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서《불멸의 력사》 2

        장편소설

 

 

                                     천  세  봉  

 

( 제 9 회 )

 

2

 

이튿날은 일요일이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아침 일찌기 권심을 찾아가시였다. 어제밤 소년회창립회의에 권심을 나와달라고 초청을 하시였는데 그가 나오지 않아서 몹시 궁금한 생각이 드시였다. 권심이 서재속에만 파묻혀있는 사람이라고 하기에 그를 실천투쟁속으로 이끌어내시려는 생각도 있었고 또 그가 적극적으로 나서만 준다면 혁명투쟁에서 한모를 막을수도 있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도 하시였다. 그래서 권심이에게 기대를 가지고 초청하셨는데 그는 회의에 얼굴을 내밀지 않았다.

김성주동지께서 권심의 집을 찾아가시니 그는 아직 조반전인것 같은데 책상앞에 앉아서 무언가를 쓰고있었다.

《무얼 그렇게 열심히 쓰십니까?》

《아, 참 잘 오셨소. 내 그러지 않아도 론문을 가지고 찾아가려던참이였소. 어서 앉소.》

《무슨 론문입니까?》

《신문에 련재해볼가 하는건데 우선 성주동무가 좀 읽어주오. 인젠 다 썼소. 참 글이라는게 어렵구만.》

권심은 무척 흥분해있었다. 우묵한 눈언저리에 속눈섭이 침끝처럼 뻗쳐있다. 재털이에서는 피우다가 놓은 담배가 실같은 연기를 피워올린다. 권심은 잠간동안 원고뭉치를 들어서 툭툭 그루를 박았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잠시 방안을 둘러보시였다. 이틀전까지 고열과 싸우던 차광수가 보이지 않는것이 이상스러웠다. 식전일텐데 어디로 나갔을가? 며칠동안 노상 아래목에 펴놓고있던 무명솜이불이 방구석에 개여져있는것을 보면 독감에 시달리던 그가 깨끗이 병을 털고 일어난 모양이다. 옳바른 운동선을 찾아 길림으로 천방지축 달려온 열혈의 차광수를 위해서는 참으로 기쁘고 다행스러운 일이였다. 그래, 일어나야지. 일어나서 빨리 길림의 파도에 뛰여들어야지. 그이께서는 사상도 건실하고 학식도 높고 인품도 좋은 차광수에게 커다란 기대를 걸고계셨다. 그가 방금 닻을 올리고 기슭을 떠난 우리 혁명의 한 익측을 믿음직하게 감당할수 있다고 생각하시였다.

《차광수동무는 어데 갔습니까?》

김성주동지께서 물으시였다.

《방금전에 채경이가 와서 데리고 갔소. 오누이가 그 사람을 위해서 일부러 조반을 마련한 모양이더군.》

권심은 이렇게 대답하고나서 만년필을 들고 원고의 맨 마지막문장을 뻑뻑 지워버리였다.

《병은 다 나은것 같습니까?》

《열은 내렸는데 상기 기침이 안떨어졌더구만. 글씨가 란잡해서 원고는 아무래도 내가 읽어야 할것 같소. 들은다음 좋은 의견을 주오.》

《듣기는 하겠는데 너무 기대를 크게 가지지 않으시는게 좋겠습니다.》

《원 겸손두 분수가 있지.》

권심은 류창한 목소리로 원고를 읽기 시작했다.

론문은 《조선로동운동개관》이란 제목을 가지고 씌여졌는데 1920년대전반기 조선로동운동을 개괄하였다.

ㅡ부르죠아지는 자체를 사멸케 할 무기를 단련하였을뿐만아니라 그는 그 무기를 가지고 자기와 교전할 사람들까지, 현대의 로동자들 즉 프로레타리아까지도 산출한다.ㅡ

《공산당선언》에서 끌어온 이 정의를 부제로 한 론문은 3.l운동이후 부산로동자들의 총파업에서부터 시작하여 각지에서 폭발된 파업을 전부 개괄하면서 동맹파업의 《직업별 년차비교표》, 《인원별 년차비교표》 같은 통계수자까지도 밝히였다. 그러면서 조선로동계급의 이와 같은 자각적진출은 자본을 증식하는 자본계급이 모든 리익을 롱단하기때문에 프로레타리아트가 피눈물을 뿌리면서 죽음의 항구로 몰려들어가지 않으면 안되게 된데 그 원인이 있다고 분석을 내리고있다.

조선로동계급은 대부분이 농촌에서 흘러나와 그 진지가 형성되였다. 자본가들은 농촌에서 밀려나오는 로력을 로동력가치이하의 헐값으로 살수 있게 되였다. 그래서 로동시간은 길고 임금은 적다. 식료품 및 방직 공업에서의 로동시간은 평균 12시간이상이다. 광산로동자들은 더욱 참혹한 상태에 빠져있다. 하루 12시간이상 지하로동을 강요당하며 로동안전대책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탓으로 중경상을 당하거나 사망하는 비률이 해와 달을 따라 늘어가고있다. 이렇게 극악한 로동조건과 참을수 없는 긴 로동시간, 그리고 최저의 생활비도 안되는 극도의 낮은 임금은 자본가들에게 막대한 초과리윤을 짜낼수 있게 하고있다. 특히 지금 조선의 공업은 령세공업이 우세를 차지하고있는데 이 령세공업이 수입상품과 대항하며 큰 공장과 경쟁을 해서 리윤을 얻자면 그 원천은 역시 로동자들을 더욱더 가혹하게 비틀어짜는 방법밖에는 없다.

론문은 여러 공장에서 벌어진 자본가들의 착취와 횡포한 행동을 실례로 들었다. 평양양말공장에서 벌어진 실례는 심금을 울리는 문장으로 씌여졌다.

평양양말공장에서는 양말직조기계를 직공더러 월부로 사라고 강요한다. 월부로 사면 이 기계가 직공의 기계로 되는가? 아니다. 사도 자기의것이 못되게 만드는 흑막이 있다. 이 흑막은 건드리기만 하면 《신성불가침》의 창검이 나와서 목을 치고 가슴을 찌른다. 그러니 그 녀공들이 자기 소유로도 못만드는 기계를 사라고 해도 응할수밖에 없다. 이렇게 되니 몇십전의 임금중에서 기계대, 수선비, 제품이 불합격되면 그 원료대 변상, 무슨 후생비, 위생비를 다 제하고나면 호구지책을 마련할 방도가 어데 있겠는가.

길거리에 방황하는 아가씨들의 운명이 어떻게 될것인가!…

결국 이렇기때문에 조선로동계급은 자기의 생존을 위해서 투쟁에로 나서지 않을수 없게 되였다. 이러한 로동대중을 투쟁에로 급격히 추동한것이 10월혁명의 영향과 맑스ㅡ레닌주의사상의 영향이다. 이 영향과 새 사상은 지하로 스며들어가 로동대중에게 진리를 속삭여주기 시작했고 로동대중이 눈을 뜨고 자기 주위와 사회를 고쳐 인식하게 만들었으며 자기라는 존재를 고쳐 깨닫게 하였다.

이러한 각성은 그들로 하여금 서로 어깨를 겯게 만들어 각지에서 로동조합들이 생겨나고 이것이 로동자들의 단합된 의식과 사상으로(분산성은 아직 면하지 못하였으나) 자본의 성벽에 구멍을 뚫기 시작하였다. 결국 외래자본의 급진적침투는 조선로동계급의 진지를 형성시키였고 자본주의에 대항할 무기를 벼리게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현재의 로동운동의 양상을 랭철한 눈으로 관찰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앞으로 전진하기 위해서 이 운동에서 약점과 결함을 찾으며 이 모든것을 교훈으로 하여야 하겠기때문이다. 조선로동운동은 아직 요람기에 있다. 그렇기때문에 모든 파업들이 국부적이고 개별적인 형태로 나타나며 드디여는 피투성이가 되여 물러앉군한다. 이러한 분산적이며 개별적인 양상은 다른 나라 로동운동에서도 찾아볼수 있는 로동운동 일반이 가지고있는 쓴 경험이다.

권심은 외국로동운동경험을 몇개 들었다. 그러면서 그는 조선로동운동이 발전하려면 통일적인 지향을 가지고 전일적운동으로 되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자기의 론문을 결속하면서 《혁명은 력사의 기관차》라는 맑스의 명제를 인용하고 1920년대전반기의 조선로동운동은 이랬거나저랬거나 새 력사의 려명을 장식한 드높은 발구름소리라고 썼다.

론문을 읽고난 권심은 원고묶음을 들어 그루를 박았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벽에 기대앉았던 자세를 바로하시였다.

《의견을 좀 말해주오.》

권심은 담배갑을 끌어다가 한대 붙여물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권심의 손가락들이 가늘게 떨리는것을 보시였다.

《어서 말해주오. 의견을 들어야 시원하겠소.》

《좀 연구를 해야지 즉석에서 무슨 말씀을 드리겠습니까?》

김성주동지께서는 되도록 오늘은 말씀을 하지 않을 작정을 하시였다. 쇠약한 몸으로 정열을 부어 써낸 장문의 론문을 즉석에서 옳다 그르다 말하기가 난처하시였다. 그럴뿐만아니라 론문이 매우 교조적인데 빠져있기때문에 그것을 한두마디 말로써 납득시켜낼수 있을것 같지 못하시였다.

《연구는 무슨 연구겠소? 느낀대로 말을 해주오.》

김성주동지께서 주저하시자 권심은 더 적극적으로 의견을 내놓아달라고 요청했다. 그이께서는 하는수없이 의견을 말씀하시였다.

《조선로동운동을 성실하고 진지하게 개괄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내 생각에는 조선로동계급의 특수성을 좀더 명백하게 밝혔으면 좋을것 같습니다.》

《조선로동계급의 특수성을?》

《네, 조선로동계급이 다른 나라 로동계급과 다른 특수성을 좀 더 두드러지게 밝혀야 좋을것 같습니다. 론문에 약간 이야기되긴 했습니다만 조선로동계급이 급진적으로 진출하는것은 계급적인 자각에 의해서만 그렇게 되는것이 아니라 민족적자각에 의해서도 그렇게 된다고 봅니다. 조선의 경제명맥을 일제가 틀어쥔 조건하에서 조선로동자들은 침략자의 략탈과 자본계급의 착취를 동시에 당하고있는것입니다. 때문에 로동계급의 급진적진출을 두 측면이 자극하고있다는 사실을 좀더 명확하게 강조해야 할것 같습니다.》

권심은 얼굴빛이 약간 파릿해졌다.

《그다음 내 의견은 조선의 경제를 철저히 식민지적경제라는 각도에서 분석했으면 좋을것 같습니다. 그래서 조선의 경제<장성>이라는것이 어떤 자본주의적자유경쟁에 의해서 진행되는것이 아니라 일제의 침략적 군국주의적략탈계획에 의해서 <장성>하고있다는것을 깊이있게 밝혀야 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말하자면 하나에서 열까지 조선자원의 략탈과 로동력의 략탈의 결과로 이루어지고있다는것을 말입니다.》

권심은 여전히 낯빛이 파릿해서 들었다. 그러나 그는 김성주동지께서 또 주저하며 망설이는 빛을 보이시자 말씀을 더 계속해달라고 보채였다.

《피곤하실텐데 내가 말을 길게 해서 되겠습니까?》

《일없소. 조금도 피곤하지 않으니 계속해서 말해주오.》

《그럼 내 의견을 그저 참작해서 들어주기 바랍니다.》

하고 김성주동지께서 말씀을 이으시였다.

《그다음 내가 보건댄 론문이 보다 많이 경제적분석 일면에 치우친 감을 줍니다. 물론 임금문제, 로동시간문제, 자본가가 짜먹는 초과리윤문제를 말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그러나 론문의 립각점은 철저히 정치적인데 발을 붙이고 경제투쟁이 추구하는 목적을 좀더 뚜렷이 서술하는데 힘을 넣어야 되겠다고 봅니다. 이건 무슨 말인가 하면 이야기가 반복되는것 같습니다만 조선로동계급이 처한 특성과 그 투쟁대상의 특성을 구체적으로 밝히면서 로동운동의 지향점과 방도를 명백히 가르쳐주었으면 좋겠다는 말입니다.》

《가만 좀 있소. 난 그 조선로동계급의 특성을 지나치게 내세우면 필연적으로 조선로동운동이 다른 나라 로동운동과 다르다는 결론에 떨어지게 될것인데 그것은 아무래도 잘 모르겠소. 론문에도 명백히 씌여진바와 같이 나는 조선의 로동운동을 이러저러한 리유때문에 다른 나라, 이를테면 맑스가 머리속에 두었던 그런 나라의 로동운동과 구별해야 된다고는 생각되지 않소. 내 생각에는 조선로동운동도 자본가를 타도하는것외에는 그 무엇도 그들의 앞에 딴것을 내놓아서는 안된다고 보는것이요.》

《바로 그 립각점, 그 견해가 잘못된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것이 리론을 실정에 맞지 않게 통채로 옮겨놓는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러기때문에 요전날 중도반단이 된 연설에서도 그런 좌경을 범하게 되는것입니다.》

《아니 그건 무슨 말이요?》

《내 일전에도 피뜩 그런 뜻을 비친적이 있습니다만 확실히 그날밤 연설에서도 조선혁명의 실정과는 맞지 않는 극단적인 말씀을 하셨다고 봅니다. 민족문제를 그렇게 허무적으로 풀어선 안될줄 압니다. 조선혁명은 민족해방과 계급해방이 밀착된 혁명이라고 보아야 옳을것입니다. 민족해방문제가 아주 중요하고 또 그것이 선차적으로 나서는 과업인데 민족문제를 그저 계급적모순의 한측면으로만 보아서야 되겠습니까? 그랬기때문에 공산주의는 계급투쟁만 알고 민족은 모른다는 반항이 나오는것입니다. 이 론문과 그 연설은 다같이 맑스ㅡ레닌주의를 우리의 혁명실정에 맞게 소화하지 못한 결함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 혁명의 실정에 맞게 맑스ㅡ레닌주의를 소화해서 받아들여야 우리는 우리 혁명을 어떻게 해나가겠다는 방침도 세울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기때문에 우리는 추상화된 로동계급이라는 개념으로 조선로동계급을 생각할수 없습니다. 바로 조선땅에서 조선혁명을 하고있는것만큼 우리의 특수성을 념두에 두고 조선로동계급을 생각하고 조선로동운동을 생각해야 됩니다. 바로 그래서 우리는 리론을 전개하는 경우에도 자기 머리로 자기 현실을 들여다보고 자기 혁명에 맞는 리론을 전개해야 할줄 압니다. 우리에게야 혁명과 실천을 위한 리론이 필요하지 리론을 위한 리론이야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나는 요즈음 이런 문제에 대해서 자주 생각하군합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조선혁명의 주인이다, 그러기때문에 이 립각점에 튼튼히 서서 모든것을 생각하고 행동해야 되겠다, 이런 충동을 무시로 느끼군합니다. 사유에서도 주인이 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는 글을 쓰는 일도 그렇고 모든 일을 옳게 할수가 없다고 봅니다. 이 말은 물론 이 론문을 두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충분히 료량해 들어주십시오.》

권심은 말이 없었다. 담배불을 끄더니 또 한대 붙여물었다.

《너무 흥분하지 말고 좀더 시간을 두고 생각해보는게 좋겠습니다.》

《좀 머리를 식혀가며 연구해보겠소. 문제가 너무도 심각하니만치 나는 이 자리에서 론전을 펴려고 생각하지 않소.》

《그렇게 하는것이 좋을듯싶습니다.》

권심은 자꾸 담배연기를 뿜었다. 담배를 쥔 손이 가늘게 떨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언제든 권심이 이런 진통을 겪지 않고는 옳은 립장에 설수 없다는 생각을 하시며 차라리 오늘 말씀을 꺼낸김에 솔직히 이야기를 잘해주었다고 생각하시였다.

결국 이렇게 되여 그이께서는 권심에게 어제밤 회의에 왜 나오지 않았느냐는 말씀도 못하시고 후일 다시 찾을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서시였다.

김성주동지께서 돌아가신후 권심은 몹시 괴로왔다. 무엇인가 밑둥이 뒤흔들린것 같이 온 정신이 휘청거렸다. 혁명에서 주인의 립장, 사유에서 주인의 립장, 확실히 진리의 섬광이 번뜩이는 말이다. 문제가 심각해서 즉석에서 론전을 펼수 없다고 했으나 그것보다도 말이 막혀, 아니 머리를 수그리지 않으면 안될 진리가 있는것 같아 론전을 펼수가 없었던것이였다.

권심은 원고묶음을 끌어당겨 벌컥벌컥 넘기며 내용을 훑어보기도 했다. 글을 쓰거나 말을 하거나 늘 무엇인가 앞에 막힌것이 있는것 같았고 다달으지 못한 높이가 있는것 같았는데 차츰 그것이 무엇인지 명백해지는듯싶있다. 자기 리론에서 근본문제를 풀수 있는 기본고리를 찾은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그는 후들거리는 손으로 손수건을 꺼내여 이마를 문질렀다.

권심이네 집에서 나오신 김성주동지께서는 하남가의 번화한 거리를 걸어가다가 우연히 김찬을 만나시였다.

김찬은 몹시 반가와했다. 그는 큰 손으로 그이의 손을 쥐고 격하게 흔들어댔다.

《어데로 가는길이요?》

《네, 서점엘 좀 가보자구 나왔습니다.》

《역시 공부에 열중이군. 난 지금 송화강가에 산보를 나갔다 오는길이요. 서점엔 좀 이따가 가구 우리 하숙엘 가기요. 월파선생도 와있소. 맑스주의백과사전인 월파 조청산선생말이요. 내 월파선생한데도 어제밤 회장동무의 연설이야기를 했소. 그러니까 선생도 아주 기뻐하면서 한번 만나보고싶다지 않겠소. 그 선생은 이미 강남공원연설에 대한 소문도 듣고 회장동무를 몹시 만나보고싶어하더군.》

김찬은 이런 소리를 하면서 김성주동지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부득이 김찬을 따라 걸으시였다.

벽돌담장밑을 한참 걸어서 국수집뒤를 돌아들어가면 거기에 김찬의 하숙이 있었다. 마당으로 들어서는데 《소월파》 조창진이 웬 안경낀 학생과 함께 걸어나왔다. 그는 김성주동지를 보더니 몹시 반가와했다. 김성주동지께선 손을 내밀어 두 학생과 악수를 하시였다.

《회장동지, 어제밤엔 참 수고많았소.》

조창진의 말이였다.

《수고가 무슨 수고겠소?》

김성주동지께서 조창진이와 말씀을 하시는데 김찬이 조창진이들에게 왜 벌써들 가느냐고 물었다.

《판플레트를 하나 빌려가지고 갑니다.》

《그건 좋은 일이야, 많이 읽어야 하네.》

김찬은 뾰족한 단화 한컬레가 놓여있는 토방으로 올라섰다. 김성주동지께서도 따라 올라서시였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검은 양복조끼 앞자락에 시계줄을 드리운 사람이 책상앞에 앉아서 열심히 글을 쓰고있었다. 얼른 치떠보는, 코밑수염이 감실감실한 얼굴이 중병을 앓고난 사람같이 핼쑥했다.

《월파선생, 우리가 이야기하던 회장동무입니다.》

김찬은 방안에 들어서기 바쁘게 김성주동지를 월파에게 소개했다.

《아, 그런가요? 그러지 않아도 한번 만나보았으면 했는데 참 잘 왔소.》

월파는 일어서서 김성주동지와 악수를 했다.

격정적으로 손을 잡고 힘있게 흔들었다.

《앉소. 방은 너저분하지만… 우리 프로레타리아트의 생활이란 이렇소.》

월파는 책상앞에 도로 앉으며 담배갑을 끌어당겨갔다. 몸이 여위기는 했으나 생기가 발랄하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월파와 김찬이 권하는대로 방아래목에 들어가 앉아 좌우를 한번 살펴보시였다. 이구석저구석 책이 많았다. 한쪽에는 신문도 가뜩 쌓여있었다.

《인제 사회발전사는 다 됐소. 사적소유의 발생에 대해서 설명하는것이 역시 힘드는군.》

월파는 이때까지 써놓은 원고를 간종그렸다.

지금 김찬이나 월파는 저들의 앞을 열기 위해서 밤잠을 자지 않고 뛰였다.

《고려공청》과의 무서운 대립, 이것이 지금 그들앞에 막혀있는 큰 암초라고 말할수 있었다. 그들은 어떻게 하든지 이 암초를 물리쳐없애고 만주에서의 일체 사회주의세력을 《조선공산당만주총국》산하에 집결하며 그 령도권을 장악하려고 획책했다. 그것을 위해 가는곳마다 목에 피줄을 세우며 기염을 올렸다. 그들은 만주에서 령도권만 장악하면 서울 당내에서 무너지기 시작한 자기네 화요계의 세력을 복구할수 있다고 보았다. 아니 그렇게만 되면 조선공산주의운동의 본거지를 만주땅으로 옮겨올수 있다고도 생각했다. 그들의 눈앞에는 구름봉우리같은 꿈이 솟아있었다. 그들은 지금 간도에서 열릴 지방《야체이까》책임자들의 강습회에서 어떻게 하면 자파의 영향력을 확대할수 있을가 하는 문제를 토론하면서 월파가 강의안을 만드는중이였다.

《사회주의혁명이란 한마디로 말해서 천재를 요구하는 운동이요. 맑스ㅡ레닌주의리론을 통달한다는것은 그야말로 어려운 일이요. 그런데 내 어제밤 회장동무가 연설하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소. 인제 조창진군도 연설을 들었다고 하면서 찬사가 이만저만 아니였소. 조창진군은 내 제자이고 머리가 명석한 맑스주의학도요.》

월파는 원고를 책상 한쪽에 밀어놓고 돌아앉아서 담배연기를 뿜으며 말했다. 몹시 들까부는 사람이라는것이 첫눈에 알려진다. 사실 그는 여러해전 조창진이네가 살고있던 동해바다가 어느 어촌에서 사립학교 교원노릇을 한 일이 있었다. 그때 그를 가르쳤기때문에 자기 제자라고 떠드는것이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당장 열을 띠고 들까부는 이 사람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나 해서 잠간 미간이 오그라붙은것 같은 그의 얼굴을 바라보시였다.

《연설이 시종 진지하고 사람들의 심장을 틀어잡고 놓지 않았다는것은 대단히 좋은 일이요. 그런데 내 이야기를 듣고 한가지 모를게 있어서 지난 밤새 김찬동무와도 론쟁을 했소. 김찬동무의 말이 일제의 강점으로 인해서 로동자, 농민은 말할것도 없고 중소상공업자 지어는 민족자본가들도 고통을 당하고있다.… 이러니까 억압받고 학대받는 사람들은 물론 뭉칠수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단결하여야 한다.… 이렇게 론리가 전개되였다고 하는데 난 아무래도 그럴수 없다고 우기질 않았겠소. 어떻게 사회주의혁명을 부르짖으면서 민족부르죠아지와 단결할것을 주장할수 있겠는가? 부르죠아지야말로 사회주의혁명의 대상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어떻게 그 학생이 그런 리론상 착오를 범할수 있었겠는가. 내 주장은 이것이였소. 그런데 김찬동무는 회장동무가 틀림없이 그렇게 말했다는거요. 어제밤에만 말한것이 아니라 지난해여름 화전에서도 꼭같은 내용의 말을 했다는거요. 때때로 통감하는바이지만 이런 리론투쟁은 참으로 피곤하오. 도대체 누구의 무슨 주장을 론박하는지도 모르고 밤새 싸웠다니까. 하하하…》

월파는 웃었다. 김성주동지께서도 웃으며 대답하시였다.

《그거야 조선의 사회주의자들은 혁명의 현단계에서 일제와 싸우기 위해 매판자본가가 아닌 민족부르죠아지와도 단결할수 있고 또 단결해야 한다는 나의 주장을 론박한것이겠지요. 김찬선생이 나의 말을 비교적 정확하게 전달한것 같습니다.》

《아니, 그럼 그게 사실이란말이요? 그렇다면 그건 맑스ㅡ레닌주의립장이 아닐뿐만아니라 형식론리에도 맞지 않는단말이요. 사회주의혁명의 대상인 민족부르죠아지와 단결하는것을 어떻게 사회주의혁명이라고 할수 있겠소?》

월파는 펄쩍 뛰다싶이 놀래였다. 그는 담배연기를 뿜으며 긴장해서 그이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나는 지금 현단계에서 당장 사회주의혁명을 하자는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무엇을 주장하는거요? 도대체 회장동무가 맑스ㅡ레닌주의자라는 말이 옳기는 옳소?》

《나는 공산주의자입니다. 그러나 나는 현단계에서 조선혁명의 과업은 당장 사회주의혁명을 수행하는것이 아니라 일본제국주의를 내몰고 그와 야합한 봉건지주와 매판자본가, 친일파, 민족반역자들을 두드려엎는것이라고 봅니다. 그러니 덮어놓고 유산계급일반을 다 반대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흐음ㅡ 이를테면 부르죠아민주주의혁명이란말이군.》

월파는 떨리는 손으로 담배불을 껐다. 끄고나서 담배갑에서 또 한대 뽑아들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월파와 오래 이야기할 필요가 없을것 같다고 생각하시였다. 그래서 말씀의 아퀴를 짓고 얼른 일어서려는 생각을 하시였다.

《내가 현단계에서 반제국주의적, 반봉건적 혁명을 수행해야 한다고 보는것은 나의 주관적욕망이 아니라 일제에 의해 강점되고 봉건적인 사회경제관계를 가지고있는 우리 나라의 객관적현실이 그것을 요구하고있기때문입니다. 그런데 나는 이 혁명에서 로동계급과 공산주의자들이 부르죠아지들에게 령도권을 빼앗길것이 아니라 그것을 더욱 튼튼히 틀어쥐고 로동계급의 령도적역할을 제고시켜야 한다고 보는것입니다.》

《도대체 그것은 누구의 로선이요? 그 리론적근거가 어디 있소? 나는 어느 고전에서도 그런것은 본 일이 없소.》

《그것은 내가 생각하는것입니다. 그 리론적근거는 맑스ㅡ레닌주의이지요. 월파선생이 고전에서 그런것을 보지 못했다고 하는것은 있을수 있는 일입니다. 고전가들은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것과 같은 이런 식민지반봉건사회를 념두에 두고 리론을 만들어내지는 않았으니까요. 그렇기때문에 조선혁명을 하고있는 우리는 맑스ㅡ레닌주의의 일반적원리를 우리 조선혁명에 맞게 창조적으로 적용하여 우리 혁명의 리론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봅니다.》

《음, 이건 모를 일인데, 모를 리론이야…》

월파는 머리를 흔들며 혼자소리로 중얼거렸다.

아까부터 그의 거동을 랭소하는것 같은 표정으로 바라보던 김찬이 한마디 끼여들었다.

《월파선생! 인젠 선생도 세상에 맑스주의를 아는 사람이 선생외에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수 있다는 아량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월파 조청산은 김찬의 야유에 더욱 낯빛이 변했으나 말은 하지 않았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그들 두사람이 이 문제를 가지고 밤새 론의하였다는것과 그리고 월파가 그 누구든 리론으로써는 능히 휘여잡아낼수 있다고 장담했었다는것이 짐작되시였다.

방안의 공기는 어색해졌다. 김찬이 침묵을 깨뜨리며 또 한마디 했다.

《불쾌하게 생각할것은 없소. 앞으로 우리한테 자주 들려주오. 련계를 가지잔말이요.》

《불쾌하게 생각할것이 있습니까? 그런데 나는 학생이기때문에 두분을 자주 찾아올 형편은 못될것 같습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이런 사람들과는 어울릴 필요가 없다고 여기고 잘라서 말씀하시였다.

김찬의 하숙에서 나오신 김성주동지께서는 큰 거리로 걸어가며 은근히 긴숨을 내쉬시였다. 바로 저 사람이 그렇게 소문이 난 맑스주의자였던가. 저 사람은 권심이와도 다른 사람이다. 권심은 교조주의를 범하고있지만 그래도 량심을 가지고 혁명을 생각하며 리론으로써 무엇인가를 혁명에 기여하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그러나 조청산같은 사람은 그런것도 없고 자기가 독경적으로 외운 고전가들의 개별적명제들을 조선혁명에 통채로 옮겨놓으면서 무서운 정치적야욕을 위해 날뛰는 사람이다. 당장 조선에서 사회주의혁명을 해야 한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웨쳐대는 그들의 《리론》은 길림시에뿐만아니라 조선에까지도 알려져있다. 그런데 정작 만나시고보니 월파같은 사람을 놓고는 맑스주의의 심오한 진리를 이야기할수도 없다. 이미 김찬이한테서도 느낀바이지만 월파에게서 느낄수 있는것이란 파세획득을 위해서 오그랑수를 쓰는 음침한 그늘뿐이다. 잠간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왔지만 그것이 강하게 느껴진다.

김찬이도 그렇지만 조선과 만주일경에서 그렇게도 소문이 뜨르르한 월파 조청산역시 아무 기대를 가질것도 없는 그런 주의자였구나 하는 생각이 서글프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파랗게 눈이 튼 가로수가지밑으로 걸어가며 점점 더 생각이 깊어지셨다. 붐비는 사람들의 소요도 귀에 들려오지 않으셨다. 오늘은 무엇인가 큰 충격을 받은것 같으시였다. 방금 권심의 론문을 놓고 이야기를 하다가 나왔는데 이어 또 월파한테 와서 기분이 좋지 않은 론쟁을 했다. 결국 따지고보면 권심에게 한 이야기도 월파와의 론쟁도 다같이 교조주의와 현실을 떠난 《리론》을 공격하는 싸움이였다. 길림에 온 날부터 아프게 느끼고있는 일이지만 교조주의와 민족허무주의는 비단 월파나 김찬이들뿐만아니고 맑스주의를 배운다는 많은 학생들의 넋에 스며들고있다.

왜 이렇게 되는가. 이들에게 어떤 부족점이 있기에 모두 이런 혼탁속에 빠져있는가. 결국 그것은 맑스ㅡ레닌주의를 한다는 사람들이 정말 제 정신과 제 의식을 가지고 조선혁명을 생각하지 못하기때문이 아닌가!

인간이란 본래 자기 운명을 자기가 개척하는 주인으로서 사물을 인식하고 모든것을 능동적으로 자기에게 복종시킬줄 알고 창조할줄 알아야 하지 않겠는가! 인간에게 그런 정신과 능동적인 창조성이 없다면 어떻게 그 존재를 이 세상의 주인인 인간이라고 볼수 있겠는가. 인간은 그 본성에 있어서 자주인이지 결코 노예는 아니다. 바로 이런 정신, 이런 의식을 잃어버릴 때 사람은 자기자신이 가진 힘을 믿지도 못하거니와 기존공식과 리론을 창조적인 두뇌로 분석할줄도 리해할줄도 모르고 그것을 자신에게 맞게 받아들이지는 더구나 못할것이다.

권심이 조선로동운동의 특성을 선뜻 인정하기 어려워하는것은 그에게 교조주의적인 제약성이 있어서 그런다치더라도 정치적야욕에 날뛰는 월파나 김찬이들은 자주정신이 없는건 물론이고 반제반봉건의 특수성의 중하를 지닌 조선혁명을 자기 길이 아닌 딴곳으로 이끌어가려는 행위임이 틀림없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이마의 땀을 훔치시였다. 생각하실수록 기가 차지는 일이였다. 그것도 한두사람이 아니고 이 시대의 흐린 물결처럼 길림이란 정치무대를 덮어치고있으니 심각한 문제가 아닐수 없었다.

그이께서는 바로 이것을 바로잡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그 어느때보다도 절실해지시였다.

이 탁류를 그냥 두어선 안된다. 어데로 흘러가는지도 모르고 공담과 웨침과 아우성으로 시대를 거슬러 흘러가는 탁류, 이것을 바로잡아야 한다. 그 흐린 물속에서 앞을 가려보지 못하고 웨치는 사람들을 한사람한사람 건져내여 제정신을 가지고 살게 만들어야 한다. 조선혁명의 주인이란 립장에 튼튼히 서서 싸워나가도록 만들어야 한다. 나는 결코 잘못 걷지 않을것이다. 누가 무엇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절대로 이 길에서 빗나가지 않을것이다. 조선혁명의 승리를 위해선 오직 조선의 현실로부터 출발하는 이 길만이 옳은 길이다.

그이께서는 화창한 해빛속을 그냥 걸어나가시였다.

 

3

 

길림에서는 새로운 기운이 힘차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년회가 매일밤 모임을 가지기 시작했고 각 학교들에서 맑스ㅡ레닌주의연구소조들이 련속 조직되였다. 육문중학교, 문광중학교, 제5중학교, 직업학교들에서 연구소조들이 선참 나오고 법정학교에서도 채경이 연구소조를 내왔다. 이 연구소조엔 민족주의계렬에 섰던 학생들도 여러명 참가했다.

박두학은 연구소조모임장소를 구하던 끝에 아예 자기네 집 안방에 모이기로 했다. 그의 집은 우물정자로 지은 큰 집인데 독립군활동을 하던 그의 아버지는 지금 사랑방에서 앓고있었다. 골수염으로 운신을 못할 지경이니 아버지가 흥야라붕야라 시비를 할 경황도 못되였다. 막상 자기 집에 장소를 정하고보니 그이상 좋은 장소가 없는것 같았다. 그는 안방에 있는 가족들을 단단히 단속했다. 동생들보고는 학생들이 모여들어 공부한다는 소리를 어데 가서 하기만 하면 흔뜨검을 내준다고 큰 주먹을 들어 흔들었다. 어머니보고도 그렇게 일렀다.

《어머니, 우리가 무슨 공부를 하는지 아시지요? 어디 가서 함부로 말씀만 했다간 그저 우리는 이겁니다. 이거야요.》

박두학은 손으로 목을 썩 베는 시늉을 해보이였다.

결국 이렇게 해놓으니 궁궐속같은 안채에서 소를 잡아먹어도 비밀이 새지 않게 되였다.

저녁마다 연구소조원들이 모여들어서는 토론들을 했다. 여기서는 다른 학교 소조와 같이 수군수군 혀아래소리로 토론하지 않고 막 내놓고 했다.

그런데 어느날 저녁이였다. 여기에 경주와 오순희가 나타났다.

녀자중학과 녀자사범에 연구소조를 내오게 하기 위하여 채경이가 소조운영을 어떻게 하는가를 나와서 보라고 이른것이였다. 연구소조원들은 모두 웅성거리며 경주와 오순희를 맞이했다.

박두학은 그들을 방 안목으로 끌어들이고 다른 학생들은 자리를 내주고 하며 법석했다.

《얘, 앉자꾸나.》

경주가 오순희의 팔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둘이는 방 안목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경주는 자꾸만 가슴이 울렁거리였다. 맑스ㅡ레닌주의연구소조가 운영된다는 소리는 들었으나 박두학이네 안방이 이렇게 웅성거릴줄은 몰랐다. 벌써 여러 학교에 이런 연구소조가 나왔다고 하니 온 길림이 밑에서부터 세차게 설레고있는것이 아닌가! 어떻게 일조에 이런 변화가 일어날수 있을가!

경주는 이 타오르는 불길너머에 비낀 위대한 영상을 그려보았다.

학생들은 녀자중학과 녀자사범에도 빨리 연구소조를 내와야 한다고 떠들어댔다.

박두학은 녀자중학에선 안경쟁이교장의 눈에 걸리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고 단단히 일렀다. 방안이 더워서 어떤 학생은 교복을 벗고 샤쯔바람으로 앉아서 이야기를 했다.

이날밤 맑스ㅡ레닌주의연구소조에서는 《조선혁명의 현단계에 대하여》에 대한 토론이 있었다.

모두들 엄숙한 분위기에 휩싸여있었다. 어떤 학생은 경주와 오순희가 와앉아있어서 그러는지 공연히 점잔을 빼면서 말을 더듬거리기도 하였다.

경주와 오순희는 토론을 열심히 들었다. 경주는 어떤지 몰라도 오순희에게는 처음 듣는 말이 많았다. 《잉여가치》, 《기아임금》, 《경제공황》이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그런것은 태반이 처음 듣는 말이였다.

오순희는 자기도 인제부터는 열심히 배워야 하겠다는 속다짐을 했다. 고민에 싸여있던 오빠가 서울로 떠나간것이 차라리 잘되였다는 생각도 들었다. 인제는 집안에서 맑스ㅡ레닌주의를 내놓고 공부해도 무서울것이 없을듯싶었다.

박두학은 토론을 들으면서 공책에 무언가를 자꾸 적었다. 투박한 손에 만년필을 쥐고 앉아 쓰다간 가끔 옳은 말이라고 토론을 지지해주기도 했다. 그는 평가가 아주 후했다. 그러나 리론적으로 잘못된 토론이 나오면 머리를 흔들기도 하고 은근히 혀도 차면서 적었다. 토론을 다 시키고나니 공책에 댓장 잘 썼다. 그는 그것을 들고 일어서 책을 두드리며 불을 뿜는것 같은 열정으로 결론을 지었다.

모임은 밤이 깊어서 끝났다. 박두학의 집에서 나온 경주와 오순희는 어두운 골목길을 빠져 큰길로 나왔다.

그들은 말없이 걸었다.

《뭘 그렇게 깊이 생각하니?》

민감한 오순희가 경주를 쳐다보며 물었다.

《난 그저 마음이 든든해서 그런다.》

《나도 그래.》

《지금 이 길림에는 아무것도 없는것 같지? 거리도 고요하고 밤 하늘도 고요하고… 그렇지만 밑에서 흐르고있는게 얼마나 장엄하냐? 그것이 싹인데도 이렇게 장엄하니 그 싹이 무성할 때에는 얼마나 놀랍겠니?》

《온 지상에 울창한 숲같은게 나타나겠지.》

《숲이 아니라 폭풍과 같은 힘이 나타날거야. 짜리로씨야를 들부신 폭풍도 이런 싹에서부터 자랐을것 아니야.》

경주의 소리에 오순희는 가슴이 더욱 뻐근하였다.

그들은 녀중과 녀자사범의 연구소조문제를 토의하기 위해서 강보배를 찾아갔다.

보배네는 지난겨울에 고향을 떠나서 이곳으로 들어왔는데 지금 자기네 큰집과 동거하고 살았다. 보배의 큰아버지는 완고한 한학자이고 민족적량심을 지닌 로인이였다. 둘이는 이 로인이 무서워 살금살금 걸어서 보배네가 사는 뒤채로 갔다.

그들이 방안으로 들어서니 보배는 조그만 등잔불앞에 앉아서 열심히 뜨개질을 하고있었다. 방안에는 그의 남동생들이 얼기설기 다리를 걸어놓고 자고있었다. 보배의 어머니도 저쯤 아래목에서 마디가 굵은 손을 늘어뜨리고 녹아떨어졌다. 애 하나는 어린것의 목우에 다리를 걸어놓고 잔다. 고된 생활이 온 일가를 너부러뜨린것 갈은 광경이였다.

《얘, 우리 밖으로 나가서 이야기나 좀 하자.》

오순희가 소곤거리자 보배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경주는 애들의 다리도 바로놓아주고 차던진 포대기도 덮어주고 하면서 큰 목소리를 내지 말라고 손을 저었다.

보배를 데리고 거리로 나온 경주와 오순희는 북산공원으로 가는 풀밭에 이르렀다.

《얘, 달이 참 밝구나. 너 뜨개질하려면 달빛아래 나와서 하는게 낫지 않니? 그 수수떡같은 등잔불앞에서 하지 말구…》

오순희의 말에 보배는 또 방긋 웃기만 했다.

《얘 보배야, 우리는 오늘밤 문광중학교 연구소조에 가보았단다. 너도 함께 데리구 갈가 하다가 늦어지는것 같아서 성밖으로 나오지 못했어.》

경주의 말이였다. 보배는 마른 풀을 뜯을뿐 아무 말이 없었다.

《너의 학교에서는 준비가 어떻게 됐니? 몇명이나 장악했니?》

그래도 보배는 말이 없었다. 그는 얼마후에야 달빛을 받은 파릿한 얼굴을 들며 말을 꺼냈다.

《얘, 난 아무래도 길림에서 공부할것 같지 못해.》

《왜?》

《아버지가 욕심에 나를 사범학교에 넣어주긴 했는데 아무래두 여기선 살수 없다지 않아. 그래서 아버지는 어느 농촌에 가서 농사라도 지어야겠다고 하면서 선창일을 그만두고 어딘지 떠나가셨단다. 아마 땅을 얻으러 가셨겠지.》

《얘, 그럼 아버지는 농촌에 나가서 농사를 지으라고 하려무나. 그리고 넌 큰아버지보고 학비를 좀 대달라면 되지 않니.》

경주가 보배의 무릎을 흔들며 말했다.

《큰아버지두 쪼들리는데 내 학비를 어떻게 대주니? 지금 우리 식구가 와서 큰아버지네 신세를 지는것만 해도 이루 헤아릴수 없는데…》

《얘 얘, 그럼 동생네가 굶어죽게 됐는데 형이 모른척하겠니? 형제간에 신세는 무슨 신세냐?》

이번에는 오순희가 쏘아붙였다.

보배는 눈물이 가랑가랑 맺혀 말이 없었다. 경주도 오순희도 방금 보고 온 방안의 정경이 눈앞에 떠올라 눈물을 꿀꺽 삼켰다. 그래도 역시 경주가 다기차고 생각이 깊었다.

《얘, 농촌으로 갈 때는 가도 당장 우리가 해야 할 일이나 토의하자. 설사 농촌으로 간다 해도 맑스ㅡ레닌주의공부는 계속해야지. 그러자면 여기서 한자라도 더 배워가지고 가는것이 좋지 않니. 너의 학교엔 연구소조를 희망하는 학생이 너 말고 누구누구냐?》

《3학년에 조숙희, 한은연, 리정애, 그담 2학년에 몇명 있지.》

경주의 말에 보배는 손가락을 하나하나 꼽아나가며 말했다.

《거기서 제일 똑똑한 애는 누구냐?》

《뭐 특별히 똑똑한 애가 있니? 다 그러루하지.》

《얘, 너의 학교는 왜 그렇게 얼떨떨하니?》

그 소리에 모두들 웃음이 터졌다. 말을 한 경주도 웃고 오순희도 웃었다.

보배는 어쩐지 무안스럽기도 해서 풀뿌리를 비틀어뽑으며 고개를 돌리고 웃었다. 그들은 한참동안 녀자사범에 맑스ㅡ레닌주의연구소조를 내올 이야기들을 하였다. 그러다가 아무래도 얼떨떨한 녀자사범에 연구소조를 독립적으로 내오게 하는것보다 녀중의 연구소조에 녀자사범의 학생들까지 망라시키는것이 좋겠다는 이야기로 락착을 지었다. 그래서 이 문제는 경주가 자기 오빠를 통해서 김성주동지께 건의해보기로 하였다. 그들은 달이 기울 때까지 풀밭에 앉아서 이야기의 꽃을 피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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