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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불멸의 력사》 2 장편소설
천 세 봉
( 제 8 회 )
3
다음날 저녁이였다. 경주네 오누이는 저녁을 지어먹고 리선엽목사네 례배당으로 떠날 차비를 서두르고있었다. 소년회를 조직하는 모임에 참가해달라는 김성주동지의 초청을 받았던것이다. 그이께서는 벌써 어느새 《ㅌ.ㄷ》성원들과 학우회역원들을 동원하여 소년회조직을 위한 빈틈없는 준비를 갖추시였던것이다. 소년회를 내오는 문제에 대해서는 민족주의자들도 지지하였다. 오순희가 밖에 와서 경주를 찾았다. 오늘밤 모임에 같이 가기로 약속했던것이다. 그는 제잡담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왔다. 《경주야, 네 그림자가 왔다.》 채경은 구석에서 양말을 신고있는 경주를 돌아보며 롱조로 뚱겨주었다. 둘이 너무도 같이 붙어다녀서 《그림자》라는 별명까지 생겨났다. 오순희는 경주의 그림자이고 경주는 또 오순희의 그림자라는것이다. 경주가 반색을 하며 올라오라고 손을 까딱했으나 오순희는 응하지 않고 부엌봉당에 벋디디고서서 채경이한테 집적거리였다. 《아직 고산자로 안갔구만요.》 사실은 어제 길바닥에서 나눈 대화의 계속인셈이다. 채경은 채경이대로 아닌보살을 했다. 《내가 왜 고산자로 가? 순희가 가마타구 시집가는것두 보지 않구 고산자로 가?》 《누가 시집이라는걸 가겠대요?》 오순희는 코웃음을 치며 눈을 할기죽거렸다. 그러더니 채경이가 더 걸죽한 말을 하지 못하게 신발을 벗고 잉그르르 경주한테로 달려올라왔다. 밑도 끝도 없이 왕청같은 화제를 꺼냈다. 《얘, 경주야. 글쎄 얼마나 우스운가 봐라.》 《뭐가 우습단말이냐?》 《소년회라는거야 까놓고 말해서 조선독립을 위해서, 사회주의를 위해서 싸우자는 조직이 아니겠니. 그런데 사회주의자도 아닌 우리 아버지가 뒤에서 열성적으로 후원하고있거든.》 《그럼 너희 아버지도 사회주의자가 된게로구나.》 《애두참, 사회주의자가 될게 뭐야. 사회주의청년들을 민족주의청년들로 알구 깜빡 속고있는거지.》 《오히려 네가 잘못 생각하는지도 몰라. 너희 아버지야 민족주의자들가운데서도 좌파에 속하지 않니. 무산혁명을 지지하는 련공분자라고 볼수 있지뭐.》 오순희는 채경이쪽을 할끔할끔 곁눈질하며 경주에게 귀속말로 소곤거리였다. 《얘, 너 그새 저 능구렝이같은 오빠수하에서 꽤 유식해졌구나. 진짜 로자 룩셈부르그라도 된것 같다 얘.》 《넌 참 못하는 소리도 없구나.》 경주는 눈을 흘기였다. 《호호호, 어쨌든 우리 아버지가 희극이야. 넌 아까부터 뭘 그렇게 꾸물꾸물하니? 빨리 가자. 가서 연설이랑 하는걸 들어야지. 너 저 리선엽목사령감 연설하는걸 들어봤지? 에헴, 저 악독한 왜구의 침략을 우리는 반드시 물리치고 세계제패의 도적심사를 가졌던 카이제르의 운명이 그러하듯이… 호호호, 호호호.》 오순희는 종주먹을 흔들며 언젠가 리선엽목사가 자기네 례배당에서 연설하던 흉내를 냈다. 그리고는 경주의 어깨에 매달려 몸을 꼬며 웃어댔다. 경주도 눈물이 솟아나게 웃어댔다. 처녀들쪽에 등을 돌려대고 시물시물 웃던 채경이 발을 탕 굴러 그들을 놀래웠다. 《에끼, 고현…》 오순희는 경주의 손을 끌고 까르르 웃으며 부엌으로 내빼였다. 둘이 문가에서 사라지기 바쁘게 《조선공산당만주총국》집행위원인 김찬이 엇바꿔 들어섰다. 마치 무슨 연극에 나오는 역인물들의 등퇴장처럼 사개가 딱딱 맞물려 돌아가는 장면이였다. 《그런데 이야길 들으니까 오학천이 요새 어데로 류학을 떠났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이요?》 김찬이 자리에 앉으며 채경에게 물었다. 《글쎄 어데로 갔다고 하는것 같습니다.》 《어데로 갔는지 모르겠소?》 《잘 모르겠는데요.》 《무엇때문에 길림을 떠났는지도 모르구?》 《그야 공부를 하러 떠났겠지요. 길림보다 나은데 가서 공부를 하자구…》 《음…》 김찬은 무언가 신중한 생각을 하고 앉아있다. 채경은 김찬이 무슨 눈치를 보러 왔다는것을 깨달았다. 길림시내에 자기들의 뿌리를 박자고 하면서 민족주의자들과 상극이 되여 싸우는 사람이니까 이런 문제에 관심이 없을수가 없는것이였다. 《그런데 오늘밤 소년회를 조직한다는건 또 무어요?》 《아마 소년들의 조직이 없었기때문에 그런 조직을 하나 내오는것 같습니다.》 《음… 채동문 육문중학교에 들어간 김성주학생을 알고있소?》 《네, 알고있지요.》 《그 학생이 강남공원에서 연설할 때 갔댔소?》 《전 가질 않았댔습니다.》 《음…》 김찬은 또 신중한 표정을 하고 담배를 갈아붙이며 생각에 잠겼다. 그는 길림에서 무슨 움직임은 빈번해지고있는것 같은데 도대체 정세를 알수가 없어 안타까운것이였다. 오동진이 길림시내의 학생세력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들을 어데로 류학을 보내지는 않을터인데 류학을 보냈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또 김성주학생이 발기한 소년회조직을 적극 후원해나선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야 오동진의 배속을 알수가 없었다. 안창호가 잡혀들어갈 때 오동진은 왜 잡혀들어가지 않았을가? 숱한 사람이 잡혀들어갔어도 그와 같은 인간이 뻗디디고있기때문에 길림의 민족주의발판이 뒤흔들리지 않고있다. 그래서 자기네 세력이 청소년들속에 스며들지 못하고있다. 김찬은 또 한참 학생집단이 들고일어난 안창호의 석방운동이 암초에 부딪치고있는것 같은데 그건 장차 어떻게 할 작정이냐고 물었다. 채경은 그것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대답했다. 얼마후 김찬은 소년회 창립회의에 나와달라는 초청을 받았노라고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채경이도 따라일어섰다. 《채동무도 창립회의에 나가겠소?》 《네, 우리 경주가 소년회에 들겠다고 해서 함께 나가자고 합니다.》 《음, 소년회에 들어야지. 학교공부도 해야 하지만 운동선상에 나서서 닥달도 해야 돼.》 김찬은 점잖게 기침을 하면서 먼저 토방으로 나와 칠피단화를 발에 걸며 단장을 거머쥐였다. 벌써 례배당엔 학생들이 가득 모여들어있었다. 한옆으로 의자들이 주르르 놓여있는데 거기에는 회색두루마기를 입은 리선엽목사며 리웅, 장철하 기타 인물들이 와 앉아있었다. 김찬이 들어가며 인사를 하자 모두들 점잖은 자세로 앉아서 인사를 받았다. 《아니 김선생은 간도로 떠나갔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여기 있었군요.》 리웅의 말이였다. 《네, 아직 떠나지 못했습니다.》 김찬은 리웅의 말에 대꾸하며 그의 곁의자에 가서 앉았다. 큰 몸집을 뒤로 제끼며 장내의 학생들을 한번 쭉 훑어보았다. 김찬을 쳐다보며 무어라고 숙덕거리는 학생들이 많았다. 김찬은 그런 학생들을 향해 웃음을 띠우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얼마후 흰두루마기를 입은 오동진이 례배당으로 들어섰다. 그는 손수건으로 연방 땀을 씻으며 리웅이들이 앉아있는곳으로 왔다. 오동진의 뒤로 김성주동지께서 들어오시고 그뒤에 또 최봉, 권태일을 비롯한 대여섯명의 학생들이 따라들어왔다. 장내에서는 김성주동지의 성함을 외우며 수군거리는 소리가 일어났다. 강남공원의 연설이야기를 하는것 같았다. 모두들 얼굴을 들고 그이께 시선을 집중했다. 《어서 시작을 하세, 늦어졌는데.》 오동진이 의자에 앉지도 않고 서성거리며 김성주동지께 말했다. 그는 여전히 손수건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사실 그는 오늘저녁 무척 바쁜 시간을 보냈다. 안창호야 갇혔든 말든 3부통합희의는 빨리 시작해야 한다고 3부의 거두들을 설유하노라고 저녁끼니도 건느고 례배당으로 나왔다. 얼마후 김성주동지께서 연탁앞으로 나가시였다. 가득 배겨앉아있는 학생들이 모두 조용해졌다. 그이께서는 잠간 연탁앞에 서서 장내를 둘러보시였다. 《여러분, 오늘밤 이렇게 모여와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저는 조선인길림소년회창립을 준비한 한사람으로서 여러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장내에 앉아있는 오순희는 가슴이 울렁울렁 뛰였다. 그는 김성주동지께서 맑스주의자라는것을 벌써 한달전에 알았다. 맑스주의자가 소년회를 창립한다는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가! 이것이야말로 우리 학생들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 징조일수 있다. 맑스ㅡ레닌주의를 지지하는 학생들은 말할것도 없고 모든 학생들이 다 뭉쳐가지고 불쑥 붉은 기발을 쳐들고 《일어나라 저주로 인맞은…》 하고 인터나쇼날을 부르자는것일가? 만약 그렇게 된다면 김성주동지께서 맑스주의자인줄 몰랐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눈들이 휘둥그렇게 될것이다. 오순희는 은근히 통쾌한 생각이 나서 반짝이는 눈으로 학생들을 돌아보았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개회의 말씀을 계속하시였다. 《저는 긴 말씀을 올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한가지 부탁할것은 여러분들이 나라를 빼앗긴 청소년들로서 오늘밤 소년회를 조직하는 의의를 깊이 자각하고 회의를 뜻깊게 진행해달라는 그것입니다. 그럼 인제부터 우리 소년회창립을 후원해주신 오동진선생님의 말씀이 있겠습니다.》 사회를 끝마친 그이께서 연단을 내려서시자 오동진이 두어마디 기침을 하고는 활개를 저으며 연탁이 있는쪽으로 나갔다. 그는 연탁앞에 서서도 잠간동안 붉은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고나서야 말을 시작했다. 《…월나라 새는 남쪽가지를 사모하고 호마는 북풍에 우는 법입니다. 동물도 이러하거늘 만물의 령장인 인간이 어찌 잃어버린 자기의 조국을 생각지 않으며 자기의 력사를 생각지 않겠습니까. 일본제국주의강도가 아무리 조선강토를 략탈하고 조선민족의 혼을 죽이려고 하여도 조선의 땅덩어리는 동양일각에 영원히 존립할것입니다. 조선민족의 혼은 자손대대로 맑은 물과 같이 정갈하게 흘러내려 외적을 미워하는 사상은 대를 이어감에 따라 더욱 커지고 강해지고있습니다. 지금 여러 학생들은 바로 이런 민족혼을 계승하여 태여난 사람들입니다. 그렇기때문에 학생들은 이 길림땅에 살고있지만 아침저녁 그 맑은 눈동자로 조선의 하늘을 쳐다보며 조국땅을 그리워하고있는것입니다. 또한 학생들에게는 조선을 강점한 왜적을 배척하는 사상이 아버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뼈와 살과 혈통과 같이 억세게 살아있습니다. 그렇기때문에 학생들의 시대는 아버지의 시대보다 왜적과의 투쟁이 더 완강해져야 할것이며 또 완강해질것입니다. 조선독립운동은 대를 물려가며 더 힘차지고 더 커지고 더 맹렬해질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가슴에 새겨야 할, 뜻을 멀리 가져야 한다는 위대한 사상입니다. 이 사상은 이 회의를 사회한 바로 저 학생의 아버님이신 독립운동의 선각자이시며 지도자이시였던 김형직선생님의 <지원>의 사상입니다.…》 학생들의 시선이 일시에 김성주동지께로 쏠리였다. 이 사실을 처음 아는 학생이 많은듯 장내가 한참 수군거리며 끓었다. 오동진은 잠간 서서 장내가 조용해지는것을 기다리고나서야 또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는 이런 《지원》의 사상이 있기때문에 우리의 독립운동은 무한히 힘차고 불요불굴하고 또한 앞길이 창창하다고 한참동안 열변을 쏟아부었다. 그런 다음에야 학생들이 조선독립운동의 대를 이어가기 위하여 교육을 어떻게 받고 몸과 마음을 어떻게 단련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넘어갔다. 그는 결론적으로 이 모든것을 잘하기 위해서 소년회조직이 필요하다고 하면서 길림시내의 청소년전체가 이 조직에 망라되여 규를을 잘 지키고 훈련을 잘 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학생들은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앉아서 오동진의 붉은 얼굴을 쳐다보며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박두학, 권태일을 비롯한 학생 몇명만이 연탁밑에 앉아서 소년회명부를 정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권태일이 각 학교에서 들어온 명부를 들고 앉아서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주고 최봉이와 안경 낀 학생이 그것을 새 종이에 받아서 적었다. 리선엽목사와 김찬은 축사를 해달라는 청탁을 받고 지금 그것을 생각하느라고 둘이 다 눈을 가느스름히 뜨고 앉아있다. 리선엽은 가끔 기침을 하면서 무르팍을 괴고 내리고 했으나 몸집이 큰 김찬은 뿌리가 내린 나무처럼 움쩍 않고 앉아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두터운 입술을 꾹 다물고 회관안의 허공을 주시했다. 회의는 순조롭게 진행되였다. 소년회가입을 신청한 학생들의 호명도 끝나고 강령과 규약도 통과시켰다. 조선소년들의 단결을 도모하며 견결한 반일사상으로 무장하기 위하여 노력한다는것이 소년회의 목적으로 지적되였다. 그러나 사실은 이것으로써 소년회의 목적이 다 밝혀진것은 아니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청년학생운동이 로동자, 농민들과 혁명운동과의 사이에 다리를 놓아주는 중요한 역할을 놀아야 하겠다는 생각으로부터 이 소년회도 내오신것이였다. 그이께서는 인제 이 조직을 통하여 청소년학생들을 반일사상으로 교양할뿐만아니라 그들에게 계급의식을 주입시키고 그들을 투쟁속에서 단련시켜 혁명의 믿음직한 후비대로 키우시려는것이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회의를 능숙하게 지도해나가시였다. 그이를 조선인길림소년회 회장으로 선거할 때에는 오동진이 특별히 일어서서 안을 내놓았다. 그러자 만장의 박수갈채가 일어났다. 녀학생들속에 앉아있던 경주는 선참으로 열광적인 박수를 쳤다. 그는 무언지 모르게 활짝 가슴이 넓어지는것 같았다. 웬일인지 그는 《공산당선언》의 첫구절이 떠오르기도 했다. 《…공산주의는 벌써 구라파의 모든 권력자들에게 한 세력으로 인정되고있다. 인제 공산주의자들은 온 세계를 향하여 자기들의 견해, 자기들의 목적, 자기들의 지망을 공공연하게 진술하고 그리하여 공산주의환영이란 신화에 자기 당의 선언서를 대립시킬 때가 벌써 돌아왔다.…》 경주는 바로 길림의 학생세력이 이런 당당한 선언을 들고 나서서 투쟁할 때가 된것 같이 느껴졌다. 새로운 기치가 길림 한복판에 불쑥 일어서는것 같은 생각도 들었다. 그는 내내 가슴이 뛰였다. 리선엽목사가 축사를 하려고 연단으로 나갔다. 목사는 뾰주름한 얼굴을 들고 서서 연설을 시작했다. 《오늘밤 소년회창립은 과연 훌륭한 일입니다. 벌써 이런 단체를 내와야 할터인데 내오지 못하고있다가 오늘밤 조직하게 된것은 때늦은 감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늦더라도 이런 단체가 길림에 나타났다는것은 길림의 전체 청소년들앞에 신의 은총이 빛발처럼 비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무릇 청소년들이란 앞길이 창창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떠나는 길손과도 같은 사람들입니다. 바로 이들속에 장래의 위인 성자가 있고 대학자가 있고 대문호가 있는것입니다.》 리선엽목사는 민족애와 동포애를 력설하고 바로 이 사랑의 정신이 궁극에 가서는 민족적독립을 가져올수 있는 큰 실력을 이룩한다고 주장했다. 《에헴, 그리고 내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부탁하고싶은것은 복잡한 시대를 걸어가는 청소년들이 항상 자기를 살피며 나아가야 되겠다는 그것입니다. 잠시라도 자기를 살피지 않다가는 자기가 어데로 가는지도 모르게 파산의 길로 떨어져들어갈수가 있습니다. 무엇이 파산의 길인가? 바로 그것은 이 시대의 구석구석에 뿌려지고있는 소위 새 사조라고 하는 그것입니다. 새것이란 언제나 위험합니다. 요즈음 떠도는 새로운 사상을 본다면 일견 진리인것 같이 사람을 끌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사람들의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고 정의에 도전하게 만듭니다. 여기에 빠지면 모든것은 파산입니다. 도덕도 파산되고 륜리도 파산되고 인간애도 파산되고 급기야는 민족의 파산과 인류의 파산이 오게 됩니다.》 리선엽은 어린애들 손같이 작고 통실통실한 손으로 연탁을 두드리며 소리쳤다. 그는 원래 사회주의라면 무섭게 질시하는 위인이기도 하지만 오늘 사회주의를 공격하는 근저에는 다른 생생한 앙심이 또하나 있다. 그는 안창호가 잡힐 때 함께 붙잡혀들어가서 십여일동안이나 경무청류치장에서 자면서 안창호가 언제부터 사회주의를 하는가고 대라는 졸경을 받았다. 기가 급한 그는 심문을 들이대는놈의 따귀를 갈기자고 덤벼들었다. 이러다가 어떻게 되여 겨우 놓여나왔다. 이러고보니 그의 생각엔 그 사회주의라는것때문에 조선독립운동이 온통 망해간다는 생각밖에는 없었다. 지금 그 앙심 같아서는 찢어발기는 심정으로 사회주의를 치고싶었으나 차마 그러진 못하고 점잖은 말투로 축사에 한마디 심어넣었다. 리선엽이 사회주의를 공격한다는것을 느끼자 학생들이 눈에 불꽃을 튕기며 리선엽을 쏘아보았다. 그러나 김찬은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묵중하게 앉아있다. 그는 리선엽의 말따위는 귀등으로 흘려버리는것 같은 태도이다. 축사를 끝낸 리선엽은 손수건으로 얼굴의 땀기를 씻으며 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코수염을 점잖게 매만지며 의자에 들어앉았다. 이어 김찬이 잠자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연단에 나타나자 학생들이 박수를 쳤다. 그바람에 리선엽의 얼굴은 확 달아서 벌겋게 되였다. 곁에 앉아있는 오동진은 리선엽이 축사에서 사회주의에 도전한것을 아주 못마땅히 여겼다. 그자신도 사회주의자는 아니지만 오늘밤 이 회의가 그런 싸움을 할 회의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진리를 사랑하는 학도 제군!》 김찬은 연탁가장자리를 두손으로 붙들고 머리를 흔들며 장내가 쩌렁 울리게 소리쳤다. 그의 목소리는 굵고 걸걸해서 방금 웨치고 들어간 리선엽의 연한 목소리의 인상을 단마디에 날려버리는것 같았다. 《제군들은 진리를 사랑하며 인류의 리상실현을 위하여 일기당천의 기개와 진취력을 가지고 앞으로 내닫는 청년학도들입니다. 당신들이야말로 인류의 운명을 좌우할 사람들이며 이 탁류와 같은 사회에 등불을 들고 전진할 사람들입니다. 바로 당신들은 이러한 자기 사명을 실천하기 위해서 앞을 다투어 이 자리에 달려왔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쌍수를 들어 축하할 일입니다!》 김찬은 정말 쌍수를 들어 흔들며 웨쳤다. 그는 연설에 숙달된 사람이라 몸의 움직임도 제가락에서 놀았다. 그런데 그의 음성은 불시에 가늘고 연해졌다. 무엇을 간곡히 호소하기라도 하듯 턱도 연탁우에 낮추었다. 《제군! 나는 여기서 제군에게 한마디 묻고싶습니다. 가령… 제군들이 정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라고 합시다. 그리고 병치료를 자기의 천직으로 삼는 의사라고 가정합시다. 그런 제군들의 병원에 어느 한 람루한 옷차림의 사나이가 찾아와서 왕진을 청했다고 합시다. 물론 제군들은 인도주의자인것만큼 그 청을 거절하지 않을것입니다. 그 사람은 황송한 표정으로 제군들의 왕진가방을 들고 앞서서 걸을것입니다. 제군들은 그 사나이를 따라 고대광실 큰 집들이 즐비한 거리를 지나 어둡고 침침한 뒤골목으로 들어섭니다. 하수도엔 더러운 물이 넘쳐나고 세균이 우글우글 끓고 쓰레기가 여기저기 널려져있습니다. 이런 골목을 지나 마침내 쓰러져가는 오막살이앞에서 사나이는 걸음을 멈췄습니다. 제군들이 방안으로 들어가니 천정은 무너지고 방바닥은 꺼졌는데 생물표본같이 피골이 상접한 환자가 누워 신음소리를 내고있습니다. 그곁에 갈비뼈가 앙상하고 배가 똥똥한 아이들이 오구구 둘러앉아있습니다. 제군들은 익숙한 솜씨로 왕진가방을 펼치고 세심하게 진찰을 합니다. 풍부한 림상경험을 가진 제군들에게는 환자의 증상을 판단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제군들은 곧 그것이 현대사회에 널리 보급된 하나의 사회병ㅡ영양실조와 과로라는 진단을 내리지 않을수 없을것입니다. 인제 제군들은 자기의 판단에 따라 가장 적절한 처방을 떼야 할것입니다. 정의를 사랑하는 청년학도 제군!》 여기서 김찬은 별안간 처음 시작할 때와 같은 쩌렁 울리는 목소리로 웨치며 고개를 버쩍 들었다. 그러다가 잠시 동안을 두고 김성주동지를 흘끔 돌아보았다. 그이의 표정에서 자기 말이 던진 파문의 폭과 그 말의 금새를 검증해보려는것이였다. 한때 동경의 조선인 류학생들의 얼을 뽑았고 서울의 좌익계렬청년들의 넋을 휘저어놓았으며 지금은 동만과 남만, 중부만주일대에서 천지개벽을 갈구하는 어리무던한 농군들과 좌익소아병에 걸린 공산주의사상가들의 정신을 엿가락처럼 흐물흐물하게 만들고있는 그의 류창한 웅변도 왜 그런지 이 방에서는 순탄하게 엮어지지 못하고있는것만 같았다. 무엇인가 줄곧 그의 연설을 구속하였다. 그가 그런 구속을 느끼기 시작한것은 지난해 여름 화전의 방을룡이네 집에서 화성의숙학생들과의 상봉이 마련되였던 그 망신스런 밤의 정경이 떠오른 순간부터였다. 그날 김찬은 그 무슨 비프로레타리아트적요소에 대한 궤변을 장황하게 늘어놓았었다. 궤변은 즉석에서 김성주동지의 단호한 반박을 당했고 그 물샐틈없는 론리앞에서 김찬은 아무런 변명도 하지 못하고말았었다. 김찬은 그날밤 맛본것과 같은 그런 수치스런 장면이 이밤 또다시 되풀이될가봐 그것이 은근히 두려웠다. 그런데 다행히도 김성주동지의 표정에서는 색다른것을 찾아볼수 없었다. 《나는 제군들에게 묻는바입니다. 그와 같은 환경에서 과연 제군들이 그 병에 맞는 적절한 처방을 뗄수 있겠습니까? 환자에게는 신선한 공기와 밝은 해빛이 드는 주택이 필요하며 충분한 휴식과 영양가 높은 음식물이 필요합니다. 제군들은 과연 그 환자에게 좋은 별장에 가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휴식하는것이 좋겠다는 그러한 처방, 아니 그러한 권고를 할수가 있겠습니까? 제군! 우리들의 량심, 우리들의 정의감은 바로 그와 같은 환경에서 피눈물을 흘리지 않으면 안될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같은 환자가 이 사회의 태반을 이루고있다는 사실에 주목을 돌리며 몸서리를 치지 않으면 안될것입니다. 제군들은 단연 그 무력한 청진기와 주사약을 집어던지고 계급투쟁에 일어서야 하겠다는 결심이 생길것입니다. 제군은 바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저 굶주린 아이들에게 밥을 주고 오막살이에 해빛을 주고 가난한자에게 유족한 생활을 주기 위하여 무산계급해방의 혁명가가 되여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이 시대는 개개의 환자를 고치는 나약한 인도주의자가 아니라 썩은 사회를 송두리채 뒤집어엎는 혁명가를 요구하고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사회주의혁명의 기치를 높이 들고 이 썩은 사회의 온갖 모순을 두드려부셔야 합니다.》 김찬은 큰 주먹으로 연탁을 땅땅 두드렸다. 그의 커다란 《주의자머리》도 와실거리며 흔들렸다. 장내에서는 박수소리가 일어났다. 책방에 굴러다니는 어느 소책자에서 얻어낸 이야기를 아무런 주석도 없이 그대로 주어섬긴 김찬의 연설은 알만한 사람들에게는 불쾌한 인상을 주었지만 나이 어린 학생들에게는 자극이 강했다. 《이건 무언가? 축사를 하러 나가서 공산주의선전을 하는가?》 리선엽이 팔로 삿대질을 하며 자리를 차고 일어서려 하였다. 그러자 옆에서 장철하와 리웅이 리선엽을 끌어당겨 앉히였다. 장내의 숨소리는 높아졌다. 누구 하나 들고일어나 누구를 지목해서 공격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모두 눈길이 날카로와져서 쏘아보았다. 리선엽이 먼저 사회주의를 공격해놓았고 그 뒤끝에 김찬이 나서서 정면으로 사회주의혁명을 주장하였으니 분위기가 날카로와질수밖에 없었다. 어른들만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연줄로 해서 두편으로 갈라져있는 학생들과 어린 소년들까지도 눈에 보이지 않는 암투속에 말려들어갔다. 그러나 김찬은 한참 더 큰 주먹으로 연탁을 치며 청년학생들은 사회주의혁명에 나서라고 웨쳐대고야 개선장군처럼 연탁에서 물러났다. 그는 손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리선엽과 등을 대고 자리에 앉았다. 코마루가 칼등 같은 리선엽은 흘깃 눈짓을 하며 자기 몸이 김찬에게 닿지 않도록 도사리였다. 장내의 공기는 일층 더 팽팽해졌다. 《선생님, 제가 한마디 하겠습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오동진에게 말씀하셨다. 그이께서는 본시 발언을 안하실 계획이였다. 그러나 장내의 공기를 보니 참으실수가 없었다. 《어서 하게, 회장이 한마디 해야지.》 오동진이도 장내의 공기가 좋지 않은지라 불그레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했다. 김성주동지께서 연탁앞으로 나가시자 학생들이 일제히 앞쪽을 바라보았다. 채경이 오누이는 이 터질것 같은 공기를 어떻게 눌러놓으려고 저렇게 나서시였을가 하는 생각을 하며 긴장해서 그이를 쳐다보았다. 잠시후 장내의 복잡한 감정의 파도를 타고 그이의 활달하고 무게있는 목소리가 울려퍼졌다. 《여러분, 우리는 오늘밤 소년회창립회의를 성과있게 진행하였습니다. 이것은 래빈 여러분들과 학생 여러분들이 성의를 다해서 회의에 참가해준 결과입니다. 오늘밤 조선인길림소년회의 창립은 우리 청소년학생들이 한마음한뜻으로 단결하여 앞으로 전진함에 있어서 획기적인 의의를 가지는 일입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소년회가 창립된것은 하나의 큰 배가 돛을 올리고 바다에 뜬것과 같다고 하시면서 이 배우에 탄 사람들이 합심하여 노를 잘 젓고 키를 잘 잡아야 거친 파도를 헤치고 등대가 있는 희망의 항구에 도달할수 있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리고는 강령규약을 다시 조목조목 들어서 해설하시면서 이것이 바로 이 시대의 거친 파도를 항행하는 우리들이 지킬 규범이라고 말씀하시였다. 학생들은 숨을 죽이고 앉아 그이의 말씀을 들었다. 《우리는 조선의 운명을 두어깨우에 떠멘 새로운 세대입니다. 지금 조선의 운명은 다시 소생하는가 아니면 영원히 죽고마는가 하는 갈림길에 서있습니다. 일본제국주의강도는 우리 3천리금수강산을 캄캄한 지옥으로 전변시켰습니다. 지금 조선땅에서는 로동자, 농민도 살수 없고 인테리와 중소기업가도 살수 없게 되였고 지어는 민족자본가들가운데서도 못살겠다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가두에서, 농촌에서, 바다가에서, 산간에서 사람들은 피눈물을 뿌리며 살려달라고 아우성치고있습니다. 로동자들은 파업을 일구고 농민들은 소작쟁의를 일으키고 그러다가는 실업을 당하여 거리를 헤매고 쪽박을 차고 고향을 떠나는것이 오늘 우리 조국의 현실입니다. 이 참담한 현실이 지금 우리의 어깨를 잡아흔들며 너희들은 무엇을 위해 어디로 나가느냐고 묻고있습니다. 우리의 귀에는 구원을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 로인의 목소리, 아이들의 목소리, 온 민족의 가슴아픈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이 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우리가 그 무슨 조선의 아들딸들이겠습니까!》 김성주동지께서는 장내를 한번 훑어보시였다. 그이의 연설을 처음 듣는 채경이 오누이는 긴장해서 연설에 이끌려들어갔다. 오늘밤 여러 사람이 나와 웨치기도 하고 멋을 부리기도 하였지만 그들과는 달리 김성주동지의 말씀은 진정의 토로였으며 온 겨레를 한품에 안으시려는 넓고 뜨거운 사랑의 호소였다. 연설도 그렇거니와 모습과 동작, 목소리에서까지도 큰 인품이 감출수 없이 드러나고있었다. 《바로 이렇게 일본제국주의는 모든 조선사람을 죽음의 구렁으로 몰아넣고있습니다. 일본제국주의를 미워하지 않는 사람을 우리는 조선사람이라고 부르지 않을것이며 그런자들은 매국노, 민족반역자로 규탄해야 할것입니다. 이 자리에 모인 많은 사람들은 비록 정치적견해가 같지 않고 재산정도나 신앙이 같지 않다 해도 누구나 다 일본제국주의를 미워하며 그 강도들을 조국땅에서 내몰기 위하여 목숨을 바쳐 끝까지 싸우려는 결의를 가지고있는 사람들입니다. 비유해말하면 우리는 다같이 먼길을 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일본제국주의를 내쫓고 조국을 해방하고 민족의 번영을 가져올 앞날까지 가려면 험난한 먼먼 길을 걸어야 할것입니다. 물론 이 사람들중에는 먼길을 가는데 어떻게 가느냐 하는 문제를 가지고 생각이 같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수 있고 또 실지로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명심해야 할것은 어떤 사람이건 조국과 민족의 운명을 해결해야겠다는 하나의 큰 리념으로 통해있다는 사실입니다. 누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있든지 그것이 이러한 리념으로 통해있지 않다면 그게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결국 우리는 누구나 다같이 이 큰 리념속에서 심장이 불붙고있는것입니다. 그렇기때문에 내가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고싶은것은 모든 사람들이 이 큰 목적앞으로 엄숙히 걸어나와 자기를 돌아보며 반목과 질시를 버리고 우리의 사랑하는 조국강토에서 일제를 내몰기 위하여 천이면 천, 만이면 만이 다 굳게 단합하여 신들메를 든든히 하고 멀고도 준엄한 길을 함께 걸어나가자는 그것입니다. 멀고 험한 길을 걸어가려면 우리는 거치른 바다도 건너야 하고 험한 준령도 넘어야 합니다. 피도 흘리고 가슴아픈 희생도 있을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만난을 극복하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야 하며 원쑤와 싸워야 합니다. 오직 우리에게 두려운것은 그 험난한 길에서 우리들의 의지가 되고 힘이 되고 용기가 되는 단결을 잃는 그것입니다. 우리는 첫째도 단결이고 둘째도 단결입니다. 억압받고 학대받는 사람들 그리고 뭉칠수 있는 모든 반일세력들은 철통같이 단결하여 통일된 힘으로 일본제국주의강도들을 우리 조국땅에서 하루빨리 몰아내고 우리의 아름다운 3천리금수강산에 민족의 번영을 이룩하여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너도나도 튼튼히 어깨를 겨룹시다. 이런 각오로 달려나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 조선인길림소년회는 뜨거운 지지와 존경을 보낼것입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만면에 웃음을 짓고 손을 들어 흔드시였다. 열광적인 박수가 터졌다. 리선엽과 김찬의 축사로 하여 대립되였던 감정들이 눈녹듯 스러져버리고 모든 사람의 가슴속에서 앞이 쑥 열리는것 같은 쾌감과 흥분이 쿵쿵 뛰며 돌아갔다. 오동진이도 얼굴이 활짝 밝아져서 두터운 손바닥을 요란스럽게 두드렸다. 리선엽과 김찬이도 서로 등을 지고 앉아서 박수를 쳤다. 《오빠, 정말 놀라와요,》 《너무 흥분하지 말아.》 채경은 눈물이 글썽거리는 누이동생을 달래였다. 그러나 그 역시 흥분에 휩싸여 가슴이 뛰였다. 아직 그이의 연설을 론리로 깊이 새길수는 없었으나 새롭고 큰 무엇이, 아니 그이의 온 사상이랄수도 있을것 같은 그런것이 가슴을 뜨겁게 쳤다. 페회가 선언되자 회의장은 더욱 웅성거리며 끓었다. 학우회 역원 송춘보가 혼잡속에 일어서서 소년회 역원으로 뽑힌 사람들은 다들 남으라고 선언을 했다. 그도 인젠 그이의 지도밑에서 일에 신바람이 난것이였다.
제 4 장
물결이 일어난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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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호는 오늘밤에도 책상앞에 마주앉아서 시를 썼다. 그는 몇줄씩 쓰다가는 째버리고 다시 썼다. 다시 써서도 마음에 들지 않아 또 째버렸다. 그러다가는 책상우에 팔굽을 짚고 이마를 주먹으로 떠받들고 앉아서 생각에 잠겼다. 《자네 집에다 편지를 안쓰나?》 정지방에서 봉숙이어머니가 오랍동생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편지는 써서 뭘해요.》 《아니 뭘하다니? 장사가 망해서 살수 없게 됐다고 눈물겨운 사연을 적어보내왔는데 회답을 안하겠단말인가? 그런 편지가 아니더라도 아버지의 편지를 받았으면 의례 회답을 써야 할일이지.》 봉숙이어머니는 오랍동생을 나무랐다. 그는 지금 굵은 바늘로 포대기를 꾹꾹 꿰매고있다. 포대기는 여러해를 두고 해지면 붙이고 해지면 붙이고 해서 인제는 본바탕을 알아볼수 없게 되였다. 그래서 그 더덕더덕한 바탕에 바늘이 잘 들지 않아 그는 몇뜸씩 뜨고는 바늘끝을 머리밑에 훑군하였다. 《누님, 너무 걱정말아요. 회답을 쓰라면 쓰긴 하겠지만 회답을 한다고 망한 살림이 바로 되겠나요? 또 망하긴 무어가 망해요. 보지 않아도 꼭 누님같이 걱정이 자심한 아버지가 불경기때문에 술이 잘 팔리지 않으니까 큰일 났다구 편지를 쓴다 어쩐다 야단을 했을테지요.》 《편지를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하나?》 《편지를 봐야 그거죠.》 신동호는 기분이 좀 흐려져서 책상우에 널려있는 책과 종이를 쌓아놓으며 대답했다. 신동호네는 강원도 어느 고을에서 조그만 양조장 하나를 경영하고있었다. 그런데 오늘 집에서 온 편지에 의하면 인젠 양조장을 경영할수 없게 되였다는것이였다. 왜놈이 들어와서 큰 자본으로 양조장을 건설해놓았기때문에 신동호네 양조장따위는 거기에 짓눌려 술을 팔아먹을수 없게 되였다는것이다. 그래서 부득이 양조업은 망할 형편인데 이 불행을 홀로 묵새길수도 없고 또 너희들이 집안불행을 모르고있어서는 안되겠기에 편지를 띄우노라고 했다. 편지를 받은 봉숙이어머니는 남몰래 한참 울었다. 그러나 오랍동생 신동호는 누이와는 달리 벼룩이 무는것 같은 충격도 받지 않았다. 방금 자기 입으로 이야기한것 같이 아버지의 편지가 공연한 소리라고 생각해서 그러는것은 아니였다. 그자신이 아직 생활이라는 짐을 지고 걸어가보지도 못했거니와 또 생활에 대한 견해도 누이와는 달랐다. 그는 생활이란 살아있는 이상에는 있기로 마련이고 또 그 생활이란것이 복잡하고 거치른 사회의 물결속에 있는만큼 부대끼기 마련이라고도 생각했다. 그러나 부대끼면서도 존재하는것이 생활이기때문에 생활을 놓고 울고불고 할 필요는 없다고 여겼다. 《내 그러지 않아도 한번 말을 하자고 별러왔네만 자네는 지금 나라를 잃은 백성으로서 행동하는것이나 생각하는것이 사람답질 못해. 집안살림이 왜놈때문에 망했다면 보통 젊은 사람이라면 이를 갈걸세.》 《흥, 그런들 소용있어요.》 《아니, 그래 분하지도 않단말인가? 왜놈에 대해서 원쑤를 갚겠다는 생각도 나지 않아?》 《분한 생각이 난들 어떻게 해요? 누님에겐 나라를 독립시킬 무슨 방도라도 있어요?》 신동호는 불쑥 일어섰다. 몹시 역겨운 생각이 드는것이였다. 《방도를 찾아내야지. 방도가 없다고 그냥 팔짱만 끼고 앉아있겠나.》 《그런 말씀은 매부가 늘 하던 말씀이지요.》 《매부가 하던 말이 그래 나쁜가? 자네 매부는 그래도 독립운동을 하다가 돌아가셨어.》 신동호는 그다음에는 대꾸가 없이 방안을 왔다갔다 했다. 사실 그는 누이가 말하는 이 문제에 대해서 그저 남의 일처럼만 여기는것은 아니다. 그자신 일제에 대한 미움이 없는것도 아니며 일제를 몰아내고 조선독립을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없는것도 아니였다. 그러나 그의 머리로는 도저히 이 일이 가능하리라고 생각되지가 않았다. 그렇기때문에 그는 누이가 늘 자기남편의 희생에 대해서 말하는것을 가슴아프게 느끼긴 하면서도 별수 있느냐 하는 반발이 일어나는것이였다. 그는 길림에서 벌어지는 독립운동자들의 모임에도, 사회주의자들의 모임에도 수없이 다니며 구경을 했다. 그들이 서로 물어뜯군하는 싸움도 수없이 보았다. 그는 차츰 이 현실에 대한 혐오가 생기였다. 수없는 사람이 목에 피대를 세우고 싸운들 어떻단말인가! 그따위 싸움을 해서 무엇이 되겠는가! 밤낮 독립의 방도를 모색한다고 하는데 과연 독립할수 있는 길이 있기나 한걸 가지고 그러는가! 그는 이 환멸의 현실을 마구 들부셔버리고싶은 생각도 났다. 어쨌든 이 싫증을 느끼게 하는 현실은 신동호로 하여금 일종의 체념에 떨어지게 하였다. 모든것을 단념한 기분상태였다. 이런속에서 그는 자기 혼자의 꿈을 추구했고 랑만을 추구했다. 그래서 얻어진것이 소라껍질속세계와 같은 퇴페시의 세계였다. 얼마후 신동호는 밖으로 나왔다. 그는 양복주머니에 두주먹을 꾹 찌르고 거리를 걸어갔다. 밤이 벌써 퍼그나 깊었다. 넘쳐나던 생활이 모두 처마밑으로 기여들어가고 가로수들도 묵중히 서서 자고있다. 엷은 그물로 얼굴을 가리운듯한 달이 꿈결처럼 빛을 부어내렸다. 신동호의 정신은 역시 번민하는 꿈의 호수가에 가있었다. 오늘밤에는 거기에 그 어떤 선녀가 서서 피리를 불었다. 신동호는 그 피리소리를 좇아서 자기의 시상을 붙잡으려고 애썼다. 신동호가 거리의 가로수밑으로 걸어가는 때였다. 리선엽목사네 례배당에서 소년회창립의 모임을 끝낸 군중이 와 터져나왔다. 열어제낀 문으로 불빛이 내비치고 들끓는 학생들이 언덕으로 떼를 지어 내리밀렸다. 시상을 더듬으며 걸어가던 신동호는 얼른 가로수밑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밀려내려오는 학생들쪽으로 마주 걸어가고싶은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잠간 서서 망설이다가 도로 돌아서서 골목길로 들어섰다. 신동호에게는 조용하고 호젓한 길이 좋았다. 달빛도 골목을 비친 달빛이 더욱 다정스러운것 같았다. 그는 떠드는 거리를 등지고 골목으로 자꾸 걸어나갔다.… 회의를 끝내신 김성주동지께서는 소년회 역원들과 함께 앉아서 앞으로 할일을 토의하시고나서 밤이 늦어서야 하숙으로 돌아오셨다. 그이께서 문을 열고 들어서시는데 봉숙이어머니가 신동호의 책상앞에서 엉겁결에 물러섰다. 손에 종이를 한줌 쥐였다. 《인제 돌아오나?》 《네, 왜 아직 주무시지 않습니까?》 《이걸 좀 봐주게. 우리 동호가 무얼 밤낮 이렇게 쓰고있나? 오늘밤에두 자네가 그만치 회의에 나가자고 했는데 회의엔 안나가구 밤새 앉아서 이걸 쓰다가 어디로 나갔네.》 봉숙이어머니는 째고 긋고 한 시 원고뭉치를 그이의 앞에 펼쳐놓았다. 《이게 시라는겁니다.》 《시? 시란게 무언가? <관동별곡>같은것 말인가?》 《허허허, 말하자면 그런것이지요.》 《아니, 그래 지금 <관동별곡>을 쓰고앉아있단말인가?》 봉숙이어머니는 두눈이 커져서 그이의 얼굴을 마주보았다. 《아주머니, 아무렴 동호동무가 길을 잘못 가기야 하겠습니까. 시를 쓴다 해도 혁명을 위해 시를 쓰는 혁명시인이 되겠지요.》 《글쎄 그렇게 되기를 어떻게 바라겠나. 인제두 내가 한참 타일러주었네만 저건 아직 셈이 없는 철부지일세. 아버지가 늘그막에 본 귀동이라고 귀엽게만 길러서 세상이 무언지를 모르고있네. 나라가 어떻다는것도 모르고 살림이 어떻다는것도 모르구 청맹과니같은 사람일세.》 《아주머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두 인제 옳은 길에 들어섭니다.》 《난 어떻든 자네를 믿네. 저 사람을 누가 사람으로 만들어주겠나? 난 그래두 오랍동생 하나 남은걸 잘 양해보자구 령감이 살아있을 때 령감과 얘기를 해서 데려다가 기르는데 제가 그 심정을 알아주구 옳게 돼주어야말이지 그걸 몰라주니 하는수가 있나.》 봉숙이어머니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이런 말을 하면서 원고뭉치를 가쯘거려 책상우에 올려놓았다. 늘 그런것처럼 그의 말속에는 남편을 잃은 자기 신세의 서글픔이 어려있었다. 이날밤 신동호는 거의 새벽녘이 되여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그때까지 책을 읽고계시다가 이슬에 젖어 후줄근해져서 들어서는 신동호를 쳐다보며 가볍게 미소를 지으셨다. 《어데 갔다 인제 오오?》 《송화강에 산보를 나갔댔소.》 《그래 좋은 시상이라도 잡았소?》 《좋은 시상이 뭐 그렇게 쉽게 잡히겠소.》 신동호는 어쩐지 기분이 나지 않는 소리로 말했다. 얼마후 김성주동지께서는 불을 끄고 신동호와 함께 자리에 누우시였다. 《동호동무.》 그이께서는 어둠속에서 부드러운 음성으로 부르시였다. 신동호는 그린듯이 누워있었다. 《난 오늘밤 동무가 회의에 나오는가 해서 몹시 기다렸댔소. 정 나오지 않기에 동무를 데리려 사람을 보낼가 하다가 말았소.》 《…》 《난 동무에게 진심으로 얘기하오. 동무가 시를 쓰는것을 나도 반대하지 않소. 어떤 시를 쓰는가 하는것이 문제라고 보오. 내 아까 동무가 쓴 시를 읽어보았소. 시에서 동무의 재질은 충분히 느낄수가 있었소.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그런 시를 누가 읽어주겠소? 시인이 자기 시를 읽어주는 사람이 없다는것처럼 불행한 일이 어디 있겠소. 자기 시의 독자가 없다는것은 자기가 사회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 옳은 시를 쓰고있지 못하다는것을 말하는것이 아니겠소. 그 좋은 재질을 가지고 왜 혁명적인 시를 쓰지 못하오?》 그래도 신동호는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큰숨을 내쉬였다. 그것은 다 듣고있노라는 기척같기도 하였다. 벌써 몇번 충고를 해주신 이야기였다. 어떤날 밤엔 그이의 말씀에 신동호가 자기 주장을 들고 일어나 기염을 올리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이께서는 더욱 진지하게 달래면서 혁명의 길에 들어서서 시를 쓰라고 하시였다. 《내 인제 동호동무의 누님이 걱정하시는 말씀도 들었소. 동호동무나 나나 지금 여기에 와서 공부하는 목적이 뭐겠소? 그저 글을 배워가지고 앞으로 자기 한몸의 안일이나 영달을 꾀하기 위해서이겠소? 우리 조선청년들은 지금 그렇게 할 형편에 놓여있지 못하오. 우리는 잃어버린 나라를 찾아야 할 무거운 의무를 지니고있소. 이 목적이상 더 큰 목적은 없소. 여기에 모든것을 다바쳐야 하오. 신동무의 시에 대한 재능도 여기에 바쳐져야 하오. 신동무, 듣소?》 《듣고있소. 나두 요새 고민이 없는건 아니요. 내가 과연 앞으로 문학을 할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왜 문학을 못하겠소? 우리에게 혁명적인 문학이 얼마나 필요하게 문학을 못한단말이요? 꼭 앞으로 혁명적인 시를 많이 써야 하오.》 신동호는 그다음에는 또 말이 없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좀더 진지한 이야기를 해주려고 하시다가 밤이 너무도 깊은것 같아서 말씀을 끊으시였다. 그이께서는 신동호가 잠이 드는것을 보시고는 도로 자리에서 일어나시였다. 책을 더 읽으려고 불을 켤가 하시다가 신동호가 깨여날것 같아 그만 두고 조용히 일어서서 밖으로 나오시였다. 그이께서는 뜰을 거닐며 생각에 잠기시였다. 조직한 소년회를 어떻게 지도해나갈것인가? 오늘밤의 조직은 화전에서 조직한 《ㅌ.ㄷ》나 무송에서 조직한 새날소년동맹과 같은 비합법조직이 아니고 합법적인 조직이다. 길림에서 벌어지는 복잡한 사회적인 혼탁, 이 혼탁속에서 시급히 대중적인 지반을 닦고 청년학생들을 공산주의후비로 키우려면 역시 합법적조직을 리용하지 않고는 안된다. 그래서 첫 조직을 내온것인데 인제 이 조직을 어떻게 운영해야 혁명의 알속을 얻어낼것인가? 이 조직이 가진 합법성을 어떻게 리용해야 하는가? 새롭게 생각되시는 문제들이 많았다. 합법적인 투쟁과 비합법적인 투쟁의 결합, 핵심을 기르며 핵심을 토대로 비합법조직도 확장해야 할 문제, 그이께서는 무르익혀오시는 수많은 문제를 놓고 생각에 잠기시였다. 그이의 머리속에는 오늘밤의 회의장 광경도 떠올랐다. 표표한 리선엽의 얼굴이 떠오르고 주먹을 흔들던 김찬의 얼굴도 떠올랐다. 그러는가 하면 회의장에 감돌던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들의 얽힘도 떠올랐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이 모든것이 혁명의 전진도상에서 몸소 헤쳐나가지 않으면 안될 뒤얽힌 밀림속처럼 생각되시기도 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