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총서《불멸의 력사》 2 장편소설
천 세 봉
( 제 6 회 )
5
례배당이 생겨 처음보는 대성황이라 한다. 이른아침부터 모여들기 시작한 청강자의 흐름은 아홉시가 지나고 열시가 다 될 때까지도 조수처럼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교인들이 무시로 찾아와 미사를 올리고 찬송가를 부르는 그리 크지 않은 건물은 수용능력의 두곱도 더 되는 사람들로 초만원을 이루었다. 길림에서 수십리 떨어진 신안툰과 강동마을에서도 청강지망자들이 쓸어들었다. 제일 좋은 앞좌석은 독립군계통의 인사들과 유지들, 시내의 조선인상공업자들이 차지하였다. 양복을 입은 사람들, 조선옷을 입고 단장을 짚은 사람들, 한학자인 강보배의 큰아버지는 칠색이 번들번들한 통영갓을 쓰고 두루마기를 입고 나왔다. 장내는 축제의 분위기와도 같이 장엄하고 따뜻하고 열광적인 분위기로 들레이였다. 지방유지들이 기차에서 내려 들이밀렸다. 정거장에서 인력거를 타고 들어오는 사람들도 있었다. 학생들도 모여들었다. 례배당에 사람들이 거의 찼을 때 3부통합회의를 하자고 모여온 각 조직의 대표들이 진을 치고 들어섰다. 《신민부》의 김좌진은 오늘 수염단장을 더 잘했다. 기름을 바른것 같은 새까만 수염끝이 붓촉같이 치들렸는데 그 요란한 수염을 쳐다보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한참후에야 리갑무며, 심봉준이며 최활이들이 키가 후리후리한 안창호를 앞세우고 례배당안으로 들어섰다. 그뒤로 오동진, 리웅, 고원암, 장철하, 김사헌이들이 따라 들어섰다. 곤색양복을 멋있게 뽑아입은 유상조는 맨 뒤에 들어섰다. 안창호는 세련된 몸짓으로 군중에게 모자를 약간 들어보이고는 이어 의자가 놓여있는곳으로 발을 옮기였다. 앞쪽에 의자가 수십개 놓여있는데 이미 거기 앉아있던 사람들은 모두들 우실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는 아직 자리에 앉지 않은 안창호를 둘러싸고 서서 웅성거렸다. 리선엽목사가 재빨리 안창호를 안내해서 팔걸이가 있는 큰 의자에 앉히였다. 아침부터 줄창 례배당에 나와 회장을 정돈하느라고 바삐 보낸 그는 안창호가 입장한 다음부터 더 신바람이 나서 돌아갔다. 나라가 독립되면 안창호가 대통령이 될것이라고 믿고있는 리목사였다. 례배당 뒤쪽 절반은 학생들이 새까맣게 차지했다. 김성주동지께서도 맨 뒤쪽에 와앉아 제1중학교 학생과 말씀을 나누고계셨다. 학생들속에는 박두학이며 권태일이며 최봉의 얼굴도 보이였다. 안창호는 이쁘장한 나비수염을 잠간 손가락끝으로 매만지였다. 입술은 연지를 찍은것 같이 새빨간데 입이 몹시 작아보였다. 그 작은 입에서 웅변이 청산류수로 터져나온다는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였다. 회장이 정돈되자 리선엽목사가 연탁앞에 나서서 한참동안 안창호의 활동경력과 그가 상해에서 북경을 거쳐 길림에까지 오게 된 취지를 설명하였다. 그런 다음 강연을 곧 시작하겠노라고 선포하였다. 요란한 박수소리와 함께 만장의 시선은 연탁으로 쏠리였다. 안창호는 《조선민족운동의 장래》라는 제목으로 인차 연설을 시작하였다. 그는 먼저 조선독립운동의 력사를 개괄하는것으로부터 시작하였다. 《여러분, 생소한 이역의 하늘밑에서 망국노의 설음을 안고 분골쇄신의 정신으로 독립운동에 매진하고있는 존경하는 지사들과 동포제씨들! 제천에서, 선산에서, 흥주에서 우리의 독립운동이 의기를 들고 일어나던 때로부티 30년이라는 세월이 경과하였습니다. 그동안 우리 민족은 주검산을 넘고 피바다를 건느며 그 열렬한 충의와 혁혁한 공훈으로써 조선독립운동사에 광채를 뿜는 혈서를 남기였습니다. 우리에게 있었던 무기란 낫과 호미, 방망이와 작대기, 그렇지 않으면 주먹, 그것도 아니면 육탄으로 놈들의 총과 칼과 창끝에 대항하였습니다. 뼈를 들판에 뿌려놓고 두골을 창끝에 들이대면서도 누가 후회한 사람이 있었습니까? 이렇게 시작한 싸움이 의병의 정화를 거쳐 3.l운동의 대앙양을 넘어 그다음에는 상해로, 만주로, 로령으로 혹은 미주로 그 기본력량이 충혈을 뿌리면서 흩어졌습니다. 그리하여 풍찬로숙의 길에서 대오는 차차 설피게 되고 오늘에 와서는 전 독립운동선상에 실로 처량한 빛이 비끼게 되였습니다.》 군중은 황홀해서 안창호를 쳐다보았다. 안창호가 움직이며 돌아가는 속에서 정말 의병들의 기발이 펄펄 날리고 3.l운동의 함성이 터져오르고 호미와 낫과 작대기로 일본놈을 치는 광경이 보이는듯싶었다. 《잘하는군, 과시 독립운동의 대선배로군.》 강보배의 큰아버지는 갓을 끄덕거리며 감탄했다. 리선엽목사의 눈에서는 눈물이 몇방울 굴러떨어졌다. 리갑무, 심룡준, 리웅 같은 사람들도 오늘의 독립운동선상에 처량한 빛이 비끼였다고 했을 때에는 땅을 두드리며 목을 놓아 울고싶었다. 청중속에서는 오직 학생들만이 랭담했다. 그들이 안창호에게 기대하는것은 그런 화려한 웅변인것이 아니라 그 내용이였다. 그러기에 그들은 까딱 움직이지 않고 리지에 빛나는 눈으로 안창호를 주시하고만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의 운동이 이 슬픈 양상을 떨어버리지 않고 그냥 있어야 하겠는가? 반만년 력사를 영원히 진토속에다 묻고 우리의 강산과 지하재부와 우리의 후손을 저 섬나라 오랑캐들의 손에 그냥 넘겨주고말겠는가? 결단코 그럴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30년 혈전의 력사를 더듬어보고 교훈을 찾고 대세를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찾을 교훈은 무엇인가?》 안창호는 리선엽이 따라놓은 고뿌의 물을 들이마셨다. 그리고는 흰 손수건을 꺼내 입술을 닦고 이마를 가볍게 훔쳤다. 강연은 계속되였다. 그는 30년간의 투쟁력사를 전술도 계획도 없고 무장도 없어 작대기와 주먹과 알몸뚱이로 싸운 말하자면 깊이 뿌리를 박은 투쟁이 아니라 건드리니까 폭발한것과 같은 기분적인 승세로 시작되여 실패로 끝나버린 싸움이였다고 단정했다. 그는 연탁앞을 왔다갔다하며 양복조끼 앞자락의 금시계줄을 요란스럽게 흔들었다. 《옳은 말이지, 그게 과연 옳은 말이야. 30년간의 투쟁이란것이 무슨 준비가 있었던 싸움인가? 왜놈들이 침입해오니까 그저 불맞은 범처럼 화닥닥 일어섰지…》 앞에 앉아있는 민족주의자들은 거의 이렇게들 긍정했다. 그러면서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자세를 고치기도 했다. 그러나 오동진이만은 안창호의 편을 보지도 않았다. 그는 입을 꾹 다물고 앉아서 사람들이 콩나물시루처럼 배겨앉아있는 출입문쪽만 내다보았다. 학생들은 아직도 반응이 없었다. 뒤쪽에 새까맣게 들어앉아서 안창호를 쳐다보기만 했다. 안창호가 아무리 열을 내여도 뒤쪽좌석은 더워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조선은 장차 어떤 길로 나가야 하겠습니까? 흥분된 기분에서 무턱대고 <나아가자!> <싸우고 죽자!>는 식의 산발적인 반항에 그냥 매달려야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이런 자살행위가 더 지속되여서는 안됩니다. 이제부터는 <나아가자!>나 <싸우고 죽자!>가 아니라 <나아갈수 있는 준비를 하자!>, <보람있게 죽을수 있는 준비를 하자!>입니다. 말하자면 전 민족이 하나로 뭉쳐서 실력을 증진하고 자기 개인과 민족적인격을 혁신함으로써 조선민족의 대권위를 추켜올려야 한다는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는 세계 민족중에서도 가장 정신수양이 낮은 민족이며 또 가장 가난한 민족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싫고 역겹더라도 자인을 해야 할 문제입니다. 오늘 미국이 어떻게 하여 저와 같이 세계강국으로 되였는가?》 안창호는 미국의 개척력사를 한창 늘어놓았다. 그는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의 두차례의 류혈을 겪은 미국이 자기의 광대한 령토우에 오늘과 같은 재부를 쌓아올린것은 전국민적근기가 있었기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록키산맥을 넘어 서부의 광막한 대지를 횡단하면서 본 설렁거리는 목화밭이야기를 한참이나 했다. 그리고는 뉴욕, 시카고, 데트로이드의 공업에 대해서도 설명을 했다. 만약 원주민인 인디안들이 오늘까지도 미국령토우에서 주인노릇을 했다면 이러한 발전된 공업과 발전된 농업은 볼수 없었을것이라고 하였다. 그는 이렇게 전제를 걸어놓고는 강국에 의존해야 할 조선의 운명에 대해서 말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작대기나 고작해야 화승대를 가지고 일본놈을 이겨낼것 같습니까? 그렇게 해가지고는 칠성판에 넘어져있는 우리 나라를 들어일구지 못합니다.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실력을 배양해야 합니다. 민족의 실력이란 정신상의 단결력과 물질상의 금전력과 국제간의 신용력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이 세가지 힘을 잘 조직해서 강하게 하면 독립도 할수 있고 남의 나라문명에 뒤떨어질 념려도 없습니다. 한때 우리는 청도회담을 열고 미국인이 경영하는 북간도 밀산현의 태풍실업회사 땅을 십리가량 사서 농장과 군관학교를 설립하고 거기서 실력배양의 밑천을 마련하려고 한적도 있습니다. 자금때문에 계획은 아쉽게 류산되였지만 나는 상기도 그 계획에 미련을 가지고있습니다. 조선독립의 밑천을 마련하자면 무엇보다도 미국, 프랑스를 비롯한 강대국들에게 차관을 얻어다 경박호에 수력공업을 건설하고 만주에 있는 조선사람의 농업을 장려하며 교육과 산업의 진흥에 의한 국력배양운동을 널리 벌려야 합니다. 이 힘의 준비야말로 독립목적달성의 지름길이라고 할수 있습니다.》 온 장내에서 박수가 일어났다. 리선엽목사는 얼굴이 새빨갛게 동해서 박수를 쳤다. 학생들속에서도 박수를 치는 학생이 많았다. 청중의 흥분은 연사에게도 그대로 감염되였다. 안창호는 이마의 땀을 훔치고나서 다시금 열변을 토하였다. 《실력배양은 자아수양과 인격향상을 전제로 하고있습니다. 건전한 인격적바탕이 없으면 도덕적으로 부패한 민족이 되여 풍부한 경제력도 강대한 군사력도 기대할수 없습니다. 내가 처음 미국에 가니 그 나라 국민은 조선사람을 불명예스러운 미개민족으로 대하고있었습니다. 조선사람은 모두가 게으르고 더럽고 렴치없는 족속들이라는것이였습니다. 때묻은 한복에 상투를 틀어얹은 무식한 우리 행상군들과 신용잃은 뜨내기 품팔이군들은 동양의 야만인취급을 당하고있었습니다. 그들은 거리에서 동족끼리 멱살을 잡고 싸움질을 하는가 하면 서로 경멸하고 질시하고… 또 공사장이나 농장 같은데서 일을 되는대로 하여 신용을 잃고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정환경과 일상생활의 례절부터 고쳐가도록 동포들을 깨우치고 옳바른 로동정신과 로동태도를 가지도록 그들을 계몽시켰습니다. 례를 들어 과수원 같은데 가서는 <귤 한개의 껍질을 상하거나 나무가지 하나라도 분질러서는 안된다. 미국 과수원에서 과실 한개를 따는것이 곧 우리 나라의 독립운동이요, 우리 민족의 신용과 품위를 높이는 큰 사업>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동포로동자들이 정성껏 귤수확을 하는것이였습니다. 과수원 경영자는 너무도 감복되여 조선인로동감사회를 열고 그들모두에게 성경책과 찬송가책까지 선물하지 않겠습니까.》 또다시 박수소리가 터져올랐다. 안창호는 기고만장하여 목청을 더 돋구었다. 《여러분,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이것은 자아혁신, 인격수양의 중대성을 말해주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만일 이와 같은 민족갱생의 애국운동을 외면하고 등한시한다면 머지 않아 우리 민족은 국제적류랑민으로서 거지가 되고말것입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심각한 표정으로 장내를 살펴보시였다. 구석구석에서 안창호의 웅변에 대한 찬탄의 속삭임소리가 일고 공감의 말마디들이 튀여올랐다. 그이의 머리에는 지난해 6월 화전의 우정국에서 리효와 함께 나누던 《민족개조론》에 대한 상담내용이 떠올랐다. 그날 리효가 한 말에서는 그 개조론을 두둔하는 론조가 울리였었다. 그런 지지의 론조가 지금은 청중의 박수속에서 울리고있다. 안창호의 입에서 거침없이 쏟아져나와 만장에 어지러이 뿌려지는 민족개량주의와 외세의존의 유해로운 독소도 느끼지 못하고 학생들은 그에게 연방 박수갈채를 보내고있는것이다. (좌절시켜야 한다. 저 연설을 빨리 좌절시켜야 한다. 사탕물에 뒤섞인 저 독소가 이이상 더 학생들과 청중들의 뇌수속에 들어가게 해서는 안된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사태를 바로잡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시며 얼른 수첩과 만년필을 꺼내시였다. 그리고는 수첩장을 뜯어내여 거기에 재빨리 적으시였다.
몇가지 묻겠습니다. 대답해주길 바랍니다. 물음 첫째, 산업과 교육을 진흥시켜 조선민족의 실력을 배양해야 된다고 하는데 나라를 일제에게 통채로 빼앗긴 형편에서 그것이 실제적으로 가능합니까? 방도를 알고싶습니다. 둘째, 우리 민족을 정신수양이 낮은 민족으로 보는데 어떤 점이 그러합니까? 셋째, 미국은 원주민인 인디안의 피바다우에 세워진 나라이고 조선인민의 불구대천의 원쑤입니다. 해적선 《셔먼》호사건을 비롯한 미국놈들의 거듭되는 침략을 겪은 우리가 과연 그놈들을 본받아야 합니까? 넷째, 외세의존은 망국의 길입니다. 외자도입이니 《원조》니 하는 말은 승냥이앞에 고기덩이를 내맡기자는 말과 같지 않습니까? 다섯째, 연설내용은 민족개량적이며 무저항주의로 일관된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육문중학교 김성주
그이께서는 질문쪽지를 접어서 얼른 앞학생에게 내밀어주시였다. 《빨리 앞으로 내보내서 연사에게 전하시오. 펴보지 마시오!》 질문은 앞으로 전달되여나갔다. 그동안 안창호는 《자아의 인격수양》문제를 가지고 웅변을 계속했다. 그의 흥분은 절정에 올랐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연설이란 꼭 예술의 경지와 같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그 창조적인 쾌감때문에 연단우에서 땀을 뿌리기를 즐겨한다. 질문을 적은 종이는 앞으로 전달되여나가다가 어떻게 돼서 리선엽목사의 손에 이르렀다. 《이게 뭐요?》 리선엽은 쪽지를 받으며 두눈이 둥그래서 소리쳤다. 《무슨 질문인것 같소. 어서 안창호선생에게 올리시우.》 《아니, 연설중에 누가 무슨 질문을 해?》 리목사는 례배당안을 돌아보며 격노해서 소리쳤다. 《이리 보내시오!》 안창호가 연설을 중지하며 손을 내밀었다. 《질문이 있으면 연설이 끝난 담에 해야지 연설중에 무슨 질문인가?》 리목사가 두덜거리며 그에게 쪽지를 전달했다. 안창호는 쪽지를 펴들고 서서 읽었다. 그는 삽시에 낯빛이 변해갔다. 한참 굳어져서 쪽지를 재삼 읽었다. 그처럼 천하를 휘여잡을듯하던 열변은 간데 없고 파릿한 얼굴만이 연탁앞에 호젓이 서있다. 안창호는 점점 더 미륵처럼 되여갔다. 리목사도 그것이 심상치 않은 질문이란것을 간파했다. 그는 안창호의 난처해하는 립장을 구해보려고 한가지 꾀를 생각해내였다. 《애햄, 여러분, 여러분은 오늘 안창호선생의 연설을 들으려고 모처럼 우리 례배당에 오신만큼 잠간 주께 기도를 올립시다. 모두들 엎드리시오.》 리목사는 장내를 돌아보며 웨쳤다. 모두들 리목사가 시키는대로 엎드렸다. 학생들은 엎드리는것이 아니라 고개를 숙이고 앉아 키득키득 웃었다. 오동진이도 학생들쪽을 바라보며 빙긋이 웃는다. 리목사가 기도를 올렸다. 《주여! 전지전능하신 주여! 오늘 우리 민족대표들은 주의 은총밑에서 이렇게 대회합을 가지고 독립운동의 거사를 마련할 강연을 경청하고있습니다.…》 리목사의 기도가 시작되는통에 연탁앞에 서있는 안창호는 아주 인조인간처럼 되여버렸다. 강연이고 무어고 인젠 리목사의 판이 되였다. 결국 리목사의 꾀는 안창호의 립장을 구하는것이 아니라 더욱 난처하게 만들었다. 안창호는 리목사의 류창한 기도소리가운데 서서 땀을 빼였다. 인젠 정열도 힘도 다 좌절되여버렸다. 강연을 더 하려 해도 쪽이 난 담력을 추세워낼수 없을것 같았다. 너무도 염통을 찌르는 질문이였다. 질문에는 질문임자의 리지적인 얼굴이 뚜렷이 보인다. 허투루 답변을 했다가는 망신을 당하기가 첩경일것 같았다. 안창호는 떨리는 손으로 손수건을 찾았다. 리목사의 기도는 길었다. 그는 한참후에야 《아멘》소리를 지르며 기도를 끝내였다. 안창호의 얼굴에서 땀을 본 유상조가 얼른 일어서서 저편 연단뒤쪽으로 걸어갔다. 그는 거기 놓인 쟁반을 들어다가 안창호에게 받쳐올렸다. 안창호는 쟁반에 있는 젖은 수건을 집어들고 천천히 얼굴을 닦았다. 그리고나서는 흐트러진 나비수염을 량손가락끝으로 잠간 바로잡아놓았다. 그는 질문에 대답해보려고 종이쪽지를 몇번 들었다놓았다하였다. 그러나 안창호는 대답을 못하고 또 한참 목소리를 높여 정신수양문제를 가지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인제는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도 연설에는 박력이 없고 뜨겁지도 화려하지도 못했다. 바로 그것을 돌이켜보려고 기를 올리는것 같았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파리해지는 얼굴만이 더욱 두드러져보일뿐이였다. 군중들은 바로 연탁우에 놓인 종이쪽지가 안창호의 사지를 묶는것 같은 그런 조화를 논다는것을 알았다. 《내 오늘 연설을 좀 길게 하려고 작정했었습니다. 그러나 사정에 의해서 부득이 오늘은 이만하고 후일에 다시 기회를 얻을가 합니다. 이만하겠습니다.》 안창호는 풀기가 없이 이런 말을 남기고 연단을 내려섰다. 앞에 앉았던 민족주의자들이 모두 술렁거리며 좌우를 돌아보았다. 그들은 영문을 몰라서 뒤에 대고 누가 무슨 소리를 했느냐고 소리쳤다. 《그만두십시오. 그 학생들한텐 아무 죄도 없습니다. 내 심기가 좀 불쾌해서 그랬으니 그리 아십시오.》 안창호는 이렇게 변명했다. 난생처음 당해보는 망신이였고 수치였다. 단순한 수치나 망신이 아니라 참변에 가까운 비상사건이였다. 평양의 쾌재정에서 웅변의 서막을 연 때로부터 서울 광화문 황토마루를 거쳐 전국을 력방하는 순회강연의 나날 그가 받은것은 민중의 한결같은 찬양과 환호뿐이였다. 그의 사상과 주장은 만사람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고 그의 뛰여난 웅변은 그 누구도 따를수 없는 무비의것으로 인정되였다. 그런데 오늘 이 길림이 무엄하게도 그의 리론에 반기를 든것이다. 장내가 웅성거리기 시작하자 학생들이 먼저 일어섰다. 그들은 출입문쪽으로 밀려나갔다. 학생들은 김성주동지를 둘러싸며 무슨 질문을 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김성주동지께서는 아무 말씀이 없이 학생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시였다. 《안창호에게 무슨 질문을 하셨는지 모두들 알고싶어 야단들이요. 청년회관에 가서 안창호의 연설이 잘못되였다는것을 학생들에게 알려주었으면 좋겠소.》 최봉이 김성주동지의 곁으로 와서 낮은 소리로 말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한동안 아무 응대도 하지 않고 방금 나온 례배당쪽만 지켜보시였다. 어쩐지 강연장안의 공기가 심상치 않다는 느낌이 드시였던것이다. 례배당에는 강연전에 볼수 없었던 독군서의 헌병들이 수태 와있었다. 《헌병들이 왜 례배당에 와있을가? 아무래도 수상쩍거든. 놈들의 눈을 피해서 딴데로 가자구. 강남공원이 좋겠소.》 그이께서 말씀하시자 최봉이 학생들앞에 나서서 강남공원으로 가자고 선동을 했다. 최봉이 웨쳐대자 박두학이도 흩어져가려는 학생들을 가지 말라고 신이 나서 소리를 질렀다.
6
례배당을 나서자 찬공기가 사정없이 몸에 휘감기였다. 2월의 날씨는 아직도 한겨울처럼 쌀쌀하였다. 그러나 차광수는 미처 추위를 의식하지 못하였다. 온몸이 그대로 불길속에 휩싸인것 같은 과열상태가 아까부터 그를 지배하고있었다. 불은 뺨에서도 타오르고 가슴속에서도 이글거리였다. 심장이 곱절로 빠르게 뛰였다. (누가… 도대체 누가 안창호와 같은 대웅변가의 기를 눌러버리였을가? 누가 그의 입에 보이지 않는 자갈을 물리였을가? 안창호를 순식간에 벙어리로 만들어버릴만한 무쇠자갈의 임자는 과연 누구일가?) 그는 줄곧 이런 생각에 잠겨 례바당 앞마당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그러는 사이에도 출구로는 학생들이 그냥 꼬리를 물고 밀려나왔다. 나와서는 왁작 떠들며 어디론가 밀려갔다. 그들이 지나갈 때마다 꽃샘철의 순결무구한 바람과도 같은 기류가 청신한 향기를 품고 흘러간다. 차광수는 그들의 모습에서 어제날의 자기를 볼수 없는것이 이상스러웠다. 그 나이의 자기는 늘 생활고와 정신고라는 이중의 속박속에서 기를 펴지 못하고 다니는 우거지상의 고독스러운 존재였다. 그런데 이고장 학생들의 모습에서는 그런 우거지상을 하나도 찾아볼수 없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기운차고 생기발랄해보였다. 그들의 일거일동에서는 다른고장의 학생들에게서는 찾아볼수 없는 약동적인 리듬과 신비의 활력이 넘쳐나고있었다. 안창호의 강연을 중도반단시킨 그 주인공도 분명 저 학생들속에 있을것이였다. 차광수는 안창호의 입을 봉해버린 그 수수께끼같은 종이쪽지가 학생들의 좌석에서 올라가는것을 똑똑히 보았었다. (도대체 무슨 글이 적히였길래 안창호는 그렇게도 쩔쩔 맸을가? 질문이였을가? 중상이였을가? 아니면 반박할수 없는 모종의 인신공격이였을가?) 어쨌든 놀라운 일이다. 종이쪽지 한장에 《독립운동의 대선배》가 스스로 연설을 중단하고 단상에서 물러섰으니 이거야말로 얼마나 희한한 일인가. 권심이도 만일 강연장에 있었다면 똑같은 충격을 받았을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 례배당에 온것 같지 않았다. 장내에서도 밖에서도 그의 모습은 볼수 없었다. 혹시 공산주의 리론가라는 체면때문에 남들의 눈에 잘 드러나지 않는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가 강연이 유야무야되자 맨 선참으로 례배당을 나와버린것은 아닌지. 강연장에서 방금 나온 학생들의 마지막떼가 차광수의 앞을 지나가고있었다. 《다들 어데로 갔다구?》 《강남공원으로…》 《공원엔 왜?》 《안창호의 강연을 부정한 학생이 그리로 불렀대.》 《그렇다면 무슨 성토연설이라도 있는게 아니야?》 《글쎄… 하여튼 빨리 가보자구. 이건 보통사건이 아니야.》 《례배당안이 초상난집 같더구만.》 그들이 지나가면서 겨끔내기로 던지는 말이다. 차광수는 무엇을 어쩌겠다는 타산도 없이 무작정 학생들을 따라갔다. 지금은 권심이나 채경을 만나고싶은 생각보다도 학생들의 소용돌이속에 몸을 잠그고싶은 생각이 더 간절했다. 어느새 송화강가에 이르렀다. 수백명 학생들이 얼음판에서 복닥거리고있었다. 그들은 서로 붙들고 미끄럼질을 하고 달리기도 하면서 강을 건넜다. 역시 학생들의 생활이란 랑만이 있었다. 그저 웃고 떠들고 욱박지르며 야단이다. 어떤 학생은 미끄러지며 건너가다가 벌렁 넘어져서는 웃어댔다. 학생들 십여명은 어깨를 겯고 건너가며 노래를 불렀다. 송화강건너 강남공원엔 잎이 떨어진 나무들이 듬성듬성 서있다. 그 나무들사이에 정자들과 차집, 꽃방 같은 겨울철엔 썰렁하게 비여있는 건물들이 여기저기 널려있었다. 례년에 없이 두텁게 내린 눈도 강바람이 심한 이곳에서는 거의 날려가버리고 마른 풀이 깔린 땅이 거뭇거뭇 드러나있다. 오늘은 류달리 바람이 자고 날씨가 푸근했다. 송화강얼음을 건너온 학생들이 들끓으며 정자가 있는곳으로 밀려들었다. 삽시에 주위에는 학생들이 새까맣게 덮였다. 정자우로 뛰여올라가는 학생들도 있었다. 확실히 이 길림의 분위기는 다르다. 청년학생운동도 독립운동도 큰 테두리우에서 움직이고있는것 같다. 아니, 그 규모나 범위가 클뿐만아니라 무엇인가 시대와 시대의 교체가 진행되고있는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여기에는 무엇인가가 있다. 큰것이 기울어지고있고 더 큰것이 태동하고있다. 여기에서는 하나의 바스락소리조차도 그것을 력사의 음향으로 들어야 할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몸집이 다부진 한 학생이 정자우로 뛰여오르더니 모두들 조용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무슨 일이 있소?》 차광수는 곁학생을 돌아보며 물었다. 《아까 질문을 하던 육문중학교 학생이 연설을 한답니다.》 《서면질문을 한 동무가 중학생이란말이요?》 《그렇소. 참 벌써 나섰군.》 차광수는 몸집이 다부진 학생의 앞에 나서서 벌써 말씀을 시작하신 김성주동지틀 고쳐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중학생이란 말은 거짓말 같았다. 큰 키에 세련된 몸가짐 그리고 굵은 음성이 더욱 그런 생각을 가지게 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안창호의 강연을 분석하는 연설을 시작하시였다. 《동무들이 내가 어떤 질문을 했느냐고 몹시들 알고싶어하니까 이야길 해봅시다. 안창호는 오늘 일관해서 경제개발이요, 실력배양이요, 정신수양이요 하면서 그것이 마치 독립운동에 그 어떤것을 마련할수 있는 길인것처럼 주장했는데 이것이 과연 무엇을 말하는것인지 우리는 그 본질을 까밝혀볼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조선땅이 어떻게 되여있습니까? 우리 나라를 침략한 강도 일본제국주의는 지금 조선이라는 하나의 큰 로획물을 눕혀놓고 움쩍 못하게 발로 지르디디고 서서 자기들에게 필요한것을 무제한으로 빼앗아가고있습니다. 광산을 개발해서 금과 은을 다 파가고 철광석을 파가고 석탄을 파가고 안파가는것이 없습니다. 조선사람들의 공장은 빼앗아내고 철도, 해운, 온갖 운수수단도 다 손아귀에 넣었습니다. 그래선 기차로, 배로 원료를 실어다가 일본에서 기계를 만들고 천을 짜고 온갖 공업제품, 심지어는 식료품까지 만들어 세계시장에 내보내고 조선에 되실어다가 팔아먹기도 합니다. 이걸 일본에서만 만드는것이 아니라 조선공장에서 조선로동자들의 잔등에 채찍을 후려가며 만들기도 합니다. 조선에서 나는 쌀, 조선에서 나는 고치, 조선에서 나는 담배도 다 실어갑니다. 우리 조선사람들은 피겨죽을 먹는데 일본놈들은 조선쌀을 모조리 빼앗아다가 배에 기름을 지우고있습니다. 조선소도 모조리 실어갑니다. 자, 사태는 이렇습니다. 이런데 우리 조선사람이 경제개발을 어떻게 합니까? 산업진흥을 어떻게 합니까? 일본놈들이 조선사람을 보고 경제개발을 하라고 팔짱을 끼고 가만히 앉아있을것 같습니까? 어서 당신네 땅이니 당신네 마음대로 지하자원도 캐내고 공장도 세우고 물건도 마음대로 만들어내시오. 그럴것 같습니까? 더구나 한심한것은 안창호가 여기 만주에다 빚을 내서 농장도 꾸리고 수력발전소도 세우자고 했는데 이런 허황한 망상이 어데 있습니까. 살길을 찾아 고향을 떠나온 우리 인민이 이국땅에 집 한채 짓지 못하고 죽 한그릇도 먹지 못하고 굶주리고있는 형편인데 농장은 뭐고 수력발전소는 뭡니까.》 김성주동지께서는 허리를 굽히며 청중에게 물으시였다. 그러더니 이어 허리를 쭉 펴며 주먹을 들어 흔드시였다. 《일본놈은 바로 이렇습니다. 이것은 어떤 궤변으로도 청산류수같은 웅변으로도 가리워낼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여기서 우선 일제와 싸우는 문제가 가장 긴급한 문제라는 결론을 지을수 있습니다. 오직 투쟁, 투쟁이 있을뿐입니다.》 그이께서는 주먹을 더 높이 쳐들어 흔드시였다. 정자주위의 학생들이 긴장해서 그이를 바라보았다. 아까 안창호의 연설에 박수를 친 학생들은 된방망이에 맞은것 같이 얼얼해 앉아있다. 모두 안창호의 연설을 들을 때에는 그럴상싶었는데 김성주동지의 연설을 듣고보니 정말 안창호의 주장이 허황하다는것이 헨둥해졌다. 단순하고 명백한것인데 몰랐다. 《그다음 안창호는 조선민족의 자아수양을 말했는데 그래 우리 조선민족의 정신이 낮단말입니까? 조선독립운동의 30년간의 투쟁이 기분적승세로 진행되였기때문에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오늘과 같이 처량한 빛을 띠게 됐다고 말했는데 그래 과연 30년간의 투쟁이 기분적승세로만 진행되였습니까? 30년을 어떻게 기분으로만 싸웁니까? 그래 우리 민족이 나라를 사랑할줄 모르는 민족이란말입니까? 을지문덕, 강감찬의 애국심은 그만두고라도 우리 선조들이 임진란때에 어떻게 싸웠습니까? 전인민이 들고일어나 활과 창으로 혹은 바위돌로 혹은 식칼로 왜적을 족치고 리순신이 적함 수백척을 족친건 애국심이 아니란말입니까? 그래 조선의 의병들과 독립군들이 애국정신이 없이 단순히 기분적승세로만 싸웠단말입니까? 3.l의 전민족적항쟁이 기분이란말입니까? 한팔이 떨어지면 다른 한팔을 쳐들어 독립 만세를 웨친 우리 민족이 그래 기분으로 싸웠단말입니까? 아무 사상도 정신력도 없이 일시적충동으로 내달아 자기의 생명을 초개같이 바쳤단말입니까? 우리 민족이 그래 그렇게 미개한 경지에 있습니까?》 김성주동지께서는 잠간 말씀을 끊었다가 다시 이으시였다. 《이것은 자기 민족과 자기 민족이 가진 슬기에 대한 혹심한 모독입니다. 그렇기때문에 바로 <조선민족은 정신수양이 낮다, 정신개발과 자아수양을 해야 된다>는 한심한 소리가 나오는것입니다. 서울에는 <민족개조론>을 부르짖는 너절한 인간들이 있습니다. 조선민족을 <렬등민족>이라고 하면서 <민족성>을 고쳐야 한다는것입니다. 오늘의 강연이 이 <민족개조론>과 무엇이 다릅니까? 그래 조선사람이 <렬등민족>입니까? 우리가 과연 <렬등민족>이란말입니까?》 그이께서는 흥분되여 또 한참 청중을 둘러보시다가 말씀을 계속하시였다. 《조선민족은 절대로 민족정신이 낮은 민족이 아닙니다. 우리 민족은 정신세계가 높고 애국정신이 높은 민족입니다. 슬기롭고 지혜있고 총명하고 정의감과 용맹이 있고 투쟁정신이 강하고 창조력이 뛰여난, 힘에 넘친 민족이 조선민족입니다. 이런 자랑찬 민족성때문에 우리들의 가슴속에 조선의 아들된 긍지가 살아있는것입니다. 민족주의운동이 처량한 빛을 띠게 된것은 결코 기분적승세로 투쟁했기때문에 그렇게 된것이 아니라 바로 문제를 그렇게 보는 상층의 령도가 잘못된데 있습니다. 독립운동에 대한 아무런 로선도 방책도 없이 모여앉으면 공리공론을 일삼고 인민대중의 힘을 조직할줄도 동원할줄도 모르는 그 무능한 상층부에서 잘못된 원인을 찾아야 합니다. 자기 민족에 대한 더러운 허무주의적견해는 저들의 오점을 바로 신성한 민족의 이름우에 넘겨씌우는 용서할수 없는 행동이며 발언입니다. 우리는 이 그릇된 견해를 짓부시며 슬기로운 민족의 영예를 튼튼히 지켜야 합니다.》 박수가 일어났다. 놀라움으로 눈이 커져 바라보던 학생들이 흥분을 이기지 못하여 정자가 떠나갈듯이 박수를 쳤다. 《옳습니다.》 하는 소리가 련속 터져올랐다. 차광수는 자신의 기분도 그 연설과 함께 승화되는것을 느끼며 혼자소리로 《과연 통쾌한 론법이로군!》하고 뇌이였다. 그리고는 곁의 학생에게 물었다. 《저 학생 이름이 뭐요? 혹시 김성주라고 부르지 않소?》 《옳소. 김성주요.》 이름모를 학생의 대답에서는 경의에 가까운 자랑찬 음조가 울리고있었다. 차광수는 그 학생의 손을 으스러지게 틀어잡고 목멘 소리로 부르짖었다. 《고맙소, 동무! 정말 고맙소!》 뜻밖의 인사를 받게 된 박두학은 놀라운듯 초면의 안겅쟁이를 유심히 돌아보았다. 상대방에게 잡힌 손을 뽑지도 않고 롱을 하였다. 《허참, 무슨 잔치인지도 모르면서 떡부터 훌쩍 받아먹었군. 그래 우리 성주동무 연설이 마음에 드오?》 《마음에 드오.》 《어째서 나보고 고맙다고 했소?》 《그걸 설명하자면 좀 복잡하오. 동무는 성주동무와 잘 아는 사이인것 같구만?》 《그렇소, 잘 아오. 동무는?》 《모르오. 그저 말만 들었지. 그러나 이제부터는…》 누구인가 《쉬!》하고 그들의 대화를 제지시켰다. 차광수는 입을 다물고 정자쪽을 돌아보았다. 정자밑에 서있던 육문중학교 학생이 불쑥 손을 쳐들었다. 권태일이였다. 《권동무, 무슨 할말이 있소?》 김성주동지께서 몸을 기울이고 그를 굽어보시였다. 《언권을 좀 주오.》 권태일은 이렇게 대답하며 두다리를 후들거렸다. 되게 분기가 오른것 같았다. 《자, 그럼 우리 권태일동무의 말을 한번 들어보는게 어떻습니까?》 《좋습니다.》 그이의 말씀에 학생들이 일시에 대답했다. 모두들 화기에 넘쳤다. 그저 그이의 품에 막 밀려들어와 웅성웅성 끓는것 같았다. 권태일이 정자우로 달려올라와 귀뿌리가 새빨개서 부르짖었다. 《내 그럼 그… 그 정신수양에 대해서 한마디 말하겠습니다.》 그의 눈은 불꽃처럼 빛을 뿜었다. 《내가 우리 외삼촌이 정신수양하는걸 직접 보았소. 기가 딱 막히는 이야기를 좀 들어보시오.》 웃음소리가 터지고 여기저기서 웅성거린다. 진정하라고 웨치는 소리가 일어났다. 권태일은 무슨 교인가 교를 믿던 외삼촌이 한달동안이나 정신수양을 하던 이야기를 익살과 분노를 섞어서 퍼냈다. 《본시 똑똑하던 외삼촌이 교에 미쳤습니다. 그래서 정신수양을 시작했는데 매일 솔잎가루 한공기에 생콩 세알씩만 먹고는 어깨를 흔들흔들하며 앉아있었지요. 식구들은 봄에 씨붙임을 하느라고 들에 나가서 법석 고고있는데… 그때 내가 외가에 가있었는데 외삼촌보고 물었지요. 정신수양을 하면 뭐가 되느냐고. 그러니까 <얘야, 정신수양을 해서 도통만 되면 하늘에도 올라가구 땅속에두 들어가고 마음먹은 일은 다한다.> 그런단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조선두 독립시킬수 있는가고 물으니까 <조선만 독립시키겠느냐, 일본놈이 우리 땅을 먹었던 앙갚음으로 이번엔 우리가 일본땅을 먹을수도 있지.> 이러질 않겠습니까. 난 어린 맘에 무슨 조화가 일어났는가 했지요. 그런데 꼭 한달동안 그짓을 하고나니까 외삼촌은 눈이 골속으로 들어가고 광대뼈가 솟고 해골같이 됐단말입니다. 이렇게 되니 외할머니가 겁이 나서 방문을 열어젖히고 <야! 네가 정신이 있느냐.> 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래도 외삼촌은 어깨를 흔들흔들하며 앉아서 <어머니, 가만 계시오. 뜹니다. 인제 뜹니다. 내 하늘로 날아올라가다가 입고 가던 옷은 저 은하수가에서 벗어서 내려던지겠습니다.> 이러질 않겠습니까. 그러니 외할머니는 무르팍을 탁 치며 <아뿔사, 사람이 잘못됐구나, 벌써 눈알이 똑바로 돌지 않는구나.> 하며 목을 놓아 울었지요. 이렇게 되니 집안식구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외삼촌을 들어일으켰지요. 그런데 아무리 들어일궈도 오금을 펴야 일어서지요. 그래서 외할머니는 가슴팍을 붙안구 다른 식구들은 달려들어서 발목을 잡아당겼지요. 그러니까 무릎마디에서 우지끈 소리가 나며 쭉 펴집디다.》 폭소가 터졌다. 권태일은 웃지 말고 이야기를 들으라고 소리쳤다. 그는 얼굴에 노기가 올라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런데 외삼촌이 다리는 폈는데 힘줄이 상했단말입니다. 그러니 이번엔 그 힘줄을 고치느라고 한 3년간 고생을 했지요. 정신수양의 결과가 바로 이렇습니다. 내 그리구 인테리가 정신수양하는것도 하나 보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자리에서 그 이야길 다할수가 없습니다. 정신수양이란게 무언가? 뭐 자아수양? 도덕수양? 그래 오늘 이야기하는 그 <정신수양>이란게 무업니까? 무얼 어떻게 하라는것인가요? 난 <정신수양>이라니 인차 외삼촌이 머리속에 떠올라 외삼촌 이야길 했는데 대체로 이게 무업니까? 이게 조선민족을 어데로 내몰자는것인가요? 아까 안창호의 연설에 박수친 동무들 말해보시오.》 권태일은 정자주위를 빙빙 둘러보았다. 《안창호가 이야기한걸 백보 양보해서 좋게 해석해봅시다. 정신수양이란걸 교육을 발전시키고 계몽사업을 하고 인격수양을 하고 이렇게 하라는것으로 해석합시다. 그러면 이게 오늘 우리앞에 긴절한 구호로 나서야 하겠는가? 김성주동무가 방금 말한바와 같이 우리 나라를 침략한 왜놈과의 싸움에로 부르지 않고 왜 교육과 계몽을 운운하는가? 바로 그속에 숨어있는 사상을 우리가 보아야 하겠단말입니다.》 《옳습니다. 바로 그것을 보아야 합니다. 그 민족개량주의를 보아야 합니다,》 권태일의 말을 듣고계시던 김성주동지께서 말씀하시였다. 권태일은 얼굴이 피빛같아져서 활개를 휘저으며 정자밑으로 내려왔다. 학생들은 박수를 쳤다. 그의 사랑스러운 익살때문에 웃는 학생이 많았다. 그이께서는 한참 더 《정신수양》을 고취하는 리면엔 투항과 민족개량주의가 은페되여있다고 강조해서 말씀하시였다. 이러는데 육문중학교 학생 하나가 숨이 차서 정자우로 달려올라왔다. 그리고는 란간옆에 서계시는 그이께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창호선생이 체포되였소. 례배당에서 흩어져나오다가 그 선생뿐만아니라 여럿이 잡혀갔소.》 《동무는 언제 강을 건너왔소?》 《방금 례배당앞에서 그 광경을 보고 건너왔소. 독군서 헌병들이 달려들었소. 그런데 신통히도 다른데서 온 사람들과 안창호선생만 붙잡아가질 않겠소. 아마 여기 사는 사람들은 헌병들이 낯을 알기때문에 다치지 않은것 같기도 하오. 이게 무슨 조화속인지 알수 없구만.》 김성주동지께서는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였다. 안색이 달라져서 잠간 란간곁을 거니시였다. 그러나 이어 활기를 띠며 말씀을 계속하시였다. 《자, 하던 이야기를 마저 합시다. 안창호는 또 무엇이라고 말했는가? 그는 우리의 불구대천의 원쑤인 미국놈을 <찬양>하면서 조선이 미국을 본받아야 하며 미국에서 실력배양할 자본을 도입하며 <원조>를 받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래 우리가 무엇때문에 피비린내나는 미국을 본받아야 하며 그놈들에게 의존해서 독립을 구걸해야 합니까? 우리 자체의 힘은 어데다 두고 미국놈에게 의존한단말입니까? 우선 미국이란 나라가 어떠한 나라인가를 좀 봅시다. 안창호는 미국이 <강국>으로 된것은 미국 국민이 <정신적지향이 높고 전 국민이 근면과 근기를 가지고있기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래 미국이 과연 그러한 나라입니까? 그렇게 해서 살이 찐 나라입니까? 우리는 미국이 꾸바와 필리핀을 어떻게 강점했고 하와이와 사모아군도를 어떻게 거머쥐였으며 루이지아나와 플로리다, 알라스카와 알류산렬도를 어떻게 매수했는지 잘 알고있습니다. 우리 나라 면적의 11배가 넘는 250만㎢의 광활한 메히꼬땅을 미국놈들이 어떻게 집어삼켰습니까. 그래 이것이 과연 안창호가 말한것과 같은 전국민적근기의 산물이란말입니까? 안창호가 숭상하는 미국의 문명, 미국의 재부, 미국의 기적, 미국의 신화속에는 세계피압박인민들의 피가 스며있고 눈물이 스며있고 땀이 스며있습니다. 원주민의 살가죽으로 면도칼을 가는 <기념품>혁띠를 만든 식인종들의 짐승같은 광기와 파렴치, 저주받을 <고립주의>와 <몬로주의>, <범미주의>와 <윌슨주의>의 더러운 기념비가 솟아있습니다. 미국에 의존해서 독립을 얻는다는것은 어리석은 잠꼬대입니다. 그것은 날도적놈을 보고 집을 보아달라고 하는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조선인민은 벌써 근 백년전부터 미국놈들이 날강도이고 침략자라는것을 알고있습니다. <셔먼>호의 후예들이, 그 날강도들이 그래 우리에게 자유와 평등을 줄것 같습니까? 우리는 그들의 유들유들한 낯짝에서 웃음을 볼것이 아니라 그놈들의 옷섶밑에 숨어있는 칼날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절대로 미국놈들에 대하여 손톱눈만한 환상도 가져서는 안됩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잠간 말씀을 끊으셨다가 다시 주먹을 들어 흔들며 호소하시였다. 《우리는 숭미사상을 반대합시다. 외세의존을 반대합시다. 우리는 오직 우리의 힘으로 우리 땅에서 일제를 내몰고 나라의 독립을 쟁취합시다.》 《옳습니다.》 환호성이 터져올랐다. 학생들은 주먹을 휘두르고 혹은 박수를 쳤다. 모자를 흔들며 소리를 지르는 학생도 많았다. 《미제는 강도요.》 《날강도요.》 민족주의계렬의 학생들은 심각한 생각을 하고있다. 그들은 안창호의 연설에 기대를 걸었던것이 사실이다. 또 례배당에서 연설을 들을 때에는 그 연설에 황홀해져서 박수를 보냈던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여기에 와서 김성주동지의 연설을 들어보니 안창호의 연설이란것은 그야말로 넝마쪼각만도 못하다. 여기서 듣는 연설은 마치 날이 선 도끼와도 같다. 푹 찍어서 뻐개놓으면 그저 명백한 진리가 불꺽 뛰여오르군한다. 안창호의 연설처럼 요란한 말로 번들거리지도 않는데 그렇다. 《무얼 생각하고있나?》 학우회 역원인 송춘보가 곁에 서있는 학생을 건드리며 물었다. 《생각해야 할것이 많네. 저런 비범한 학생이 어떻게 여기 나타났나?》 《참, 놀라운 일일세. 혜성과 같은 출현일세. 한마디한마디가 다 금같은 말이네. 빌어먹을것들, 운동을 하려면 좀 똑똑히 할게지 그게 뭐야. 개량주의, 무저항주의라고 면박을 받아도 찍소리를 못하게 됐으니…》 송춘보는 사회주의를 제일 질시하는 학생이다. 성질이 어떻게 날카로운지 서울 가서 사회주의운동을 하는 자기 사촌형과 리론투쟁을 하다가 면도칼을 가지고 덤벼들었다는 학생이다. 《그 민족주의령감쟁이들이 여기 와서 저 연설을 좀 들었으면 좋겠네, 정신들이 버쩍 들게.》 그는 쑥 뽑힌 목에 울대뼈가 두드러져서 또 한마디 중얼댄다. 오늘 민족주의계렬의 학생들만 교양을 받는것이 아니라 김찬이며 월파의 영향밑에 있는 학생들도 단단히 교양을 받았다. 문광중학교에 다니는 《소월파》 조창진이도 눈을 까딱하지 않고 서서 연설을 들었다. 그는 가끔 곁에 서있는 키큰 학생을 돌아보며 속삭였다. 《새로운 이야긴데… 쉽고 명백하고 그리고 공산주의자라는데 민족문제를 저렇게 열정을 가지고 대한다는것은 새롭지 않어?》 키큰 학생도 조창진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거린다. 사실 그들은 월파나 김찬이들의 연설은 힘든 술어투성이가 되여서 리해하지 못할 말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의 연설은 조선혁명을 부르짖긴 해도 무엇인가 명백하지 않고 자기 민족에 대한 천시와 허무주의적언사가 많아서 어떤 땐 듣기가 역한적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 김성주동지의 연설은 들으면 들을수록 민족적긍지와 자부심으로 가슴이 뿌듯해지고 정말 혁명을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부쩍부쩍 솟는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계속하여 미제국주의자들의 피비린내나는 침략정책에 대해서 또 한참 설명하시였다. 미제국주의란 하나의 야수다. 가장 지독한 흡혈귀이다. 이 흡혈귀는 지금 그 피묻은 큰 아가리와 이발과 발톱으로 세계를 노리고있다. 제1차 세계대전후 미제의 세계제패의 야망을 보라. 윌슨의 《14개 조항》이라는걸 보라. 그 어느 한 조항도 미제의 팽창, 세계제패의 야망과 관련되지 않은것이 없다. 독일배상문제에 관한 《도즈안》이란걸 보라. 이것 역시 구라파에 대한 팽창정책을 적극화한것이다. 미국놈의 정치란 어떤것인가? 어제날의 윌슨이나 오늘의 쿠릿지나 무슨 짓을 하는 작자들인가? 그들은 독점자본의 무제한한 위주머니에 그것들의 천성적인 생리에 맞게 략탈한 피를 퍼넣어주는 백정질을 하고있다. 이것이 미국놈의 정치다. 미국에는 침략과 략탈로 불어난 독점재벌의 재부만이 존재하지 인민의 재부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여기에 어떤 국민적근기와 근면이 있고 어떤 높은 정신적지향이 있고 어떤 미국인민의 재부가 있단말인가! 바로 그것이 있다고 하는것은 완전히 허위이며 기만이며 날조이다. 날씨가 변하면서 강바람이 정자안으로 불어들었다. 눈가루가 스르륵거리며 날아들기도 했다. 정자밖에 둘러서있는 학생들의 머리우에도 눈가루가 뿌려진다. 그러나 그들은 움직이지 않고 그이의 얼굴에 시선을 집중하고 서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또 잠간 눈가루가 날리는 란간마루를 거니시다가 말씀을 꺼내시였다. 《동무들, 한가지 소식을 알려드리겠습니다. 안창호는 방금전 독군서 헌병들에게 체포되였습니다.》 그이께서 말씀하시자 학생들은 모두 놀라 긴장해졌다.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일어났다. 《동무들, 조용합시다.》 학생들속에서 최봉이 소리쳤다. 다시 조용해지자 김성주동지께서는 말씀을 계속하시였다. 《이것은 틀림없이 독군서가 일제의 사촉을 받고 저지른 폭행입니다. 동무들, 보십시오. 일제는 이렇게 악독한 우리의 원쑤입니다. 우리가 안창호가 체포된 사건을 놓고 어떻게 생각해야 합니까? 일제가 나라를 빼앗았다, 일제는 우리의 원쑤다, 이렇게 보통 우리가 가지고있는 감정으로써만 이 사건을 생각해야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오늘의 사건을 통하여 일제가 얼마나 잔악하게 우리 조선사람들의 말 한마디, 손끝 하나 움직이는것에 이르기까지 탄압을 가해오고있는가 하는것을 똑똑히 알아야 합니다. 일제가 무엇때문에 안창호를 체포해갑니까? 이제까지 안창호의 연설을 비판했지만 그래 그가 자기의 연설에서 일제를 겨누고 총 한방 쏘겠다는 소리라도 했단말입니까? 일제는 이런 사람의 손목에까지 수갑을 채워 끌고갔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가만히 내버려두어야 하겠습니까? 안창호의 사상은 물론 나쁩니다. 그러나 그 사상이 나쁘다고 해서 저 악독한 강도 일제에게 잡혀간 조선사람들을 그냥 내버려둬야 하겠습니까? 우리는 단연 놈들의 마수로부터 그와 잡혀간 모든 사람들을 탈환해내야 하겠습니다. 일제의 폭행은 안창호의 개인에 대한 폭행이 아니라 우리 조선사람에 대한 폭행입니다. 우리는 철통같이 단결된 힘으로 놈들에게 철추를 내리고 잡혀간 사람들을 뽑아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존엄있는 우리 민족의 꺾을수 없는 힘을 내외에 시위하여야 하겠습니다.》 《옳습니다.》 여기저기서 환호소리가 터졌다. 모두들 김성주동지의 넓은 아량에 감동되여 어쩔줄을 몰라했다. 송춘보는 모자를 휘저으며 환호를 올렸다. 그의 눈굽에서는 눈물이 번쩍번쩍 빛났다. 역시 안창호의 불행에 대한 아픈 감정은 있었던것이다. 김성주동지의 연설이 끝나자 박수소리가 우뢰처럼 터졌다. 육문중학교 학생들이 달려와 정자에서 내려오시는 그이의 손을 잡고 흔들었다. 법정학교 학생들도 문광중학교 학생들도 우르르 밀려와 그이를 에워쌌다. 바람이 더 세차게 불고 눈보라가 날려왔다. 강남공원일대가 뽀얗게 눈보라에 묻혔다. 학생들은 눈보라속에서 모자를 흔들고 주먹을 흔들고 하면서 와글와글 끓었다. 한 학생이 차집뒤 높은 언덕으로 뛰여올라간다. 그는 쳐갈기는 눈보라속에서 주먹을 불쑥 들었다.
… 거리는 싸움에 부서지고 대오는 무리로 쓰러졌어도 평등은 그의 보습으로 논밭을 깊이 갈았거니
에젠 뽀지에의 시를 눈보라속에서 읊고있다. 둘러선 학생들은 《피의 한주일》의 장엄한 화폭이 떠올라 흥성거렸다.
그것은 큰 도살이였다만 피흘린 고장이면 그 어데이고 긴 싹이 돋아났어라 …
학생들이 목소리를 합쳐서 읊는다. 그들은 누구나 다 빠리콤뮨의 혁명시인 에젠 뽀지에가 된듯한 감동속에 빠져서 얼굴들이 홧홧 달아올랐다. 눈보라가 더욱 사납게 그 불덩이 같은 얼굴들을 휘갈기며 달아난다. 차광수는 가슴을 들먹거리며 눈보라속에 서있었다. 인제야 자기가 올곳으로 온듯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벌써 대학을 집어던지고 이리로 오지 못했던가! 그 폭우가 쏟아져 범람하던 거리, 진눈까비가 내리는 거리로 신문을 안고 돌아다니며… 그래, 내가 거기서 얻은 보상이 무엇인가? 그 저주의 땅, 이가 갈리는 땅, 한때는 투신자살, 음독자살의 비겁한 기도까지 품고 비척거리며 다니던 저주로운 땅… 그러나 그것은 생활의 언덕 저편에 있는 과거지사이다. 식민지청년의 등골을 사정없이 파고들던 그 구질구질한 수난의 비도 이제는 멎어버리였다. 그는 가슴을 펴고 코날을 벌름거리며 자기를 수난에서 건져준 그 고마운 갱생의 강반에 름름히 서있다. 두발로 눈무지를 푹푹 찍으며 강기슭을 거닌다. 자기자신과 끝없이 말을 주고받는다. 창걸아, 정다운 나의 《도투바우》야, 속절없는 내 방랑은 오늘부터 끝장이다. 나는 네가 알선해준 이 길림땅에 보짐을 풀어놓으련다. 누가 가라고 등을 떠밀어도 움쩍하지 않겠다. 다 망한줄 알았던 조선의 명맥이 바로 여기에 뿌리를 박고있었구나. 김성주! 그 청년은 조선의 명맥이다. 김성주의 모습에서 나는 조선의 미래를 본다. 아아, 네가 얼마나 훌륭한 청년을 나한테 소개했는지 네자신도 다는 모를것이다. 너희들의 지도자, 그러나 조만간에 나의 스승, 나의 동지, 나의 지도자로 될 김성주는 내가 본 모든 영걸들중에서 가장 뛰여난 인물이다. 창걸아, 정말 고맙다. 래일은 네가 써준 소개신을 가지고 육문중학교로 찾아가련다. 아, 아, 눈이 또 내리는구나. 소담한 함박눈이… 멀리서 네가 보내는 축복의 꽃보라는 아닌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