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서《불멸의 력사》 3

        장편소설

 

 

                                     천  세  봉  

 

( 제 1 회 )

 

제  1  장

 

왕   청   문

 

1

 

한여름 뜨거운 해빛이 내려쪼인다. 온 땅이 훅훅 열기를 뿜어올린다. 그래도 이따금 더운 가마에 찬물을 끼얹듯 산뜻한 바람이 불어오군해서 어딘가 북방의 여름다운 맛은 있다.

가도가도 수수밭이다. 간간이 고랑을 메운 콩잎이 가는 바람에 너슬대기도 한다. 간혹 장잎을 쭉쭉 뽑아올린 조밭도 나타났다. 거기에선 메비둘기가 날아오른다.

밋미스름히 언덕진 수수밭머리로 올라서신 김성주동지께서는 허리에 손을 짚으시고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시였다.

《또 좀 쉬여갈가?》

《일없소. 오늘로 기어이 한촌에 대야겠다고 하지 않았소?》

뒤따라오던 차광수가 대답을 하며 얼굴에 흐르는 땀을 씻는다.

《발바닥에 또 콩알이 생기지 않았소?》

《어제밤 딱총이 약이 된것 같소. 오늘은 걷기가 한결 괜찮소.》

《그러게 무슨 일이든 된탕을 먹여야 하오.》

김성주동지의 말씀에 차광수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웃었다. 그는 길림에서 이리로 오는 도중 발바닥에 물집이 생겨 크게 애를 먹었다. 그바람에 길이 더욱 더디여졌다. 그래서 어제밤엔 김성주동지께서 그를 눕혀놓고 발바닥에 성냥딱총을 놓으시였다. 어떤 물집엔 성냥의 화약대가리를 두세개 뜯어놓고 불을 지르시였다. 발바닥에선 푸르륵 폭 푸르륵 폭 소리가 일어나고 차광수는 《엑 뜨거》하고 소리를 지르며 훌쩍 뛰여올랐다. 폭소가 터져 서로 갈겨대는 소동도 일어났다. 그렇게 애를 먹이던 발이 오늘은 걷기가 한결 괜찮아졌다.

어쨌든 유쾌한 려행길이였다. 왕청문에서 열린다는 《남만청총대회》에 참가하려고 그이께서 차광수를 데리고 떠나시였는데 그 려행길이 힘드시긴 하였지만 이렇게 유쾌한 길이 될줄은 몰랐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저고리를 어깨에 걸메고 곡식밭들 사이길을 걸어내려가시였다. 그이와 키가 가지런한 차광수는 젖은 잔등에 웃저고리를 걸치고 걸었다. 아직 발바닥때문에 한쪽다리는 절뚝절뚝 절며 걷는다.

《한촌에 가도 지금 최봉동무가 있겠는지 모르겠소.》

《하긴 지금 왕청문에 가서 뛰고있기가 십상이지요. 편지에 오던길에 한촌에 들리라고는 했지만…》

《어쨌든 가봅시다. 왕청문 형편에 대한 구체적인 편지를 보내오긴 했지만 가서 만나서 좀 더 사전료해를 하고 왕청문으로 들어가야 하겠소.》

차광수의 말에 그이께서 대답하시였다.

《남만청총대회》란 3부통합으로 태여난 《국민부》가 남만과 동만청년단체들의 대표를 모아놓고 앞으로의 청년운동의 방향을 토론하겠다는 대회였다. 그래서 그이께서 급히 백산청년동맹 대표라는 이름을 띠시고 길을 떠나신것이였다. 말하자면 어려운 싸움의 길이였다. 왕청문에 집결된 민족주의세력이란것이 《국민부》라는 명칭은 띠고있으나 배타적인 완고한 집단이고 또 그들이 요새 무슨 정당을 만들었다고 하기도 하니 그런 집단이 조직하는 대회란것이 청년운동을 어떤 그릇된 방향으로 돛을 올리자고 소란을 피울지 알수 없는 일이였다. 이걸 바로잡지 않고는 안된다는 생각으로 걸음을 다그치는 김성주동지이시였다.

그이께서는 바람이 설렁거리는 들길을 바삐 걸으시였다. 바람결에 땀기가 잦아드니 한결 기분이 상쾌하시였다. 그러나 여전히 생각은 많으시였다. 길림의 혁명사업도 걱정되신다. 일제의 만주침략책동이 한층 로골화되고있는 때에 그곳 사업이 여간 근심되시지 않는다. 지금 길림엔 일제가 쥐여뿌린 밀정이 거리들을 싸다니고있다. 동무들한테 아지트를 로출시키지 말라고 신신당부는 하고 떠났으나 놈들의 촉수가 언제 아지트로 뻗어올지 누가 알랴. 길림주변 농촌조직들의 일도 우려되시였다. 지난해 대시위이후 길림시내는 물론 농촌주변들에서도 공청, 반제청년동맹 같은 조직들이 소낙비 온 뒤의 대순처럼 솟아올랐다. 《ㅌ.ㄷ》에 뿌리를 둔 조직들이였다. 갓 생겨난 이 푸른 화원에 어느 한귀퉁이 조그마한 상처라도 나지 않을가.

김성주동지께서는 초조하고 불안한 생각을 금하실수 없었다.

날이 차츰 저물어왔다.

폭양과 랭기가 졸지에 갈마들었다.

류하를 좀 지나니 정말 한촌이란 동네가 있었다. 야산을 등지고 길가에서 얼마쯤 들어가앉은 마을은 퍼그나 아늑해보였다. 마을앞엔 시내가 있고 강변엔 수양버들이 늘어져있었다. 물도 맑았다. 사품치는 여울에서는 구슬이 부서지는것 같다. 징검다리가 놓인 물역에서 한 처녀가 날이 저무는줄도 모르고 빨래를 두드리고있었다. 처녀는 동그스름한 잔등에서 흘러내려온 머리태의 붉은 댕기가 물에 젖는줄도 모르고 물방치질에만 옴해있었다.

《여보시오.》

뜻밖에 찾는 낯선 목소리에 놀라 처녀는 뒤를 돌아보았다.

《…》

차광수는 처녀한테로 걸어가며 다시 물었다.

《한가지 물어봅시다.》

《무슨 말씀이온지?》

그제야 돌우에서 일어선 처녀는 물방울이 뛴 어여쁜 얼굴에 수태를 머금으며 가느다란 목소리로 되묻는다.

《최봉이란 사람이 어느 집에 있는지 모르겠소?》

그러자 처녀는 대꾸를 못하고 물방치 쥔 손으로 공연히 치마앞자락을 휩싼다.

《가만 있소. 여기가 한촌은 한촌입니까?》

김성주동지께서는 차광수의 말이 너무도 아닌밤중에 홍두깨같아서 그를 옆으로 비켜세우며 친절히 물으시였다.

《예에…》

처녀는 귀밑을 붉히며 수집게 대답했다.

《여기 지난 겨울부터 최봉이란 청년이 와있었겠는데… 아니 무슨 단천집이라는 집에 와서 류숙하고있다는 말을 편지에 적어보냈던것 같은데 그 단천집이 어느 집입니까?》

《저기 저 생철굴뚝이 일어선…》

처녀는 동네쪽을 돌아보며 한마디 간신히 대답했다. 그리고는 치마를 휩싸고 도로 돌우에 오그리고 앉는다. 또 정적을 깨치는 물방치소리가 들리였다.

《거 성춘향이가 이곳에 나타난게 아니요?》

차광수가 물가에 눈길을 던진채 너스레를 떨자 김성주동지께서는 웃으시며 빨리 걸으라고 그의 잔등을 미시였다.

결국 이렇게 해서 최봉의 하숙집을 찾긴 했는데 최봉은 예상했던대로 왕청문에 가고 없었다. 그래도 길림에서 온 사람들이라고 하니 머리가 센 주인어머니가 불을 때다가 달려나와서 반갑게 맞았다.

《온 저런 우리 최봉이 그 사람을 만나겠다고 길림에서 예까지 왔단말인가? 그래 최봉이처럼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인가?》

《허허, 그저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 여기 왔습니다.》

로파의 묻는 소리에 김성주동지께서 대답하시였다.

《그랬겠지. 최봉이 그 사람도 늘 길림이야길 했다네. 타관객지에 와있으니 친구가 그립다고… 어서 들어가라구. 친구야 없은들 대순가? 친구의 에미같은 내가 있는데…》

수선을 떠는 주인어머니는 어서 방으로 들어가라고 김성주동지의 잔등도 밀고 차광수의 잔등도 밀었다. 그리더니 이어 돌아서며 시내가에 대고 목소리를 높였다.

《얘, 수연아! 수연아! 어서 빨래를 걷어담아가지고 들어오너라. 무슨놈의 빨래를 해점도록 하느냐.》

《따님입니까?》

방안으로 들어가려던 차광수가 돌아보며 물었다.

《그렇다우. 쯧쯧, 얘 수연아! 손님이 왔다. 저런 물방치소리만 깨지게 내는군…》

어머니는 딸을 부르다 못해 쯧쯧 혀를 차더니 아예 그쪽으로 휘젓고 달려나간다.

방안으로 들어오신 김성주동지께서는 웃저고리를 벗어 벽에 걸고 방안을 살펴보시였다. 가난의 때가 찌든 방안이긴 했으나 방 한쪽구석엔 앉은뱅이책상도 놓여있다. 책상우엔 책도 수두룩이 쌓여있고 잉크병, 필통, 거울 같은것도 놓여있다. 뒤벽 시렁우엔 농도 한짝 놓여있고 시렁밑엔 매돌, 방치돌, 무슨 바줄타래같은것도 널려있다.

《성주동무, 최동무가 여기 와서 공작은 안하고 호박 딸 생각만 하고있은게 아니요? 저 주인어머니가 우리 최봉이 우리 최봉이 하고 부르는건 무슨 뜻이요?》

뒤따라 방안으로 들어온 차광수는 두꺼운 안경알너머로 두눈을 두릿두릿 굴리며 숨이 급하게 수군거린다.

《공작을 안했다는게 뭐요? 류하 삼원포에다 조직을 내오고 왕청문에도 줄을 박았는데… 그러면서 호박에 주의를 돌렸다면 그야 잘한 일이지. 혁명두 하고 호박두 따고…》

《허허허, 하긴 그렇소. 그게 나쁠것이야 없지요…》

이러는데 밖에서 주인어머니가 딸을 데리고 들어오며 떠드는 소리가 들린다. 차광수는 문을 벙글써하게 열고 다시 밖을 내다보았다.

《뭘 점잖지 못하게 자꾸 살피오?》

《일이 그렇다면 좀 더 자세히 보아야 하지 않겠소. 아, 정말 괜찮소. 저만하면 최봉동무의 배필로도 짝이 기울지 않소.》

얼마후에야 차광수는 싱긋 웃으며 문고리를 당겼다. 그는 내내 싱글벙글 웃었다.

딸을 데리고 부엌으로 들어온 어머니는 법석 떠들었다.

《글쎄 최봉이 그 사람을 찾아왔단다. 길림에서 예가 어디냐? 오죽 친한 사이면 그 먼먼길을 걸어서 찾아왔겠니? 저 안경낀 젊은인 다리를 절뚝거리기까지 하더라. 발탈이라도 났게 그러지. 어서 쌀을 퍼내서 일어라.》

딸은 한마디 대꾸가 없다. 딸이 부끄럽게 떠들지 말라고 손짓이라도 하는지 어머니는 《일없다.》하고 한술 더 뜬다. 딸이 도리여 어머니보다 만사를 속깊이에 묻고 내색을 안하자고 하는것 같다. 웃방에서 부엌이야기를 듣는 차광수의 안경을 낀 눈가에 웃음이 떠돈다.

김성주동지께서도 미소를 띠시고 책상우에 있는 책들을 살펴보시였다. 최봉이 보다가 두고간듯한 레닌의 저서가 몇권 있고는 그 다음엔 무슨 농민독본이니 조선말독본이니 하는따위 책들이 수두룩이 쌓여있다. 이런 책들은 아마 수연이란 처녀가 읽고있는듯싶었다. 백로지책에 줄칸을 긋고 또박또박 농민독본의 글을 베껴넣은 학습장도 있다. 이것도 아마 글자를 익히는 수연이가 써넣은것 같았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그걸 보시자 화성의숙때 일이 생각나시였다. 최봉은 독립군들의 추천으로 화성의숙에 입학하였다. 김성주동지께서 그에게 처음 맑스주의서적을 읽어보라고 주시였을 때 최봉은 눈이 둥그래서 놀래였다.

《이거 정신이 있소? 읽을 책이 없어서 하필이면 학교에서 엄금하는 맑스주의책을 읽어요?》

그는 책을 외면했다. 그런것을 그뒤에 또 그의 책상서랍에 밀어넣어주었다. 최봉은 그걸 모르는숭하고 한달이나 지냈다. 그러고나서 그 책을 남 안볼 때면 훔쳐보기 시작했다. 그 한책을 다 읽고나더니 그다음엔 몸이 달아서 제혼자 달려다니며 맑스주의책들을 구해들여서 읽었다. 그렇게 혁명의 길로 들어선 최봉이 오늘은 이처럼 한 지역을 맡아가지고 나서서 공작도 하며 차광수의 말한가지로 호박도 따고있다.

얼마후 미닫이 새문이 드르르 열렸다.

《쯧쯧, 얼마나 시장들 할가. 그 먼먼길에 여기를 대오느라고… 최봉이 친구들이라니 내 자식들같은 생각이 드네. 어서 저녁상을 받으라구.》

《아니, 어머니 뭘 이러십니까? 우린 류하에서 장국밥을 사먹고 왔습니다.》

《글쎄 그랬대도 내 집에 온 손님들인데 저녁을 굶기겠나? 얘, 어서 상을 들어올려오너라.》

주인어머니는 차광수를 한쪽으로 밀어세우며 딸더러 어서 상을 올려오라고 손짓했다. 처녀는 겸상을 한 저녁상을 들고 올라왔다. 여전히 수태를 머금은 아릿다운 얼굴이다. 고개를 숙이고 량볼이 발깃해서 상을 놓느라고 허리를 굽히자 굵은 머리태가 한쪽옆으로 미끄러져내리며 흔들흔들 그네를 뛴다.

《이거 미안합니다.》

차광수는 안해도 좋을 말을 한마디 건늬였다. 그러나 처녀는 낯만 진하게 붉히며 얼른 돌아서 정지방으로 내려간다. 그는 내려가면서 어머니의 소매자락을 끄잡아당겼다. 정지방으로 내려가자는것이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빙긋이 웃으시며 차광수와 함께 저녁상을 마주하고 앉으시였다.

김이 물물 나는 조밥을 어떻게 낟가리를 가려서 담았는지 밥바리가위선으로 부실부실 흩어져내리기도 한다. 풋고추를 넣어서 지진 토장맛도 달았다. 계란도 두알을 삶아서 접시에 담아놓았다.

정지방에서도 어이딸이 저녁을 치르는것 같았다. 그러나 말한마디 없이 이따금 그릇소리가 달그락거릴뿐이였다. 수다스러운 어머니도 끼니를 치르는 례절은 각별한듯했다.

그러나 저녁을 치른 어머니는 웃방의 밥상을 들어내려오기 바쁘게 잉그르르 치마폭을 휩싸며 또 올라왔다.

《이사람들, 자네들이 최봉이의 친구들이라니 아무래도 일을 알려야겠네.》

어머니는 김성주동지의 무르팍을 두드리며 자리에 앉는다.

《어머니, 무슨 일입니까?》

그이께서 물으시였다.

《가만 있게.》

어머니는 얼른 벙글써하게 열린 새문을 꼭 닫았다.

《난 요새 경사를 앞에 놓고 맘이 흥충거려서 이런다네.》

《무슨 경사입니까?》

《글쎄 저것과 그 사람이 인연을 맺지 않았겠나. 그 사람이 내집에 와있으면서 저걸 야학에 끌고다닌다 회의에 끌고다닌다 하더니 둘이 정분이 났네. 그 사람이 저걸 글눈두 띄워주었지. 제사람 만들 욕심이 있으니까 야학방에 안나가는 날 밤이면 저 책상앞에 앉혀놓고는 쇠판대기같은 손으로 연필대 쥔 저것의 손을 틀어쥐고 앉아서 글획을 이렇게 그어라 저렇게 그어라 동그래미를 그려라 낫가락 거꾸로 세운것 같이 내려그어서 까부려라 하며 글자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네. 그래서 지금은 저것이 편지도 쩡쩡 잘 쓴다네.》

《허허, 그게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그럼, 좋기만 하겠나. 그래서 백년해로를 하겠다고 인연을 맺었다네. 인제 최봉이가 왕청문에서 무슨 회의인가 하고 돌아와선 성례를 치른다네.》

《어머니!》

딸이 정지방에서 새문에 손기척을 내며 어머니를 부른다. 그런 실없는 자랑을 말라는거다.

《오냐, 무슨 일 있니?》

어머니는 뒤손질로 새문을 더 밀어닫았다. 그리고는 목소리를 낮춰서 수군거린다.

《저건 남과 그 이야기만 하면 질색을 한다우. 얼굴이 일년감빛이 돼서…》

《그래 잔치준비는 다 됐습니까?》

김성주동지께서도 낮은 목소리로 물으시였다. 차광수는 그저 벙긋벙긋 웃기만 한다.

《되지 않구, 이것 보라구.》

어머니는 닁큼 일어서더니 농짝우에 가리워놓은 보자기를 쳐들며 새 이부자리를 보여주었다. 검은물 들인 광목이불인데 그래도 이불깃은 남색명주천을 댔다.

《이부자리도 다 되고 초례때 입을 옷도 다 지었다네. 최봉이 옷은 조끼까지 받쳐서… 아니 글쎄 최봉이 그 사람이 저것 생각이 얼마나 끔찍하면 삼원포 은방에 가서 이런걸 다 만들어왔겠나.》

어머니는 농문을 살그머니 열고 농밑바닥에 손을 지르고 한참 뒤적거리더니 무엇인가 푸른 천에 싼것을 꺼냈다. 천을 펼치니 은가락지 한컬레가 나왔다. 옛날 색시들이 끼던 말굴레같은 큰 가락지는 아니고 반지보다는 조금 큰 은가락지였다.

《글쎄 최봉이 그 사람이 이 은가락지 한컬레를 만들어가지고 와서, 저 책상앞에 저걸 앉혀놓고선…》

《어머니!》

딸이 또 어머니를 부른다.

《오냐, 설겆이를 해라.》

어머니는 그 소리는 귀등으로 날려보내며 제사 흥분해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글쎄 책상앞에 둘이 앉아 최봉이 그 사람이 뭐라고 하는고 하니 이 가락지 한짝은 조국광복하는 싸움 잘하자는 동그래미고 또 한짝은 백년해로하자는 동그래미라고 하잖겠나. 그러면서 동그래미란 끝이 없이 돌고도는건데 둘이도 변치 말고 돌고돌며 쌈도 잘하고 백년해로도 잘하자네. 이 소리를 듣더니 저건 눈물을 짜데. 흐흐흐, 내가 새문틈으로 올려다보면서 다 들었지…》

김성주동지께서는 가락지를 들어다가 보시였다. 차광수도 가락지 한짝을 집어다가 제 굵은 손가락끝에 끼여보았다.

《어머니, 우리도 기쁩니다. 그래 어머니는 슬하에 저 따님 하나밖에 없습니까?》

김성주동지께서 물으시였다.

《웬걸, 저 애 우로 아들이 하나 있었다네. 그런걸 단천 메등에다 파묻고 오질 않았나.》

《왜 그렇게 됐습니까?》

《앓다가 잘못됐다면 가슴이 이렇게 쓰리진 않겠네. 마을에 나와서 갈개는 순사놈한테 대들었다가 칼에 맞아서 잘못됐다네. 그놈이 칼로 찔러도 명치끝을 찌를게 뭐겠나?》

어머니는 절통한 생각이 들어 휘유 한숨을 짓는다.

《그럼 아버님은 어떻게 됐습니까?》

이번엔 차광수가 물었다.

《령감이야 독립군이 되여 여기 들어와있었지. 그래서 내가 그녀석 죽은 뒤에 저 애를 데리고 수천리길을 걸어서 여기 들어오지 않았겠나. 그런데 들어와보니 령감은 압록강가에서 바위돌을 안고 돌아가며 왜놈과 맞총질을 하다가 다쳐서 앓지 않겠나. 우리가 여기 들어온 뒤에 인차 세상을 떠나고말았지…》

어머니는 또 한숨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인젠 드나나나 저것 하나밖에 없다네.》

《어머니, 왜 하나뿐이겠습니까? 따님이 있고 인젠 사위가 또 있지 않겠습니까?》

《하긴 그렇지. 사위한테 가는 정이야 아들한테 가는 정에 대겠나? 그 정을 찜쪄먹지.》

웃음이 터졌다. 역시 어머니도 지나간 눈물보다 앞에 있는 기쁨이 더 좋아 차광수의 무르팍을 두드리며 웃는다. 얼마후에야 어머니는 가락지를 농밑바닥에 도로 간수해넣고 농문에 자물쇠까지 잘칵 잠그었다.

이날밤 김성주동지께서는 오래 잠들지 못하시였다. 혁명동지의 일이여서 무척도 즐겁고 기쁘시였다. 한시바삐 최봉을 만나보고싶으시였다. 혁명이 힘들긴 하지만 이런 인간의 행복을 동반하니 얼마나 좋은가. 저 은가락지 낀 손으로 백년가약주잔을 들어줄 때 최봉의 가슴이 뻐개지지 않겠는가. 아이때부터 독립군들속에 섞여다니며 풍찬로숙의 고생속에서 성장한 최봉이, 언제 한번 인간의 따뜻한 인정속에서 사람이 사람에게 주는 고상한 애무를 느껴보지도 못한 최봉이, 그 덕지 앉았던 가슴이 희열로 뻐개지지 않을가!

《거 모를 일인데… 그 무쇠덩어리같은 최봉동무의 심장속에서 이런 불꽃이 피여난다는것은…》

차광수도 잠들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좋은 불꽃이요. 혁명을 위해서도 가슴속에 그런 연소가 있어야 하오.》

《암, 그야 여부가 있소.》

그이의 말씀에 차광수는 눈물을 글썽거리기까지 하였다.

이튿날 또 강행군이 시작되였다. 새벽조반을 치르고 왕청문으로 떠나가려고 하자 그제야 주인어머니는 최봉이같은 사회운동자라는걸 알고 왕청문에서 회의가 끝나면 최봉이와 함께 와서 잔치를 치러달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어머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리들이 둘러리도 서겠습니다.》

그이의 말씀에 어머니는 눈물을 씻으며 어서 그렇게 해달라고 했다. 뒤따라 나온 수연이는 부끄럼 가득한 얼굴로 머리를 곱게 숙여 절을 했다. 그이께서는 차광수와 함께 감동의 이슬을 감추지 못하고 그 절을 받으시였다. 두 모녀는 그이께서 한촌동네를 벗어나실 때까지 수양버들 드리운 마당가에 서서 눈물을 씻으며 바래주었다.

《자 빨리 걷자구. 오늘은 별일 있어도 왕청문에 대야 하겠소.》

《정말 그래야겠소. 최봉동무가 편지에 <국민부>패거리들이 정면대결로 나온다고 했는데 그새 어떻게 되였는지 모르겠소. 내가 발바닥이 물집투성이만 되지 않았어도 길이 이렇게 늦어지진 않았을텐데…》

차광수는 자기의 발바닥을 원망했다. 정말 유쾌한 려행길이였다. 한촌에서 하루밤 묵은것이 그 무슨 꽃향기 진동하는 오두막을 지나친것 같은 생각도 들게 한다.

한촌을 떠나 얼마를 걷지 않아 구릉처럼 누워넘어간 산발이 나타났다. 가둑나무가 우거지고 간간이 물푸레, 피곁나무 무데기들도 무성했다. 새가 우짖고 다람쥐가 기였다. 뉘엿한 산마루 둘을 순식간에 넘으니 잔등들이 또 척척히 젖었다. 차광수가 힘들어하는것 같아 김성주동지께서는 그의 팔을 끼시였다.

《아니 일없소.》

《아, 그러지 마오. 그래서 혁명동지가 좋다는것 아니요.》

그이의 말씀에 일부러 뚝뚝한 표정을 짓고있던 차광수의 입가에는 어느덧 비죽이 웃음발이 비꼈다.

그런데 이날 오후 왕청문을 약 20여리 앞둔 지점에서 되게 퍼붓는 소낙비를 만났다.

검은 구름이 룡트림을 하며 삽시에 하늘을 덮었다. 그 구름은 무거운 물기를 안고 대지에 입맞춤이라도 하듯 온 들판을 휩쓸기 시작하였다. 머리우에서 번개불이 구불거리고 하늘땅을 쪼개는것 같은 뢰성이 일어났다. 대줄기같은 비발이 쏟아졌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차광수와 함께 부랴부랴 산기슭에 있는 거부기같이 생긴 바위밑으로 비를 피해 들어가시였다. 꽝 우르릉 소리가 련속 일어난다. 거부기가 가슴팍을 쳐든것 같은 바위가장자리로는 비물이 좌륵좌륵 쏟아져내린다. 그이께서는 차광수를 바싹 옆에 끼고 앉으시였다. 뼈대도 굵은 사람인데 한증가마를 옆에 낀것 같았다.

《야 이놈들 발가숭이들이 어디로 털썩털썩 뛰여들어? 나가지 못할가?》

차광수가 눈을 붉히며 소리켰다. 개구리가 여러마리 비에 쫓겨서 바위밑으로 뛰여드는것이였다.

《놔두오. 들어오너라. 너희들도 비를 긋자는게구나.》

그이의 말씀에 차광수는 유쾌한듯 흰 이새를 드러내며 웃었다.

비가 좀 뜸해져서 다시 걷기 시작하였다. 개울을 건너 수수밭머리로 돌아나가는데 웬 청년이 허겁지겁 뛰여왔다. 노상 비를 맞으면서 뛴것 같다. 양복아래우가 다 젖어서 몸에 철썩 붙고 젖은 모자는 벗어서 손에 쥐고 뛰여온다.

《아니 이게 누구야? 김도균동무가 어떻게?》

차광수가 앞에 달려온 청년을 쳐다보며 소리쳤다.

《어 이거…》

청년도 마주 쳐다보며 소리를 질렀다. 젖은 머리가 이마우에 내려덮이고 볼로는 비물인지 땀인지 모를 물이 줄줄 흘러내린다.

《도균동무, 어떻게 된 일이요? 비를 맞으면서 어데로 뛰여가오?》

김성주동지께서 손을 잡아흔드시며 물으시였다.

《바로 김성주동무가 오는가 해서 류하쪽으로 뛰여가는길인데 여기서 만날줄은…》

그는 젖은 모자로 얼굴을 마구 문질렀다. 그러면서 숨을 급하게 쉬며 부르짖었다.

《지금 왕청문으로는 못들어가오. <국민부>패거리가 어찌나 갈개는지… 왕청문사업은 최봉동무가 다 맡아서 하기로 했으니 김성주동무는 들어가지 말아야겠소.》

《아니 무엇이 어떻게 됐게 그렇게 급한 소리야?》

차광수가 끼여들며 물었다. 김도균은 최봉이와 손을 잡고 왕청문에 조직을 내온 청년인데 지난봄 최봉을 따라서 길림에 왔던 일도 있다. 그때 그는 약왕묘 지하실에서 화흥중학교 교원의 깽깽이 켜는 흉내를 잘 냈다. 코를 안쥐여도 깽깽이 소리 비슷한 음성인데 그날밤엔 코까지 쥐고 익살을 부렸던것이다.

《지금 왕청문은 위험하오. 대회준비위원회를 내오긴 했는데 민족주의패가 청년들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서 독립군까지 동원하며 야단이요. 어느 순간에 무슨짓을 해올지 모르겠소. 그래서 우리가 거기서 조직의 방침대로 해내기로 하고 성주동무는 거기 들어서지 않는게 좋겠다고 토론됐소. 저놈들이 지금 백산청년동맹대표가 오는가고 눈들이 화등잔이 되여 살피고있소. 그래서 내가 길을 막자고 달려오는참이요.》

김성주동지께서는 정색해진 표정으로 말씀하시였다.

《걱정 마오. <국민부>사람들이 날뛴다고 우리가 손을 털고 나앉겠소? 그래 그들이 우리 청년들을 그릇된 길로 끌고가자고 하는걸 뻔히 보면서도 되돌아서야 옳단말이요? 아니, 그럴수 없소. 우린 결코 청년들을 그들에게 빼앗길수 없소. 자, 갑시다.》

말씀을 마치신 그이께서는 앞장에서 걸음을 옮기시였다.

《아니…》

김도균은 어안이 벙벙해서 바라보다가 그다음엔 차광수에게 매달려 왕청문이 정말 위험하니 제발 김성주동무를 돌려세워달라고 애원했다.

《그래, <남만청총>책임자 한윤동무는 있소?》

《있지요.》

《그 동무는 지금 어떻게 나오고있소?》

차광수는 《남만청총》책임자 한윤이 일본 동경에서 같이 고학을 한 처지여서 그에 대한 기대도 가지고 오기때문에 묻는것이였다.

《한윤이는 얼떨떨한 립장이요. 민족주의자들이 압력을 가하니까 중간에 서서 평행선을 긋는 립장이지요.》

《어쨌든 가봅시다.》

차광수도 그이를 따라서 걸었다.

김도균은 풀밭에 털썩 주저앉으며 얼굴에 흐르는 땀과 비물을 씻었다.

《제길, 내가 이럴줄 알면서도 뛰여왔다니까…》

그는 벌써 밭 한사래 길을 걸어가신 김성주동지를 바라보며 눈물이 다 글썽해졌다.

 

2

 

왕청문에도 소낙비가 드리웠다. 여기는 더 세찬 폭우였다.

여기저기 솟아있는 백양나무들의 긴 허리가 활시위같이 휘여들었다 일어났다 했다. 돈잎같은 잎들은 소란스럽게 화르르 떨었다.

다닥다닥 붙어앉아있는 검은 흙지붕, 초가지붕, 기와지붕들이 일매지게 컴컴해보이고 우우 그 무슨 웅심깊은 소음이라도 내는것 같다.

번개불이 지붕들우로 번쩍하며 지나간다. 뒤미처 벼락을 치는것 같은 와지끈 하는 우뢰소리가 정수리우에서 떨어져내린다. 온통 징벌을 받는것 같다. 무서운 타락에 대한, 무서운 죄악에 대한 징벌이 여기 왕청문의 조그마한 거리우에 떨어져내리기라도 하는것 같다.

《구보로 갓!》

지금 화흥중학교 운동장에선 말 십여필이 네굽을 끌어안고 뛰여돌아간다. 꼭 곡마단 말들이 재주를 노는것 같다. 말잔등엔 군복을 입은 독립군들이 앉아서 칼을 휘둘렀다. 공중에다 빙글빙글 돌리다간 좌우를 쫙좍 내리치며 적병의 목이라도 따던지는 시늉을 한다. 연방 악악소리가 일어난다. 진탕이 한길씩 뛰여올라 말과 사람을 쳐갈린다.

이것은 청년세력을 위압하려는 《혁명당》의 엉큼한짓이다.

《뛰엿! 뛰엿!》

앞말을 탄 독립군이 또 악을 썼다. 그는 정두진이란자인데 군복에 무슨 벙거지같은 모자를 쓰고 말을 달리며 호령을 지른다. 말과 사람이 온통 진흙물투성이다. 정두진은 모자우에도 흙이 뛰여올라가붙었다. 수염 한대 없이 표표하게 생긴 그의 얼굴은 상추잎같이 새파랗다. 말고삐를 어찌 세게 채는지 말은 자갈문 아가리로 번개치는 하늘이라도 물어뜯을듯이 쩍 벌리고 솟구쳐오르군했다.

뒤에 따르는 말들도 모두 진흙물투성이다. 그것을 비가 갈기며 주룩주룩 씻어내린다. 말잔등에 앉은 사람들이 다들 군복을 입은줄 알았는데 더러는 적삼과 중의를 입고 모자만 군모를 썼다.

운동장에선 말이 뛰여돌아가는데 학교교실에서는 청년들이 빼곡이 들어앉아 연설을 듣고있었다. 요샌 여름방학이 돼서 학교가 청년들판으로 되였다.

《조선에서 자본발달이 가능한가? 나는 가능하다고 봅니다. 자유경쟁의 길로 나가보잔말이요. 나갈 길은 오직 자유상업, 자유산업, 자유경쟁의 길에 있다고 봅니다. 왜놈들과도 산업에서 상업에서 자유경쟁을 해보잔말이요. 나는 남을 위한 복무정신이 이 사회를 발전시키는 정신적원동력으로 된다는걸 믿지 않습니다. 오직 나를 위해서 내 리익을 위해서 경쟁을 해보자! 내게 필요한걸 달라, 그러면 네게 필요한것도 줄것이다. 바로 이런 자유경쟁속에서 우리 나라의 자본을 발달시켜보자! 내 주장은 이겁니다. 이거란말이요…》

연사는 《남만청총》계렬의 청년 조동식이다. 현묵관이들이 조직한 《혁명당》이 민생문제의 기발을 올리고 조선에서의 자본혁명을 부르짖기때문에 그걸 안받침하느라고 이런 소릴 웨치고있다.

장내는 벌둥지 쑤셔놓은것 같이 끓어댔다.

자유경쟁이라니 이건 무슨 소리냐고 눈이 둥그래서 조동식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이판에 앉아있던 최봉은 분이 머리꼭뒤까지 치밀어 《남만청총》 위원장인 눈섭이 시꺼먼 청년을 데리고 교실밖으로 나왔다. 그가 바로 한윤이인데 최봉이처럼 어려서 독립군을 따라다니기도 했고 서울 가서 중학교도 나온 청년이였다. 그는 이 복새판에서 평행선을 긋는 저울대같은 립장을 취하며 용의주도하게 행동했다. 결국 최봉은 이 한윤을 조종하면서 준비위원도 복안대로 선출해냈던것이다.

최봉은 한윤을 데리고 다음교실로 갔다. 밖에선 여전히 억수가 퍼붓고 군마가 뛰여돌아갔다.

《여기 좀 앉읍시다.》

최봉은 한윤을 끌어다가 걸상에 앉히며 자기도 곁에 앉았다.

《그런데 웬 청년들이 저렇게 많이 모여왔소?》

최봉은 주머니를 들추어 담배 한대를 붙여물며 물었다. 상대방은 낯빛이 시뻘개서 말이 없었다. 역시 무언가 심각하게 고충을 느끼고있는듯한 표정이였다.

《한대 붙이시오.》

최봉은 그의 얼굴을 흘끔흘끔 살펴보며 담배 싼 종이를 내밀어주었다.

《방금 피워서 그만두겠소.》

《왜 판을 자꾸 이렇게 벌려놓고있소? 준비위원들끼리 모여서 회의방향도 토론하고 결의문초안도 작성하자구 해놓군 이게 뭐요? 일껏 준비위원들을 선출해가지고 회의준비는 안하고 매일 리론시합을 벌릴 작정이요?》

《리론시합이 아니라 우리가 문제의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선 충분히 론쟁을 해야 한다고 보오.》

《문제의 본질이란 무어요?》

최봉이 추궁하자 한윤은 안피우겠노라고 밀어놓던 담배봉지를 끌어다가 한대 말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난 최동무가 어느 줄이라는것도 알고있고 또 사상이 무어라는것도 짐작하고있소. 허지만 난 그걸 반대하지 않소. 나도 맑스주의를 좀 읽은놈인데 앞으로 청년운동이 어느 길로 나가야 한다는걸 모르겠소?》

최봉은 이때까지 자기의 정체를 감추며 한윤과 접촉을 해왔는데 한윤은 이미 다 알고있다는것이였다. 그는 가리워진 면사막을 벗고 솔직한 이야기를 해보자는듯한 정중한 표정이다.

《그래 무슨 말을 하려는거요?》

《내가 잘못 생각하는진 모르겠으나 우리가 사회주의립장에 선다고 하더라도 <혁명당>기치를 드는게 나쁠것이 없다고 보오. 어제두 론쟁이 있었지만 민생문제를 푼다는 기본사상이 무엇이요? 그게 사회주의가 아니란말이요? 현선생도 어제밤 그 문제에 대해서 해설이 있었소. 사회주의에 가깝다고…》

현선생이란 《국민부》와 《혁명당》의 거두 현묵관을 말하는것이였다. 그는 공산주의를 제일 적대시하는 위인이였다. 《혁명당》결성식을 하기 전전날에도 민족주의자들앞에서 입에 거품을 물고 공산주의를 타매하는 연설을 장황히 했다. 그런자가 저들이 내건 사회평등이니 민생문제해결이니 하는 손문의 민생주의를 따온 주장을 사회주의에 가깝다고 하는것은 청년들의 혼전을 이룬 론쟁속에서 공산주의세력이 우세하다는걸 간파하고 기발에 분칠을 하고 나서는것이였다. 이야말로 검은 배속을 가지고 청년들을 희롱하는 수작이다.

《이것 보시오. 우리 터놓고 이야길 합시다. 동무도 맑스주의를 좀 읽었다니 그만한 문제에 대해선 자기 머리로 판단이 설줄 아오. 그래 현선생의 해설이 진담같아보이오? 민생문제해결이 정말 사회주의같아보이오?》

최봉은 기가 욱해서 부르짖었다.

《사회주의란것이 궁극에 가서야 민생문제해결이 아니요?》

《누가 령도를 해서 어떤 식으로 민생문제를 해결한다우? 솔직히 말해서 현묵관, 고인호 등이 <조선혁명당>강령이라고 내두르는것이 그게 어디 조선적인거요? 중국의 손문선생이 내놓은 <지권평등>이나 <자본절제> 등 민생주의를 본따서 그 무슨 새로운 강령처럼 내두르는걸 우리가 모를줄 아우? 남의 리론을 본따서 마치 민생문제해결의 새 기치나 든것처럼 요란스레 떠들면서 민족주의세력의 독점자가 되고 대두하는 공산주의세력을 배격하며 나아가서 청년세력들까지 다 자기들의 기치를 들고나가게 하자는걸 누가 모를줄 아오?》

몸집이 큰 최봉은 젖은 몸이 후끈후끈 달아서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따지듯이 물었다.

한윤은 압력에 눌리는듯한 기분에서 벗어날수 없어 얼굴만 더 시뻘겋게 동해오를뿐 대답을 못했다. 최봉의 말이 《조선혁명당》강령의 본질을 꿰들고있는것이여서 변명하거나 반박할 말도 없었다.

 

바로 이때 학교에서 얼마 멀지 않은곳에 있는 현묵관의 집 안방에서는 청총대회문제를 가지고 한창 이야기가 벌어졌다.

현묵관, 고인호, 거기에 단 한명 길림의 리갑무들세력속에 있는 서근하가 끼여앉아있다. 사실 길림에서 3부가 합동해서 《국민부》를 만들어놓은 뒤 오동진이 왜놈밀정의 손에 체포되는 불행이 덮어치는바람에 리갑무를 중심으로 했던 길림의 토착세력은 다 뒤로 물러앉고 새 세력이 밀려들어 현묵관, 고인호 같은자들이 그 중진인물로 되였다. 거기 단 한사람 길림패인 서근하가 끼여있을뿐이다.

현묵관은 한때 민족주의자들의 어느 한 기관지주필도 했다는자이고 고인호는 농우회 회원으로 활약하던자였다. 이 인물들이 지금 《국민부》라는것을 부둥켜안고나가며 이번에 당도 만들어냈다. 그들은 지금 자기들이야말로 낡은 세대를 탈피하고나와 새로운 독립조선을 들고나선, 때가 벗은 새 세력이라고 자부하고있었다. 그러면서 자기들의 세력속에 끼여든 서근하조차도 상투쟁이 독립군시절의 때를 벗어던지지 못한 무식한이라고 보고있다.

지금 청총대회문제를 토론하는 이 자리에서도 현묵관과 고인호는 서근하가 한자리에 앉아있는것을 그리 달가와하지 않아했다.

《문제는 그놈이 문제란말입니다. 응원세력이 달려들어 조선혁명당의 기치밑에 회의가 진행돼야 한다고 떠드는데 이 시라소니는 머리를 뚝 떨구고 앉아서 함구무언이란말요.》

방금 학교를 다녀온 고인호는 저들이 감투를 씌워놓은 청총책임자 한윤을 죽일놈이라고 욕설을 퍼부었다. 키가 구척이나 되는데다가 다부산자를 입어 몸이 지렁이같이 길어보이는 고인호는 너무 화가 나서 일어섰다앉았다하며 떠들어댄다.

《아-니 어제 그만큼 알만하게 말해보냈는데두 한윤이녀석이 그런단말요?》

현묵관이 랑패라는듯 눈을 부릅떴다.

사실 이들의 자초의 계획인즉 《동만청총》과 《남만청총》을 통합해가지고 《조선청년동맹》을 만들고 그 동맹으로 하여금 자기들의 기발을 들고나가게 하자는것이였다.

그래서 어제 현묵관과 고인호는 대회준비위원들의 계렬을 따져보고 세력균형이 자기들한테 불리하다고 오늘은 준비위원회사업에 쐐기를 박아넣었다. 밖으로는 독립군의 기마병을 동원시켜 위세를 보이게 하고 안으로 어중이떠중이 청년들을 동원시켜 준비위원회사업이 공산주의계렬쪽으로 기울어지지 않도록 론쟁을 벌리게 했다. 어떻게 하든지 강권을 발동시켜서라도 청년세력을 틀어쥐려는것이였다. 그랬는데도 한윤의 태도부터가 어정쩡하고 모든 계획이 곤경에 빠졌으니 현묵관은 기가 돋을수밖에 없었다.

《저 시라소니가 근심이 깊은 얼굴을 하고 앉아서 륙갑을 할건 뭐요?》

고인호가 또 한마디 증난 소리를 하는바람에 서근하가 한마디 께끼였다.

《륙갑으로 조화를 부리는 사람도 있답디다. 허허.》

서근하의 롱섞인 그 소리에 누구도 웃지 않았다. 서근하는 좀 무안한 생각이 들어 낯빛이 붉어졌다.

《저놈은 제 애비 절반만도 못한놈이요. 제 애비는 그래도 우리 독립군부대에서 누구보다 예견성도 있었고 활동도 잘했소. 그런데 저건 어디서 저따위가 나불러졌는지 모르겠단말야.》

고인호는 그전 독립군때 일을 회상이라도 하는듯 한윤의 아버지를 추면서 한윤을 죽일놈이라고 또 한마디 했다.

얼마후 현묵관은 백산청년동맹대표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다.

《아직 도착하지 않았답니다.》

고인호가 대답했다.

《하긴 그 회장이 빨리 와야 저 혼탁한 사태를 바로잡아나갈텐데…》

서근하가 또 한마디 끼여들었다. 김성주동지께서 오셔야 일을 바로잡아나갈수 있다는 소리였다. 현묵관은 눈길이 거칠게 서근하를 한번 거들떠보았다. 그는 이 길림패인 서근하가 김성주동지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것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겼다. 김성주동지께서 공산주의자라는것을 알고있기때문이였다.

《어쨌든 우리가 청년세력의 통합을 기하지 못한다면 당은 창건초기에 사회의 면전에서 수치를 면할수가 없소. 오늘밤엔 한윤을 불러다놓고 남만청총청년들이 따로 밀회를 가지고 짜고들도록 좀 더 단단히 타일러야겠소. 물론 한윤의 립장이 철저치 못한것도 있지만 우리의 손발이 될놈들전체가 얼떨떨하기때문에 준비위원회복안도 관철시켜내지 못하고 뒤흔들리기 시작한것 같단말이요. 처음부터 단단히 틀어잡고나가지 못한 책임은 더 많이 우리들한테 있다고 보우.》

현묵관이 엄한 표정을 하며 한마디 건늬였다.

《오늘밤엔 저 한윤의 색갈을 좀 단단히 검토해봅시다.》

고인호의 말이였다.

《하여간 백산청년동맹대표가 도착하면 일을 모두 그에게 맡기도록 하는게 좋을것 같소.》

《그만두시오.》

서근하의 말에 현묵관은 피빛이 된 눈을 쳐들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밖에선 여전히 억수가 드리우고있었다. 좀 뜸해진것 같던 번개불이 어마어마한 칼날처럼 방안을 째고 들어오며 번쩍했다. 마당에서 자끈 벼락치는 소리가 났다.

《응 이거 어디를 쳤나?》

모두들 자리에서 우실우실 일어서며 중얼거렸다. 그들은 피같은 붉은 흙탕물이 쏠려나가는 뜰을 내다보며 우들우들 떨었다.

Twitter로 보내기 Facebook으로 보내기 Google로 보내기 네이버로 보내기 싸이월드 공감 Google+로 보내기 Evernote로 보내기 Reddit로 보내기
우리민족끼리
홈페지봉사에 관한 문의(E-mail) : urimanager@silibank.com 홈페지내용에 관한 문의(E-mail) : uriminzok@silibank.com
Copyright © 2003 - 2013 《조선륙일오편집사》 All Rights Reserved
gotop
기사종합
 
도서, 잡지
 
영화, 음악
 
독자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