. 걸상과 책상이 군드러지고 서류가 한교실 흩어졌다. 여기저기 피가 뛰고 흙투성이의 발자욱들이 마루우에 짓이겨져있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우뚝 서신채 말씀이 없었다. 넓은 두어깨가 눈에 띄우게 파동이 일어났다. 《저 개자식들이 숱한 청년들을…》 한 청년이 손바닥에 주먹을 치며 울음을 터뜨렸다. 모두 낯빛들이 시꺼멓게 죽었다. 청년들이 흩어진 문건들을 들어보기도 하고 진흙발자욱을 조사해보기도 했다. 교실바닥에 떨어져있는 만년필을 주어들며 어린애 울음소리를 내는 청년도 있었다. 《나갑시다. 어데로 끌어갔는지 뒤쫓아봅시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청년들을 데리고 교실밖으로 나오시였다. 바다가 뒤번지는것 같은 엄청난 분노를 참아내시며 출입문밖에서부터 발자욱을 살펴보시였다. 날이 환히 밝아 발자욱들이 죄다 뵈였다. 교정뒤문쪽 진탕길에 숱한 발자욱이 짓이겨져있었다. 독립군들이 신고다니는 지하족자욱이 수두룩했다. 발자욱들은 후문밖의 수수밭머리로 곧장 나가서 벌을 향해 올라갔다. 땅이 마른곳에선 발자욱들을 잃어버리고 한참씩 헤매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따금 피가 흐른 자욱도 보였다. 줄곧 흘리며 갔는지 길이 내내 시뻘겋게 젖어있기도 했다. 길엔 뒤축이 물러난 운동화 한짝이 벗겨져있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운동화를 들어보시며 최봉의 운동화가 아니냐고 물으시였다. 《옳소. 여기 와서도 돗바늘로 뒤축을 꿰매서 신는걸 보고 내가 가슴이 아팠던 일이 있소.》 한 청년이 운동화를 받아쥐더니 컴컴한 빛을 띄우며 대답을 했다. 그다음엔 길에 다섯발가락이 쩍 벌어진 맨발자욱이 듬성듬성 섞여나갔다. 청년들은 눈물을 떨구며 그 발자욱을 따라갔다. 얼마 안가선 진탕속에 고무신이 또 한짝 벗겨져있었다. 되게 두드려몬 모양이였다. 아침해빛이 비쳐내렸다. 불같이 뜨거운 해빛이였다. 그이께서는 땀을 흘리시며 발자욱들을 따라가시였다. 그러나 발자욱은 풀밭이 펼쳐진곳에 와서 없어져버렸다. 그담엔 농토가 없는 초원이여서 길이 끝나버린것이였다. 청년들은 해종일 초원을 헤매였다. 멀리 괴모산밑까지 샅샅이 흩어져 들어갔다. 개울웅뎅이같은데도 죄다 뒤지였다. 그러나 아무데도 그 무슨 흔적이 없었다. 석양이 되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청년들과 함께 풀밭에 앉으시였다. 가슴이 쓰리고 아프시였다. 세상에 이렇게도 무서운 참변이 생겨날수 있을가. 그 펄펄 뛰던 청년들이 이 세상에서 아주 흔적이 없어졌단말인가. 불붙는 눈동자에 미래를 그리며 열변을 토하던 그 애동초목들이 자기 흔적을 속속들이 걷어가지고 허허공간에 넋을 뿌려던졌단말인가. 그처럼 믿음직하고 성실하던 최봉이 영원속에 추억만 남겼단말인가. 김성주동지의 눈앞으로는 최봉의 애절한 뒤그림자같은 한촌의 처녀가 얼른 다가와 수집게 절을 하고 사라지기도 한다. 가슴속에서 타번지는 어마어마한 분노를 눌러내시며 그이께서는 터져오르는 오열을 참으시였다. 청년들도 울었다. 몸부림을 치며 울었다. 《최봉동무!》 《기철동무!》 《동환동무!》 누군가 푸른 하늘에 대고 여섯명 청년의 이름을 부르기도 했다. 얼마후에야 그이께서는 절통한 심정을 누르시며 청년들을 데리고 학교로 도로 내려오시였다. 백양나무그늘이 덮인 학교운동장엔 청년들이 가득 모여들어서 끓었다. 보복을 가하자고 떠드는 소리도 일어났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아침에 들어가셨던 교실로 다시 들어가셨다. 와이샤쯔가 땀에 푹 젖고 복지경 해빛에 목도 검붉어졌다. 그이께서는 청년들에게 교실을 정돈하고 대회문건들을 내다가 불을 지르라고 말씀하시였다. 무엇인가 단호하게 새로운 결심을 품으신것 같았다. 청년들이 나딩군 책상과 걸상들을 바로잡아놓고 흩어진 문건들을 주어올렸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다시 학생들이 공부할 방이니 피흔적도 깨끗이 닦고 진탕도 씻어내라고 이르시였다. 얼마후 그이께서는 문건이 타는 연기를 등지시고 급하게 현묵관이네 집을 향해 걸으시였다. 도저히 그냥 내버려두실수가 없었다. 그만큼 간곡히 민족단합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는데 파렴치한 악당들은 결국 이런 식으로 대답해왔다. 이 더러운놈들의 정수리우에 철추를 내리지 않고 어떻게 그냥둔단말인가! 거리로 한창 올라가시는데 려관집 식모가 마주 걸어내려왔다. 독립군선생 한분이 와서 빨리 데려다달라고 해서 학교로 가는길이라는것이였다. 식모를 앞세우고 려관으로 오시니 서근하가 와서 기다리고있었다. 마루우에 앉았던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침통한 낯빛으로 아무 소리없이 그이를 맞았다. 그이께서도 말씀이 없이 마루우로 올라서시였다. 《학교에서 오는길인가?》 서근하가 물었다. 《네.…》 《…》 《나는 <혁명당>이 이런짓을 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이께서 먼저 한마디 던지시였다. 낯빛이 엄숙하시였다. 서근하는 재게 부채질을 하며 의연히 말이 없었다. 그는 휘유 긴숨을 내불며 땀발이 선 이마를 손수건으로 문질렀다. 《나는 물론 서선생이 이런 일에 가담했으리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국민부>와 <혁명당>의 지도적위치에 있으니만치 말씀을 해둡니다만 우리 민족이 천추를 두고 치를 떨 사건이 이 왕청문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아두시는게 좋겠습니다.》 《회장, 나도 할 말이 없네. 누가 이런 일이 벌어질줄이야 꿈엔들 상상했겠나. 내가 리갑무선생한테 가서 무어라고 여쭙겠나. 그 선생이 나를 엎어놓고 곤장으로 치지 않겠나. 죽이자고 들지 않겠나? 그건 그렇고 이 긴박한 순간에 그런 이야긴 거두자구. 그리고 회장도 지금 당장 이 왕청문을 떠나는게 좋겠네. 신변이 위험하니까.…》 서근하는 화닥화닥 부채질을 하며 웨쳤다. 그도 극도로 흥분했다. 《념려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러나 나는 청년들을 테로한 장본인들을 좀 만나보고야 떠나겠습니다.》 《현묵관이나 고인호를말인가?》 《그렇습니다. 그 추악한 몰골들을 한번 보고 떠나겠습니다.》 《못가네. 그들은 만날 형편이 못되네. 지금 눈에 피가 올라서 갈개고있네. 여차하면 독립군무력을 죄다 들어일굴지도 모르는 판이야.》 《독립군무력을 내몬들 어떻습니까? 어떤놈이 무슨짓을 한들 우리의 사상이야 구속할수 있겠습니까?》 김성주동지께서는 서근하와 말씀을 끊으시고 도로 마루를 내려서시였다. 도도하고 근엄한 기상에 서근하도 움이 질렸다. 그이께서 대문밖으로 나서시는데 방금 한윤을 쏘아죽이자고 그의 하숙집에까지 달려갔다온 차광수가 앞에 와서 막아섰다. 얼굴에서 땀이 철철 흘렀다. 《어디로 가자고 이러우?》 《내가 현묵관이들을 좀 만나보겠소.》 《못가오. 지금 저쪽에서 독립군들이 눈에 달이 올라서 웅성거리고있소. 현묵관이들이 무슨짓을 해올지 모를 형편이요.》 차광수는 땀이 난 손으로 그이의 두손목을 잡아쥐며 애원했다. 바로 이런 일이 있을가봐 주머니에 권총도 지르고 그이를 수행해온 차광수였다. 《그래도 가봐야겠소. 저자들이 어떤 몰골을 하고 앉아서 이런 천추에 용납 못할짓을 하고있는가 좀 보고와야겠소.》 《김성주동무!》 차광수는 안타까이 부르짖었다. 그러나 그이께서는 손목을 잡은 차광수의 손가락들을 잡아펴며 그를 비켜세우시였다. 그리고는 골목길을 급히 걸으시였다. 차광수도 어쩌지 못하고 땀이 질벅한 손으로 주머니속의 권총을 틀어쥐고 뒤를 따랐다. 아까는 두팔목이 묶여 총질을 못했지만 인젠 어느놈이고 쏴죽일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려관집마루우에 서있던 서근하는 후들거리는 걸음으로 마루를 내려섰다. 대문밖으로 나오니 벌써 회장은 어데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는 필시 회장이 테로두목을 만나러 갔을 짐작을 하고 고인호의 집을 향해 잰걸음을 놓았다. 후들거리는 손으로 품에 지른 권총을 만져보았다. 한생 독립군을 하다가 인제 정말 가장 떳떳하고 값있는 일을 해제끼고 죽을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가슴이 뛰였다. 고인호의 집으로 오니 마침 고인호의 몸뚱아리같은 기다란 목을 한 게사니들이 여러마리 감겨돌아가며 꿱꿱 소리를 질렀다. 방안엔 아무도 없었다. 《현묵관이네 집엘 간 모양이군.》 서근하는 중얼거리며 돌아서 걸었다. 그는 또 한참 걸어서야 현묵관이네 집에 당도했다. 안마당에 들어서니 정말 회장이 와있었다. 지금 한창 현묵관이와 고인호에게 청년들의 행방을 대라고 다그치고있는 판이였다. 현묵관의 애첩도 부엌문앞에 나섰다. 그이의 분격한 목소리에 몸을 옹송그리고 떠는것 같았다. 마루앞엔 차광수가 우뚝 서있었다. 《말을 해보시오. 청년들을 어데 끌어다가 어떻게 했는지? 그리구 무슨 목적으로? 청년들이 당신네 독립운동에 어떤 방해라도 끼쳤기에? 한번 자세히 말해보시오.》 그이께서는 둘을 앞에 앉혀놓으시고 연거퍼 질문하시였다. 《아니 회장이 우리를 어떻게 보고 그런 소리를 하는거요? 우리도 지금 대회가 급박했는데 준비위원들이 없어져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고 사면팔방으로 찾아보고있는중이요. 그런데 우리더러 사람을 내놓으라니 그건 무슨 소리요?》 고인호가 펄쩍 뛰는 시늉을 하며 변명을 했다. 현묵관은 볼을 푸들거리며 말이 없었다. 《사면팔방으로 찾고있다구요? 당신네들도 이것이 전민족으로부터 저주받을 죄악이라는것을 알고있는건가요? 그렇지 않으면 인민의 심판이 두려워 꼬리를 사리는건가요?》 《글쎄 우린 모르오. 회장이 오해를…》 고인호가 다부산자자락을 후르르 드리우며 불쑥 일어섰다. 《오해가 무슨 오해요?》 그이께서 위압적인 목소리로 고인호의 말을 중둥무이시키시였다. 간담이 서늘해지는 굵은 음성이였다. 공기가 팽팽해지는바람에 서근하는 얼른 품속으로 손이 갔다. 이러는데 또 청년들 십여명이 뜨락으로 들어섰다. 아니 십여명뿐만아니였다. 앞골목에서도 청년들의 와와 들끓는 소리가 일어났다. 청년들이 밀려드는걸 본 고인호는 그제야 눈이 커져서 들끓는 토담너머를 내다보았다. 현묵관은 그저 주먹을 꾹 쥐고 앉아있다. 볼따귀살이 점점 더 푸들푸들 떨었다. 《빨리 말해보시오. 펄펄 뛰는 청년들을 어데 끌어다가 어떤짓을 했는지 말해보시오. 그걸 내앞에서 말하지 않고는 이 순간을 순탄히 넘기지 못할줄 아오. 당신들은 자기들의 마음대로 무슨 일을 어떻게 할수도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런 망상에선 벗어나시오. 우리도 우리의 힘을 과시할만한 준비를 하고있소. 뻔뻔하게 앉아있지만 말고 말을 해보시오. 남의 테제를 끌어다가 제 기발로 내걸고 무슨 일을 해보려다가 안되니까 그담엔 마구잡이로 청년들을 해치고나서는 그 무뢰한, 그 협잡배의 입에서 무슨 소리가 나오는가를 좀 들어봐야겠소. 왜 대답이 없소, 왜 대답이 없느냐말이요?》 그이께선 또 한번 따져물으시였다. 그제야 현묵관이 독이 오른 얼굴을 쳐들었다. 《회장, 무슨 불손한 소리를 그렇게 장황히 하고있나? 그래 회장의 눈으로 우리가 청년들의 가슴에 흉기를 대는 광경이라도 띄여보았기에 그러나? 이건 회장의 행동답지 않군.》 《위선을 떨지 말고 진실을 말해보시오.》 《나는 진실을 말하고있네.》 《진실이 아닌걸 진실이라고 해서 믿을 사람은 없소. 우린 괴모산쪽으로 뻗은 길이 피에 젖은걸 보고 왔소. 어느 산기슭에 끌어다가 학살을 했는지 말해보시오.》 《글쎄 우린 그런 테로를 한바가 없어. 누구의 앞에서 강박인가?》 현묵관은 무슨 잠옷같은 옷의 앞자락을 와락 잡아당겨 제끼며 벌떡 일어섰다. 털이 듬성듬성 난 가슴팍이 드러나고 빌기 두꺼운 배가 풀떡거렸다. 그는 제김에 기가 북받쳐 왔다갔다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불이 펄펄 타는 시선으로 현묵관의 이마빡을 한참이나 쏘아보시였다. 도대체 이 철면피한 악한들과 무어라고 이야기를 더 해야 할지 가슴만 답답하시였다. 뚱뚱한 육체에 이목구비가 바로 붙은것을 보면 이것을 인간이 아니라고야 할수 있는가! 인간인것이 어떻게 자기 민족을, 그래도 나라의 광복을 위해서 무언가를 해보겠다고 뛰여다니는 그 애동초목들을 쓰러뜨리고도 이렇게 뻔뻔스럽게 기를 올릴수 있단말인가! 인간의 면모가 아깝고 분노가 아니라 도리여 그 면모가 지닌 비극에 가슴을 두드리며 눈물을 뿌리고싶기도 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자리에서 마주 일어서시였다. 《분하오! 가슴이 터지오. 이런 천추에 용서 못할짓을 하면서도 뭐 조선독립운동을 하노라고 하겠지. 이거 보시오. 난 그래도 여기 당도하는 날 밤으로 당신을 찾아와서 다 함께 손잡고 전민족이 단합해서 싸워야 우리의 투쟁이 승리할수 있다는 말을 했었소. 그런데 당신들은 그 단합을 깨기 위해서 사람을 죽인단말이요? 광복운동에 한몫씩 메고나설 청년들을 칼로 찔러서 죽여요? 총으로 쏴서 죽여요? 당신들도 사람이라면 어떻게 그런짓을 할수가 있느냐말이요?》 그이께서는 곁에 있는 등의자를 치시였다. 온 뜰안이 조용했다. 서근하는 눈물고인 눈을 슴벅거렸다. 차광수의 안경쓴 눈에 물기가 어려 번들거렸다. 그이의 말씀이 가슴을 흔들기도 하거니와 최봉의 마지막 말이 귀에 날아오기도 한다. 《야 차광수야, 넌 어떻게 하든지 살아라. 김성주동무가 위험하다. 뛰여라!》 포승에 결박당하며 웨치던 최봉의 고함소리가 귀에 그대로 살아있어서 차광수는 다부지게 틀어쥔 주먹을 와들와들 떨었다. 이 광경을 내려다본 고인호는 방안으로 쫓겨들어가 숨기가 없이 앉아있다. 현묵관은 시꺼멓게 죽은것 같은 얼굴로 디뚝디뚝 거닐기만 한다. 《어리석은짓을 하지 마시오. 사람의 사상을 억제하는 법이란 있을수 없소. 당신들이 비록 몇사람의 육체는 억제할수 있어도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청년들의 사상은 억제할수 없다는걸 아시오. 그 새로운 사상으로 무장하고 나가는 사람들과 발을 맞출 생각은 없이 귀중한 사람들을 테로해서 죽인단말인가? 여섯명씩이나… 악당들! 천추에 용서를 못받을 악당들! 이 악당들의 이름을 조선민족이 뼈에 새기고 심장에 새기지 않을줄 아는가? 철천지 원쑤로 심판을 내리지 않을줄 아는가?》 그이께선 또 한번 등의자를 소리나게 치시였다. 얼마후 김성주동지께서는 마루우에서 내려서시였다. 무슨 말씀을 더하실 필요를 느끼지 않으시였다. 이 악한들에게 뼈에 사무칠 말을 해서 충격을 가한다고 한들 그 무슨 단합을 이룰수 있는 힘이라도 얻을수 있단말인가. 그이께서는 분노가 치밀어 앞이 잘 보이지 않으시였다. 대문을 나서시니 청년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휩쌌다. 《돌아들갑시다.》 그이께서는 나직이 말씀하시며 걸음을 옮기시였다. 청년들이 그이를 옹위하고 골목길로 밀려나갔다. 길가에도 청년들이 덮이였다. 그이께서는 걸음을 헛디디시여 부축도 받으시였다. 너무도 쓰라린 체험이였다. 민족주의운동의 종말이 이렇게도 미치광이들의 란무장으로 될줄은 모르시였다. 그래도 강토를 피로 물들이며 싸워온 종말이 이렇게도 철면피한 악한들, 낮도깨비들의 손에 장악되여 이런 비극, 이런 수치를 민족사의 페지우에 매질해놓을줄은 모르시였다. 그이께서는 어데를 걷는지도 모르게 자꾸 걸으시였다. 황혼이 내리는 려관집앞 풀밭에는 청년들이 새까맣게 덮였다. 어제밤 한윤이네 하숙에 와서 앉아있던 청년들도 몇명 와서 섞였다. 한갈피한갈피 흑막이 벗겨져나가는속에서 진실을 보는것이였다. 언덕우에 김성주동지께서 올라서시였다. 푹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씀을 시작하시였다. 《<남만청총대회>는 이렇게 끝장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회의는 못했지만 얻어야 할 결론은 얻었습니다. 귀중한 동지들을 잃고 피눈물의 체험을 통해서 결론을 얻었습니다. 우리가 나아갈 길은 더욱 뚜렷해졌고 명백해졌습니다. <국민부>의 우두머리들인 저 악한들은 입으로는 <독립운동>을 떠들고있으나 그것은 저들의 추악한 정체를 가리우려는 속임수에 지나지 않습니다. 놈들은 이미 독립운동의 참된 리익과 대중의 지향은 안중에도 없는 부패타락한 정치적투기업자들의 무리로 전락되였음을 스스로 폭로하였습니다. 결국 종말을 고해가는 민족주의운동으로써는 조국광복을 이룩할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광범한 인민대중을 굳게 결속시켜 공산주의길로 나감으로써만 조국의 광복도 혁명의 승리도 이룩할수 있습니다.》 그이께서는 잠간 말씀을 끊으시고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으시였다. 그이의 안광에서 섬광같은 빛이 번쩍거리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볼일을 다 보았습니다. 우리는 지금 저 악당들이 또 어떤 류혈을 꿈꾸는지 모르는 정황속에 놓여있습니다. 독립군들의 무기가 어떤 지시를 받고 어떻게 갈갤지 모르는 형편입니다. 그러기때문에 나는 동무들에게 지금 빨리 이 치떨리는 땅을 떠나 자기 지방으로들 돌아갈것을 권고합니다.》 청년들은 황혼속에서 눈시울을 닦았다. 가슴이 아픈 음성을 들어낼수가 없는것이였다. 《자기 지방으로들 돌아가면 여기에서 잃어버린 동지들을 잊지 말고 굳세게 싸워주시오. 우리는 우선 조선독립을 위해서 싸우고 공산주의를 위해서 싸워야 합니다. 이게 우리들이 나아가야 할 진리의 길입니다. 이 진리의 대오, 그 억센 흐름이 두려워 현묵관이, 고인호들은 이렇게 항거해나오고있습니다. 이런자들은 철저히 박멸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의 대오가 무서운 힘으로 굽이치고 나가며 일제와 계급의 원쑤들, 모든 사악의 무리들을 철저히 소탕해버려야 합니다. 나는 앞으로 동무들의 투쟁을 돕기 위해서 동무들이 있는 지방으로 조직원들을 파견하겠습니다. 지금 길림에서 싸우고있는 청년공산주의자들은 길림과 길림시주변에서 지펴올린 혁명의 불길을 더욱 넓은 지역으로, 남북만의 광활한 무대로 밀고나가며 새로운 동지들과 손을 잡고있습니다. 우리가 이번 여기로 온것도 그 목적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런데 현묵관이며 고인호 같은 저 악당들은 그 목적을 가지고 뛰는 귀중한 혁명동지들을 여섯명씩이나 살해해치웠습니다. 그 귀중한 동지들은 인젠 이름을 불러도 이 세상엔 없습니다. 우리는 인제 이 분노의 눈물을 촌시도 잊지 않고 피해를 가한 저 잔인무도한 악당들에게 천백배의 보복을 가하는 심정으로 투쟁을 더욱 억세게 밀고나갈것입니다. 그런 각오를 다진 우리의 조직원들이 동무들의 지방으로도 파견되여갈것입니다. 손잡고 힘차게 싸워주십시오.》 《김성주동무!》 《김성주동무!》 청년들의 부르짖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일어났다. 모두들 어둠속에서 움씰거리며 이쪽에서 저쪽에서 다가들었다. 그이께서 언덕밑으로 내려서시자 확확 연기를 뿜는 몸집들이 죄여들어오며 그이를 둘러쌌다. 《성주!》 《성주!》 서로들 손을 수풀처럼 뻗치며 소리쳤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두팔을 펴서 청년들과 어깨를 겨루시였다. 피를 바친 싸움터에서 얻어진 새로운 동지들의 성벽이다. 그이께서는 이 청년의 어깨도 다가끼여보시고 저 청년의 어깨도 다가끼여보시였다. 아 얼마나 귀중한 전우들인가! 쓰라린 피값으로 백배해진 우리의 대오, 이 숱한 최봉이, 피끓는 나의 전우들! 혁명이여, 굳세게 앞으로! 그이께서는 량볼이 젖어내렸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