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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서《불멸의 력사》 2 장편소설
천 세 봉
( 제 5 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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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가 길림에 도착한 날 저녁 김성주동지께서는 철도기관구로동자들이 맑스-레닌주의연구소조의 첫 모임을 가진다는 기별을 받고 성밖 기준이네 집으로 향하시였다. 그이께서 막 밖으로 나오시는데 최봉이 급한 걸음으로 찾아왔다. 《무슨 일이 있었소?》 그이께서는 최봉이와 함께 거리로 걸어나오시였다. 《길림에 안창호가 도착했다는 소식을 들었소?》 《들었소.》 《난 오늘 직업학교동무들이 정거장에 나가보자고 하기에 나가보았소. 그런데 안창호에 대한 환영이 대단했소.》 《대단했겠지. 민족주의자들이 대통령처럼 받드는 사람인데 영접을 소홀히 하겠소?》 《민족주의자들뿐 아니요. 학생들도 적잖게 나가서 역두연설에 박수갈채를 보내며 야단이였소. 가만히 생각해보니 저 안창호가 학생들에게 좋은 영향을 줄것 같지 못하오. 더구나 인제 곧 대강연회가 열린다는거요. 강연회에서 무슨 말을 하겠는지 모르지만 조선혁명에 해독이 될 소리라도 쥐여치고 또 그것이 인기라도 집중하게 된다면 좋을것 같지 못하오.》 《허허허, 겁내지 마오. 일시 인기를 얻을수도 있겠지. 그러나 학생들이 진리가 아닌 길로 나갈수야 있겠소.》 《그래도 나는 마음이 놓이지 않소. 안창호의 언변이 청산류수라는데 그 언변에 청중이 홀딱 녹아날것만 같단말이요. 성주동무, 우리 영향밑에 있는 학생들만이라도 강연장에 안가게 하는것이 어떨가?》 최봉은 걱정스러운 안색으로 김성주동지를 바라보았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안가게 한다?》하고 그의 말을 되받아뇌이고는 소리를 내여 웃으시였다. 《허허허, 역시 최봉이답군. 할머니들처럼 잔걱정이 많고 다심하지 않으면야 최봉이 아니지. 그런데 이것 보오. 안가게 한다는건 부질없는 일인것 같소. 거의 모든 학생들이 그 강연을 듣고싶어하는데 우리가 그걸 막아나선다면 어떻게 되겠소? 다들 가서 들으라고 합시다. 안창호가 유익한 연설을 하면 유익해서 좋을것이고 구미에 맞지 않는 연설을 하면 그만큼 학생들이 민족주의라는 낡은 사조에 등을 돌려댈것이니 이러나저러나간에 손해는 없을것 아니요.》 《하긴 그래, 그 말이 합당한것 같소.》 최봉은 큰 머리를 끄덕거리였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곧 화제를 새 곬으로 돌리시였다. 《그래, 직업학교연구소조는 어떻게 되였소?》 《어제밤부터 시작했소.》 《지금 몇명이나 뭉쳤소?》 《아홉명이요. 오늘밤 또 한사람 더 나오게 되여있소.》 《그럼 빨리 가보오. 비밀리에 잘 지도해야 하오. 우리는 요란스러운 연설행각으로 인기를 끄는 방법이 아니라 밑으로 스며들어가 진리로 눈을 띄워 힘을 묶는 방법을 끈덕지게 밀고나가야 하오. 그게 확고한 우리의 방법이요.》 최봉이와 갈라지신 김성주동지께서는 독군서앞거리를 바삐 걸어가시였다. 가로수가지에서 삭풍이 아릉아릉 소리를 내였다. 인도에도 얼음이 덮여 발밑에서 와싹와싹 부서졌다. 그러나 그이께서는 조금도 추운 생각이 없이 그저 온몸에 힘이 뿌듯해지고 기분이 가벼우셨다. 그이께서 기준네 마당으로 들어서시니 벌써 기준이가 헛간이 있는곳에 나와 기다리고있었다. 기준은 두손으로 그이의 손을 잡아흔들며 귀속말로 소곤거렸다. 《한사람 안오구는 다 왔습니다.》 《들어갑시다.》 《그런데 한가지 미리 말씀드릴게 있습니다.》 《뭡니까?》 《다름이 아니라…》 기준은 잠시 쭈밋거리다 말을 이었다. 《전날 말씀드린 동무들외에 또 한사람이 참가했습니다.》 《누굽니까?》 《리성남이라구, 기관구에서 탄수부일을 하는 소년인데 사실은 제가 데리고 자취를 하고있습니다.》 《그럼 믿을수 있는 동무겠군요. 참가하게 합시다.》 기준은 마음이 놓이는지 그제야 성큼성큼 토방앞으로 걸어가서 크게 기침을 하며 문을 밀었다. 문이 어찌나 낮은지 등을 구부리고야 들어갔다. 그이께서 방안으로 들어서시자 석유연기가 피여오르는 등잔불앞에 앉아있던 청년들이 우르르 자리를 차고 일어섰다. 《동무들, 그렇게 만나뵙고싶어하던 김성주동무입니다. 오늘밤 우리 기관구로동자들의 첫 맑스-레닌주의연구소조모임을 지도해주려고 나오셨습니다. 다들 인사하시오.》 기준이는 미리 생각해두었던 말을 옮기듯 정중하게 소개를 했다. 청년들이 저마끔 손을 내밀어 김성주동지와 악수를 했다. 얼굴빛이 핼쑥한 리성남이도 앞사람을 비집고 나서며 악수를 했다. 작고 부드러운 손이다. 갈퀴같이 억세고 거치른 기준이의 손과는 너무나도 대조된다. 그러나 이 야들야들한 소년의 손도 종당에는 그처럼 크고 투박한 갈퀴손으로 될것이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어쩐지 가슴이 저려나시였다. 《아, 리성남이로군. 그래 성남이가 탄수부일을 한단말이지?》 김성주동지께서는 갑자기 웃음을 거두고 진중하게 물으시였다. 리성남은 그이께서 자기를 먼저 알아봐주신데 대하여 기쁨을 감추지 못해 피기없는 입술을 벌리며 웃었다. 《몇살이요?》 김성주동지께서는 여전히 성남의 손을 만지며 무거운 어조로 물으셨다. 《열네살입니다.》 《열네살…》 나이가 어리기도 하지만 워낙 자라지를 못했다. 《그래 이 손으로 그 평삽을 다루어낸단말이요?》 《우리가 못하게 합니다만 그래도 죽자꾸나 기를 쓰고 합니다.》 최기준의 말이였다. 《음-》 김성주동지께서는 그제야 성남의 손을 놓으시였다. 방안의 공기가 갑자기 무거워졌다. 그이께서는 짓밟힌 조국의 피어린 상처를 만지고난듯 가슴이 저리시였다. 《혁명을 하자고 모여온 길림로동자들의 대렬속에 리성남동무가 참가했다는것은 매우 기쁜 일입니다. 어른들도 하기 힘든 일을 리성남동무가 한다는것이 얼마나 장합니까? 저 호강을 하며 자라는 부자집 자식들에게 우리 로동계급의 아들인 리성남동무가 투사로 자라나는 모습을 보여주고싶습니다. 동무들, 그렇지 않습니까?》 그이께서 기분을 고치고 이렇게 말씀하시자 무거워졌던 분위기가 인차 후덥게 달아올랐다. 누군가가 성남의 옆구리를 찌르며 뭐라고 소곤거렸다. 성남의 얼굴에는 빨갛게 피기가 피여올랐다. 《자, 모두들 앉읍시다.》 김성주동지께서는 힘주어 말씀하시며 주위를 돌아보시였다. 그러나 청년들은 앉지 않고 주밋거렸다. 《왜 이러고 서있습니까? 자, 이렇게들 앉읍시다.》 그이께서는 두팔을 벌려 량옆에 서있는 청년들의 어깨를 누르며 먼저 자리에 앉으시였다. 그제야 청년들이 모두 우실거리며 앉았다. 석유연기는 계속 꼬리를 끌며 솟아올랐다. 연기가 빠져나가도록 뒤쪽벽에 공기창은 뚫려있었으나 방안이 자욱하고 목구멍이 카해진다. 한 청년이 연기가 너무 뻗쳐오르는것에 주의가 가서 등잔대에 매달려있는 돗바늘로 심지를 눌러놓았다. 그러자 연기는 얼마쯤 가늘어졌으나 그대신 불이 어두워졌다. 이러는데 아직 오지 않았다던 청년이 문을 열고 잔말없이 쑥 들어섰다. 《우리 집으로 오는걸 누가 보지 않았소?》 기준이 청년에게 물었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소. 그런데 석필인 왔소? 음, 저기 왔군. 왜 혼자 내뺐어? 난 그 곰보네 가사쌈을 말리다가 늦었소. 빌어먹을것이 술을 처먹구는…》 청년은 김성주동지께서 앉아계시는것은 보지 못하고 두덜거리며 방안으로 올라섰다. 기준이가 김성주동지께 단야공 차득보라고 소개를 해서야 그는 황급히 몸가짐을 고치였다. 《이거 실수했습니다.》 《실수가 무슨 실수입니까? 어서 앉으시오.》 김성주동지께서는 악수를 하시고나서 차득보를 곁에 끌어당겨 앉히시였다. 몸가짐이 큰 차득보가 비비고 들어앉는바람에 잠간동안 모두 자리를 드티느라고 설레였다. 차득보는 얼굴이 넙죽하고 코마루도 둥실하게 잘생겼다. 《김성주동무, 모두 열한명입니다. 여기 적은것을 보십시오.》 기준이는 그이의 앞에 이름적은 종이를 내밀어놓았다. 큰 공책장에 연필로 넙적넙적하게 쓴 글씨인데 이름밑에 직종도 적고 나이도 밝혔다. 단야공이 두명, 기관조사가 한명(기관조사는 기준이였다.) 탄수부가 네명, 선반공이 한명, 기관차수리공이 세명이였다. 기준은 이 열한명은 거의다 어려서부터 로동판으로 돌아다닌 사람들이라고 덧붙여 설명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한참동안 청년들의 지나온 경력들에 대해서 물으시였다. 리성남이에게는 좀 더 자세히 물으시였다. 《그래, 성남동무의 아버지는 어데서 돌아가셨소?》 《탄광굴속이야요.》 성남이는 고개를 숙인채 꺼져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하였다. 《우리 아버지와 함께 탄광굴속에서 돌아갔지요. 탄굴이 주저앉았는데 뭐 시체를 찾아내기나 했나요.》 리성남의 말끝에 차득보가 넙죽한 얼굴을 들고 앉아서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는 그까짓 지나간 일이 무슨 눈물과 간장을 쥐여짤 일이냐 하는듯한 태도이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청년들의 형편을 다 물으시고나서 그들이 글을 어느 정도로 알고있는가 알아보시였다. 글아는 청년이라고는 기준이, 차득보 그밖에 탄수부 한명이 있을뿐이였다. 《대부분이 문맹자란말이지요. 하긴 그럴수밖에 없지요.…》 그이께서는 가슴이 저리시였다. 《자, 동무들, 우선 이렇게 합시다. 기준동무를 비롯해서 글아는 동무들이 모르는 동무들을 이끌어줍시다. 우리 나라 글은 배우기 쉬운 글이기때문에 인차 깨칠수 있습니다. 한번 로동계급답게 공부해봅시다.》 《그런데 너희들 생각은 어떠냐, 배워낼만 하냐?》 차득보가 좌우를 둘러보며 물었다. 《차동무, 이젠 그런 말버릇은 고칩시다. 혁명동지간에는 동무라고 불러야 합니다.》 김성주동지께서 웃으며 주의를 주시자 차득보는 얼굴을 붉히며 벌씬 웃었다. 《입에 올라 그럽니다. 그럼 동무들, 배워낼것 같소?》 역시 단순하고 솔직한 차득보였다. 《배워만 주시오. 그까짓거 등짐지는것만치 힘을 쓰면 되겠지.》 《전 약간은 읽을줄 압니다.》 청년들은 그제야 눈들이 부리부리해지며 대꾸했다. 《읽을줄 알면 그만치 빠를수 있습니다.》 김성주동지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며 이야기를 계속하시였다. 《글을 빨리 배워야 하겠습니다. 글은 특별한 사람들이 배우는것이 아닙니다. 누구나 다 배울수 있고 배워야 합니다. 더구나 동무들은 조선혁명을 떠메고 나가기 위해서 맑스ㅡ레닌주의를 학습해야 할 사람들입니다. 글을 알아야 맑스ㅡ레닌주의를 리해할수 있습니다. 거듭 말하지만 인제부터 우리가 글자를 익히고 책을 읽는것은 우리 로동계급이 일제와 지주, 자본가들을 반대해서 싸우기 위한 전투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왜 배우지 못했고 눈뜬 장님이 되였습니까? 우리 로동자들은 누구만 못지 않은 지혜와 슬기를 가지고있는 총명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로동자들이 아니면 세상사람들은 하루도 살아갈수 없습니다. 로동자들은 먹을것 입을것을 만들어내고 온갖 현대문명을 다 창조해냅니다. 이렇게 우리 로동계급은 무궁무진한 힘과 재능을 가지고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학교에 가기 앞서 어려서부터 뼈가 휘도록 일을 하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바로 이것은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우리 조선사람들을 영원히 저들의 노예로 만들기 위해 사람들을 몽매하게 만들자는 정책의 결과입니다. 글을 배우면 각성하고 각성하면 단결해서 반항하며 혁명을 일으킬것이기때문에 놈들은 한사코 조선사람들이 언제까지나 눈뜬 장님으로 되여있을것을 바라는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제 나라 글을 배우고 각성하기 위한 투쟁이 어찌 혁명투쟁이 아니겠습니까.》 김성주동지께서는 말씀을 잠간 중단하시고 청년들을 둘러보시였다. 차득보는 여느때보다 곱이나 커진 눈으로 이편을 주시하고있다. 모두 진지한 표정들이였다. 《우리는 글을 배워서 맑스-레닌주의라는 큰 칼을 손에 잡고 이 썩어빠진 자본주의사회를 갈피갈피 해부해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원쑤를 쳐서 꺼꾸러뜨려야 합니다. 그다음 우리는 제국주의가 멸망한 그 터전우에 압박과 착취가 없는 행복하고 자유로운 사회주의제도를 훌륭하게 일떠세워야 합니다. 그렇기때문에 우리 로동계급이 맑스-레닌주의라는 이 무기를 제 손에 틀어쥐는가 못쥐는가에 따라서 자본의 억압에서 해방되는가 못되는가 하는것이 결정됩니다. 우리 조선로동계급은 태여난지 오래지 않습니다. 그러나 조선로동계급은 력사상 보기드문 인간이하의 압박과 착취를 당하고있습니다. 손쉽게 례를 들어봅시다. 동무들은 기관구에서 하루 열두시간이상 석탄짐을 지고 화구에 불을 땝니다. 그러나 동무들의 가족은 헐벗고 굶주리고있으며 동무들자신은 병들면 내쫓기는 형편에 있습니다. 그뿐만아니라 동무들은 참을수 없는 민족적모욕까지 당하고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언제까지 이런 처지에 있어야 하겠는가. 이대로 짓밟히고 눌린채 한당대 살아야 하겠는가. 그래 어떻게들 생각합니까? 차득보동무는 이 억울한 사정을 어떻게 하는것이 좋을것 같습니까?》 《예, 두말할것 없이 왜놈들을 모조리 두드려 내쫓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동무는?》 그이께서는 맞은편구석에 앉아있는 청년에게 물으시였다.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 로동자 한명이 왜놈 한두름씩만 제끼면 다 될것 같습니다.》 《한두름씩? 하하, 괜찮습니다.》 방안에서는 웃음이 터졌다. 《그 결의는 좋습니다. 그러나 산 하나를 오르려고 하여도 어느 쪽으로 어떻게 숲을 헤치고 어느 길로 가야 한다는것이 있어야 하는데 하물며 강대한 일제를 쳐서 물리쳐야 할 우리들이 덮어놓고 해보자는 식으로 해서야 되겠습니까? 어떤 방법으로 어떻게 나가며 일본놈을 어떻게 쳐야 된다는것이 있어야 할텐데 누구 한번 말해보십시오.》 그 말씀에는 아무도 대답을 못했다. 《잘 모르겠습니까? 허허허, 그것 보십시오. 동무들이 각오는 단단한데 어떻게 싸워야 이긴다는 방법은 모르고있단말입니다. 우리는 그 방법을 배워야 합니다. 방법이란 다른것이 아니고 동무들이 맑스ㅡ레닌주의를 알고 맑스ㅡ레닌주의기발밑에 모든 로동자를 굳게 단결시키는것입니다. 로동계급이 철석같이 단결한다면 그 어떤 경찰도, 군대도, 감옥과 교수대도 두려울것이 없습니다. 단결이 무서운 힘이라는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은 이 방안에 들어앉아있는 우리 십여명이 단결하고 래일은 백명이, 또 그 다음에는 천명이 그리고 만명이 이렇게 단결한다면 우리는 능히 빼앗긴 조국을 찾을수 있고 우리의 주권을 세울수 있습니다.》 그이의 말씀은 심각했다. 잠을 깨야 한다. 손을 잡고 일어서야 한다. 어깨를 겯고 앞으로 나가야 한다. 마디마디 절절하고 뜨거웠다. 등잔불빛이 어룽거리는 눈들에는 이슬이 어리였다. 리성남은 옷소매를 들어서 눈으로 가져갔다. 그 누구도 이런 이야기는 들어본적이 없었다. 그럴뿐만아니라 자기자신들조차도 자기들의 신세에 대해서 이렇게 깊이 생각을 해본적이 없었다. 차디찬 세상을 정처없이 굴러다니면서도 무엇때문에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생각도 못했다. 의례히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것이려니 생각했을뿐이였다. 그들은 지금 저마끔 별생각이 다 났다. 로동자들이 우글우글하는 공사판에서 십장놈의 발길에 명치를 채워 울던 생각, 무거운 레루를 메고 비칠비칠 걸어가다가 넘어져서 발목이 깔려 비명을 지르던 생각, 찬비 뿌리는 들판에서 오돌오돌 떨며 집을 그리워하던 생각, 아버지가 운명하던것을 본 생각, 어린 동생을 땅에 묻던 생각, 이 모든 생각이 한꺼번에 떠올라 목을 메게 했다. 《울지들 마십시오. 울어서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누구나 다 혁명에서 선봉을 설 튼튼한 각오를 가지고 힘을 내야 합니다.》 그러나 청년들은 눈물을 그치지 않았다. 모든 청년들이 다 눈물을 보였다. 차득보는 허리에 찼던 수건을 뽑아 눈시울을 닦았다. 모임은 밤이 깊어서 끝났다. 김성주동지께서는 기준을 밖으로 데리고 나오시여 조용히 말씀하시였다. 《기준동무, 기관구에 수리직장 같은것이 있습니까?》 《네, 있습니다. 있어도 큰것이 있습니다.》 《그럼 저 성남동무를 그런 직장에 견습공같은것으로 넣을수 없을가요?》 기준은 잠간 말을 못하고 서있었다. 《저렇게 어린 동무가 탄통에 눌려서 시들어가도록 내버려두어서야 되겠습니까? 저런 동무를 우리들이 돌보아주지 않으면 누가 돌보아주겠습니까? 성남동무가 공부하는 문제는 내가 책임을 지겠습니다.》 《래일 기관구에 나가서 알아보겠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쉬운데다 일자리를 옮겨주도록 힘쓰겠습니다.》 기준은 성남이를 친동생처럼 돌본다고 생각해오던 자신이 스스로 부끄러웠다. 그는 김성주동지께서 자기네 로동자들의 처지에 대해 이처럼 깊고 따뜻한 사랑을 부어주신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꼭 그렇게 해주십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기준이와 헤여지신 김성주동지께서는 어두운 골목길로 걸어나오시였다. 아무래도 마음이 개운치 못하시였다. 말랑말랑한 손의 감촉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그 눈물이 나는 손… 손에 대한 생각을 하고보니 얼마전에 본 권성근의 뻗장대같은 다리도 생각나시였다. 로동재해로 성성한 다리가 부러졌는데도 치료비는 고사하고 해고까지 당했다는 그 기막힌 사연… 그날 저녁엔 그 잊을수 없는 가긍한 모습때문에 얼마나 울분에 차서 모대기였던가! 권태일의 집에서 그 이야기를 듣고 밤늦어 하숙으로 돌아오니 신동호가 책상앞에 앉아서 시를 쓰고있었다. 그 《자화상》이였다. 사람들이 피를 뿌리며 우는 현실속에 들어앉아 무엇때문에 애수에 잠긴 제 얼굴을 그리고있는지 아실수 없었다. 이 모순에 찬 핍박한 사회에 대하여 항거를 불러일으키는 시는 쓸수 없단말인가! 답답하고 괴로와 도로 밖으로 나오시였다. 송화강가에 나가면 시원할가싶어 강가에 나갔는데 역시 답답하고 울분은 풀리시질 않았다. 강물은 왜 출렁이며 흐르지 못하고 그렇게 답답하게 얼어붙었을가! 그 두텁게 얼어붙은 얼음을 보시니 바로 자본사회가 그렇게 인간을 두겹세겹 두터운 그 무엇으로 짓누르고 고혈을 짜는것 같은 생각도 드시였다. 시퍼런 얼음과 자본의 철쇄가 한덩어리로 되여 보이기도 했다. 얼음우에 권성근의 뻗장대같은 다리가 또 나타났다. 정맥이 푸르게 살아올랐던 갈퀴같던 주먹도 되살아올랐다. 주먹아, 너는 왜 그 무쇠힘으로 벼락을 치듯 너를 짓누른 그 두터운 얼음을 요정내지 못하느냐! 네가 그 얼음을 요정낼 때 자본사회는 꺼꾸러지고 해방과 자유의 흐름이 새세상에 굽이치며 다시는 그런 고역이 너에게 없으리라는것을 약속해줄것이 아니냐! 강기슭을 걷고 걸으셔도 답답한 가슴은 풀리시지 않았다. 울분은 풀리시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밤에는 그 연연한 손이 이렇게 가슴에 울분을 채워줄줄은 몰랐다. 그 말랑말랑한 손의 감촉때문에 그렇게 모대기지 않고는 견딜수 없을것 같았다. 분하다. 어떻게 이 모순을 두드려부시지 않고 그냥둘수 있단말인가! 이 절박한 비극을 그냥 내버려두고 살수 있단말인가! 때려부셔야 한다. 이 모순에 찬 사회를 하루바삐 때려부셔야 한다. 그이께서는 흥분과 함께 두 어깨가 처지는 책임감을 느끼시며 별빛이 쏟아져내리는 거리로 걸어나오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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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난히도 굼뜨고 지긋지긋한 려행이였다. 렬차는 예정보다 퍽 늦은 한낮때에야 길림역에 도착하였다. 어디서 무슨 사달이 났는지 이름도 모를 간이역에서 일곱시간이나 지체하였다. 충돌사고가 난것 같다는 풍설도 돌았지만 그 사실여부는 알도리가 없었다. 한쪽에서는 탈선사고라는 말도 돌았다. 갈길이 총총한 승객들에게는 이런 사고나 저런 사고나 연착이라는 점에서는 매일반이였다. 차광수는 연착바람에 아침을 굶었다. 도중역에 내려 전병 같은것이라도 사서 입가심을 하고싶은 욕망이 간절했지만 매번 뭇승객들에게 떠밀려 허탕만 치고 돌아섰다. 나중엔 기가 진하여 아주 단념하고말았다. 한끼쯤 굶은들 대수냐 하는 오랜 타향살이의 습성이, 되는대로 사는데 버릇되여온 가난한 독신생활의 타성이 불쑥 고개를 쳐든것이였다. 하기는 그 눈물겨운 떠돌이생활의 서글픈 추억이 그에게는 아직도 그 무슨 향수처럼 간직되여있는지도 몰랐다. 춥고 배고플 때마다, 슬프고 괴로울 때마다 그리고 감당하기 어려운 생활의 핍박이 자기를 궁지에 몰아넣을 때마다 그는 이 추억의 주머니를 뒤지여 거기서 자기가 이미 겪은 고달픈 인생체험의 파편들을 아낌없이 꺼내가지고 생활이 요구하는 엄청난 《값》을 치르군하였다. 이렇게 주림도 참아내고 시련도 이겨내군하였다. 신문팔이와 우유배달로 고학을 하던 차광수의 동경시절은 온통 구질구질한 체험으로 가득차있다. 살기차고 각박한 동경생활은 어린 시절 그가 룡천땅에서 메싹을 캐먹으며 그려보던 그런 유토피아가 아니였다. 로략질로 비만해진 사무라이들의 도시는 단벌옷을 입고 끼니를 자주 건네며 성에가 하얗게 내불리는 골방에서 머리를 싸매고 공부하는 위병쟁이 식민지 고학생의 뒤를 치근치근 따라다니며 그를 못살게 굴었다. 월사금을 늦게 낸다고 눈을 부라렸고 교통질서를 지키지 않는다고 따귀를 쳤으며 조선말을 한다고 격검채로 두드렸다. 《공산당선언》을 읽는다고 경찰서로 끌고가기도 했다. 그는 무산자로서, 조선사람으로서 2중의 인간적학대를 당했다. 하지만 자기의 존엄우에 무시로 떨어지는 그 모멸에 입술을 깨물고 몸서리를 치면서도 차광수는 비운에 빠진 민족의 장래를 두고 부단히 생각하였다. 칠성판에 오른 겨레를 죽음에서 건져줄 해방의 구성을 그리며 그런 구성의 빛발을 받아안을수 있는 옳바른 운동선을 찾아 안타까운 탐색의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동경에도, 서울에도, 상해에도 그런 운동선은 없었다. 독립을 부르짖는 사람도 많고 혁명을 부르짖는 사람도 많았지만 만인이 공감할만한 기치나 방략을 가지고있는 영걸은 없었다. 그러던중 그는 류하에서 이전부터 알고있는, 같은 평안도태생의 최창걸을 만나 김성주동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 생신한 이야기는 차광수로 하여금 며칠동안 잠을 못이루게 하였다. 진리의 태양, 구원의 태양을 찾아 한정없이 방황하던 동토대와도 같은 그의 넋에는 마침내 새로운 생명의 즙, 소생의 즙이 고이기 시작했다. 김성주동지와 같은 나이를 차광수는 벌써 여러해전에 거쳐왔다. 시골 야학방에서 돌아가는 모지라진 신소설책에서 《치악산》과 《귀의성》을 읽으며 간담을 조이는 그 아슬아슬한 장면들에 취하여 몽롱한 정신으로 열여섯살을 보냈다. 그러나 그 열여섯살에 김성주소년은 민중의 각광을 받는 지도자가 된것이다. (열어섯살! 과연 창걸이의 말이 진실일가?) 선뜻 믿을수도 없고 또 쉽사리 믿어지지도 않는, 하지만 믿지 않을래야 믿지 않을수 없는 이 나이를 두고 오래동안 반신반의하던 차광수는 노을이 류달리도 진하게 타오르던 어느 저녁에 드디여 최창걸이앞에서 《나도 길림으로 가겠소! 어서 소개신을 써주오.》하고 말했다. 그리고는 급히 려장을 꾸리였다.… 피곤에 몰려 한결 더 거칠어지고 영악스러워진 기차손님들의 한떼가 그의 옆구리를 떠박지르며 개찰구로 빠져나간다. 서켠으로 얼마쯤 기울어진 설핏한 해가 구름뒤에서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정거장앞뜰을 랭담하게 굽어보고있었다. 차광수는 그 뜰의 한쪽 변두리에서 생눈을 한줌 집어들고 주머니에 안경을 집어넣은다음 그 눈으로 얼굴을 한참 문질렀다. 석탄가루먼지가 올라 찐덕찐덕한데다가 세수까지 하지 않아 사뭇 텁지근하던 얼굴이 대번에 피가 뛰고 윤기가 돌았다. 볼에 붙어있는 눈가루에서 물이 녹아내리고 김이 서려올랐다. 눈의 선뜩선뜩한 랭기가 정신을 번쩍 들게 하였다. 그는 안경을 걸고 턱에 맺힌 물방울을 털어버리면서 역전광장앞에 펼쳐진 길림시가의 일경을 주의깊게 바라보았다. 삼동의 위엄과 신비를 아직도 고스란히 간직하고있는 도시의 거무충충한 벽체와 지붕들이 눈에 안겨왔다. 일본과 중국관내를 돌아다니면서 아시아 굴지의 대도시들을 수태 보아온 그로서는 별로 놀랄만한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 고색창연한 도시의 한복판을 흐르고있는 사람들의 활기찬 움직임과 생활의 소음은 그의 마음을 힘있게 끌어당기였다. 길림이다! 여기가 바로 길림이다! 내가 그렇게도 오고싶어했던 길림! 권심이가 있고 채경이가 있고 최창걸의 학우들이 있는 길림, 《ㅌ.ㄷ》의 아들들이 활동하고있는 길림! 여기에 바로 김성주가 있다. 나의 희망이며, 리상이며, 등대이며 생활의 전부인 민중의 지도자 김성주가 있다. 차광수는 벅찬 감정에 휩싸여 숨을 크게 몰아쉬였다. 그리고는 대합실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허기를 달래려는 생리적본능이 그의 마음을 손에 들고 가는 보퉁이에로 자꾸 떠밀었다. 그 보퉁이에는 최창걸이 류하에서 사준 한관짜리 수수엿이 들어있었다. 그 엿의 한쪽 귀퉁이만 떼먹어도 조반 한끼쯤은 능히 굼땔수 있다. 그러나 그는 입을 꽉 다물고 그 유혹을 밀어버리였다. 위탈로 고생하는 권심을 생각하여 고스란히 남겨두려는것이였다. 차광수도 심한 위병쟁이지만 권심은 그보다도 훨씬 더 《관록》있는 위병환자이다. 차광수처럼 권심의 위장병을 진심으로 걱정해주는 사람은 아마 없을것이다. 사실상 서울에서 그들이 서로 인연을 맺고 나중에는 《형님》, 《동생》하는 절친한 사이가 된것도 이 위장병 덕이였다. 처음에는 창출과 율무를 많이 팔아주는 계동《고려약국》에서, 다음에는 명의로 소문난 《양양의원》집 처치실에서 두사람은 낯을 익히였다. 그 알량한 고질병을 저주하면서 치료경험을 나누고 통성을 하고 여러차례의 래왕끝에 각자의 리념을 터쳐놓기까지에는 그닥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권심은 나이로 봐서도 우이였고 맑스ㅡ레닌주의를 섭취한 력사를 놓고보아도 차광수보다는 선배였다. 그런 권심이가 지금 길림에 와있는것이다. 차광수의 립장에서 보면 큰 언덕, 큰 의탁점이라고도 할수 있을것이다. 동경과 상해와 남경에 처음 갔을 때 느끼던 그 서름서름한 고독과 짓눌리는듯한 위축감은 다시 일지 않았다. 그대신 불길처럼 강렬한 그 무엇이 가슴속에서 이글거리였다. 대합실안에 들어서자 눈앞이 갑자기 뿌얘졌다. 찬 공기에 휩싸여 한껏 얼어들었던 안경알이 순식간에 김으로 뒤덮여진것이다. 차광수는 그 김이 걷히여 시야가 트일 때까지 통로 한쪽옆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하루에도 수십차례씩 겨울이 오면 어쩔수없이 당하게 되는 안경쟁이들의 서글픈 고통이다. 여름철이면 또 여름철대로 땀때문에 애를 먹는다. 이런 약점때문에 때로는 안경을 벗어 팽개치고싶어지는 마음이 불쑥불쑥 치밀어오르는 순간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고학생활 몇해어간에 더 약해진 시력을 다문 얼마라도 높여보려는 본능적인 의식이 매번 그 충동을 눌러버리였다. 그는 자기의 눈과 시계를 차단해버린 뽀얗고 동그란 연막의 한모퉁이가 서서히 들리여 유리알이 말개지는 모양을 짜증스럽게 내다보면서 신경질적으로 안경다리를 추슬러올리였다. 나그네의 허기를 달랠수 있는 광주리장사들은 대합실 요소요소에 얼마든지 있었다. 차광수는 최창걸이 마련해준 몇푼되지 않는 로자가운데서 길림관채 한잎을 꺼내여 호떡을 다섯개 샀다. 그걸 게눈감추듯 먹어버리고나서 한참 망설이다가 세개를 또 샀다. 길림에서의 첫 끼니를 허술히 굼때고싶지 않는, 자신의 궁핍에 대한 이상야릇한 도전의 감정이 부지불식간에 그를 허기와 타협해버리게 하였다. 에라 모르겠다, 돈 몇잎에 목을 매겠는가, 돈도 사람이 만들어낸 물건딱지인데 그 돈앞에서 궁색스럽게 내 식욕을 눌러버리겠는가, 혁명을 하느라면 배를 곯을 때가 많을것이다. 그러니 차차로는 굶더라도 오늘 이 순간만은 배불리 먹어보자. 배불리 먹고 나의 오랜 방황생활에 종지부를 찍어줄지도 모르는 길림바닥을 가슴펴고 활보해보자. 차광수는 대합실을 나서자 권심의 하숙집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모르는 길을 물어가느라니 적지 않은 시간이 허비되였다. 그러나 그는 별로 서두르지도, 초조해하지도 않고 배포유하게 걸음을 옮기였다. 그 옛날 갈길을 몰라 속절없이 헤매던 동경과 상해에서의 그 막막한 걸음도 아니다. 이 나라에 인물이 없다고 통탄하며 파쟁으로 멍든 서울의 이슬비속을 정처없이 떠돌아다니던 그날의 그 암담하고 가련한 걸음도 아니다. 오늘의 걸음은 등대를 향해 내닫는 걸음이다. 덧없는 방황의 길에서 힘도 많이 소모되고 정열도 많이 소모되였지만 나의 체내에는 혁명을 위해 연소시킬 기력이 충분히 남아있다. 왜 이리도 꾸물거리느냐? 어서빨리 걸음을 다그치자. 차광수는 발을 재게 옮겼다. 그러다가 눈에 미끄러져 한팔을 허공에 쳐들고 쓰러질듯이 비칠거리였다. 누구인가 날쌔게 그 팔을 거머잡았다. 길림이 보내는 호의의 첫 손길이다. 차광수는 몸을 가누고 뒤를 돌아보았다. 열일곱이나 열여덟살쯤 되였을가 싯누런 모표가 달린 모자를 쓰고 허연 솜실장갑을 낀 중학생이 빙긋이 웃으며 그를 마주보고있었다. 《어, 혼날번했구만, 고맙소.》 차광수도 그 학생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초면이라는것도 잊고 무랍없이 물었다. 《길이 왜 이렇게 미끄럽소? 짜장 얼음판같으니…》 《장난꾸러기들의 놀음터이니까요. 여기서 썰매도 타고 팽이도 돌리지요. 어떤 심술망나니들은 우정 물까지 부어놓는답니다. 중학생아가씨들이 엉덩방아를 찧으며 깔깔거리는 모양을 좀 보자는거지요. 어제아침에도 녀자사범에 다니는 아가씨들이 이 어름에서 무리로 넘어졌다는구만요.》 《사내녀석들이란 어디 가나 마찬가지거든.》 차광수는 껄껄 소리를 내여 웃고나서 또 물었다. 《학생은 어느 학교에 다니오?》 《육문중학교에 다닙니다.》 보폭이 작은 중학생은 그와 걸음을 맞추느라고 다리를 재게 놀렸다. 그제야 차광수는 유심히 그 학생의 모표를 살펴보았다. 정말 《육문》이라는 글자가 두드러지게 부각되여있었다. 그는 느닷없이 가슴이 활랑거리는것을 느끼면서 다시금 말을 걸었다. 《그러면 김성주라는 학생을 알겠구만?》 《네. 우리 웃학년이지요. 한달전에 편입한것 같습니다. 열여섯살이라는데 어찌나 숙성한지 스무살은 넘어보입니다.》 《더러 대면해봤소?》 《아직은…》 학생은 말을 채 마무리지 않고 덤덤히 걸음을 옮기다가 홱 돌아서서 뒤를 돌아보며 《어 친구들! 빨리!…》하고 손을 저었다. 그러자 뒤에서 대여섯명의 학생들이 우르르 달려와 그를 둘러쌌다. 같은또래들인데 모표는 그와 달랐다. 얄팍한 황동판에 《문광》이라고 새긴 모표들이였다. 모두가 조선인학생들이다. 저기 거리앞쪽에서도 학생들이 떼를 지어 어디론가 밀려간다. 남학생도 있고 녀학생도 있고 걸어가는 학생도 있고 뛰여가는 학생도 있다. 모표도 각각이고 차림새도 각각인데 다같이 한방향으로 간다. 길림에 조선청년들이 많다더니 과연 허튼 말은 아닌것 같다. 《여, 정말 리선엽목사네 례배당이 옳긴 옳대?》 눈이 부리부리한 문광중학교 학생이 육문중학교 학생에게 뛰여오자바람으로 다급히 묻는 말이다. 《옳지 않구. 누가 아니라고 그러든가?》 《청년회관에서 한다는 소리가 있길래…》 《그런 소리도 돌았지. 그런데 리선엽목사가 선생을 꽉 붙잡고 놓지 않는다나.》 《그럴만도 하지. 선생을 위해 우리가 꽃다발을 미리 장만하지 못한것이 한스럽구만.》 문광중학교 학생은 걱정에 싸여 들뜬 어조로 뇌이였다. 마치 무슨 시구라도 외우고있는듯이 숙연한 표정이였다. 차광수는 호기심이 당겨 그 학생에게 물었다. 《길림에 누가 왔소?》 학생은 이상하다는듯한 눈찌로 빤히 그를 쳐다보았다. 《아니, 그 소식을 아직도 모르십니까? 안창호선생이 오신걸…》 《안창호선생이?!》 《네, 온 길림바닥이 그때문에 며칠째 끓고있는데 그걸 모르시다니요.》 《나야 어찌 알겠소. 방금 길림땅을 밟는 사람이…》 《그러니까 타고장에서 오시는 모양이구만요. 정 바쁘시지 않으면 조양문밖에 있는 리선엽목사네 례배당으로 같이 갑시다요. 거기서 안창호선생이 시국대강연을 하신답니다.》 학생은 이런 말까지 하고나서 앞으로 바삐 뛰여갔다. 동료들이 어느새 그를 뒤에 떨구고 거리모퉁이를 돌아서고있었던것이다. 그들은 목청을 합쳐 노래를 부르고있었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 간다 한들 영 갈소냐 나의 사랑 한반도야
안창호가 마포에서 밀선을 타고 중국으로 망명하면서 지은 《거국가》였다. 과연 문광중학교 학생의 말이 옳은것 같기도 했다. 안창호의 래방으로 길림은 법석 끓고있는것 같았다. 어제낮이나 밤차로 이 도시에 도착했더라도 차광수는 지금쯤 학생들을 따라 리선엽이네 례배당으로 갈것이였다. 그도 안창호의 명성에 습관된 조선민족의 한 성원이였다. 공산주의와는 아득히 거리가 먼 그의 사상이나 리념에서는 비록 취할것이 없다 하더라도 일찌기 이등박문과 대적했다는 그의 류창하고 도도한 웅변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흥미를 가지고있었던지라 들어보고싶은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꾹 참고 한대중으로 권심이의 하숙집을 향해 걸어갔다. 뭐니뭐니해도 지금은 그를 만나는것이 첫째가는 급선무라고 생각되였다. 권심이부터 만나자. 권심을 만난 다음 세수도 하고 강연도 듣고 거리구경도 하자. 하지만 권심은 하숙에 없었다. 주인아주머니의 말을 들어보면 먼데로 나간것 같지 않은데 아무리 기다려도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차광수는 방 한쪽 구석에 짐보퉁이를 내려놓고 실내의 절반이상 면적을 차지하는 책무지들과 원고뭉테기들을 경이의 눈으로 둘러보았다. 책은 서울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불어난것 같았다. 《변증법적유물론》, 《임금로동과 자본》, 《빠리꼼뮨》, 《잉여가치학설사》, 《반듀링론》과 같은 사회정치서적들과 《어머니》니, 《서유기》니, 《철의 흐름》이니 하는 소설책들은 모두 길림에 와서 새로 사들인것 같았다. 책무지옆에 되는대로 놓여있는 아령도 전에는 볼수 없었던 물건이다. 서울에서 이미 낯을 익힌바있는 장방형의 양철통속에는 지난날의 율무, 창출이나 감초대신 신약이라고 일컫는 위산, 포리비오스와 건위정봉지가 들어있다. (그렇게도 완고하게 한약을 숭상하던 권심이 어떻게 되여 신약을 받아들이게 되였을가? 길림이라는 새로운 토양우에서 이루어진 정신적앙양이 권심의 낡은 생활습성마저 뒤흔들어놓은것은 아닐가?) 어떻든 이 방안에서 보게 되는 새것에 대한 지향이 차광수를 기쁘게 하였다. 그는 이전보다 백배로 건강해진 권심, 삶에 대한 의욕과 활동력으로 충만된 권심의 모습을 자신있게 상상할수 있었다. (참 반가운 일이군, 길림에 오면 이전날과 다름없는 초라하고 고루한 권심의 하숙방을 보리라고 생각했는데… 권형의 생활은 일보 전진한것 같거든. 허허, 저 아령을 좀 보지. 과연 신천지는 신천지야.) 차광수는 아령을 끌어당겨 우로 옆으로 흔들며 몇차례 팔운동을 해보았다. 동경고학시절 이후로는 처음 집어보는 아령이다. 생활에 다쫓기고 번민에 떠밀리는 고달픈 방랑의 나날 자신도 모르게 결별해버린 아령, 그런 아령을 권심은 생활갱신의 무기로 틀어쥐고 일어선것이다. 아, 아, 길림! 희망의 신천지여! 그대는 이 불우한 《덜렁광창》한테 장차 무엇을 가져다주려느냐. 권심이한테 선물한 그 청신한 갱생의 씨앗을 내 마음속에도 심어주지 않으려나. 빈다. 동양삼국을 발이 닳게 돌아다니며 절망에 한숨짓던 이 나그네에게 마음의 안식처를 달라. 멍들고 어혈진 내 넋의 채원에 진리의 봄싹을 이랑이랑 가꿔줄 빛을 주고, 물을 주고, 공기를 달라. 나는 이 이상 더 방황하는 나그네가 되지 않으련다. 차광수는 책더미우에서 신간소설 한권을 집어들고 무료히 뒤적거리다가 밖으로 나갔다. 권심이 돌아올 때까지 무슨 허드레일이라도 하면서 심심치 않게 시간을 보내고싶었다. 무슨 일을 하면 좋을가? 토방우에서 무작정 도끼부터 집어들었다. 뜨락 한옆에 쌓여진 통나무더미를 본것이다. 그는 기력이 남아돌아가는 사람처럼 힝힝 소리를 내며 나무를 패기 시작했다. 날이 선들선들한 도끼는 매번 단매에 언나무토막들을 두쪽으로 갈라놓군하였다. 나이지긋한 하숙집의 중년부인이 뒤축이 물러앉은 짚신을 맨발에 꿰지르고 달려나와 차광수를 만류하였다. 《몸도 피곤하시겠는데 그만두시라요.》 《아주머니, 괜찮습니다. 이 힘을 뒀다가 어디 쓰겠습니까.》 차광수는 근육이 잔뜩 불거진 팔뚝을 눈짓하며 웃어보이였다. 녀인은 그의 손에서 무작정 도끼를 앗아들었다. 《그만두시고 들어가서 좀 쉬시라구요. 한잠 푹 자고나면 피곤도 풀리고 그사이에 권심선생도 돌아오시겠는데…》 《어디 먼데로 나간답디까?》 《글쎄요. 아무 소리도 없이 나갔어요. 혹시 <신문서사>로 가시지 않았는지…》 《<신문서사>란 뭔가요?》 《책방이지요. 이틀에 한번씩은 꼭꼭 그 책방에 가신답니다. 어이구, 무슨 선생인지 살이 요렇게 쪽 빠져가면서도 그냥 책만 붙들고있다니까요.》 녀인은 손을 집게처럼 벌려 량쪽볼을 꼭 누르면서 살이 빠진 호물때기를 형용해보이였다. 그리고는 나오던 때처럼 수선스럽게 집안으로 들어가버리였다. 차광수는 마음을 진정하지 못하고 뜨락에 그냥 서있었다. 권심을 만나기전에는 집안에 가만히 붙박혀있어낼것 같지 못했다. (《신문서사》라… 그리로나 가볼가.) 그런데 어째서인지 권심이 거기에 있을것 같은 확신은 생기지 않았다. 오히려 《신문서사》보다 조양문밖에 있다는 리선엽목사네 례배당으로 갔을것 같은 예감이 더 들었다. 온 길림시가 안창호때문에 끓는다는데 권형이라고 무심할수가 없는것이다. 공산주의와 민족주의라는 리념상의 차이때문에 안창호의 존재자체를 무시할 그런 권심은 아니다. 차광수는 이런 생각에 잠겨 자기도 모르게 조양문밖으로 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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