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소설《충성의 한길에서》

 

        제 1 부

 

                    

                    천  세  봉

 

(  제  24  회  )

 

제   9   장

 

2

 

한겨울처럼 휘뿌리던 눈은 저녁때 가서야 멎었다. 뭉글뭉글 흩어지는 구름사이로 따사로운 석양이 드러났다.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안개같은 운기가 서서히 흐르며 꿈같이 사라지기도 하고 다시 생겨나기도 한다. 석양이 한폭 금띠같이 그 운기를 째고 퍼져 내려온다. 상촌은 아름답고 정갈했다. 하얀 설경우에 운기와 석양이 서로 붙안고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린다. 꿈나라 같은 황홀경속에서 노래소리가 울려온다.

 

칼바람 추운 겨울 물러갈 때에

꽃피워줄 붉은 바람 일어났도다

 

학교에서 합숙으로 돌아오는 아동단원들의 긴 대렬이 눈과 해빛과 운기의 조화속을 헤치고 걸어가며 노래를 부른다. 맨앞엔 나팔수 기송이가 섰다.

그는 키 큰 인수가 소선대로 넘어간 뒤엔 아동단반장이 되였다.

얼굴이 두리두리해지고 키도 몰라보게 커졌다. 그는 책보를 어께에 걸메고 나팔을 한손에 들었다. 역시 부암의 재더미속에서 찾아낸 납으로 땜질한 나팔이였다.

 

꽃을 찾는 봉접들은 나래를 펴고

하루속히 꽃피기를 재촉하노나

 

아동단원들의 합창소리는 더욱 쩌렁쩌렁 울리였다. 모두들 반짝이는 눈망울로 황홀한 눈세계를 바라보며 목청을 돋구었다. 인젠 입히기도 잘 입히고 발도 얼지 않게 고무신과 버선을 신겼다. 리상준의 작은 조카애 태국이나 부암의 태호같은 꼬마동이들한텐 목도리까지 감아주었다.

 

꽃동산을 뭉개려는 벌레 없애고

모두 함께 춤을 추자 넓은 동산에

 

눈우로 흐르는 운기는 점점 더 찬란해진다. 석양은 그속에 와서 외꽃빛이 되여 빙글빙글 돌았다. 그 눈부신 속으로 메새들이 지저귀며 날았다. 참새떼가 우르르 덤불을 찾아가기도 한다.

《누나!》

합숙에 거의 다달은 애들은 대렬을 흐트리고 함성을 지르며 달려갔다. 강한 규률속에서 단련이 돼가긴 하지만 벌써 합숙근방에만 오면 그 모든것을 집어던지게 하는 누나에 대한 뜨거운 정이 폭발했다. 그것은 어머니의 품으로 달려가는것보다도 더 강렬한 정이였다.

눈덮인 개울가에 앉아 빨래를 하시던 김정숙동지께서는 얼른 일어서시였다. 검은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은 그이께서는 얼굴이 확 피여난것 같고 몸도 좋아지시였다.

《누나, 우리가 오늘 산수시험에서 뭘 맞았는지 알아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요?》

《우린 죄다 갑상을 맞았어요.》

《얘, 언제 다 갑상을 맞았니? 상호는 을상 맞지 않았니?》

한 애가 죄다 갑상을 맞았다고 자랑을 하자 다른 한 애가 시비해나섰다.

《그렇지만 그 애두 선생님이 시험을 잘 쳤다고 칭찬했어.》

《칭찬은 칭찬이구 을상 안야?》

애들은 저희들끼리 법석 끓는다. 어떤 애는 김정숙동지께서 두드리다 놓으신 빨래방치를 두손으로 움켜잡고 꽝꽝 빨래를 두드리기도 하고 또 어떤 애는 누나의 물에 젖은 시뻘건 손이 시리겠다고 두손으로 붙안고 입김을 호호 불어주기도 했다. 강기슭의 얼음은 녹았지만 아직도 물은 차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그저 미소를 지으며 이애 저애 돌아보시였다.

《빨리 들어가 버선들을 벗어서 부엌에 널어요.》

《젖지 않았어요.》

《눈구뎅이속으로 왔는데 왜 젖지 않았겠어요.》

《누나, 총 쏴봤어?》

기송이가 누나의 곁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그만이 역시 응석받이 반말을 했다.

《내가 언제 총을 쏴봤겠니? 총을 다 만들었게?》

《헹, 우리가 아까 점심시간까지 다 만들었어. 그래서 누나더러 쏴보라고 웃방 책궤우에 놔두고 나왔어.》

《그런걸 몰랐구나. 혁명위원회에 갔다오느라고...》

《야, 정말…》

기송이는 주먹을 부르쥐고 합숙으로 달려갔다. 여러명의 애들이 뒤따라 뛰였다.

총이란 조준련습할 목총을 말하는것이였다.

얼마후 기송이는 새까맣게 먹대우까지 낸 목총을 들고 애들과 함께 달려왔다.

개울가에 있던 애들도 총을 보더니 야 함성을 지르며 몰려들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미소를 머금으며 얼른 목총을 받아쥐시였다. 눈물과 사랑으로 키워낸 불행했던 세대가 인젠 자기더러 총을 다 쏴보라고 이렇게 떠밀어준다. 김정숙동지의 가슴속으로 뜨거운 생각이 흐르시였다.

총은 애들 솜씨같지 않게 잘 만들어졌다. 조준련습이 잘되도록 총대끝에 조성도 해달고 조문이며 방아쇠도 만들어붙였다.

《누나, 조준도 잘해야 하지만 방아쇠를 당길 때 총이 흔들리면 안된대. 약간만 흔들려두 헤딴델 쏜다는거야. 그래서 방아쇠 당기는 련습두 잘하라고 잘칵 제껴졌다 들어가도록 속에다 용수철두 붙였어.》

기송이는 신이 나서 설명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총을 어깨에 대고 겨누시였다.

《야, 쏜다, 누나가 총 쏜다!》

애들이 환성을 지르며 정말 목총끝에서 총알이라도 나가는가싶어 새별같은 눈들을 방아쇠에 건 누나의 손가락에 모았다. 한 아이가 까마귀 날아간다고 소리를 질렀다.

정말 운기가 벗어진 새파란 하늘로 까마귀 한마리가 너펄너펄 날아갔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까마귀를 조문안에다 잡아넣으려고 총끝을 천천히 돌리시였다.

애들이 발을 구르며 쏴라쏴라 하고 부르짖었다.

《얘, 이녀석들, 빨래버치 깨겠다. 저리 좀 비켜라. 나무막대기를 가지고 어떻게 까마귀를 쏘니?》

리상녀가 김이 물물 풍기는 빨래버치를 또 하나 이고 나와 내려놓으며 애들을 꾸짖었다.

《힝, 어머닌 늘쌍 부엌데기야, 우리 누난 인제 총쏘는 련습을 해가지구 개암골중대로 가거던.》

《야, 이녀석, 부엌데기가 뭐 나쁘냐? 먹을것 입을것 시중들어주는데도 부엌데기가 나뻐?》

리상녀는 꼬마둥이의 엉덩판을 철썩 갈겨댔다. 응석받이들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성재를 키우던 때 손버릇은 더욱 잦아졌다. 어머니로선 그래야 애정을 푹푹 퍼주는것 같은 기쁨도 있는것이였다. 리상녀와 애들이 싱갱이를 하거나말거나 김정숙동지께서는 열심히 까마귀를 쫓으며 총부리를 돌리시였다. 드디여 까마귀가 조문안으로 들어왔다. 그이께서는 방아쇠를 잘칵 당기시였다. 애들이 환성을 지르며 손벽을 쳤다.

《해해해, 거짓부리가 돼서 싱겁네.》

《정말이야, 누나가 헤딴델 쏜것 같애.》

《헤딴덴 왜 헤딴데야? 진짜배기 총이라면 우리 누나가 까마귀를 못쏘겠니?》

애들은 누나의 손에서 총을 뺏어들고 합숙마당으로 달려들어갔다. 그들은 거기서 저마끔 조준련습을 해보겠다고 서로 총을 빼앗으며 돌아갔다.

《그래 남자두 아닌게 총을 쏴낼것 같니?》

리상녀가 빨래를 두드리며 김정숙동지께 물었다.

《왜 못쏘겠어요? 손가락으로 방아쇠만 당기면 되는것인데 못쏠게 있어요? 전날두 대원들 총으로 진짜 총알을 넣구 쏴봤는데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시무룩이 웃으며 대꾸하시였다.

《어이구, 진짜 총알을 넣구 쏴봤다는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구나! 아무렴 그게 그렇게 쉬울가?》

《그렇게 쉽기야 하겠어요. 그렇지만 원쑤 갚을 생각만 있다면 아무리 녀자라도 총 하나 못쏘겠어요?》

김정숙동지께서는 빨래방치를 두드리며 말씀하시였다.

《그 말은 옳은 말이다. 아무렴 왜놈 미워하는 마음이 모자라겠니, 저것들두 원쑤를 갚을 생각으로 총을 쏘겠다고 장 우쭐렁대는걸 보렴.》

리상녀는 마당에서 떠드는 애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전날엔 조그마한 태호두 날 보구 자기두 인제 유격대로 들어간다나? 그래서 네까짓게 무슨 유격대냐고 하니까 자기하구 팔씨름을 해보자는게 아니겠니? 그래서 어서 해보자하구 둘이 가마뚜껑우에 팔굽을 세우고 맞들어봤단다. 그런데 예삿내기가 아니더구나. 손아귀가 돌같애. 그리고 힘은 또 얼마나 세겠니?》

김정숙동지께서는 흐뭇해서 웃으시였다. 자기가 힘이 세다는 소리보다도 애들이 힘이 세서 총을 멜것 같다는 소리가 더욱 기쁘시였다. 요새 와서는 늘 그런 생각이 들군하지만 강가에 널려있던 그 어린것들이 인제 이만치라도 옳게 자라갈수 있는 의지가 생겼다고 생각하니 한숨 놓이는것 같은 느낌도 드시는것이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빨래방치를 힘차게 두드리시였다. 석양이 비쳐 그이의 얼굴은 황홀할만큼 아름다왔다. 금빛 운기와 뜬김이 그 아름다운 얼굴을 빙글빙글 휘감으며 날아가고 밀려오고 한다.

바로 이런 때 혁명위원회 사무실로는 캡을 쓰고 굵은 단장을 짚은 김기준동지가 젖은 신발을 털며 들어섰다. 그는 장군님께로 가던길에 차응도나 김봉석이를 만나 경찰서에 갇힌 광부들의 구출문제를 토의해보려고 여기에 들리였다.

혁명위원회 사무실에 가뜩 모여앉아 회의를 하던 사람들은 김기준동지가 들어서는바람에 모두 일어나 악수를 하며 맞았다.

《아니, 이 눈속으로 어떻게 이처럼 벼락같이 날아들었습니까?》

《상촌동지들이 보고싶어서 왔습니다.》

김기준동지는 빙긋빙긋 웃으며 대꾸했다.

《아니 보고싶으면 화상을 그려보내라든지 할것이지 이른봄 진눈길에 이건 무슨 수곱니까?》

차응도의 익살에 방안에선 웃음이 터졌다. 김기준동지도 웃었다.

《먼길에 수고를 했습니다. 최진이라 부릅니다.》

웬 얼굴 해맑은 청년이 김기준동지의 손을 잡으며 정중히 인사를 건네였다. 차응도가 왕청에서 온 동지라고 소개를 했다. 김기준동지는 왕청이란 소리에 얼른 얼굴을 들며 청년을 마주보았다. 청년은 눈에 맑은 정기를 담고 미소를 지었다.

《저야 뭐 수고가 있습니까? 김기준이라 불러주십시오.》

《바로 김정숙동무의 오빠입니다.》

이번엔 공청지부 책임자 리진구가 알려주었다.

《아, 그렇습니까? 참으로 훌륭한 누이동생을 두셨습니다.》

청년은 인상좋게 웃었다. 김봉석이며 희섭이들도 반가와서 악수를 했다. 한참 웅성거리고나서야 모두들 자리에 앉았다. 김기준동지는 차응도의 옆에 들어앉으며 이마에 번지르르하게 내밴 땀을 손수건으로 문질렀다. 아무리 눈이 퍼부어도 철은 역시 속일수가 없는것인지 눈에 묻힌 길을 걸어왔는데도 땀이 나서 속옷까지 척척히 젖었다.

김기준동지는 지금 이 자리에 왕청에서 온 청년이 앉아있다는 바람에 가슴이 두근두근 뛰였다. 왕청이라면 지금 자기가 찾아가는 장군님께서 계시는곳이다. 그런데 그곳에서 왔다면 필시 장군님께서 보내신 공작원이 아니겠는가. 무슨 일이 있기에 여기 공작원을 내려보내주셨을가? 자기는 왕청으로 오라는 지시를 딴 지방조직을 통해서 받았는데 혹시 이 공작원이 그쪽으로 돌아오며 련락을 띄운것이나 아닌가.

김기준동지는 이런 생각을 하며 차응도의 저편에 앉아있는 청년을 흘끔흘끔 눈주어보았다.

《자, 회의를 계속해보시지요.》

청년의 말이였다.

《계속합시다. 제기된 문제에 대해 기준동무의 의견도 들어보기로 하고 회의를 계속합시다.》

차응도가 웃으며 대꾸를 했다.

《그래 우리가 노나줄수 있는 땅의 총평수가 얼마라고 했지요?》

왕청에서 온 최진이 연필대를 들고앉아 공책에다 무언가를 적으며 물었다.

《맨처음 방침대로 자작지까지도 다 수탈해낸다면 120정보가 넘습니다.》

저쪽 군복 입은 김봉석의 곁에 앉아있는 얼굴 기다란 사람이 대답했다. 그의 앞엔 책상이 놓여있고 책상우엔 무슨 서류인가가 수두룩이 쌓여있다. 그리고 연필이며 수판을 놓고 앉아있는걸 보면 무슨 계산을 해가며 토론들을 하고있는게 분명했다.

《글쎄 인젠 자작지 수탈이란 그런 잘못된 말씀은 그만두십시오. 그걸 무슨 방침이라는 말로도 표현을 하는데 조선혁명에선 오직 김일성장군님께서 내세우신 로선과 방침이 있을뿐입니다.

김일성장군님께서 내세우신 방침은 악질지주의 땅을 빼앗아서 밭갈이하는 농민들에게 노나주는것입니다. 그러니까 악질지주놈들한테서 빼앗은 땅만 계산해야 합니다.》

《그것만 계산을 한다면 리창근의 땅이 30정보, 가만있자, 산림도 저리 넣어서 노나주질 않겠습니까?》

최진의 말에 얼굴 기다란 사람은 장부책을 뒤지고 수판을 튀기고 하면서 이렇게 물었다. 최진은 산림은 놔두고 토지만 계산하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잠간동안 수판을 티각거리며 계산을 했다.

《지주가 네놈인데 땅은 82정보입니다. 네놈이 다 악질이고 친일분자입니다. 그렇지 않은 지주란 한놈도 없습니다.》

《야, 그놈들이 많이도 가지고있었군, 그러니까 상촌지역의 땅을 거의 가지고있은셈이군요.》

사람들이 혀를 차며 소리를 질렀다.

《바로 그 땅을 근거지농민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무엇때문에 얼마 안되는 자작지를 수탈한다, 어쩐다하며 소동을 일구겠습니까? 자작지란 자기 로력을 가지고 농사 지어먹는 땅인데 그런 사람들은 근로적인 측면도 가지고있고 또 대개가 반일감정을 가지고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우리 혁명의 편에 쟁취할 대신에 오히려 땅을 빼앗아서 혁명과 담을 쌓게 하겠습니까?

김일성장군님께서는 여러 근거지들에서 쏘베트를 세우겠다 어쩌겠다 하고 좌경적인 구호를 들고나오는가 하면 이곳 상촌에서처럼 사적소유의 페절이니 뭐니하며 토지문제를 우리 혁명의 성격에 맞지 않게 잘못 다치는 경향이 있기때문에 이번에 군정간부회의를 소집하시고 다시한번 정권문제며 근거지문제에 대해 정확한 해명을 주신것입니다. 그러시고는 곧 공작원들을 여러 근거지로 파견하셨습니다. 제가 여기 온것도 바로 그때문입니다. 그러니 수탈대상은 어디까지나 김일성장군님의 방침에 비추어 이 82정보의 땅으로 금을 긋고 그것을 근거지농민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합니다.》

희섭이는 얼굴이 주홍빛이 되여 앉아있었다. 아니 희섭이뿐만아니라 김봉석이며 턱수염이 시꺼먼 농민협회책임자도 그런 표정들이고 희섭이들의 의견에 어느 정도 기울어져가던 차응도도 얼굴이 불그레해졌다. 최진이가 말을 부드럽게 했지만 사실 이 근거지에서는 토지문제를 가지고 여러가지 극단적인 주장이 나와서 혼란이 있었던게 사실이였다. 심지어 토지의 사적소유일반을 철페하고 토지란 토지는 죄다 수탈해서 꼴호즈나 쏩호즈를 뭇듯해가지고 농민들을 먹여살려야 한다는 극단적인 주장도 나왔다. 그바람에 차응도까지도 휩쓸려들어가서 겨우 버티여낸것이 중농가운데서 땅을 한두뙈기 소작주는 사람들 땅쯤은 몰수대상에 넣어도 되지 않겠는가 하는 주장을 했었다. 희섭이는 꼴호즈요 뭐요 하는것은 반대했지만 수탈대상에 대해선 차응도보다 훨씬 더 좌로 기울어졌다. 어쨌든 김일성장군님께서 먼곳에 계시면서도 이곳의 형편을 꿰뚫어보시고 일찌기 최진이를 파견해주셨기에 망정이지 하마트면 자작지까지도 죄다 수탈하는 놀음이 벌어질번했었다.

김기준동지는 담배를 붙여물고앉아 방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한참 심중히 들었다. 어쩐지 가슴이 무둑해졌다. 상촌일군들이 일을 잘못 벌렸던것이야 어찌되였든 여기선 벌써 장군님의 령도밑에 토지가 농민들의 소유로 넘어가고있다. 이야기로만 들어오던, 희망속에서만 그리던 꿈같은 세상이 여기에선 현실로 펼쳐지고있다. 토지! 토지에 대해선 김기준동지도 자신의 체험을 통한 피맺힌 생각들이 많고도 많다. 소작살이의 쓰라린 고통때문에 가슴을 두드리고 땅 한고랑때문에 얼마나 울었던가. 고향땅에서도 그랬고 두만강을 건너 이 들판에 와서도 그랬다. 지금도 타박타박 김을 매나가는 아버지가 보이고 어머니와 안해가 보인다. 한여름 온 식구가 배를 곯으며 뜨거운 볕에 나앉아 땀을 빼도 가을에 걷어들인 곡식은 지주의 광속으로 죄다 들어가고말았다. 생활은 깨진 질그릇같이 되고 거기에 한숨과 눈물이 서리고 어렸다. 그런데 인젠 그 토지가 농민들의 얼굴에서 피얼룩, 눈물얼룩을 씻으며 농민들의것으로, 농민들의 소유로 돌아오고있다. 땅이 농민의것으로 된다니 누구보다도 안해의 얼굴이 더욱 눈앞에 매달려 떨어지지 않는다. 말도 변변히 못하던 그 안해가 제 집에서도 배를 곯고 시집을 와서도 배를 곯으며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그러면서도 기를 쓰고 농사를 지었지. 농사를 지어서 민가네 집으로 도조를 실어가는 날엔 울지도 않고 그저 외롭고 서글픈 얼굴로 내 눈치만 보았지. 그 불쌍한것이 지금 저세상에서라도 이 소식을 듣는다면 두고 간 먼 이 세상을 얼마나 그립게 바라보고있을가.

김기준동지는 은근히 가슴이 저리였다. 그는 인젠 땀이 다 잦아든 얼굴을 괜히 자꾸 문지르고있었다.

최진은 공책에 무엇인가를 열심히 쓰기도 하고 수판을 튀기며 계산도 했다. 아직은 학생티가 있는것 같은 청년인데 맑은 눈망울이 영채를 뿌리며 그 눈에서 장 웃음도 떠나지 않았다. 하는 잡도리를 보니 아예 자기가 팔을 걷고 대들어 토지분배사업을 밀고나갈 태세같기도 했다.

사실 그는 큰 사업을 능숙하게 제껴나갔다. 여기 오는길로 즉시 장군님의 인민혁명정부로선에 근거하여 혁명위원회 대신 인민혁명정부위원들을 선거하여 정권기관을 새로 꾸리고 적위대는 반일자위대로, 반제동맹은 반일회로, 혁명의 현단계의 요구를 보다 절실히 반영한 조직으로 개편강화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토지문제를 해결하려 나선것이였다.

방안사람들은 그저 그의 밝은 인품과 만사에 숙달된것 같은 일솜씨에 경이의 눈을 보내고있었다.

이날 저녁 김기준동지는 딸 둘을 키우며 홀아비살림을 하는 차응도를 따라가서 저녁을 같이 나눈 뒤 태봉시경찰에 갇히운 광부들의 구출문제를 토의했다. 차응도는 선뜻 그 문제의 절박성을 리해하고 꼭 그들을 유격대에서 구원하도록 김봉석이와 토론해보겠다고 했다. 지난번 련락을 받고는 태봉시내의 지하조직망에 피해가 올것이 걱정되여 유격대를 파견하지 않았는데 인젠 자기 생각에도 그냥 둘수가 없는것 같다고 했다.

김기준동지는 이 문제에 대해서 한숨 마음이 놓이였다. 그는 차응도를 따라서 다시 토지분배사업이 벌어진 인민혁명정부로 나왔다. 혁명정부에선 최진의 지도밑에 분배대상자명부를 만드느라고 떠들썩하였다.

김기준동지는 밤이 좀 들어서야 희섭이와 함께 누이동생이 있는 아동단합숙을 향해 떠났다. 들에 나서니 질적히 녹아내린 푸근한 땅을 굽어보며 보름달이 두둥실 떴다. 은쟁반같은 달이였다. 밝은 달빛이 복받은 땅우에 바다처럼 비껴나갔다. 김기준동지는 이게 바로 장군님의 령도밑에 태여난 자유천지로구나 하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흔들었다. 농민들의 손으로 돌아올 대지는 지금 살진 젖가슴을 눈속에 감추고 말없이 누워있다. 인제 이 들판에선 농민들의 웃음소리, 소모는 소리가 일어나고 새롭게 벼려맞춘 보습가로 검고 번지르르한 흙이 기름처럼 번져질것이다. 얼마나 휘황하고 꿈같은 일인가! 바로 태봉시 로동계급의 숨가쁜 싸움도 이것을 위해서 있은게 아닐가.

《학교에 학생은 얼마나 됩니까?》

《150명가량 됩니다. 거리가 먼곳엔 분교도 두었습니다.》

김기준동지의 물음에 희섭이 대답했다. 그들은 밤이 들면서 다시 살얼음이 잡혀가는 깊은 웅뎅이를 빠져나갔다.

《희섭동무가 여기 와서 수고를 했습니다.》

《내가 무슨 수고겠습니까? 수고는 정숙동무가 큰 수고를 했지요. 참 신문을 받아읽었습니까?》

《예, 읽었습니다.》

《바로 정숙동무가 그렇게 싸웠습니다. 나는 필력이 모자라 정숙동무의 투쟁을 사실만큼 감동적으로 쓰지 못했습니다.》

《어린것을 등만 두드려주어서는 안됩니다.》

《어리다니요? 허허허, 이 근거지에서 누가 그 동무를 어리다고 생각할 사람이 있겠습니까? 근거지에서의 그 동무는 우리모두의 거울과 같은 커다란 존재입니다.》

그들은 이런 소리를 주고받으며 눈구뎅이길을 걸어갔다. 희섭이의 말을 들으니 김기준동지는 다시한번 가슴속이 뭉클해졌다.

합숙에 오니 덩그렇게 높은 기다란 집에 불빛이 환했다. 두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애들이 넓은 방에 가득 들어앉아 공부를 하고있었다. 칠판이 달린 벽앞에 김정숙동지께서 책을 들고 서서 무언가를 설명하다가 《아니…》 한마디 하고는 입을 다물고 우뚝 서버리시였다. 오빠가 나타나다니,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김정숙동지께서 그저 놀라움에 잠겨 서계시는동안 애들이 우르르 일어섰다. 희섭이를 보고 허리를 굽석하는 애가 있는가 하면 꼬마둥이 태호는 이마우로 손을 쳐들어올리며 《항상준비》 하는 소리까지 질렀다. 그는 그리고나서는 자기만이 소리를 지른것이 부끄러워 얼굴이 새빨개져서 이 애 저 애 돌아보았다.

《허, 이놈들이 아주 괜찮게 사는구나. 환한 방안에서 글을 읽으며 응?》

김기준동지는 입이 벌어져 한방안 가득한 애들부터 돌아보았다. 그리고나서야 누이동생을 쳐다보았다.

《네가 수고를 하는구나!》

그의 말은 흔연히 울렸으나 어딘가 첫마디부터 젖어있는듯했다.

《오빠, 언제 여길…》

김정숙동지께서는 일이 너무도 놀라와 가리마가 단정한 얼굴로 서서 다음 말을 잇지 못하시였다.

《난 아까 왔다. 그새 건강해서 일을 잘했다니 기쁘구나.》

《제가 뭐 한 일이 있어요?》

담담한 목소리시였다. 김기준동지는 안개더기우에서 헤여지던 때 일을 생각하며 누이동생이 그새 그 무슨 세찬 바람을 헤치고 왔기에 저렇게도 숙성해졌을가 하고 생각하였다.《상촌신보》에 홑적삼에 해진 치마라는 말이 나왔으니 이리로 오면서도 누이동생의 모습을 내내 안개더기우의 그 모습 그대로만 그리며 왔었다. 이렇게도 확 피여나 모습이 딴사람같이 되였을줄은 꿈에도 몰랐다.

희섭이가 애들을 앉으라고 해서야 줄레줄레 일어섰던 애들이 모두 자리에 들어앉았다. 기송이가 연필대 쥔 손등으로 눈물을 이리저리 씻었다.

《형님이 왔는데 인사도 없이 울어?》

희섭이가 따뜻한 목소리로 나무랐다.

《선생님, 그 앤 눈물이 많아요.》

꼬마둥이 태호가 입술을 나불거리며 희섭이에게 고자질했다. 그러자 곁에 앉은 애가 어른들이 들어섰는데 무슨 쓸데없는 소리냐고 장딴지를 꼬집어주었다.

《애쿠, 왜 꼬집냐?》

《까불지 말어.》

《너 그럼 기송이가 잘 울지 않는단말이냐? 전날두 산에 올라갔다가 상고개너머 흰구름을 쳐다보며 어머니 생각 난다고 울지 않던?》

《이자식이…》

이번엔 기송이가 눈물범벅이 된 얼굴을 쳐들며 을러멨다. 그러더니 그는 제풀에 설음이 터져 고개를 무릎우에 구겨박고 꺽꺽거리며 울었다. 그바람에 김정숙동지께서도 얼른 돌아서 저고리고름으로 눈물을 씻으시였다.

《아니, 이게 누군가? 인남 애비가 오질 않았나?》

리상녀가 사이문을 열어제끼며 부르짖었다. 김기준동지는 리상녀의 얼굴이 나타나는바람에 깜짝 놀랐다. 경식이로부터 성재를 잃은 리상녀가 상촌에 와있다는 말을 들었으나 이 합숙에서 이렇게 만날줄은 몰랐다.

《청진집어머니도 여기 와계십니까?》

《여기 와서 서로 의지하고 산다네. 그런데 어떻게 이처럼 꿈같이 나타났나? 정숙이가 늘 오빠의 이야길하며 어데 있는지 모르겠다고 하더니…》

《좀 먼곳에 가서 살고있습니다. 그래 어머니는 건강하십니까?》

《건강하잖구, 목숨이 붙어있는데 힘이 모자라겠나?》

김기준동지는 웃으며 희섭이와 함께 정지방으로 내려갔다. 그는 리상녀가 죽은 아들 생각을 하며 울음보라도 터뜨리면 어떻게 하나 하는 근심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리상녀는 흔연한 표정으로 깁고있던 애들 옷과 반짇그릇을 구석쪽으로 옮겨놓으며 어서들 앉으라고 했다.

《어머니, 그새 고생이 많았겠습니다.》

《고생만 있었겠나? 그렇지만 인젠 그걸 다 디디고 일어섰다네.》

어머니는 무거운 방치돌도 힝 들어서 구석쪽으로 옮겨갔다. 그런 리상녀의 모습을 보니 김기준동지는 그가 울음을 터뜨리는것 이상으로 가슴이 아팠다. 드세고 꿋꿋한것이 꼭 자신의 어머니를 방불케 한다. 그 괴롭고 아픈 시련을 다 디디고 일어섰다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우리 집 땡땡이는 어데로 갔습니까?》

희섭이는 리상녀나 김기준동지의 입에서 부암이야기라도 터져나와 방안공기를 어수선하게 만들가봐 우스개소리로 자기 안해에 대한 이야기를 물었다.

《에이구, 점잖은 어른이 땡땡이란건 무슨 소리요?》

리상녀가 희섭이를 책망했다. 그는 그제야 어느틈에 내밴 눈귀의 눈물을 치마자락으로 씻었다.

《혁명사업을 잘 안하는건 땡땡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혁명사업을 잘 안하다니? 지금 앞뒤마을로 부리나케 돌아다니며 부녀회원들 글을 가르치느라고 야단인데 그건 무슨 소리요? 오늘 저녁에도 눈이 깊어 못간다고 그리 말렸는데 저녁술을 놓자마자 이어 내뺐다우.》

《그게 뭔지 아십니까? 양은쟁개비 끓듯하는것입니다.》

《어이구맙시사…》

희섭이는 껄껄 웃었다. 김기준동지도 희섭이가 제 안해의 이야기를 하는줄 알고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태봉밥집에서 견디기 힘들어한다는 반영도 있었거니와 원래 희섭이와 금실이가 남다른 내외간이라는것을 알고 일부러 상촌으로 올려보내기는 했지만 성미 괴벽한 희섭이가 또 어떻게 나올가 해서 은근히 근심을 했었는데 이제 오고가는 이야기를 듣고보니 마음이 놓인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여전히 칠판앞에 서서 글을 가르쳐나가시였다. 그이께서는 칠판의 글자들을 한자한자 짚어가며 읽으시였다.

《우리 아버지는 봄, 가을, 여름 없이 일을 하지요.》

 

애들이 목소리를 합쳐서 받아읽었다. 새별같은 눈들이 김정숙동지의 손끝을 따라가며 글자까지도 한자한자 머리속에 익혀나간다. 그러나 기송이만은 얼굴을 못들고 눈물을 뚝뚝 떨구며 받아읽었다.

 

《장군님 주신 땅에 밭갈고 씨뿌리고》

《장군님 주신 땅에 밭갈고 씨뿌리고》

 

김정숙동지께서는 울며 글을 받아외우는 기송이쪽을 될수록 보지 않으려 하시였다. 그이 역시 가까스로 침착한 태도를 지탱해나가시였다. 건드리면 터질것 같은 울음이 그이의 목안에서도 북받쳐오른다. 오빠가 무슨 일로 여기에 왔을가, 인젠 여기 영영 있으려고 온것이나 아닐가, 그렇다면 인남이는 어떻게 하고 왔을가, 안개더기우에서 아버지의 품에 안겨간 그 어린것이 그동안 아무 탈 없이 자라기는 했을가, 그 누가 제 엄마같이 그것을 키워주고있을가, 송하동에선 그 불쌍한것이 젖도 얻어먹지 못하고 비누물을 뒤집어쓰고 얼마나 울었던가, 오빠는 왜 혼자만 왔을가, 그 보고싶은걸 어째서 업고오지 못했을가, 혹시 업고 와서 어데다 맡기고 온것이나 아닐가.

김정숙동지께서는 물밀듯이 치미는 아픈 생각을 가까스로 달래시였다. 정지방에선 무슨 이야기가 벌어졌는지 오빠의 웃음소리가 들려온다. 오래간만에, 너무도 오래간만에 들어보는 걸걸한 큰 웃음소리였다. 꼭 오빠가 부암에서 농사를 지을 때 김군들과 함께 앉아서 이야기판을 벌리며 웃던 그런 유쾌한 웃음소리였다. 그 웃음소리를 들으니 그 옛날이 되살아난듯 가슴이 울렁거리기도 하시였다.

(언니가 저 목소리를 한번 들었으면…)

문득 죽은 올케 생각이 가슴을 칼로 에이듯이 아프게 치미신다. 정말 오빠의 저 목소리를 부암의 그 초가집 추녀밑에서 올케가 다시한번 들어보고 잘못되였어도 한이 덜 맺혔을것 같으시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얼마전에 희섭이를 통하여 올케의 마지막 소식을 자세히 들으시였다.

태봉혁명조직에서 들은 소리라고 하면서 전하는데 올케야말로 회령집며느리답게 장하게 싸우다가 희생되였다. 여북했으면 올케를 취조하다가 종시 물고를 내고만 그 독사같은 왜놈형사조차 혀를 내두르며 하루종일 술을 퍼마신끝에 김기준의 안해가 이런 판이니 김기준이 당자야 더 말할수 있겠는가 하고 개탄했다고 했을가.

김정숙동지께서는 오빠의 목소리를 들으며 가슴속으로는 그리운 올케의 생각을 더듬으시였다.

《자 오늘밤에 오빠두 왔는데 복습을 그만 시키지.》

희섭이가 벌거우리해진 얼굴에 웃음을 띠고 웃방으로 올라오며 말했다. 그도 무엇인가 몹시 유쾌해진 모양이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글을 쓰다가 돌아서며 그저 시무룩이 웃으시였다. 그이께서는 희섭이의 말을 들어보니 그게 옳은 말인듯도싶어 칠판에 써놓은 글을 모두 지우시였다. 그리고는 애들더러 책보를 싸라고 하시였다.

희섭이는 방금 들은 김기준동지의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달빛이 흘러내리는 눈벌로 걸어나갔다. 김기준동지는 상녀의 슬픈 심정을 풀어주려고 능청스럽게 그런 우스운 이야기를 꺼냈는지 모른다. 태봉시에 애꾸광주가 한놈 있었는데 세상을 절반밖엔 볼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이 시라소니광주를 첩 열둘이 속여먹고 덕대들이 속여먹고 해서 결국은 망해버렸는데 지금은 그 눈때문에 자기가 망했다고 애꾸를 수술하여 유리알을 박아넣고 다닌다는것이였다. 김기준동지는 손짓 몸짓으로 익살을 섞여가며 애꾸의 흉내를 냈다. 그통에 리상녀도 자기도 눈물이 나게 웃었다.

얼마나 유쾌한 밤인가! 폭이 넓고 속이 깊은 김기준동무가 늘 자기들과 함께 있어주었으면 좋을것도 같았다. 혁명가란 이렇게 해서 슬픔도 아픔도 이겨나가며 랑만을 가지고 투쟁할수 있는게 아니겠는가!

희섭이는 얼어서 뿌드득뿌드득 소리가 나는 길을 총총히 걸어나갔다.

《자, 오늘밤엔 우리 조무래기들과 하루밤 같이 새볼가?》

김기준동지는 활짝 밝아진 얼굴로 싱글벙글 웃으며 애들속에 올라와앉았다. 애들이 서로 눈짓을 하며 김기준동지의 너부죽한 얼굴을 흘끔흘끔 쳐다보았다.

《얘, 누나 오빠라는데 령감같지?》

《쉬- 듣는다. 저것 봐, 이쪽을 보지 않니?》

《누나 오빠면 우린 뭐라고 부를가?》

《형님이라구 부르지.》

《형님? 해해, 어떻게 형님이라구 부르니, 저렇게 수염이랑 났는데…》

꼬마둥이들이 구석쪽에 모여앉아 소곤거렸다. 푸접이 좋은 태호는 얼른 일어서더니 김기준동지의 곁에 가서 슬쩍 들어앉았다. 그리고는 그의 굵은 무릎우에 조그만 손을 올려놓으며 발씬 웃기까지 한다.

《허 이놈 괜찮은데.》

김기준동지는 태호의 뒤통수를 쓸어주며 웃었다.

《갼 싱검바우예요.》

태호의 코앞에 앉았던 홍갑이가 이렇게 말했다.

《싱검바우?》

《예, 거짓말두 잘해요.》

《헹, 암만 그래봐라, 난 기송이 형님곁에 앉으니까 좋기만하다.》

그 소리에 김기준동지는 태호의 잔등을 두드려주며 큰소리로 웃었다.

너무나 큰 충격에 마음을 가눌수가 없어 바깥으로 나가 한참 앉았다가 들어오신 김정숙동지께서는 방 웃목에 조심스럽게 앉으시였다.

《넌 여기 들어와서 몹시 앓았다더니 인젠 몸이 일없느냐?》

《네, 그때 인차 나았어요. 오빠, 인남인 어데 있어요?》

《인남이? 그 앤 태봉에 있다.》

《태봉시내에요?》

《그럼.》

《오빠두 이때까지 거기 계셨어요?》

《거기 있었다. 넌 아직 내가 어데 가있는걸 모르고있었니?》

《내가 어떻게 알아요?》

김정숙동지께서는 불시에 다시 가슴이 무둑해지며 목이 메여오시였다. 먼 하늘가에 밀어보냈다고만 생각하시였던 부암의 설음이 다시 살아나고 이 상촌에 와서 겪은 고통과 눈물로 엉킨 사연이 다시 살아났다. 그이께서는 얼굴을 돌리고 앉아 우시였다. 애들앞에선 울지 말자고 밖에 나가 바람까지 쏘이고 들어왔건만 인제 더는 울음을 억제할수가 없으시였다. 그저 그립고 그립던 오빠의 앞에서 서럽고 기쁜 정이 산같은 울음으로 되여 쏟아지시였다.

《우지 말아, 인남인 인제 거의 이 애만치는 컸다. 방안에서 고무공두 차며 돌아가구…》

그 소리에 태호가 헹 코방귀를 뀌였다.

《이놈 왜 코방귀야?》

《엊그저께까지 빽빽 울던걸 벌써 나만치 컸다네.》

《너 왜 오늘밤 그렇게 까부니?》

애들속에 앉았던 기송이가 시뻘건 얼굴을 쳐들며 태호에게 눈을 부라렸다.

《정말이다. 누나가 지금 막 울고있는데…》

딴 애들이 기송이의 훈수를 들었다. 그제야 태호는 낯이 약간 발깃해졌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오래 우시였다. 김정숙동지께서 우시는바람에 애들도 경황이 없는 얼굴들로 앉아있었다.

《어서 그쳐라! 애들이 다 심란하게 자꾸 울어서야 되겠니?》

《안… 안 울겠어요. 난 그저 오빠가 와서 너무도 기뻐 그래요.》

《기쁘면 웃어야지.》

《해해, 정말.》

태호의 소리에 다른 애들이 또 한바탕 시뻘건 눈으로 태호에게 눈총을 주었다. 그래도 태호는 끄떡없이 앉아서 김기준동지의 손을 주무르고있다.

얼마후에야 김정숙동지께서는 울음을 그치시였다. 그이께서는 눈물을 씻고 파릿해진 얼굴로 돌아앉으시였다.

《오빠, 그래 인남이는 젖엄마한테 주어서 키우세요?》

《젖엄마는 무슨 젖엄마냐? 그 애 걱정은 조금도 하지 말아라. 네 올케 이상으로 아이를 길러주는 할머니가 계신단다.》

《할머니가요?》

《그럼, 내가 부암에서 만났을 때 이야기하지 않더냐? 어머니를 한분 모시고있다구. 그 어머니가 인남이를 키운단다.》

《그럼 내내 암죽을 먹여요?》

《암죽을 먹지, 하루에 세종발이씩…》

《야, 죽신하겐 먹네.》

애들이 일시에 부르짖었다. 그들도 인젠 누나가 울음을 그치니 좋은 모양이였다.

《밤이 깊었는데 애들을 재우려무나…》

《그래 오빠는 상촌에 볼일이 있어서 왔어요?》

《그 이야긴 이따가 하자. 자, 모두들 자리를 보아라. 밤도 깊었는데…》

그제야 애들은 모두 웅성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들은 일어서면서도 장난질이였다.

서로 다리를 걸기도 하고 쿡쿡 쥐여박기도 했다.

《무슨 장난질이예요?》

김정숙동지께서 꾸짖으며 일어서시였다.

《얘가 먼저 옆구리를 꼬집지 않아요.》

《남의 옆구리는 왜 꼬집어요? 삼손이, 나 좀 봐요.》

삼손이라고 불리운 애가 차렷자세를 하고서서 김정숙동지를 올려다보았다.

《어제밤 회의에서 삼손이는 뭐라구 말했던가요?》

《…》

《왜 말을 안해요? 어서 대답해봐요.》

《다시는 장난질을 안하겠다구…》

《그런데 왜 또 남의 옆구리를 꼬집어요?》

《…》

《다시 그러겠어요?》

《안그러겠어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엄한 눈길로 한참 바라보고나서야 빨리 자리를 깔고 누우라고 하시였다. 그제야 다른 애들도 죄다 아무 소리없이 자리들을 보았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애들이 자리를 보는것도 일일이 거들어주시였다. 베개도 바로 놓아주고 이불도 셋이서 한채씩 덮게 골고루 펴주시였다. 넓은 방안에 애들을 가득 들여눕히고나서야 그이께서는 앞에 드리운 머리를 쓸어넘기며 일어서시였다. 이 광경을 보는 김기준동지는 가슴속에서 뜨거운 생각이 흘렀다. 이 장난꾸러기들을 사랑의 품에 품어서 키우려니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 일이 많았겠는가. 저 마음씨 착한것이 눈물인들 얼마나 흘렸겠는가, 누이동생은 자기가 바랐던 그것보다 더 높이 몰라보게 아득히 자라났다. 그는 누이동생의 얼굴에서 그 어딘가 숭엄한 빛이 비끼는것 같은 인상도 받았다.

김기준동지는 애들은 물론 리상녀까지도 다 잠이 든 뒤에야 누이동생을 웃방으로 불러올려다놓고 자기가 김일성장군님의 부르심을 받고 가는길이라는것을 이야기하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두눈에 황홀한 광채를 담고 오빠를 쳐다보시였다.

《오빠, 그게 정말이예요?》

《그럼 정말아니구…》

《지금 장군님께서는 어디 계시게요?》

《왕청에 계신단다.》

《왕청?》

김정숙동지께서는 혀아래소리로 가만히 속삭이며 두어깨를 차분히 낮추시였다. 왕청! 그렇게도 그리던 장군님께서 계신곳, 그곳이 왕청이란곳인가. 눈부신 그 이름 왕청! 우리 오빠는 장군님을 만나뵈오러 왕청으로 간다!

《오빠는 거기 가서 내내 계시게 되여요?》

김정숙동지께서는 너무도 기뻐 눈에 반짝이는 빛을 띠고 오빠를 쳐다보며 물으시였다.

《글쎄 어떻게 될지 알수가 없구나, 장군님께서 오라고 분부가 계셨으니 내 생각엔 필시 그 무슨 새로운 지시가 있을줄 아는데 그게 어떤 지시겠는지야 알겠니? 어쨌든 장군님께서 하라시는대로 해야 하지!》

《장군님께서는 이 상촌으로 언제 오시나요?》

《왜, 장군님을 만나뵈옵고싶으냐?》

《저 같은게뭐…》

김정숙동지께서는 작은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하시였다.

《일을 잘해라. 장군님을 만나뵈여도 일을 잘하고 만나뵈여야지! 혁명하는 사람치고 그 누가 장군님을 만나뵙고싶어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니? 그렇지만 한일이 없이 만나뵙는다는것은 부끄러운 일이야. 난 네가 상촌에 와서 일을 이만치 해놓고 사람들의 칭찬도 받고있으니 맘이 좀 놓인다. 이게 얼마나 좋은 일이냐? 애비 에미 잃은것들을 이렇게 모아다놓고 뜨뜻이 재우며 글을 가르치고있으니… 이것들이 몇해후엔 다 총을 메고나서서 일본놈과 싸울게 아니냐? 얘, 저 애 목이 비틀렸구나. 베개를 바로 놔줘라.》

김정숙동지께서는 얼른 또 옷고름을 들어 눈물을 닦고나서 자는 애의 베개를 바로 놓아주시였다. 한방안 가득 누운 애들이 복스럽고 끌끌도 해보였다. 낮에 기껏 뛰다가 눕기 바쁘게 잠이 들었는데 숨소리가 그 무슨 풍구라도 두어개 놓고 불어대는것 같았다. 기송이도 시뻘건 얼굴을 태국이의 납작한 얼굴과 마주대고 들어가도 모르게 자고있다. 입이 벙글써하게 열리고 굵은 앞이 두대가 드러나보인다.

《저녀석은 말을 잘 듣니?》

《네, 장난이 세서 가끔…》

《가끔 어쨌단말이냐?》

《시뚝거리군하죠. 내가 있으니까 응석을 부리는거겠지요, 그러나 지금은 많이 나아졌어요.》

《어쨌든 저 애를 잘 키워라. 그래야 돌아가신 어머니가 땅속에서라도 눈을 감을게 아니냐? 너나 나같은것이야 다 큰걸 보고 돌아가셨으니까 무슨 뒤가 무거운 생각을 가지고 가셨겠니? 그렇지만 저 기송이녀석이야 어린걸 두고 돌아가셨으니 명치에서 그 생각이 내려가셨겠니? 그러니까 우리가 그 여한을 잊으시도록 해드려야 할게 아니냐?》

따뜻하고 부드러운 오빠의 이야기는 밤새 계속되였다. 눈과 얼굴에서는 내내 밝은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이날이때까지 오빠의 이런 얼굴은 한번도 본 일이 없으시였다. 어쩜 그렇게도 엄하고 강직하던 오빠의 입에서 설음과 눈물의 이야기가 이처럼 환희와 행복에 겨운 이야기같이 쏟아질수 있을가?

김기준동지는 거의 새벽녘이 되여서야 아이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누웠다. 그는 베개를 밀어던지고 디굴디굴 구는 기송이의 머리를 자기 팔우에 올려놓았다.

《들어던져도 모르게 자는군.》

그는 혀아래소리로 중얼거리며 인젠 한근이나 되게 무거운 기송이의 큰손을 끌어당겨 자기의 배우에 올려놓고 아직도 눈물흔적이 남아있는 그의 눈가장을 살뜰히 쓸어주었다.

리상녀의 곁에 내려와 누운 김정숙동지께서는 거의 밝아올녘이 되여서야 잠간 눈을 붙이시였다. 그이께서는 눈을 붙이자 이어 자신도 장군님 계신 왕청으로 찾아가는 꿈을 꾸시였다. 눈우가 아니고 풀이 파란 들길로 자꾸만 걸어가시였다. 가다가 보시니 멀리에 높은 산이 보이고 그 산너머에서 금빛같은 광채가 부채살처럼 퍼져올랐다. 거기가 바로 왕청땅이라고 했다. 아 왕청! 왕청! 김정숙동지께서는 속삭이며 달음박질을 하시였다. 꿈을 꾸는 그이의 이마에는 맑은 이슬같은 땀이 함치르르 돌았다.

 

 

제   10   장

 

1

 

을씨년스럽게 흐린 날씨였다.

경식이는 광부들의 오두막이 붙어앉은 첫째봉 앞거리를 걸어가고있었다. 첫째봉기슭의 비밀장소로 가는길이다.

장군님의 부르심을 받은 김기준동지가 거리를 떠나간 뒤로는 경식이가 태봉지구의 혁명조직책임을 지게 되였다.

지금 태봉지구의 혁명조직은 어려운 시련을 겪고있었다.

일제는 지난해 겨울과 올 봄철에 걸치는 《토벌》작전으로 갓 태여난 조선인민혁명군을 요람속에서 짓눌러버릴수 있으리라고 타산하였다.

그러나 국경일대의 무력을 총동원한 봄철 《토벌》작전에서마저 놈들은 사등이뼈가 부러졌다.

인제 와서 놈들은 조선인민혁명군에 사람과 총탄, 식량과 화약, 군복과 정보를 공급하는 국경일대의 도시와 농촌을 유격근거지로부터 떼여내지 않고서는 료원의 불길처럼 번져가는 조선인민의 거족적인 항일무장투쟁의 불길을 끌수 없을뿐만아니라 그 불속에서 저들이 타죽게 되리라는것을 통감하게 되였다.

놈들은 당황하였다. 그래서 이해 여름내 근거지에 대한 《토벌》작전을 더욱 강화하는 한편 저들의 통치구역, 특히는 근거지와 린접한 반유격구일대의 도시와 농촌의 혁명조직들과 인민들에 대해서도 전에 없는 발광적인 탄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상촌유격구와 린접한 태봉 역시 이 탄압의 검은 물멀기에서 벗어날수 없었다. 더구나 태봉엔 놈들이 이를 악물만한 조건이 따로 있기도 했다. 놈들은 작년 여름 여기에서 온 거리를 뒤집어엎는 광부들의 폭동을 겪기도 했다. 그리고 놈들은 상촌 《토벌》에서 번번이 그것때문에 혀를 빼물고 퇴각하지 않을수 없는 그 작탄이란것이 태봉지구의 금광들에서 뽑혀올라가는 화약으로 만들어진다는것도 알게 되였다. 놈들은 눈알이 뒤집혀 대검거선풍을 일으켰다. 뚜렷한 단서가 있는게 아니라 미심쩍다고 생각되는 밥집과 골목과 갱들을 송두리채 휩쓸어내는 비자루검거였다. 이바람에 태봉지구 혁명조직은 큰 손실을 입었다. 무고한 인민들과 함께 지구혁명조직의 적지 않은 골간들이 검거선풍에 휘말려들어갔다. 태봉조직은 지금 놈들과의 투쟁을 치렬하게 벌리였다. 얼마전엔 상촌중대의 도움을 받아 첫째봉기슭 학살장으로 끌려가는 백여명의 무고한 인민들과 함께 밥집의 홍대근이 대걸이 같은 사람들을 탈환하는 일을 성공해냈다. 이런 사건이 벌어지자 놈들은 더욱 눈알이 곤두서서 뛰였다. 인젠 마구 잡아들이고 마구 내다가 쏘아죽였다. 이렇게 되니 혁명조직은 또 이에 대처한 투쟁을 조직하지 않을수 없었다.

어쨌든 경식은 불철주야 사선을 넘는 환경속에서 뛰였다. 어떤 땐 떠나간 김기준동지의 생각도 간절했다. 혁명조직의 책임을 맡긴 했으나 모든 일이 김기준동지가 있을 때같이 잘되여나가지도 않거니와 정세가 점점 더 긴박해져서 무얼 어떻게 손쓸나위도 없었다. 경식이는 땀을 씻으며 걸었다.

비밀장소로 오니 주인집 아낙네가 밖으로 나오며 상촌에서 사람이 왔다고 알려주었다.

《상촌에서요?》

《네, 녀성동무가 왔어요.》

경식이는 언제나 상촌에서 사람이 왔다면 반가왔다. 누가 왔을가? 주인아낙네는 한마디 이르고는 모르는척하며 개울가 빨래터로 걸어간다.

경식이는 얼른 토방으로 올라서 문을 열었다.

방안엔 뜻밖에도 김정숙동지께서 와 앉아계시였다.

《아니 이게 누구요?》

오래간만에 만나는 반가움도 있지만 이 살판치는 거리에 김정숙동지께서 나타난것이 놀랍기도 하였다.

《안녕하셨어요.》

김정숙동지께서는 마주 일어서며 인사를 하시였다.

《참, 오래간만이요. 그런데 어떻게 동무가 여길?》

《조직에서 가보라기에 왔어요.》

《조직에서? 차응도회장이 그럽디까?》

김정숙동지께서는 대답하지 않고 저고리 앞섶에 찔러가지고 온 쪽지를 경식이에게 꺼내주시였다.

돌돌 만것이 꼭 굵은 바늘대만 했다. 경식이는 얇은 미농지가 메질것 같아 조심히 풀어서 읽었다.

 

경식동무.

상급조직의 통보를 받고 그곳 어려운 형편을 알게 되였습니다. 요청대로 공작원을 보냅니다. 공청원 세사람을 선발해서 보내는데 김정숙동무를 내놓고는 모두 적구공작경험이 있는 동무들입니다. 김정숙동무도 잘 뒤받침하여주면 그곳 조직들을 꾸리는데 한몫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사람들을 묶어세우는 일에선 상촌지구에서 우리들도 그에게서 많은것을 배운답니다.

탈환하여 들여보낸 사람들은 거의 다 건강이 회복되였습니다. 미처 이리로 몸을 빼지 못한 중상자들이 있다는데 이어 들여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차응도

 

경식이는 다 읽은 쪽지에 성냥불을 그어댔다. 상급조직의 통보를 받고 공작원을 보낸다는것은 다른게 아니였다. 일이 힘겨워진 그는 얼마전 상급조직에 능숙한 공작원을 몇명 보내달라고 요청하였는데 그 요청이 상촌근거지에 지시로 떨어진 모양이였다.

경식이는 재털이우에서 재가 되여 가드라지는 쪽지에서 시선을 들며 김정숙동지를 쳐다보았다. 이렇게 정숙동무가 공작원으로 나오리라고는 미처 생각도 해보지 못하였다. 감개무량한 생각이 가슴에 젖어든다.

작년 이맘때 상촌에서 헤여졌으니 꼭 일년만에 만나는셈이다. 그런데 엊그제같은 그 한해동안에 얼마나 숙성해졌는가.

부암에서는 겹치는 고생과 시련으로 하여 피지 못했던 여윈 몸과 작은 얼굴이 눈에 띄게 실해지고 환하게 피여났다. 검은 눈동자에는 예전보다 더욱 영채가 돌고 전에 없던 깊고 침착한 빛이 온몸에서 풍긴다. 경식이는 그 의젓해진 모습속에서 신문을 통해서도 알았고 소문으로도 알았지만 상촌지구의 아동단을 잘 꾸리여 장군님의 치하를 받고 공청원이 되였다는 김정숙동지의 그간의 정신적장성의 무게가 느껴지여 더욱 미덥고 반가운 마음을 금할수 없었다. 경식이는 김정숙동지의 모습에서 마치 일년동안 몰라보게 자라난 혁명의 키를 뚜렷이 보는것 같아 벅찬 느낌도 들었다.

《그래 리상녀어머니랑도 평안히 계시오?》

경식이는 고개를 다소곳이 숙이고 앉아있는 김정숙동지께 물었다.

《네, 편안해요.》

《아이들 합숙에서 일을 한다더니 아직두 거기 계시오?》

《네.》

《부암에서 올라간 애들두 모두 잘 자라구?》

《그럼요. 지금은 죄다 학교에도 나가구 아동단생활도 잘하고있어요.》

《그래야지. 허허, 기송이가 눈에 선하우. 그녀석은 지금도 나팔을 불겠지?》

《불고있어요.》

《아무튼 기쁘오. 정숙동무가 인젠 혁명을 본격적으로 하게 됐으니… 공청에 들었다는 말두 내 들었는데 한몫 단단히 해주오!》

《제가 무슨…》

김정숙동지께서는 고개를 수그리시였다.

《그래 같이 온 동무들은 어디 있소?》

《산속에 있어요. 저녁에 둘째봉 뒤골짜기에서 만나기로 하였어요.》

《그래? 아주 잘했소. 지금 놈들의 발광이 무섭소. 거리에 낯선 사람이 나타나기만 하면 잡아가는 판이요.》

경식은 흡족했다. 지하공학엔 별로 경험이 없을 김정숙동무인데 거리에 들어서는 첫 잡도리부터가 생각이 깊은것이 마음에 들었다.

별안간 방문이 열리더니 조덕하가 들어왔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얼른 자리에서 일어서시였다. 조덕하는 목에 건 수건을 벗어 땀을 문지르며 김정숙동지를 웬 처녀인가 하는 눈으로 흘금흘금 쳐다보았다. 경식이가 김기준동지의 누이동생이라고 소개하자 그는 반색을 하며 솥뚜껑만치 큰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하자고 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낯을 붉히며 자기의 조그마한 손을 내미시였다.

《참 나두 들었소. 상촌에 올라가있다구요?》

《네…》

김정숙동지께서는 혀아래소리로 대꾸하시였다.

《앉소, 어서 앉소.》

조덕하는 자리를 가리키며 어서 앉으라고 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조심스럽게 치마자락을 휩싸며 다시 자리에 앉으시였다.

조덕하는 경식에게 무어라고 수군수군 이야기를 하였다. 무슨 밀정처단문제를 이야기하는것 같은데 곁에 앉아계시는 김정숙동지께서도 알아듣지 못하게 낮은 목소리로 수군거렸다. 경식이는 시종 심각한 표정을 하고 앉아서 이따금 고개만 끄덕거렸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아무래도 자기가 곁에 앉아있어서 그들이 할 이야기를 꺼려하며 조심하는것 같아서 슬그머니 일어서 밖으로 나오시였다.

《어디로 가오?》

경식이가 물었다.

《밖에 나가서 바람을 좀 쐬자구요.》

《거리엔 나가질 마우.》

《네.》

어쩐지 정말 무시무시한 분위기같기도 하시였다. 토방우에 나서시니 첫째봉우의 하늘이 올려다보이였다. 지난해 폭동이 일어났을 때 거리쪽으로 둥둥 떠넘어오며 삐라를 뿌려던지던 삭도바가지들이 오늘도 의연히 공중으로 떠넘어온다. 올케를 만나겠다고 떡보자기를 안고 달려왔던 이 거리… 그날엔 얼마나 이 거리를 갈팡질팡 헤매였던가. 그때는 내가 어린 철부지이기도 했었지. 들끓는 로동군중이 그저 어마어마해만 뵈였고 로동군중속에 오빠가 없다고 그렇게도 비애에 잠겨 눈물을 글썽거리지 않았던가.

그러나 나는 오늘 김일성장군님의 크나큰 뜻을 받든 공작원으로 이 거리에 찾아왔다. 생각하면 감개가 무량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깨가 무거워지는 생각도 드시였다. 근거지에 들어오신 이후 열정을 기울여 학습도 하고 조직에서 시키는 일을 남보다 갑절 애를 쓰며 하느라고도 하시였다.

어느 한시 품에서 책을 떼놓지 않고 장군님의 가르치심을 맘속에, 넋속에 새겨넣으며 공부를 하시였다. 그러는 속에서 무엇인가 한구석한구석 환하게 가셔지는것을 느끼기도 하시였다.

지난달엔 공청선전사업분공을 받아가지고 상촌근거지 사방 70리에 널려있는 마을들을 돌기도 하시였다. 아동단사업도 지도하고 청년들과 부녀회원들 앞에서 무장투쟁로선, 근거지창설방침, 혁명정부로선을 선전도 하시였다. 군중앞에서 이야기를 하고나면 말 잘한다는 칭찬이 있어 늘 얼굴이 붉어지군하시였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 무슨 칭찬을 받을만치 말을 잘했다고는 느껴지질 않으시였다. 어쨌든 근거지에 들어온 후 오늘까지의 생활은 장군님께 충실한 전사로 되기 위해서 각별히 애를 쓰신 기간인것만은 사실이였다. 그러기때문에 어린 아이들을 합숙에 모아놓고 생활을 꾸려나가시던 때처럼 일을 하면서도 앞을 가늠할수 없는 그런 수준은 아니시였다. 그래서 차응도회장과 공청서기 리진구가 자기를 불러다놓고 태봉으로 공작을 나가라고 임무를 줄 때에도 일이 엄청나긴 했으나 한번 나가보겠다는 심정이 있어서 가슴이 뛰기도 하시였다. 그러나 막상 오늘 이 무시무시한 태봉거리에 들어서시고보니 자기가 과연 이 거리에서 무슨 일을 감당해낼수 있겠는가 하는 불안이 가슴속에 그늘을 지웠다. 인제 경식동지가 무슨 일을 시킬지 알수는 없었으나 어떤 생소한 일에 대들어 실수나 저지르면 어떻게 할가?

김정숙동지께서는 어쩐지 무거워지는 마음으로 마당에 내려서시였다. 그이께서는 문득 인남이의 생각이 나시였다.

오빠가 인남이를 이 태봉시에다 두고 떠났다는데 그 할머니네집은 어데 있을가? 혹시 이 동네 어디에 있지 않을가? 인남이가 인제 나를 보면 얼굴을 알아볼가? 영 몰라보고 울음보를 터뜨리지나 않을가? 태봉이란 어째서 이렇게 슬픔도 많고 인연도 깊이 맺어진곳일가? 태봉에 끌려와 류치장에서 죽은 올케는 지금 제 아들이 여기 와서 어느 할머니네 집에서 자라고있는줄 알기나 할가. 그걸 알고있다면 올케의 넋은 나는 새라도 되여 그 집에 와서 싸고돌며 애닲게 울고있을지도 모른다.

《왜 나왔어요? 어서 들어가요.》

망을 보는 주인아낙네가 눈짓을 하며 말했다.

《늘 망을 보시려니 얼마나 수고가 많으시겠어요.》

김정숙동지께서 대꾸해주시였다.

《늘 망볼 필요야 있어요? 공작원이 나타난 때만 이렇게 살피고있지요. 어서 들어가봐요. 요새는 놈들이 어떻게 눈알이 뒤집혀 갈개는지 모른다오.》

김정숙동지께서는 도로 토방으로 올라서시였다.

그러나 그이께서는 지금 비밀이야기가 벌어진 방안으로는 도로 들어가고싶지 않아서 굴뚝이 서있는 회춤으로 돌아가시였다. 방안에선 여전히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린지 조덕하가 그놈도 처단해야 한다고 우기는것 같았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그 소리를 들으니 웬일인지 가슴이 더 불안하게 두근거리시였다. 사실 요새 태봉시에서는 적아간에 생사를 결단하는 치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놈들이 무고한 인민들과 혁명가들을 학살하는데 보복하여 혁명의 편에서는 밀정들을 처단하였다. 어제는 놈들이 강물속에서 눈깔이 튀여나온 민가의 아들 민인택을 건져놓고 해종일 검시를 한다고 모여들어 끓었다. 민가는 아들이 학교를 마치고 돌아와 경찰서장과 손을 잡듯마듯 송장이 되여 너부러졌다고 정신을 잃고 훌쩍훌쩍 뛰였다.

경식이와 조덕하의 이야기는 한참후에야 끝났다. 그들은 김정숙동지에 대해서도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이야기가 끝나자 이어 경식이 문을 열고 김정숙동지를 들어오라고 했다.

그는 김정숙동지께서 들어가시자 조덕하를 따라 웃골이 어딘지 웃골로 올라가라는것이였다.

《웃골에 신개동으로 나가는 녀성동무가 있으니 그 동무를 따라서 신개동으로 나가오. 형편이 좀 험악해서 동무를 여기서 지체시킬수 없소. 신개동에 나가면 거기 한기천이란 동무가 있소. 그 동무가 신개동, 온천동, 덕산동 일대의 조직을 맡고있소. 그러니 그 동무의 지도를 받아가며 군중조직사업을 봐주오. 지금 놈들의 발광적인 탄압소동을 뚫고나가는 길은 오직 혁명조직들을 더욱 튼튼히 꾸리며 혁명력량을 더 크게 길러서 조선인민혁명군의 활동을 힘있게 뒤받침하는것이요. 난 정숙동무가 꼭 크게 한몫 맡아주리라고 믿소.》

경식이는 활달한 목소리로 과업을 주었다. 그도 그전 경식이와는 다른것 같았다. 역시 이런곳에서 큰일을 맡아안고 나가니까 무엇인가 시퍼렇게 날이 서고 닥달이 된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저… 산속에 있는 동무들은 어떻게 하겠어요?》

《그 동무들 걱정은 마우. 인제 곧 우리 사람들이 가서 만나도록 조직하겠소. 참 이곳에 조카애가 있다는 말은 들었던가?》

《네…》

《인남이는 잘 자라고있소. 만나보고 가게 했으면 좋겠는데 지금은 거리에서 우물거리고있을 때가 못되우. 다음 기회에 만나보기로 하고 오늘은 그냥 떠나는것이 좋겠소.》

《그렇게 하겠어요.》

《자, 갑시다.》

조덕하가 모자를 쓰며 김정숙동지더러 가자고 했다.

조덕하를 따라나선 김정숙동지께서는 석양을 받아안고 바삐 걸으시였다.

조덕하는 첫째봉기슭 고개길을 향해 걸어올라갔다. 어데서인가 불시에 여러방의 총소리가 울리였다.

《개같은놈들, 까막골에 피바다를 만드는가보군.》

조덕하가 중얼거렸다. 아마도 멀지 않은곳에 까막골이 있는것 같았다. 거기서 사람을 죽인다는 소리같아 김정숙동지께서는 몸이 오싹하는 느낌도 드시였다. 고개를 넘어서니 골짜기에 광부들 집같은 오두막들이 가뜩 널려있었다.

《정숙동무, 여기 좀 서있소. 내 들어가서 녀성동무를 내보낼테니까 그 동무를 따라서 신개동으로 나가우. 빨리 걸으면 어둡기전에 닿을거요.》

여기가 웃골인 모양이였다. 조덕하는 김정숙동지를 길가에 세우고 이런 말을 하더니 바삐 길옆집 울타리밖을 돌아 종종걸음을 쳤다.

그가 들어간지 얼마 안되여 그 울타리 뒤길로 몸이 크고 머리태가 치렁거리는 웬 처녀가 뛰여나왔다.

《아니…》

길가로 나온 처녀는 두눈을 흡뜨며 김정숙동지를 쳐다보았다.

《복녀동무 안예요?》

김정숙동지께서 먼저 소리치시였다.

《에그머니나, 이거 어떻게 된거야요?》

복녀는 달려오더니 김정숙동지의 어깨를 잡아흔들었다.

《글쎄 이렇게 만날줄 어떻게 알았어요?》

《정말이예요.》

김정숙동지께서는 대꾸하며 눈물이 글썽해지시였다.

복녀도 그담엔 말을 못하고 그 실한 손등으로 눈굽을 닦았다.

《어쩜 그렇게두 몰라보게 피였을가? 보름달같이 환해졌어요.》

《온 참, 무슨 환해졌겠어요.》

김정숙동지께서는 미소를 지으며 대꾸하시였다.

《빨리들 가보우. 경찰이 싸다니는데 걸리면 재미없소.》

뒤에 나온 조덕하가 은근히 일러주며 두 처녀의 곁을 씽 지나쳤다. 그는 비딱하게 쓴 캡을 밀어올리며 길건너쪽으로 건너갔다. 거기에도 처마가 땅에 닿는 납작한 집들이 여러채 있다. 저녁 짓는 연기가 이골목저골목에서 뭉게뭉게 기여나온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복녀를 따라서 큰길쪽으로 걸어나오시였다. 그리고는 아득하게 펼쳐진 벌판길을 걸어가시였다. 인젠 눈도 다 녹고 기름기 스민듯한 시꺼먼 벌이 저녁해빛속에 드러났다. 멀리에 구릉같은 곡선이 보이는데 거기에선 갈가마귀들이 떠올라 바글바글 끓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무척 맘이 개운해지셨다. 이 초행길에 복녀가 동행이 될줄은 모르시였다.

《복녀동무는 아직두 그 밥집이라는데 있어요?》

《여직 있었댔지. 그렇지만 인젠 나왔어요. 정숙동문 참 상촌에 가있다구?》

《그건 어떻게 알아요?》

《알잖구, 내가 아는 어머니네 집에 기준동지가 자주 다니는데 모를가?》

《그래요? 그럼 그 어머니가 우리 조카애를 키우세요?》

《인남이말이야요?》

《네…》

《키우잖구… 참 아이가 인젠 올 때 대고는 몰라보게 자랐어요. 그 어머니가 여북이나 잘 거두는줄 알아요? 하루에 암죽을 세종바리씩 해먹인다우.》

김정숙동지께서는 가슴이 뭉클해지셨다. 인젠 정말 애가 얼마나 달라졌을가? 그 고생꾸러기가 어찌다가 그런 어머니품에 가서 자라게 됐을가.

《그 어머니가 정숙동무를 만나면 정말 기뻐할거야요. 참 좋은 어머니라오. 동무네 올케가 류치장에서 잘못된걸 놈들이 까막골에 내다가 던졌다는 말을 듣고는 한달동안이나 잠을 못잤어요. 그저 밖에 우두커니 나서선 까막골어구만 바라보구있었다질 않겠어요?》

김정숙동지께서는 가슴을 저며내는것 같은 생각이 드시였다. 까막골이란 아까 총소리가 나던곳인데 거기 올케가 묻혀있단말인가. 아니 무슨 무덤이나 있을텐가, 저놈들이 마구 내다가 집어던졌다질 않는가. 치가 떨리시였다.

해가 지자 대지우엔 검푸른 기운이 썰렁하게 건너갔다. 쌀쌀한 바람이 찬물을 끼얹듯 불어왔다. 해빛 사라진 창공에서 무슨 새인지 모를 새 한마리가 삐삐 울며 떠돌았다. 이 넓은 벌판에 어디 둥지를 두고 저리도 외로이 헤맬가?

신개동에 다달았을 때는 캄캄한 밤이였다. 조덕하는 어둡기전에 닿을거라고 했지만 그렇게 종종걸음을 쳤는데도 밤이 되여서야 들어섰다. 나지막한 야산을 등지고 앉은 넓은 웅뎅이안에 집들이 띠염띠염 앉아있다. 그곳을 벗어나자 축동이 나지고 축동안에 집들이 또 가뜩 들어앉아있었다.

《이런 촌에서도 혁명하는걸 막 내놓군 못해요.》

복녀가 속삭였다.

《여기도 경찰이 나와요?》

《경찰도 가끔 나오고 개질하는놈들도 있다오.》

김정숙동지께서는 복녀를 따라서 언덕을 또하나 넘으시였다. 거기서 골짜기로 깊이 들어가 집이 몇채 있는데 그 어구에 청년 둘이 망을 보며 서있었다. 복녀는 청년들과 제법 악수까지 했다. 그리고는 김정숙동지를 상촌에서 보내온 공작원동무라고 소개도 했다. 청년들은 상촌이란 말에 반색을 하며 김정숙동지와도 악수를 했다.

《상촌에서도 밤이면 이렇게 망을 봅니까?》

한 청년이 악수를 하며 물었다.

《네…》

《야, 한번 가보고싶은데요.》

사실 상촌이란 말은 청년들의 마음을 들썩들썩 뛰놀게 하는 말이였다.

그 누구나 다 장군님 해발이 비친 자유천지로 가보고싶어 모여앉기만 하면 상촌이야기들을 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복녀를 따라서 나무가 우거진 사이길을 걸어 맨 마지막집으로 오시였다. 신문지를 더덕더덕 바른창문에 불그레한 불빛이 비쳐있었다. 방안에서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나왔다.

《여기가 아지트야요.》

복녀가 알려주었다.

《그리구 이것 봐요. 민가네 집에서 마차 부리던 사람을 알지요? 혹시 부암에 다니는걸 더러 보지 않았어요?》

복녀는 사립문안으로 채 들어서지 않고 소곤소곤 물었다.

《누구말예요? 대걸동지말예요?》

《그럼… 아이참, 정숙동문 누구나 다 척척 동지라고 부르네. 난 아직 입에 잘 익지 않아서 그렇게 못불러요. 그런데 그 사람두 여기 와 치료를 하구있어요.》

복녀는 얼굴을 약간 붉혔다. 어둡기때문에 김정숙동지께서는 그것을 모르시였다.

《탈이 났게요?》

《탈이 무슨 탈이겠어요? 류치장에 갇혀있었댔는데 사형장으로 끌려나가다가 요행 살아났어요. 인민혁명군이 와서 놈들을 갈겨주어서… 그런데 뛰다가 한방 맞질 않았겠어요.》

김정숙동지께서 놀라시자 복녀는 곁손질로 얼른 옆을 찌르며 앞서서 걸어들어갔다. 창문에 그림자가 얼씬하는것을 보았기때문이다.

부엌문안으로 들어서니 정지방은 썰렁하게 비여있고 웃방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모두 시뻘겋게 단 얼굴들을 돌리며 내려다보았다.

《복녀동무가 벌써 다녀왔군. 뒤에 들어오는 동무는 누구요?》

얼굴이 기름하고 코대가 우뚝한 한기천이 복녀에게 물었다.

《상촌에서 오는 동무야요.》

《상촌에서?》

복녀는 대꾸를 않고 저고리섶에서 쪽지를 꺼내 한기천에게 주었다.

한기천은 쪽지를 펼쳐들고 불앞에서 읽었다. 글은 몇줄 안되는것 같은데 한참이나 들고 앉아서 고쳐보고 고쳐보고 했다. 그러더니 얼마후에야 성냥을 득 그어서 쪽지에 불을 붙였다. 그는 김정숙동지를 쳐다보고 수고를 했다고 하며 손을 내밀었다. 김정숙동지께서는 허리를 굽히며 두손으로 악수를 하시였다.

《앞으로 일을 좀 잘해주오. 기준동무의 누이동생이라니 반갑소.》

《많이 배워주세요.》

김정숙동지께서는 얼굴을 붉히며 대꾸하시였다.

《아니 우리가 문의한 문제에 대해선 뭐라고 답변이 없나요?》

방안에서 누가 물었다. 아마 쪽지에 무슨 다른 대답이 없는가고 묻는것 같았다.

《그만두라우. 광산주변까지 흉흉하게 만들어선 안된다우. 여기선 군중을 묶어 힘을 만드는데 모를 박으라우.》

한기천은 역기가 올라 중얼거리며 담배연기를 뿜었다.

《아니 그럼 저 왜놈들은 태봉시내사람들을 마구 죽이고있는데 우린 여기놈들을 처단할수 없단말이요?》

《잘못하다간 도리여 큰 피해를 입을수 있다는 말이겠지요.》

격동된 소리를 눌러놓는 대걸이의 목소리가 들린다.

《아니요. 견해가 잘못됐소. 이걸 테로로 보는것 같은 견해가 잘못됐단말이요. 이게 무슨 테로란말인가? 혁명이 지금 결정적시기에 이르렀는데 박대동이나 온천동 정치호 같은놈들을 처단해 없애는것이 테로란말인가.》

한기천이 기를 돋구었다.

《정숙동무, 앉자구.》

복녀는 김정숙동지를 정지방구석으로 이끌며 속삭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구석쪽에 조심스럽게 앉으시였다.

그이께서는 인제 그 사람이 바로 태봉시에서 폭동이 터졌을 때 무슨 동발목이 팔리지 않는다고 주먹을 휘두르며 연설하던 사람이라는것을 깨달으시였다. 웃방에선 주구처단문제를 놓고 한참동안 이러니저러니 이야기들이 오고갔다. 한 청년은 우에서야 무어라고 지시를 하든 처단하려고 계획했던놈들은 다 없애버려야 한다고 우겨댔다. 그는 정 다 처단할수 없다면 덕산동 박대동이만이라도 없애버리자고 했다.

담배는 얼마나 피우는지 담배연기가 정지방에까지 꾸역꾸역 밀려내려온다.

웃방에서 박대동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바람에 김정숙동지께서는 가슴이 후두두 떨리시였다. 태봉에서 경식이가 덕산동이야기를 할 때부터 분임이의 생각이 떠올랐댔는데 결국 분임이의 시아버지는 혁명과 이렇게 원쑤로 마주 서있는놈인가. 박대동이 처단대상자로 지목이 된놈이라면 지금 분임이는 그 시집에서 어떻게 살고있을가? 김정숙동지의 눈앞에는 잊을수 없는 분임이의 얼굴이 떠오르시였다.

칠보단장에 진한 분화장까지 했는데도 창백한 빛을 가리우지 못한 구슬픔이 드러나던 얼굴, 두볼에 눈물자국이 얼룩지고 절망과 원망이 서린 눈으로 뒤를 돌아보며 가마안으로 들어가던 그 잊지 못할 얼굴… 그 불쌍한것이 사람들이 처단한다 어쩐다 하는 원쑤놈의 편에 넘어갔단말인가.

김정숙동지께서 이렇게 가슴무거운 생각을 하시는데 웃방에선 법석 떠들던 소리가 불시에 조용해졌다. 모두 우실우실 일어나 밖으로들 나가는 모양이였다. 어디로 가는것인지 말들도 없이 쿵쿵 토방에서 떨어져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나직이 한숨을 쉬시였다.

사람들이 나가자 복녀는 김정숙동지의 팔소매를 끄당기며 일어섰다. 함께 웃방으로 올라가자는 안속인것 같았다. 김정숙동지께서는 복녀를 따라 웃방으로 올라가시였다. 웃방엔 연기가 꽉 차고 독한 담배내가 코를 찔렀다. 방안목에 두눈이 골속에 들어간 대걸이 누워있다.

《저 오늘은 좀 어때요?》

그처럼 활달한 복녀가 별스럽게 수집음을 탄다.

《좀 나은것 같소. 아니 이게 누구요?》

대걸이는 김정숙동지를 보자 얼른 어깨를 들고 일어나려고 했다. 복녀가 일어나면 안된다고 몸을 굽히며 그의 어깨를 눌렀다.

《어디를 다치셨게 그렇게…》

《겨드랑밑을 상했어.》

김정숙동지의 말씀에 복녀가 대꾸했다. 사실 대걸이는 혁명군들이 놈들을 갈겨눕혀서 빠져나오던 날 밤 저도 놈들의 총을 뺏어들고 격전을 했는데 마지막판에 한방 맞았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상촌으로도 올라가지 못하고 이 동네로 맞들려나왔다.

《정숙동무는 어떻게 돼서 이리로 왔소?》

김정숙동지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대걸이가 쳐다보며 물었다.

《여기 와서 일을 하라구 해서 왔어요.》

《여기 와서 무슨 일을 한단말이요?!》

김정숙동지께서는 고개를 숙이고 앉아 말씀을 못하시였다. 김정숙동지의 반듯한 가리마를 한참 쳐다보고있던 대걸이도 말이 없이 그담엔 눈길을 돌려 천장을 뚫어지게 올려다보았다. 살이 쑥 빠진 옆얼굴이 대걸이가 아닌 딴사람같아도 뵈였다. 복녀는 방안에 놓여있는 화로를 들고 부엌으로 내려가 푸푸 불을 불어대며 법석을 하더니 무언가 김이 문문 풍기는것을 손바닥에 들고 올라왔다.

《팔을 좀 들어요. 해종일 약을 한번도 갈아붙이지 않았군요.》

상처에 무슨 찜질을 하는 모양이였다.

대걸이는 여전히 침묵속에 팔을 들고 상처를 내맡겼다.

《그래 오빠는 한번도 못만나봤소?》

약을 갈아붙이고난 대걸이는 그제야 한마디 또 물었다.

《만나봤어요. 왕청으로 가시던길에 상촌에 들렸기에…》

《그때 상촌에 들렸댔단말이요?》

《네…》

《다시 태봉으로 돌아온다는 소리는 없었소?》

《그런 말은 없었어요.》

대걸이는 또 천장을 쏘아보았다. 그는 매일같이 김기준동지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중이였다. 그가 보기에도 지금 태봉지구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심상치 않아뵈였다. 각일각 큰 위험이 닥쳐들고있는데 그 누구도 속수무책이면서 그저 법석 들끓고만 있는것 같았다. 이런 시기에 무엇을 어떻게 해야 된다는것은 김기준동지가 돌아와야만 알것 같았다.

《그래 정숙동무를 이리로 가라고는 누가 그랬소?》

《경식동지가요.》

《경식동무는 어떻게 만났댔게?》

《상촌조직에서 태봉으로 내려가라고 하기에 태봉시에 가서 만났댔어요.》

《그래 여기 내려가 공작하라고 하였소?》

《네…》

대걸이는 들을만하고 한번 큰숨을 씩 쉬였다. 그는 복녀가 가져다 덮어주는 이불을 한옆으로 제껴놓으며 복녀더러 랭수를 한그릇 떠오라고 했다.

이날밤 김정숙동지께서는 복녀와 주인아낙네의 두 틈에 누워서 날이 샐녘까지 잠을 못드시였다. 무슨 부녀회사업으로 마을에 나갔다왔다는 주인아주머니도 몸이 복녀만치나 실한 아낙네였다. 이 실한 녀자들 두 틈에 누워있으려니 몸이 짓눌리우는것 같기도 하시였다.

(아, 내가 과연 여기서 무슨 일을 해낼수 있을가?)

김정숙동지께서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시였다. 그러나 그이께서는 이어 자기의 생각에 놀라며 무섭게 자신을 꾸짖으시였다.

(너는 공청원이 아니냐? 더군다나 장군님께서 몸소 받아주신 공청원이 아니냐? 장군님께서는 늘 네가 어떻게 싸우는가를 살펴보시고계실텐데 무얼 주저하고 무얼 두려워한단말이냐? 경식동지랑 기천동지랑두 뭐 배속에서부터 혁명가로 태여났을가? 나가보자, 나가다 넘어지면 어떠냐? 백번 넘어지면 이백번 일어서서 나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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