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서《불멸의 력사》 2

        장편소설

 

 

                                     천  세  봉  

 

( 제 24 회 )

 

제  12  장

 

사람들이여, 희망을 가지라!

 

1

 

벽에는 자그마한 칠판이 걸려있다.

강반석어머님께서는 지금 분필을 들고 칠판에 글을 쓰고계시였다. 방안 가득 들어앉아있는 부녀회 회원들은 칠판을 올려다보며 어머님께서 쓰신 글을 열심히 베껴쓴다. 모두들 공책을 무릎우에 올려놓고 쓰는데 애들처럼 연방 연필끝에 침을 묻히는 아낙네도 있다. 어린애를 잔등에 업고 앉아 쓰는 아낙네도 여럿이다.

《천천히 쓰더라도 글자를 똑똑히 써버릇해요. 되는대로 휘갈겨선 안돼요.》

강반석어머님께서는 칠판에 글을 다 쓰시고나서 아낙네들이 글쓰는것을 일일이 살펴보셨다.

《장순엄마두 인젠 잘 쓰는구만… 그런데 여기 한자 틀렸어요. <는>자가 아니라 <든>자를 써야 해요.》

《호호호, 그 자가 그 자 같애서…》

아낙네들이 모두 웃었다.

《자, 인젠 읽어봅시다. 뒤집 동서 한번 읽어봐요. 자꾸 잘못 읽는다고 칭원했는데 오늘밤엔 잘 읽어봐요.》

뒤집 동서라고 불리운 분이엄마가 얼굴이 빨깃해 앉아서 공책에 쓴걸 또박또박 내리읽었다. 그는 아이들같이 발음 첫머리에 으으 소리를 하고 또 가끔 가다가 《그러니까나》소리를 끼워넣어서 아낙네들을 웃기군했었다. 그런데 오늘밤에는 그런 소리 하나없이 잘 읽었다.

《우리 녀성들은 봉건제도를 반대해서 싸워야 한다. 봉건제도는 녀성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제도이며 녀성을 인간이하로 얽매여놓는 제도이다. 우리는 이 제도를 반대해서 싸워야 하며 남자들과 동등하게 사회에 나서서 일해야 한다. 그러니까나…》

다 잘 읽어내려가다가 마지막에 《그러니까나》소리가 들어갔다. 아낙네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참, 입을 호아매든지 해야겠어…》

분이엄마는 제풀에 얼굴이 활딱 붉어져 화를 내였다.

《입을 호아매군 밥두 안먹겠소?》

《그러니까나 하구 읽어두 돼요. 그러니까나 우리는 열심히 배워야 한다. 되지 않아? 호호호.》

아낙네들이 저마끔 한마디씩 이래서 또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이 야학은 강반석어머님께서 아드님의 편지를 받고 조직하신것이였다. 어머님께서는 그동안 아드님께서 편지에 쓰신대로 부녀회의 핵심육성사업에도 힘을 쓰시였고 조직을 확대하는 일과 계몽사업에도 힘을 쓰시였다. 그래서 부녀회조직은 무송일대의 농촌에 여기저기 들어가박히기 시작했다. 야학을 시작한 동네도 여러 동네 되였다.

어머님께서는 핵심들을 뽑아서 자주 농촌들에 내보내시였다. 또한 자신께서 직접 나가 조직을 지도하기도 하시였다. 야학방에서 쓸 교재 같은것도 손수 만들어내시였다. 보신 책자나 신문에서 따내여 교재를 만드시기도 하였지만 어머님자신께서 생각하고계시는 실천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더 많이 교재를 만드시였다. 녀성해방문제는 물론이지만 미신타파문제, 자녀교양문제, 부녀회조직문제, 문맹퇴치문제 등 이런것을 교재로 만들어서는 자신께서 가르치시는 야학에서도 쓰고 다른 야학방들에 보내기도 하시였다. 이러한 실천적인 문제들은 어느 야학방에서도 부녀회원들의 흥미를 끌게 하였다.

분이엄마가 읽어본 다음에는 다른 아낙네들도 한사람 한사람 다들 읽었다. 인제 겨우 문맹을 깨친 수준인데 그래도 잘들 읽는 편이였다. 강반석어머님께서는 글 쓴 공책들을 일일이 보아도 주셨다. 글자를 잘못 쓴 아낙네들이 많았다.

《남의 속에 든 글을 배운다는게 쉽기야 하겠어요. 그래도 사람은 아무일이고 명심하고 열성을 가질탓이라우. <ㄹ>자는 이렇게 쓴다우.》

강반석어머님께서는 손수 연필을 쥐시고 잘못된 글자는 바로 써주시였다.

공책을 다 보시고난 강반석어머님께서는 칠판을 짚어가며 읽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하시였다.

《우리 녀성들은…》

《우리 녀성들은…》

《봉건제도를 반대해서》

《봉건제도를 반대해서》

아낙네들이 일제히 받아서 읽었다.

《건숭 읽지 말고 글자를 똑똑히 보구 읽어요. 가령 <우리> 하면 <우>자와 <리>자를 어떻게 썼는가 그걸 눈으로 익히고 머리로 생각하면서 읽어야 해요… 봉건제도를 반대해서》

《봉건제도를 반대해서》

《싸워야 한다.》

《싸워야 한다.》

랑랑한 글소리가 방안을 울리며 밖으로 퍼져나갔다. 글읽기를 한참 하고는 그것을 공책에 다시 옮겨쓰게 하시였다. 그 다음에는 뜻을 새기는데로 넘어가서 깅반석어머님께서는 더욱 정력을 내시였다. 몸가까이 있는 이러저러한 실례들을 들어가면서 봉건제도에서의 남존녀비사상 그리고 일제가 조선녀성들을 어떻게 2중3중으로 억압착취하고있는가 하는것을 설명해주시였다. 말씀을 듣고있는 아낙네들은 평소에 그렇게도 너그럽고 인자하시던 어머님의 그 억실억실한 눈모습에서 불을 내뿜는것 같은 강렬한 광채를 보는것이였다.

공부가 끝날무렵 문이 열리며 뜻밖에도 김성주동지의 웃으시는 얼굴이 나타났다. 한손에는 모자를 벗어쥐고 다른 한손에는 책보를 드시였다. 불빛을 받은 이마에 땀기가 번쩍거렸다.

《아니 이밤에 어떻게 왔니?》

칠판앞에 서계시던 어머님께서 한발 앞으로 내디디며 말씀하시였다.

《어머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난 잘 있었다만 편지래도 내고 올 일이지.》

《그렇게 됐습니다. 이거 공부하시는데 안됐습니다.》

《안될게 있어요. 밤에 오시느라구 수고했군요.》

아낙네들이 책보자기를 받아서 방안에 들여놓았다. 그이께서는 토방에 서신채 잠간 손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닦으시였다.

《방학이 돼서 왔니?》

어머님께서 물으시였다.

《네.》

《걸어서 왔겠구나.》

《아닙니다. 한 5리밖까지는 마차로 왔습니다.》

《오동진선생이 붙잡혔다는 소식은 들었다. 학천이 어머니가 여간 상심하지 않았겠구나.》

《나도 그 일때문에 며칠밤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오동진의 불행에 대해서는 어머님께서도 그이께서도 그 이상 말씀을 안하시였다.

《왜들 이렇게 일어서십니까? 앉으십시오.》

방안으로 들어오신 김성주동지께서는 웅성거리며 일어선 아낙네들을 돌아보며 말씀하셨다.

《네가 왔다고 그러질 않느냐. 어서들 앉아서 이야기들이나 좀 더 합시다.》

강반석어머님께서 만류하시자 아낙네들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김성주동지께서 부녀회원들과 함께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계실 때 연예대련습을 하던 새날소년동맹원들이 철주를 앞세우고 야학방으로 몰려왔다. 김성주동지의 도착소식이 어느새 련습장까지 날아간 모양이였다. 그들중에는 머리를 기른 청년들도 몇명 섞여있었다. 저대를 든 소년이 있는가 하면 하모니카를 쥔 소년도 있었고 앞가슴에 커다란 소가죽북을 멘 소년도 있었다.

키들도 더 자라고 눈빛들도 더 어글어글해지고 몸가짐들도 전보다 더 름름해진것 같았다.

한해사이에 새날소년동맹은 청송록죽처럼 푸르게 무성하였다. 그동안 맹원수도 부쩍 늘고 조직의줄도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동맹원들속에는 맑스ㅡ레닌주의서적을 읽기 시작한 청소년들이 많았다.

강반석어머님네 아래웃방은 툭 터져나갈 지경으로 되였다.

《들어오시오. 좁더라도 다들 들어오시오. 오늘밤엔 아예 집을 좀 늘쿼야겠소.》

김성주동지께서는 일어서서 새날소년동맹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시였다.

《성님, 집이 좀 컸으면 좋겠어요.》

《좁은 집에 배겨앉아야 더 정답다우. 사람은 마음이 좁으면 못살아도 집이 좁아서 못사는 법은 없다오.》

강반석어머님께서는 웃으시며 머리를 끄덕이는 아낙네들을 돌아보시였다.

철주가 정지방으로 내려오더니 어머님께 삼촌이 아직 돌아오시지 않았는가고 물었다.

《래일 저녁때쯤 돌아오겠다고 하면서 떠나가셨는데 벌써 돌아오시겠니?》

《삼촌이 어느쪽에 가셨는지 모르겠어요?》

《부녀회사업도 지도해준다고 하면서 봉화동쪽으로 나가셨는데 거기 갔다가 어느쪽으로 가셨는지 알수가 있니?》

《무산동쪽에서는 청년단끼리 싸움을 했대요.》

철주는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무산동쪽이면 청년단이 나와서 흥성댄다던데가 아니냐? 삼촌이 거기야 가셨겠니. 그런데 싸움은 왜 했다더냐?》

《종파싸움이지요뭐, 오늘 그쪽에서 온 사람들의 말을 들으니까 싸움이 대단했대요.》

《기가 막힌 일이지. 조선사람끼리 싸울거야 무어람, 일본놈은 치지 않구…》

강반석어머님께서는 이렇게 통탄하시였다.

이날밤, 김성주동지께서는 청소년들을 앞에 앉히시고 이때까지 새날소년동맹이 해온 일들을 일일이 물어보시였다. 양시환은 그이의 곁에 앉아서 새날소년동맹사업을 구체적으로 말씀드렸다. 그는 살갗이 희고 이마가 넓은 청년인데 가죽가위를 한 목책을 들고 앉아서 확장된 조직들의 맹원수, 연예공연 회수, 대중강연회 회수 같은것까지 다 이야기했다. 열정이 있고 통솔력이 강한 청년이였다.

《그래 송화동에 내온 조직은 맹원이 몇이나 되오?》

《모두 스물두명입니다.》

《책임자는 누구요?》

《리경복입니다. 아시겠는지요?》

《알겠소. 그래 동맹원들이 지금 무슨 책을 읽고있소?》

《맑스주의책들을 읽고있지요. 그리고 신문, 잡지, 소설… 안읽는게 없습니다. 딱딱 과업을 주어 읽힙니다. 그리고 읽은 책에 대한 감상문도 써서 내게 하구…》

《소설은 어떤 소설을 읽소?》

《혁명적인 소설을 읽습니다. 련애소설나부랭이는 못읽게 합니다.》

양시환은 자세를 고쳐하며 대답했다.

그이께서는 빙긋이 웃으며 양시환을 보시였다. 양시환은 얼굴을 붉히며 공연히 손수건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자기가 련애소설에 빠져있었을 때 그이께서 그런 책을 읽어서는 못쓴다고 각별히 타일러주시던 생각이 난것이였다.

소년동맹원들은 거의 새벽녘이 되여서야 흩어져갔다.

그이께서 눈을 좀 붙이시려는데 김형권선생께서 집에 들어서시였다.

《이거 누가 왔나?!》

김형권선생께서는 꾸둥꾸둥 언 신발을 벗으면서 밖에서부터 걸걸한 목소리로 말씀하시였다.

《네, 제가 왔습니다. 어데서 이렇게 새벽에 오십니까?》

김성주동지께서는 마주 나가며 인사를 하시였다. 그리고는 얼른 삼촌의 손목을 잡고 방안으로 들어오셨다.

《대단한 추윈데, 가만 이 털모자부터 벗겨주게. 눈이 뽀얘서 잘 보이지 않네.》

그이께서는 얼른 털모자를 벗겨드리시였다. 털모자에는 성에만 아니라 고드름까지 사슬 달리듯하였다.

얼마후에야 김형권선생께서는 얼굴이 녹는것 같다고 하시면서 아직 펴지지 않는 언 손으로 얼굴을 한바탕 비비시였다. 김형권선생께서는 이마에 돈잎만한 허물이 있는데 그 표적을 가리우느라고 늘 긴 머리를 내려덮고 다니셨다. 그게 인제는 자리가 잡혀서 모자를 벗자 이어 내려와덮였다.

《숙부님, 그동안 고생이 많으셨겠습니다. 살림을 꾸리시느라고…》

《살림이야 내가 뭐 참견을 하나, 형수님께서 혼자 고생을 하시지. 참, 오동진선생이 붙잡혔다는 소식을 들었네. 신의주형무소로 압송됐다는게 사실인가?》

《네. 사실인것 같습니다.》

《그래 그 유상조란놈이 간첩인줄 모르고 장춘까지 따라갔댔단 말인가?》

《기가 막힌 일입니다. 너무 순박했지요.》

《형님 말씀이 옳아. 늘 사람은 실천속에서 검열해보아야 한다구 하셨지. 간첩이 간첩이란 딱지를 붙이고 다니지 않는 이상 검열을 안해보고야 어떻게 간첩인줄 알겠나. 이끝저끝 돌아가신 형님생각이 간절해지네.》

김형권선생께서는 갑자기 돌아가신 형님 생각이 가슴에 절절해서 큰숨을 지으시였다.

지금 뜬김이 자욱하게 서린 부엌에서는 벌써 강반석어머님께서 조반을 짓느라고 서두르시였다. 뒤집 분이엄마가 이른조반을 해놓고 강반석어머님을 찾아나와서 도왔다.

《동서는 공연히 나와서 수고가 아니요. 내 혼자 조반을 짓지 못할가봐 그러오.》

《그래도 길림 가셨던 아드님도 돌아오시고… 맞갖잖은 끼니에 좀 손이 가겠어요.》

분이엄마는 지난해 겨울 자기가 앓아누웠을 때 강반석어머님께서 한달동안이나 먼 물을 손수 길어다가 자기네 끼니를 해주시던 생각이 났다. 끼니만 해주셨는가, 어린 분이의 암죽도 매일 끓여서 먹여주시였다. 어떤 때는 어머님네 화로에서 암죽을 쒀가지고는 절절 끓는 암죽 종바리를 치마폭에 싸들고 달려들어오기도 하시였다. 분이엄마는 이런 신세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몰랐다.

《성님, 시아우님도 들어섰는데 밥이 적지 않겠어요?》

분이엄마가 가마뚜껑을 열고 박죽으로 밥을 젓다가 물었다. 분이엄마의 눈에도 지어놓은 밥이 눈에 차보이지 않는것이였다.

《적으면 적은대로 먹지, 부뚜막에서야 배부르게 못먹은들 무슨 일이 있소.》

《어떻게 그렇게 하겠어요.》

《무얼 못그러겠소. 밥이란건 많으면 많이 먹구 적으면 적게 먹는것이지.》

평생을 그렇게 살아오신 어머님이시다. 강동, 림강, 팔도구, 무송 어데서인들 손님이 오지 않은 날이 있었던가!

하루밤에 두세번씩 끼니를 끓이시면서도 어머님께서는 끼니를 넘기고 주무실 때가 많았다. 아침에 일어나 물을 긷자면 어지럼증이 나고 허리맥이 없어 온몸이 휘청거리였다. 그러면 어머님께서는 치마끈을 더 힘주어 죄여매군하시였다.

강반석어머님께서는 새벽에 들어선 시아우가 추워한다고 화로에 불을 떠들고 올라가신다. 분이엄마는 그 인자하신 뒤모습을 얼른 한번 눈주어보았다.

(세상에 돈이 어디 가서 썩어지고있담. 저런 성님을 좀 편안하게 해드리지 못하구…)

그는 눈물이 핑해졌다.

 

2

 

김형권선생께서는 조반을 끝내고서야 그동안 무송주변의 각 농촌들로 돌아다니시며 청년들의 동향을 료해해본 이야기를 하시였다. 약 한달전 김성주동지께서는 안도, 무송, 돈화 등 백두산주변일대의 청년들을 새로운 대중적혁명조직에 결속하려는 방대한 구상을 세우시고 우선 김형권선생께 무송주변의 청년들에 대한 동태를 료해해보라는 편지를 띄우시였다. 그 편지를 받으시고 선생께서는 거의 무송주변의 농촌에 나가계시였다. 가시는곳마다에서 강반석어머님께서 조직해놓으신 부녀회사업도 지도하고 청년들이 어떤 사상동태를 가지고있으며 어떤 움직임들이 벌어지고있는가 하는것을 료해하시였다. 야학이 열려있는곳에 가시여선 글도 가르치고 조선민족이 일제와 어떻게 싸워야 한다는 강연도 하시였다.

《어쨌든 이 무송주변을 그냥 내버려두어선 안되겠네. 본시 이곳은 민족주의영향밑에 있는 지방이 아닌가. 그런 관계로 인젠 청년들이 그 고루한 사상에 환멸을 느끼며 무언가 새로운 투쟁의 길을 찾고있는데 지금 각 파벌이 줄을 뻗쳐서 그 세력을 낚으려고 애쓰고있네, 화요파가 기여들지, 엠엘파가 기여들지, 민족주의계렬은 또 그 계렬대로 책동을 하지, 이러니 청년들의 세력이 장차 어떻게 되겠나? 사분오렬되여 파싸움이 일어나리라는건 뻔하지 않는가?

이 기막히는 현상을 어떻게 그냥 둘수 있나? 우리가 단결을 하고 뭉쳐야지 이래가지구야 일이 되겠나?》

김형권선생께서는 흥분해서 말씀하시였다. 이미 오래전부터 혁명의 길우에서 투쟁해오신 선생이시였다. 김형직선생님께서 생존해계실 때에는 형님의 지도밑에 국내와 국외를 무른메주 밟듯하고 돌아다니시며 혁명이 요구하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하시였다. 무기를 나르시고 지시를 전달하며 하루에도 수백리씩 걸으시며 공작하시였다. 무기를 나르실 때에는 험산준령을 넘으며 찬이슬속에서 밤을 새우기도 하시였다. 참으로 사나운 비바람속을 헤쳐온 로정이였다. 그래서 그런지 선생의 말씀 한마디에도 거센 기운과 혁명에서 닥달된 기백이 울린다.

《지금 저 무산동쪽이 바로 그 종파쟁이들이 춤추는 중심구역일세. 그래서 그 주변에선 벌써 청년단들이 나왔는데 이 청년단들이란것이 지도부에 동상이몽을 하는 파벌들이 숨어들어가 있으니까 단결이 될게 무언가? 요즈음에도 무산동에서 청년들의 강습이 조직됐는데 종파들의 싸움이 일어나서 골이 깨지고 뼈가 부서지고 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네. 우선 저 란무장부터 쓸어버려야 해. 저 본거지부터… 쾌씸한놈들.》

《숙부님 말씀이 옳습니다. 우리는 그런 상태를 그대로 내버려둘수 없습니다. 그래서 방학기간엔 여기서 일을 좀 해볼가 합니다. 며칠 있으면 길림에서 우리 동무들도 올것입니다.》

김형권선생의 말씀을 신중히 들으시고난 그이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였다.

《알만하네. 내 전번 편지를 받고 무슨 구상이 있다는걸 짐작을 했네. 그리고 이야기를 들으니까 지금 길림도 웅성웅성한다니까 길림에서도 밀고나가고 화전에서도 밀고나가고 또 여기서도 밀고나가고 하느라면 조선혁명의 터전이 점차 마련되겠지. 힘이 생기네.》

《숙부님! 좀 주무십시오. 안색이 좋지 않습니다.》

《아마 며칠밤 자지 못했더니 그렇게 보이는가보네.》

김성주동지께서는 삼촌께서 잠이 드시도록 정지방으로 내려오시였다. 삼촌께서 기운이 왕성해서 활동을 하시니 그이께서도 흐뭇한 정을 금하실수 없었다.

 

그날도 소남문거리댁은 청소년들로 차넘치였다. 그들은 김성주동지의 지도밑에 고리끼의 장편소설 《어머니》에 대한 독서감상발표모임을 가지고있었다. 어제는 이 방에서 《자본론》에 대한 연구토론이 있었고 그저께는 국내정세에 대한 김성주동지의 강연이 있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지칠줄 모르는 정력으로 매일같이 동맹사업을 지도하시였다. 그이께서는 무송일대의 소년들과 각계각층 군중들에 대한 정치선전사업에 이바지할 혁명적출판물 《새날》을 창간하기 위한 구상을 무르익히시면서 아버님과 가까이 지내던 시내의 유지들을 만나 신문발간에 쓸 등사기도 물색하고 연예대의 련습도 지도하시였다. 밤을 지새우며 연극대본도 쓰시였다. 어떤날 밤에는 부녀회의 사업을 지도하려고 어머님과 함께 눈보라를 헤치고 몇십리의 길을 걸으시기도 하였다. 이무렵 길림에서 채경이와 박두학이 도착하였다. 그들은 약속한대로 서점에 새로 들어온 맑스-레닌주의도서들도 한보따리 사가지고 왔다. 온 집안이 웅성거리며 눈속을 헤치고 온 두사람을 안아들이다싶이 했다.

강반석어머님께서는 채경이가 신고 온 가죽신을 부엌아궁으로 들고 내려가며 이 무거운걸 신고 어떻게 그 먼길을 걸어왔을가고 걱정을 하시였다. 가죽신이라고 해도 신고 다닐만한것이 못되였다. 법정학교 어느 동무가 자기 삼촌이 독립군을 하며 신고 다니던것이라고 하면서 채경의 큰발엔 맞겠다고 가져다준 편상화인데 어찌 큰지 채경이의 발에도 맞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인젠 다 해져서 굵은 돗바늘로 뒤축과 옆구리를 열번도 더 기웠다.

채경은 그런걸 신고 길림에서 여기까지 먼길을 걸어왔다.

강반석어머님께서는 구두창에 달린 돌같은 얼음덩이를 뜯어내며 가슴이 뭉클해지셨다. 언제 이 젊은 사람들이 제 나라를 찾고 이런 고역을 면할수 있을가? 그런 날에 가면 이런걸 신고 다니던 발에 비단과 같이 부드럽고 가벼운것으로라도 신을 지어 신겨야 이 아픈 가슴이 풀리질 않을가?

《자네는 어느 학교에 다니나?》

저녁끼니를 치르고나시여 어머님께서는 채경이에게 물으시였다.

《어머님, 전 법정학교에 다닙니다.》

《집에 부모님들은 다 계시나?》

《부모님들은 이미 다 돌아갔습니다. 지금 누이동생이 한명 남아있습니다.》

《그럼 오누이가 집을 유지해가고있나?》

《네.》

어머님께서는 조용히 채경의 얼굴을 쳐다보시였다. 역시 두드러진 관자노리에서 고생살이의 흔적이 풍겼다. 거치른 손도 일에 다지운것이 분명했다.

《오누이가 이 험한 세월에 살아가려니 여북하겠나? 자네가 신고 온 구두를 보니 자네네가 어떻게 고생스럽게 살아간다는것이 알려지고도 남네. 그렇지만 우리가 그런 고생을 면해보자고 혁명을 하는것이니까 어떤 간난신고라도 헤쳐나가며 투쟁을 해야 하네.》

《어머님 말씀이 옳습니다. 저도 그런 각오로 투쟁하고있습니다.》

어머님의 말씀에 채경은 코허리가 찡해서 이렇게 대답했다. 그는 덧붙여 인젠 무송어머님을 친어머님으로 모시고 자주 무송으로 오겠노라고 말씀을 올리였다.

《어서 그렇게 하게, 그렇게 하면 나도 여간 기쁘지 않겠네. 난 어떻게 하든지 자네들이 혁명투쟁을 잘해나가기만 바라네.》

채경은 몹시 행복했다. 그는 방안에 앉아있는 온 식구의 얼굴들을 일일이 바라보았다. 아드님도 어머님도 삼촌도 동생도 모두 혁명의 한길에 들어서서 서로 신뢰하고 받들며 높은 정신으로 이렇게 싸워나가는 가정이 또 어디 있을가? 그는 무엇인가 옷섶을 여미게 하는 뜨겁고 엄숙한 생각이 솟기도 했다.

채경이네가 온 이튿날밤 김성주동지께서는 김형권선생의 영향밑에서 눈을 뜬 이 지역의 진보적인 청년 수십명을 모여앉히고 백산청년동맹을 결성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이미부터 파쟁의 흙탕물이 밀려들기 시작하는 이 지대의 특성을 고려하여 선진적인 로동청년과 농민청년은 물론 민족주의단체와 독립군에 관계했던 청년들까지도 광범히 망라시키는 새 청년조직을 이곳에 내오려고 김형권선생께 편지도 띄우며 일을 진척시켜 오셨던것이다. 바로 그 구상을 실천에 옮기신것이였다.

백산청년동맹을 결성하시고는 이어 이 조직을 확대하기 위한 문제도 토론에 붙이시였다. 아래웃방이 툭 터지게 모인 청년들은 새로운 포부와 흥분을 안고 밤새 웅성거리며 끓었다.

이 회의를 끝내신 김성주동지께서는 곧 신문 《새날》을 창간하는 일을 본격적으로 밀고나가시였다.

그이께서는 채경이들과 함께 가물거리는 등잔불밑에서 밤을 새워가며 신문의 창간사를 쓰시고 론문과 교양자료를 쓰시였다.

《내가 도울 일은 없겠니?》

어머님께서도 주무시지 않고 웃목에서 글을 쓰시는 아드님께 물으시였다.

《어머님은 주무십시오. 도와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그래도 신문을 만들어낸다는 일이 쉽겠니? 네 삼촌은 건넌방에서 등사판 손질을 하면서 밤을 새우는구나, 내게두 할일이 있으면 시켜다우.》

《어머님께서도 앞으로 이 신문을 위해서 할 일이 많으십니다. 신문이라는건 찍어내는것으로 일이 끝나는것이 아니라 찍어낸 뒤에 신문을 대중들에게 노나주는 일이 중요합니다. 물론 잘 배포가 되도록 조직은 하겠습니다만 어머님께서도 이 일은 한몫해주셔야 하겠습니다.》

《그거야 못하겠니? 신명이 나서도 할수가 있지. 혁명의 목소리를 전하는 일인데…》

어머님께서는 몹시 즐거운 표정으로 등잔불의 불꼬리를 돋구어놓으며 말씀하시였다.

 

새날소년동맹의 연예련습은 매일밤 계속되였다.

《새날》 첫호를 발간하신 김성주동지께서는 이어 청년들을 각 지역으로 파견하시고 자신께서는 연예대를 데리고 무산동을 향해 떠나시였다.

《자, 우리 한번 잘해보자! 대중이 우리 연예공연을 보고 눈들을 번쩍 뜨게말이다.》

그이께서는 소년들을 말파리에 태우며 말씀하시였다.

두대의 말파리가 북과 꽹과리와 징을 울리면서 무송시내를 벗어났다. 맨앞 말파리우에서는 무송청소년연예대란 기폭이 펄펄 날리고있었다.

말파리는 눈이 반짝이는 벌판우에 나섰다. 해빛이 은장처럼 맑고 아직 차겁기는 하나 솔솔 불어오는 바람이 봄기운을 배태한듯 싶었다. 말들은 코김을 뿜으며 달리였다. 앞말파리는 두필의 밤색말이 메였는데 둘이 다 살도 잘 졌다. 말파리군이 채찍을 후리지 않아도 대가리를 주억거리며 잘 달리였다. 앞말파리에는 대체로 소년들이 탔는데 김성주동지께서도 거기에 앉아계시였다.

말파리우에서는 노래소리가 일어났다. 그이께서도 노래를 부르시였다.

 

목에다 두른것은 붉은 넥타이

등에다 짐을 지고서 훈련을 나간다

장하다 그의 이름 아동단 아동단 아동단

세상이 모두다 칭찬한다 아동단 아동단

 

뒤말파리우에서는 북소리가 울리고 하모니카와 저대 소리가 울리였다. 그 소리에 맞춰 거기서도 노래소리가 일어났다.

말파리들은 노래를 싣고 반짝이는 눈우를 끝없이 달리고 달렸다. 그것은 마치 눈이 덮이고 찬바람이 부는 이 땅우에 봄을 예고하며 굴러가는 꽃수레들 같기도 했다.

(사람들이여! 희망을 가지라. 이 땅이 아무리 춥고 어둡고 쓸쓸하고 고통이 심해도 그것은 봄을 가져오기 위한 진통에 불과하거니 웃으라! 웃으며 봄을 이끌어올 결전장으로 뛰여나오라. 어깨와 어깨를 겯고 손과 손을 어울러잡고 쓰리고 아픈 마음을 서로 나누며 결전장으로 나오라. 힘차게 웃으며 결전장으로 나오라! 하하하.)

정말 꽃수레는 웃음을 뿌리며 굴러간다. 힘이 용솟음치고 희망이 부풀어올라 온 들판이 춤을 추며 약동한다.

해가 뉘엿뉘엿 떨어질무렵 말파리들은 무산동에 도착하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우선 종파쟁이들의 싸움이 벌어졌다는 이 동네부터 꽃수레를 몰고 들어가 청년들의 가슴속에 새희망의 씨앗을 뿌려주고 그들을 묶어 새 조직을 내오려고 결심하셨다.

지금 무산동은 난가와 같이 어수선하였다. 꼭 무슨 회오리바람이 지나간 뒤와 같았다. 여기에서는 청년단이 강습회를 열었는데 지도부내에 기여들어있던 화요파와 엠엘파가 강습회를 저마끔 파세확장의 무대로 리용하려다가 싸움을 벌리였다. 싸움이 어떻게 호되였던지 강습회장인 학교강당이 피로 물들었다. 그래서 무산동청년들은 청년단지도부를 더러운 집단이라고 타매하고 그들의 지도밑에서 조직되였던 청년단을 해산해버리고말았다.

무산동 주변부락들에서도 무산동을 본따서 청년단들을 해산해버렸다. 청년들의 이러한 반항기세에 겁을 먹은 종파쟁이들은 모두 무산동에서 달아나버렸다.

청년들이고 로인들이고 종파쟁이들을 욕하느라고 변이 났다.

말파리들은 성수가 나서 동구앞길을 달리였다. 들메나무가 서있는 동구를 들어서서부터는 말파리우에 실은 악기가 다 동원되였다. 큰 북, 작은 북, 꽹과리, 징, 저대, 하모니카… 곡조야 맞든 안맞든 그저 치고 불고 야단법석이 일어났다. 한번 동네사람들의 눈을 휘둥그렇게 만들어놓고 어데서 무엇때문에 왔노라는 인사를 할 작정이였다. 모두 신바람들이 났다.

《저게 무슨 소리요? 동네에 또 일이 나지 않았소?》

《파싸움을 하더니 또 무슨 일이 있는것 같소.》

무산동사람들은 한번 놀랐던 가슴들이라 모두 눈들이 휘둥그래졌다. 그들은 싸움이 있은 날 밤 골이 터진 사람을 셋이나 업어나르는것을 목격했다. 그래서 어데서 큰소리만 나도 또 무슨 그런 불상사가 나지 않는가 해서 놀래였다. 그러나 들려오는 소리가 농악소리인것을 알고는 모두들 밖으로 달려나왔다.

학교쪽으로 올라가는 길가에는 사람들이 모여들어 담을 쌓기 시작했다.

《하하하, 이번엔 흥성거리는 판이 벌어졌군.》

《무송청소년연예대라, 그럴듯해.》

《야, 북 참 잘 친다. 북망치를 머리우에 빙빙 두르며 춤까지 겸했군.》

《여보, 북만 잘 치우, 저 저대 부는 사람 손가락 좀 보우. 가운데손가락 하나는 내내 귀신같이 떨고있소.》

《그게 뻬스를 넣는 손가락이요.》

《하하하, 좌우간 훈련들을 잘했소.》

모두들 얼이 나간듯이 말파리우만 쳐다보았다. 말들도 신이 나서 석양에 번쩍거리는 갈기를 휘둘러대며 투레질을 했다. 그러면서 편자 박은 발바닥을 뚜꺽뚜꺽하며 번갈아디디였다. 말파리군들조차도 두어깨가 으쓱으쓱해졌다. 한 말파리군은 동네사람들의 귀에 대고 이 놀음군들은 그저 놀음군이 아니고 사회운동하는 놀음군이라고 일깨워주었다.

《함부루 말하지 마슈, 비밀입넨다.》

그는 동네사람들을 단속까지 했다. 동네사람들은 좀 얼떠름해지였다. 그들은 사회운동이라는 말만 들어도 골 터진 사람들이 생각났다. 동네사람들은 서로 옆구리를 꾹꾹 찌르며 이들도 놀음군들이 아니고 사회운동자들이라고 수군거렸다.

그러거나말거나 청소년들은 점점 더 신바람이 났다. 인젠 아예 말파리들을 세우고 모두들 길바닥에 내려서서 농악을 울리였다. 재주란 재주는 다 터져나왔다. 북도 그저 치지 않고 북채를 다리샅으로 뽑아치고 머리우로 휘둘러치고 했다. 징을 치는 청년도 한번씩 쳐대고는 두어깨를 으쓱으쓱했다. 하모니카나 저대도 그저 불질 않고 몸짓을 섞어가며 불었다. 음향과 률동이 한덩어리가 되여 들썩들썩했다. 이렇게 되니 행길에 널려섰던 사람들이 놀음이 벌어진곳으로 다 몰려와서 하얗게 성을 쌓았다.

《저게 무얼하는 사람들이라구?》

《네, 순회공연을 다니는 연예대랍니다.》

《그런데 오기는 어데서 왔나?》

《무송에서 왔습니다. 청년들만 아니구 어린 소년들도 섞여있습니다.》

《음…》

지금 류혈의 싸움이 벌어졌던 학교옆 느티나무가 서있는 언덕우에는 토목두루마기를 입은 한 로인이 서서 동네 촌장과 이야기를 하고있다. 로인은 주글주글한 큰 손에 지팽이를 거머쥐고 섰는데 우묵한 두눈에서는 아직 그의 쇠잔한 몸과는 다르게 불빛이 펄펄 끓고있었다. 그는 이따금 저녁바람에 날리는 긴 은백색 턱수염을 한손으로 걷어잡아쥐군했다.

《좌상님, 어떻게 할가요? 동네에 받아들일가요?》

《받아들이게. 어린 사람들이 먼길에 여기까지 찾아왔는데 좀 수고를 했겠나. 어서 받아들이게.》

《알았습니다.》

촌장은 나무그늘이 비낀 언덕길로 급하게 뛰여내려갔다. 마을 한가운데서는 여전히 음악이 울리고 사람들이 하얗게 모여서서 와아와아 들끓는다.

로인은 언덕우에 선채 한참동안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이 로인은 무산동일대의 사람들이 누구나 다 존경하고있는 박순무라는 로인이였다. 이 지방 사람들은 그를 좌상님 좌상님 하고 불렀다. 그것은 나이가 많기때문에 그렇게 부르기도 했지만 그를 웃어른으로 모시고 살기때문에 더욱 그렇게들 불렀다. 그는 한평생 농사일로 량손이 갈퀴같이 된 로인인데 애국정신이 불같이 강했다. 그러기에 3.l운동이 일어났을 때 고향에서 온 동리사람들을 휘동해가지고 일본경찰서가 있는 읍내로 육박하였다. 그때에도 그는 나이 든 때였는데 긴 수염을 바람에 펄펄 날리며 대렬선두에서 목이 터지게 만세를 불렀다. 그는 군중을 추동해서 왜놈경찰서에 돌을 들여던지고 헌병기마대를 쇠스랑으로 찍기도 하였다. 그렇게 한달이상 싸웠다. 그러다가 숱한 사람이 잡혀들어갈 때에는 땅을 치고 통곡하며 이 나라에 이 싸움을 바로 이끌어나갈 사람이 이렇게도 없느냐고 울부짖었다. 그뒤 그는 간신히 일본놈들의 수색망을 빠져서 가족을 데리고 두만강을 건너와 이 무산동에 살곳을 정했다. 그는 지금 늙은 몸으로 손수 농사도 짓고 동네의 대소사를 감독하면서 살았다. 그는 어느날에야 왜적을 쳐없앨수 있겠느냐고 하면서 늘 울분에 찬 가슴을 쳤다.

이런 로인인만큼 이번 학교강당에서 벌어진 불상사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더 통분해했다. 그는 불상사가 났을 때 가슴을 치며 울부짖었다.

《이놈들아, 너희 젊은놈들두 그 몰골이니 인젠 조선독립운동을 뉘 한단말이냐? 조선백성이 땅속으로 들어간들 눈을 감을수가 있겠느냐?》

로인은 얼마나 충격이 컸던지 여러날동안 침식을 잃고 지냈다.

집에 돌아온 박순무로인은 연예대를 받아들이라고는 했으나 아무래도 동네에 또 무슨 다른 일이라도 있지 않을가싶어 경황없이 저녁상을 받았다.

(안됐군. 내가 나가봐야겠어. 아무래도 심상치를 않아. 동네사람들이 좋은것에 정신이 팔렸다면 몰라두…)

학교강당에는 벌써 동네사람들이 툭 터지게 모여들었다. 그런데 청년들은 언제 그렇게 상통이 되였는지 연예대원들과 섭쓸려돌아가며 무대를 만드느라고 끓었다. 모두들 활기가 나서 뛰였다. 막을 치는 일, 불을 준비하는 일, 무엇을 하려는지 큰 서류궤짝을 메오는 일, 모두 마을청년들이 대들어 해냈다.

박순무로인은 사람들의 안내를 받으며 맨가운데 좌석에 가서 앉았다.

사람들은 자꾸 모여들었다. 언제 소식이 갔는지 10리이상 떨어져있는 동네에서도 수십명의 청년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빼곡 들어차있는 강당안으로 인정사정없이 꿰지르며 밀려들어왔다.

박순무로인은 엄한 눈으로 무대쪽만 신칙해보았다. 그는 벌써 동네청년들이 연예대와 섭쓸린것을 언짢게 생각하였다. 연예대가 어떤 사람들이기에 저렇게 안고 받들고 돌아가며 야단법석을 치는가? 청년들이란 행동거지가 저렇게 가벼운것이 탈이다.

얼마 안있어서 막이 열리고 김성주동지께서 무대우에 나서시였다.

《연예대를 인솔해가지고 온 청년입니다.》

앞에 나가서 청년들속에 섞여돌아가던 촌장이 다시 박순무로인의 곁에 와서 배겨앉으며 알려주었다. 로인은 대꾸가 없이 무대쪽에만 시선을 보내고 앉아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간단한 인사의 말씀을 하시고는 전체 반일세력을 단합해가지고 일본제국주의를 조선강토에서 몰아내자는 제목으로 한시간나마 강연을 하시였다. 관중은 처음에는 그저 인사의 말만 할줄 알았는데 뜻밖에 웅변이 시작되는바람에 모두들 긴장하고 황홀해졌다.

《저 청년이 누구랍니까?》

《김형직선생님의 아드님이시랍디다.》

《음, 그렇군. 어쩐지 다르다 했소. 아버님의 기상을 물려받았소.》

《기상뿐이요? 웅변도 아버님 같은데가 있잖소.》

《어느 학교에 다닌답디까?》

《길림에서 공부한다는 말이 있었는데…》

장내가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누구인가가 조용히들 하라고 소리쳤다. 벌써 연설내용이 군중을 사로잡기 시작한것이였다. 장내가 다시 물을 뿌린듯 조용해졌다. 장중하면서도 뜨거움을 띤 음성이 회장을 쩌렁쩌렁 울리였다. 때로는 관중이 숨을 죽이고 듣도록 만들기도 하시고 주먹을 틀어쥐고 흥분하도록 만들기도 하시였다.

《잘하는군. 놀랍군. 옳은 말을 해.》

박순무로인은 공연히 어험어험 기침을 하며 올방자를 고쳐틀었다. 가슴에 드리운 은실수염이 흔듣흔들 떨었다.

《일체 반일력량을 단합해야 합니다. 개인이고 단체고… 모든 반일력량을 단합해서 일본제국주의를 조선강토우에서 몰아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첫째가는 목적이며 임무입니다. 분렬은 우리의 죽음입니다. 여러분들은 피자욱이 마르지 않은 이 강당안에 앉아서 무얼 생각하십니까? 독립운동을 하느라면 이런 일이 항용 있을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이 용서할수 없는 죄악을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그게 또한 죄악입니다. <헤게모니>를 위해서 운동을 짓밟는 더러운 종파행위는 밑뿌리를 철저히 파던져야 하며 밑뿌리가 박혔던 땅까지라도 다시 갈아엎고 깨끗이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 뭉쳐야 합니다. 왜놈을 반대하는 세력이면 망치들고 로동하는 사람들, 밭가는 농민들, 지식있는 사람들, 학자들, 소시민들, 돈있는 사람들, 민족자본가들 다 뭉쳐야 합니다. 다 뭉쳐 2천만민족이 하나의 거창한 힘이 되여 일제를 우리 강토에서 내몰아야 합니다.》

《장허다! 내가 조선의 기상을 처음 보는구나!》

박순무로인이 소리를 지르며 무르팍을 쳤다. 그는 온몸을 와들와들 떨며 안절부절 못해했다. 그는 음, 음 소리를 련발했다.

《보통사람이 아닙니다.》

촌장의 말에 박순무로인은 대꾸도 안했다. 보통사람이 아니라는 말따위로는 지금 무대우에 서있는 청년을 설명하는데 셈도 안된다고 생각하는것이였다.

강연이 끝나자 이어 연예공연이 시작되였다. 사람들은 마구 뒤흔들린것 같은 심장을 눅잦히면서 소년들의 노래소리를 들었다. 노래는 구슬같이 아름다왔다. 그러는가 하면 경쾌하고 힘이 있고 두어깨가 들썩들썩해져서 좋기도 했다. 독창도 재청을 받고 합창도 재청을 받았다. 그저 내내 박수였다. 평생 박수라는것을 쳐보지 못한 박순무로인도 큰 손바닥으로 뚝떡뚝떡 박수를 쳤다.

그는 단심줄 유희극을 보고서는 한번 더 하라고 요청을 했다. 무대우에는 유희극이 다시 올랐다. 무대 한복판에 조선독립을 상징하는 기둥이 서고 로동자, 농민, 학자, 학생 각계각층 복장을 한 소년들이 온갖 색실을 나누어쥐고 돌아가며 노래부르고 춤을 췄다.

 

단심 단심 단심

우리들은 단심

일제놈을 몰아내려 우리들은 단심

 

박순무로인은 목을 높이 세우고 앉아서 무대를 바라보았다. 깊은 눈확속에 익을가말가하는 꼬아리빛 눈동자가 딱 멈춰서서 재빛 속눈섭사이로 린같은 불빛을 내쏘고있다. 이따금 껌벅하고 속눈섭이 붙었다 떨어지며 눈귀로 우무러든 주름투성이 낯가죽이 움직이긴 했으나 눈동자만은 딱 그대로 서있다. 그만치 그는 유희극에 정신이 쏠리였다.

《음, 그게 의미가 깊군. 좋은 놀음이야.》

《단결을 표시한 놀음 아닙니까.》

곁에 앉은 촌장이 말했다.

《그렇지 그래, 조선사람이 저렇게 꽉 짜고들어서 단결한다면 왜놈들이 다 무언가, 좌우간 이게 훌륭한 연예대일세. 그저 연예대가 아니야. 놀음이 그저 놀음이 아니고 북소리가 그저 북소리가 아니야.》

박순무로인은 얼굴에 화색이 떠올라 올방자 튼 무르팍을 뿌등뿌등 더 괴여올렸다. 유희극은 군중에게 잊을수 없는 감명을 주었다. 파쟁의 불상사가 있은 뒤끝이라 사람들의 심정을 더욱 흔들어놓았다.

연예공연이 끝나자 군중은 왁 들고일어나서 박수를 보내였다. 박순무로인도 일어서서 박수를 쳤다.

마당으로 밀려나온 군중은 흩어지지 않고 농악을 울리기 시작했다. 마을청년들이 자기네것을 메고 와서 두드리는것이였다. 모두들 흐뭇해서 으쓸으쓸 어깨춤들이 절로 났다.

얼마 안있어 철주며 양시환들도 북과 꽹과리, 징을 들고 마당으로 달려나왔다. 그리고는 동네사람들과 한덩어리가 되여 돌아가며 불고 치고 했다.

마당으로는 쓰르렁쓰르렁 찬바람이 불어가고 하늘엔 은빛눈섭같은 달이 걸려서 내려다보고있다. 밤이 깊고 날씨가 춥건만 사람들은 그저 둥그렇게 울타리를 치고 서서 들끓었다. 마을청년들도 농악을 잘 치는데 새납소리가 유표하게 두드러졌다. 니나노나요 니나누 난실나니 하고 꺾어넘기는 구슬픈 가락이 갈구랑달 걸린 하늘가에 울려가고있다.

《고맙네, 고마와, 자네네가 놀음을 가져온게 아니라 춘풍을 가져왔네. 조선이 독립할 봄기운을 가져왔네. 장하이, 장해…》

지금 학교 교실안에서는 박순무로인이 김성주동지의 손을 붙잡고 감격의 눈물을 뿌리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 같은 나이에 자네 같을수 있을 사람이 우리 조선에 있을고? 아, 이것은 조선정기가 살아있다는 징조일세. 나는 그렇게 믿네.》

밖에서는 춤판이 벌어졌다. 동네사람들이 모두 뛰여들어 덩실덩실 팔을 벌리고 돌아갔다.

이렇게 무산동에서는 새 바람이 일어났다.

그 다음날부터는 이 일대의 농촌들에서 련속 농악소리가 울리였다. 그 농악소리와 함께 어느 동네를 물론하고 대순이 땅거죽을 뻐개고 솟아오르듯 백산청년동맹 지부들이 솟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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