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서《불멸의 력사》 2 장편소설
천 세 봉
( 제 15 회 )
제 7 장
행 복
1
일요일인데도 권심의 하숙방은 조용하다. 권심은 조반을 끝내자 《신문서사》로 책사러 떠나갔다. 방에 남은것은 김성주동지께서 주신 개별공작임무를 끝마치고 간밤 장춘에서 돌아온 김혁이뿐이였다. 그가 받은 임무는 무기상점 점원으로 일하고있는 최효열에게 혁명적영향을 주며 장춘일대에 산재하고있는 청년공산주의자들을 장차 공청과 반제청년동맹에 흡수하기 위한 기틀을 마련하는것이였다. 일은 예상했던것보다 퍼그나 순조롭게 진행되였다. 김혁은 가벼운 마음으로 공작지에서 돌아왔다. 김성주동지께 장춘실태를 보고드리고 온밤 권심이와 이야기를 나누느라고 잠도 설치였지만 그는 별로 피곤한줄을 몰랐다. 길림에 발을 들여놓은 첫순간부터 시작된 정신적인 앙양상태가 여러달이 지난 오늘까지도 계속되고있었던것이다. 김혁은 인생을 새롭게 개척하고있는것 같은 심정으로 매일매일을 랑만적으로 보냈다. 하숙집 녀주인이 지어주는 깔깔한 조밥조차 이 아침에는 혀끝에서 달큼한 감미가 우러나올 지경으로 별스레 맛이 있었다. 마당 한쪽구석에 서있는 철봉대에 매달려 몇분동안 운동까지 하고나니 온몸에서 기운이 우쩍우쩍 솟았다. 그가 아직도 이 하숙방에 거처하고있는것은 온전한 숙소를 얻지 못한때문만은 아니였다. 권심이, 차광수들이 다문 몇달이라도 같이 지내자고 극성스레 잡아끄는 까닭으로 홀홀히 다른 거처로 자리를 옮기기 난감한탓도 있었다. 책무지로 둘러싸인 이 고리타분한 방에서 김혁의 존재는 시골선비같은 권심의 메마른 성미와 진취적이고 활동적인 특질을 가지고있으면서도 약간 뚝뚝한 차광수의 인품을 잘 조화시켜주어서 그들은 단란한 한집안식구처럼 화목하게 지냈다. 그러던것이 신안툰의 학교문제로 차광수가 떠나고보니 요즘은 하숙방이 별로 썰렁해보인다. 철봉을 하고 방안에 들어서자 그는 벽에서 기타를 벗겨들었다. 길림의 혁명조직성원들이 마련해준 기타였다. 김혁이 너무도 고맙고 송구하여 김성주동지께 사례를 드리자 그이께서는 우리 대오에 복덩이가 한명 굴러들었는데 혁명하는 사람들끼리 기타 하나쯤이야 마련해주지 못하겠는가고 하면서 어서 그 기타를 가지고 혁명에 보탬이 될 좋은 노래들을 많이 지으라고 고무격려해주시였다. 《김혁이와 기타는 한몸이라는데 동무를 만나는 첫순간에 그 표상이 허물어지니 얼마나 섭섭한지 모르겠더군. 차광수의 이야기를 듣고나서부터 난 늘 기타를 메고있는 김혁이를 상상했더랬소. 그런데 동문 내앞에 빈몸으로 덜렁덜렁 나타나더란말이요. 그래서 난 동무한테 기타를 하나 구해주자고 생각했더랬소.》 그날 그 기타를 받아안고 김혁은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혁명의 지도자를 만난 기쁨에 울고 상해에서 로자와 바꾸었던 그 기타가 새것으로 부활된 기쁨에 울었다. 그때부터 그는 단 하루도 몸에서 기타를 떼놓은적이 없었다. 기차나 마차를 타고 공작지로 떠날 때에도 기타는 항상 그의 몸에 붙어있었다. 김혁은 올방자를 틀고 무릎우에 기타의 공명통을 올려놓은 다음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네손가락으로 현들을 주르르 훑었다. 그리고는 손가락들을 잽싸게 놀려 화음들을 련이어 튕겨내였다. 가슴을 울렁거리게 하는 아름다운 리듬이 방안을 가득채웠다. 어찌나도 발랄하고 약동적인 리듬인지 현을 훑어가고있는 연주자자신도 미소를 지으며 그 여운에 귀를 기울일 지경이였다. 길림의 청년들은 김혁의 이 리듬에 매양 황홀감을 금치 못하였다. 길고 단단하게 생긴 김혁의 손가락들은 한동안 여러가지 박절의 리듬을 종횡무진으로 튕겨대다가 은근하면서도 열정적인 원무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의 머리에서 순간순간 불꽃처럼 벙끗거리며 일사천리로 줄달음치고있는 선률들의 즉흥적인 폭발이였다. 길림에 온후부터 김혁에게는 즉흥곡을 연주하는 버릇이 새로 생긴것이다. 원무곡은 미구에 호탕하고 박력있는 행진곡으로 넘어갔다. 수만군중의 노도같은 발구름을 련상시켜주는 행진곡풍의 즉흥곡이였다. 원무곡에도, 행진곡에도 길림생활이 그에게 마련해준 랑만이 압축되여 울리고있었다. 그는 한참만에야 기타를 걸어놓고 창문앞을 서성거리였다. 현에서 울리던 음악의 여운은 인차 가라앉고 무거운 정적이 곧 방안을 휩쓸었다. 김혁은 어쩐지 그 정적에 쉽사리 습관될수가 없었다. 길림의 들끓는 생활은 그에게 단 한번도 고독이나 권태를 주지 않았다. 그는 고독할사이가 없었고 권태를 느낄 여가가 없었다. 장강의 흐름처럼 도도하게 굽이치는 혁명의 급류우에서 김혁은 수개월동안 김성주동지의 발걸음에 보조를 맞추며 숨가쁘게 지내왔다. 긴장한 출장끝에 차례진 이 아침의 짧은 휴식마저 그에게는 별로 갑갑스럽게 느껴졌다. 이 순간에도 동지들은 뛰고있을것이다. 김성주동지의 구령에 따라 모두들 앞으로 돌진하고있을것이다. 김혁은 그 장쾌한 진군서렬에서 잠시나마 외따로 떨어져있는것 같은 적막감을 맛보면서 무엇을 어찌겠다는 확실한 생각도 없이 무작정 방문을 열어제끼였다. 그러다가 문을 열던 그 자세대로 그 자리에 우뚝 굳어져버리였다. 마당 한옆에 경주가 고개를 숙이고 서있었던것이다. 《경주동무, 거기 왜 그러구 섰소?》 김혁은 문설주를 짚고 반가운 목소리로 경주를 찾았다. 경주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금시 꿈에서 깨여난듯한 몽롱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토방앞으로 재빨리 걸어왔다. 《김혁동지, 먼길에 수고가 많으셨군요.》 《수고는 무슨 수고… 신선놀음이였는데.》 김혁은 롱조로 대답했다. 경주는 눈을 흘겨보이였다. 《김혁동진 그저 롱만 하시네.》 《롱이라니, 그건 진심으로 하는 소리요. 길림에서도 그랬지만 거기 장춘에 가서도 나는 내내 과원속을 거니는것과 같은 기분으로 노래를 흥얼거리며 지냈더랬소.》 김혁은 웃음을 거두고 실눈을 지으며 정색해서 말했다. 《정말 다감하시구만요.》 경주는 진심으로 말했다. 《내가 특별히 다감해서가 아니라 생활이 나에게 스스로 시를 주고 노래를 주고있단말이요. 그래 경주동문 무슨 일로 왔소?》 《김혁동지를 만나려구요.》 《그럼 방에 들어올것이지 관청에 찾아온 촌아낙네처럼 그렇게 주접이 든 모양으로 서있소?》 《방에서 기타소리가 흘러나오겠지요. 그 소리에 취해서… 그냥 서있었지요. 감히 그 음악을 깨뜨리고싶은 용기가 나지 않더군요. 귀에 설은 선률인데 아주 매혹적이였어요. 무슨 곡이였나요?》 《그저 마음내키는대로 한번 튕겨봤소. 이를테면 즉흥곡이라고나 할가…》 《아, 그런가요?! 그렇다면 김혁동지의 음악적재능에 더욱 감탄하게 되는구만요.》 경주는 황홀한 표정으로 김혁을 쳐다보았다. 김혁은 당치않은 찬사라는듯이 머리를 좌우로 털고나서 장지문을 더 넓게 열어놓았다. 《경주동문 아주 엄격한 비평가라고 하던데 좌우간 영광이올시다. 어서 들어와서 용건이나 이야기하구려.》 《아니, 여기서두 돼요. 다른게 아니라 김성주동지가 만나자는군요.》 《그래?! 정말 내 마음을 딱 알아맞히는구만. 그러지 않아도 난 지금 막 갑갑하던 참이였는데…》 김혁은 활기를 띠였다. 그는 벽에서 상의를 벗겨입은 다음 더 지체하지 않고 인차 김성주동지의 숙소로 향하였다. 쌓이고쌓였던 피곤이 다 풀려서 그런지 기분이 무척 상쾌하였다. 동행하는 경주도 마음이 이만저만 들떠있는것 같지 않았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바지주머니에 두손을 깊숙이 지르고 숙소의 앞마당을 거닐고계시였다. 그이의 매 발자국에는 깊은 사색의 자취가 어려있었다. 멀리서 활개를 저으며 다가오는 김혁을 보시자 그이께서는 걸음을 멈추고 입가에 미소를 지으시였다. 《피곤할텐데 오라구 해서 안됐소. 사실 오늘은 아무 일도 안시키고 푹 쉬우려고 했는데…》 김혁은 펄쩍 뛰였다. 《푹 쉬우다니 그게 무슨 소리요. 속이 근질근질해서 막 죽을 지경이였는데… 나를 때맞추 잘 불렀소. 그러지 않아도 성주동물 찾아와서 일감을 달라고 하려던 참이였소.》 《허허, 그렇다면 좀 마음이 놓이는군. 어쩔가? 방에 들어가서 얘기를 나눌가? 여기서 그냥 나눌가?》 《밖에서 그냥 나눕시다. 이 좋은 해빛과 공기를 두고 음달속으로 들어가다니. 경주동무, 그렇지 않소?》 경주는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이였다. 김혁은 눈을 쪼프리고 파랗게 개인 하늘을 쳐다보다가 쏟아져내리는 해살을 퍼담기라도 하려는듯 손등이 아래로 내려가게 허공중에 한손을 곧추 펴서 내들었다. 그런 다음 뚜벅뚜벅 걸음을 옮겨 토방우에 걸터앉았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그의 옆에 나란히 자리를 잡으시였다. 토방 한쪽끝에는 경주가 와앉았다. 《김혁동무, 오늘은 나하구 같이 글을 좀 써야겠소. 우리 혁명을 위해서 김혁의 그 불을 뿜는것 같은 문장이 필요하게 됐단말이요.》 김성주동지께서는 한쪽무릎으로 김혁의 무릎을 슬쩍 다치며 의미있는 웃음을 그려보이시였다. 김혁은 《문장》이라는 말에 침을 꿀꺽 삼키였다. 문장이 소용되는 일이라면 팔을 걷고 해볼만한 일이다. 그의 머리속에 혁명을 위해 필요한 문장은 얼마든지 있었다. 그 문장들가운데는 칼날같이 예리한 시어들도 있었고 미풍처럼 훈훈한 산문들도 있었다. 계급의 원쑤들을 조롱하는 야유가 있는가 하면 애국에 울며 몸부림치는 호곡이 있었고 화염도 있었다. 김혁은 가슴을 울렁거리며 김성주동지를 돌아보았다. 그러다가 목메인 소리로 뇌이였다. 《나도 그런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오. 그래 어떤 글을 쓰게 되오?》 《일제를 치고 독군서를 치는 글이요.》 김성주동지의 눈가에서는 번개불같은 섬광이 번쩍이였다. 그이께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격한 걸음걸이로 토방앞을 거닐기 시작하시였다. 《도산 안창호선생이 감옥에 갇혀있는 사실은 김혁동무도 잘 알거요. 겨울에 잡혀들어간 선생이 봄이 다 가도록 아직 놓여나오질 못하고있소. 우리가 사회여론에 호소해서 항의도 하고 규탄도 하고 요구도 해왔지만 일제의 압력을 받고있는 독군서는 아직 안창호선생을 석방시키지 않고있단말이요. 그래서 우리는 석방운동을 좀더 높은 차원에서 벌리자는거요. 우리가 여기서 투쟁을 한걸음 더 전진시키지 않고 주춤거리면 안창호선생을 영영 구출하지 못하게 되오. 선생은 결국 일본놈의 쇠고랑을 차게 될거요. 왜놈들이 안창호선생을 기어이 자기들의 손에 넣으려고 하는것은 선생 하나를 철쇄에 묶어놓음으로써 조선민족주의운동 전체를 뿌리채 압살해버리자는데 있소. 우린 왜놈들의 이 기도가 그대로 실현되도록 허용할수가 없소. 민족주의가 비록 낡은 사조이고 또 진부한데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애국애족이라는 그 근본정신이야 우리 민족을 위해서도 좋은것이 아니겠소. 안창호선생이 아니고 보통 조선사람이 감옥에 있대도 그렇지. 우리가 그를 어떻게 홀홀히 왜놈들한테 넘겨줄수 있겠소? 하물며 안창호선생과 같이 명망이 높은 지사인데야…》 김혁은 목구멍으로 뜨거운것을 삼키면서 김성주동지의 말씀을 묵묵히 듣고있었다. 그도 김성주동지의 지도를 받고있는 길림의 학생청년계층이 안창호 석방운동을 벌리게 된 동기를 대충 알고있었다. 하지만 그 동기속에 그처럼 의롭고 순결하고 열렬한 김성주동지의 인간애, 민족애가 반석처럼 깔려있는것은 깊이 헤아리지 못하고있었다. 김혁은 그이의 그 하늘같은 도량에 눈물이 나도록 감동되였다. 사상은 비판하면서도 사람자신은 구출하지 못해 애를 태우는 저 우주같이 너그러운 포옹력앞에서야 어느 누군들 머리를 숙이지 않을수 있으랴. 김성주동지께서는 말씀을 이으시였다. 《우리는 지금까지 길림의 언론계, 사회계에 호소하여 안창호선생을 구원하기 위한 불을 지폈소. 독군서는 궁지에 빠져 갈팡질팡하고있소. 앞에서는 우리가 목줄을 조이지, 뒤에서는 왜놈들이 으르렁대지… 이런 때 우리가 좀더 힘을 보태여 공세를 강화한다면 독군서는 우리의 정정당당한 요구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을수가 없을것이요. 그래서 이번에는 길림의 학계를 들어일궈보자는것이요. 학계가 궐기하면 온 시내가 들썽거리고 아마 독군서의 룡마루도 되게 흔들릴거란말이요. 길림의 학생들이 만만치 않거든. 어떻소. 김혁동무, 해볼만하지 않소?》 《해볼만하오. 승산이 있는것 같소.》 김혁은 흥분된 목소리로 긍정하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미소를 지으시였다. 《김혁동무, 오전중으로 시내 각 학교 교장들과 학생단체들에 보내는 성토문을 작성할수 없을가?》 《오전중으로 써서 오전중으로 부치도록 하겠소.》 《그럼 부탁하겠소. 경주동문 장마당에 나가 안창호선생에게 들여보낼 사식을 좀 마련해야겠소. 될수록 신선하고 영양가 높은것으로… 선생이 이틀째 음식을 통 입에 대지 않는다는구만. 아마 건강상태가 몹시 악화된것 같소.》 《알겠어요.》 경주는 곧 일어서서 밖으로 나갔다. 김성주동지께서도 문밖에 나서시였다. 《나는 철도기관구에 좀 갔다오겠소. 두시간후에 돌아올테니 그때까지 일을 마무리해주오.》 그이께서는 이런 부탁을 남기고나서 총총히 토방앞을 떠나시였다. 김혁은 한손으로 문설주를 짚은채 그이의 후리후리한 모습을 경건히 지켜보았다. 그의 눈앞에는 길림땅에 첫발을 들여놓던 그날 로상에서 인력거군을 옹호하여 어떤 신사놈을 단죄하는 김성주동지의 모습을 바라보던 순간이 되살아올랐다. 그날 그는 그 극적인 장면을 보고 얼마나 통쾌해하였던가. 그리고 마음속으로 김성주동지의 그 정의로운 행동에 얼마나 감복하였던가. 그날의 사건이 김성주동지의 투철한 계급성을 보여주었다면 안창호 석방을 위한 오늘의 설계는 그이의 열렬한 인간애, 민족애를 보여준다. 복잡다난한 이 세기의 공산주의운동선상에 김성주동무처럼 그렇듯 열렬히 겨레를 사랑하고 조국을 사랑하는 인간이 또 어데 있었던가. 김성주, 그대는 내가 찾던 별이다. 온 민족이 일구월심으로 찾고 그리던 해방의 구성이다. 나는 아직 그대처럼 민중을 사랑하고 민중을 중시하는 지도자를 보지 못하였다. 그대는 민중속에서 나와 민중에게 빛을 주고 덕을 주는 민중의 별이다. 나는 이 별을 받들고 지키는 하나의 전사다. 장차 주옥같은 시어들을 골라 이 별을 찬양하고 자랑할 사명을 지닌 조선의 시인이다. 이 별밑에서 조국이여, 그대는 반드시 광명을 보게 되리라. 그대의 앞길에 행복은 무궁하리라. 김혁은 봄처럼 움터오르는 어떤 장엄하고 격정적인 시상에 잠겨 오래도록 문앞에 서있었다.
2
안창호는 해볕이 따뜻하게 내려비치는 한낮에 석방되였다. 리갑무, 오동진, 심룡준을 비롯한 독립군 간부들이 감옥문밖에서 그를 맞이하였다. 감옥에서는 안창호이외에도 여러 사람이 놓여나왔다. 하긴 그동안 벌써 수십명이 석방되였고 오늘까지 석방되니 잡힌 사람은 다 놓여나오는셈이였다. 안창호는 몹시 수척했다. 이쁘장하던 나비수염은 간데없고 노르끼레한 수염이 온통 입술을 덮어 구레나릇이 되였다. 목도 헐끔하게 여위여 체포되기전에 입었던 와이샤쯔깃이 헐렁헐렁해졌다. 그래도 그는 리선엽목사가 주는 파나마모와 부채를 받아들며 여유있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밖에 있는 여러분들이 로심초사를 하며 고생을 하셨지 내야 무슨 고생이 있었겠소. 가만히 앉아있다가 나오는건데.…》 그는 부채질을 하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래두 감옥안이 아니요. 아무렴 감옥안과 감옥밖을 비교하겠소. 그동안 감옥밖에 있는 우리들은 사회계가 들썽거리는통에 한편 신명도 났었소.》 리갑무로인이 전에없이 밝은 얼굴로 이렇게 말해서 모두들 웃었다. 로인은 이 더운 날에도 모시두루마기에 버선을 신었다. 그래도 그는 땀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 일행은 청향국 옆길로 빠져 큰 거리로 나섰다. 리선엽목사가 일행의 중간에 서서 걸으며 사회계와 학생계가 들끓던 이야기를 하였다. 《좌우간 그 도량이 만만칠 않아. 남의 힘을 움직여 두 정권의 수족을 얽어놓고 잡힌 사람들을 놓여나오게 했단말이요.》 《그렇지, 두 정권이지. 왜놈과 장작림정권을 옴짝 못하게 만들어놓았으니까. 과시 김형직선생님의 자제분답지 않소.》 리선엽의 소리에 심룡준이 대꾸했다. 오동진이도 화색이 도는 얼굴로 떠드는 이야기를 들으며 걸어갔다. 그는 이번에 김성주동지께서 안창호의 석방운동을 일으킨데 대해 누구보다도 기뻐하였다. 자기가 안창호의 사상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어떻든지간에 그래도 민족주의운동자들을 위하여 석방운동을 조직하고나섰다는것은 목이 메도록 고마왔다. 그것부터가 벌써 사회주의를 하는 청년으로서 김찬이들이 하는 방법과는 다른것이다. 김찬이들이라면 민족주의운동자들이 그 어떤 피해를 입었다면 그것을 통쾌히 여기면 여겼지 앞장에 나서서 구원의 손길을 뻗치려고는 하지 않았을것이다. 또한 석방운동자체도 자기들과 같은 민족주의자들로서는 도저히 생각조차 할수 없는 놀라운 방법으로 하고있다. 이렇게 통이 크고 품이 바다같은 비범한 인재가 바로 다른 사람 아닌 김형직선생님의 자제분이라고 생각할 때 오동진은 눈물이 나도록 기뻤다. 모두들 리선엽목사의 집으로 왔다. 드높은 사랑채의 아래웃방에 사람들이 가뜩 들어앉았다. 리선엽이 담배갑을 테서 좌중에 내놓으며 어서들 피우라고 권했다. 앞뒤문을 다 열어놓아서 사랑방으로는 서느러운 바람이 불어들어왔다. 좌중에서는 3부통합회의에 대한 이야기가 벌어졌다. 사실 그동안 3부는 머리를 맞대고 회의를 적잖게 진척시켰다. 3부가 관할하던 지역을 통합하는 문제, 군사를 통합하는 문제, 각 부 교육재정을 통합하는 문제 등 어떤 문제는 며칠씩 두고 론쟁을 했지만 일부 문제는 큰 곡절이 없이 결정을 보기도 했다. 《어쨌든 시련은 있었지만 회의도 그만치 진척시켜놓았으니 다행이요. 인젠 안창호선생도 나왔으니 회의를 더욱 일사천리로 밀고나가야 하겠소.》 리선엽이 부채를 권한다, 담배를 권한다 부산을 피우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렇구말구요. 모두 일심동체가 돼서 진척시켜봅시다. 인제야 저놈들이 감히 또 그런 망동을 하겠소. 차라리 이번에 시련은 겪었지만 그놈들에게 혼뜨검을 내주는데선 일이 잘됐지요.》 심룡준이 열을 올리며 말을 받았다. 모두 기분이 나서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리갑무로인조차도 앞으로 벌어질 회의에서는 안창호의 역할이 크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방안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흡족한 표정으로 듣고있었다. 안창호는 말 한마디 없이 앉아서 부채질만 했다. 윤기가 돌던 그의 이마엔 잔금이 여러줄 건너갔다. 약간 재빛을 띤듯한 눈동자에는 무거운 그늘이 깃들어있다. 그는 열어놓은 창문으로 당옥색 하늘을 내다보며 부채를 들지 않은 손에 손수건을 쥐고 앉아있다가 가끔 그것을 들어 이마를 닦는다. 《담배를 피시지요.》 《네…》 오동진의 말에 안창호는 간단히 대꾸했다. 그는 허울만 남아있는 사람같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서 이번의 감옥생활은 단순한 감옥생활만이 아니였다. 자기의 독립운동을 심각하게 돌이켜보는 기간이기도 했다. 그는 감옥안에 들어가 앉아서 내내 김성주동지의 질문을 생각해보았다. 답변이 막혀서 연설을 못한것도 기가 찬 일이였지만 자기자신이 왜 대답을 못하게 되였는가 하는 그 궁극의 모습을 살펴보니 몸소리가 쳐졌다. 결국 자기의 로선이라는것은 화려한 너울을 입힌 모순의 집대성과 같은것이였다. 웅변의 힘이 자기자신도 거기에 취할 정도로 요란스럽게 만들어놓기는 했으나 사실상 와락 헤치고 들여다보면 거기에는 리치에 닿지 않는 신념의 몸부림이 있을뿐이였다. 아니, 사각이 맞지 않는것이 고임돌도 없는 터전우에 서있을뿐이였다. 그렇다, 사각이 맞지 않고 고임돌도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야 왜 질문에 한마디 대답도 못하고 연설이 막혔겠는가? 구체적으로 외자도입을 해서 조선에서 산업진흥이 가능한가? 일본놈이 정치와 경제를 송두리채 틀어쥔 조건하에서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정신수양을 해서 어떤 실력을 만들어낼수 있는가? 일본놈의 총검밑에서 어떻게 조선사람의 넋을 가진 민족교육이 가능하며 정신수양이 가능하겠는가? 그리고 미국의 개척력사가 과연 피비린내로 절어진 력사가 아니란말인가? 아무리 가리우고 가리운들 인디안의 멸족으로 미국의 번영이 이루어졌다는것을 어떻게 속인단말인가? 나라를 왜놈에게 먹히우고 서럽다는 우리가 그 입으로 인디안을 멸족시킨 미국을 찬양했으니 청년들이 분개하지 않을 일인가. 쓰고 역겨워도 이 모든것이 진실인데 내가 질문에 무어라고 대답한단말인가? 때리고 쳐도 할 말이 없지 않은가! 그렇다면 내가 정말 무저항주의로선을 밟아왔는가? 난 무저항주의는 아니였다. 그러나 무저항주의라고 해도 그것을 반박할 근거가 없는것이다. 안창호는 자기가 무섭게 혐오스러웠다. 그는 일생 처음 자기라는 존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것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안창호는 감옥안에서 김성주동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다. 그는 그이께서 자기를 석방하기 위한 투쟁을 크게 벌리셨고 그 영향으로 사회가 물끓듯 끓고있다는것도 알고있었다. 그러고보면 김성주동지는 그의 은인이라고 말할수 있었다. 은인이래도 단순한 은인이 아니였다. 모든 희생을 각오하고 그를 왜놈의 독아에서 건져낸 생명의 은인, 평생을 통해 형성된 그의 그릇된 독립관을 향해 진리의 종소리를 울려 그를 잠에서 깨워준 정치적교사였다. (아, 내 일생에 이런 은인이 언제 또 있었던가!) 안창호는 주의와 주장을 초월한 인간본연의 허심한 감정으로 아직 본적도 만난적도 없는 김성주동지의 모습을 뜨겁게 그려보았다. 그이를 만나서 감사하다는 말이라도 하고싶었다. 그러나 그런 소망을 실천에 옮길만한 용기가 그에게는 없었다. 그 애젊은 리지의 천재앞에 퇴색해진 자기의 허울마저 나타내고싶지 않았던것이다. 《오선생, 내 한가지 좀 물읍시다.》 안창호는 눈을 내리감고 무겁게 입을 열었다. 《네, 물으시지요.》 《김형직선생 자제분이 나에 대한 석방운동을 벌린건 3부통합에 모인 독립군 여러분들의 부탁을 받고서였던가요?》 안창호로서는 사실 옥중에서부터 수수께끼같이 생각하고있었던 문제이기도 하였다. 그는 석방운동의 밑바닥에 흐르는 김성주동지의 숭고한 인간애, 민족애의 깊이를 리해할수 없었던것이다. 오동진은 머리를 흔들었다. 《아닙니다. 누구도 그에게 그런 부탁은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모여앉아서 걱정만 하고있었지요. 그런데 그때 벌써 성주네는 도산선생의 석방과 관련된 대책을 세웠더란말입니다. 통합회의를 하는 장소에 성주가 직접 찾아와서 한숨만 쉬고 앉아있는 령감들더러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왜놈들이 안창호선생을 내놓지 않고는 못견딜거라고 하겠지요. 그러면서 방략을 쭉 이야기하더구만요. 처음엔 우리도 그 방략을 두고 미타하게 생각했습니다. 헌데 대세를 보니 점차 그 방략대로 흘러가지 않겠습니까.》 《나도 옥중에서 석방운동소식을 듣고 몹시 놀랐댔습니다. 털어놓고 말해서 김성주학생으로 말하면 서면질문을 해서 강연때 나를 곤경에 몰아넣은 장본인이 아닙니까. 그런 학생이 주동이 되여 석방운동을 벌린다니 나로서는 사실 놀라지 않을수 없었습니다. 나를 왜 구원하려 하는지 자꾸 의문이 떠오르겠지요.》 《그래서 우리들중 누군가 질문을 한것 같습니다. 주의주장이 달라서 서면질문까지 가한 안선생을 왜 구원하려 하는가구요. 그랬더니 성주는 <안창호선생도 조선사람이 아닙니까.>하더라는겁니다.》 《과연 출중한 청년입니다!》 안창호는 눈물이 글썽해서 진실로 감동되였다. 그 청년의 나이가 이십전이라니 더더욱 경탄할수밖에 없었다. 참으로 놀라운 인물이다. 자기를 그 어떤 아득한 미궁속에 집어던지기도 하고 또 끌어당겨오기도 하는 자유자재의 조화와 권위를 가진 사람이다. 안창호의 머리에는 새삼스럽게 10여년전 일이 떠올랐다. 그때 그는 평양 어느 대회장에서 외세의존의 대웅변을 토하다가 토목두루마기를 입고 연단에 뛰여오른 김형직선생님으로부터 일생을 두고 잊을수 없는 타격을 받았었다. 이 열혈투사는 외세의존은 망국의 길이라고 부르짖으면서 자기의 연설을 일순간에 뒤집어놓았다. 대회장은 끓어번지며 그의 불을 뿜는것 같은 연설에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때 안창호자신은 얼마나 급했던가? 반박연설을 채 듣지도 못하고 코트와 단장을 걷어안고 대회장에서 도망해나왔다. 회장밖에 나오니 온몸에 땀이 쫙 흘렀다. 그때 일이 칼로 새긴것 같이 지금도 선명하다. 그런데 인제 와서는 또 그이의 아드님으로부터 호된 타격을 받았다. 무엇인가 도도한 흐름이 세월을 두고 굽이쳐오면서 자기에게 련속 부딪치고 부딪치고 하는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확실히 높고 거세찬 정신의 흐름이 여기에 있다. 머리를 수그리지 않으면 안될 웅장한 조선의 기상, 새로운 기상이 여기에 살아있다. 인제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 이끼 오른 돌각담, 쓸쓸한 저녁바람이 불어치는 돌각담, 나자신이 아무리 몸부림을 해도 그런것밖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인제 나는 올 길을 다 왔다. 해는 벌써 서산에 올라 락조를 던지지 않느냐. 안창호는 감옥안에서 몸부림을 쳤었다. 끼니를 굶는적도 있었다. 다른 독립운동자들이 건강에 대해서 걱정을 하면 《그 장한 몸뚱아리가 무에 그리 아까울것이 있소.》 하고는 긴 한숨을 내쉬였다. 이런 정신적고민을 겪었으니 몸이 허울처럼 될수밖에 없는것이였다. 안창호는 지금 감옥안에서 겪어온 고민을 그대로 가지고 나와 앉아있다. 그렇기때문에 그는 자기앞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소리가 도무지 귀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그저 창밖으로 펼쳐진 하늘에 서글픈 눈길을 보내며 홀로 자기의 생애에 대한 생각을 좇고있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공부를 필하자 학생들을 데리고 도서실로 가시였다. 그이께서는 아직 후끈후끈 달아있는 도서실에서 도서정리를 시작하시였다. 그이께서 도서실운영책임을 맡으신데는 딴 결심이 있었다. 그이께서는 도서실을 통하여 육문중학교의 전교생을 맑스-레닌주의조류에 이끌어들이려고 생각하시였다. 《권태일동무는 여기 와서 이 책의 표지를 뜯소. 그리고 리동무는 복도쪽에 나가서 망을 보오. 누가 오지 않는가. 왕희동이는 분명 갔지?》 그이께서는 학생들을 돌아보며 말씀하시였다. 한 학생이 왕희동은 아까 틀림없이 퇴근했다고 대답했다. 《그럼 책가위를 뜯읍시다. 딴 가위를 씌워야 할테니까.… 가만있자. 누가 한사람은 학교 소사 있는데 갔다와야겠소. 아까 풀을 쑤라고 부탁을 했는데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군.》 《내가 갔다오지요.》 키가 큰 학생이 복도쪽으로 달려나갔다. 다른 한 학생은 복도 유리문앞에 나가 서서 학교사무실쪽을 살펴보며 망을 보았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얼른 구석쪽으로 가 책을 내려놓은 서가들을 모두 복도유리문쪽으로 옮겨놓게 하시였다. 《문을 막아야 하오. 지나다니며 들여다보지 못하게… 도서실이란것이 장마당같단말이요. 밖에서 들여다보고 안에 들어와 떠들구… 인젠 도서실을 그렇게 운영하지 않겠소. 자, 우쩍 듭시다.》 그이께서는 천장에 닿는 높은 서가의 한쪽에 어깨를 들이밀고 우쩍 드시였다. 다른 한쪽도 학생들이 들었다. 덩지 큰 서가가 기우뚱기우뚱하며 복도쪽 창문으로 다가갔다. 《자, 놓고…》 김성주동지께서는 힘을 쓰느라고 얼굴이 붉게 상기되시였다. 저편쪽 학생들은 발이 깔린다고 소리쳤다. 《드오, 발을 빼내게 드오. 옳지, 원 서가두 이렇게 육중하게 만들 필요야 어데 있겠소. 유리문도 필요없는것인데.》 《그게 다 혹뿌리의 만년지대계가 아니겠소.》 권태일이 롱조로 하는 말이였다. 그 소리에 학생들이 모두 소리를 내여 웃었다. 혹뿌리란 학교의 경리를 보는 서기였다. 그는 턱에 조그만 혹이 있어서 혹뿌리라고 부르는데 학교비품을 사들일 때에는 돈을 아끼지 않았다. 학교비품이란 후대에게 넘겨주는것인데 한가지라도 똑똑한걸 사놓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였다. 한번은 교장이 자기 의자를 수선하라고 하니까 그것은 고쳐서 딴 선생에게 주고 빙빙 돌아가는 희전의자를 사왔다. 《아니 이건, 예산이 모자라면 당신이 옷을 벗어넣겠소?》 교장은 눈이 둥그래서 물었다. 《다른 항목에걸 류용해쓰지요. 이게 다 만년지대계가 아닙니까?》 교장은 어이없어 허허 웃고말았다. 이래서 혹뿌리의 만년지대계란 말은 학생들속에서도 류행되고있었다. 김성주동지께서 학생들을 데리고 서가를 옮기고 책을 쌓으시는동안 권태일은 한쪽에 앉아서 책가위를 쫙쫙 뜯어던졌다. 어제 김성주동지께서 몰래 구입해오신 맑스ㅡ레닌주의도서가 수십권이나 된다. 《반듀링론》, 《토지문제》, 《자본론》, 《철학의 빈곤》, 《국가와 혁명》 등 서점에 있는 책들은 다 사오셨다. 《이것두 만년지대계입니다. 책을 사들이는데 돈을 아껴선 안됩니다.》 혹뿌리조차도 도서대금계산서를 보고 입을 딱 벌리는것을 권태일이 옆에서 슬쩍슬쩍 구슬려넘기였다. 《그래, 그래.》 혹뿌리서기는 돈을 세 내놓으며 신이 나서 웃었다. 이렇게 해서 사들인 도서들이다. 이것을 지금 딴 가위를 해서 씌우려는것이였다. 풀을 가지러 갔던 학생이 절절 끓는 풀그릇을 들고 뛰여들어왔다. 《거 소사가 들어다주겠다고 하는걸 겨우 뺏어들고 왔소.》 《소사는 알아두 괜찮어. 그 사람은 우리와 통했어.》 《그래?》 풀그릇을 들고온 학생은 손가락을 후후 불며 법석을 했다. 《빨리 여기다 씌울 딴 책가위들을 뜯소. 이건 뭐 이런걸 여기다 갖다놓았어?》 권태일은 옆구리를 건드리는 널장을 훌 집어던지며 혀로 웃입술을 슬쩍 핥는다. 그는 흥이 날 때엔 그런 버릇이 있다. 그래서 입술이 마치 꿀칠이나 한듯 번지르르해졌다. 《자, 이런걸 뜯어서 거기다 가위를 하시오.》 김성주동지께서 책을 골라서 던지시였다. 《장한몽》, 《긴 한숨》, 《세계박람기》 등 학생들은 그이께서 골라주시는대로 책가위들을 뜯어냈다. 권태일은 뜯어낸 책가위들을 새 책에 씌웠다. 아직 풀이 식지 않아서 그는 입술을 붕어입같이 동그랗게 만들어가지고는 후후 불면서 씌웠다. 《여, 왕희동이 온다.》 복도에서 망보던 학생이 창문가에 와서 손나팔을 해대고 소리쳤다. 《뭐, 왕희동이가? 퇴근했다더니 뭘하러 와?》 책가위를 붙이던 학생들이 모두 눈들이 커져서 일어섰다. 왕희동이한테 들키면 큰일이다. 《아니다. 아니다. 흐흐흐, 왕가가 아니라 키다리 영어선생이야. 옳지, 옳지. 학감실로 들어간다. 여긴 안온다, 흐흐흐.》 《저건 눈두 똑똑칠 못해.》 권태일이 두덜거렸다. 학생들이 모두 웃었다. 《아니, 도서실은 왜 이렇게 허물고있나? 엉?》 망을 보는 학생이 똑똑치 못하다는 소리를 듣게 되였다. 영어선생이 학감실로 들어가는것만 보고있다가 뒤에서 걸어오는 혹뿌리서기는 보지 못했다. 혹뿌리서기는 아직 채 막지 못한 복도쪽 창구로 혹이 난 턱을 들이밀고 서서 비품이라도 하나 파손시키는것 같아 그러는지 겁에 뜬 눈으로 두런두런 휘둘러보았다. 《뭐 볼게 없어요. 책을 고쳐쌓느라고 그럽니다.》 김성주동지께서 넓은 가슴을 내대고 앞을 막아서시였다. 그러고는 뒤짐진 손으로 권태일이들에게 뜯어낸 책가위들을 절대로 보이지 말라고 신호를 하시였다. 혹뿌리에게 책가위 뜯어낸것만 보였다간 결단이 난다. 맑스ㅡ레닌주의도서를 사들였다고 해서 그러는게 아니라 학교 도서의 책가위를 마구 뜯어냈다는것이 엄중한 일이기때문이다. 《모르겠다. 무슨 꿍꿍인지? 좌우간 자네가 무슨 조화있는 사람 같애.》 《조화는 무슨 조화요? 어서 비켜서십시오. 자, 그 서가를 빨리 여기 들여오시오.》 김성주동지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학생들이 서가에 어깨를 들이밀고 영차영차 소리를 질렀다. 《거 뭘 깨지는 말라구.》 《우리가 정신이 없다구 깨겠습니까?》 《그래두 아나? 덤벼치다가 무얼 부러뜨릴수두 있구 깨먹을수도 있지.》 그 소리에 학생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혹뿌리서기도 씩 웃으며 가버렸다. 한참 옮기고나니 도서실정리가 다 되였다. 복도쪽 유리문들을 큰 서가들로 막아놓으니 도서실안이 아늑하고 깊어보였다. 유리문이 달리지 않은 조그만 서가들은 안쪽으로 줄을 지어 다금다금 놓고 책들을 쌓았다. 맑스ㅡ레닌주의도서들은 구석쪽 서가에 따로 가지런히 꽂아놓았다. 《자, 나들갑시다.》 김성주동지께서는 학생들을 데리고 도서실밖으로 나오시였다. 그이께서는 출입문에 자물쇠를 잠그시고는 열쇠를 교복주머니에 넣으시였다. 《인제부터는 이 도서실에 누구나 함부로 들여놓지 않겠소. 책을 빌리고 받고 하는건 하학후에 이 창구멍으로 하구… 어떻소. 이렇게 질서를 세우는게 좋지 않겠소?》 학생들이 모두들 좋겠다고 동의했다. 그들은 학교경내에다 큰 무기창고를 하나 만들어놓은듯한 흐뭇한 마음으로 교정에 나섰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