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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불멸의 력사》 2 장편소설
천 세 봉
( 제 19 회 )
제 9 장
가 을
1
가을이 깊어갔다. 낮 한때는 뜨거운 볕이 내려쪼이기도 했으나 온 하늘에 소슬한 기운이 차있었다. 모든것이 바삭바삭 마르며 조락을 재촉했다. 가로수들의 누런 잎들이 무시로 떨어져내렸다. 북극문밖에 있는 원천령 현천봉의 숲도 누른 기운을 띠여갔다. 북산의 다락이며 절간들의 지붕이 선명해져서 더욱 가을의 정서를 돋구었다. 계절조들이 어느새 벌써 남쪽으로 날아가고있었다. 이른봄부터 시작된 3부통합회의는 마가을이 다 되여오는 오늘까지도 끝을 맺지 못하고있었다. 도대체 무엇을 토의하기에 회의가 그렇게도 길어진단말인가? 한때 안창호를 사로잡았다가 놓아준놈들이 그 분풀이로 길림에 와서 민족주의자들을 또다시 사로잡으려 하지 않으리라고 누가 장담하겠는가. 교활한놈들이 또 장작림군벌을 매수해가지고 어떤짓을 해올지 모른다. 그이께서는 모든 일을 남의 일같이 생각하실수가 없었다. 될수만 있으면 3부통합회의를 벌린 민족주의자들도 하루빨리 무엇이든 만들어가지고 단결을 이루어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드시였다. 그들이 단결을 이룬다면 그 힘도 일제를 치는 싸움에 동원되도록 이끌수 있을것이다. 어느날 그이께서는 학교에서 돌아오시던길에 《복흥태》정미소에 들리시였다. 우선 무슨 회의를 어떻게 하고있는지 정형을 알아보시려는것이였다. 정미소는 길림육문중학교로 가는 행길옆에 있었다. 《회장 오나? 어서 들어오게.》 앞이마가 벗어진 《복흥태》의 주인이 마당에서 선풍기의 날개를 집게로 우그리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은 회의에 참가하지 않고 일만 하십니까?》 《나야 뭐 회의에 참가해도 할 말이 있나? 말 잘하는 어른들이 할 말을 다 하시는데…》 《복흥태》주인은 껄껄 웃었다. 그는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정의부》계통의 민족주의자였는데 남의 쌀을 찧어주고 도정료를 받아먹고사는 량심적인 소기업가였다. 그는 정미소를 해도 자본만 먹여놓고 물러앉아있는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이 일에 몸을 잠그고 기계를 보며 정미를 했다. 김성주동지께서 회의구경을 왔다고 하시자 얼른 들어가보라고 하였다. 퇴마루밑에는 가지각색 신발이 어지러이 널리여있다. 방안에서는 리웅의 높은 목소리가 울려나왔다. 그는 무슨 소린지 개인과 단체를 혼동하는것은 모순된다고 했다. 그러자 여러 목소리가 모순은 무슨 모순이냐고 윽박질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얼른 마루우로 올라서며 문을 두드리시였다. 《누구요?》 안에서 고원암이 문을 열고 내다보았다. 《아니, 자네가 어떻게 왔나?》 《회의구경을 왔습니다.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어서 들어오게, 자네 혹시 우리 늙은 사람들의 운동이 잘되는가 시험쳐보자고 온것이나 아닌가?》 리갑무의 전에 없는 롱질에 김성주동지께서는 웃음으로 대답하시였다. 그이께서는 얼른 방에 들어가 좌중에다 인사를 하시였다. 그러자 리갑무가 《신민부》, 《참의부》사람들에게 그이를 소개하였다. 《이사람은 형직선생하고 사상이 달라.》 구면인 《정의부》의 고원암이 그이를 자기옆으로 끌어당기며 롱질을 하였다. 《제게 무슨 다른 사상이 있겠습니까. 공연히 저보고 그렇게 말하지 마십시오. 저한테는 조선을 독립시키겠다는 사상 한가지밖에 없습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고원암이와 리웅사이의 뒤로 좀 처진 구석쪽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겸허하게 말씀하시였다. 고원암은 그냥 싱글싱글 웃으며 머리를 흔들었다. 《아니, 자네들은 독립인것이 아니라 딴거야. 사회개혁이지. <맑스>만 옆구리에 끼고다니는…》 《새로운 책도 안읽고 또 그런 운동에 참가도 안한다면 머저리지요. 선생님들하고 같겠습니까. 선생님들은 선생님들이고 또 우리 청년들은 세대가 다른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곤난합니다.》 《아, 뭐 안창호선생을 구원하느라고 사생결단으로 싸운 자네가 우리 령감들을 타도하겠나? 우리들이 힘을 합쳐서 잘해보자구 하는 말이네.》 고원암은 말끝을 사리며 수그러들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때를 놓치지 않고 슬그머니 역습을 들이대시였다. 《그런데 선생님들이 토론하는걸 우리 젊은 사람들이 들어서 나쁠것이 없겠는데 왜 선생님들끼리만 회의를 합니까?》 《자네들은 우리하고 사상이 다르지 않나.》 구면인 《참의부》의 심룡준이 하는 말이다. 《뭐 크게 다를것이 있습니까. 다같이 조선독립을 하자는 사상인데… 글쎄 방법상에서는 혹시 의견차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 말씀에는 누구도 대꾸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오동진은 담배를 빨며 씨무룩이 웃고있었고 리갑무는 채수염을 비다듬으면서 맞은켠에 앉아있는 김좌진의 표표한 얼굴을 넌지시 살펴보고있었다. 무슨 문제가 토의되고있는지 오늘 김좌진의 얼굴은 온통 주토빛이 되였다. 그는 피줄이 지렁이처럼 꿈틀거리는 관자노리를 한손으로 움켜쥐고 짜증과 신경질이 잔뜩 뒤섞인 눈초리로 천정을 쳐다보고있었다. 김좌진의 옆에는 기름독에 쑥 빠졌다 나온것 같은 유상조가 앉아있는데 두사람의 모양은 아주 대조적이였다. 하나는 곰같고 하나는 매끈한 여우같았다. 요새 회합에서 엉킨 문제는 이른바 《리면핵심체》로서의 민족주의정당을 내오자는 문제였다. 이 정당문제는 회합에서 제일 곡절을 조성시키고있는 《신민부》가 제기한 주장이였다. 《신민부》는 회의 전과정에서 《정의부》측에 주도권이 쏠리게 되자 처음부터 예견하지도 않았던 정당문제를 어두운 밤에 홍두깨 내밀듯 내밀었다. 결국 이것은 회의를 다시 시초로 후퇴시켜서 《정의부》가 회의과정에 쌓아올린 주도세력을 무너뜨리자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들의 리론인즉 지금까지의 모든 문제는 《표면자치체》에 관한 문제고 이 《표면자치체》의 운영을 잘하기 위해서는 《리면핵심체》가 존재해야 한다는것이였다. 말하자면 국가기구만 가지고는 안되며 실권적인 정당이 존재해야 한다는 주장이였다. 《정의부》도 《참의부》도 그럴듯한 껍데기를 씌운 이 주장이 사실은 여러달동안 각 부가 머리를 맞대고 앉아 땀을 흘리고 피대를 세우며 도달한 합의내용을 일격에 짓부셔버리기 위하여 내놓은 주장이라는것을 알고있었다. 《정의부》는 처음부터 주먹을 내흔들며 반대했다. 이것을 반대하는데는 《정의부》의 거두들이 한사람같이 발걸음을 맞추었다. 그러나 《참의부》는 달랐다. 심룡준과 같은 사람은 벌써 《신민부》의 흉측한 계략을 알고 반대를 했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제안을 지지하고 나섰다. 그들도 주도세력이 《정의부》쪽으로 넘어가는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것이였다. 오늘도 이 문제를 가지고 백열전이 벌어졌다. 《정의부》측은 한껏 유한 자세로 《신민부》측의 주장에 응수를 했다. 《도대체 그런 중대한 문제를 회의를 마감짓자는 이 판에 와서 별안간 들고나서는것은 무슨 의도요? 우리는 핵심체라는것을 달리 보지 않소. 바로 <표면자치체>를 튼튼히 꾸려놓는다면 당신들이 부르짖는 <리면핵심체>라는것도 거기에 있다고보오.》 오동진이 얼굴을 쳐들며 말을 꺼냈다. 그러자 《신민부》사람들이 와 들고일어났다. 《<표면자치체>야 <표면자치체>지 그게 무슨 정당인가? 우리가 <표면자치체>만 가지고 신축성있는 정책을 실시할수 있을것 같소? 핵심체가 없이 표면기구를 꾸린다는것은 조직체계에서 모순이란걸 아시오.》 《그 모순을 인제 와서 간파하게 된 연유가 어데 있소? 처음엔 그걸 알지 못했는데 인제 와서 알게 된 연유가 어데 있느냐 말이요.》 오동진은 《신민부》사람의 소리에 이렇게 들이댔다. 그러자 이번에는 《참의부》양복쟁이 한사람이 그의 말을 반박해나섰다. 《인제 와서 알게 됐든 어쨌든 <리면핵심체>라는것이 우리 운동에 필요할것 같으면 그 문제를 론의해봐야 할것 아니요. 회의가 길어진다고 해서 우리가 이처럼 중대한 문제를 피한단 말이요?》 론쟁은 격렬하게 벌어졌다. 《신민부》와 《참의부》가 《정의부》를 맹렬히 공격했다. 《상해림시정부》의 최활은 얼굴이 새빨개 앉아서 량편이 반씩 양보해서 문제를 풀어나가자고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 반씩 양보한다는것은 어떻게 한다는것인지 그건 말하지 않았다. 리갑무로인과 심룡준은 심각한 얼굴을 하고 앉아서 론쟁을 듣고만 있었다. 이 문제로 하여 두 로인사이에도 야릇한 감정이 작용하고있는것은 사실이였다. 두 로인은 다같이 떠나간 안창호를 생각했다. 안창호가 있었다면 회의가 이 모양으로 돼가지 않을수도 있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이였다. 길림역에서 기차에 오르며 눈물이 어려 모자를 흔들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 두 로인은 은근히 한숨을 짓군했다. 얼마후 리갑무로인이 그렇다면 이왕 말이 난김이니 《리면핵심체》문제를 정식으로 심의해보자고 말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정의부》사람들이 모두 반기를 들고 일어섰다. 오동진이만이 리갑무로인의 제기를 꺾지 못하고 땀에 뜬 얼굴로 담배를 붙여물었다. 그도 리갑무로인이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서 자기 립장을 양보한다는것을 알았다. 오동진은 땀에 젖어 후줄그레해진 손수건으로 자꾸 얼굴을 문질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론쟁의 밑바닥에 흐르는 공기를 주의깊게 살피시였다. 《리면핵심체》요 《표면자치체》요 하고 외양은 어마어마한 문제를 다루는것 같이 보이지만 결국 속을 헤치고 보면 새로 나올 통합체의 령도권을 누가 쥐는가 하는 싸움을 하고있는것이다. 말하자면 자리다툼으로 세월을 보내고있는것이였다. 어떻게 반년나마 이런 싸움을 하고 앉아있을수 있단말인가? 그이께서는 이튿날도 학교에서 돌아오시다가 《복흥태》정미소집에 들리시였다. 밤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오늘은 《리면핵심체》문제를 두고 정식 심의에 들어갔다. 그런데 이번에는 조직될 핵심체의 강령문제를 놓고 또 싸움이 벌어졌다. 어제보다도 더 날카롭게들 다투었다. 그이께서는 잠간 앉아서 들으시다가 밖으로 나오시였다. 아무래도 사태를 그냥 내버려두어선 안되겠다고 생각되시였다. 이때까지 이런 파쟁속에서 수없는 곡절을 겪어왔는데 아직도 수치스러운 싸움을 계속하고있다. 민중을 떠나서 이런 싸움질이 무슨 소용인가! 나라를 독립하자면 대중을 불러일으켜 힘을 마련할 방책을 토론해야지 아무 마련도 없는 판에 모여앉아서 네가 령도권을 쥐느냐 내가 령도권을 쥐느냐 하며 자리다툼을 하고있으니 이게 얼마나 기막힌 노릇인가! 물론 시대적으로 뒤떨어져있고 계급적으로 제한성을 가지고있는 그들이 민족해방투쟁에서 어떤 힘을 마련할수 있으리라고 바라는건 아니지만 그래도 조선을 독립시키겠다는 뜻을 가지고 모여왔다면 모두 합심해서 무엇이든 하나 만들어가지고 단결해야 하지 않겠는가! 분하고도 서글픈 현실이였다. 이런 현실을 외면하고 수수방관한다면 파쟁은 더욱 심화될것이고 민족단합을 위한 투쟁은 엄중한 시련에 부닥치게 될것이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미궁에서 헤여나오지 못하는 3부의 민족주의자들에게 단연 큰 충격을 주어야 하겠다고 생각하며 한참동안 거리를 거니시였다. 그이의 마음속에서는 3부거두들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한 하나의 구상이 움터올랐다. 그이께서는 하숙에 돌아오자 김혁을 부르시였다. 김혁은 그사이 김성주동지의 지도밑에서 길림주변의 혁명군중을 쟁취하기 위한 맹렬한 선전계몽활동을 벌려왔었다. 얼마전에는 차광수를 도와 신안툰에 가서 활동하였다. 길림에 돌아와서는 또 학우회와 소년회 회원들의 연예대활동을 지도하느라고 바삐 돌아갔다. 그에 대한 군중의 평판이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악보를 말아쥐고 기타를 늘 메고다니는 그는 마치 방랑가수나 가난한 풍류객처럼 보이였다. 《길림소문이 멀리도 퍼져가더구만!》 김혁은 기타를 벗어 방구석에 세워놓고 자리에 앉자바람으로 이런 말부터 꺼냈다. 온몸에서 정열이 확 풍기였다. 내부적격정의 연소가 끊임없이 진행되는 그의 육체는 하나의 불덩이같은 인상을 주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김혁이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겉옷을 말코지에 걸어놓은 다음 자리에 앉아 그 불덩어리같은 모습을 정겹게 바라보시였다. 《무슨 소문말이요?》 《길림에 새로운 혁명세력이 자라고있다는 소문말이요.》 《허허, 총독부도 알고있는 사실을 인민이 왜 모르겠소. 아마 또 누구를 만난게로구만?》 《그래 만났소. 몇해전에 서울서 통성을 한 <동아일보> 기자인데 길림의 혁명세력에 대한 호기심이 대단하더구만.》 사실 그 《동아일보》 기자는 길림학생운동을 통솔하는 지도자가 누군가고 물었다. 김혁은 지도자가 바로 김성주동무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김혁은 기타를 치면서 《조선의 노래》를 연거퍼 불렀다. 그런 다음 이 노래의 사상이 바로 우리 김성주동무의 사상이고 이 노래의 감정정서가 다름아닌 김성주동무의 감정정서라고 설명해주었다. 기자는 그 노래를 여러번 따라부르더니 노래가 아주 생신하고 약동적이여서 좋다고 찬탄하였다. 그는 가사도 곡도 다 마음에 든다고 하면서 악보를 베끼였다. 기자는 그 악보를 한참 보고나서 《이 노래 하나만 들어도 당신네 지도자의 영상을 상상해볼수 있다.》고 하였다.… 김혁은 손수건으로 얼굴의 땀을 씻었다. 그는 남들보다 곱절이나 땀을 많이 흘리였다. 한여름은 물론 가을에도 손수건이 노상 축축이 젖어있었다. 《우리 동포들이 길림으로 시선을 모으고있다는것은 어쨌든 기쁜 일이요. 그것은 우리 인민이 자기들을 해방시켜줄 진정한 혁명세력의 탄생을 목마르게 기다리고있다는 실질적인 증거가 아니겠소.》 《옳소. 인민은 해방의 구성을 찾고있소. 희망의 별을 찾고있소. 그런데 그런 별이 길림에 나타났단말이요. 그러니 사람들이 왜 길림으로 눈길을 돌리지 않겠소.》 《이것보, 김혁동무, 그 별이니 구성이니 하는 말은 제발 입밖에 내지 마오.》 김성주동지께서는 얼굴의 웃음을 거두고 짐짓 랭정한 표정을 지으시였다. 그러나 김혁은 태도를 바꾸지 않았다. 《내 말은 진심이요. 나는 심장이 시키는대로 말했을뿐이요. 누가 뭐라든 내 마음속에서 별에 대한 생각을 지워버릴수는 없을것이요. 나는 별을 찾아 길림에까지 굴러온 사람이요. 그러니 탓하지 마오.》 《시인들이란 참…》 김성주동지께서는 이렇게 말씀을 뇌이시며 머리를 흔드시였다. 그리고는 인차 다른데로 화제를 돌리시였다. 그이께서는 방금전에 보고 오신 3부통합회의정형을 대충 소개해주시고나서 민족주의 거두들에게 자극을 줄 하나의 힘있는 방법으로 연극을 준비할데 대한 구상을 말씀해주시였다. 《이 연극은 <신민부>, <참의부>, <정의부>를 상징하는 세 정승을 등장시켜 그들이 서로 세력다툼을 하다가 망하는 내용으로 하자는거요. 이를테면 풍자극이라고 할가. 대본은 내가 이미 만들어놓았으니 김혁동무는 차광수랑, 채경이랑, 박두학이랑 여러 동무들과 합심해서 배역도 선정하고 의상과 소도구도 마련한 다음 곧 련습에 착수해야겠소.》 《거참 그럴듯한 생각이구만. 령감들이 좀 정신을 차리게 해야지.》 김혁은 흥분하여 두손을 마주 비비였다. 그가 신바람나 하는것을 보자 김성주동지께서도 못내 기뻐하시였다. 《한주일후에는 연극을 무대에 올리지 못할가?》 《좀 아름차긴 한데 해보겠소.》 김혁은 선뜻 대답하였다. 여러차례의 원정공연을 통하여 경험을 축적한 그는 설사 그보다 더 힘든 과업을 받아도 어김없이 해낸다는 신심을 가지고있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두번째 과업을 주겠다고 하시며 김혁이를 데리고 뜨락으로 나가시였다. 《가만, 자전거를 탈줄 아오?》 그이께서는 문득 발길을 멈추고 김혁을 돌아보시였다. 《아오.》 김혁은 얼떠름해하며 대답하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빙긋이 웃으시였다. 《알면 됐소. 동양삼국을 돌아다닌 풍운아가 자전거를 못배웠을리 없지.》 그이께서는 하숙집 바람벽에 기대여져있는 자전거를 앞으로 끌어당겨 김혁에게 넘겨주시였다. 그리고는 웃으시였다. 《김혁동무, 이 자전거를 오늘중으로 차광수한테 가져다주고와야 하겠소. 그사람이 요즈음 길림을 오르내리느라고 발에 물집이 다 생겼더구만. 다리까지 절지 않겠소. 앞으로는 이 자전거를 타고다니면서 일을 보라고 하시오.》 김혁은 조향간을 이리저리 돌리며 자전거의 몸체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새것은 아니였지만 신품이나 다름없이 번쩍거리는 자전거였다. 원래는 《복흥태》정미소 주인이 사용하던것이였는데 그 주인이 주변농촌에 자주 나다니시는 김성주동지께서 쓰시라고 보내드리였다. 아하, 자전거를 타고다니면서 혁명을 한다! 이거야말로 얼마나 랑만적인가. 그는 어째 그런지 눈굽이 저절로 찌르르해졌다. 《거 <덜렁광창>이 래일부터는 호사를 하게 됐군.》 김혁은 베달을 밟아보면서 중얼거리였다. 그다음 뻗침쇠를 아래우로 두번 올렸다내렸다 해보고나서 또 중얼거리였다. 《자전거와 차광수!》 김성주동지께서는 김혁이와 헤여지신 다음 신동호네 집으로 향하시였다. 고민속에 빠져있는 그를 연극준비에 인입하시려는것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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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두촌에서는 집집마다 벼를 터는 일이 한창이였다. 어느 집이고 벼를 돌우에다 철삭철삭 치고있다. 벼춤은 대여섯번씩 후려쳐야 알이 다 떨어진다. 춤이 좀 큰것은 열번도 더 후려쳐야 한다. 그러니 한춤의 벼알을 다 떨구려 해도 고역이다. 온몸에 땀이 후줄근히 흐르고 껄끄렁이가 달라붙어 따끔따끔 쑤신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들의 신역이 고되다는 생각조차도 할 사이가 없다. 장춘에 있는 지주 홍가가 달려들어서 타작을 재촉하는 판이니 일을 늑장부릴수가 없다. 동네에서는 늙은이 젊은이 할것없이 모두다 떨쳐나섰다. 타작이 늦어진 집들에서는 아이들까지 떨어나서 앞벌의 벼를 운반해들였다. 사내들은 등짐으로 져나르고 아낙네들은 머리에 이여나르고 했다. 벌써 타작이 끝난 집들도 많다. 그런 집들에는 홍가의 마름이 돌아다니며 마대에 넣은 벼를 저울에 달았다. 이제 이 검근한 벼를 길림역에까지 실어다놓아야 농민들이 한숨 마음을 놓을 판이였다. 차득만네도 온 가솔이 달라붙어 앞벌의 벼를 모두 운반해들여다가 돌 세개를 나무통에 받쳐놓고 벼를 쳤다. 벼를 터는대로 내던져진 벼짚이 한옆에 쳐다보이게 쌓이고 무너져내린 짚검불이 또 한쪽에 그렇게 쌓였다. 마대에 넣어 저울에 단 벼는 토방우에 쌓여있는데 30여마대 잘되였다. 이것은 농사를 지은 주인이 혀를 대볼 량곡이 아니였다. 득만네가 먹을 량곡은 아직 그대로 땅바닥에 있다. 벼짚낟가리앞에 조그만 벼무지가 한개 있고 그옆에 쭉정이무지가 또 그만한것이 두개 있다. 이 쭉정이무지는 마대의 량곡을 정선할 때 키로 날려보낸것이니 알이 있을리 없다. 그래도 득만네 식구는 이것을 또 한번 키로 날려서 단 한되박이라도 알을 얻어내려는 심정으로 긁어모아놓았다. 지금 득만네는 검불을 펴놓고 도리깨질을 하고있다. 검불속에는 목이 부러져 떨어진 벼이삭이 더러 섞여있는데 그것을 두드려 벼알을 떨구는것이였다. 득만이는 아예 웃동을 벗고 도리깨질을 했다. 모두들 목과 잔등으로 땀이 번들번들 흘러내린다. 아버지가 땀을 더 흘린다. 재빛수염이 덮인 턱에서도, 팔굽에서도 땀이 뚝뚝 떨어져내린다. 땀을 덜 흘리는것은 어머니였다. 도리깨질은 령감이나 아들만치 해내면서도 잔금투성이의 눈언저리에 땀기가 약간 내비쳤을뿐이였다. 어머니는 그렇게 강기가 있었다. 누구나 침묵속에서 움직였다. 일년농사가 그들에게 기쁨을 주는것이 아니라 무거운 시름을 가져다주는것이였다. 농사를 지을 때 같아서는 가을을 두고 꿈도 많았고 타산도 많았는데 정작 낟알을 거둬들이고보니 그게 다 물거품같이 되였다. 툭탁툭탁 짚검불을 두드리자니 맥이 빠지고 한숨이 흘러나왔다. 짚검불이 아니라 밑창 빠진 생활을 두드리는 심정들이였다. 《어머니, 쉬세요.》 《난 괜찮다. 네나 좀 쉬려무나.》 어머니와 아들은 서로 이러고는 또 말이 없었다. 아버지는 아무 소리도 못들은척했다. 세식구의 심정엔 더욱 짙은 시름이 스며들었다. 《수고하십니다.》 도리깨질이 한창인 때에 김성주동지께서 인사를 하며 마당으로 들어서시였다. 모두들 도리깨질을 멈추고 땀에 뜬 얼굴을 돌리였다. 차득만은 얼른 도리깨를 내던지고 그이의 앞으로 마주 걸어나가 허리를 굽석하고는 악수를 하였다. 《원 녀석두, 웃동을 벗구 인사를 해.》 어머니가 혀를 갈기며 나무랐다. 그제야 득만이는 뒤통수에 손을 가져가며 얼른 웃옷을 벗어놓은데로 달려갔다. 《선생님, 오늘은 이렇게 낮에 나오셨수다.》 차득만의 아버지의 말이였다. 그동안 벌써 여러차례 다니시였어도 늘 밤에 찾아오고 새벽에 돌아가시군하시였기때문에 하는 말이였다. 《네, 오늘은 반공일이 되여서 일찍 나왔습니다. 벌써 벼를 다 털었습니다. 농사가 잘되였습니까?》 《네, 되기는 괜찮게 되였습지요.》 김성주동지께서는 저편쪽 벼무지로 걸어가시여 벼알을 한줌 쥐시고 도글도글한 알들을 손바닥에 펴보시였다. 《괜찮게 여물었습니다. 논은 얼마나 부쳤습니까?》 《한 댓마지기 부쳤지요.》 《다섯마지기라, 그럼 한마지기에 석섬씩만 나도 열다섯섬은 나지 않겠습니까?》 《열다섯섬이야 나지요. 그러나 그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득만이아버지는 벼짚단우에 주저앉으며 고불통대를 꺼냈다. 김성주동지께서도 로인의 곁에 앉으시였다. 로인의 얼굴에서는 인제야 무겁던 빛이 좀 가셔지는것 같다. 주글살이 진 눈가장자리에 부드러운 기운이 떠돌았다. 《소작료를 물고 남을게 없다는 말씀이겠지요?》 《어데 소작료뿐입니까? 참 말씀을 드리자면 기가 막히지요.》 로인은 꼭 나무등걸을 련상시키는 크고 험한 손으로 담배를 쑤셔담으며 땅이 꺼지게 한숨을 쉬였다. 《소작료외에 땅세도 작인부담입니까?》 《그렇습지요. 그외에도 물것이 많습지요.》 로인은 고불통에 부시를 쳐댔다. 볼이 오무라들게 몇모금 뻐금뻐금 빨고나서야 다시 말을 이었다. 《게다가 또 지고있는 빚은 얼마입니까? 금년에 농량이 모자라 내다먹은것도 있는데 작년 재작년치도 깨끗이 갚지를 못했습니다. 세 식구의 목숨인데 빚더미에 앉고보니 벌진 않고 배 두드리며 먹기만 한것 같습니다.》 《빚은 몇푼변으로 내다씁니까?》 《칠푼변이랍니다. 그런데 량곡을 빚내다 먹는건 더 비싸지요. 여름에 한마대 갖다먹으면 가을에 가서 한마대반은 물어야 하니까요.》 로인은 또 한숨을 지으며 담배를 빨았다. 그이께서 로인과 이야기를 나누시기 시작하자 득만이와 그의 어머니는 도리깨질을 멈추고 앉아서 벼이삭을 훑어던졌다. 《어머니, 저녁을 일찌기 지으십시오.》 《오냐, 그런데 찬이 없어 걱정이구나.》 어머니와 아들은 혀아래소리로 이렇게 소곤거렸다. 그이께서는 한참동안 로인의 이야기를 들으시고나서 득만이와 함께 마을로 나서시였다. 저녁무렵이 되자 찬물을 끼얹는것 같은 바람이 불고 대기가 졸지에 식어버렸다. 짚검불이 공중에 떠올라 어수선하게 날리였다. 그이께서 물으시였다. 《요새 야학을 계속하오?》 《야학을 못합니다. 홍가가 와서 타작을 독촉하는바람에 밤에도 벼를 터느라고 모여앉을수가 있어야지요. 지금 동네사람들은 눈코뜰새가 없습니다.》 《동네사람들이 모두다 홍가네 땅을 소작하고있소?》 《대부분 홍가네 땅을 부치고있습니다. 저 앞벌이 모두 홍가의 땅이랍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그다음엔 말씀을 하지 않으시였다. 그이의 눈앞에는 방금 보신 득만이아버지의 검붉은 잔등이 떠오르시였다. 삭아떨어진 적삼밖으로 드러난 잔등, 볕에 그슬리고 소금에 절고 하여 몇번이고 가죽이 벗겨진 그 잔등, 인젠 살이 아니라 무슨 괄익은 질그릇같기도 했다. 동네사람들은 그렇게 제몸을 지옥의 가마속에 녹여내는것 같은 고역으로 땅과 씨름을 해서 그 도글도글 여문 낟알들을 거두었다. 그런데 인제 와서 그것이 깡그리 남의것으로 된다는것은 무슨 강도의 리치인가! 너무도 잘 알고계시는 모순이였으나 강도가 판을 치는 세상을 생판 처음 보시는것 같은 생각도 드시였다. 불현듯 만경대 생각이 떠오르시였다. 차득만의 아버지의 잔등이 할아버님의 잔등으로 엇바뀌여보이기도 하시였다. 창덕학교를 다니시던 때 어느날 집으로 오시니 할아버님께서도 그런 등빠진 적삼을 입고 밀마당질을 하고계시였다. 할아버님의 적삼은 더 삭아서 어깨까지 내놓였다. 할아버님께서는 땀을 얼마나 흘리시였는지 잠뱅이 괴춤도 푹 젖어있었다. 그이께서는 차득만이와 함께 늪을 에돌아 집이 촘촘 배겨앉아있는곳으로 나서시였다. 마음속의 충격때문에 어데로 가는지도 모르고 걸으시였다. 《경식동무네 집으로 가실가요?》 《경식동무가 집에 있으면 그리로 갑시다. 일이 암만 바빠두 야학을 쉬여서야 되겠소?》 사실 김성주동지께서는 그동안 장두촌에 농민야학과 녀성야학을 한꺼번에 내오고 한경식과 민족주의계렬청년 한명을 교원으로 배치하시였다. 오늘 장두촌으로 나오신것도 이 야학들이 제대로 운영되 고있는가를 알아보려고 나오신것이였다. 그이께서 한경식이네 집에 거의 가셨을 때였다. 길옆 토담안에서 벼락같은 소리가 울려나왔다. 《저게 무슨 소리요?》 김성주동지께서는 우뚝 걸음을 멈추며 득만에게 물으시였다. 《바로 그 지주 홍가가 호통을 치는것 같습니다. 이 집은 홍가의 마름네 집입니다.》 《누굴 보고 호통하는거요?》 《동네사람들을 불러다놓고 그럴겁니다. 요즈음은 매일 그 지랄을 하니까요.》 그이께서는 잠간 멈춰서서 담장안의 고함소리를 들으시였다. 목소리는 왜가리청인데 담장안이 떠나가는것 같다. 가끔 무얼 두드리는것 같은 소리도 들린다. 왜가리청뒤에 무슨 딴소리라도 들리는가 해서 귀를 기울이시였으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고 왜가리청 혼자서 판을 치고있다. 《동네사람들이 수태 모여와있습니다.》 득만이가 어느새 토담구멍으로 담장안을 엿보고 와서 소곤거렸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아무 말씀이 없이 버드나무가 서있는 바깥마당쪽으로 돌아가시였다. 《들어가시겠습니까?》 《들어가봅시다.》 득만이는 그이께서 홍가가 앉아있는 안뜰로 들어가보신다는바람에 은근히 신명이 났다. 도대체 어떻게 하시려고 들어가보시자는것일가? 그도 슬금슬금 뒤를 따랐다. 바깥마당에는 홍가가 타고 온 마차가 있고 말 두필이 버드나무에 매여 갈기를 흔들며 코투레질을 하고있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널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서시였다. 대청마루우에 목에 살이 덮인 홍가가 비단 방석을 깔고앉아서 뜰을 내려다보고있다. 뜰에는 10여명의 농민이 불려와있는데 모두들 배허벅에 손을 붙이고 서있다. 그중 두사람만이 배포가 유한 태도로 마당 한쪽에 오금을 꺾고 앉아서 담배를 피웠다. 《저 리치근이 장부를 좀 봐라! 저놈이 떼먹으려는 심사가 없는놈이라면 자기가 쓴 빚이 얼마인지도 몰라?》 홍가가 곁에 앉아있는 마름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그는 올방자를 틀고앉아 자꾸 부채질을 했다. 몸이 비대한 홍가는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나서 철이 어느때이건 부채를 들고 다녔다. 홍가의 곁에 앉아있는 마름은 머리가 희슥희슥 세였는데 은실테돋보기를 코등에 걸고 앉아서 검은 가위의 장부책을 분주히 뒤지고있다. 그의 곁에는 그 장부책 말고도 여러개의 장부책이 놓여있고 차용증서묶음 같은것도 놓여있다. 수판, 벼루돌, 벼루돌우에는 금방 쓰다가 눕혀놓은듯한 가는 붓도 한자루 있다. 아예 농민들을 불러다놓고 주리를 틀듯 강박해가며 무슨 서약을 받아내는것 같았다. 얼마후 마름이 장부책을 펴들고 리치근의 빚이 얼마라는것을 내리외웠다. 그는 어느해 어느달 어느날 얼마를 가져다썼는데 첫해에 본전에 붙은 리자가 얼마이고 그 이듬해에 붙은 리자, 또 그다음해에 붙은 리자가 얼마인데 본전이 리자를 낳고 리자가 리자를 낳아 5년전에 10원을 가져다쓴 빚이 지금은 80원으로 되였다는것이다. 마름의 목청은 몹시 비린청이였다. 그 비린청으로 악을 쓰니 담장안을 칼로 째는것 같았다. 리치근의 빚은 그것뿐이 아니다. 해마다 소작료미납이 있었는데 그것이 또 돈으로 환산되여 기하급수적으로 새끼를 쳤다는것이다. 리치근이라고 불리운 농민은 뜰가운데 머리를 숙이고 서서 한참 말이 없더니 얼마후에야 고개를 들며 《지주어른.》 하고 불렀다. 《무슨 말인가? 죽을 죄에도 할 말이 있다니까 말을 해보게.》 홍가는 시뻘건 얼굴에 부채질을 하며 농민을 넌지시 내려다보았다. 《장부에 똑똑히 기입을 하셨다니까 맞겠습지요. 그런데 그 빚을 금년에 다 갚으라면 어쩔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선심을 베풀어 금년에는 금년치 소작료만 받고 묵은 빚은 눌러두길 바랍니다.》 《그건 무슨 소린가? 묵은 빚을 눌러두면 눌러둘수록 리자가 붙는데 또 눌러둬? 임자는 량심이 틀렸어. 하니까 일언이페지하고 땅을 내놓게. 아무리 땅이 흔해도 임자같은 사람에게 소작을 줄 땅은 없단말야.》 《그렇게 해서야 되겠습니까?》 《안되긴 무어가 안돼. 땅은 내 땅이야. 임자는 내 땅을 소작부치는거야.》 《그걸 누가 모릅니까?》 《그래 알면서도 떼를 써보는 판인가, 으허허허.》 홍가는 온몸을 들썩거리며 웃었다. 그러더니 불시에 화색을 띠며 정갱이를 끄당겨 오금을 고쳐 괴였다. 《자, 그럼 이렇게 하자구. 임자도 좋고 나도 좋은 방법으로 하면 될것이 아니야. 인제 임자가 금년만은 묵은 빚을 눌러달라고 했는데 그래 명년에는 갚을 재주가 있을것 같나? 또 후년엔들 갚을것 같은가? 언제고 갚을길이 없을것은 뻔하단말야. 그러니까 내 말을 듣게. 내가 지금 장춘에다 정미공장을 하나 세우는데 일군이 부족하단말야. 임자가 일군 하나만 보내준다면 이 장부책에 기재되여있는 빚이 문제인가. 물론 임자는 농사를 버리고 내 공장으로 올수가 없을터이지. 또 그래서두 안되구… 하니까 임자의 아들 오손이를 장춘으로 보내란말야. 오손이가 와서 한 4∼5년 일해준다면 그 빚값이야 못하겠나? 내 아까 저 정령감과도 이야기를 했지만 그게 나도 좋고 임자네도 좋은 우물고누 첫수란 말야. 정령감은 자기 아들을 보내주겠다고 다짐을 두었어. 난 내 땅을 부치는 임자네들의 형편이 가긍하니 이렇게 인정을 가지고 문제를 해결하자고 해.》 《과연 지당한 말씀이올시다. 그런 인정을 몰라준다면 쇠아들이지요.》 곁에서 마름이 장단을 쳤다. 결국 농사소출만 빼앗아가겠다는것이 아니라 사람까지 빼앗아가겠다는 소리다. 이 능구렝이같은 작자는 장춘에 큰 정미공장을 세우면서 작인들의 인력을 뽑아다가 그것을 운영할 계획을 했다. 그는 빚값에 쳐오는 작인들의 로력이란 양의 무리처럼 마음대로 몰아올수도 있고 절반 공짜로 부려먹을수도 있다고 속구구를 했다. 왜냐 하면 자기 땅과 얽매여있는 사람들이니 이들에 대한 생사여탈권이 자기 수중에 장악되여있기때문이다. 이 권력을 가지고 어떻게 롱간을 부리느냐에 따라서 새로 시작하는 기업의 흥망도 좌우될수 있다고 보았다. 홍가는 이 장두촌에서만도 수십명의 인력을 뽑아가려고 타산했다. 그래서 동네에 달려드는길로 처음에는 범의 기상을 하고 소작료문제를 가지고 으르렁거렸는데 인제는 소작료가 아니라 사람을 내라고 으르렁대였다. 지금 여기 불려온 농민들은 거의다 아들을 빼앗기지 않으면 자기의 동생을 빼앗겨야 할 운명에 처한 사람들이였다. 득만이네도 득만을 빼앗아가기로 점이 찍힌 집인데 아직 불려오지 않았을뿐이였다. 《지주어른.》 농민들뒤에 서있던 정령감이 후들후들 채머리를 저으며 앞으로 나섰다. 《인제 지주어른은 내가 아이를 내놓기로 서약을 한듯이 말씀을 하였으나 그렇게 능갈치는 방법으로 사람을 빼앗아가서야 되겠습니까? 저는 일언반구도 자식을 내놓겠다고 말씀을 올린바가 없습니다. 지주어른도 우리 집 정상을 짐작하시겠지만 내가 그 자식을 내놓고 어떻게 입에 풀칠을 합니까? 올해 소작료를 물고나면 한달 량식도 남지 못할건 뻔한데 옹근 일손을 내놓고 누가 벌어서 식구를 살립니까? 정말 인정이 있으시다면 이런 정상을 알아주셔야 할게 아닙니까?》 정령감의 소리에 홍가는 펄쩍 뛰여올랐다. 《능갈치는 방법이라니? 그게 무슨 수작인고? 그래 빚을 받을 사람이 작인의 정상을 생각해서 당장 갚을 방법이 없으면 사람이라도 와서 일을 해달라고 하는것인데 그것이 능갈쳐? 이 고현놈, 도적놈, 이놈, 땅을 내놔라, 당장 땅을 내놔.》 홍가는 부채끝으로 마루바닥우를 두번세번 밀어던지며 웨쳐댔다. 이 정상을 바라보고계시던 김성주동지께서는 사람들을 헤치며 앞으로 썩 나서시였다. 그리고는 농민들을 향해 말씀하셨다. 《여러분! 당신들은 무슨 죽을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머리를 숙이고 섰습니까? 허리를 펴고 머리를 드십시오. 당신들이 타작한 곡식은 당신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며 피땀을 흘려서 지은 곡식입니다. 지주는 그 곡식을 략탈해다가 먹고 살이 찌는것이지 땅문서를 먹고 살이 찌는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무엇때문에 죽은 목숨처럼 말도 못하고 욕설을 듣고있습니까?》 《아니 이… 이게 웬 학생이야?》 홍가는 화들거리는 손으로 부채를 쫙 펴서 부치며 엉덩판을 들썩들썩했다. 《조심하십시오. 독립운동의 지도자올시다.》 마름이 홍가의 궁둥이를 찌르며 소곤거렸다. 그러나 기가 동한 홍가는 그 소리를 미처 알아듣지 못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홍가가 저혼자 기가 뻗쳐 떠들거나말거나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해서 농민들에게 힘을 북돋아주는 말씀을 하시였다. 그러고나서야 펄펄 뛰는 홍가를 마주보며 추상같은 말씀을 하시였다. 《당신은 권세 하나면 모든것을 다 좌지우지할수 있다고 생각하는것 같은데 그런 때는 이미 지나갔소. 당신이 농민들을 누르면 누를수록 당신은 그만큼 가차없는 징벌을 받는다는것을 알아야 하오. 사람들은 당신과 같이 탐욕스런 착취자들을 용서치 않을것이요.》 그이께서는 이렇게 단죄하시고 농민들쪽으로 다시 돌아서서 두팔을 펴며 말씀하시였다. 《자, 나들 갑시다. 우리는 떳떳하게 살아야 합니다. 자기 힘을 믿고 자기의 응당한 권리를 주장해야 합니다.》 그이께서는 농민들을 한품에 안으시듯하며 대문쪽으로 내미시였다. 농민들은 기세가 올라 웅성거리며 밀려나갔다. 어떤 농민은 속심이 뻗쳐서 홍가를 쏘아보며 침을 뱉기도 하였다. 《서지들 못할가, 어데로 가는거야?》 홍가가 육중한 몸을 들고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그러는것을 마름이 다급하게 두루마기자락을 잡아당겼다. 《진정하시우, 그저 학생이 아닙니다. 독립군 지도자라는데도 그러십니다.》 《뭐뭐 독립군? 독립군이 무슨 독립군이냐? 새파랗게 젊은 학생인데…》 《하, 이러지 마십시오. 피스톨을 찼을지도 모릅니다. 여긴 장춘쪽과는 달습니다.》 마름은 대청마루를 뛰여내리려는 홍가를 겨우 붙들어서 굽혀앉혔다. 홍가는 목과 얼굴에서 피가 뚝뚝 떨어지는것 같고 볼편살이 푸들푸들 뛰였다. 두꺼비배같이 내민 큰 배는 숨이 차서 급하게 나왔다들어갔다하였다. 농민들이 다 빠져나간 뜰안에는 추녀그림자가 기울어지고 금방 쥐를 잡아먹은듯한 고양이 한마리가 앉아서 세수를 하고있다. 《안창호선생도 길림에 와서 저 학생한테 말이 꺾여서 연설을 못했답니다. 그뿐입니까? 선생이 잡혀들어간 뒤에는 저 학생이 사회계를 들썽거리게 해서 뽑아내기도 했답니다. 그런 학생을 건드렸다가는 숨주머니가 왔다갔다할수 있습니다.》 마름은 자기가 장두촌에 기둥그루를 박고 사는만치 될수록 홍가가 갈개지 말기를 바랐다. 만약 홍가가 갈개는 날이면 홍가가 받을 화를 그가 떠난 뒤 자기가 받을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안창호의 연설을 꺾었으면 꺾었지 어떻단말인가? 그래 내가 강도라는 소리를 듣고도 뻐꾹소리를 못하고 앉아있어야 하나? 내가 어떻게 하니 강도인가? 장두촌 앞벌이 뉘 땅인가? 내 땅 가지고 내가 소작주어 도조를 받아가는데 내가 강도야. 에끼, 이 망할것, 무에 무서워서 설설 기느냐?》 《하, 이러지 말래두 그럽니다. 이 길림근방에서 이러다간 검정콩알을 먹습니다.》 《검정콩알이 그렇게도 무서우냐, 이 쓸개빠진놈아.》 홍가는 장부책과 증서묶음을 한아름 안아서 마름의 면상에 후려쳤다. 마름은 뒤로 벌렁 넘어졌다. 그바람에 돋보기도 벗겨져 저만치 굴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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