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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불멸의 력사》 2 장편소설
천 세 봉
( 제 11 회 )
2
봄날의 밤길은 걸을수록 상쾌하다. 차광수는 양복주머니에 두손을 깊숙이 지르고 거리를 걸어갔다. 마치 떠오를락말락한 시상이라도 붙잡으려고 애쓰는 사람처럼 미간을 잔뜩 모으고 땅바닥을 굽어보면서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기였다. 창가에 어려 신비롭게 너울거리는 《삼풍잔》려관의 불빛이 등뒤에서 그를 바래주고있었다. 그는 이따금씩 걸음을 멈추고 그 불빛을 바라보군하였다. 그러면 방금전에 그 려관 안방에서 있은 잊을수 없는 회의의 정경이 눈앞에 다시금 떠오르는것이였다. 볕에 그슬리고 상혈된 홍안의 얼굴들, 그 얼굴들에 무시로 어리고 비끼는 웃음, 새별같은 눈동자들에서 한결같이 쏟아져나오는 신념의 광채, 열과 정을 담아 오손도손 주고받는 소박한 말마디들,… 그렇다. 언행도 몸가짐도 분위기도 모두 소박한 회합이였다. 화려한 웅변도 없고, 침방울을 튕기는 언행도 없고, 머리칼을 쥐여뜯는 싸움도 없는 그런 조용한 모임이였다. 여기서는 하나의 구체적인 의제를 타고 아무런 수식사도 없는 실속있는 말마디들만 순수하게 오갔을뿐이였다. 동경에서도 서울에서도 상해에서도 본적 없는 그런 성격의 독특한 모임이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조선인길림소년회와 류길학우회가 새롭게 나온 조건에서 청소년들에 대한 사상교양사업을 어떻게 벌려나가겠는가 하는 문제를 회의 의제로 제기하시였다. 그리고 이 문제와 관련된 《ㅌ.ㄷ》성원들의 견해를 청취하시였다. 좋은 의견들과 방법들이 자유롭게 교환되였다. 그이께서는 광범한 군중속에서 민족주의자들과 종파분자들이 벌리고있는 권력다툼과 파벌싸움의 본질을 폭로하고 그 해독성을 해설하는 사업을 여러가지 형식과 방법으로 벌려나가야 한다고 하시면서 특히는 선진적인 청년학생들과 대중속에 맑스ㅡ레닌주의 선진사상을 보급하는 사업을 계속 힘있게 밀고나가야 한다고 가르치시였다. 청년학생들이 합법적조직을 내온 유리한 조건에서 조직들의 역할을 높여 독서발표회, 토론회, 웅변대회, 강연회, 연예선전대활동을 활발히 조직진행하며 광범한 군중을 계몽각성시켜야 한다고 말씀하시였다. 모임에서는 청소년학생들과 대중교양에 필요한 도서관을 자체로 꾸릴데 대한 문제가 중요하게 론의되였다. 도서관을 자체로 꾸려놓으면 비밀독서회의 활동에도 유리하고 독서발표회와 토론회들을 통일적으로, 계획적으로 조직하는데도 유리하다는것이 김성주동지의 주장이였다. 그이께서는 차광수에게 도서관을 자체로 꾸릴데 대한 과업을 주시였다. 방조성원으로는 박두학, 오순희, 채경주들이 지명되였다. 차광수는 그 과업을 받은 순간부터 줄창 흥분하였다. 그는 자기를 처음으로 뚜렷하게 의식하기 시작한것이다. 지난날의 차광수는 암흑세계에서 헤매는 하나의 고독스런 티끌과도 같은 존재였다. 생명은 있으되 자양이 없고 움직임은 있으되 궤도가 없는 불쌍하고 가련한 존재였다. 그 시절에 《지도자》들이 그에게 준것이란 무지개같이 현란한 약속과 《독재》니 《결전》이니 《매장》이니 하는 과격하고 허황한 말마디들뿐이였다. 《리론가》들앞에서는 그의 존재가 한명의 청중에 불과하였고 종파쟁이들앞에서는 그의 존재가 파세확장을 위한 수자적개념에 지나지 않았다. 그를 훈계하고 미끼로 써먹으려는자들은 있어도 그의 자아를 계발시켜주고 그를 동지로 존대해주는이는 하나도 없었다. 길림은 이 구슬픈 장을 덮어버리고 그의 인생에 새로운 장을 펼쳐주었으니 그는 여기서 자기 운명을 송두리채 내맡길수 있는 진정한 삶의 품, 투쟁의 품을 찾은것이다. 그 고마운 품이 오늘밤 그에게 새 임무를 떠맡긴것이다. (이건 과업이라기보다 선물이야, 나에게 주는 《ㅌ.ㄷ》의 첫 선물이다. 한평생 내가 받은 선물가운데서도 가장 값비싼 선물, 인간으로서 조선청년으로서 내 생명이 새롭게 태여난 증표라고 할가. 나도 이제는 조선혁명이라는 신성한 유기체의 피줄속에서 그 유기체를 위해 존재하는 하나의 적혈구가 된셈이지. 도서관을 꾸린다! 아, 혁명이란 이렇게도 실천적이고 구체적인 산 활동이라는걸 이전에는 왜 미처 몰랐던가?) 차광수는 가로수잎을 뜯어 코밑에 대고 흠흠 냄새를 맡다가 대공을 향해 머리를 건뜩 젖히였다. 그러자 무엇인가 축축히 볼을 타고 흘러내리였다. 그 흐름우에서 별빛이 보석처럼 부서지였다. 그는 자기가 눈물을 흘리고있다는것을 느끼지 못하고있었다. 온밤 차광수는 도서관생각으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거처는 길림 례배당곁에 있는 정미소의 한 방을 쓰기로 예약되였다니 걱정할것이 없었다. 그런데 책장과 책은 자체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될 형편이였다. (어떻게 해결할것인가? 맨주먹밖에 없는 이 상태에서 무엇부터 어떻게 시작할것인가?) 눈을 뜨고서도 그 생각, 눈을 감고서도 오직 그 생각뿐이였다. 다음날 아침 그는 박두학이를 데리고 성밖에 있는 제재소로 향하였다. 둘이서 하루종일 일공로동을 해주고 그 값으로 서가와 책장을 만드는데 쓸 널판자들을 구해오려는것이였다. 제재소주인과의 교섭은 뜻밖에도 쉽사리 이루어졌다. 건장하고 끌끌한 두 청년의 체구에 눈독을 들인 주인은 차광수의 제의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들에게 특별한 기술은 필요치 않으나 힘은 여간 들지 않는 일거리를 맡기였다. 울타리를 따라가며 말리워놓은 톱밥을 마대에 넣어 한군데 쌓아놓는 일이였다. 둘은 온종일 그 톱밥과 씨름하였다. 주인은 보수로 스무장의 널판자를 주었다. 길이 2m정도의 이깔나무널판자들이였는데 그만하면 꽤 쓸만하였다. 그런데 방금 제재한것들이여서 퍼그나 무거웠다. 도서관이 서게 될 길림 례배당근처까지 등짐으로 져나르자면 조련치 않을것 같았다. 울며 겨자먹기로 그 원시적인 방법에 의거하는수밖에 없었다. 널 열장을 새끼줄로 짊어지고 부축을 받아 일어서니 첫 자국을 떼기도전에 땀부터 솟았다. 소득이 이렇게 푸짐하리라는것을 미리 짐작했더라면 오순희와 채경주를 데리고오는것인데 지금은 아무리 후회를 해봐야 행차뒤나발이다. 어쨌든 차광수는 박두학이를 앞세우고 제재소를 떠났다. 얼마 걷지도 않았는데 숨이 가빠나고 목에서 겨불내가 나기 시작했다. 어깨가 아프게 죄여들고 울혈로 얼굴이 부어오르는듯했다. 그래도 독립군에서 몇해동안 단련된 박두학이가 차광수보다는 훨씬 더 강기가 있어보였다. 《차동무, 힘드오?》 앞서가던 박두학이 점점 더 거칠어지는 차광수의 숨소리를 듣고 넌지시 물었다. 《뻐근하구만.》 차광수는 박두학이 롱질을 하지 못해 안달아한다는것을 알자부터 어부재기를 더 쳤다. 이런 때에는 우스개소리라도 들어야 한결 힘이 덜 들고 성수가 나는 법이다. 박두학은 또 말을 걸었다. 《우유배달이랑 신문팔이랑 했다는 사람이 어째서 그렇게 약골이요?》 《아무렴, 박서방처럼 강단이 있을수야 없지. 동무야 이러나저러나 <군자금>덕을 좀 보지 않았나. <군자금>을 털어서 개도 잡아먹고 닭도 잡아먹었을테지?》 박두학이도 한때 독립군생활을 했으니 백성의 고혈이 스민 《군자금》덕을 입었으리라는 뜻이였다. 차광수는 그가 이쯤한 롱을 해도 고까와하지 않는 성미라는것을 잘 알고있었다. 한두달사이에 둘은 벌써 그렇게 허물없는 사이가 된것이다. 박두학은 펄쩍 뛰는 시늉을 하였다. 《어랍쇼, 개도 잡아먹고 닭도 잡아먹다니, 그거야 <군자금>으로 토지를 사고 약혼식까지 차린 저 <신민부>의 마인택이나 하는 짓이지 나같은 졸자야 뭐 어림이나 있는줄 아는가.》 《모를 소리. <군자금>덕을 보지 않고야 빈농출신인 박두학이 저렇게 황소처럼 뼈마디가 굵고 살집이 부얼부얼할수가 있나말이야.》 《원참, 어머니한테서 넘겨받은 젖살도 몰라보누만.》 《젖살에는 그런 흉칙스런 여드름이 없는 법인데.》 그들은 이런 롱질을 하며 성안에 들어섰다. 해빛이 설핏한 저녁거리로 빈 마차 한대가 먼지를 날리며 덜컹덜컹 지나갔다. 그 먼지속으로 목판을 든 엿장사가 걸어갔다. 그다음은 손님도 없는 인력거들이 꼬리를 물고 뒤따랐다. 모두가 생업을 위해 죽을 기를 쓰고 달리였다. 일에 부대껴 웃음기라고는 찾아볼수 없는 얼굴들이다. 몇해전만 해도 차광수는 저런 행렬속에 끼여있었다. 그것은 생활전선이라고 불리우는 어마어마한 악몽속에서 덧없이 허우적거리는 그런 수난자들의 불행한 행렬이였다. 그러나 지금 그는 혁명의 대오속에 서있다. 비관과 절망을 모르는 투쟁의 대오, 청춘들의 대오속에 서있다. 톱밥냄새가 풍기는 등짐, 자기의 투쟁이 이런 등짐으로 첫 발자국을 떼리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차광수였다. 그러고보면 혁명이라는것은 너무나도 생활적이고 단순한것 같았다. 하지만 생활과 밀착된 단순명백한 그속에 오히려 혁명의 심오성, 복잡성이 내포되여있는지도 모른다. 혁명을 삐라, 레포, 팜프레트, 태업, 쟁의, 폭동 등 어마어마한 개념으로만 리해하려고 했던 차광수가 아니였던가. 그런데 어떻게 되여 그는 오늘 이런 개념과는 거리가 먼 날품팔이를 하게 되였던가, 널판자 몇장을 위한 일공로동이 혁명에 직결되는 일이라고 확신한데서였던가? 그렇다. 차광수는 그것이 바로 혁명을 위한 일임을 확신하였다. (혁명이란 화려한 웅변도 아니고 요란한 약속도 아니다. 말공부질만 해대는 무위도식은 더더구나 아니다. 작아도 목적이 뚜렷하고 결과가 내다보이는 일을 하나하나 실속있게 해나가는것이 바로 혁명이다. 이 진리를 내 가슴에 심어준 교사는 김성주동무이다. 나는 쌍수를 들어 이 혁명을 환영한다. 이런 혁명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희생도 마다하지 않을 각오이다.) 격렬한 상념이 그의 머리속에서 불꽃처럼 펑끗펑끗 피여올랐다. 참다. 힘들더라도 이를 악물고 걸어가자. 한걸음한걸음 쉬지 않고 자꾸 걸어가느라면 례배당곁에까지 가닿게 되겠지. 차광수는 끙하고 안깐힘을 쓰며 짐을 추슬러올리였다. 그러자 어깨를 파고들던 오른쪽 새끼줄이 그만 뭉청 끊어졌다. 널판자들은 한쪽끝을 땅바닥에 대고 볼성사납게 기울어졌다. 나머지 새끼줄마저 풀어던지고 짐을 내려놓았다. 박두학이도 짐을 내려놓았다. 《십리도 못가서 발탈이 난다더니 우린 몇리만인가?》 그는 눈을 꺼벅거리며 또 지분거리였다. 《겨우 300m지.》 차광수도 롱조로 대꾸하였다. 박두학이 그렇게 때없이 시까슬러대는것이 싫지 않았다. 《첫 시작부터 그렇게 주춤거려가지고서야 독립봉, 해방봉까지 가대겠소?》 《부지런히 걷느라면 가대겠지.》 《맥은 빠지고, 배는 고프고, 새끼줄은 끊어지고… 그러니 이제는 어쩐다?》 《무슨 수가 있겠지.》 차광수는 두손을 옆구리에 올리고 한참동안 주위를 둘러보았다. 눈앞으로는 또 한대의 인력거가 느릿느릿 다가오고있었다. 빈 인력거였다. 그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박두학이를 돌아보며 씽긋 웃었다. 그리고는 손을 쳐들고 한발쯤 앞에 나서서 그 인력거를 멈춰세웠다. 소매끝을 팔꿈치아래까지 뭉청 잘라던진 허름한 마고자차림의 인력거군은 의혹 절반, 기대 절반의 눈길로 그를 쳐다보았다. 인력거를 타기에는 너무나도 애젊고 끌끌한 청년이라는데서 오는 의혹이요, 생활에는 그 의혹을 무시해버릴만큼 절박하고 돌발적인 사정도 있을수 있다는데서 오는 기대였다. 《어서 타시우다.》 그의 입에서 석쉼한 소리가 회파람처럼 새여나왔다. 차광수는 미소를 지었다. 《아닙니다. 타자고 그러는게 아닙니다. 한가지 청을 드릴게 있어서 그럽니다.》 《무슨 청인지?》 차광수는 얼른 대답을 못하고 땅바닥에 가려져있는 널판자묶음을 향해 시선을 던지였다. 눈동자는 어째서인지 초점을 잃고 불안스럽게 떨었다. 《령감님, 이런 청을 드려서 실례가 되겠는지 모르겠는데… 이 널판자들을 좀 실어주실수 없겠습니까?》 한참만에 그가 말했다. 로인은 눈을 크게 흡떴다. 《널판자라니? 사람이 타고다니는 인력거에다가 널판대기를 싣는단말이요?》 몹시 언짢은 말투였다. 인력거군은 자기의 생업과 자기의 로동도구와 자기자신에 대한 심한 모욕을 느낀것이다. 그러나 차광수는 그냥 웃고있었다. 《공짜로 싣자는건 아닙니다. 돈은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끌기는 제가 끌겠습니다. 그러니 령감님은 그저 인력거를 빌려주는셈이 됩니다.》 인력거군은 미타한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내 체면이 어떻게 되겠소. 사람들이 나를 보고 뭐라고 손가락질하겠소? 돈을 벌어도 더럽게 번다고 침을 뱉지 않겠소?》 《침은 무슨 침입니까. 모두들 제살궁리를 하느라고 바삐 돌아치는데 그런걸 상관할 경황이 있겠습니까.》 《사람타는데 널판자를 싣는다고 흉을 볼거요.》 《흉을 볼테면 보라지요. 돈 한푼이 아까와서 바들바들 떠는 부자놈들을 태우기보다는 그래도 이 널판대기들을 싣고 가는게 더 마음편할겁니다. 령감님, 그렇지 않습니까?》 로인은 말을 못하고 인력거채를 든채 길앞쪽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차광수의 말에서 울린 진리가 그의 마음을 움직여놓은것 같았다. 그는 몹시 점직스러워하면서 젊은이들에게 인력거를 내맡기였다. 사실은 로인도 손해를 볼것은 없었다. 사람을 태우고 품삯을 받으나 널을 싣고 품삯을 받으나 그에게는 매일반이였다. 오히려 널을 실으면 부자놈들을 태우고 다닐 때마다 맛보군하는 모멸감은 면할수 있었다. 차광수는 승객들이 팔을 얹게 되여있는 인력거의 좌우 량턱을 지지점으로 삼고 널판자들을 실었다. 그옆에 박두학의 널장들도 나란히 실었다. 에라, 부자놈들이 쓰는 인력거를 혁명에 쓰면 못쓴다더냐. 혁명을 위해서 필요하다면 하느님한테라도 등짐을 지우자꾸나. 이것이 차광수의 배짱이였다. 길림에 온 다음부터 그는 배짱이 더 커졌다. 오랜 방황생활에서 축적된 울분과 몸부림이 그런 배짱으로 변신된것 같았다. 둘은 인력거의 끌대를 엇바꿔 끌면서 유쾌하게 걸어갔다. 그들의 괴이한 행색은 길을 가던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 눈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다 그들을 돌아보았다. 부자놈들은 금시 따귀라도 후려칠듯한 눈초리로, 보통행객들은 리해와 지지와 공감의 눈길로… 《저것보오, 저놈이 우릴 노려보는걸.》 인력거옆에서 홀개몸으로 걸어가던 박두학이 문득 차광수의 옆구리를 툭 다치며 길 왼편을 손짓해보이였다. 다부산자를 입고 은테안경을 낀 중년의 돈냥이나 있는듯한 사나이가 길가에서 그들을 쏘아보고있었다. 차광수는 그쪽을 흘깃 돌아보고나서 코웃음을 가볍게 쳤다. 《나으리들이 타고다니는 인력거를 모독한다는거겠지.》 박두학은 갑자기 정색해지며 입속말로 중얼거리였다. 《정말 우리가 도를 넘은게 아닐가?》 《도를 넘다니, 그건 무슨 소리요? 우리가 뭐 못실을 물건짝이라도 실었소? 두엄이나 쓰레기나 구정물이라도 실었나말이요?》 《사람이 타는 인력거에 널장을 실은걸 처음 보니 좀 별나서 그러오. 인력거력사에 이런 일이 언제 또 있었겠소?》 《혁명, 그 자체가 낡은것을 두드려부시고 새것을 창조하는 거창한 위업인데 그런 혁명을 하느라면 무슨 일인들 없겠소. 원래 사람이 사람을 끌고다닌다는 자체가 언어도단이란말이요. 하나는 타고 하나는 끌고… 게다가 타는 놈팽이들은 하나같이 돈많은 부자라… 불평등 불평등 해도 세상에 이같이 더러운 불평등이 어데 있나말이요. 이따위 물건짝은 오그랑박죽으로 만들어서 시궁창에 처넣어도 무방하오.》 《차동무, 인력거가 없어진다구 부자놈들이 우리처럼 걸어다닐줄 아오? 마차도 없고 가마도 없고 달구지도 없고 인력거도 없으면 그놈들은 가난뱅이들의 등에 업혀다닐거요. 그렇게 해서라도 호강을 하자고 할거요. 령감님, 안그렇습니까?》 박두학은 뒤에서 따라오는 늙은 인력거군을 향해 눈을 꺼벅거리였다. 인력거군은 동감이라는듯이 빙그레 웃었다. 《젊은이 말이 옳지. 부자가 있는 한 인력거는 없애지 못할거요.》 《그런 결국은…》 차광수는 인력거를 멈춰세우고 한동안 땅바닥을 굽어보다가 주먹을 허공에 불쑥 쳐들어올리며 말을 이었다. 《혁명을 해서 부자놈들을 없애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는구만. 하하하.》 《허허허.》 둘은 마주보며 유쾌하게 껄껄거리였다. 별치 않게 시작을 뗀 인력거이야기가 혁명에 대한 이야기로 끝을 맺었으니 모든 화제들이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어쩌면 이렇게도 신통히 혁명론으로 번질가 하는 랑만에 찬 웃음이였다. 그사이에 일행은 한마장쯤 되는 거리를 지나갔다. 번잡하고 소란스러운 상업가에 들어서자 인력거군은 무엇때문엔지 안정을 못하고 경계하듯 부산스레 주위를 살피였다. 그는 허둥지둥 달려와 인력거의 끌대를 무작정 그러잡았다. 차광수는 걸음을 멈추고 불안에 떠는 로인의 눈을 쳐다보았다. 《로인님, 왜 그러십니까? 이제는 짐을 내려놓으랍니까?》 《네, 안됐소만 그렇게 해주시오. 저 길녘에 우리 주인장네 집이 있는데 그 사람 눈에 띄우면 야단이요. 만사가 끝장이지요.》 《알겠습니다. 로인님의 밥줄을 떨구게 해서야 안되지요. 여기까지 실어다주신것만 해도 감사합니다.》 차광수는 주머니에서 엽전 다섯잎을 꺼내가지고 인력거군앞에 내밀었다. 그러자 인력거군은 그의 손을 황황히 밀막았다. 모욕이라도 당한듯이 얼굴을 붉히며 성난 어조로 말했다. 《천한 일을 하는 늙은이라고 사람을 너무 더럽게 보지 마시우. 나두 경우가 있는 늙은이요.》 《천하게 봐서 그러는게 아닙니다. 너무 고마와서 그러는겁니다. 덕은 덕으로 갚으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내 돈이 아무리 발라두 그런 돈은 받지 않겠소. 젊은이들이 나를 불쌍히 여기고 동정해주었으니 나는 그 마음을 돈으로 알고 가겠소.》 로인은 두 청년이 널묶음을 다 부리우자 이런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거 정말 마음이 비단같은 령감인데!》 늙은이의 뒤모습을 지켜보던 박두학이 입안의 소리로 중얼거리였다. 《옷은 허름해도 속은 진주보석이요! 개같은놈들이 저런 진주보석에다가 채찍을 댄단말이야.》 차광수는 감명에 겨워 로인을 칭찬하다가 그 누구인가를 욕질하였다. 부자일반을 두고 뇌이는 욕설인것 같았다. 그사이에 박두학은 짐질 차비를 하였다. 짐바밑에 팔을 꿰고 차광수더러 도움을 청하였다. 《이것 보. 차동무, 여기 와서 이 손을 좀 잡아당겨주오.》 《아니, 날 버리고 혼자 갈 작정이요?》 《내가 가서 <지원병>들을 모집해올테니 차동문 여기서 기다려주오.》 《허, 이것봐라. 자기는 영웅이 되고 난 락오자가 되라는거지. 그렇게는 안될걸.》 차광수는 박두학의 청대로 그를 일으켜세워준 다음 자기의 짐을 손질하였다. 널 열잎을 새끼로 비끄러매여 끙 하고 메였다. 그러나 그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술취한 사람처럼 비칠거리였다. 《차동무, 안되겠소. 아무래도 <지원병>들의 도움을 받아야 되겠소.》 그의 등뒤에서 난데없이 울린 목소리였다. 그 목소리에 이어 깔깔거리는 처녀들의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차광수는 널묶음을 멘채 천천히 뒤로 돌아섰다. 김성주동지께서 경주, 오순희들과 함께 눈앞에 서계시였다. 《수고들 하누만. 빨리 온다는게 그만 길이 엇갈려서 늦었소.》 그이께서 또다시 하시는 말씀이다. 그이의 바른손은 벌써 차광수의 짐으로 뻗어올라 멜끈을 거머잡는다. 《내가 메고 갈테니 그 손을 놓소.》 차광수는 손을 놓지 않았다. 두다리의 균형도 잡지 못하던 몸에서 다 스러진줄 알았던 힘이 되살아오르는것을 느끼며 손에 힘을 꽉 주었다. 《괜찮소. 내가 메고가겠소.》 《이리 넘기라는데… 제재소까지 갔다가 여기로 찾아온 동무들의 성의를 생각해서라도 고생을 나누어야지.》 《그럼 절반절반씩 나누어 메기요.》 차광수는 절충안을 내놓았다. 결국은 그 절충안이 모두의 동의를 얻어 차광수와 박두학은 동무들에게 짐을 절반씩 덜어주었다. 일행은 조용조용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상업가를 걸어갔다. 짐이 가벼워지니 마음도 가벼워졌다. 《차동무, 수고했소. 동무들의 덕으로 훌륭한 도서관이 서게 됐소.》 김성주동지께서 차광수를 향해 말씀하시였다. 《듣자니 온종일 허리가 꼬부라들게 품을 팔았다더구만.》 《수고는 사실 저 박두학이 도맡아한거나 다름없소. 저 엉큼한 친구가 글쎄 제재소주인을 떡반죽처럼 흐물흐물하게 만들어놓더란말이요. 그 우스개때문에 나도 배가 끊어질번했소.》 차광수는 박두학이 제재소주인앞에서 하던 우스개소리를 몇마디 흉내내였다. 그바람에 폭소가 터졌다. 김성주동지께서도 웃으시였다. 《박두학의 우스개야 원래 화성의숙때부터 유명했지. 하여튼 우리한테는 그 입이 보배요.》 그이께서는 말씀을 끊고 광주리장사들이 진을 치고 앉아있는 길녘에서 느닷없이 걸음을 멈추시였다. 고추자루를 앞에 놓고 행객들을 살펴보던 젊은 아낙네가 반색을 하며 그이를 쳐다보았다. 《어서 사시라요. 조선고추예요.》 녀인이 없는 수선을 떨며 간청하는 말이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입가에 미소를 짓고 고추자루옆에 놓여있는 책을 굽어보시였다. 《공산당선언》이였다. 《아주머니, 나는 고추가루보다 그 책에 더 마음이 끌리는구만요.》 그이께서는 널장을 멘채 키를 낮추고 《공산당선언》을 집어드시였다. 그닥 헌책은 아닌데 뒤부분이 서너장 떨어져나갔다. 고추를 담아파는통에 그 불멸의 저작이 그런 졸경을 치른것 같았다. 류실된 부분을 복사해넣으면 새로 꾸리게 될 도서관의 서가에 당당히 꽂힐수 있을것 같았다. 《<춘향전>이나요, <홍길동전>이나요?》 녀인은 포장지의 구실을 하고있는 얄팍한 그 책자를 시답지 않게 눈질하며 흥심없이 물었다. 글도 모르는 알짜 무식쟁이인 모양이였다. 《전책은 아닙니다. <공산당선언>이라구… 아주 좋은 책이지요. 아주머니, 이 책을 저한테 팔아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럼 난 고추를 어데다 싸서 팔겠나요?》 《아, 정말 그렇군요. 그러면 내가 다른 종이를 대신으로 드리지요.》 《글쎄 그러문야…》 《얼른 뛰여갔다오지요.》 김성주동지께서는 녀인앞에 널장들을 내려놓고 근처에 있는 가게방으로 바삐 뛰여가시였다. 주머니의 돈을 깡그리 털어 백로지 다섯장을 사시였다. 어머님께서 보내주신 10원가운데서 학용품을 사고 남은 돈이였다. 새 신발을 사려고 아꼈던것인데 결국은 《공산당선언》과 바꾸게 된셈이다. 《내 돈으로 살걸 그랬구만.》 손에 돈을 쥐고 뒤늦게 따라온 차광수가 아쉬운 표정으로 그이를 바라보았다. 《원 별소리, 차광수의 돈이면 어떻고 김성주의 돈이면 어떻소. 우리한테야 네것 내것이 따로 있소. 두었다가 감기에 걸리거든 아스피린이나 사서 먹소.》 《혁명을 하느라면 감기에 걸릴새나 있겠소. 이 돈으로는 <일보전진 이보퇴각>이나 사겠소.》 때국이 흐르는 책자대신 깨끗한 백로지를 다섯장이나 받아든 고추가루장사는 뜻밖의 횡재에 감동되여 《공산당선언》을 얼른 내드렸다. 책은 김성주동지의 손을 거쳐 즉석에서 차광수의 손으로 넘어갔다. 《옜소. 이 순간부터 광수동무의 재산이요. 도서관이 꾸려지면 거기에 비치하는게 좋겠소.》 《고맙소!》 차광수는 주머니에 책을 질러넣고 묵묵히 앞으로 발걸음을 옮기였다. 그는 다섯발자국앞에서 걸어가는 김성주동지의 모습을 목메인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파란 많은 이 시대의 암흑속을 헤치며 조선의 청신한 넋들을 광명으로 선도해가시는 그이의 모습이 한가득 눈에 안겨오는것이였다. 그 영상을 따라 최창걸이 가고 박두학이 가고 채경이와 순희가 가고 경주며, 김리갑이며, 계영춘이며, 권태일이며, 최봉이며, 기준이들이 가고 차광수 자기가 가고있는것이다. 권심이도 가고있는것이다. 미구에는 《ㅌ.ㄷ》의 산아들뿐아니라 온 조선이 그이를 따라서게 될것이다. 나는 이것을 확신한다. (아 아, 김혁아!) 차광수는 먼곳에 있는 벗의 이름을 속으로 불러보았다. 파리찌가 다닥다닥한 서울의 어느 뒤골방에서 《황성옛터》를 부르며 기타를 뜯던 열혈시인 김혁, 리별의 술을 마실 때 《조선아, 사랑하는 한반도야! 너를 구원할 영걸은 과연 이 세상에 없다더냐?》고 부르짖던 김혁! 애수에 젖어 꿈결에서도 자주 그려보던 그 정다운 벗의 이름을 불러보느라니 가슴속에서는 저절로 시가 울리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내 친구야, 기뻐해다오. 이 세계의 혼돈속을 표류하던 내 넋은 드디여 닻을 내리고 항구에 정박하였다. 그것은 휴식을 위한 정박도 아니고 다음 표류의 준비를 위한 정박도 아니다. 나는 내가 그처럼 그리던 동경의 《나라》, 리상의 《나라》를 마침내 찾은것이다. 그 《나라》에는 당년 열여섯살의 청년지도자 김성주가 있고 조선을 구원할 그의 리념이 있고, 그 리념이 낳은 열매 《ㅌ.ㄷ》가 있다. 파쟁과 질시를 모르고 무럭무럭 자라오르는 새형의 청년공산주의자들이 있다. 그들의 활동방식은 인민들속으로 들어가는것이며 그들의 신념은 2천만의 총동원으로 조국광복을 이룩하자는것이다. 그들의 생활을 지배하고있는 기본륜리는 우정과 단결이다. 우정과 단결은 그네들의 존재방식이다. 아니, 그네들이 아니라 우리들의 존재방식이다. 내가 감히 우리들이라고 말하는것은 어제날의 방랑청년 차광수도 《ㅌ.ㄷ》의 기수가 되였기때문이다. 《우리들》이라는 이 개념속에 너를 포함시킬수 없는것이 참으로 서운하구나. 그러나 그것은 시간문제라고 생각한다. 부언하여 강조하지만 우정과 단결은 《ㅌ.ㄷ》의 초석이다. 이 초석으로 우리는 자기의 지도자를 따르고 동지들과 단합하고있다. 한마디로 말하여 여기에는 혁명의 리상향이 건설되고있다. 이 리상향의 주인은 김성주이다. 나는 그의 지도밑에서 지난날 내가 잃어버렸던 힘과 정열과 시간과 눈물까지를 고스란히 보상받고있다. 김혁아, 조국이 없으면 시가 없고 시가 없으면 못산다며 가슴을 두드리던 나의 막역지우야! 이런 리상향에 와있으니 네 생각이 더 간절해진다. 너도 이제는 그 지겨운 방랑생활을 끝내고 여기로, 김성주동무의 곁으로 달려오너라. 여기에 와서 새세계의 시를 맘껏 읊조리거라. 영탄과 애수를 자아내는 눈물의 시가 아니라 사람들의 심장에 불을 달아주는 우정의 노래, 단결의 노래, 투쟁의 노래를 부르려무나.) 차광수는 마음속으로 그냥 김혁을 부르며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였다. 그날밤 그는 김혁에게 보내는 장문의 편지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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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은 낮차로 길림에 도착하였다. 책과 원고지를 잔뜩 다져넣어 어방없이 무거운 커다란 트렁크를 손에 든 김혁은 려객들로 붐비는 역구내에 내려섰다. 상해에서 그려본 표상하고는 달리 길림 역시 사람들천지였다. 그런 속에서도 김혁은 사람사태를 헤치면서 차광수의 얼굴을 찾아 한참 두리번거리였다. 낯선고장에 오니 무엇보다 그리워지는게 차광수였다. 그가 역전에 마중나올수야 없지. 김혁은 섭섭한 표정을 짓고 머리를 흔들었다. 김혁은 상해에서 차광수한테 자기의 출발을 알리는 전보를 쳤었다. 그러나 도착날자는 오늘이 아니라 래일이다. 한시바삐 길림에 오고싶었던 김혁은 예정날자보다 하루 앞당겨 부랴부랴 상해를 떠난것이였다. 그러니 차광수가 마중나올수 없는것이다. 차광수의 편지는 김혁을 여기 길림으로 무섭게 유혹하였다. 밤낮없이 술상에 마주앉아 인생과 세월을 한탄하던 김혁에게 있어서 상해 역시 캄캄한 시궁창이였다. 서울에서와 마찬가지로 상해에서도 젊은 시인은 술을 자주 마시였다. 절망이 고개를 쳐들 때마다 그는 그 절망이 몰아오는 영탄과 울분을 술로 달래였다. 하루에도 몇차례씩 김혁의 마음속에서는 몸에 불을 달고 네거리에 뛰쳐나가 썩어빠진 이 세상을 절규하던가 폭탄이 되여 저주로운 이 시대의 부정의를 폭파해버리고싶은 단말마적인 충동을 느끼였다. 며칠전만 해도 그는 이런 심경에 잠겨있었다. 《림정》이 있고 《흥사단》이 있고 피스톨을 찬 좌익정객들이 장발을 날리며 뻗닿게 출몰하는 이 도시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동경시절부터 애타게 그려온 참다운 인생의 방향타를 주지 못하였다. 그런데 천만뜻밖에도 눈앞을 환히 열어주는 차광수의 편지가 날아들었던것이다. 김혁은 봄날의 누기가 을씨년스럽게 감도는 어둑시그레한 숙소의 뙤창밑에서 한잔술을 앞에 놓고 목을 추기며 울적하게 기타를 뜯다가 그 편지를 받았다. 그는 편지를 세번 연거퍼 읽고나서 기쁜나머지 중화식당에 뛰여가 주머니에 남아있는 부스럭돈으로 짜장면을 두그릇이나 사서 먹었다. 그리고는 새 대륙이라도 찾아가는것 같은 심정으로 길림행 렬차에 몸을 실었다. 김혁은 인총이 바글거리는 역전으로 나왔다. 봄날의 서기에 휩싸인 아름다운 채색구름이 뜬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마의 땀을 훔치던 김혁은 문득 눈앞이 어질어질하고 다리가 휘청거리는것을 느끼였다. 그제서야 김혁은 상해에서 기차에 오른 이후로는 내내 음식을 들지 않았다는것을 알았다. 뭘 좀 먹어야겠는걸. 이러다가는 차광수를 만나지도 못한채 쓰러지겠군. 이 무거운 트렁크는 어떻게 메고간다? 김혁은 주머니를 뒤졌다. 김혁은 서글프게 손에 쥔 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것은 기타를 팔아 로자를 하고 남은 마지막 돈이였다. 그것을 털어서 만두 다섯개를 사든 김혁이 요기를 하려고 트렁크우에 앉을 때였다. 인력거군이 다가왔다. 해빛을 받아서 노랗게 병색을 한 머리며 턱수염에 서리가 앉기 시작한 중년이 훨씬 지난 인력거군이 김혁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부터 하였다. 《선생님, 제가 모셔다드리지요.》 뒤따라 인력거뒤에서 눈에 류달리 영채가 도는 더벅머리 총각애가 불쑥 머리를 내밀고 김혁에게 머리를 굽석거렸다. 그 애의 눈은 김혁이 무릎우에 올려놓고있는 그 만두에 온통 쏠리고있었다. 《나같이 젊은놈이 인력거를 타면 벌을 받습니다.》 김혁은 더벅머리 총각애한테 웃음을 보냈다. 《예… 그럼 트렁크라도…》 인력거군의 순박하고 어진 눈엔 간절한 호소와 기대가 담겨져있었다. 총각애는 말만 떨어지면 그 트렁크를 냉큼 들고 갈 자세였다. 김혁이 일없다고 하자 인력거군은 섭섭한 기색으로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분명 아버지인 인력거군의 뒤를 따르다 말고 그 총각애는 다시한번 김혁을 돌아보았는데 이번에도 그 애의 관심은 그 만두에 있는것 같았다. 김혁은 본의아니게 그들의 청을 들어주지 못했다. 그래서 인력거군은 삯전을 벌수 있는 기회를 놓쳤다. 김혁이 그것을 느끼였지만 할수 없었다. 설사 인력거우에 올라앉는다 해도 삯전을 치를 돈이 없었다. 《얘, 이리 오너라.》 김혁은 저만큼 멀어져간 그 총각애를 불러세우고 손짓을 하였다. 그리고 총각애한테 들고있던 만두 다섯개를 고스란히 넘겨주었다. 그 애의 얼굴에 피여나는 기쁨의 미소를 들여다보며 김혁은 가슴 미여지는 아픔을 느끼였다. 인력거군과 그 총각애가 역전앞 가로수밑 의자에 나란히 앉아 만두를 나누는 모습을 얼핏 스쳐보며 김혁은 트렁크를 들었다. 차광수가 써보낸 주소를 찾아 번잡한 거리를 더듬는 김혁의 눈앞에 그 인력거군과 총각애의 모습이 얼른거리였다. 그것은 여기 길림에서 받게 된 첫인상때문인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책방거리에서 김혁이가 차광수를 만난것은 얼마후의 일이였다. 하숙집으로 오던 차광수가 책방앞에서 어슬렁거리는 김혁을 알아보고 달려온것이였다. 전보를 받고 이제나저제나 하고 김혁의 도착을 기다리던 차광수는 달려가서 김혁을 얼싸안았다. 《왔구만, 김혁이!》 《아, 차광수!》 《래일 온다고 전보를 쳤던데 이렇게 불쑥 나타났군.》 차광수는 김혁의 손을 잡고 연방 흔들었다. 《그렇게 되였네. 일각이 삼추같아서 하루라도 앞당겨오고싶었지.》 김혁의 눈에는 문득 감격의 눈물이 핑 고이였다. 《반갑네 김혁, 상해에서 헤여질적에는 영 리별인가 했더니… 그래 편지를 받은 즉시로 상해를 떠났나?》 《물론이지. 자네의 편지를 읽고나니 더는 상해에 있고싶은 마음이 없어지더군. 그래 자네가 그렇게 큰 열정을 가지고 편지로 소개한 김성주동무는 잘 있나?》 김혁은 사람들이 들락날락하는 책방을 둘러보며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길거리가 아니라 조용한 숙소에서 로독을 풀며 진지하게 나누려던 화제인데 자기도 모르게 불쑥 입밖에 내였다. 상해에서부터 줄곧 자라고자라온 그 어떤 갈망이 차광수를 만나자 용수철처럼 튕겨오른것이다. 옹근 열페지도 넘는 장문의 편지에서 차광수는 전에없이 섬세하고 자상한 필치로 김성주동지를 소개하였는데 그 구절구절에서 풍기는 커다란 긍지와 자부가 김혁의 심장을 뒤흔들어놓았던것이다. 《물론 잘 있지. 자네에 대한 관심이 여간 아닐세. 내가 장참 김혁이 이야기만 했으니까. 자네가 시문학을 한다는것까지 다 알고있지. 그만큼 자네 경력을 손금보듯 꿰들고있네. 내가 처음으로 자네이야기를 한날 밤에는 잠을 못이루더군. 우리 혁명이 시재를 요구하는 때인데 그런 아까운 동무가 갈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다니 될말인가고 하면서 안타까와하질 않겠나. 아마 자네가 길림에 도착했다는걸 알면 한달음에 뛰여올거야. 지금 농촌조직을 지도하느라고 교외에 나가있네.》 차광수는 눈을 빛내이며 하늘 저쪽 멀리를 바라보았다. 김혁은 아무런 불안도 번뇌도 없는 그의 눈빛을 부러운 마음으로 쳐다보았다. 전에는 그의 눈에 그런 안정이 깃든적이 한번도 없었다. 그 눈을 지배한것은 날이 갈수록 심신을 깊이 좀먹어들어가는 애수였고 고뇌였고 회의였었다. 그런데 다섯달도 못되는 길림생활이 그 침울한 표정을 흔적도 없이 지워버린것이다. 마치도 헐망한 람루를 걸쳤던 사람이 하루밤사이에 새옷을 지어입은것 같은 인상이다. 김혁이 고주망태가 되여 상해의 료정에서 조선의 혼을 부르며 꺼이꺼이 울고있을 때 차광수는 길림이라는 신천지에서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고있었던것이다. (참, 조화는 조환걸!) 김혁은 초면의 길손이라도 대하듯 서름서름한 표정으로 차광수를 곁눈질해보더니 흐뭇이 웃으면서 트렁크를 집어들었다. 차광수가 얼른 그 트렁크를 앗아쥐였다. 차광수는 트렁크를 들고 앞서 걸으면서 김혁을 자꾸 돌아보았다. 김혁은 영문을 몰라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렇게 자꾸 쳐다보나? 내 차림새가 길림의 류행에 어울리지 않아서 그러나?》 《아닐세. 류행과는 상관 없네. 우리가 언제 뭐 류행의 비위를 맞추면서 지낸적이 있었나? 자네 차림새가 너무 간편해서 그러네.》 《나라를 잃은 망국청년의 주제에 트렁크 하나면 족하지 않을가.》 《그렇지만 김혁이야 다르지. 김혁의 려장이 이렇게 단출할수야 있나. 자넨 나보다도 늘 한가지를 더 어깨에 메고 다녔는데… 가만 있자. 그게 뭔지 이제야 생각나는군. 이것보라구. 자네 늘 가지고 다니던 그 기타는 어떻게 했나? 혹시 차칸에 둬두고 내린게 아닌가?》 김혁은 쓸쓸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닐세. 그 기타는 상해를 떠나면서 팔아버렸네. 팔아서 로자를 마련했지.》 차광수는 아쉬운 표정을 그리며 입을 다시였다. 《김혁이답지 않군. 그 아까운 기물을 팔아버리다니! 로자가 없으면 양복저고리라도 벗어서 팔것이지. 그거야 자네 몸의 한부분처럼 애지중지하던 기타가 아닌가.》 《뭐 그렇게까지 아쉬워할건 없네. 나는 지금까지의 고답적인 생활, 방향상실의 과거와 결별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기타를 팔아버렸네. 그 여섯가락의 현에서 애처롭게 떨며 울리던 감상적인 선률을 회상하는것만도 이제는 지긋지긋하거든.》 《그러니 음악과는 결별이란말인가?》 《그렇다고 말할수도 있지. 이제부터는 음악이 아니라 혁명을 해야지.》 《에끼, 사람두.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나?》 차광수는 김혁의 어깨를 철썩 두드리고나서 타이르듯이 말했다. 《친구, 음악도 결국은 혁명이야. 시와 음악은 자네의 우상이 아닌가. 길림의 친구들이 자네의 시와 음악에 대해서 얼마나 큰 기대를 품고있는지 자네 아나? 자네가 시도 쓰고 작곡도 한다는걸 알고 김성주동무는 여간 흥분하지 않았댔네. 거듭 말하지만 혁명은 자네와 같은 시재를 요구하고있단말일세. 에이참, 기타를 떼놓고서야 무슨 김혁인가.》 그는 늙은이들처럼 끌끌 혀를 차면서 시적시적 앞으로 발을 옮겼다. 김혁은 같은 보폭으로 잠자코 차광수를 따라갔다. 길림에 도착하고보니 기타를 괜히 팔아버렸다는 후회가 없지 않았다. 수천리밖에 살붙이를 떼두고 온것처럼 마음이 허전하고 애잡짤한것도 사실이였다. 하지만 새로운 세계의 대문에 들어선 기쁨이 그 모든 자질구레한 감정들을 눌러버리였다. 물건이란 있다가도 없어지고 없다가도 생긴다. 지금은 비록 내 피천 한푼없는 알거렁뱅이지만 철퇴같은 이 두주먹으로 장차 기타야 다시 못마련하랴 하는것이 그의 배심이였다. 《이것보게 광수, 길림친구들도 음악을 좋아하나?》 김혁은 새세계의 뙤창을 두드리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차광수는 활기를 띠였다. 《암, 좋아하다뿐이겠나. 좋아해두 이만저만 좋아하지 않지. 길림의 청년들과 노래는 서로 뗄래야 뗄수 없는 혼연일체야.》 《좋은 노래가 많나?》 《있기는 있는데 많지는 못해. 앞으로 자꾸 만들어내야지.》 《누가 만드나?》 《누군 누구야. 김혁이지. 차광수가 뭐 괜히 김혁이를 기다린줄 아는가. 그런데두 자넨 기타를 덜컥 팔아버리구 왔거든.》 《그 기타소린 그만큼 하라구.》 김혁은 자기도 모르게 이마를 찡그리였다. 차광수의 말을 들을수록 세월의 풍운을 함께 헤치고 온 그 애용품을 공연히 팔아버렸다는 후회가 가슴을 알찌근하게 했지만 이제는 할수 없었다. (에이, 내가 큰 실책을 범했거든. 큰 실책을 범했어.) 김혁의 허기진 모습을 알아본 차광수는 음식점에 들려 우동으로 대충 요기를 하게 한다음 그길로 곧장 권심이 하숙하고있는 집으로 향하였다. 차광수도 지금껏 그 집에서 동거살이를 하고있는터였다. 고장난 자물쇠를 문에다 걸어놓고 권심은 어데론지 외출하고 없었다. 차광수는 책더미들로 포위되여있는 방 아래목에 얄팍한 이불을 펴주면서 김혁이더러 자기가 돌아올 때까지 로독이나 풀라고 말한 다음 총총히 밖으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기 바쁘게 김혁은 인차 잠에 곯아떨어졌다. 한평생 고민과 심뇌로 설치고 밀렸던 잠을 마치 반나절사이에 죄다 봉창하려는 사람과도 같이 그처럼 늘어지게 잤다. 잠에서 깨여나니 방은 텅 비여있었다. 차광수는 보이지 않고 그가 사다놓은것 같은 사이다 두병이 머리맡에 놓여있었다. 김혁은 그중 한병의 마개를 따서 목을 추긴 다음 시원한 공기를 쐬우려고 마당으로 나갔다. 주인집의 괘종이 넉점을 두드렸다. (아, 벌써 오후 네시로군. 그러니 내가 세시간동안이나 잠을 잤나.)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 마당은 반나마 그늘에 덮여있었다. 대기는 정오보다 한결 더 신선하고 상쾌하였다. 《차선생이 어데 가지 말고 기다리라고 하시던데요.》 귀가 밝은 하숙집 녀주인이 마당에서 울리는 김혁의 발자국소리를 듣자 문을 열고 웃으면서 귀띔하였다. 칭칭 감기는것 같은 말투도 말투지만 그 웃음이 아주 미묘하였다. 차광수가 아마 단단히 붙잡아두라고 신칙을 한 모양이다. 《그 친군 늘 나를 붙잡아두지 못해 애를 쓰지요.》 김혁은 이런 말로 녀주인을 어리둥절하게 만든 다음 씽긋 웃으면서 마당을 나섰다. 정말이지 그는 한자리에 가만히 붙박혀있는 성미가 아니다. 새고장에 도착한지도 세시간이 넘었는데 거리를 돌아보지 않고서야 무슨 김혁인가. 길림의 중심부를 밟아보고 새로 사귄 친구들을 만나 새고장에 대한 인상을 피력한다면 이이상 더 멋들어진 일이 어디 있겠는가. 가능하면 길림도착기념으로 즉흥시도 읊을수 있을것이다. 우정에 충실한 차광수를 위해 즉흥시 한수쯤 지어 읊는것도 나쁘지는 않을것이다. 이거야말로 시인이 할수 있는 노릇이다. 김혁은 인도를 따라 느릿느릿 걸음을 옮기였다. 길림은 예상했던것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번창한 도시였다. 도시를 두쪽으로 가르며 흐르는 송화강도 그의 애수와 탄식을 받아들이던 황포강보다는 한결 더 청신하고 유연해보이였다. 마차들이 채찍소리를 울리며 부산스럽게 거리를 달리였다. 무슨 일이 있는지 큰 잡화상점앞에 사람들이 가뜩 모여 서있다. 학생들, 시민들, 멜대에 짐을 달아메고 걸어가던 장정도 짐을 내려놓고 발돋움하며 사람들 머리너머를 넘겨다본다. 김혁은 호기심이 동하여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키작은 중학생의 학생모와 마고자를 입은 장정의 어깨팍사이로 노란수염이 다부룩하게 자란 인력거군의 모습이 보이였다. 분명 역전에서 만났던 그 인력거군이였다. 먼저와는 다르게 얼굴이 땀투성이였다. 그가 무얼 이야기하고있기에 모두들 이렇게 걸음을 멈추고 구경을 하고있을가? 잡화궤짝들이 쌓여있는 상점앞엔 고역의 기구인 인력거가 서있고 그옆에 총각애가 겁에 질려 서있었다. 인력거군은 방금 인력거에서 내린듯싶은 신사에게 허리를 굽신거리며 애걸하였다. 《나으리, 그저 적선하는셈치고 몇푼만 더 놓으십시오.》 말가죽같이 굳어진 손바닥에는 신사가 던져준듯싶은 돈이 두어잎 놓여있다. 《뭐? 적선을 해? 내가 인력거군한테 적선을 안하면 죽어서 무슨 징벌이라도 받을줄 아느냐? 도적놈같으니라구…》 시계줄을 늘이고 금테안경까지 건 신사인데 돈 몇푼때문에 인력거군에게 쌍욕을 퍼붓고있다. 《나으리, 정거장에서 여기가 어디입니까? 나한테 자식새끼들만 없다면 전 나으릴 그저 태워다드리기라도 하겠습니다. 어서 두푼만 더 놓아주십시오.》 김혁은 가슴이 뭉클했다. 인력거군의 말이 너무도 가긍했다. 인력거를 타고왔으면 왜 삯이 될만한 돈을 주지 못하는가! 저 불쌍한 사람이 몸을 가릴만한 옷도 입지 못하고 무엇때문에 인력거를 끌고 숨이 턱에 닿도록 뛰여왔겠는가? 저 신사의 양복주머니에 인력거삯을 제대로 줄 돈이 없단말인가! 야박스러운놈, 저 기름이 유들유들한 상판… 누가 저놈의 상판대기를 갈겨주지 못할가. 신사는 종시 삯전을 주지 않고 몸을 빼려고 단장을 옮겨짚었다. 《나으리, 삼민주의를 생각해서라도 한푼 더 주십시오.》 인력거군은 바싹 달라붙어 신사의 옷자락을 잡아쥐였다. 《이놈! 넌 삼민주의만 알고 오권헌법은 모르느냐? 에끼, 이 도적놈…》 신사는 잡힌 외투자락을 홱 나꿔채며 단장을 들어올리였다. 김혁은 치가 떨리였다. 그는 불쌍한 인력거군의 편역을 들어 신사에게 저항해나서려고 주먹을 부르쥐였다. 이 순간 웬 학생이 뛰여들어가며 신사의 쳐들린 팔목을 거머쥐였다. 《이게 무슨 짓이요? 왜 사람을 치오? 인력거를 타고왔으면 삯을 제대로 줄일이지. 그래 누가 도적놈이요?》 키가 후리후리한 학생은 광채가 이글거리는 두눈으로 신사를 노려보았다. 신사는 학생이 팔목을 거머쥐는바람에 한발 비척하며 안경속에서 두눈이 커져 학생을 마주보았다. 《학생은 웬 참견이요?》 《잔말 말고 이분에게 삯전이나 제대로 주시오. 여보십시오, 얼마쯤 더 받으면 삯이 되겠습니까?》 학생은 인력거군을 돌아보며 물었다. 이 순간 김혁은 학생의 얼굴에 사람을 제압하는 름름한 기상이 어려있는것을 보았다. 《그저 두잎만 더 주면 정거장에서 여기까지 보통 받는 삯전은 됩니다.》 인력거군은 황이 든것 같은 누런 얼굴을 들고 학생을 바라보며 말했다. 《삯전을 더 치르시오. 당신은 인력거우에 앉아서 건들건들 호강을 하며 왔지만 이분은 이렇게 등판이 째진 누데기를 걸치고 구슬땀을 흘리면서 당신을 끌고왔소. 삯전을 받기 위한 일이 아니라면 이분이 무엇때문에 그런 고역을 겪겠소.》 신사는 파르무레하게 수염자리가 있는 턱을 가늘게 떨며 말을 못했다. 그러자 주위에 서있던 사람들속에서 신사를 닦아세우는 소리가 들려나왔다. 《빨리 내오. 도적놈은 삯을 제대로 안내겠다는 당신이 도적놈이요. 삯을 안냈다간 당신이 이 자리에서 당장 변을 만나리라는걸 아시오.》 군중이 웅성거리자 신사는 마주선 학생의 엄엄한 눈길을 흘끔흘끔 쳐다보며 종시 단장의 꼬부라진 손잡이를 팔에 걸고 보석반지가 번쩍거리는 손으로 양복안주머니에서 돈지갑을 꺼냈다. 돈을 받아쥔 인력거군은 돈을 준 신사에게가 아니라 학생에게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고마울게 있습니까? 정거장에서 여기까지라면 아직도 받을만큼 다 받았다고 말할수 없습니다. 세상은 바로 이렇게 공평치 못합니다. 그러기때문에 절대로 비굴하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인력거에 태워다주었으면 당당하게 삯을 내라고 할일이지 무엇때문에 손을 내밀고 빕니까? 인젠 절대로 그렇게 살지 마십시오.》 학생은 상점뒤로 달아나는 신사를 쏘아보며 말했다. 인력거군은 그저 고맙다고 허리를 굽석거렸다. 학생은 아무 말없이 사람들속을 빠져나와 거리로 걸어갔다. 김혁은 속이 시원했다. 무엇인가 분하고 답답하던것을 확 열어준것 같았다. 걸어가는 학생이 얼마나 돋보이고 친근하게 느껴지는지 몰랐다. 그 학생은 주먹이 아니라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신사를 눌러놓고 놈한테서 채 주지 않는 돈을 받아내게 하였다. 그 이글거리는 눈에서 내뿜기던 범상치 않은 광채가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다. (어떤 학생일가?) 주위사람들도 웅성거리며 끓었다. 김혁은 학생의 뒤모습을 그냥 지켜보다가 법정학교빠찌를 단 청년에게 물었다. 《어느 학교 학생인가요?》 《낯은 익은데 잘 모르겠습니다. 육문중학 학생같은데… 여하튼 길림시내 학생이 분명합니다.》 그의 목소리에서는 자랑과 기쁨이 넘쳐흘렀다.
그날저녁이였다. 책을 보시던 김성주동지께서 하숙마당에 나와 잠시 산보를 하고계시는데 언덕길아래에서 차광수가 안경알을 번뜩이며 웬 낯모를 청년과 함께 걸어오는 모습이 바라보였다. 키는 차광수와 어슷비슷한데 얼굴이 강파르고 기품이 의젓한것이 생면부지의 낯모를 청년이다. 그는 열변을 토하듯 손세까지 써가며 이야기하는 차광수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김성주동지의 눈길은 왜 그런지 그 초면의 청년한테서 떨어지지 않았다. 가슴을 후드드 뛰게 하는 행복한 예감이 번개처럼 그이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저 사람이 혹시 차광수가 동경고학시절에 가깝게 지냈다던 김혁이라는 그 청년시인이 아닐가? 김혁이같은 사람이 길림의 활무대에 나타난다면 우리의 운동은 얼마나 더 즐겁고 신바람이 날것인가. 두주일전에 차광수가 상해에 전보도 치고 편지도 보냈다니 지금쯤은 그가 길림에 나타날만도 하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마당가에 서서 언덕으로 올라오는 그들일행을 바라보시였다. 그러는 그이의 모습을 먼저 눈에 띄워본 차광수가 그이한테로 총총히 걸어왔다. 《성주동무, 김혁이가 왔소!》 성급한 걸음걸이나 흥분된 얼굴표정과는 달리 그는 뜻밖에도 이 말을 조용히 하였다. 그리 크지는 않으나 리지로 빛나는 강파른 얼굴이 김성주동지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보통키, 활달하고 박력있는 걸음걸이, 얄팍하나 무게있게 다물린 입술, 그 입술을 스치고 지나가는 이른봄날의 들꽃과도 같이 수수하고 따뜻한 미소, 그리 크지는 않으나 정열이 불꽃처럼 반짝거리는 눈동자… 그 모든 특징들은 순식간에 김성주동지의 마음을 사로잡고 놓지 않았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김혁에게로 한걸음 마주 걸어가시였다. 《이렇게 만나니 반갑습니다.》 김혁은 자기의 눈을 의심하였다. 분명 그 학생이였다. 인력거군을 돕던 그 름름한 기상에 대바르던 청년의 모습이 한가슴에 안겨왔다. 바로 그 학생이 김성주동무다. 일격에 솟구치는 기쁨과 감격에 목이 메여 김혁은 말했다. 《김혁이올시다.》 김혁은 김성주동지의 손을 두손으로 꽉 틀어잡았다. 《이렇게 만나고보니 초면같질 않습니다.》 《사실 초면은 아닙니다. 나는 이미 성주동무를 봤댔습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시였다. 《아까 길림시내를 돌아보자고 저 친구 몰래 슬그머니 거리에 나갔더랬는데 성주동무가 인력거를 타고와서도 돈을 제대로 물지 않는 신사놈을 호되게 질책하는것을 보았습니다.》 《그렇습니까?》 김성주동지께서는 호탕하게 웃으시였다. 그러고보면 김혁이가 초면이 아니란 말도 빈말은 아니였다. 김혁은 웃음을 거두며 진정을 담아 말하였다. 《몹시 만나고싶었습니다.》 《나도 무척 기다렸습니다. 어쨌든 김혁동무, 이 순간부터는 나를 친구처럼 대해주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자, 차동무, 어서 들어갑시다. 또 한명의 동지가 우리를 찾아왔는데 상봉기념으로 뭐든지 대접해야 할게 아니요.》 김성주동지께서는 김혁이와 차광수를 량옆에 세우고 인차 하숙으로 들어가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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