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서《불멸의 력사》 2

        장편소설

 

 

                                     천  세  봉  

 

( 제 7 회 )

 

제  3  장

 

물결이 일어난다 (1)

 

1

 

봄이 돌아왔다. 저녁해빛이 거리우에 비쳐내리고 잎이 피는 가로수가지들이 가는 바람에 살랑거린다. 경주는 벼겨 실은 손수레를 이끌고 정미소뒤 언덕길로 올라갔다. 벼겨를 사다 때려면 언제든지 이 언덕에서 애를 먹는다. 그러기에 벼겨를 사오는 날에는 늘 오빠와 함께 와서 오빠는 뒤에서 밀고 자기는 앞에서 끌고 했다. 그러나 오늘은 오빠가 길림을 떠나기전에 부엌을 고치느라고 같이 올수 없었다. 그래서 벼겨를 그전처럼 많이 사지도 않았는데 역시 언덕을 추어오르기는 힘들었다.

경주는 저녁해발이 누렇게 깔린 언덕길을 한걸음한걸음 톺아올라갔다. 얼굴에서는 땀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그는 힘든 생각보다도 무언지 모르게 구슬픈 생각이 저녁그늘같이 스며왔다. 그동안 마음을 다지고 또 다진 일이긴 하지만 막상 오빠가 떠나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속이 천근처럼 무거워졌다. 인제 자기는 이 길림땅에 홀로 남아서 어떻게 살것인가? 고산자로 떠나가는 오빠도 자기도 앞으로는 어떻게 하든지 혁명의 길을 찾아서 다같이 보람있게 투쟁하자는 맹세는 했다. 오빠는 고산자에 가서 일자리를 잡고 한편으로는 뜻이 맞는 동지들과 손을 잡고 투쟁을 시작하며 이어 길림에 있는 자기도 그리로 전학하도록 힘써보겠다고도 했다. 그러나 그 일을 어떻게 믿을수 있겠는가!

여기서 투쟁을 할수 없는데 거기 가서는 무슨 뜻맞는 동지들이 그렇게 흔해서 인차 투쟁을 시작하며 또 일자리를 어떻게 쉽사리 구할수 있겠는가? 어쩐지 그저 떠나가는 오빠나 혼자 떨어져있게 되는 자기나 다같이 불쌍하고 막막한 생각만 들었다. 그래도 오빠는 혁명을 위해서 그렇게 애를 썼건만 왜 아무 보람도 없이 길림에서 떠나야 하는가? 혁명이란 그저 말만 그렇게 화려하고 정작 실속은 없는것인가? 무엇이 우리를 배신했기에 우리 오누이는 이렇게 되였는가?

경주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괴였다. 그것이 땀방울과 함께 떨어져내렸다.

손수레는 점점 더 짐이 다리워왔다. 아직도 언덕받이길을 다 춰오르려면 한참 더 끌어야 했다. 경주는 땀이 질벅거리는 고무신끝을 땅바닥에 박으며 힘을 썼다. 그러는데 별안간 짐이 마구 밀려올라왔다.

경주는 얼른 뒤를 돌아보았다. 웬 학생이 뒤에서 짐을 밀고있다.

《아이, 누구세요?》

《어서 끄시오. 내가 뒤에서 밀테니까.》

두눈에 영채가 번쩍이는 학생이 고개를 들며 웃음을 지었다. 그 순간 경주는 가슴이 뭉클했다. 언제인가 이 학생을 두고 하던 오순희의 말이 생각났다. 그의 말에 의하면 이 학생이 강남공원에서 수백명 학생을 감동시키는 그렇게도 큰 연설을 했다고 했다. 그리고 맑스주의에 정통한 학생이라고도 했다. 고산자로 떠나겠다는 오빠도 이 학생을 두고 몇번인가 이야기했었다. 이 학생이 오자 각 학교의 학생들이 온통 웅성거린다는 말도 했었고 강남공원에서 연설을 했다는 날 밤에는 어데 가서 무슨 소리를 듣고 왔는지 온밤 꿍싯거리며 생각에 잠기기도 했다.

어데서 이런 비범한 학생이 이 길림에 나타났는가! 그 어떤 리상과 동경의 세계에서 불쑥 날아든 거인같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 학생이 이 언덕받이길에 와서 그의 손수레를 밀어주는것이다.

경주는 가슴이 두근두근 뛰였다.

《그만두세요. 제 힘으로도 끌고 올라갈수가 있어요.》

경주는 송구해서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지 말고 올라갑시다. 나도 언덕을 올라가는길인데 좀 밀면 어떻습니까?》

경주는 할수없이 돌아서 손수레를 끌었다. 학생이 어떻게 밀어올리는지 수레는 끌지 않아도 저절로 들들 굴러올라왔다. 경주는 점점 더 죄송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는 학생이 힘을 덜 쓰게 하느라고 온힘을 다해서 이를 악물고 끌었다.

얼마후 손수레는 언덕길을 다 춰올라왔다. 경주는 수레채를 놓고 돌아서며 김성주동지께 수고하셨다고 인사를 했다.

《별말을 다 합니다. 그런데 이 무거운걸 어째 혼자서 끌어올립니까?》

《혼자 힘으로도 넉넉히 끌어올릴수 있어요.》

경주는 수집게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머리수건을 벗어서 땀을 씻었다.

《그런데 이 근방에 법정학교에 다니는 채경이라는 사람의 집이 있다는데 어느 집인지 모르겠습니까?》

김성주동지께서는 언덕밑에 널린 나지막한 집들을 내려다보며 물으시였다. 경주는 잠시 대답을 못하고 얼굴을 붉혔다.

《언덕을 올라서서 왼편으로 구부러지면 집이 있다고 했는데…》

《바로 저희 집이예요.》

《아니 그럼, 동무가 경주동뭅니까? 채경동무의 누이동생인가요?》

《네, 어떻게 절…?》

《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고학들을 하면서 살아간다니 얼마나 고생스럽습니까.》

《고생이 무슨 고생이겠어요.》

경주는 낯이 더욱 붉어지며 공연히 땀씻은 수건을 비틀었다. 손등이 온통 트고 손가락 하나엔 헝겊까지 돌려감았다. 손가락마디가 트지 않게 하기 위해서 감은것이였다.

《지금 오빠가 집에 있습니까?》

《네, 있어요.》

《그럼 갑시다. 어느 집인지 이건 내가 끌지요.》

김성주동지께서는 얼른 수레채안에 들어서려고 하시였다. 그러자 경주가 머리수건도 못쓰고 달려와 채안에 들어섰다. 그리고는 뒤에서 짐을 밀어줄가봐 겁이 나 하는듯 다부지게 끌고나갔다.

한참 우불구불한 골목길을 빠져나가니 붉은 벽돌담장옆에 초가집 한채가 앉아있었다. 제비둥우리같이 작은 집이였다. 그래도 널쪼박을 다닥다닥 붙여 널바자까지 해서 둘러쳤다.

경주는 쪽널을 무어붙인 작은 대문안으로 손수레를 끌고 들어갔다. 손수레가 대문 문설주에 스치자 방울소리가 딸랑하고 울리였다. 문설주꼭대기에 메기입같이 입을 벌린 노란 방울이 하나 달려있었다. 그것이 대문을 건드리기만 하면 딸랑 소리를 내였다.

(깜찍한 솜씨들이군!)

김성주동지께서는 이런 생각을 하며 손수레를 따라 뜰안으로 들어서시였다.

《오빠! 어데 갔어요? 오빠!》

뜰안으로 들어간 경주는 오빠를 찾았다. 그러나 오빠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솥을 두개나 뽑아내다가 마당에 엎어놓았고 부엌문도 열어던진채 있었다.

《아마 어데로 나갔나보아요. 좀 기다리세요.》

《아니 가마는 왜 뽑았습니까?》

《부엌이 내서 고치느라고 그런답니다.》

경주는 부리나케 손수레의 바줄을 풀며 대답했다.

뜰안도 손바닥같이 좁았다. 그래도 작은 뜰안에 꽃밭을 만들고 무슨 꽃씨를 뿌렸는지 당추씨같이 노르끄레한 꽃순들이 다부룩하게 머리를 내밀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경주를 도와 짐을 부리우시였다.

《그만두세요.》

《그만둘게 있습니까? 동무네 집에 오니까 어쩐지 일을 하고싶군요.》

바줄을 풀고난 경주는 벼겨마대를 들어서 허청으로 날라갔다. 김성주동지께서도 벼겨마대를 나르시였다. 경주는 또 옷에 먼지가 묻는다고 질색을 했다. 그러나 그이께서는 그 소리를 못들은척하시였다. 오누이는 허청도 알뜰히 거두었다. 벽에 시렁을 매고 함지, 질그릇, 비 같은 살림도구들을 얹어놓았는데 한쪽구석에는 장작도 몇단 쌓여있고 우그러진 상자, 쇠쪼박, 철사 같은것도 가뜩 모아다 쌓아두었다. 울을 막은 널바자같은것도 이런 페물을 모아들여 해세운 모양이였다.

그이께서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지시였다. 그래도 이 눈물겨운 자립정신이 오누이의 생활을 지탱해나가게 만들고있다.

벼겨마대를 다 부리우고난 경주는 손수레를 밀고 대문밖으로 나갔다. 빌려왔던것을 돌려주러 간다고 하면서 널바자너머 누런 해빛속으로 달려가고있다. 영악스럽게 고된 세상을 헤치며 뛰는것 같았다.

경주가 나간 뒤 그이께서는 잠간 마당에 서계시다가 부엌으로 들어가시였다. 어떻게 되였기에 부엌이 내는지 알아보시려는것이였다. 그이께서는 한참동안 가마를 들어낸 아궁안이며 부엌바닥을 살펴보시였다. 부지깽이로 고래안을 휘저어보기도 하셨다. 이러는데 채경이가 멜대에 출렁거리는 물초롱 둘을 달아매고 대문안으로 들어섰다. 송화강에 나가서 물을 길어가지고 들어오는것이였다. 이 길림에서는 물이 없어서 음료수도 송화강물을 길어다가 밭아서 먹었다. 그래서 물을 한방울 쓰려 해도 송화강으로 나가야 했다.

《아니, 이게 누구요?》

부엌문앞으로 온 채경은 놀라며 물었다.

《허허허, 안됐소.》

《여길 어떻게 돼서 오셨소?》

《채경동무를 좀 만나볼가 해서 왔는데 경주동무마저 어데 잠간 다녀온다고 나가서 이렇게 혼자 빈집에…》

《하하하, 난 깜짝 놀랐구만.》

채경은 그제야 멜대의 물초롱들을 하나씩 토방우에 올려놓았다. 그는 아래도리가 온통 젖었다. 양복가랭이 하나는 아예 물에 행구어낸것 같이 되였다.

《요새 학교도 계속 나가오?》

채경이 물었다.

《계속 나가오.》

《그런데 학교에 나가 무얼 배울게 있겠소?》

《그건 무슨 말이요? 학교에 배울게 없다니?》

채경은 커다랗게 웃었다. 김성주동지께서도 웃으시였다. 권심이네 집에서 한번 만나 통성명을 한 정도의 사이인데 그이께서 집에까지 찾아와 속을 터놓고 대해주시니 채경은 여간 반갑지가 않았다. 그는 김성주동지에 대한 이야기를 한두번만 들은게 아니였다. 강남공원에서 연설을 들은 법정학교 학생들은 길림에 혜성이 나타났다고도 했다. 그래서 채경으로선 김성주동지에 대해서 은근히 존경심을 가지고 동경하게 되였던것이다.

《그래 무슨 일때문에 오셨소?》

《아니 해가 지는데 부엌부터 고치기요.》

《부엌이야 내가 고칠건데…》

《나두 좀 도웁시다.》

《허허허, 그럼 내가 인사가 되오?》

《솥을 뽑아놓고 인사를 차릴 경황이 있소?》

채경은 또 큰소리로 웃으며 신명이 나서 호미를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김성주동지께서도 채경을 따라 부엌으로 들어가셨다. 부엌이 어찌 좁은지 둘이 들어서니 몸을 비비고 돌아설 틈도 없다.

이러는데 경주가 부엌문앞에 나타났다.

《이게 글쎄 귀신 곡할 일이 아니요? 고래엔 구재 하나 없는데 불을 때기만 하면 우리 경주를 울린단말이요.…》

《오빠두 참…》

《너 울지 않니?》

《우는건가요, 눈이 시여서 눈물이 나죠.》

《그게 우는거지…》

그 소리에 김성주동지께서도 웃으시였다.

사실 채경은 뚝해보이긴 하지만 이렇게 좋은 사람이였다. 좋을뿐만아니라 가끔 음흉수를 놀아서 남을 곧잘 웃겼다. 그러기에 법정학교 학생들은 그를 놀부라고 부르기도 했다. 그가 이렇게 아주 불명예스러운 별명(사실은 채경에 대한 호의가 깔려있는 별명이였다.)을 가지게 된데도 배를 끌어안고 웃어야 할 채경의 음흉스러운 이야기가 숨어있었다. 채경이 우유배달을 하는 어떤 집에는 녀자사범에 다니는 한 녀학생이 있었다. 그는 아침마다 우유병을 받으면서 우유배달이 운동장근처에서 만나군하는 법정학교 학생과 모습이 꼭같은데 주의가 갔다. 아무리 보아야 얼굴이 꼭같았다. 그래서 녀학생은 어느날 저녁때 학교에서 돌아오다가 법정학교 학생을 만나서 물어보았다.

《당신은 쌍둥이짝이 아니예요?》

《네? 그건 무슨 말입니까?》

채경은 길을 가다가 우뚝 서서 녀학생을 마주 보며 반문했다.

《당신한테 쌍둥이형이 있거나 쌍둥이동생이 있지 않아요?》

《전 쌍둥이가 아닌데요.》

《아이참 이상해라! 그런데 어쩜 그렇게 꼭같을가요.…》

《무엇말입니까?》

《글쎄 아침마다 우리 집에 우유배달하는 청년이 있는데 그 청년의 얼굴이 당신의 얼굴과 꼭 같으니말이예요.》

《네, 허허허, 그 그건 제 동생입니다.》

《글쎄, 그럼 그렇겠죠. 어쩐지 꼭같다 했죠. 아니, 그런데 형은 학교에 다니면서 동생은 왜 우유배달을 시키세요?》

《그건 제 계모의 몸에서 난 동생입니다.》

《어마나, 계모의 몸에서 났다구 동생을 그렇게 천대하세요?》

《아무래도 한배속에서 나온 동생과 같을수야 없지 않습니까?》

《아이 무서워라. 당신은 놀부예요.》

녀학생은 뺑소니를 쳤다. 그뒤 채경이 우유를 가지고 가면 늘 그 녀학생은 분개해서 당신의 형은 놀부니까 그런 형과는 절연하라고 권고했다. 이래서 놀부라는 별명을 가지게 되였다.

부엌바닥에서 한참동안 고래를 쑤신다 아궁바닥을 가셔낸다 하고난 채경은 아무래도 고장을 알수 없다고 하면서 부엌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김성주동지께서 굴뚝에 나가보자고 하시였다.

《나가봅시다. 그러나 굴뚝이야 여북 잘 손질했기에 그러오. 굴뚝만은 양철로 말아세운것인데 이 길림바닥에서도 그만한 굴뚝이 없을거요.》

채경은 여전히 우스운 소리를 하면서 김성주동지를 따라 일어섰다. 뒤울안에 나오니 정말 굴뚝은 함석으로 말아세운것이였다. 녹이 가서 구멍이 뚫린데는 온통 종이도배까지 했다.

《이것 보시오. 바람 한점 안들게 때고 붙이고 했는데 굴뚝에야 무슨 고장이 있겠소?》

김성주동지께서는 아무 말씀 없이 한참 서서 굴뚝을 보시였다. 그러더니 얼른 굴뚝을 안아서 우쩍 드시였다.

《아니, 이건 어쩌자고 이러시오?》

《굴뚝밑을 좀 봅시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꼭대기가 휘청휘청하는 굴뚝을 안고 돌아서시였다. 채경이 얼른 달려들어 굴뚝꼭대기를 받아안았다. 그이께서는 굴뚝이 서있던 자리를 삽으로 와락 파헤치셨다.

《음, 여기가 고장이군. 굴뚝밑을 안팠으니까 부엌이 낼밖에 더 있소? 여기를 파야 하오.》

채경은 아무 대꾸 없이 고개를 기웃기웃했다. 역시 무슨 리치가 있는 말씀같기도 한것이였다.

《말하자면 바람의 함정을 만드는셈이지. 굴뚝속으로 들어온 찬바람이 고래속으로 내쏘지 못하고 이 함정에 빠져 힘이 꺾이도록말이요. 그뿐인가. 여기 빠졌던 찬바람은 더워져 다시 굴뚝으로 빠지면서 불길을 끌어당기기도 한단말이요.》

《리치가 그럴듯하오. 그게 과학인것 같소.》

《혁명하는것과 비슷하다고 할수 있겠소. 가령 중간에서 동요하는 력량이라도 혁명의 편에 끌어당겨서 돌려세우면 그만치 힘이 강해지지 않겠소. 찬바람을 덥혀서 불길을 끌어당기게 하는 리치와 같소.》

《허허허, 비유 역시 그럴듯하구만. 삽을 이리 주오.》

《아니 내가 마저 파겠소. 빨리 흙을 이기도록 하시오.》

김성주동지께서는 흰 운동화발로 삽을 꾹꾹 밟으며 삽자루가 휘게 흙을 파올리시였다.

채경은 마당으로 돌아나와서 경주와 둘이 흙을 이겼다. 어느새 경주는 벼짚을 도끼로 펑펑 찍어서 흙무지에 섞어놓았다.

《모두들 저 학생을 맑스주의자라고 찬탄하지 않아요.》

《응, 참 훌륭한 동무이다.》

《퍽 소박하시죠.》

《소박하기두 하구 식견두 대단히 넓은것 같다.》

오누이는 이런 소리를 소곤소곤 주고받으며 흙을 이겼다. 채경은 방금 들은 한마디 말씀속에도 새로운 진리가 있는것 같이 생각되였다. 동요하는 력량이라도 혁명의 편에 끌어당겨 돌려세우면 그만치 혁명의 힘이 커진다. 어쩐지 김찬이 같은 사람들에게선 들어볼수 없었던 강한 견인력을 가진 새로운 말이다.

채경은 몹시 유쾌한 기분으로 다리를 걷어붙이고 흙을 이겼다. 집안에서 허전한 그늘이 싹 없어져버린것 같았다. 오누이가 학교에 갔다가 집에 돌아오기만 하면 서로 낯을 쳐다보며 쓸쓸한 심정들을 숨기려고 했는데 오늘저녁에는 애당초 그런 맘고생들이 있었던것 같지도 않았다. 오누이는 연방 굴뚝쪽으로 흙을 날랐다. 둘이 다 정말 부엌이 내지 않았으면 하고 바랐다.

얼마후 굴뚝은 다시 일어섰다. 그이께서 발돋움을 하시며 굴뚝의 웃도리를 처마밑 산자에 비끄러매셨다.

《집 키가 겨우 내 키와 비슷하군.》

《그게 세상에 태여난지 얼마 안돼서 그렇다오. 인제 자랄거요.》

김성주동지의 말씀에 채경이 씽긋씽긋 웃으며 이렇게 대답했다. 굴뚝밑에 앉아서 흙을 바르는 경주는 소리를 내여 웃지는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부엌의 가마까지 다 붙이고나니 날이 어둑어둑 저물었다.

경주는 부엌아궁앞에 앉아서 사뭇 설레는 마음으로 불을 지펴넣었다. 아궁안이 습해서 처음에는 불이 잘 당기지 않았다. 그러던것이 불이 당지기 시작하자 이어 고래속으로 불길 달려들어가는 소리가 와릉와릉 울리였다. 밖에서 오빠가 굴뚝으로 연기가 뽑힌다고 소리를 쳤다. 경주는 밖으로 달려나갔다. 정말 양철굴뚝으로 검은 연기가 뭉클뭉클 솟아오르고있다. 경주는 다시 부엌으로 달려들어왔다.

《어쩜, 그런것까지 다 환하실가! 그처럼 간단히 고쳐도 되는걸…》

경주는 눈물이 가랑가랑해져서 중얼거렸다. 부지깽이로 아궁안을 휘둘러보았다. 그래도 불이 꺼지질 않는다. 부엌이 들지 않을 때 늘 불길이 일어서라고 아궁안을 휘저어놓으면 불길이 일어서기는커녕 새까맣게 꺼져버리군했었다. 그랬는데 인젠 아궁안을 아무렇게 휘저어도 불길이 펄펄 일어서 돌아가며 꺼지지 않았다. 얼마 안있어 김성주동지께서도 부엌으로 들어오시고 채경이도 뒤따라 들어왔다. 모두들 타오르는 불길을 들여다보았다. 채경은 불빛속에서 벌씬벌씬 웃으며 《기적이군, 참 기적이야!》하고 부르짖었다. 그는 이것이 아궁안의 불길이 아니라 자기네 알가마같은 생활에 나타난 그 무슨 새 징조의 불길과 같이도 느껴졌다. 채경은 더욱 기분이 흡족해져서 김성주동지와 함께 웃방으로 올라갔다.

경주는 서둘러 저녁을 지었다. 그는 김성주동지의 저녁도 지으려고 했다. 어떻게 거저 가시게 할수 있는가! 찬도 없고 수수밥이긴 하지만 오빠와 함께 앉아서 나누고 가시도록 저녁을 지어야 한다. 그래야 인사가 아니냐! 경주는 이런 생각을 하며 불을 땐다, 쌀을 인다 하였다. 허청칸시렁에 얹어두었던 북어낌에서 북어도 두어개 뽑아다가 방치돌에 놓고 두드렸다. 북어자반을 만들려는것이였다.

이러는동안 웃방에서는 김성주동지와 채경이사이에 이야기가 시작되였다. 혁명에 대한 이야기인것 같아 경주는 북어 두드리던 손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려길학우회문제만 해도 길림학생들이 큰 포부를 가지고 내온 조직인데 그렇게 흐지부지 내던질수야 없지 않소. 그리고 혁명에 대해서도 잘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겠소. 나는 채경동무와 별로 깊이 상종할 기회는 없었지만 속으로는 은근히 함께 손잡고 싸울수 있는 미더운 동지라고 생각해왔소. 그런데 오늘저녁 집에 와보고 그런 확신이 더 굳어졌소. 오누이가 이처럼 외로운 환경에서도 씩씩하게 자기 생활을 자기 힘으로 개척해나가면서 학교에서나 사회운동에서 앞장서있다는것은 어쩐지 눈물겨운 생각이 드오.》

경주는 어딘가 먼곳에서 들려오는 자장가소리에 귀를 기울이듯 방치를 소리나지 않게 들었다놓았다하며 이야기를 들었다.

《속담에 공든 탑이 무너지랴 하는 말이 있지 않소. 그런데 그처럼 혁명을 해보겠다고 애를 쓰다가 물러앉아서야 되겠소? 난 솔직히 말해서 오학천이 길림을 떠난것과 채경동무가 길림을 떠나겠다고 하는것은 다르다고 생각하오. 오학천이는 아직 그 어떤 리념도 가지지 못하고 헤매는 사람이지만 채경동무야 어디 그렇소?》

《나한테는 그 무슨 똑똑한 리념이 있는줄 아오? 나도 앞길이 막막하오. 나는 불쌍한 누이동생을 데리고 그 애의 손에서 밥을 얻어먹으며 그애의 학비 한푼 보태주지 못하고 사는놈이요. 이런 처지가 더욱 우리 오누이를 혁명의 길에 나서도록 채찍질한것인지는 모르겠소. 그런데 내가 오늘과 같은 결심을 지니게 된것은 생활의 고통이나 누이동생의 눈물겨운 정상을 보기가 괴로와 그러는것은 아니요. 혁명자체의 앞길이 막혔기때문이요. 그래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오? 갈곳이 없으니 마음을 달리 가질수밖에 더 있소?》

오빠의 목소리는 격렬하였다. 자기와 의논할 때는 그렇게 가슴 아픈 소리를 하지 않았다. 이제 듣고보니 오빠의 심정이 얼마나 복잡하고 얼마나 괴로왔던가 하는것이 짐작되고도 남았다.

《오늘의 현실은 량심있는 조선청년들이 혁명을 하려면 누구나 다 한번씩은 부딪치게 되는 그런 쓰디쓴 현실이요.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피할것이 아니라 억세게 밀어헤치고 나가야 하오.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소. 길림에서 정말 혁명을 할수가 없겠소? 과연 혁명의 앞길이 막혔겠소? 나는 채경동무 오누이가 그 어떤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씩씩하게 이렇게 생활하는 그자체만으로도 혁명에 대하여 랑만을 가지고 전진하는것 같은 든든한 생각을 금할수 없소. 채경동무, 그러지 말고 우리 여기서 함께 손잡고 혁명을 해봅시다. 채경동무가 떠난다면 경주동무는 또 얼마나 외롭겠소? 혁명을 위해서는 일신상의 그 어떤 희생도 참아야 하겠지만 채경동무의 그 생각이 과연 경주동무에게 어떤 희생을 요구할만큼 떳떳한것이라고 말할수 있겠소?》

경주는 더는 눈물을 참을수가 없었다.

그는 얼른 부엌으로 내려와 아궁앞에 앉아서 얼굴을 싸고 울었다. 그이의 후더운 목소리가 너무도 가슴을 흔들었다. 어떻게 저런분이 이처럼 별안간 우리 집에 오셨을가? 앞이 자욱한 어두움을 밀어주려고 우리 집에 오셨을가?

《오빠, 왜 손잡고 혁명을 하시자는데 말씀이 없으세요? 난 그이의 지도밑에서 혁명을 하게 된다면 우리의 앞날도 눈부실것 같애요. 눈부실것 같애요!》

경주는 격정에 목이 메여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2

 

채경은 이날밤 잠을 못잤다. 그는 김성주동지께서 하시던 말씀이 떠올라 생각에 잠기군했다.

《오늘의 현실은 량심있는 조선청년들이 혁명을 하려면 누구나 다 한번씩 부딪치게 되는 그런 쓰디쓴 현실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피할것이 아니라 억세게 밀어헤치고 나가야 하오.》

역시 옳은 이야기였다. 모든것을 고쳐 생각해보고 고산자로 떠나는 문제를 결정해야 될것 같았다. 그리고 자기가 이때까지 환멸을 가지고 대해오던 이 길림에 김찬이나 권심이들과는 다른 새로운 세력이 억세게 일어나서 그 파도가 자기에게도 미쳐오고있다는것을 느끼지 않을수 없었다.

채경은 우선 고산자의 한윤수에게 간단한 회답을 썼다. 편지를 받고 급히 떠나려고 했는데 그렇게 할수 없는 일이 생겨서 떠나지 못하니 량해해달라는, 말하자면 가겠다거나 가지 못하겠다거나 어느쪽도 확언을 않는 내용이였다. 이러노라고 채경은 밤을 꼬박 새웠다. 이튿날 그는 여느날과는 달리 아침 일찌기 일어났다. 그는 맑은 기분으로 마당을 쓴다, 꽃밭에 호미질을 한다, 떨어진 널바자에다 못을 박는다 하며 일손을 다그쳤다. 경주도 밝은 얼굴이였다. 그도 내기 한점 없는 말쑥한 부엌에서 불을 땐다, 그릇을 부신다 하며 서둘렀다.

《오늘아침엔 사람 사는 집안같구나. 경주가 울지도 않구…》

채경은 부엌에 들어와 세수물을 떠들고 나가며 누이동생에게 롱도 한마디 건네였다.

《오빠, 소금은 안가지고 나가요?》

《응, 좀 다우.》

경주는 알잔에 소금을 담아 내밀어주었다.

채경이 세수를 하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데 오동진의 딸 순희가 벌써 학교로 가다가 경주를 찾아 마당으로 들어섰다. 흰 저고리에 검은 치마를 입은 날씬한 몸매의 예쁜 처녀다.

《넌 벌써 학교로 떠났느냐?》

《뭐 벌썬가요? 여덟시가 다 됐는데요.》

《우린 경주가 잠꾸러기돼서 늘 아침이 늦는단다.》

채경이 이렇게 말하자 오순희는 롱말인줄 알고 깔깔대며 웃었다.

《아이, 우스워, 경주가 잠꾸러길게 뭐예요?》

《넌 모르는 소리 한다. 우리 경주는 잠이 들면 들어가도 모른단다. 그러게 언젠가는 한번 도적을 맞힐번했어.》

오순희는 또 바스러지게 웃었다. 채경이도 수건으로 목덜미를 문대며 시물시물 웃었다.

《그런데 순희야, 너의 오빠는 어데로 떠났어?》

《서울로 갔어요.》

《아니, 상해로 간다던게 왜 서울로 떠났느냐?》

《아버지가 상해로 가면 학비를 안대주겠다고 선포했어요. 오빠가 그 호랑이같은 아버지기세를 꺾나요?》

그 소리에 채경은 껄껄 웃었다.

《서울로 갔으면 잘했다. 아무래도 길림에서 공부하는것보다야 나을테지.》

《경주오빠는 고산자로 언제 떠나요?》

《글쎄, 순희가 미워서도 빨리 떠나긴 해야겠는걸. 너 내가 없으면 우리 경주한테 더 자주 올테지?》

《아예 책상두 여기다 가져다놓겠어요.》

부엌에서 이 소리를 듣는 경주는 은근히 한숨을 지었다. 어제밤 확답은 없었지만 오늘아침 오빠가 전에없이 기분이 개운해져서 들락날락하는걸 보고는 그 무슨 새로운 결심이라도 가졌는가 싶었는데 아무래도 떠날 마음을 버리지 않고있는것 같았다. 그처럼 진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 왜 맘을 변동시키지 못할가? 거기 가면 일자리도 아직 없다는데 무엇때문에 그리로 가지 못해 뿌등뿌등 애를 쓰는것일가!

경주는 경황이 없이 조반을 먹고 오순희와 함께 학교로 갔다.

이날엔 채경이도 학교로 나갔다. 원래 오늘은 가지고 갈 짐이라도 꾸려서 먼저 철도편으로 부쳐놓고 떠나자고 하였는데 그것은 그만두고 학교로 발길을 돌렸다.

학교로 나오니 이날엔 제일 듣기 싫은 상법을 말더듬이법학학사가 나와서 두시간이나 강의를 했다. 그전같으면 코가 류달리 큰 말더듬이의 얼굴이나 쳐다보고 앉아있었을터인데 오늘은 꼬치꼬치 필기도 했다.

저녁때 집으로 돌아오려고 하는데 오순희가 또 집으로 찾아왔다. 채경의 팔을 끌면서 무작정 자기를 따라오라는것이였다. 무슨 일때문에 어디로 끌고가는가고 물어도 대답하지 않았다. 시치미를 뻑 따고 발만 재게 놀리는걸 봐서는 불길한 일이 생겼을상 싶지도 않고 그렇다고 하여 무슨 굉장한 경사가 생긴것 같지도 않았다. 필경 누구의 부탁을 받고 자기를 데리러 온것 같은데 들판에 풀어놓은 망아지처럼 장난기가 센 처녀는 채경의 감질을 돋구느라고 그러는지 감쳐문 입술을 삐죽 내밀며 이따금씩 그를 돌아다보군할뿐이였다.

《순희야, 우리 오늘은 좀 친선적으로 지내자. 도대체 날 어데로 끌고가는거야?》

채경은 길다란 다리를 징겅징겅 옮겨놓으며 승산없는 흥정을 붙였다.

오순희는 곱지 않은 눈길로 그를 흘겨보았다.

《선보러 가지요.》

《뭐 선?! 내가 벌써 장가를 가게 됐나.》

《되구말구요. 혁명도 포기했는데 장가나 가서 자수성가를 하는게 좋지요.》

《혁명을 포기하다니. 너 그게 무슨 소리냐?》

《뭐 길림을 떠나 고산자로 간다면서요?》

《고산자로 가는게 혁명을 포기하는걸로 된단말이냐?》

《그렇잖구요. 복판을 떠나 변두리로 가는거야 혁명을 안하겠다는거나 마찬가지가 아니나요. 그런바치고는 빨리 색시라도 얻어서 경주의 부담을 덜어주는게 낫지 않겠나요.》

오순희는 잘 익은 가을콩처럼 땅땅 여무진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다. 오빠의 고산자출발설에 뒤이어 생긴 경주의 고민이 그에게 그대로 옮아버린것 같았다. 불쌍한 누이동생에게 그런 고민은 왜 사서 주나요? 그게 과연 경주오빠다운 처사일가요? 오빠가 떠나면 동생의 처지가 어떻게 되리라는거야 다 짐작하실텐데 어쩌면 그렇게도 인정머리없는 결심을 하셨나요? 개인의 번민을 절대시해도 분수가 있지 않나요. 난 경주오빠가 그런 사나이인줄은 정말 몰랐어요.… 담차게 내디디는 오순희의 매 발자국은 마치 채경이를 이런 말로 질책하는것 같았다.

경주의 아픔을 자기의 아픔처럼 받아들이고 그것을 심장속에 용해시킨 처녀의 깨끗한 동지적순정이 눈물겹도록 채경이를 감동시켰다. 그러나 채경은 내색을 하지 않고 여전히 능글거리는 어투로 말했다.

《그러니까 어제오늘 너희 두 참새가 머리를 맞대고앉아 이 오래비를 두고 수태 찧고 까불고 했구나. 어쨌든 내 순희한테는 손을 들었다. 자, 항복이다.》

그는 어깨우로 짐짓 두손을 들어올리기까지 했다. 고산자출발계획은 이렇게 실천전야부터 아래우로 드센 압력을 받고있다. 정색해서 생각해보면 무슨 화풀이처럼 쏟아지는 오순희의 비난에도 잠든 리성을 깨우는 반박할수 없는 진리가 있는것 같다. 만나는 사람마다 그의 결심에 제동을 건다. 채경은 한걸음 물러서서 그 모든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수 없었다.

오순희는 뜻밖에도 자기 집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다 왔어요.》

채경은 어리둥절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였다. 그렇다면 이 이악한 처녀가 나의 고산자출발을 막느라고 나를 여기까지 유인해다가 무슨 담판 비슷한것이라도 벌리자는게 아닐가. 경주를 생각하여 나를 옴짝달싹 못할 궁지에라도 비끄러매놓으려는것이 아닐가.

오순희는 사랑방앞으로 채경을 끌고가 문고리를 잡고 위혁하듯 말했다.

《고산자문제를 잘 생각해보세요. 취소하면 꽃다발이구 취소 안하면…》 처녀는 손으로 무엇인가를 썩둑 잘라던지는 시늉을 해보였다. 그리고는 채경이를 문안으로 떠밀었다.

《여기예요. 여기서 경주오빠를 기다리고있어요.》

그는 누가 기다린다는 암시도 없이 알쑹달쑹한 소리를 하고는 쌩긋 웃으면서 본채로 들어가버리였다.

채경은 대진내가 확 풍기는 방안에 들어섰다. 며칠전까지 《정의부》령감들이 모여앉아 3부통합을 위한 사전회의를 벌리던 방이다. 어제부터 그들은 《복흥태》정미소로 옮겨가고 지금은 여기에 최봉, 김리갑, 박두학, 권태일을 비롯한 《ㅌ.ㄷ》성원들이 한가득 들어앉았다. 낯설은 얼굴, 낯익은 얼굴들이 하나 둘씩 점차 그의 눈에 안겨든다. 모두들 정다운 눈으로 그를 지켜보고있다.

맨복판에 앉아계시던 김성주동지께서 얼른 일어나 채경의 손을 잡아끄시였다.

《어서 들어오시오. 오느라고 수고했소.》

그이께서 반갑게 인사를 하시였다. 환한 얼굴, 영채도는 안광, 활달하고 세련된 몸가짐… 마주서면 무엇인가 토로하고 고백하고 하소하고싶은 친근한 모습이다.

채경은 끌리는대로 그이의 곁에 주저앉았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그의 무릎에 손을 얹고 부르신 사연을 설명하시였다.

《중요한 문제를 의논하자고 채경동무를 불렀소. 기다리다가 늦어지기에 회의를 시작했소. 무슨 안건이냐 하면 안창호의 석방운동을 어떻게 밀고나가겠는가 하는거요. 방금 꼭지를 뗐으니 채경동무도 좋은 안을 내놓구려.》

그이께서는 좌중을 향해 활기있게 호소하시였다.

《자, 그러면 토의를 계속합시다. 생각하는바를 기탄없이 내놓읍시다.》

채경은 마음을 안정하고 장내를 둘러보았다. 거개가 생소한 얼굴들이여서 서름서름한 생각도 없지 않았다. 좌중의 몇몇 청년은 작업복차림으로 앉아있다. 로동판에서 일하는 사람들 같았다. 모두 허우대도 크고 패기들이 있어보였다. 채경의 곁에 앉아있는 여드름투성이얼굴의 청년한테서는 구수한 낟알냄새, 정미공장냄새가 났다. 화성의숙시절에 국내원정을 갔다가 실패하고 돌아왔다는 청년이 바로 이 친구겠군. 김리갑이라구 했더라. 언제인지 경주가 《복흥태》정미소에 쌀고르는 일하러 갔다와서 김리갑의 이야기를 했다. 과연 모험청년답게 생겼군. 저 박두학이란 친구도 보통내기가 아닌것 같애. 그옆에 최봉이라는 친구는 오동진이처럼 듬직하거든. 이 세사람은 화전서부터 같이 공부하던 김성주동무의 친구들이라고 했지. 그 나머지는 길림에 와서 새로 흡수한 동무들이겠지. 바로 이 방에 와있는 청년들이 김성주동무의 이름으로 불리우는 길림의 신흥청년세력이겠구만. 그렇다면 나는 뭔가? 생활의 먼 변강으로 도피하려는 계획을 취소해버리지도 못한채 이 방에 앉아있는 나는 무언가? 내가 과연 이 동무들속에 올방자를 틀고 앉아있을만한 자격을 가지고있기나 한 사람인가. 채경은 어쩐지 눈굽이 저려나고 가슴이 후더워졌다.

《나는 일본령사관에 와 박혀있는 <조선총독부> 특사놈을 없애치우는것이 첫째가는 방도라고 생각합니다. 그놈을 처단해버리기전에는 안창호가 놓여나올수 없습니다.》

김리갑이 먼저 선코를 떼였다. 그는 이전보다 뼈도 더 굵어지고 눈매도 더 부리부리해진것 같았다. 그 눈에서는 그 어떤 격렬한것에 대한 갈망이 번쩍거리고있었다. 채경에게는 그의 몸전체가 하나의 화독같아 보였다.

(역시 모험청년다운 사고방식이로군.)

그는 안중근의 후신이라도 보는것 같은 착각이 들어 눈이 휘둥그래졌다.

《옳습니다. 그게 그럴듯합니다. 리웅이랑, 장철하랑 권총을 준다고 했으니까 령사관밖에 잠복해있다가 한방 갈기잔말입니다.》

권태일이 김리갑의 폭력안을 지지하여 열을 내며 부르짖었다.

그러자 최봉이 그들쪽은 보지도 않고 무게있게 말했다.

《허, 특사나 한명 쏴갈겨서 안창호선생이 놓여나온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건 부질없는 노릇 같습니다.》

《부질없다니? 뒤에서 간책을 꾸미는 장본인이 특사인데 그래도 부질없단말입니까. 독군서가 바로 그놈의 간책에 빠져서 갇힌 사람들을 놓아주지 않는데 그런 화근을 그냥 놔둘수야 없지 않습니까.》

김리갑은 물러앉고 고집이 황소뿔같은 권태일이 그를 두둔하여 열을 올리였다.

최봉이도 양보하지 않았다.

《어림없는 소린 하지도 마시오. 그놈이 간책은 쓰겠지만 독군서가 뭐 그 간책에만 빠져서 갇힌 사람을 놓아주지 않는것 같습니까.》

《그놈을 죽이느라면 독군서도 정신이 들겁니다. 그놈을 죽이든지 령사를 죽이든지 둘중 어느 한놈을 쏴죽여야 만사가 순조롭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두들 얼굴에 피가 올라서 들끓었다. 사실 안창호들의 석방운동은 그동안 학생집단의 이름으로 독군서는 물론 경무청과 감옥에까지 항의문을 들이대고 싸웠다. 3부합작회의를 하려고 모여온 민족주의자들도 회의를 못열고 독군서에 진정서를 가지고간다, 뢰물을 들이민다 하며 법석을 했다. 그러나 독군서는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ㅌ.ㄷ》성원들은 지금 한데 모여 금후대책과 행동방향을 토론하고있는것이다.

《김리갑, 권태일 두 동무의 주장은 안중근이라든가 강우규같은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위험한 주장입니다. 그 주장대로 하다가는 길림의 모든 혁명세력에 사정없이 백색테로가 가해질수 있습니다.》

박두학의 말이였다. 그는 그렇지 않느냐는듯 김리갑이와 권태일이쪽을 번갈아 돌아보았다. 롱과 익살을 천분으로 가지고있으면서도 무슨 중대사에 접해서는 괴벽스럽다고 할만치 신중해지고 용의주도해지는 박두학이였다.

장내의 공기는 두쪽으로 명백히 갈라졌다. 선창과 기관구에서 온 로동자들도 김리갑의 저격론에 대해서는 골을 흔들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채경에게 언권을 주시였다.

《채경동무의 의견을 좀 들어봅시다.》

그이께서는 기대에 찬 눈길로 채경이를 지켜보시였다. 그 눈길에는 웅심깊은 사랑과 믿음이 넘쳐흐르고있었다.

채경은 정신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저격하는건 나도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재미없을것 같단말입니다. 내 생각엔 독군서에 영향을 줄수 있는 중국인 유지들의 힘을 리용해보는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는것입니다.》

그는 자기가 한 말에 자신을 잃은 사람처럼 갑자기 머리를 흔들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그의 소탈한 몸가짐을 살펴보며 미소를 지으시였다.

《허허, 머리는 왜 내흔듭니까. 그것도 방법의 하나일수는 있지요. 동무들, 그러면 내 의견을 말하겠습니다. 이 사건은 <조선총독부> 특사놈이나 한놈 죽여가지고 해결될 그런 일이 아닙니다. 독군서가 처음에는 일제의 어떤 간책에 빠져서 행동을 했다 하더라도 사람을 잡아가둔 이상에는 자기네 책임도 있으니까 갇힌 사람들을 내놓지 않고 죄를 씌우기 위해서 백방으로 애를 쓸것입니다. 그러므로 독군서에 강한 압력을 들이대야 합니다. 나는 광범한 사회계와 인민의 힘을 들어일궈서 독군서들 넘겨뜨리고 갇힌 사람들을 빼내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할 방법이 있습니까?》

권태일이 눈을 크게 뜨며 반문했다.

《들어일굴수 있다고 봅니다. 인제도 말했지만 사회적문제로 들어일궈야 합니다. 장작림정권이 일제의 간책에 빠져서 부당한 행동을 하고있다는 사실을 광범한 사회계가 알도록 우리가 문제를 던져야 합니다. 우선 각 신문사들에 일제와 장작림군벌을 규탄하는 성토문을 써서 보냅시다. 신문사들에만 보낼것이 아니라 대도시들의 사회단체, 학생계에도 보냅시다. 우리들의 투쟁에 동조운동을 일으켜달라는 호소문도 동봉해서 성토문을 발송합시다. 이렇게 하면 틀림없이 반응이 일어날것입니다.》

모두들 말이 없었다. 누구나 다 그럴듯싶다는 표정들이였다.

《옳습니다. 나는 그 의견을 지지합니다.》

최봉이 한마디 했다.

《좋은 의견입니다. 불을 지펴야 합니다.》

박두학이도 무릎을 쳤다.

《저격론자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그게 총을 쏘는것만한 효과를 낼수 있겠습니까?》

김성주동지께서는 김리갑이와 권태일을 향해 물으시였다.

《그렇게 하는게 상수인것 같습니다. 기막힌 포위전이 될수 있겠습니다.》

김리갑은 그이의 얼굴에 경탄의 눈길을 보냈다.

그는 매번 이처럼 김성주동지의 사상과 인품을 통하여 혁명의 심오한 리치를 깨닫군한다.

장지문이 벌컥 열리며 량팔에 토시를 꿴 오동진이 문가에 나타났다. 그는 문고리를 잡은채 눈귀를 가늘게 좁히고 방안을 둘러보다가 김성주동지를 향해 물었다.

《무슨 토의를 하나?》

《독군서에 갇힌 사람들의 구출문제를 가지고 의논하더랬습니다.》

《음, 그래 우리도 아침부터 그걸 토론하다 오는 길이야. 3부통합회의는 뒤전으로 밀려났네.》

《좋은 의견들이 나왔습니까?》

오동진은 대답대신 토방우에 신을 벗어놓고 방안으로 들어왔다. 청년들이 한무릎씩 벽쪽으로 물러나면서 자리를 권했지만 앉지 않고 덤덤히 천정만 쳐다보다가 탄식하듯 말했다.

《그저 같은 말만 되풀이하다가 헤여졌지. 뢰물, 진정서… 여기서는 무슨 묘안을 찾아내지 못했나?》

《묘안까지는 모르겠는데 하여튼 방책을 찾아내느라고 했습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방금전에 청년들앞에서 공개하신 그 《들어일구는》 방법에 대해서 그대로 되풀이하시였다.

오동진은 연방 고개를 끄덕거리였다. 아까처럼 또 천정을 하염없이 쳐다보다가 무겁게 입을 떼였다.

《그래야지, 그게 옳은 처사야. 자네의 그 도량이 정말 부럽네.》

그는 허리를 구부정하고 밖으로 나갔다. 말보다 그 침울한 눈빛과 다달이 더 패기를 잃어가는 느릿느릿한 몸가짐에 몇갑절 더 많은 말을 품고있는 오동진이다.

(그래. 그게 옳은 처사야!)

채경은 오동진이 하던 말을 속으로 가만히 되뇌였다. 그도 역시 김성주동지의 민족애에 깊이 감복하고있었다. 사상은 반대하면서도 인간자체에 대해서는 더없이 너그럽게 품어안는 그 하늘같은 도량, 이런 도량앞에서야 그 누군들 고개를 숙이지 않으랴.

회의는 어슬어슬할 때에야 끝났다.

《ㅌ.ㄷ》성원들과 헤여지신 김성주동지께서는 채경을 이끌고 맨 나중에야 모임장소를 나서시였다.

하늘은 뿌옇게 흐려있었지만 날씨는 잠풍하였다. 먼 남국에서 움튼 봄기운이 가만가만 찾아와 옷섶밑으로, 페부속으로 스며드는것 같은 아늑하고 푸근한 날이였다.

그이께서는 《그리운 강남》을 회파람으로 나직나직 부시다가 채경이를 돌아보시였다.

《채경동무, 솔직히 말해서 나는 채경동무와 헤여지고싶지 않소. 이 길림에서 함께 손잡고 혁명을 해보고싶단말이요.》

《나도 성주동무곁을 떠나고싶지 않소. 십년을 사귀여서만 벗이겠소. 오늘부터 이 못난 채경이를 벗으로 생각해주오.》

《고맙소. 채경동무! 나도 채경동무가 결심을 달리하리라고 짐작했소. 나라를 위해 품은 그 청운의 뜻을 그렇게야 쉽게 집어던질수 있겠소.》

김성주동지께서는 채경의 손을 잡고 몇걸음 옮기시다가 돌아서서 그 손을 더 힘있게 그러잡으시였다. 그리고는 빠른 말씨로 속삭이시였다.

《채경동무, 기뻐하오. 차광수가 길림에 와있소.》

《아니, 그게 정말이요?》

채경은 놀라서 걸음을 멈추기까지 했다. 차광수로 말하면 중학시절의 그의 친구다. 동경대지진때 일본에서 갈라진후로는 한번도 그를 보지 못한 채경이였다.

《어저께 나를 찾아왔다가 권심선생네 하숙집에 돌아간다음부터 이불을 뒤집어쓰고 앓는다는구만. 아마 독감에 걸린것 같소. 자꾸 채경이 이야기를 한다는거요. 몹시 만나고싶어하는것 같소. 그래서 내 오늘 채경동무를 겸사겸사 초청했소.》

《아, 오늘은 복이 하늘에서 넌출채로 막 굴러떨어지는 날이구만.》

채경은 구름에 실려가는것 같은 기분으로 김성주동지를 따라 즐겁게 발걸음을 옮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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